소설리스트

Chapter. 4 (10/21)

Chapter. 4

크리스마스 행사는 교도소에 꽤나 중요한 행사였는지 교도소에서 대머리들과 나에게 일을 빼 연습을 하라고 했다. 급여는 따로 쳐 준다고 그래서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킹이 없는 공간에서 대머리들에게 열심히 피아노 반주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대머리들이 혹여 항의라도 해서 내가 피아노 반주 일을 뺏겨, 킹이 있는 공간으로 가야 할까 봐 무서웠다. 얘기하는 걸 보면 킹이 직접 하지 않는 걸 알았는데도 그랬다. 킹의 이름으로 된 타투에 비하면 피아노 치는 정도는 기꺼운 일이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부랴부랴 연습 공간이자 종교 행사의 장소이자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릴 곳인 강당으로 향하려 했다. 강당이라는 말은 공간 규모에 비해 너무 거창했지만 딱히 부를 말이 없었다. 하여튼, 킹이 날 잡지 않게, 나는 킹보다 먼저 방을 나서려 했지만 킹이 날 잡았다. 쓸데없이 재빠른 자식.

“허니.”

“으, 응?”

나는 또 타투를 하자는 개소리를 할까 봐 두려웠지만 킹의 말을 무시할 권리는 내게 없었다. 킹은 내게 다가와 내 귀 뒤를 긴 제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아직 담배를 피우지 않은 킹의 몸에선 강한 페퍼민트 냄새만 났다.

“이렇게 보내려고 하니까 후회된다. 그냥 나랑 같이 있을까?”

킹이 내 귓바퀴를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안 돼.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늦었어.

“어떻게 그래. 나 약속도 못 지키는 사람 만들 거야? 그리고, 자기가 요정 옷 입은 거 보고 싶다며…….”

나는 말을 흐리며 살짝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킹의 가슴께를 검지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킹은 자기가 얘기를 꺼낸 요정 옷이 보고 싶기는 했는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꼬까옷 입고 피아노 치는 허니를 보고 싶기는 해. 근데 그건 단둘이 할 수 있잖아.”

타투도 받아야 하는데 킹이랑도 함께 쭉 있어야 하고 요정 옷도 입어야 한다는 그런 개소리는 절대 사절이었다. 욕심이 많았다.

“아냐, 자기 바쁜데 내가 옆에 있으면 방해되고 나 자기 방해하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나 오랜만에 피아노 치는 거, 조금 기다렸단 말이야.”

열심히 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피아노 치는 거,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킹과 함께 있으며 갑작스럽게 타투를 받을지 모르는 그런 상황보다는 즐거웠다.

“허니가 정 그렇다면, 모닝 키스는 해주고 가.”

키스 정도야 껌이었다. 나는 킹의 멱살을 잡아 킹의 얼굴을 끌어내렸고 킹은 고개를 비틀어 내 입술에 본인의 입술을 갖다 댔다. 말랑한 킹의 입술에 내 것이 눌려 납작해졌고 킹이 입술을 열자 입 안에서 민트 냄새가 났다. 방금 이를 닦고 몸에 잔뜩 페퍼민트 오일을 발라, 킹의 안팎은 민트 범벅이었다.

킹은 혀를 내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날 안아 내 몸을 돌렸다. 나는 열린 문을 등지고 서 있던 상태였고 킹이 나와 자신의 위치를 바꾸자 킹의 큰 몸에 내 몸이 가려졌다. 킹은 아직도 제 멱살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올려 자신의 등을 감싸게 했고 더욱 깊게 입술을 맞붙여 내 허리가 뒤로 꺾였다.

이러다 침대로 들어가 아침부터 하자고 할 기세라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고 천천히 내 입술을 킹의 것에서 떼어냈다. 킹은 만족하지 않은 표정이어서 나는 킹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다시 킹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얼른 방 밖으로 향했다.

“이러다 나 늦겠다. 오늘도 일 열심히 하고 이따 봐.”

킹은 내 얕은수를 파악했지만 귀여워서 봐준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늦을 것 같다고 킹에게 이야기했지만, 강당에는 나와 이 안을 지킬 교도관 하나가 전부였다. 강당 구석에 있는 피아노는 잔뜩 먼지가 쌓인 상태였다. 물에 적신 휴지로 여러 번 닦아 내고 나서야 피아노는 본래의 광을 되찾았다. 피아노는 당연히 비싼 그랜드 피아노는 아니었고 어디서 쓰던 걸 받아 갖고 왔는지 ‘xx xxx 기부’라고 적혀 있었다.

뚜껑을 열자 희고 검은 건반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아무 흰 건반이나 검지로 가볍게 눌러 보자 다행히 꽤 그럴듯한 소리가 났다. 전문가 귀에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겠지만 나한테 그 정도를 바라서는 안 되었다. 난 조율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고 했지만 악보가 있어야 했고(물론 엄청 쉬워야 했다.) 딱히 수준 높은 곡을 외우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저 손을 풀 겸 내가 그나마 외우고 있는 곡을 쳤다.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근데 뭐부터였더라. 아, 맞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한 번 치다 보니 기억이 완전히 살아났는지 나는 버벅거리지 않고 피아노를 이어 쳤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피아노를 엄마한테서 배운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 초인종 소리였던 그 곡은 엄마가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곡이어서 엄마가 가르쳐 줬고 그렇게 내가 유일하게 외운 피아노곡이 되었다. 엄마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지만 음악 쪽엔 영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라 피아노를 치는 약간의 기술 말고 익히지 못했고.

재능만 있었어도 가수를 하는 거였는데. 길거리에서 캐스팅된 적은 있었고 엄마한테 가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엄마는 내게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하더니 내 노래를 듣고 한참 말이 없다가 명함을 가져갔다. 엄마도 음악에 재능은 없어서 딱 엄마에게 물려받은 거였다.

다른 쪽에서 물려받은 건 뭘까. 키 정도일까. 나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엄마의 키는 딱 평균이었으니까. 엄마가 고른 사람이었으니 제법 잘생기긴 했을 거다. 엄마도 얼굴을 꽤 봤으니까. 내 얼굴에서 엄마를 닮지 않은 부분은 그쪽에서 왔을지도 몰랐다. 킹이 어제 발견한, 웃을 때 광대가 패는 것도 그 사람에게 닮은 걸까. 그렇지만 차에 으깨져 죽은 사람을 닮든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나는 엄마랑 무척 흡사하게 생겼으니까 그거면 됐다.

나는 다시 한번 ‘즐거운 나의 집’을 치려고 했지만 교도관이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고개를 돌리니 대머리들이 강당 무대 아래 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저따위 놈들과 엄마의 생각을 섞고 싶지 않아서, 엄마에 대한 생각을 곱게 접어 머릿속 한 곳에 잘 수납해 뒀다.

대머리들이 골라온 건지 아니면 교도소 측에서 미리 골라 준 건지는 몰라도, 곡은 과 , , 였다. 아주 무난하고 성스러웠다. 이런 노래를 스님을 따라 한 대머리들이 법복을 입고 부르면 꽤 홍보 효과가 좋기는 할 것이다.

악보를 받았고 악보가 제법 쉬워 보이기는 했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음악에 큰 재능이 있지 않았기에 떠드는 대머리들의 말이 다 덮이게 피아노를 연습했다. 그러자 대머리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아노 칠 줄은 아는 거야?”

“내가 친다고 그랬어? 너네가 쳐 달라며!”

나는 어이가 없어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고 맞받아 외쳤다. 피아노 소리가 멎어서 큰 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분풀이였다. 머리털이랑 양심도 팔아먹은 대머리는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외쳤다.

“노래를 연습해야 하는데 피아노 소리만 들리잖아!”

평생 주인공이 될 일 없어서 이딴 것 가지고 설렜나 보다. 나는 다시 약하고 느리게 즐거운 나의 집을 치며 말했다.

“제일 잘생긴 것도 나고 요상한 옷 입는 것도 난데 어차피 다들 나만 볼 거야. 무슨 상관이야.”

맞지 않냐며 교도관을 바라봤고 교도관은 딱히 답을 내놓지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대머리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불만스럽게 날 쳐다봤다. 킹만 아니면 벌써 조져 놨을 거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 활짝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호랑이 없는 데에서 왕 행세하는 거 꽤 재밌다.

캐럴 연습은 한마디로 말하면 오합지졸 난장판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교도관이 안 되겠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지휘를 할 정도였다. 그 교도관은 꽤나 음악 쪽에서 재능이 있었는지, 그가 끼어들자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거기 재소자! 너는! 너는, 제발 목소리 좀 작게. 어? 입만 크게 벙긋벙긋 대란 말이야.”

교도관이 가장 키가 작은 주제에 목청은 제일 큰 대머리를 가리켰다. 교도관은 다른 재소자들에겐 나름 음역대를 정해주거나 역할 분배를 해줬는데 저 대머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라 포기한 듯했다. 그렇지만 키 작은 대머리에겐 너무나 과한 열정이 있었다. 그놈은 교도관에게 반발하며 제 날개를 펼치려 했지만 날개가 썩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도관은 내가 앉아 있던 피아노 의자까지 빼앗아 건반을 누르며 열심히 대머리들을 가르쳤다. 교도관은 내게도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조용히 한숨만 쉬더니 내버려 뒀다. 나는 그냥 구석에 가서 악보를 보면서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연습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냥 반주 틀고 부르면 안 돼?”

같은 곳에서 헤매다가 화가 나 대머리들을 바라보며 물었는데 대머리들은 그건 미처 생각 못 했는지 동시에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꿈 많고 실력 없는 키 작은 대머리가 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면 그거 편집은 누가 해?”

“내가 할 일은 아니지.”

나는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냐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대머리들이 자기들끼리 쑥덕대더니 말했다.

“그냥 피아노나 쳐.”

그래서 나는 말없이 다시 악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교도관은 답답해하며 제 가슴을 한참 쳤다. 상당히 고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달려 있던 무전기에서 지지직 하는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교도관은 대머리들에게서 등 져 무전기를 잡아당겨 귀에 갖다 댔다.

“무슨 일이야? 어. 응. 그러면 여기는? 괜찮아? 알았어.”

교도관은 한참 무전기로 교신했다. 그러면서 슬쩍 나와 대머리들을 쳐다보았는데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마구 움직여 열심히 연습 중이라는 티를 냈다. 물론 엉터리였다. 대머리들도 열심히 연습하는 척 입을 열려고 했으나 교도관은 급하게 손을 흔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옆에서 무전 중인데 노래를 부를 생각하다니. 바보들. 교도관은 무전기를 원래 자리로 옮겨 구겨진 옷을 쳐 펴더니 말했다.

“나 다른 곳 가야 하니까,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연습만 해. 사고 치면 캐럴이고 뭐고 다 독방행이야. 그리고 종교의 자유고 뭐고, 당장 너네 다 머리 기르고 해체하게 할 거야, 알았어?”

대머리들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댔고 교도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대개 모든 곳에서 교도관들이 지키고 서서 재소자들을 감시했지만 요즘 인력이 많이 부족한 탓에 저렇게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머리들은 교도관이 나갔는데도 한참 동안 어색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10분 지났을까, 한 명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 이거 진짜 비싼데, 마이클 미치가 팔던 거랑은 진짜 질이 달라. 질이. 비싼 게 좋긴 한가 봐?”

그건 작은 지퍼 백에 담긴 흰 가루였고 역시나 마약이었다. 저 미친놈이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마약을 꺼내 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놈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또, 보시 좀 해보려고 가져왔지. 부처의 정신으로 좋은 건 나눠야 하는 거잖아.”

어느 부처가 마약을 나눠 하라고 했는지 나는 종교에 무지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다른 놈이 카드만 한 종이를 꺼내 내밀었고 마약을 들고 온 놈이 그걸 종이에 소량 옮긴 후 한쪽 콧구멍을 막고 곧바로 흡입했다. 콧구멍으로 가루를 흡입하면 아프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고통은커녕 놈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놈들은 앞다퉈 가루를 제 몸에 먼저 집어넣으려고 싸웠다. 제일 먼저 약을 흡입한 놈은 이제는 아예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제 몸으로 쏟아지는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연습 안 해?”

“이게 다 연습의 일환이야!”

나는 악보를 들며 불만스럽게 물었지만 제 순서를 기다리던 대머리가 내게 외쳤다. 개판이었다. 두 번째로 약을 빤 대머리가 약 덕분에 너그러워졌는지 내게 물었다.

“왜 너도 하고 싶어?”

눈도 풀리고 입도 풀려 발음이 무척 불분명했다. 내가 “뭐라고?”를 두 번 반복해 묻고 반복해 같은 말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를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냥 웅앵웅앵거리겠지. 세 번째 차례를 기다리던 대머리가 두 번째 차례 대머리의 팔을 때렸다.

“야. 쟤한테 휴 사토가 판 거 주면 우리 킹한테 죽어.”

킹 때문인 것보다 아까워서 그런 것 같았다. 흰 가루의 양이 점차 줄 때마다 초조한 표정이었으니까. 어휴, 나는 악보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킹이 팔았어도 안 해.”

* * *

제대로 된 연습은 개뿔. 대머리들은 약에 취해 꽥꽥대다가 시간이 지나자 허기가 진다며 우르르 바깥으로 나갔다. 크리스마스 행사에 교정 본부 측 중요 인사들이 온다던데 얼굴도 본 적 없던 교도소장이 조금 불쌍해졌다. 사실 진짜 그렇진 않고 그냥 하는 말이다.

교도관이 없어서 대머리들이 제멋대로 일찍 나갔기 때문에, 나는 혼자 강당에서 피아노를 몇 번 쳤다. 그렇지만 하면 할수록 답이 없는 것 같았다. 전날에 피아노를 부숴 두면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가장 오른쪽 건반 쪽만 약하게 눌러 대야지.

겨우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안 되게 연습했는데 너무 지겨워졌다. 나는 결국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고 킹이 있을 정보 처리실로 향했다. 킹이 진짜 바쁜지, 그렇다면 도대체 뭘 하느라 날 떼어놓을 정도인지 궁금했다. 킹은 휴 사토가 한 공간에 있다는 걸 못 견디게 싫어했기 때문에 휴 사토와 관련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정보 처리실에 도착하자, 그곳의 문은 닫혀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앞에 서서 고민하다가 그냥 눈 딱 감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노트북에 고개를 박고 있던 재소자들이 날 쳐다봤고 교도관도 눈썹을 찡그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교도관은 내가 들어온 걸 확인하고 그냥 손을 흔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다시 킹이 있는 방의 문을 또 열고 들어갔다. 킹은 커튼을 쳐 두고 집중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들어갔던 탓인지 킹은 내가 들어온 걸 알아채지 못했다. 킹이 저렇게까지 집중한 건 처음 보아서 나는 까치발로 소파 쪽에 가 앉았다. 그리고 킹의 넓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로 바쁜 모양이었다. 저렇게 타투고 요정 옷이고 뭐고 다 잊고 일만 했음 좋겠다.

늘 이곳에서 책을 읽었지만, 오늘은 악보를 보며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진짜 눌리는 게 없으니 더 재미없었다. 그냥 피아노 연습을 더 하고 올 걸 그랬나. 짜증 나서 악보에 푹 머리를 박는데 내 머리를 간질이는 손이 느껴졌다. 고개를 그대로 들어보니 킹이었다. 킹은 키가 엄청 커서 머리가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킹은 기분이 괜찮은지 평소보다 올라간 입꼬리로 날 내려 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킹이 다가오는 걸 알아채지 못했기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 보았다. 그러나 킹도 같은 걸 물었다.

“허니야말로 언제 왔어?”

킹은 내 머리에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 내 옆에 앉았다. 킹의 무게 때문에 소파가 푹 꺼져 내가 엉덩이를 붙인 자리도 아래로 내려갔다.

“나 아까 전에. 자기가 너무 집중하고 있길래 방해 안 했어.”

킹은 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본인 손에 얼굴을 받친 후 날 바라봤다.

“그냥 부르지.”

“자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킹은 평소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휴 사토가 입소한 이후로 이런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분명 킹은 무슨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거나.

“그야 허니 보니까 좋아서 그렇지.”

거짓말. 날 반년 넘게 지겹게 봤으면서 저런 얼굴은 또 처음이었다.

“안 속아.”

나는 코에 주름이 가게 살짝 찡긋거렸다. 그러자 킹이 작게 웃더니 좀 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허니가 꼬까옷 입고 피아노 치는 것도 기다려지고, 몸에 내 이름 새길 것도 기다려져서 기분이 좋나 봐.”

괜히 물어봤다. 킹은 검지로 제 볼을 가볍게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익숙하게 킹의 뺨에 입을 맞췄고 킹은 잘했다며 내 귀를 만졌다. 킹은 내 귀를 만지는 걸 좋아했는데, 킹이 점점 기술이 생기는지 아니면 내가 점차 익숙해지는 것인지 제법 기분이 좋고 편안했다. 그리고 킹은 내 귓불을 살짝 건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번 주 토요일에 면회 있어.”

“누구?”

반년 넘게 킹과 함께 지내왔지만 킹이 통화를 하는 것도, 면회를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킹이 노트북으로 외부와 접촉을 필요한 만큼 다 하는 줄 알았다.

“그냥 동료이자 친구.”

친구가 있었어? 조금 놀랐지만 나는 현명했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아.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흐릴 뿐이었다.

“근데 허니는 왜 아무도 면회를 안 와? 통화도 안 하고.”

킹이 내 가슴 쪽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내 가슴을 빨고 싶은 듯했다. 그렇지만 내가 고생스러웠기에 모른 척했다.

“아아. 나? 사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여기 온 거.”

아무에게도 얘기를 안 하긴 했다. 왜냐하면 얘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 나는 가족이 없었고 또한 친구라 부를 마땅한 이들도 없었다.

“가족들이 걱정 안 해? 허니네 엄마랑 아빠는 허니랑 되게 사이좋을 거 같은데.”

킹은 멋대로 나를 엄마와 아빠가 모두 살아있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줬고. 뭐, 그쪽이 이로웠다.

“그니까 말씀 안 드린 거지. 부모님 모두 홍징 사람이긴 하지만 외국에 계시거든. 거기서 하는 일이 좀 힘들다고 하셔서 그냥 나가고 나서 얘기하려고 해. 그쪽이 나을 것 같아.”

킹이 내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간지러워서 킹의 손을 들어 치웠지만 킹은 굴하지 않고 다시 내 허벅지를 괴롭혔다.

“그동안 아무 연락도 안 하고?”

“원래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었어. 그리고 엄마랑 아빠는 형을 더 좋아하고 나는 내놓은 자식이거든.”

“형이 있어?”

킹의 손가락이 슬금슬금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가기에 나는 킹의 양손을 잡고 들어 손가락에 약하게 바람을 부는 장난을 쳤다. 킹은 내게 손이 잡히고도 내가 장난치는 게 괜찮았는지 날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킹의 검지에 바람을 강하게 후! 분 후 다시 말했다.

“응.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지. 무슨 회사에 다닌다고 했는데 어딘지는 모르겠어.”

바람을 부느라 동그랗게 말린 내 입술 사이에 킹이 검지를 꽂아 넣었다. 입술에 딱 맞게 들어맞던 손가락은 내가 입술 모양을 원래대로 돌리자 풀려났다. 킹은 그대로 제 손가락을 내 입꼬리로 옮겨 가볍게 누르며 물었다.

“내놓은 자식이란 건 무슨 말이야?”

“남자를 만나는 걸 들켰거든.”

내 말을 듣고 킹은 손을 빠르게 내 목 뒤로 옮겨 내 목을 낚아채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 말고 어떤 자식인데?”

나보다 더 놀아났을 거면서.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킹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킹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음, 자기보다 키도 작고 못생겼던 애. 안 그런 애가 있겠느냐마는, 걔는 진짜 별로였지. 그냥 내가 남자랑 할 수 있나 그런 게 궁금해서 골랐던 거뿐이야. 좆 크기는 잘 몰라. 안 잤거든. 그렇지만 자길 만나고 나니까 걔 얼굴은 기억도 안 나. 그냥 쭈그러진 빵 같았던 것만 생각나.”

내가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이 킹보다 못생기긴 했지만 쭈그러진 빵같이 못생긴 애는 고른 적 없었다. 그런 건 비위 상하잖아. 그러나 킹에 비하면 쭈그러지긴 했으니 엄연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건 악보야?”

킹이 내 무릎에 있던 악보를 빼앗아 들고 갔다. 가 쓰여 있는 악보였다.

“응. 근데, 나 피아노 사실 잘 못 쳐. 어려워.”

나는 킹에게 웅얼거리듯 답했고 킹은 악보를 보며 콧노래로 가볍게 노래를 불렀는데 목소리가 좋아 그런지 듣기 괜찮았다.

Raindrops on roses And whiskers on kittens

킹의 한쪽 손도 움직이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Bright copper kettles and warm woolen mittens Brown paper packages tied up with strings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

킹에게는 맞지 않는 가사 같았다. 노랫말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자기 피아노 칠 줄 알아?”

“조금.”

내 물음에 그제야 킹은 흥얼거림을 멈추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킹은 망나니처럼 굴어도 평소 자세가 꼿꼿했고 가끔 잘 교육받은 티가 났다. 양자라고는 하나 킹은 역시 미나콤이었다. 야매로 피아노를 배운 나보다 킹이 더 잘 칠 것 같았다.

“자기가 더 잘할 거 같은데 왜 나 시켰어?”

“왜? 내가 재롱부리는 거 보고 싶어?”

내가 묻자, 킹이 악보를 제 얼굴에서 치우고 날 바라봤다. 하여튼 뭘 물으면 그거에 맞는 답을 똑바로 주는 적이 없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잠자코 날 바라본 킹이 내 뺨에 손을 올려와 자연스레 얼굴을 기댔다. 킹이 피식, 입술 새로 웃음을 흘리더니 엄지로 내 턱 주변을 문지르며 말했다.

“완다가 이것저것 배우라고는 했는데, 악기는 딱히 배우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바이올린은 끽끽거려서 싫고, 첼로는 무겁고, 기타는 손가락이 아플 것 같고, 플루트는 쇠라 싫다 그러니까 엄청 큰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더라. 비싼 거니까 ‘왕벌의 비행’까지는 익히라더라고.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난 제목에 벌이 들어가니까 그게 동요인 줄 알았거든. ‘반짝반짝 작은 별’같이 쉽고 간단한 거 말이야.”

피아노를 잘 몰라도 왕벌의 비행이 고난도 곡인 건 알았다.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하는 애에게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는 것도 놀라운데 왕벌의 비행을 익히라는 건 엄격하고 지나친 처사였으나 완다 미나콤과 킹 미나콤의 얘기라니 어느 정도 수긍됐다. 내 턱을 만지는 킹의 엄지손톱에 가볍게 내 엄지를 갖다 올렸다. 단단하고 반질거리는 손톱이 닿았고 나는 그곳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서, 익혔어?”

“그거만 익혀서 다 배웠다고 하려고 했는데 기본이 없으면 안 된다고, 사상누각 같은 배움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몇 년은 쳤지. 그제야 왕벌의 비행을 치게 해주더라고. 손가락에 쥐 나는 줄 알았어.”

킹이 피아노를 치듯 검지와 중지를 교차로 내 턱 위를 톡톡톡 쳤다. 귀 가까운 곳이라 톡톡톡 소리가 귀에 분명하고 크게 들렸다.

“다른 거는? 어려운 거 많잖아.”

어려운 피아노곡이 많은 건 알았는데 어떤 곡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뭉뚱그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킹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답했다.

“딱 그거까지만 배운 다음에 완다한테 보여주고 그 앞에서 피아노 부쉈어. 그러니까 암말 안 하더라.”

하여튼 성격이 나빴다. 피아노 이제 막 시작하는 애한테 왕벌의 비행까지는 치라는 사람이나 진짜 치고 피아노를 부순 놈이나. 악기는 잘 몰라도 그랜드 피아노가 비싼 건 알았다. 더욱이 미나콤이니 비싼 브랜드의 질 좋은 걸 들여놨을 텐데. 그 비싼 것을.

“그래도 아깝다. 기껏 배워 놓고.”

나는 아직도 내 볼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킹의 손등 위에 내 손가락을 올려 킹을 따라 검지와 중지를 움직였다.

톡톡톡.

소리가 귀에 두 겹으로 더해졌다. 킹은 간지럽다는 듯 손등을 움찔대고 작게 웃었지만 내 손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기 쉽게 손등을 대줬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지껄였다.

“왜 아까워? 그걸 배우니까 우리 허니 뒷구멍 잘 쑤셔 주잖아. 손만으로도 좋다고, 그때마다 앙앙대면서 좋다며 울어 댈 때는 언제고. 섭섭하네.”

킹이 내 엉덩이를 쥐었다. 상하의가 분리된 옷이었으면 진작 바지를 내리고 박았을 모양새였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점프 슈트였다. 나는 킹의 손을 천천히 내 엉덩이에서 떼어낸 후 킹의 손바닥 가볍게 안쪽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손을 절대 풀어주지 않고 말했다.

“나 피아노 연습해야 해. 자기가 시킨 거잖아.”

킹의 손은 아직 하나가 더 있어서 킹은 반대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내가 그 전에 먼저 낚아채 잡았다. 킹은 내게 양손이 붙잡힌 채 웃었다.

“피아노 연습해야 한다며. 이렇게 잡고 할 거야?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난 피아노가 아냐.”

“방해 안 할 거야?”

“내가 언제 방해했어?”

결백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킹의 양손을 놓아주었고 킹은 내 말을 들어 처먹지 않고 날 돌려 끌어안았다. 내 등이 킹의 가슴에 닿는 자세였다. 나는 항의하듯 고개를 뒤로 돌려 킹을 바라봤다.

“방해 안 한다며!”

“가르쳐 줄게. 허니가 너무 못하는 거 같아서.”

킹이 나보다 잘 치긴 잘 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피아노만 가르쳐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 바쁘다며.”

“섭섭했구나? 알았어. 얼른 가르쳐 줄게.”

하여튼 말이 안 통했다. 킹은 내 허벅지가 피아노 건반이라는 듯 악보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 멈칫한 것이 전부였고 그리고 킹은 악보를 보며 부드럽게 내 허벅지를 두드렸다. 진짜 피아노가 아니라서 무슨 음이 나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나보다는 실력이 나았다. 나는 그냥 가만히 킹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킹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가르쳐 주는데 왜 안 해?”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혼자 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따지듯 물었는데 킹은 그저 투정 부리는 게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손을 움직였다.

“알겠어. 잘 봐. 이렇게 해.”

나는 킹이 하는 대로 손을 따라 움직였다. 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그렇지만 진짜 피아노가 아니라 제대로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제법 집중해서 움직이는데 킹이 슬금슬금 내 가슴 쪽으로 손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방해 안 한다고 했잖아.”

“응, 방해 안 해. 허니 잘하네. 열심히 더 해봐.”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옷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킹은 곧바로 드러난 내 맨 가슴에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참나.

“그게 방해 안 하는 거야?”

“응. 허니 심장 가까운 곳에서 쳐주려고. 그러면 더 잘하지 않을까?”

“거기는 심장 쪽 아니야.”

킹은 양손으로 내 양 젖꼭지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어느 누가 심장이 그렇게 둘로 나뉘어 있는지. 그렇지만 킹은 염치없이 태연하게도, 내 젖꼭지를 만지면서 오히려 내게 따져왔다.

“허니야말로 왜 연습 안 하고 계속 나한테 말 시키고 나 방해해? 나 지금 집중하는 중이란 말야.”

킹이 집중한 상태이기는 했다. 내 젖꼭지를 간지럽히는 것에. 나는 그냥 모른 척하고 다시 연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킹의 손에서 놀아났던 터라 신경을 모으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하으……. 잠깐, 잠깐만.”

“허니, 왜 그래? 아파?”

킹은 부끄러움도 없이 내게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냥 악보를 옆에 던져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곧바로 킹의 입술에 내 입술을 박았다. 킹이 웃어 약한 바람이 내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 * *

“윽, 하아.”

킹은 날 돌려 안고 내 젖꼭지에 입술을 박더니 열심히 빠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 옷을 다 벗겨 제 손을 내 엉덩이 사이에 박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킹이 계속 빠는 왼쪽 젖꼭지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이 올라와 뇌에 박혔다. 한쪽에만 올라오는 쾌감이 과해 킹의 머리를 잡고 반대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킹이 낄낄댔다.

“허니는 진짜 너무 밝혀.”

“자기만 하겠어?”

나는 이미 잔뜩 발기한 킹의 좆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킹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오른쪽 젖꼭지에 혀를 갖다 댔다. 나는 킹의 뒷머리에 손을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킹은 확실히 능숙했고 내 체력의 한계까지 몰고 가는 것만 아니면 킹과 하는 섹스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는 건 자위보다는 낫다는 말이었다. 킹의 섹스를 마냥 좋다고 하기에는 킹과의 섹스에서 느끼는 쾌감이 아플 정도로 과했고 체력적으로 힘들었으며 뒤처리가 번거로웠다. 킹의 중지가 내 구멍을 슬금슬금 파내고 들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 마디를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킹은 곧바로 얼굴을 올려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 내 숨을 빼앗아 삼켰다. 킹은 내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고 내 입천장을 문질렀다. 뇌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킹의 혀를 내 혀로 낚아채 가운데 부분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킹이 내 입 안으로 맺어지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물론 킹은 내 구멍을 괴롭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킹의 중지는 세 마디 모두 내 안에 들어온 상태였고 검지가 남은 틈을 벌려 들어오려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윤활유 없이 침으로만 젖은 킹의 손가락은 평소보다 건조했고 내 구멍은 평소보다 더 벅차 했다. 그러나 킹은 배려 없이 검지를 그냥 쑤셔 넣었다. 나는 아프고 놀라 킹의 입술에서 입을 떼어냈다.

“윽! 그렇게 갑자기 넣으면 어떻게 해.”

“좆을 박은 것보다는 낫잖아.”

풀어주지도 않고 제 좆을 그냥 박아 넣으면 살인 미수라는 걸 모르나 보다. 아님 알면서도 너무 뻔뻔한 거지. 나는 그냥 한숨을 내쉬었고 킹은 내 뺨과 이마에 마구 뽀뽀를 했다. 나는 킹이 내 얼굴에 귀찮게 구는 걸 잠자코 받아들이며 구멍이 무리 없이 벌어지게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킹은 어느새 검지와 중지를 내 안에 다 넣은 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평소보다 더 느리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허니, 나 피아노 배운 보람이 있는 거 같지?”

킹은 그렇게 말하며 검지와 중지를 내 안에서 피아노 치듯 움직였다. 물론 안은 더럽게 좁아서 그저 엄지와 중지를 교차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평소보다는 공을 들이는 것이 맞았다. 나는 킹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헐떡대는 중이었다.

“흐윽, 피아노 배워서 피아노를 쳐야 쓸모 있는 거지.”

“그럼 이제부터 허니가 피아노 해.”

제멋대로야. 진짜. 킹은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이는 걸 멈추고 팔을 움직여 위아래로 내 구멍에 손을 박아 넣었다.

“흐윽, 윽! 아아…….”

킹의 긴 손가락 끝이 내 안 깊숙한 곳에 닿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한참 손가락을 담고 있어 점차 풀어진 구멍이 쾌감에 움찔대고 있었다.

“흐윽, 자기 좀만 천천히, 응?”

아직 삽입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느끼기엔 너무 격한 쾌감이었다. 나는 킹에게 애원했지만 킹은 모른 척 내 귀에 입을 맞췄다.

“피아노는 말 못 하는 거 몰라?”

“흐윽! 그럼 자기는, 피아노한테 그렇게 박아 대?”

“그치. 심지어 부쉈는데 뭘 못해? 그렇지만 이번 피아노는 아껴 줄게.”

킹은 어느새 중지까지 내 안에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삼발이처럼 세 손가락을 내 안에서 벌렸다. 안은 좁고 탄력 있었는데도, 킹의 손가락 힘이 더 강했다.

“아, 그렇게 벌리면, 윽!”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까 봐. 허니가 생각해도 나는 그만두기에 너무 재능 있는 거 같지?”

피아노고 뭐고 나는 지금 내 구멍에서 움직이는 킹의 손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킹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그저 킹의 목에 팔을 감고 거친 숨만 흘렸다.

킹도 흥분이 됐는지, 말없이 내 구멍을 박으며 푸는 데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손가락을 뽑아내고 제 옷을 벗었다. 그 탓에 나는 킹의 몸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흐린 눈으로 킹을 바라보았다.

킹의 몸은 크고 단단했다. 짙은 피부가 킹의 거대한 뼈와 근육을 덮고 있었고 근육들은 잘게 쪼개져 킹의 뼈에 붙어, 꼭 훌륭한 조각가가 만든 소조 같았다. 킹은 능숙하고 빠른 속도로 옷을 벗어 냈고 나는 잔뜩 발기한 킹의 좆으로 시선을 옮겼다. 킹의 것은 배 쪽으로 올라붙어 잔뜩 성이 난 상태였는데 혈관들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씨발. 저걸 몸에 넣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다가올 쾌감에 대한 기대인 동시에 두려움 때문이었다. 킹은 내가 자신의 좆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검지로 내 볼을 톡 하고 쳤다.

“왜? 얼른 박아 줬음 싶어?”

“아니, 천천히, 제발 천천히 해줘. 자기 거는 너무 커.”

“좋으면서 맨날 앙탈 부리더라.”

킹은 날 타박하면서도 제 좆 크기를 칭찬하는 날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날 소파에 눕히더니 날 내려다보았다. 빛에 등진 킹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킹의 곱슬머리는 쏟아져 내려, 킹의 얼굴과 내 시야를 가렸다. 킹은 제 큰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지만, 고정되지 못한 머리는 이내 흩어져 다시 쏟아졌다. 그러자 킹은 귀찮은지 그냥 제 머리를 내버려 두고 내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킹은 귀두를 내 구멍에 맞추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곧바로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 윽! 으으…….”

좁은 구멍이 다시금 벌려지는 게 느껴졌다. 킹의 귀두는 축축하고 둥글어 손톱과 뼈를 가진 손가락보다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더 굵었고, 귀두 밑에 혈관들이 돋아난 좆 기둥은 거칠고 뻣뻣했다. 킹은 반절 정도를 내 안에 박아 넣고 거칠게 한숨을 한 번 뱉었다. 아무리 손으로 풀었다 해도 원래는 무척 좁은 구멍이었고 그런 곳에 예민한 제 성기를 박아 넣는 것은 킹에게도 쉽지 않은 듯했다.

킹이 얼굴을 살짝 내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내 이마와 두피, 그리고 얼굴에 킹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찡그려 눈을 감았고 킹은 제 머리를 다시 한번 쓸어 올리며 내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킹의 손짓이 부드러워 조금 마음이 풀어졌을 때 즈음, 킹은 예고도 하지 않고 거친 허릿짓으로 좆 전체를 박아 넣었다.

“아윽…!”

나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킹은 날 달래듯 내 허리를 문질렀다. 그러나 진정되지 못했고, 나는 잠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킹의 허리를 잡았다. 아직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킹은 잠시 내게 배려를 해주는 듯싶었으나, 킹은 역시나 이기적이었다.

아직 제대로 적응이 되지 못했는데 킹은 다시 허리를 움직여 강한 힘으로 내 안에 박아 넣었다. 킹의 것이 내가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다. 예전에 킹이 한 말 대로, 내가 느끼는 곳은 상당히 깊이 있었고 킹 정도의 크기가 아니라면 쉬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킹은 내 안을 휘젓듯 천천히 좆을 움직였다. 나는 킹의 목에 팔을 감고 킹에게 매달리듯 킹을 안았다.

“제발 좀,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만, 응? 잠시만…….”

“하아, 허니. 그러면서 뒤는 왜 조여.”

그냥 움찔거린 것이지 일부러 조인 적은 없었다. 그래도 킹은 선심 쓰듯 잠시 몸을 멈춰주었다. 대신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식은땀이 나 내 얼굴은 약간 젖어 있었고 킹의 건조한 손이 얼굴의 물기를 조금 훔쳐갔다. 킹이 내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게 느껴졌고 젖은 머리는 킹의 손을 따라 뭉쳐 얼굴 위로 넘어갔다. 내 이마를 비롯한 얼굴이 모두 분명히 킹에게 드러났고 킹은 내 얼굴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쁘네.”

킹은 확실히 내 얼굴을 좋아했다. 불행인 동시에 다행인 일이었다.

“이쁘면 좀 잘 해주든가.”

투정을 부리듯 내 이마에 있는 킹의 손등에 내 손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킹은 제 손을 빼내어 내 손 위로 덮어 깍지를 꼈다.

“허니는 참 욕심이 많아. 내 딴에는 이제껏 만난 이 중에 제일 잘해주는 건데.”

킹은 내게 가끔 잘 해 주긴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서라기보다는 귀여운 반려동물이나 아이 보듯 귀여워했다. 그러나 나랑 붙어먹고 싶어 했고 지금처럼 붙어먹었기에 동물이나 아이처럼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하나만 하면 낫지 않을까.

킹은 내 손에 깍지를 낀 손을 옆으로 두고 내 귀로 입술을 내려 작게 속삭였다.

“이제 움직일 거야.”

나는 각오하듯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킹은 곧바로 허리를 강하게 쳐 올렸다. 잠깐 가셨던 쾌감이 과할 정도로 빠르게 뇌를 향해 달려와 박혔다.

“윽! 하아, 너무, 흑”

“하아, 왜 해도 해도 힘들어해? 응? 그럼 앞으로 더 많이 해야 하는 수밖에 없겠다.”

“흐윽, 흑. 지금 하면서 왜 또 하고 싶대.”

나는 킹의 어깨에 얼굴을 박고 그저 킹의 허리 짓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킹은 그런 내 얼굴을 억지로 끌어 올려 볼에 가볍게 쪽, 쪽 댔다. 그리고 킹은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소파는 우리 둘을 감당하기에 너무 좁고 불편했다.

“하아, 씨발.”

킹은 작은 욕 소리와 함께 내 몸을 안고 일으켰다. 순식간에 몸이 일으켜져 킹의 허벅지에 앉아 마주 본 자세가 되었고 몸의 무게 때문에 삽입이 더욱 깊어졌다.

“윽, 하아.”

나는 큰 자극에 내 뒤가 허공이라는 것을 잊은 채, 몸을 뒤로 젖혔고 킹은 재빠르게 내 허리를 감싸 나를 잡았다. 나는 큰 자극에 어떻게든 몸을 틀고 싶어 이번에는 허리를 안쪽으로 숙이듯 굽혔지만 킹의 몸에 막혀 허리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앉은 자세로 킹은 나를 쳐 올렸다. 마치 밀려날 거 같은 힘이라 킹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킹의 좆이 내 안에서 마구 요동치며 날 극점으로 몰고 가고 있어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밀려오는 쾌감을 감당하느라 힘들었지만 킹은 이제 날 기다려 주지 않았다. 킹은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며 내 목에 이를 박고 혀로 핥았다. 킹의 앞니가 얇고 작은 벽처럼 내 목을 눌러 자국을 냈고 목이 미지근하고 축축했다.

뒤에서 계속 올라오는 쾌감에 곧 사정할 것 같았다. 그러나 킹은 아직 멀어 보였고 내가 사정한 후에도 킹은 본인이 사정하기까지 게걸스럽게 계속 내 구멍을 탐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나는 킹보다 갑절로 절정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차라리 킹이 먼저 사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뒤로 돌려 킹의 무릎에 댄 후 허리를 움직이며 구멍을 조였다.

“윽, 하아.”

킹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신음을 내뱉고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젖혀 킹의 눈높이로 올라간 내 턱에 입을 맞췄다. 킹이 너그럽게 내 성기로 손을 내렸지만 나는 킹의 손을 떼어냈다. 이대로 킹보다 먼저 가서는 안 됐다. 그리고 나는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내 좆에서는 액체가 찔끔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딱 사정하기 직전이었지만 킹의 걸 먼저 내보내야 했다. 킹도 내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허니, 오늘따라 더 내 좆에 환장했네. 응? 튕겨 놓고 맨날 이러지. 귀엽게.”

에휴. 나는 킹의 입술을 내 걸로 막았다. 킹은 불만 없이 내 입술을 받아들이고 혀로 핥았다. 힘들어서 실수로 킹의 입술을 꽤 강하게 물었지만, 오히려 킹은 아파하지 않고 좋아했다. 그리고 올라간 킹의 입꼬리에 입을 가볍게 맞추는데 킹이 갑작스레 좆을 내 구멍 안,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나는 놀라 입을 벌리고 강하게 뒤를 조이는 동시에 사정했다.

“하윽, 흐윽. 아아…….”

내 온몸을 태우듯 올라오는 오르가슴에 몸을 떨며 움찔대자, 킹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로 크게 숨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구멍으로 미지근하고 점도 있는 액체가 쏟아졌다. 그러나 킹이 아직 좆을 꽂고 있어 바깥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아 보기엔 말끔했다. 그리고 킹이 잔열처럼 남은 쾌감을 느끼며 천천히 좆을 움직이자 그제야 정액으로 구멍이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걸 또 처리하려면 잔뜩 귀찮을 텐데.

콘돔을 쓰자니 킹은 난데없이 발정했고 난데없이 내게 박고 싶어 했기 때문에 평소에 챙겨 다니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 그리고 콘돔을 죄수복에 챙기고 다니는 건 당연히 기껍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에 생으로 싸지른 킹은 다시 좆을 세우고 있었다. 양심이 없었다. 킹은 내가 뒤처리 생각에 살짝 짜증이 난 것도 모르고, 아니, 무시하고 내 볼과 귀에만 연달아 입을 맞췄다.

섹스 후 더럽혀진 건 킹이 대강 치웠다. 킹을 머슴처럼 부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아직 구멍이 축축해서 찝찝했지만 킹이 날 안고 있어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내 등이 킹의 가슴에 맞닿은 자세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킹은 내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손도 이쁘네, 허니는.”

킹이 내 손등에다 손톱 끝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냥 간지럽히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랬다. 킹이 한 타투 얘기 떠올라 불안해졌다.

“에이, 뭐가 이뻐. 그냥 평범하지.”

나는 몸 곳곳이 대체로 보기 좋았지만 일부러 과장되게 비하했다. 그러자 킹은 내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가볍게 입 맞추더니 앞니를 손등에 대고 속살거렸다. 킹의 뜨거운 숨이 손등에 머물렀다.

“아냐, 예뻐. 손등에 타투를 박아 넣어도 이쁘겠어. 그치?”

“이쁜 거는 원래 안 건드리고 내버려 두는 거래. 그래서 좋은 재료는 별 가공 안 하고 소금간만 하고 그러잖아. 원래 별로인 거나 꾸미는 거야.”

“아냐, 좋은 재료엔 이것저것 넣어서 잔뜩 맛있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보람이 있지.”

하, 말이 안 통한다. 곧 죽어도 내 몸에 타투를 박아 넣을 작정인가 보다. 그냥 킹이 타투를 잊어버렸음 좋겠어서 나는 그냥 말을 돌렸다.

“요즘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빠?”

“섭섭해?”

답을 해주면 될 걸 이렇게 꼭 내 감정을 물어왔다. 아니, 묻는다기보다 내가 느낀다고 답했음 하는 감정을 강요하는 것에 가까웠다.

“응. 섭섭하네. 곧 크리스마스인데 일만 하고.”

그래서 킹이 원하는 대로 답해줬다. 그러자 킹은 더욱 기꺼워했다. 킹은 내 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나중에 보면 알 거야. 벌써부터 알면 재미없잖아.”

“…나랑 관련된 거야?”

불안했다. 그냥 알려줬음 좋겠다.

“허니 때문에 바쁜 건 아냐, 걱정 마.”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지, 대체.

* * *

씻고 싶었지만 킹이 배고프다며 식당으로 날 끌고 갔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따라가는 내게, 킹은 다음에는 콘돔을 구해 와 쓰겠다며 날 어르고 달랬다. 내가 이따위 표정인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는 듯 말이다.

휴지를 돌돌 말아 속옷에 갖다 댔고, 식당으로 오기 전 나름 빼낸 터라 많은 양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찝찝한 건 찝찝한 거였다. 괜찮다고 했는데 킹은 굳이 내 식판까지 들어 테이블로 가져갔다. 과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와의 섹스가 만족스러웠던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하는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듯했다.

오늘 식사는 파인애플과 채소를 넣고 볶은 밥이었다. 기름이 과해 보였으나 맛은 괜찮았다. 반찬은 그저 절임 채소 몇 조각이라 숟가락으로 밥만 열심히 퍼먹었다. 빨리 먹고 씻으러 갈 셈이었다.

“천천히 먹어. 체 할라.”

킹이 밥은 안 먹고 턱을 괸 채 날 보며 말했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고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 한술을 떠서 입 안에 넣고 씹어 넘기자 킹이 옆에서 물을 건넸다. 나는 그 물을 벌컥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킹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어디 가?”

“나 얼른 씻고 싶어서.”

“그럼 다음엔 미리 얘기하고 일어나. 나 몰래 가고 그러는 거 싫다고 했잖아.”

킹은 가도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킹은 엄지로 내 손목 안쪽을 약하고 천천히 쓸었다. 소름이 돋아오는 것 같은 기분에 킹의 손에서 내 손목을 부드럽게 빼낸 후, 킹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며 킹을 달랬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 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가는데, 복도 저 멀리에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피할까 싶다가, 샤워실이 그 무리보다 가까웠고 굳이 피해야 할 필요를 모르겠어서 그냥 걸었다. 그리고 조금 가까워지자 그들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는데, 휴 사토와 그 똘마니들이었다.

휴 사토는 본래도 돈이 많고 셀럽 행세를 해서 붙는 이가 좀 있긴 했으나 그것 자체가 힘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물건을 유통하고 수완 좋게 팔아내는 휴 사토는 그것으로 힘을 얻었고 주변의 강한 사람들을 둘 수 있었다. 휴 사토의 키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휴 사토 근처의 있는 덩치들의 키와 덩치는 엄청났다. 그래서 거대한 고기 울타리에 휴 사토가 둘러싸인 것 같았다.

휴 사토와 킹은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그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걷다 샤워실로 들어가려 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날 불렀다.

“야.”

휴 사토 무리 중 한 명의 목소리였고 나는 모른 척 무시했다. 그렇지만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 오는 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씨발, 왜 불러도 답이 없어?”

강한 힘으로 몸이 돌려져 결국 그 못생긴 얼굴을 마주 봐야 했다. 뒤에 서 있던 휴 사토가 여유로운 척 굴며 그놈을 말렸다.

“론, 그만해.”

휴 사토의 말에 론이라 불린 놈은 씨익 대면서 휴 사토의 뒤로 섰다. 휴 사토가 가만히 서서 말없이 날 훑어봤다. 휴 사토와 내 키는 엇비슷해서 눈높이가 맞았다.

“킹이 아주 널 끼고 돌던데, 뒤를 잘 조이나 보지?”

휴 사토가 지껄였다. 나는 기다란 원통형 샴푸 통을 휴 사토에게 내밀었다.

“빌려줄까?”

저가 브랜드의 샴푸 통이었고 이미 반 넘게 써 사용감이 가득 한 거라 휴 사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뒷구멍 간지러우니까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하는 거 아냐? 뒤 만져줘야만 싼다며. 얼마나 괴롭겠어? 아, 옆에 있는 친구들이 도와주나? 그럼 화대는 얼마씩 챙겨 줘? 내가 앞은 잘 안 써봤는데 꽤 쳐주면 갈아탈까 싶어서.”

샴푸 통을 쥐고 손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마치 샴푸 통이 좆이 된 것처럼. 휴 사토의 얼굴이 구겨졌고 휴 사토 뒤에 서 있던 놈이 주먹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가 방해했다.

“갈아탄다고? 우리 허니는 돈에 그렇게 쉽게 몸과 마음을 다 팔 수 있는 사람이었어?”

어느새 온 건지 킹이 내 어깨의 팔을 두르며 말했다. 들었구나. 나는 킹이 심술을 부릴까 봐 킹의 팔을 살짝 잡고 킹을 올려다봤다.

“아니이, 귀찮게 굴잖아. 그래서……. 그리고 나 얼굴 많이 보는 거 알잖아.”

그렇게 말하며 휴 사토의 얼굴을 살짝 흘겼다. 그러자 킹이 날 따라 휴 사토의 얼굴을 봤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우리 허니가 좆 큰 거랑 잘생긴 거 환장하게 좋아하거든. 쟤는 너무 못생겨서 영 아니다. 근데 성질부릴 줄도 아네? 귀엽게. 고양이 같아.”

킹은 그러면서 내 양 볼을 쥐고 흔들었다. 굳이 지금 이래야 하는 건 뭘까. 휴 사토 무리는 아직 가지 않고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킹은 휴 사토 무리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는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휴 사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리 허니한테는 무슨 일이야? 워낙 귀엽고 이뻐서 밖에 내놓기 무섭단 말야. 너 같은 새끼들 마주칠까 봐.”

휴 사토는 괜찮은 척, 쿨한 척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표정 관리에 능하지 못했다. 휴 사토는 크게 하! 하고 웃음을 내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네 좀 분발해야겠더라. 미나콤, 씨발 것들이 약은 지네만 팔 수 있는 것처럼 지랄지랄해서 귀찮았는데. 다른 데가 질도, 값도 괜찮더라고. 너네도 이제 좀 더 머리를 써야 되지 않겠어? 그러다 망할라.”

“그나마 있던 곳도 문 닫았으면서 무리하게 확장하려다가 좆됐던 누구네만 하겠어? 요즘 사람들이 도박질은 영, 재미없어하지? 그래서 우리가 너무 바빠서 힘들다. 좀 분발해줘. 응? 근데 또 바빠질 거 같아서 걱정이야. 우리 이번에 물건 하나 새로 만들었잖아. 이름은 골드 디거고 도박쟁이들이 환장하게 칩 모양으로 만들까 생각 중이야. 어때? 아, 근데 이름이 너무 구려서 아무도 안 사겠다.”

너네들끼리 싸우고 나는 씻으면 안 될까? 그렇지만 나는 조용히 킹에게 어깨를 내어준 채 입을 다물었다. 휴 사토와 킹은 지금 서로가 너무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는 킹이 훨씬 커서 킹이 휴 사토를 내려 보았기에, 킹이 우위에 있어 보였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휴 사토는 킹과 더 말을 섞기 싫은지 그냥 몸을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킹은 슬금슬금 손을 내 엉덩이로 내리더니, 강하게 쥐며 속삭였다.

“샤워실에서 한 번 더 할까?”

킹은 질문을 던져 놓고 내게 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날 샤워실로 끌고 들어갔고 나는 겨우 다물린 구멍을 킹에게 잔뜩 벌려주고 나서야 씻을 수 있었다.

킹과 섹스 후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샤워까지 한 후에야 나는 샤워실을 나올 수 있었다. 킹의 곱슬머리는 젖어 푹 가라앉았지만 숱이 많아 비어 보이지 않았다. 킹이 머리를 제대로 닦지 않아 땀처럼 얼굴로 물이 흘렀다.

킹은 얼굴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나마 젖지 않은 수건 모서리 부분으로 킹의 얼굴을 닦아 내었다. 그러자 킹은 방금 샤워를 끝낸 큰 개처럼 웃었다. 그러나 개만큼 온순하지 못했다.

“화장실에 들르고 가.”

킹이 샤워실 옆에 있는 화장실을 고갯짓하며 들어갔고 나도 킹을 따라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이미 줄이 있었지만 킹은 무시하고 제일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 아침까지 ‘고장’이라고 종이가 붙어있던 칸에 종이가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벌써 고쳐졌나 싶었는데 그 칸 안에서 큰 소리와 함께 큰 비명이 들렸다.

쿵!

와장창!

“으악, 씨발!”

재소자 한 명이 엉덩이를 닦지 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을 열고 나왔다. 엉덩이에서 피가 나고 있었는데 항문에서 나는 건 아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벽에서 떨어져 깨진 변기와 오물들이 보였다. 비위가 상했다.

큰 소리가 났음에도 교도관은 한참 동안 오지 않았고 누군가 부르러 간 후에야 도착했다. 교도관은 엉덩이를 닦지도 않고 피를 흘리며 엎드려 있는 재소자를 보고 1차로 표정을 구기더니, 난장판이 된 화장실 칸을 보고 더 구길 것도 없는 얼굴을 더욱 구겼다. 얼굴이 마치 산세가 험한 산맥 같았다. 교도관은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어깨에 달린 무전기를 켜 입을 갖다 댔다.

“화장실에서 부상자 발생. 아, 싸움은 아니고. 똥 싸다가 변기 떨어져서 다쳤어요. 지금 개판이에요. 네, 네. 야, 많이 아프냐?”

교도관이 엉덩이를 까고 엎드려 있는 재소자를 제대로 보지 않고 발로 툭툭 쳐 건드렸다. 나 같아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재소자는 “으으으…….”거리며 잔뜩 엄살을 피웠고 교도관은 다시 한숨을 쉬고 무전을 쳤다.

“예. 일어나기에 상태 안 좋아 보여요. 네, 네.”

깨진 변기에서 흘러나온 정체 모를 물이 화장실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화장실에 있기 싫었다. 비위가 상했다. 킹도 그랬는지 킹은 내 눈을 가려주며 날 끌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 * *

오늘은 매주 면회가 있는 토요일이었다. 면회를 하기 위해선 미리 면회 목록을 작성해야 했고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킹은 매주 토요일마다 나와 함께 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킹의 면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면회는 테이블이 놓인 방에서 최대 두 명의 사람만 들러 면회가 가능했다. 그리고 신체 접촉은 딱 두 번만 허용됐다. 만났을 때, 헤어졌을 때. 면회인과 반가움의 키스와 포옹을 하며 밀수를 하는 미친놈들이 많은 탓이다. 근데 그건 평범한 재소자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였고, 킹은 더 나은 장소에서, 감시 없이 면회를 할 수도 있었다.

면회 날은 대개 소란스럽고 들떠 있는데 다들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킹이 만나는 사람은 킹에게 특별한 이는 아닌지 킹은 평소와 똑같았다. 킹은 나가기 전 내 코를 평소처럼 톡 건드렸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응.”

사고는 킹이 쳤지, 나는 딱 한 번 말고 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온순하게 답했다. 킹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고 머리가 잔뜩 엉망이 되었다.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는 사이 킹은 큰 보폭으로 걸어 이미 방을 떠났다.

오늘은 일이 없는 주말이었지만 나는 일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대머리들과 모여 어떻게든 나아지려 애써야 했다. 그리고 도서관 대머리에게 6권을 달라고 재촉해야 했다.

며칠 새 너덜너덜해진 악보를 들고 강당으로 향했다. 킹은 본인이 피아노를 치라고 해놓고서 그동안 연습을 방해하기만 했지 절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요정 옷을 입고 개망신당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강당에 도착하자 대머리 몇이 이미 모여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교도관은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머리에게 물었다.

“교도관 없어?”

“다 면회실 쪽 갔어. 그래도 CCTV 보고 있으니까 정신 차리라던데, 카메라 고장 내도 늦게 고치려나?”

대머리가 강당 구석에 달린 CCTV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재소자들을 막 풀어 둬도 되나? 진짜 사람이 부족하긴 많이 부족한 듯했다. 그렇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피아노가 있는 무대 위로 올라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악보를 보면대에 두었다. 그리고 손을 푼 뒤 천천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연습을 해서 확실히 처음보다 수월했다. 킹이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킹 생각을 잠깐 하다 보니 킹이 피아노를 배워 놓고 얻다, 어떻게 써먹었는지 새삼 생각나 엉덩이가 간지러웠다.

나는 킹의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내고 ‘즐거운 나의 집’을 쳤다. 습관이어서 내가 그걸 치고 있는 줄도 뒤늦게 알아챘다. 엄마와 살았다가 나 혼자 살았던 그 집의 초인종 소리여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지만. 그러고 보니 마당 앞 밭에 있던 페퍼민트는 아직 살아있겠지? 집에 살 때도 별로 관리를 해주지 않았지만 자기 혼자 쑥쑥 자라났다. 죽지 않았음 좋겠는데. 죽으면 새로 심는 수밖에.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 대머리들이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와 내 근처에 서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악보를 보았다. 첫 곡이 이었는데 가 맨 앞에 와있었다. 그래서 잠시 악보를 정리한 후에야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새 연습을 했기 때문에 내 반주 실력도, 대머리들의 가창 실력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강 구색을 갖출 정도는 되었다. 각 곡은 길이가 짧았고 길어도 좀 줄였기 때문에 노래를 한 바퀴 도는 데에는 10분이 들지 않았다.

짧은 게 무대 위에 오르는 쪽이나 관객석에 있는 쪽이나 이로워서 짧다고 불만을 가질 길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길었다. 무대 위에 올랐다가 지치면 반주 속도를 높이면 됐다. 내가 멋대로 빨리 쳐도 노래 부르는 놈들은 어차피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속도를 생각하다 보니 손이 빨라져서 나도 모르게 빠르게 반주를 쳤고 대머리들은 부랴부랴 내 속도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맞춘 음정과 박자가 엉망이 돼서 질 나쁜 힙합 같았다. 무대에선 속도를 적당히 올려야겠다.

대머리들은 날 째려보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다시 부터 반주를 치려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작은 체구의 남자로, 품 안에 비닐로 포장된 천을 들고 있었고 그자가 큰 쌍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꽂혔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시선이 집중되자 몸에 들고 있던 것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 뭐야?”

대머리가 험하게 물었고 남자가 들고 있던 걸 들어 올렸다.

“이거 전해 주래서.”

대머리 하나가 무대를 뛰어 내려가 성큼성큼 그 남자를 향해 걸어가더니 물건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부랴부랴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물건을 든 대머리가 무대에 다 도착하기도 전에 포장을 다 까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초록색 줄무늬 긴 양말과 빨간 반바지, 희고 큰 단추가 달린 도톰한 초록색 반팔 티셔츠, 빨간 천 고깔모자였다. 한 마디로 내가 입어야 할 옷이라는 말이었다. 씨발, 저딴 건 어디서 구해왔담. 대머리는 그 옷을 내게 던졌고 옷이 까만 피아노 위를 흩어져 덮었다. 걸레로 쓰자니 재질이 별로였고 화장실 휴지 대신 쓰기에도 거칠어 보였다. 그냥 이따 가서 버려야지.

적당히 잃어버렸다고 하자. 뭐라고 하면 열심히 아양 떨며 좆 빨아 주고 그걸로도 안 되면 섹스를 하면 된다. 킹은 나와 섹스를 하기 시작한 후로는, 웬만한 일은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어차피 킹이랑 섹스를 하는 건 익숙했기에 감당 가능했고, 20살이 넘은 나이로 무대 위에서 저딴 옷을 입는 건 감당하기 어려웠다.

소각 처리를 기다리는 쓰레기들을 모아둔 곳에 가 요정 옷을 버렸다. 크고 얇은 검정 비닐봉지들 사이에 놓인 알록달록한 원색 옷은 정말 눈에 튀고 꼴사나웠다. 저런 걸 몸에 걸치고 올랐으면 더 흉했겠지.

연습에 의욕이 없는 대머리들 덕분에 일은 일찍 끝났고 이제 슬슬 킹의 면회가 끝날 시간이었다. 더 길어질 수도 있지만 딱히 할 말이 많은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가 보니 방은 아직 비어 있었다. 책을 읽으려 했는데 그제야 도서관 대머리에게서 6권을 받아내지 못한 게 생각났다. 그놈 방이 어디더라. 어디 있더라. 생각해 내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애초에 머릿속에 있던 적이 없었다. 사실 그놈 이름도 몰랐다. 다음에는 꼭 잊지 않고 돌려받겠다는 다짐을 하는데 킹이 들어왔다. 킹은 손에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저런 걸 대놓고 들고 오는데도 아무도 킹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킹은 그걸 내게 내밀었다.

“먹어. 단 거 좋아하잖아.”

단 거를 밝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맛있는 걸 먹을 뿐. 그렇지만 아무 말 않고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치즈케이크와 브라우니가 있었다.

“이게 웬 거야?”

“내가 부탁했어. 좀 사다 달라고.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 우리 허니는 아가라 단 거 챙겨 줘야 안 울잖아.”

킹이 내가 앉아 있는 침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케이크는 비싼 곳에서 샀는지 예뻤다. 그러나 이런 걸 일부러 부탁해 사다 주는 킹의 행위가 낯설었다.

“그런 걸 챙겨?”

“특별히 챙겨 봤어. 여기 맛있는 곳이야. 완다가 좋아해.”

말없이 케이크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맛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런 킹의 행동은 과했다. 내가 부탁하지 않은 걸 굳이. 일부러 이런 소소한 부분까지 챙겨서는 안 됐다. 그건 암묵적으로 정한 선에서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가 말없이 있자, 킹은 상자 안에서 플라스틱 포크를 꺼내더니 케이크를 떠, 내 입에 갖다 댔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고 케이크를 입 안에 넣어 맛을 느꼈다. 확실히 평생 먹었던 것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이런 고급의 것은 내가 정한 몫이 아니었다.

킹은 케이크 두 조각을 모두 내게 먹였다. 아무리 맛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케이크 두 조각을 먹으니 속이 너무 달고 느끼했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킹은 고집을 부렸고 결국 다 먹게 했다. 사실은 날 괴롭히려는 고단수의 수법이 아닌가 싶었다. 케이크 상자를 치운 킹이 아무것도 묻지 않은 내 입술을 괜히 닦아 내면서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요정 옷은?”

“무슨 요정 옷?”

나는 모른 척하며 되물었고 킹은 내 왼쪽 입꼬리를 콕콕 누르며 다시 물었다.

“크리스마스 요정 옷. 무대에서 입을 거. 이쁜 걸로 주문했는데. 특별히 허니 사이즈에 딱 맞춰서.”

그동안 바쁘다고 한 것도 이런 짓거리 하려고 바빴던 거 아냐? 나는 계속 모른 척 굴었다.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거 왔대?”

그러자 킹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디다 버렸어?”

“뭐가?”

킹이 내 입술을 만지던 손을 내리고 내 허벅지에 올렸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버린 건 괜찮은데 거짓말은 하지 마. 나 거짓말 안 좋아해.”

나는 킹의 눈을 보며 순순히 답했다.

“…쓰레기장에.”

“흠, 그렇게 싫었어?”

킹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투정 부리듯 답했다.

“너무… 빨갛고 초록색이었어.”

“그래서 귀여웠을 텐데…….”

킹이 말을 흐렸다. 좆이라도 빨아줘야 하나. 턱을 몰래 푸는데 킹이 말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웬일로 너그럽지? 수상하다.

* * *

킹이 아침부터 날 깨웠다. 나는 졸려서 도리질을 쳤지만 킹은 억지로 내 몸을 끌어당겨 앉히더니 날 끌어안았다. 나는 잠기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킹에게 안겨 다시 잠들려고 했지만 킹은 봐주지 않았다.

“허니, 눈 떠봐.”

“으응, 나 졸려…….”

“그만 귀엽게 굴고 눈 떠봐.”

킹이 내 눈을 문질렀다. 눈곱이 나올 텐데 참 비위도 좋았다. 아침부터 난리였다. 나는 겨우 눈을 떠 킹을 올려 봤다. 킹은 씻었는지 끝이 젖은 곱슬머리를 내게 늘어트리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참 쓸데없이 잘생겼다. 킹은 아이 달래듯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우리 허니, 이따가 무대 오르겠네. 그치?”

오늘은 캐럴 공연 날이었다. 이제 그만 귀찮아도 된다. 대머리들이 부르는 지겨운 캐럴도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이제 징글벨의 전주만 흘러나와도 토가 나올 거 같다.

“응……. 자기도 와?”

아직 졸려서 웅얼대듯 물었다. 킹이 내 볼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답했다.

“허니가 재롱부리는데 내가 보지, 그럼 누가 봐?”

그런데, 요정 옷을 버려도 괜찮다고 했다고? 갑자기 너그러워졌을 리 없다. 평소 귀찮게 굴면서도 요정 옷 입은 날 보겠다고 본인 옆에 떨어져 있을 수 있게 했다. 이제 나한테 흥미가 떨어졌나? 그렇다고 보기엔, 지금 내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은 여전히 과했다.

“누가 뭐 줘도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내가 주는 것만 먹어야 해. 사탕 준다고 따라가지 말고. 알았지?”

귀엽다, 귀엽다 하더니 진짜 날 5살짜리로 아는 건가. 나는 귀찮아서 대강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킹은 “대충 답하지 말고.”라며 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나는 몸을 일으키고 킹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알았어. 누가 뭐 줘도 안 먹고 사탕 줘도 안 따라갈게. 됐어?”

“됐어.”

킹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킹 때문에 일찍 깬 나는 빨리 씻은 후 킹과 식사를 하러 갔다. 교도소 곳곳 더러운 종이들이 붙어있었다. 나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것이라지만, 누가 봐도 누추했다. 크리스마스보단 핼러윈 같았다.

식당에 제법 일찍 도착했지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자리 하나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휴 사토의 무리였다. 휴 사토는 가장 가운데 테이블에서 가장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고 그 주변에 덩치들이 휴 사토를 둘러싸고 있었다. 킹은 휴 사토를 보지도 못한 척 지나치고 식판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고마워, 자기.”

익숙하게 킹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킹은 눈을 찡긋대며 한 번 웃고는 제 식판을 들었다. 그리고 음식을 배식받았는데, 오늘의 식사는 노란 치즈가 올라간 빵과 멀건 수프, 오븐에 구운 닭 다리 두 개였다. 온전한 동물의 다리라니. 크리스마스라고 제법 힘을 줬나 보다.

제법 기대하며 자리로 가는데 갑자기 내 식판이 저 멀리 날아갔다. 휴 사토의 무리 중 하나가 발을 뻗어 내 식판을 찬 것이었다. 아, 씨발. 내 밥…….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로 킹을 바라봤는데 킹은 웃고 있었다. 휴 사토의 이름만 나오면 얼굴을 팍 구기는 사람이 말이다. 킹은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등을 문지르며 달랬다.

“내 거 먹어, 이쁜 얼굴에 주름 생겨.”

왜 저러지.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휴 사토의 표정도 이상했다. 킹은 평소와 달리 먼저 휴 사토에게 말을 걸었다.

“사토. 얼굴이 영 아니네. 몸 좀 챙겨. 밥 잘 먹고.”

답지 않게 휴 사토에게 걱정의 말을 건넨 킹은 휴 사토에게 세상 잘생기게 웃어준 다음 내 어깨를 감싸고 다시 걸어갔다. 대체 왜 이러지.

***

당장 오늘이 공연 날이었지만 대머리들과 나는 여전히 오합지졸이었다. 그 공연에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냥 교정국 홍보용 영상과 사진을 찍을 빌미에 불과했지만 대머리들은 무척 긴장했다. 어떻게 화장품이라도 구해서 얼굴에 바를 기세였다. 그렇다고 얼굴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나는 무대에 오르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저번에 변기가 떨어져 나갔던 칸은 문짝도 아예 떼어 내버린 상태였고 그래서 아주 꼴이 흉했다. 바닥에 흥건했던 물과 오물들은 치웠지만 변기는 아직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변기가 붙어 있던 벽은 다른 벽보다 얇아져 너덜거려 보였다. 오늘 교정국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온다고 온갖 곳을 다 쓸고 닦게 했으면서, 이곳은 그대로였다. 뭐, 교도관과 외부 손님을 위한 화장실이 따로 있긴 했으니 그곳을 쓰겠지. 나 같아도 재소자용 화장실을 쓰고 싶진 않을 것 같다.

물로 대강 머리를 손질하고 강당 뒤로 가자 대머리들이 난리였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직 시간 많잖아.”

나는 무대에 서서 길게 말을 늘어놓는 교도소장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교도소장의 말은 지금 5분 넘게 이어지는 중이었고 앞자리에 정복을 입고 앉은 사람들을 포함해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정복을 입은 그자들이 교정국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우리 또, 교정국에서 특별히! 저희 내루 교도소를 방문해 주셨는데요, 또 저희 교도소가 또, 재소자들의 재활과! 교정에! 힘쓰는 곳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불교 신자인 우리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캐럴을 준비했습니다. 또 다른 교도소에서는 이런 거 찾아보기 힘드실 겁니다, 또. 어느 교도소에서 어느 불자들이 캐럴을 부르겠습니까. 예?”

대머리들을 소개하긴 했는데 또 자기가 맡은 교도소 자랑으로 빠져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교도소를 자랑스러워하면서 교도소 꼬락서니는 왜 이 모양이람.

아무도 웃지 않는데 혼자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교도소장은, 밑에서 말을 이제 끊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교도관을 발견했고 표정이 잔뜩 굳은 교정국 사람들도 보았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그, 그럼. 이제 우리 재소자들을 만나 볼까요?”

드디어 대머리들의 차례를 불렀다. 그러자 대머리 하나가 다른 놈들을 불러 모았다.

“야야! 긴장되니까 이거 한 번씩 빨고 가.”

그건 저번에도 가져왔던, 작은 지퍼 백에 담긴 흰 가루였다. 그놈들은 둥글게 모여 보이지 않게 벽처럼 막고 손에 가루를 올려놓고 급하게 흡입했다. 미친놈들. 그리고 교도소장이 이쪽을 바라봤다. 나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아직도 모여 킁킁대는 놈들을 다리로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놈들이 무대 밖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걸어가는 폼이 이상했다. 비틀거리더니 가장 앞에 서 있던 놈이 고꾸라졌고, 차례로 도미노처럼 대머리들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무대 위로 쓰러졌다.

“…….”

정적이 흘렀다. 아직 마이크를 잡고 있는 교도소장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 우리 재소자들이 또 이벤트로 이렇게! 장난을 또 치네요! 이제 일어나는 게 어때요? 일어납시다. 예?”

교도소장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대머리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무대 바로 밑에 있던 교도관 하나가 올라와 대머리들을 살폈다. 그리고 대머리들의 코 밑에 묻은 흰 가루를 자세히 보더니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외쳤다.

“청산가리인 것 같습니다! 구급차 불러!”

무대 위는 쓰러진 대머리들이 채우고 있었고 나는 아직 나가지 않아 커튼 뒤였다. 아. 청산가리라니. 아까 흡입한 게 청산가리였나 보다.

추리 소설에서 아몬드 냄새를 맡고 청산가리인 걸 알아낸다는데, 그놈들은 모두 개코인가 보다. 무슨 냄새가 나는지도 몰랐다. 나는.

공연 안 해도 되는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대머리들이 진짜 자살한 걸 아닐 테고, 저번 것처럼 분명 휴 사토에게 약을 샀을 텐데, 휴 사토가 약 대신 청산가리를 팔았을 리는 없다. 제 무덤 파는 꼴이니까. 그럼 역시 범인은 관객석 어두운 곳에 벽을 기대고 웃고 있는 킹이었다. 킹과 나 사이의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킹은 날 발견했고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킹이 입을 벙긋댔다.

‘내 말 잘 지켰어?’

고개를 끄덕거리자 킹은 그러자 잘했다고 입을 다시 벙긋댔다. 저러려고 바빴구나. 이런 짓을 벌이려고 내게 관대한 척 굴고 몇 번이나 낯선 것을 먹지 말라고 다짐을 받아낸 것이었다. 휴 사토에게도 나름 마지막 아량을 베풀었고. 아니, 아량이 아니라 더 빡치게 하려고 그런 거겠지.

아직 무대에 서 있는 교도소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교정국 사람들은 얼굴을 굳힌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필 교정국 중요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저 교도소장도 참 박복했다.

그리고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잉!

기상을 알리거나 공지를 할 때 울리는 사이렌 정도가 아니었다. 무척 날카로워 위험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교도관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땀을 흘리며 숨이 차 헉헉대고 있었다. 그 교도관은 소리를 질렀다.

“탈옥수가 발생했습니다!”

저렇게 크게 알릴 만한 일이 아닐 텐데. 진짜 당황했나 보다. 교도소장이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 그놈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며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교도관은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다급하게 교도소장에게 답했다.

“그, 며칠 전 화장실 변기가 떨어졌는데 거기 벽이 부식되어 많이 약해져 있었나 봐요……. 거길 뚫고 나갔습니다.”

이것도 킹이 계획한 것인가? 그러나 킹의 얼굴엔 흥미롭다는 표정만 걸려 있었다. 킹이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내 평생 가장 개판인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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