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한 발 뒤에서
“하….”
블란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누워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머리를 옥죄는 듯한 두통에 눈을 질끈 감으면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누아에게 라핀을 내놓으라며 찾아갔던 날, 출산의 장면을 목도했던 기억이.
아이를 낳느라 탈진한 라핀의 옆에는 손대기도 무서울 만큼 작은 생명체 둘이 있었다. 라핀만큼 뽀얀 털을 가진 늑대와 누아만큼 시커먼 털을 가진 토끼가 작은 생명력을 가지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누구의 아이일지는 저와 누아 중에 둘 중 하나, 반반의 확률이었기 때문에 혹여 라핀이 그의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차하면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지 않느냐며 고집을 부리려고 했다. 인간들처럼 유전자 검사를 할 만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떤 아이가 나오든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라핀이 낳은 두 아이는 누가 봐도 누구의 아이인지 명확했다. 노란 눈, 검은 털. 누가 봐도 누아를 쏙 빼닮은 모습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누아의 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블란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불리한 상황이긴 했어도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라핀의 마음.
라핀이 누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시 늑대 소굴로 데려올 명분이 있었다. 그게 누아와 한 약속이었고, 라핀이 누아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라핀이 정신을 차리면 누아를 좋아하느냐고 직접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흐으, 누, 누아 님….’
출산 직후 토끼 모습의 라핀은 의식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누아의 체취를 맡은 듯, 눈을 감은 채로 더듬더듬 누아의 품에 안겼다.
‘라핀. 다 끝났어. 잘했어.’
그에 누아는 제가 본 적 없는 따스한 얼굴을 하고 라핀을 안아주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라핀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제가 연인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라핀에게 누아에 대한 마음이 어떠냐고 물은 것도 아닌데,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뒷걸음질 치듯 도망친 것이 몇 달 전의 일이다.
그날 이후 블란은 처음으로 라핀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처음 좋아한 상대를 포기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도 많이 지쳐 있던 상태였다.
라핀을 누아에게 빼앗기다시피 한 순간부터 불면증은 계속 이어졌고, 라핀을 찾느라 온 산을 다 헤집고 다녔고, 아이를 지우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눈에 띄는 방법을 죄다 사들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라핀은 제 곁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이밍만 좋았더라면 라핀이 제 것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버릴 수가 없었다.
늑대 소굴에서 도망친 라핀을 제가 먼저 발견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누아가 어떻게 라핀을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저보다 싸가지 없는 새끼였다.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새끼, 재수 없는 새끼, 시커먼 새끼….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놈이었다.
라핀은 그런 누아에게도 마음을 연 것 같으니, 블란은 제게 기회만 있었더라면 라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블란은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핀이 누아의 아이를 낳은 것과 누아와 라핀이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버렸지만, 계속 생각이 났다. 아직 라핀에게 확답을 들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방구석에만 있는 건 저답지 않았다.
라핀에게 확답을 들어야겠다. 늑대의 종족 특성상 다른 이의 반려를 넘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라핀이 누아가 싫다면…,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블란은 빠르게 늑대 소굴을 벗어나 누아의 거처를 향해 내달렸다. 부정적인 대답을 들을까 불안했지만, 어느 작은 희망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왜 아무도 없어.”
누아의 거처에 도착했지만, 문을 두드려도 안에선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체취가 진하게 묻어 있는 걸 보아 방금 외출한 것 같았다. 블란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만은 않아서, 둘을 찾아 바깥을 좀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둘이 같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이왕이면 라핀을 독대했으면 좋겠다. 누아 놈은 얼굴도 보기 재수 없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동굴 바깥으로 나왔는데, 흰 눈 위로 늑대 발자국과 이상한… 줄무늬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자국이지? 인간들의 썰매 자국이랑 비슷한 듯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어디선가 들리는 맑은 웃음소리에 블란이 고개를 돌렸다. 라핀이나 누아의 것 같진 않고, 아이 특유의 낭랑하고 앳된 웃음소리였다.
아기가 무서운 것도 모르고 떠들고 다니는군. 배가 고팠더라면 잡아먹을 생각부터 했겠지만 그렇진 않았다. 근처에 인간이 있는 것 같은데, 아기가 눈에 띄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을 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블란은 본능적으로 눈 쌓인 침엽수 뒤로 몸을 숨겼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해서 제 신경을 밟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아와 라핀, 그리고 저번에 보았던 아이 둘까지. 근심 하나 없는 것처럼 동물 모습으로 썰매를 타고 놀고 있었다. 제가 들었던 웃음소리는 뒤에 타고 있는 작은 아이들이 낸 소리였던 것 같다.
라핀과 누아를 만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도 됐지만, 블란은 왜인지 돌덩이처럼 굳어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가 아는 누아는 늑대의 우두머리 역할은 그럭저럭 잘했지만, 대체적으로 이기적인 새끼였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제 마음 하나 모르는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라핀과 아이 둘을 썰매에 태우고 내달리고 있다. 같은 늑대의 시선에서 보기에는 봉사처럼 보였다.
블란은 썰매를 인간들을 따르는 개들이나 하는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행위 같지 않았다. 그들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썰매에 올라타 순수하게 웃고 있는 라핀의 모습에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추악한 집착과 사랑으로 라핀을 빼앗아 오고 싶다고 한들, 블란에게는 라핀이 첫사랑이었다. 제 사랑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앗아가고 싶을 만큼 심사가 뒤틀린 놈은 되지 못했다.
***
블란은 그날 또,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저답지 않은 일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도저처럼 나아가고 얻어내고야 마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남의 반려를 빼앗는 게 부도덕한 일이라 그런 걸까? 그런 양심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블란은 매일같이 누아의 별장 주변을 맴돌며 스토커처럼 라핀과 누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란은 늑대 소굴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아가 라핀을 집에 가둬둘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라핀과 자주 외출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핀 홀로 남는 때를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작은 토끼이다 보니 누아는 한시도 라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둘만의 독대는 기대에서 버려지고 있을 때였다.
“그만 좀 따라다니지?”
누아의 말에 그의 곁에 있던 라핀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누아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블란이 있어.”
누아의 혼잣말 같은 말에 라핀이 당황해서 묻자 누아는 정확히 블란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블란은 여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한때 검은 늑대 무리를 다스리던 우두머리였다는 것이 허울만은 아니라는 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정확했다.
블란은 어쩔 수 없겠다 싶어 숨는 것을 그만뒀다. 커다란 나무 뒤에서 은빛 늑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라핀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둔한 라핀. 블란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데, 누아가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라핀을 몸 뒤로 숨겼다.
“내 뒤꽁무니나 쫓아다닐 정도로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뭔 속셈이야?”
“저번에 이야기, 안 끝났잖아.”
“…….”
블란의 말에 누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은데, 약속한 것이라 차마 그러지 못하는 눈치였다.
블란은 그런 누아를 무시하고, 누아의 뒤에 숨은 라핀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수인 모습이 아닌 토끼인 상태라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라핀의 모습이 잘 그려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 떨고 있겠지.
블란은 겁에 질린 라핀의 모습을 보는 것도 너무나 좋아했지만, 오늘은 겁먹게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블란은 최대한 다정하게 목소리를 부드럽게 다듬으며 말했다.
“라핀, 나랑 얘기 좀 하자.”
“…….”
숨어 있던 라핀은 시선을 올려 누아의 눈치를 살폈다. 누아가 착잡한 표정만 지을 뿐 말리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핀이 영문도 모르고 앞으로 나왔다.
늑대의 눈에는 한없이 작게만 보이는 라핀이 살짝 앞으로 나왔다. 근래 둘을 몰래 쫓아다니며 수없이 눈에 담았지만, 가까이서, 이렇게 정면에서 보니 심장이 빠듯해지고 쿵쾅거렸다.
역시 라핀을 포기하기가 싫다. 이렇게 예쁜 녀석을 어떻게 포기해.
블란이 라핀에게 더 다가오라며 다정하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방황하기에 블란이 먼저 말문을 트고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데, 라핀이 뜬금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블란 님…. 죄송해요.”
“…….”
온화하게 풀어져 있던 블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잘 지냈냐고, 누아랑 지내는 거 힘들지 않았냐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죄송하다니. 거절당한 느낌에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블란은 표정이 싸늘하게 굳을 뻔했지만, 라핀이 제 얼굴을 보고 겁먹을까 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뭐가?”
“예전에… 제가 당근 구해 달라고 하고 도망쳤잖아요.”
라핀이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목소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라핀이 기억하는 블란과의 마지막 만남은 제사하는 날이었다. 그날, 라핀은 블란에게 배가 고프다는 말로 당근을 구해 달라고 하고,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라핀이 푹 고개를 숙이며 다시금 사과하자, 블란은 그제야 얼어붙었던 표정을 풀었다.
“봐줄게.”
“…….”
블란의 점잖은 말에 라핀이 눈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힐끗, 들어 올렸다.
블란의 시야에 라핀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들어왔다. 그날, 그런 식으로 바람맞혔으니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벌을 줘야겠다며 별별 트집을 다 잡고, 이런저런 귀여운 짓을 시켰을 터다. 그렇지만 오늘의 블란은 그러지 않았다.
“봐줄 테니까, 나한테로 와.”
“…네?”
“누아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거 알아. 이번에 돌아오면 정말로 잘해줄게. 억지로 몸을 겹치지도 않고, 매일 맛있는 음식 구해다 주고 사랑해줄게.”
블란은 라핀을 못 보는 동안 많이 후회했다. 평판을 신경 쓰고, 라핀과 함께할 거처를 구하겠다고 시간을 끌다가 누아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제가 일 처리만 더 빠르게 했더라면 누아를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도망친 라핀을 제가 먼저 잡았더라면. 그러기만 했어도 제가 라핀을 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라핀이 제게 돌아온다면 잘못한 것쯤이야 봐주고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생각이었다. 둔해 빠진 성격과 자존심 때문에 사랑 표현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누아보다는 제가 더 예쁘게 사랑해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블란이 그렇게 생각하며 너그러이 마음을 열었지만, 라핀은 무언가 불안하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힐끗거렸다.
“저는….”
“누아 눈치 살피지 말고 나만 봐.”
블란은 그렇게 말하며 누아를 한번 노려봤다. 하필 누아가 라핀의 바로 뒤에 있는 바람에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이래서야 라핀이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수가 있나. 블란은 눈치가 있으면 좀 빠지라고 누아에게 말없이 눈짓을 줬지만, 그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이빨을 으르렁 드러내며 누아와 묘한 신경전을 이루고 있는데, 라핀이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뭐?”
차근차근 대답을 기다렸건만, 라핀에게서 오는 대답은 힘 빠지는 것이었다.
왜지? 누아가 바로 뒤에 있어서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블란은 한쪽 눈썹을 움찔 떨며 그게 뭔 개소리냐며 화를 낼 뻔했다가, 몸을 수그리고 라핀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라핀, 누아가 무서워서 그래? 저 녀석 눈치 같은 거 볼 필요 없어. 영영 저 새끼 안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고. 응?”
“블란 님, 저는… 누아 님이랑 같이, 살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라핀은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말랑하기만 하고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토끼였는데, 제법 단호했다.
누아와 같이 있으면서 세뇌라도 당한 걸까? 블란은 애써 다정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순식간에 갈피를 못 잡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 새끼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억지로,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거잖아.”
블란은 라핀이 누아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든, 아니면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든. 자의로 함께하는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며칠 전에 라핀과 누아, 그리고 아이 둘까지 썰매를 타고 기쁘게 뛰노는 모습을 봤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라핀의 입으로 누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단지 라핀을 늑대 소굴로 데려오기 위한 수단으로 묻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누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받고 싶었다.
블란은 그렇게 간절하게 대답을 바라며 물었지만, 라핀은 힘없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녜요….”
“…….”
“저 누아 님 좋아해요.”
“…….”
라핀의 솔직한 고백에 블란은 심장이 바닥까지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핀의 뒤에 선 누아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부드럽게 표정을 허물었지만, 좌절감에 휩싸인 블란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제게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하는 라핀의 모습만이 시야에 가득 찰 뿐이었다.
“그러니까… 블란 님도 좋은 짝 만나세요.”
라핀이 말을 마치며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라핀은 블란에게 이런저런 일을 많이 당했었다. 미래의 행복을 빌어줄 만큼 좋은 사건들은 아니었지만, 블란이 저를 좋아했던 것만큼은 잘 알았다.
여전히 블란이 왜 저를 좋아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이 잘못된 게 문제였지 마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라핀도 제게 못되게 군 누아를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이렇게 됐으니까….
라핀은 블란을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었으나, 진심으로 그가 저와 같은 토끼가 아니라 어여쁜 암컷 늑대, 아니면 수컷 늑대라도 좋으니 같은 종족끼리 만나 마음고생하지 않는 평탄한 사랑을 하길 바랐다. 동등한 관계로 만나는 사랑 말이다.
“…….”
라핀이 말을 마친 후, 블란은 망부석처럼 굳어 입술 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라핀은 그런 블란의 눈치가 보이는 듯했지만, 누아는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라핀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블란은 돌아가는 둘을 억지로 잡아 세울 수도 있었으나,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라핀의 말이 명확하게 끝을 의미했기에.
블란은 어느새 혼자 남아 먼 하늘을 바라봤다. 겨울의 공기는 차디찼고, 칼로 자르듯 깔끔하게 잘려버린 관계에 마음도 차가웠다.
하지만 이질적이게도 눈시울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끊긴다고 한 번도 마음 아파해본 적도, 울어본 적도 없었다. 능구렁이처럼 사교성도 있는 편이었고 발도 넓은 편이었지만, 지금까지 관계들은 대부분 끊긴다고 아쉬워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다수가 블란에게 아첨하며 갑과 을이 분명한 관계였으니까.
그런데….
이 작은 토끼가. 먹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꾸만 눈에 밟히고 예쁘다고만 생각한 토끼가 제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줄이야. 누아에게 져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다도 실연의 슬픔이 더 커다랬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여태까지 모든 이들이 블란을 떠받들었고, 이성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기에 제가 점찍은 라핀과는 당연히 잘 이뤄지리라고만 생각했다.
누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곤 했지만, 놈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라핀이 그딴 놈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블란이 탄식하듯 숨을 크게 터트리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겨울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블란은 처음 겪어 보는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런, 래빗, 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