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토끼와 늑대 사이
손을 다치는 바람에 누아는 며칠간 사냥을 나가지 못했다. 다행히 누아가 식량을 미리 비축해둔 덕분에 문제는 없었다.
손이 나을 때까지 누아와 라핀은 온종일 함께 있어야 했는데, 누아가 라핀과 생활 시간까지 완전히 맞추는 바람에 함께하는 시간은 더더욱 길어졌다.
온종일 좁은 공간에 붙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마음을 자각해서 그런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가끔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올라서 곤란해지긴 했지만, 이전부터 계속 열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던 터라 의심받진 않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던 누아가 벌떡 일어나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오늘은 꼭 씻어야겠어.”
“네?! 안 돼요, 상처에 물이 들어간다고요.”
누아가 씻고 싶어 하는 것이 오늘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상처가 난 바로 다음 날부터 줄곧 그는 씻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라핀은 매번 그를 막아섰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샴푸가 들어가면 더 큰일이 날 테니 악화시킬 일은 가능한 안 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누아는 며칠 씻는 것을 참았지만, 총상은 깊었고 하루 이틀로 낫는 상처가 아니었다. 결국 누아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고 말았다.
라핀도 덩달아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누아를 붙잡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참고 있었는데, 이제 안 되겠어.”
“아니…. 잠깐만요. 아, 안 씻어도 아무 문제 없잖아요. 조금만 더 참을 수 없어요?”
수인 세계에서는 씻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았다. 라핀은 바깥에서 회색 토끼가 아닌지 의심받을 정도로 못 씻은 적도 꽤 있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 물에 쉽게 못 들어가는 특성 때문이긴 했지만, 안 씻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라핀이 나을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보라는 식으로 회유했지만, 누아는 난감하다는 듯이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문제가 될 게 왜 없어….”
“왜,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제발 내 체면도 생각해줘.”
“체면이요?”
체면? 라핀은 그의 말에 그의 모습을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를 귀엽다고 생각할 만큼 콩깍지가 단단히 씐 라핀의 눈에 누아의 모습은 아무래도 상관없이 잘생겨 보였지만, 평소보다는 꼬질꼬질하긴 했다.
늑대 우두머리 체면에 못 씻는 게 민망할 수도 있으나, 어차피 나가지도 않으니 못 씻은 그를 보는 건 자신이 전부였다. 그런데 웬 체면? 챙길 일도 없으면서.
라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누아가 무언가 억울한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잊기라도 한 거야?”
“…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라핀이 멍하니 되묻자, 누아가 꼭 두 번 말해야겠냐는 듯 한숨처럼 대답했다.
“난 너한테 이런 모습 보이는 게 싫다고. 사냥도 못 하고, 더럽고…. 고백도 인정 못 받았는데, 추한 모습으로 점수 깎아서 좋을 게 뭐가 있냐고.”
“어….”
짐작도 못 한 이유에, 라핀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일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찝찝하다거나 간지럽다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저한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씻으려고 하는 거였다고?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찮고 귀여운 이유였다. 대번 마음이 부드러워졌지만 라핀은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이유라고 해도 씻느라 상처가 덧나는 건 싫었다.
“저, 전혀 안 추하니까 괜찮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빈말할 필요 없어. 나도 거울 보면 내 모습이 어떤 꼴인 줄 안다고.”
“진짜 아닌데….”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건만, 누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거울 너머로 제 모습이 보이는 터라 더 그런 듯했다.
라핀이 어떻게든 말리려고 노력했지만, 누아는 더는 저를 말릴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갑자기 시야를 덮치는 노골적인 광경에 라핀은 불에 덴 것처럼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그의 상반신이 이미 뇌리에 박혀버린 지 오래였다. 라핀은 얼굴로 화닥닥 열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애써 ‘그는 환자다’라는 생각으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정말 씻겠다고요? 한 손으로만 씻는 게 가능하겠어요? 그것도 왼손이잖아요.”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
사실 꼼꼼하게 씻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한 손으로 씻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불안했다. 라핀과 평화로이 시간을 보낼 때도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사용하려고 할 때가 있던 누아였다. 씻을 때도 그럴 염려가 있었다.
이 정도 꾀죄죄한 것으로는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해봐야 통하지를 않으니…. 설득할 만한 게 없을까? 방법을 궁리하던 라핀은 이전에 누아가 저를 씻겨줬던 것을 떠올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갑자기 언성이 오르는 것에 놀라 라핀이 움칠 어깨를 떨자, 누아가 뒤늦게 제가 큰 소리를 냈다는 걸 인식했는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 그런데… 씻는 걸 도와주겠다고? 머리도 감아야 하고, 샤워도 해야 하는데?”
“네, 네…. 둘 다, 한 손으로는 힘들잖아요.”
“…왜?”
“왜냐니….”
방금 이유 말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제게 이유를 묻는 누아는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간 주름이 깊어지고 짙은 눈썹이 경사져 있어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혹시 제가 너무 이상한 이야기를 했나? 환자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누아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토끼한테 도움의 손길을 받는 늑대라니. 게다가 저한테 이런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씻는다는데, 굳이 씻겨주겠다고 했으니까…. 어린아이도 아닌데 돌봄 받는 것이 싫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라핀은 빠르게 의견을 굽히며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아니! 그럴 리가. 해줘.”
라핀이 고개를 수그리며 사과하자, 누아가 서 있다가 빠르게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라핀의 꼼지락거리는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갑자기 해달라고? 분명 화나 있지 않았나?
제가 잘못 본 건가 싶어졌을 때, 누아의 등 뒤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풍성하고 시커먼 늑대 꼬리가 기분 좋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
라핀은 얼떨떨하게 두 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그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화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입꼬리가 씰룩쌜룩 올라가고, 표정이 누그러져 있었다.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이 있음에도 기분 좋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걱정했던 자존심 같은 건 하나도 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라핀은 그저 그의 손을 보호하기 위해 방법을 하나 내놓았을 뿐인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하니 오히려 부담스러워졌다.
나, 남을 씻겨주는 거 처음인데….
씻겨주는 걸 받아보기만 했지 누군가를 씻겨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라핀은 잘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누아의 손에 감싸인 손을 꽉 말아 쥐었다.
***
라핀과 누아는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들어서는 동안, 라핀은 누아를 씻기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려 노력했다. 이전에 누아와 블란이 저를 씻겼을 때와 비슷하게 해보려고 하는데, 대부분이 제가 기절해 있을 때라 그런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없었다.
음…. 그냥 알아서 해야겠다.
라핀이 팔을 걷으며 물 온도부터 맞추고 있는데, 누아가 라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옷, 젖을지도 모르는데 벗는 게 어때?”
“아…, 옷이요?”
라핀은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옷이야 젖으면 다른 옷을 입으면 된다지만, 라핀은 자신이 누아의 옷을 빌려 입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에도 남의 옷을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았다.
라핀은 임신 때문에 살이 오른 몸을 그에게 보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상의와 하의를 탈의했다. 누추하게 속옷만 입은 민망한 꼴 역시 그의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함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라핀이 마저 물 온도를 맞추려고 하자, 라핀과 함께 옷을 벗고 있던 누아가 라핀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라핀, 속옷도 젖을 것 같은데 벗지 그래? 신경 쓰이면 가운이나 수건 걸쳐도 되고.”
“아….”
씻겨주는 게 그렇게 물이 튀는 작업인가? 아닐 것 같았지만, 누아는 저를 씻겨준 경험이 다수 있었다. 경험자의 말을 따르는 게 나을 듯 보였다.
수건으로 하반신만 가리고 있는 누아의 모습은 멋있었지만, 저는 그와 달리 볼품없는 몸뚱어리를 가졌기에 가운으로 최대한 가리는 편이 좋았다. 라핀은 커다란 사이즈의 하얀 가운을 걸치고 허리끈을 동여맨 후, 누아에게 확인을 받았다.
“이제 됐죠?”
“응, 그리고 혹시 힘들면 바로 말해. 내가 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말고.”
“알겠으니까, 허리 굽혀 볼래요? 아니다, 욕조 안에 들어가서 고개 젖히면 쉬울 것 같아요.”
라핀이 좋은 생각이 났다며 하얀 욕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누아와 라핀은 체격 차이가 크게 났고, 머리를 다 감겨줄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도 힘들 터였다. 그러니 욕조 안에 들어가서 머리만 젖히고 있으면 꽤 용이할 듯했다. 제가 기절했을 때에도 보통 욕조에서 씻겨줬던 기억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반신에 수건 하나만 걸친 채 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라핀은 구석에 있던 욕조 의자를 끌어다 욕조 근처에 앉으며 누아에게 말했다.
“편하게 누우시고, 머리를, 음, 뒤로 젖혀주세요.”
“응.”
라핀의 말에 누아가 순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앞머리가 넘어가면서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라핀은 적당히 온도를 맞춘 물로 누아의 머리를 적시며,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촉촉이 젖은 검은 머리칼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러고 보면 사냥을 함께 나가던 때에 늑대 모습을 한 그의 등에 업혔을 때도 복슬복슬하다고 생각했었지.
그의 늑대 몸에 올라탔던 일이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서로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라핀은 예전 일을 회상하다가, 그의 머리가 온전히 다 젖은 것을 알아채고 손에 샴푸를 소량 덜어냈다. 그리고는 며칠간은 씻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두피를 긁어주며 풍성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거 맞겠지? 누아가 별말 안 하는 걸 보면 괜찮은 듯한데, 요즘의 그라면 불편한 것쯤은 참고도 남았다. 총을 맞아 오고도 안 아픈 척하는 미련한 늑대였으니까.
라핀은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위로 젖히다가, 힐끗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는 누아의 모습이 퍽 편안해 보였다. 불편한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됐는데, 의외로 제가 잘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바닥났던 자신감이 차올랐다. 라핀이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그의 머리를 구석구석 감겨주는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던 누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라핀.”
“네? 뭐 불편하세요? 혹시 제가 너무 세게 긁었나요?”
“그런 건 아니고…. 고맙다는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
멈칫, 머리를 감겨주던 손이 멈춰 섰다.
근래 누아에게서 미안하다든지 고맙다는 말을 평소보다 자주 듣긴 했지만,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런 말은 당신과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농담처럼 넘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굳어버린 것처럼 입 한번 벙긋할 수 없었다.
라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누아가 곤히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뜨면서 라핀과 두 눈을 마주했다.
늘 포식자처럼 무섭게만 보이던 노란 눈은 어느새 태양처럼 따스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굳어 있는 라핀을 본 뒤 작게 쓴웃음을 짓고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이렇게 머리 감겨주는 것도, 너한테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을 텐데.”
“…….”
라핀은 입술 안쪽의 살을 잘끈 깨물다가, 머리를 감겨주던 손을 재개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다지, 별생각 없어요. 누아 님도 저 아플 때 씻겨주고 간호해 주셨잖아요.”
“그때랑 지금이랑 같지가 않잖아.”
그렇지만 누아는 눈을 감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누아는 아무리 제가 비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와 지금이 같은 상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누아가 라핀이 아플 때 간호하며 씻겨준 것은 라핀이 저와의 정사 후에 앓아누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책임감을 조금 느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전에도 누아는 라핀을 씻겨주는 건 귀찮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씻기고 있으면 은근한 만족감이 피어올랐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라핀에게 사심이 있었던 거고, 그걸 충족하기 위해 꼼꼼히 씻겨줬던 걸지도 몰랐다.
엄연히 말하면 누아도 라핀을 위해 사과를 구하다가 다친 것이긴 했지만, 비닐하우스의 사과를 훔친다는 위험한 방법을 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때와 지금은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누아가 단호하게 반박했지만, 라핀은 물러나지 않았다.
“저, 저한테는 다르지 않아요…. 제가 원해서 해드리는 거고 상처 덧나는 것도 싫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저도 해, 해드릴 수 있어요.”
라핀도 누아가 왜 다르다고 말하는지는 알았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그의 머리를 감겨주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가 바라서 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를 좋아하니 챙겨주고 싶은 것이 당연했지만 비단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크게 앓았을 때, 라핀은 누아의 간호를 받으며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었다. 그때는 누아를 좋아한다는 자각이 그다지 없었음에도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아빠한테 간호를 받았던 앳된 추억이 떠오를 정도로 다정했었다.
지금은 나쁜 식으로 연이 끊긴 부모님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라핀은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기에 아주 조금이나마 사랑받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아플 때 돌봐줄 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 아니까…. 제가 누아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이 정도는 해줬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누아가 제게 미안해하거나 고맙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부정했지만 누아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라핀이 생각하는 누아는, 근래 들어서 제게 많이 져주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제 말에 수긍해서 대꾸하지 않는 듯 보였다.
거품질을 마친 라핀은 샤워기 물을 틀어 하얀 거품을 씻겨 내렸다. 남의 머리를 감겨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대신 임신한 몸이라 그런지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으려니 몸이 찌뿌둥했다.
라핀은 기지개 켜듯 허리를 쭉 펴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며 말했다.
“이제 다 됐어요. 일어나세요.”
“라핀.”
“네?”
뭐 아직 거품이 덜 닦인 부분이 있나. 라핀이 움직임을 멈추고 누아를 내려다보자, 그가 노란 눈으로 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쳐다보고만 있담? 부담스러움에 라핀은 허리를 다시금 굽히고 그의 머리를 이곳저곳 살피며 말했다.
“뭐야, 뭐 불편해요? 어디 안 닦였어요?”
“응.”
“어디….”
라핀이 그의 머리를 살피고 있을 때, 누아가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라핀의 양쪽 뺨을 손으로 감쌌다.
굳은살이 가득한 거친 손이 제 뺨을 감쌌다고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라핀은 얼굴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라핀이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을 때는 입술이 맞물린 뒤였다. 쪽, 하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보드라운 입술이 새처럼 가볍게 맞부딪혔다.
“이게 무슨…, 읍!”
라핀이 깜짝 놀라 허리를 펴려고 했지만, 씩 웃은 누아가 입술을 다시 맞춰오는 것이 더 빨랐다.
꽉 다물린 입술을 벌리고 질척한 혀가 침투했다. 제집 드나들듯 깊게 쳐들어온 혀는 난잡하게 뒤섞였다. 멀쩡하던 호흡이 순식간에 가빠졌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읏, 으응…!”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평소라면 누아의 가슴팍을 밀어낼 텐데, 자세가 이상하다 보니 어딜 밀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이 뒤늦게 욕조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누아가 더 세게 라핀의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겨우 엉덩이를 달싹이는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자세는 한없이 불편했고, 얼굴이 거꾸로 마주한 상황이라 낯설고 이상했다. 제 입안을 유린하는 테크닉 또한 평소보다는 덜했다. 그렇지만 상황만으로도 심장 언저리가 오싹했다.
“앗, 잠, 깐…! 하아, 학…!”
머리에 피가 몰리고 숨이 막혀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가 되어서야 누아는 입술을 놓아줬다. 그렇지만 입맞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괜히 라핀의 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수인화를 하고 있고 가볍게 깨무는 것이라지만, 늑대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이 닿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따가움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누아가 저를 잡아먹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본능적인 두려움에 오싹한 기분 또한 함께였다.
“앗, 으, 아, 아파요…!”
“…….”
라핀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누아가 나른함에 젖어 있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라핀의 얼굴을 놓아줬다. 라핀은 놓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바로 하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키스는 갑자기 왜 한 것이며, 턱은 왜 깨문 거지? 말 대신 표정으로 묻자, 누아가 기습 키스한 일은 없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네 탓이야.”
“…네?”
내 탓이라고? 내가 뭘 했는데?
라핀은 대번 어이없다는 표정이 됐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그의 머리를 감겨준 것밖에 없었다. 유혹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라핀 나름의 논쟁을 한 것이 전부였다. 남 탓을 해도 너무 억지 아닌가.
“그게, 무슨…!”
라핀이 한 소리 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누아가 욕조에 기대고 있던 몸을 대번 일으켰다. 방금까지도 그의 세미 누드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몸을 일으키면서 그의 전신이 대번 시야에 들어왔다.
근육으로 옹골찬 몸, 복근이며 허벅지 근육이며 사냥으로 단련된 몸, 그리고… 수건 아래로 음영을 드리운 성기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확실히 발기한 것이었다.
“헙…!”
놀라서 말이 쏙 들어갔다. 왜 저렇게 발기한 거야? 저도 그와의 입맞춤으로 몸에 열이 후끈 달아올랐다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라핀은 누아가 시도 때도 없이 발정이 나는 수컷 늑대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저렇게 흥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입맞춤하기 전부터 저런 상태였을까? 그의 머리를 감기는 데만 온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그의 아랫도리 사정은 살피지 못했었다.
라핀이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내리까는데, 누아가 긴 다리로 가뿐히 욕조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새 앉아 있는 라핀의 바로 앞에 선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쁘게 굴지 마. 아무리 양심 없어도, 임신한 몸은 못 건드리겠으니까.”
“…예?”
지금 누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핀은 그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빠르게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했다. ‘예쁘게 굴지 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고장 난 것처럼 머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라핀은 입술을 몇 번씩이나 달싹이다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따졌다.
“제, 제가 언제 예쁘게 굴었다고 그래요?”
“모르는 게 더 문제야.”
“알려줘야 알죠….”
라핀이 소심하게 반박했지만, 누아는 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떻게 그걸 모르냐는 듯이.
라핀은 누아에게 저런 반응을 받고 있자니 울컥했지만, 누아가 허리춤에 두르고 수건 매듭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샤워도 도와준다고 했지.”
그는 당장이라도 수건을 풀고 늠름한 것을 드러낼 기세였다. 라핀은 당황하여 방금까지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을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말을 떠듬거렸다.
“지, 지금요…?”
“그럼 언제 해.”
그건 그렇지만….
라핀은 말 대신 그의 하반신에 둘러진 수건을 힐끗 내려다봤다가 침을 꼴깍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취소하고 싶었다. 머리를 감겨줬을 뿐인데 ‘예쁘게 굴지 마.’라는 소리나 듣고, 기습 키스나 당하고…. 샤워까지 도와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위험해 보였지만, 그래도 라핀은 그의 상처에 물이 들어가 덧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샤워를 물칠 정도로 끝내면 왼손 하나로도 충분히 하겠지만, 왠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됐다. 체면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가볍게 씻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으음…. 제가 임신한 몸이라 못 건드린다고 했으니, 샤워까지 도와준다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며칠 전에도 입맞춤하고 자위를 도와주다가 서로의 성기를 비비게 되는 음란 행위까지 가기는 했지만, 섹스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라핀도 이제는 누아에게 마음이 있어서, 섹스와 같은 몸에 무리가 가는 행위만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핀은 마음의 결심을 하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얼른 씻고 나가요.”
“…….”
라핀이 어서 샤워할 준비를 하라고 말하자, 누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라핀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라핀에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누아는, 방금 물었던 것이 마지막 경고였다는 듯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 매듭을 풀어냈다.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좇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
윤곽만 드러내고 있던 성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것은 수건 아래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발기해 있었다.
그의 성기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떻게 저런 걸 몸에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크면 불편하지도 않나? 야생에서 성기 크기는 수컷의 자존심이라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동물들도 더러 있는데, 저 크기는 너무했다.
저는 수컷인 데다가 종족도 다르니, 아무리 좋아하는 상대의 성기라고 해도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것이 아래를 꿰뚫던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야릇해졌다. 제가 그의 성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티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더 얼굴에 열이 올랐다.
라핀이 남몰래 심호흡하며 열을 가라앉히는데, 다행히 누아는 그런 라핀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지 샤워볼에 보디워시를 짜며 말했다.
“앞은 내가 닦을 수 있으니까, 이따가 등 닦는 것 좀 부탁할게.”
“…네.”
어차피 앞은 못 닦아줄 판이었다. 아무리 그의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저런 좆을 마주 본 채 닦아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누아는 라핀을 등진 채 천천히 앞을 닦았다. 머리를 감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맨몸을 마주하니 민망하기만 했다. 그의 발기한 양물을 본 직후라 더 그런 것 같았다.
라핀은 기다림의 시간 동안 괜히 손을 꼬물거리다가 그의 널따란 등을 바라봤다. 드넓은 어깨와 그 아래로 쭉 뻗은 등 근육. 그가 샴푸질하려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물에 젖은 근육이 생동감 넘치게 움직였다.
등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인지 자잘한 흉터들이 있었다. 전부 다 오래된 흉터 같아 아파 보이지는 않았고, 인간들이 멋있어 보이도록 한다는 문신처럼 보였다. 몸이 워낙 좋은 덕분이었다.
이렇게 몸이 멋있는 수인은 이 세상에 누아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콩깍지가 낀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러할 듯했다.
라핀이 감탄하며 멍하니 그의 등을 감상하고 있는데, 누아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라핀이 침 흘릴 듯 보고 있던 시선을 후다닥 거두자 누아가 샤워볼을 내밀었다.
“자.”
“…네, 다, 다시 뒤도세요.”
“…….”
누아는 뭔가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라핀을 바라봤지만, 잠시였다. 다행히 그는 라핀이 제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는지 군말 없이 뒤를 돌았다.
…환자를 두고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이건 사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그를 도와주는 것뿐이다. 라핀은 샤워볼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마음을 다잡고는, 그의 어깨부터 닦아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버리자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점점 손은 느려지고 마음은 간지러워졌다. 손이 아닌 샤워볼로 닦는 중인데도 마치 직접 손으로 늠름한 등 근육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청결한 행위를 하면서 왜 마음은 점점 더 추악해지고 더러워지는 건지….
라핀은 며칠 전에 심심해서 누아의 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 책에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무엇보다도 순수한 감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제 사랑은 왜 이렇게 날것처럼 음탕한지 모르겠다. 책이라고 해서 다 옳은 말만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몸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라핀은 엉성하게 그의 등을 닦아내고는, 샤워볼을 다시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다 닦았어요.”
“…빠르네.”
누아가 조금 아쉽다는 투로 말하며 샤워볼을 받아 갔다. 그가 다시 샤워기를 틀자,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하얀 거품이 차차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어째 그를 씻기는 것보다 서로의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더 힘든 시간이었다. 라핀이 먼저 나가도 될지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데, 금방 샤워기에서 쏟아지던 물이 멎었다.
툭, 투둑….
벌써 다 씻은 건가…. 먼저 나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같이 나가야 할 판이었다. 라핀이 누아를 바라보자 그가 미리 가져온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네….”
이제 진짜 끝났구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제가 할 일은 끝났다는 생각이 드니 라핀은 한층 마음이 놓였다. 속옷까지 벗어야 할 정도로 젖지는 않아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제가 잘해서 그런 건가 싶어졌다.
먼저 나가버리는 것도 뭣해 누아가 나가기를 기다리던 라핀의 눈에 그가 가운을 걸친 모습이 들어왔다. 아까는 맨몸이라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전보다는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누아는 저와 똑같은 사이즈의 가운을 입었지만, 거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같은 사이즈를 입은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도록 핏이 달랐다.
제게는 길고 품이 크기만 한 가운이 그에게는 딱 맞았다. 마치 맞춤복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가운이 멋지게 어울렸다. 분명 이전에도 그가 가운을 입은 모습을 봤을 텐데,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자각한 후라서 그런지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떨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 부위에서 시선이 덜컥 걸렸다. 라핀은 오묘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 그런데요. 누아 님.”
“응.”
“아래에, 그거는… 해결 안 하세요?”
라핀이 ‘그거’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너무 대놓고 쳐다본 것 같아 황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라핀이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아랫도리 사정이었다. 아까도 봤듯 그의 것은 핏줄이 설 정도로 팽팽하게 발기해 있었다. 샤워까지 했는데도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가운을 입었는데도 그 위용이 가려지지 않았다.
라핀도 남자이니, 저렇게 핏줄이 설 정도로 발기한 채로 옷을 입으면 눌려서 아프다는 걸 알았다. 샤워 후에 혼자 한 발 빼려는 건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건지….
나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걱정스럽고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만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얼굴이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그의 등 근육을 마주하느라 얼굴이 빨개져 있었는데, 이제는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을 것 같았다.
라핀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자, 누아 역시 조금 당황한 듯 잠시간의 정적 후에 대꾸했다.
“그런 건 왜 물어?”
“벼, 별건 아니고 좀… 신경 쓰여서요.”
“나도 당장이라도 박고 싸고 싶지.”
누아의 금색 눈동자가 뱀처럼 스산한 기운을 띠며 라핀의 몸을 훑었다.
사냥당하기 직전처럼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있을 때, 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저번처럼 손으로라도 빼줄 거 아니면, 그런 건 묻지 마. 너도 내가 자제력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야?”
“…….”
본인이 자제력 없는 편이라는 거… 잘 알고 있구나.
누아는 이번에 라핀이 한 말은 그냥 덮고 지나가려는지, 욕실을 나갈 듯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가 문 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라핀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손… 빌려드릴까요?”
“…….”
“아, 아니다. 왼손으로도 충분히 하시지.”
라핀이 다급히 말을 정정했다.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해서 선뜻 도와주겠다는 말이 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며칠 전에 왼손으로는 자위 하나 못 한다고 해놓고서는 제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갖고 놀던 그였다. 왼손으로도 충분히 자위할 수 있을 터였다.
라핀이 다급하게 말을 거두고 그를 따라 욕실을 나서려는데, 누아가 라핀의 가는 팔목을 콱 부여잡았다. 강한 악력에 라핀이 누아를 올려다보자 그가 화가 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손은 됐는데, 잠깐 여기 벽 짚고 서 봐.”
“네? 벽이요?”
“빨리.”
라핀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는 물을 틈도 주지 않고 라핀을 벽에 밀어 넣었다.
누아를 등지고 벽을 마주한 라핀은 영문도 모르고 욕실 타일에 손을 짚었다. 공기는 따듯했지만, 욕실 타일은 서늘했다.
욕실 타일의 냉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아가 등 뒤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두려움 때문인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동물적 감 때문인 걸까.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털이 삐쭉 솟았다. 라핀이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순간, 엉덩이에 살덩이가 닿았다.
분명히, 성기였다.
“……!”
최근에 유사 성행위도 했다지만, 삽입은 하지 않은 지 오래라 머리털이 삐쭉 설 정도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삽입하려는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임신한 저를 건드릴 순 없다고 그랬으면서 왜…. 혹, 그의 얄팍한 인내심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나? 참을성도 없고, 좋지 않은 전적까지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는 제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몰려왔다. 그와의 섹스가 버거울 정도로 힘든 것도 그렇지만, 라핀은 임신한 몸이었다. 그것도 만삭.
어쩌면 안정기가 지났기에 조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소 누아의 섹스를 생각하면… ‘조금’이 안 될 것이다. 애초에 저만한 몽둥이가 몸에 들어오는 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아, 안 돼요…!”
“가만히 있어.”
라핀이 사색이 되어 몸을 뒤틀었지만, 누아는 으르렁거리며 라핀의 어깨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정말 삽입하려는 걸까.
심장이 가쁘게 쿵쿵 뛰었다. 라핀은 아이를 지우고 싶어 했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그것도 종족도 다른 늑대의 아이를, 수컷의 몸으로 낳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게 고백한 누아에게 방법까지 알아 오라고 했지만, 지금은 오직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이건, 좀…!”
어떻게든 누아를 밀쳐내려 해도 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벽에 눌린 몸은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었다.
무력했다. 한쪽 손을 다친 늑대 하나 이기지 못하는 몸이 이토록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아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누구의 아이인지 상관없이 제가 키우겠다고 했으면서. 아이를 안 지웠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다 거짓말 같았다.
라핀이 눈물이 맺힌 눈을 질끈 감고 아랫배를 손으로 감싼 순간, 엉덩이를 비비고 있던 성기가 라핀의 두 허벅다리 사이로 쑥 들어왔다.
“흐읏?!”
누아의 자지가 라핀의 허벅다리 사이에 들어오면서 그의 것이 라핀의 보지와 고환과 자지를 동시에 스쳤다.
이, 이건….
라핀이 몸부림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누아가 라핀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거라도 안 하면… 오늘 종일 발기해 있을 것 같거든.”
“읏….”
삽입하는 줄 알고 겁먹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고 비비려는 모양이었다.
삽입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으니 대번 마음이 놓였다. 사실 지금 상황도 그다지 안도할 상황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 다리 사이로 들어온 누아의 좆이 예고도 없이 뒤로 빠졌다가 다시 깊게 들어오면서 말랑한 엉덩이에 누아의 단단한 골반이 철썩 부딪혔다.
반동으로 라핀이 몸을 살짝 휘청거리자 누아가 라핀의 골반을 손으로 단단히 쥐어 잡았다. 골반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을 때 누아가 타이르듯 말했다.
“다리 더, 모아야지.”
“마, 말도 없이 멋대로….”
“네가 먼저 도발했잖아.”
“제가 어, 언제 그랬다고….”
눈썹이 절로 팔자 모양으로 늘어질 만큼 억울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먼저 아랫도리 사정을 물어보고, 그것도 모자라 손까지 빌려주려고 했었기에 그에게는 충분히 도발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다.
오해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정말 걱정이 돼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섹스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누그러진 마음은 아무래도 좋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애초에 손으로 빼주려고 마음먹기까지 했으니, 허벅지를 빌려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하는 쪽으로. 그가 충분히 왼손으로도 자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생각이 흘러갔다.
라핀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허벅지를 꽉 맞붙였다. 두 다리 사이에 누아의 좆이 꽉 끼어들면서 음부에 세게 비벼졌다. 꾹 다물린 잇새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읏, 으….”
“하아…, 움직일게.”
누아는 허벅지 조임이 만족스러운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찰팍, 찰팍! 누아가 거세게 허릿짓을 하니 마치 손바닥으로 둔부를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마찰음이 났다. 누아의 몸이 물에 젖어 있는 데다가 욕실이라서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근래 들어 평소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끼던 라핀이었다. 그와 입맞춤을 하는 것만으로도, 손으로 성기를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직접적인 성행위를 하는 것처럼 정신을 못 차렸었는데 그의 성기가 예민한 음부를 전부 다 자극하니 미칠 것 같았다.
라핀은 자지가 단단하게 발기하다 못해, 보지까지 간지럽고 울컥울컥 액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는 누아가 제게 삽입을 할까 봐 두려워했으면서, 지금은 미칠 듯한 쾌감에 뭔가를 넣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라핀이 쾌감에 이다지도 약한 제가 원망스러워져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라핀의 골반을 단단히 쥐고 있던 누아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라핀의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아, 하악…!”
누아의 커다란 손이 라핀의 가슴을 제멋대로 주물럭거렸다. 주변 살을 그러모으고 민감하게 세워진 젖꼭지를 잡아당기기를 반복하자, 금방 젖꼭지 주변의 흰 살결이 손자국으로 붉게 물들었다.
라핀은 누아의 좆이 음부를 비비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민감한 가슴까지 자극당하니 온몸에 전류라도 도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머릿속이 쾌감으로 하얗게 질렸다. 두 눈이 질끈 감길 정도로 아찔한 쾌감이 덮쳐왔지만, 라핀은 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생각해 보면 누아의 터질 듯한 성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빌려주려고 했던 것이니 음부를 비빌 필요도, 제가 느끼도록 가슴을 만져줄 필요도 없었다.
“흐읏, 아, 저는, 됐으니까…, 아읏, 마, 만지지 마요…!”
“하아, 너도, 섰잖아.”
라핀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누아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사실 누아는 라핀에게 등 뒤를 닦아달라고 샤워볼을 건넸을 때, 라핀의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이 살짝 발기해 있는 것을 봤다. 제가 억지로 키스했을 때 흥분한 눈치였다.
그 모습에 안 그래도 바짝 서 있던 성기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지만, 누아는 추악한 욕망을 겨우 참아냈다. 이대로 밀어붙였다가는 호감도 깎일뿐더러, 라핀이 저를 씻겨주는 호화스러운 경험은 마지막이 되고 말 것이다.
솔직히 라핀이 머리를 감겨주는 건 시원하지도 않았고 거품도 제대로 닦아주지 않은 것 같았다.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라핀이 저를 씻겨준다는 행위만으로 마음이 벅찼다. 또 받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번은 건드리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이 제 것을 먼저 만져줄 생각을 했다는 것을 들으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던 욕망이 화산처럼 불시에 폭발해버렸다.
이성을 놓은 누아의 손길은 더 거칠어졌고, 그에 라핀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성은 쾌감의 저편 너머로 넘어가 버렸다. 결국 라핀은 누아의 손에 가슴을 내어주게 됐고, 누아는 승리자처럼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갈이라도 하는 것처럼 라핀의 귓불이며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라핀은 그가 무식하게 힘만 세고 우악스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짐승에서 진화하여 수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짐승의 몸체로 교미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분명 아프고 거부감이 드는 것이 정상일 텐데, 제 몸은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제가 잘 느끼기로 소문난 토끼 종족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늑대의 손길에 느끼도록 몸이 개발된 것인지 모르겠다.
“흐으, 으응…, 앗, 아아!”
“하아, 하아….”
이유가 무엇이든 제 몸이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건 변치 않았다. 늑대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난다고, 매일 발정기인 거 아니냐며 타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야말로 늑대의 좆을 원하는 미친 토끼였다.
행위가 격렬해질수록 둘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욕실 특성상 소리가 웅웅 울려대기까지 하니 그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렸다.
라핀은 헐떡대는 와중에도 신음이 집 바깥까지 다 퍼지면 어쩌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두려움이 들었다. 이곳은 늑대 굴도 아니니 바깥에 아무도 없을 텐데, 누군가 제 신음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흐읏, 끅, 으흑….”
라핀이 다급하게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신음을 최대한 참아내는데, 누아가 라핀의 귓가를 먹어버릴 듯이 우물거리다가 속삭였다.
“하아, 라핀, 네 아래… 완전히 젖었어. 알아?”
“으읏! 그만…, 아흐윽!”
그가 저를 제멋대로 만져대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음담패설까지 해대니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제가 그를 좋아한다고 인정했다지만 음담패설 하는 것만큼은 감싸줄 수 없었다. 그러니 제발 개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부정해야 하는데, 정말로 라핀의 보지는 완전히 젖어서 질질 싸댄 수준이었고 자지는 배에 닿을 듯 팽팽하게 곧추서 있었다.
왜 나만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건지…. 라핀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서러움을 참아내다가, 반항하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흐윽, 누, 누아 님도….”
“응?”
“흐, 마찬가지, 면서…!”
라핀은 반항하듯 허벅지를 더 단단하게 조였다.
누아는 저를 놀리듯 음담패설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상태도 저와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기는 허벅지 사이에 처음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단단해져 있었고 크기 또한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었다.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 또한 빨라진 것이 그 역시 곧 절정임을 알리고 있었다.
“큿…!”
라핀이 허벅지를 조이며 성기가 꽉 맞물리자, 누아가 시종일관 여유롭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라핀의 말이 맞았다. 누아도 곧 한계였다. 일부러 아닌 척을 하려고 입을 놀린 건데, 눈치도 없는 작은 토끼가 웬일로 알아챘다.
누아는 평소보다 일찍 사정의 때가 온 것을 들킨 게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하아…. 내가 이래서….”
내가 이래서 라핀을 좋아하는 거지.
누아에게 라핀은 제 상상을 뛰어넘게 야했고, 오늘은 묘하게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는 제가 밀어붙인 거긴 하지만, 먼저 저를 씻겨 주겠다고도 했고 손을 빌려줄 생각까지 했으니까.
혹시 라핀도 제게 마음이 있는 걸까? 아주 조금이라도 호감이 생긴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복받치듯 넘실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랑해.”
누아는 라핀의 귓가에 대고 속살대듯 말했다. 제가 헛된 기대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제가 양심이 없어도, 라핀이 저를 좋아하게 되기는 힘들 거라는 걸 알았다. 성별이나 종족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한 짓들이 있었으니까. 저를 좋아하기는커녕 평생 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아는 라핀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마음이 아니면 몸이라도 가지고 싶은 게 그의 추악한 욕망이었다. 누군가와 살림 차리는 것만 안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런 라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기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제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누아가 고백하자, 라핀이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라핀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으며 귓가에 달라붙은 누아를 떨어트리려 했다.
“하, 하지, 으응, 하지 마요…!”
“후우, 사랑해, 사랑해….”
라핀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누아는 껌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귓가에 달라붙어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각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랬다.
허릿짓은 점점 거세졌고, 눈을 질끈 감은 라핀의 머릿속은 끝내 팍 폭발해버렸다.
“흐읏…, 아아!”
속살거리며 귓가에 퍼지는 목소리에, 라핀은 끝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사출하고 말았다.
보지에서는 홍수라도 난 것처럼 투명한 물이 툭툭 떨어졌고, 자지 끝에서 나온 정액은 누아의 손과 욕실 벽을 더럽혔다.
라핀이 사정하며 본능적으로 몸에 힘을 바싹 주자, 누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신음이 터져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큿…!”
구멍에 쑤셔 넣을 듯 거칠게 쑤셔 박던 누아의 좆대가리 끝에서도 허연 액체가 터져 나왔다. 좆대가리에서 나온 것이 라핀의 하얀 엉덩이와 짧고 뭉툭한 꼬리에 달라붙었다.
“하….”
누아는 사정 후에야 맞붙어 있던 몸을 떨어트리고, 한걸음 뒤에서 라핀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가운을 들춘 채로 음부를 다 드러내고, 하반신을 정액으로 난잡하게 더럽히고 있는 라핀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뻐끔거리는 뒷구멍이며 보지가 삽입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아의 좆대가리도 한 발을 빼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바로 힘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누아는 셔터 닫듯 눈을 감으며 욕망을 참아냈다. 삽입만큼은 할 수 없었다.
누아가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는 사이,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자조하듯 욕실 벽에 이마를 콩콩 박았다.
사랑한다는 말에 사정하고 말았다….
곧 사정할 때였고 흥분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긴 하지만, 쐐기를 박은 것은 그의 진실한 사랑 고백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제 음부를 자극하는 것보다 그의 목소리에 더 흥분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누아는 제가 사랑 고백에 사정한 줄은 모르는 눈치라는 점이었다.
“하아….”
한 번 사정했을 뿐인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안 그래도 없던 체력이 임신 때문에 더 바닥난 것 같기도 했고, 욕실에서 서서 하느라 힘이 더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얼른 눕고 싶다….
라핀은 반쯤 감긴 눈으로 누아를 돌아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누아 님…. 하…, 이제 침실로 가요….”
라핀은 말을 하고 나서야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모르는 새 신음을 너무 내질렀는지, 목소리가 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물도 마시고 싶네…. 라핀이 돌아가는 길에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아는 두 눈에 흉흉한 기색을 죽이지 않은 채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말했다.
“침실? 침실, 좋지.”
갑자기 누아가 라핀의 등과 오금을 받치고 공중에 들어 올렸다. 갑자기 공중에 뜨게 된 라핀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악! 뭐, 뭐예요…!”
“배달 서비스.”
누아는 기분 좋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황당해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라핀은 두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내려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아는 오른손을 지나치게 잘 쓰고 있었지만, 너무 지친 탓에 라핀은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누아는 붕대를 풀자마자 바로 사냥 나갈 준비를 했다.
라핀은 누아에게 손도 다쳤으니 좀 더 쉬어도 괜찮지 않냐고 만류했지만, 누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성향상 식량을 미리 챙겨놓는 편이라 며칠 분의 식량이 남아 있긴 했으나, 누아에게는 꼭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를 지울 방법에 대해 수소문하기 위함이었다.
누아는 라핀의 곁에 누워 배를 만지거나 태동을 느낄 때, 그리고 저를 착각하게 만드는 라핀의 다정한 말을 들을 때면 확 그냥 낳게 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그러나 라핀에게 제 마음을 증명하고 블란에게 라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방법을 반드시 제가 찾아야만 했다.
수소문이 급했지만, 그간 먹은 만큼 식량을 채우기 위해 사냥하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최대한 빠르게 식량을 채우고, 바삐 수소문하러 갔지만 안타깝게도 소득은 없었다.
한시가 급한데, 몸에 무리 없이 아이를 지우는 방법은 없는 건가….
누아가 짜증스럽게 터덜터덜 먹이를 끌고 돌아오는데, 동굴 초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아.”
“…뭐야.”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였다. 블란이었다.
누아는 반갑지 않은 손님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팍 굳혔다. 누아가 짜증스럽게 대답하자, 동굴 벽에 숨어 있던 블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에 마주했을 때까지만 해도 블란은 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오늘은 은빛 털에서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고 있었다.
상태가 좋아 보이니 왠지 불안함이 일었다. 라핀을 좋아한다면서, 얼굴도 못 보는 주제에 저렇게 멀끔해졌지? 누아가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하는데, 블란이 능청스레 다가왔다.
“참나, 몇 시간을 기다린 줄 알아? 왜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야?”
“…그럴 일이 있어서. 넌 왜 왔어?”
“내가 널 찾아올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어?”
“…….”
라핀에 대한 이야기군.
설마 방법을 찾은 걸까? 아니야, 며칠 제가 집에만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훨씬 오래 정보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럴 리가 없을 터다.
정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놈이 라핀 이야기를 하러 왔다는 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누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누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가루가 든 것을 한지로 감싼 포였다. 누아는 그것을 미심쩍은 얼굴로 받아 들며 물었다.
“이게 뭔데.”
“네가 찾던 약.”
“…….”
멈칫, 누아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젠장, 그 이유로 저를 찾아온 것은 아니기를 바랐는데…. 블란이 방법을 찾았다는 건, 그의 요구대로 라핀을 원래의 늑대 소굴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걸었던 조건대로 일이 풀리니 참담했다.
누아가 대답 없이 약을 내려다보고 있자, 블란이 마저 설명을 이었다.
“온갖 약초를 섞은 건데, 이거를 먹으면 아이를 지울 수 있다고 하더군.”
“…그거, 믿을 수 있는 정보야? 누구한테 얻은 정보인데?”
“마녀의 손에서 자란 까마귀에게서 정보를 샀지. 너도 알 텐데?”
“…….”
시체에 남은 살점이나 발라먹는 재수 없는 종족, 까마귀.
까마귀는 시커멓고 음산하게 생긴 것 때문에 이미지가 나쁜 종족이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다. 까마귀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그들 중에는 정보상을 하며 암암리에 정보를 파는 놈들이 많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까마귀가 있었는데, ‘마녀’라고 불리는 사람에게서 키워진 놈이었다. 그 인간이 정말 ‘마녀’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 살이 넘도록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키우던 까마귀 또한 이상하리만큼 장수하고 있었다. 아마 이 산에서는 그 까마귀가 가장 나이가 많을 것이다.
희귀한 ‘마녀’에게서 키워진 데다가, 나이까지 많아 아는 것이 많은 정보상. 누아도 그 까마귀에게서 정보를 사는 것을 아예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워낙 사기꾼 기질이 있는 데다가 까마귀에게서 정보를 사낸다는 건 곧 그 정보 또한 누군가에게 팔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약점을 들키기 싫어서 찾아가지 않았는데…, 블란이 가서 정보를 산 모양이다.
이 새끼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정보가 급하다지만, 까마귀한테 물어보는 건 상식적으로 아니잖아. 누아가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짜증을 내자, 블란이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진정 좀 하지? 뭘 생각하는진 알겠는데, 뒤처리는 확실하게 했다고.”
“…….”
뒤처리라면 죽였다는 건가? 블란 놈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새끼였다.
정보를 판 까마귀가 죽었다는 것은 퍽 불쌍했지만, 누아로서는 다행이긴 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가는 늑대의 위신에 영향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와 블란에게 싸움을 걸어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혹여 라핀을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았다.
누아는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약을 내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확실한 정보야?”
“말로는. 두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야.”
“그런 불확실한 정보를 준다고? 제정신이야?”
누아가 얼굴을 확 구겼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면 블란과 거래할 이유가 없었다.
누아가 두 눈으로 확인한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면 필요 없다는 듯 대꾸하자, 블란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아이 지우는 걸 어떻게 눈으로 확인하고 줘? 아이를 지우고 싶어 하는 정신 나간 새끼가 어디 있다고. 아, 물론 라핀이 정신 나갔다는 건 아니야.”
“…….”
그건… 인정하기 싫지만, 블란의 말이 맞았다. 누아가 여태까지 방법을 못 찾았던 이유는 아이를 지우려고 하는 수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눈앞에서 검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찝찝함을 지울 순 없었다. 누아가 과연 이걸 라핀에게 먹여도 되는 건지 손아귀에 약재를 쥐고 굴리며 고민하는데 블란이 그것을 내려다보다 말을 덧붙였다.
“몸에 안 좋은 게 안 들어간 건 확실해. 내가 만드는 과정을 봤으니까 그건 장담할 수 있어.”
“…….”
“해볼 만은 하지 않겠어? 이것보다 안전한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
블란은 꽤 자신만만했다. 누아는 블란이 라핀을 데려오기 위해 아무 방법이나 알아다 준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면서도, 녀석도 라핀을 많이 좋아하는 듯하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이라면 추천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이가 없게도 ‘그’ 블란이 알아 온 방법이라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몸에 안 좋은 건 안 들어갔는데 아이는 지울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원리로 가능한 거지? 누아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했더라면 제가 일찌감치 방법을 찾았을 터였다.
누아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약을 챙기자, 블란이 입꼬리를 올리며 신신당부했다.
“그럼 약속한 대로, 이걸 먹이고 라핀을 데려와.”
“…그래. 그렇지만 확실한 방법인지 확인한 다음이야. 그게 계약 조건이었어.”
내키지는 않지만 이 방법이 통한다면 약속을 지켜야겠지. 정말 지키기 싫었지만, 늑대의 약속은 그런 것이었다. 장난질을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블란은 당장이라도 라핀을 데려오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이전에 조건을 내건 것이 있다 보니 강요하지는 못했다. 블란이 조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
블란은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동굴을 빠져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약의 효능을 보려면 누아가 어서 라핀에게 약을 줘야 하기도 하고, 또 블란에게는 지금이 취침 시간이기 때문에 돌아가서 마음 편히 발 뻗고 자려는 생각이었다.
***
라핀은 식탁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버선발로 달려 나온 라핀은 돌아온 누아를 발견하고는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왔어요? 별일 없었죠?”
“…응.”
라핀은 누아가 사냥을 나선 이후로 좌불안석이었다. 상처가 조금 아물어 붕대는 풀었지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라핀의 마음 같아서는 집에 비축 식량도 많으니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누아는 꼭 나가야 할 일이 있다며 박차고 나갔었다. 아무래도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그런 듯했다.
참나, 자기만 불편한 줄 아나? 나도 답답하지만 참는 건데…. 라핀은 제 생각만 할 줄 아는 늑대를 걱정하는 건 사치라고 누아에 대한 생각을 일절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렇다 해도 신경 쓰이는 걸 접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아가 오자마자 별일 없었는지 확인을 하려고 나왔는데, 어쩐지 누아의 낯빛이 어둑어둑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겉보기에 다른 상처가 늘어난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다친 손이 아파서 그러는 걸까? 라핀은 빠르게 다가서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소, 손 한번 봐요. 호, 혹시 상처 터졌어요? 아파요?”
“…….”
누아는 유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도 총상을 당한 이후로 처음 나간 사냥이었기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손을 붙들고 꼼꼼히 살폈지만, 붕대에 피가 묻어나 있지는 않았다. 상처가 터진 것 같지는 않은데… 표정은 왜 그런 거지? 단순히 아파서 그런 건가?
라핀이 의아하게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라핀, 이거.”
“……?”
어디 아픈 게 아닌지 누아의 상태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던 라핀은 의아하게 누아를 바라봤다. 갑자기 뭘 주는 거지?
설마 또 제 먹이를 무리하게 구해온 건 아니겠지? 또 그랬으면 화낼 생각으로 누아가 내민 것을 내려다보는데, 그의 손에는 영문 모를 것이 들려 있었다.
꾸깃꾸깃한 한지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천천히 풀자 무언가를 빻은 것처럼 보이는 청록색의 고운 가루가 나타났다. 후각을 곤두세우니 씁쓸한 풀냄새가 나긴 하는데, 무슨 가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뭐예요?”
“네가 말했었잖아. 아이… 지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
라핀은 약을 내려다본 자세 그대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지우는 방법….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막상 누아가 방법을 알아 왔다고 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라핀이 아무것도 못 하고 약재를 꽉 쥐고만 있자, 누아가 힘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이걸 먹으면 아이를 지울 수 있대. 약초를 빻아 만든 거라 몸에 해는 없을 거라고 그랬어.”
“…….”
누아가 설명을 이었지만, 라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혼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그가 하는 말이 뭉개져서 들렸다.
방법을 알았을 뿐이야. 당장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잖아.
누아에게 방법을 알아 오라고 한 이유도, 언제든지 제가 ‘선택’할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두려는 것이었다. 방법을 알아 온다고 해서 아이를 지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라핀은 요동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몸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했다.
“아…, 잊고 있었는데. 알아 와 줘서 고마워요.”
“잠깐만, 라핀.”
자연스럽게 회피하듯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누아가 덥석 라핀의 팔목을 붙잡았다.
“얼굴이 새파란데…, 괜찮아?”
“…….”
라핀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허옇게 질려버렸다.
라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끝내 말 대신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춰버리자, 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 지울 거야?”
“…낳는 것도, 지우는 것도 무섭고, 뭐가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어요.”
라핀은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이를 뱄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매일, 종일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지만 매번 결과가 달랐다. 어느 날은 낳는다, 다음날은 낳지 않는다, 또 다음에는 낳되 누아에게 키우라고 넘긴다…. 선택지가 수도 없이 늘어났다.
누아를 좋아하는 마음을 확실하게 자각한 후부터는 더 마음이 흔들렸다. 솔직히 지금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차라리 초기에 방법을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지웠을 텐데, 이미 너무 늦을 만큼 정이 들어버렸다.
라핀이 아직도 결론을 짓지 못했다고 하자, 누아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난 네가 당연히 지우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누구 아이인지도 모르는, 늑대의 아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정상이겠죠.”
라핀이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누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라핀이 아이를 품었다는 걸 알자마자 그에게 지우는 방법을 알아 오라고 하기도 했고,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보니 지우고 싶을 게 당연했다. 라핀도 그러니 지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라핀이 자조하듯 말하자, 누아가 “아니, 네가 비정상이라는 건 아닌데….”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말이 잘못 전달됐다고 난처한 모습이었다. 라핀은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인간한테 잡히고 실험을 당한 이후로는 가정 같은 거, 아예 못 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보시다시피…, 이런 몸이잖아요. 이상한 몸을 가져서 토끼 무리한테서도 저주 취급받아 버려진 거였고.”
라핀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혹독한 야생에서 살면서 라핀은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 죽을 뻔한 것이 누아에게 물렸을 때 단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 만큼 위험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인간에게 잡혀 실험을 받은 것이었다. 혼자 있다 보니 우울감이 심했고 온갖 주사와 수술을 받느라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곳에 감돌던 알싸한 냄새며 주변을 감돌던 스산한 죽음의 분위기가 라핀의 목을 조였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건 다행이었지만 함께하던 토끼 무리에게서, 게다가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았으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뜸 아이가 생겼고, 누아는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한다. 변덕이 심한 늑대이니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며 무시하려 했지만, 제 마음도 그에게 기울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지우겠다는 결정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제가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고 느껴져서…. 하아, 모르겠어요.”
라핀이 말하다 말고 누아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근심이 많아 현기증이 일었다. 제가 우유부단한 건지, 이런 일에서는 다 저 같을 수밖에 없는 건지….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보낸 저를 누아가 답답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을 때쯤, 잠잠히 말을 듣고 있던 누아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가 아닐 수도 있어.”
“그렇게 위로 안 하셔도….”
“나랑 사귀자, 라핀.”
“…네?”
위로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는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고백이 튀어나왔다.
방금까지 약을 먹을지 말지 머릿속을 혼잡하게 메우고 있던 생각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이미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긴 했지만, 라핀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허둥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뜬금없이….”
“뜬금없는 게 아니야. 나는 애초에 내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방법을 알아 온 거였어.”
“…….”
고백을 받는 게 너무나도 어색하고 낯간지러워서 주제를 바꾸려고 했지만, 누아는 단호하게 막아섰다.
제가 누아에게 방법을 알아 오면 마음을 믿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결정해야 된다는 부담감에 그의 고백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제 마음 확실한 거 증명됐으니까, 이제는 사귀자고….
처음 그의 마음을 알았을 때와 달리, 지금의 라핀은 누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핀은 여전히 마음의 벽을 세운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기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왜 갑자기 사귀자고 하는지는 이해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기회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는 건 무슨 의미인지….
라핀이 누아를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우고 싶지만 확신도 없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잖아.”
“…네.”
“순서를 차차 밟아 나중에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네가 원하는 안정적인 가정을 새로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누아는 라핀의 불안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제가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리라는 것도, 그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게 이 정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말이 특히나 그랬다. 평범한 몸이 아니니까 암컷 토끼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것도 모자라 무리에게서 버림받기까지 했으니 불안감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토록 싫어하는 늑대의 아이를 쉽게 지울 생각을 못 하는 거겠지.
이기적이지만, 누아는 라핀의 불안감을 이용해서라도 라핀과 함께하고 싶었다. 정말 라핀을 위한다면 제 마음을 포기하는 게 맞다는 걸 알기에 욕심내는 제 자신이 싫었다. 그렇지만 라핀을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라핀과 사귀게 되고, 누아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라핀이 제게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헌신할 생각이었다. 이미 나갈 진도도 다 나가고 볼 것도 다 본 사이에 사귄다고 큰 변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누아는 관계를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어때?”
“…….”
누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제안이 라핀이 말한 모든 불안감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라핀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 조막만 한 머리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라핀의 특기였으니까.
그의 물음에 라핀은 말없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누아의 말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아니었다. 당장 아이를 어떻게 할지가 중요한 문제이긴 했지만, 누아와 정식으로 사귀고 서로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정식으로 2세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면 누아가 말한 마음의 짐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라핀은 힐끗 누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이 늑대랑 사귄다고….
마음이 맞으면 당연한 수순인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늘 그랬듯이, 어물쩍 함께 살아가게 되리라는 생각만 했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귄다는 말이 워낙 풋풋하기도 하고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다 보니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마음이 들떴다.
라핀은 한번 경험해 보는 것쯤은…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은 쿵쿵 들떴지만, 라핀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겠다는 투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단…, 알았어요.”
“뭐? 정말이지? 이제 그럼 나랑 사귀는 거지?!”
누아가 감격스럽게 펄쩍 목소리를 높였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축배를 들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감격할 일이던가?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덩달아 입꼬리를 들썩이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누아가 준 약을 손에 꽉 쥐었다.
“그, 그런데… 당장 이걸 먹진 못하겠어요. 누아 님이 말한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이상적이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그, 아직 그러리라는 확신이 없으니까….”
라핀은 누아가 좋았기에 사귀는 것도, 서로의 마음이 통해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적어도 누구의 아이인지는 명확하게 할 수 있었고, 누아를 반려로 받아들인 이후이기에 마음도 편안할 테니까.
그렇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생겨난 지금의 아이 이후에 다음 아이가 쉽게 생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애초에 일반적이지 않은 몸이다 보니, 다시는 아이를 못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버릴 순 없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봐. 나는 지금의 아이를 키운다고 해도 좋으니까.”
라핀의 말에 누아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누아는 라핀이 둘 중 어떤 선택을 하든 좋았다. 라핀이 둘 중 무엇을 선택하든 저와 함께하게 되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라핀을 품에 끌어안았다.
“사귀기로 한 거,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
“다 잘 될 거야.”
“…….”
누아의 다독거림은 라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누아는 여태까지 라핀에게 잘못한 것도 많고, 지금조차도 라핀의 약점을 이용하는 저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라핀을 제 곁에 둘 수 없을 것 같았다.
이토록 나쁜 저를 라핀이 받아줬으니, 더는 라핀이 슬퍼하고 후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라핀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러니 제가 무조건 잘해야 한다. 잘 돼야 한다….
누아가 암시하듯 말하자, 라핀이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어정쩡하게 안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누아의 등에 손바닥을 얹고 마주 안았다.
맞닿은 심장에서 누아의 기분이 라핀에게도 다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숨소리 또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을 텐데 기쁘게 들려왔다.
아직도 라핀은 과연 누아와 사귀기로 한 것이 최선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통한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없던 일로 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부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고…. 라핀은 한 번도 믿지 않았던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
라핀과 누아는 대화를 마친 후 식사 시간을 가졌다.
라핀은 이제부터 누아와 사귀기로 했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변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볼 거 안 볼 것 다 본 사이인 데다가 진도도 다 나갔고, 납치였지만 나름의 동거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라핀은 식사를 하려고 하자마자 진땀을 흘렸다.
“…이게 뭐 하는 거예요?”
평소처럼 제 자리에 앉아 마주 보고 식사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누아가 식탁 의자에 앉은 채 제 팔목을 붙잡는 게 아닌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서 그를 내려다봤으나 그는 말없이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단순히 장난을 치려고 붙잡은 듯싶어서 놓으라며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놓지도 않았다.
…밥 먹자면서 이게 뭐 하자는 거지? 라핀이 이상한 것을 보듯 누아를 바라보자, 그가 덤덤하게 답했다.
“얼른 앉아.”
“손을 놔줘야 앉죠.”
“아니, 네 자리 말고. 내 무릎에 앉으라고.”
“…에?”
무릎?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단단한 근육으로 이뤄진 허벅다리는 앉아도 안정감 있게 보였다.
“왜요?”
그렇지만 굳이 그의 무릎에 앉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맞은편에는 멀쩡히 의자도 있고, 무릎에 앉는 것보다 훨씬 편할 게 뻔했다. 굳이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이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는 저와 스킨십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굳이 신성한 식사 시간에 이럴 이유도 없고. 라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누아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사귀면 다들 이러잖아?”
“…사, 사귀면, 다들 이런다고요?”
“응.”
사귀는 사이면 밥 먹을 때 무릎에 앉는다고?
라핀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토끼들은 안 그랬다고 하더라도, 늑대들에게는 사귀면 무릎에 앉는 관습이 있을지도 몰랐다.
늑대와 사귀려면 서로의 관습과 패턴에 맞춰가야겠지…. 못 해줄 정도도 아니고.
라핀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무릎에 앉자, 궁둥이 밑으로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몸집과 귓가에 닿는 가벼운 숨결에 라핀의 어깨가 옹졸하게 굽었다.
“…….”
어색해….
그의 무릎에 앉은 것이 처음도 아닌데, 라핀은 세상에 저와 누아만 남겨진 것처럼 그의 존재감이 여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밥이나 먹자 싶어 식탁 위의 당근을 손에 쥐려는데 뒤에서 나온 커다란 손이 라핀의 양 허리를 감쌌다. 간지럽고도 이상야릇한 느낌에 라핀이 움찔 떨자, 누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무 말랐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라핀의 몸 상태를 가늠해 보는 듯 허리를 만지던 손이 라핀의 배까지 더듬어왔다. 점점 깊어지는 스킨십에 라핀의 배에 움칠 힘이 들어갔다.
“벼, 별로…. 오, 오히려 살이 쪘는데요….”
“그래도 말랐어. 잘 먹는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라핀은 임신으로 오히려 살이 쪘는데, 누아는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듯 심각했다. 원인을 알아내려는 듯한데 사실 오히려 살이 찐 상황이니 원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운동이라니. 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에는 황당해, 라핀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나갈 수가 있어야 운동을 하죠.”
“흠…. 몸 괜찮아지면 같이 나가서 운동하자. 같이 있으면 괜찮겠지.”
“…같이 나가서요?”
“응.”
‘같이 나가서’ 운동하자니. 바깥을 나돌아다니게 할 바에는 아예 운동도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다. 이전에는 같이 사냥을 나가기도 했었다지만, 그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게다가 늑대 소굴에서 도망친 이후에는 경계가 더 심해져서 절대로 나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마음을 바꿔 먹었지?
…설마, 사귀기로 했으니 경계를 누그러트린 걸까?
여태까지 라핀과 누아와의 관계는 먹잇감과 포식자 사이였다. 이제는 누아가 저를 잡아먹지 않을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관계를 규정하자면 그런 표현밖에 없었다. 그러니 누아는 당연히 라핀이 도망치지 않도록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귀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동등한 연인처럼 대하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해졌다. 말뿐인 게 아니라, 앞으로의 태도도 달라질 것을 생각하니 은연중에 기대되는 것이었다. 라핀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에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어물쩍 화제를 돌렸다.
“조, 좋아요. 다음에 같이… 운동해요. 이, 이제 밥 먹어도 되죠?”
“그래. 밥 먹자.”
다행히 누아는 라핀의 허리와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거둬냈다. 그리고는 차려둔 음식들을 식사하기 쉽도록 앞으로 끌었다.
남들이 보기에 채식을 하는 라핀의 음식과 육식을 하는 누아의 음식이 나란히 놓인 식탁은 이상하겠지만, 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식사 자리보다 자연스러웠다.
라핀이 먹을 음식은 누아가 직접 구해다 준 것이고, 라핀은 손이 다친 누아를 위해 음식을 가까이 끌어다 주고 집어주는 것을 도와줬다.
라핀은 그의 무릎에 앉은 것이 어색하고 오글거린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누아를 필요 이상으로 극진히 도와주는 행동에는 그런 감정을 못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
며칠 전까지 방랑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가려고 하던 누아가 이제는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둔 것처럼 집에 콕 박혔다. 다쳤던 오른손이 흉터가 남은 것 빼곤 다 나았는데도 그랬다.
그는 집에 있는 동안 라핀에게 온종일 달라붙어 있었다. 문어 빨판도 이렇게 찰싹 달라붙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한시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물며 씻는 시간까지도 떨어지질 않았으니 마냥 과장도 아니었다.
늑대 소굴에서 지낼 때도 그는 종일 저와 함께 있고, 하다못해 사냥도 데려갈 정도였으니 사귀게 된 지금 그 기질이 더 도드라지는 것은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응이 안 되는 것은 그의 태도였다. 잘해주겠다는 게 그냥 한 말이 아니었던 듯 누아는 이전보다도 더 극진해졌다. 라핀이 제발 그만두라고 말릴 정도로 심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핀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눈을 질끈 감고 부탁하듯 입을 열었다.
“제, 제발 안 하면 안 돼요?”
“뭐를?”
“이, 이런 거요. 발 같은 건 씻겨줄 필요 없잖아요….”
믿을 수 없게도, 지금 누아는 물이 담긴 대야를 바닥에 앉아 허리를 수그린 채 라핀의 발을 씻겨주고 있었다. 욕실에서 가져온 물 바구니를 찰박거리면서.
발을 만지고 있는 누아의 손은 굳은살로 딱딱하고 거칠거칠했지만 씻겨주는 손길만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행위에 라핀이 얼굴을 붉히자, 그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발 씻겨주는 게 뭐 문제라도 되나?”
“이상하잖아요. 보통 이런 건 안 해준다고요….”
“사귀면 다들 해주는 건데?”
“아니, 아닌데….”
저번에는 사귀는 사이면 무릎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하기에 사귀기로 한 후로는 계속 그러고 있는데…. 이제는 발을 씻겨주는 게 당연하다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아가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하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늑대 부족은 평생에 한 반려만 둔다는 로맨티시스트 성향을 지녔다고 들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하나만 둔다는 것은 한 반려에게 진심을 다한다는 뜻이니까.
그와 사귀기로 한 이상 늑대의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토끼의 문화도 조금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라핀은 조심스러운 투로 거부했다.
“고맙긴 한데, 저, 저는 이런 건 좀… 부담스러워요. 늑대 연인 사이에서는 그런 문화가 있는지는 몰라도, 토끼 연인들은 이런 거를 당연하다고 생각 안 해요. 죄송하지만, 토끼 문화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알겠어. 그래도 이왕 물 받았으니까 오늘은 씻겨줄게.”
“으으…. 그러면 저도 좀 이따가 발 씻겨드릴게요.”
다행히 대화가 통해서 다음부터는 안 할 것 같고, 이왕 누아가 물도 받아왔고 씻기는 중이니 이번만큼은 참아야겠다. 라핀이 그런 생각으로 말했지만, 누아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니, 난 필요 없어.”
“네? 아, 아니…. 애초에 저도 필요 없었는데요?”
애초에 라핀도 필요해서 발을 씻겨주는 손길을 받는 게 아니었다. 누아의 말에 의하면 늑대들은 사귀는 사이에 이러한 행동이 당연하다고 해서 받는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리고 저는… 사귀는 건, 한 명이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라핀이 생각하기에 사귄다는 것은 한 명이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러니 라핀도 그에게 받은 만큼 잘해주고 싶었지만, 만삭이다 보니 그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게 힘들었다.
어떤 식으로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니 일방적으로 받게만 됐다. 그렇지만 발 씻겨주는 정도는 라핀도 할 수 있었다. 배가 나온 탓에 바닥에 앉아 허리를 수그리는 것이 불편하긴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라핀이 이 정도는 하게 해달라는 의미로 대꾸하자, 누아가 라핀의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일방적으로 헌신했다고 그래?”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이건 해줄 만하니까 하는 거고. 라핀, 며칠 전에 네가 나 씻겨줬던 건 잊었어?”
“그렇긴 하지만…, 그때 딱 한 번뿐이었잖아요.”
“지금까지는 내가 받아오기만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균형을 맞추는 중인 거야.”
누아는 단호히 라핀을 설득하다가도, “받은 거라기보다는 억지로 갈취한 게 맞지만….” 하고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언제 누아한테 뭔가를 줬다는 거지? 라핀이 반박하려는데,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직, 너 나 싫잖아.”
“아니…, 네?”
“어쩌다 사귀게 되긴 했지만, 싫을 거 아는데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바라겠어.”
고개를 내리고 라핀의 발을 만지작거리는 누아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어쩌다’ 사귀게 됐다는 건 뭘 말하는지 알겠는데…. 제가 누아를 싫어한다고? 그건 무슨 소리지?
왜 누아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제 마음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니 싫은데도 사귄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상황이 그랬다지만, 저도 누아에 대한 마음이 있으니까 받아들인 거였는데….
“저는….”
라핀은 아직 그에게 진심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어도 될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오해하는 것을 가만히 둬야 했지만, 어쩐지 ‘그렇다.’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거짓말 하나도 못 하는 선량한 토끼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제 앞에 있는 그가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처럼 처량해 보이는 탓이었다.
왜 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건지…. 라핀은 금방 마음이 약해져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했다. 라핀은 머뭇거리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댔다.
“…정말로 누아 님이 싫었으면, 다쳤을 때 도와주지도 않았어요.”
“빈말해 주지 않아도 돼.”
라핀이 누아가 싫지 않다며 소심하게 마음을 내비쳤지만, 누아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만이라도 고맙다는 듯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진심을 밝힐 생각은 없었으나, 저런 식으로 믿지 않으니 속이 더 답답해졌다. 왜 못 믿는 거지? 그 ‘방법’을 알아 와 달라고 부탁한 것 외에는 그에게 쌀쌀맞게 군 적도 없는데…. 사귀기로 한 이후로는 ‘늑대들은 사귀면 다 이런다’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다 들어줬고 말이다.
도대체 못 믿을 이유가 뭐야? 내 말이 못 미덥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라핀은 충동적으로 제 의견을 주장하게 됐다.
“제,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저는 오히려 누아 님을….”
라핀은 제 마음이 진심임을 주장하기 위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뒤늦게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라핀이 부자연스럽게 말문을 끊자 누아의 표정이 의뭉스러워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오히려, 뭔데? 왜 말하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을까.”
“…말실수한 거예요. 아무튼, 싫지 않다는 거면 됐잖아요.”
“…….”
라핀이 급하게 수습했지만, 누아는 제게 유리한 상황이 됐다는 걸 눈치챘는지 처량한 기색을 지우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더 깊게 추궁하지 않는 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라핀이 한껏 누아를 경계하며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가 깨끗하게 씻기고 있던 라핀의 발을 물 위로 꺼냈다.
촤르륵, 대야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젖은 발에 한기가 느껴지는데, 갑자기 누아가 발바닥에다가 입술을 맞췄다.
“히익!”
간지러움에 소름이 돋고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그의 턱을 발로 찰 뻔했다.
라핀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는 가슴께를 쥐어 잡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언성을 높였다.
“뭐, 뭐예요! 하, 하지 말아요!”
“응? 라핀. 무슨 말을 하려 했는데?”
누아는 라핀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금 라핀의 발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소름이 머리끝까지 뻗치고 어깨가 들썩였다.
그는 더러운 발에 입맞춤하는 주제에, 대답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는 것처럼 처량하게 굴더니, 지금은 왜 이리 뻔뻔해진 거야?
“말이 잘못 나온 거라니까…. 흣…!”
라핀이 어떻게든 둘러대려고 했지만, 그는 다시금 입술을 맞추려는 듯 발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입과 코에서 나오는 숨결이 다시금 라핀을 간지럽혔다.
누아는 이런 데 있어서 짜증 날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이미 라핀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한 얼굴이었다.
부정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누아는 제가 솔직하게 대답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텐데….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던 라핀은 또 입술을 맞추려는 듯 들이대는 행위에 퍼뜩 입을 열고 말았다.
“마, 말할 테니까, 제발 그만해요!”
“응.”
라핀이 애원하듯 외치자, 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바닥 가까이에 들이대고 있던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의 고문 아닌 고문에 말하겠다고 외치기는 했지만, 역시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여전했다. 착각일 수도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라핀이 애꿎은 입술을 우물거리자, 누아가 눈짓을 주며 다음 말을 종용했다.
“말한다면서.”
“아뇨, 잠깐 고민을….”
“뭔 고민을 해? 꿀 먹은 것처럼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라핀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려 하자 누아는 대번 비뚜름한 얼굴이 됐다.
뭔가를 빼앗긴 아이처럼 심통 맞은 얼굴을 한 그는, 이번에는 발가락을 물려는 듯 발끝에 대고 입술을 벌렸다. 이러다가 정말 발가락을 빨릴 것 같은 느낌에, 라핀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 좋다고, 생각해요!”
“…뭐?”
라핀의 솔직한 대답에 누아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라핀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호감을 드러내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눈치였다.
그는 감정이 너무나도 벅차올라서 그런지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과장되게 심호흡을 한 그는 제가 혹시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내가 좋다고? 언제부터? 왜?”
“그, 그건… 몰라요. 누아 님도 왜 저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 말 안 했잖아요.”
실제로 떠오르는 게 없기도 했고, 당사자 앞에서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라핀이 이것만큼은 절대로 대답하지 않겠다며 입을 단단히 걸어 잠그자, 이번에는 누아가 답답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하. 나도 빨리 생각해 볼게. 왜 내가 왜 좋은 건데?”
“모른다니까…. 전 생각 안 할 거예요.”
라핀이 단호하게 이유는 말하지 않을 거라고 하자, 누아가 입매를 불퉁하게 일자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핀의 엄지발가락을 이로 가볍게 물었다.
“악!”
“벌이야.”
이유 말해주지 않은 벌이라는 듯하다.
발가락을 물린 라핀은 황당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누아를 내려다봤다. 결국 물릴 거라면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을 텐데 괜히 마음만 밝혔다. 누아에게 휘말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무튼 불퉁했던 누아의 표정은 금방 밝아졌다. 라핀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는 라핀의 발을 놓고, 손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건 가져올게. 잠깐 기다려.”
“네….”
누아는 바른 걸음으로 파우더 룸에 있는 수건을 찾으러 갔다.
발이 물에 젖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라핀은 발이나 흔들면서 그를 기다렸다. 무료함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집 안이나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배에서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
미간을 좁힌 라핀이 배를 움켜쥐며 허리를 숙였다. 임신한 후 때때로 배가 아픈 적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단발성이 아니었다. 몇 초 만에 통증이 몇 배로 널뛰고 있었다.
뭐, 뭐지? 낮에 먹은 게 잘못됐나? 입맛이 돌아서 많이 먹긴 했는데…. 그렇지만 배탈이나 체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더, 훨씬, 배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었다. 배에 이어 허리까지 아파지고 있었다.
“아, 아으윽….”
몸이 뻣뻣해지고 체온이 순식간에 써늘해졌다. 이마에서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한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상체를 한껏 웅크리고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수건을 들고 온 누아가 라핀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달려왔다.
“라핀!”
수건까지 떨어트리며 달려온 그는 라핀의 상태를 살피려 몸을 한껏 수그리고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수건을 가져온 고작 일이 분 남짓한 사이에 라핀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어디 아픈 거야?”
“아흐으, 아, 배가…, 배가….”
“배? 배가 아파서 그래?”
라핀이 끙끙 앓자 누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라핀의 배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니 아이가 잘못된 게 아닌지부터 걱정됐다.
여태까지 멀쩡했고 오늘 발을 씻긴 것 외에는 특별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혼란스러운 와중에,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출산의 징조가 아닌가?
언제 임신한 것인지 몰라 출산일을 가늠할 수 없긴 했지만, 라핀은 누가 봐도 만삭이었다. 그러니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핀 역시 이것이 아이가 나오려는 징조임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 밖에… 나, 나갈래요….”
“뭐? 이런 몸으로 어딜 나가겠다는 거야!”
누아가 드물게 호통을 치며 라핀의 팔을 붙잡았지만, 라핀은 힘없이 팔을 흔들며 그의 손을 내치려고 했다. 라핀은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불안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흐으으, 아이, 나, 나올 것 같아요. 호, 혼자, 있을래요….”
“왜 혼자 있겠다고 그래! 어떻게 되면 어쩌려고!”
“어, 어차피… 누, 누아 님 있어도, 하, 할 수 있는 거… 없다고요!”
라핀의 말에 누아가 무력하게 손을 놓았다. 그러고 보면, 출산은 수인의 몸이 아닌 본래의 동물 모습으로 돌아가서 해야 했다. 라핀의 말대로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책에서 읽은 바로는 토끼들은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판단되는 곳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본능이 있다고 했다. 라핀이 지금 나가려고 하는 것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 나가려고 하는 것일 터다.
아이를 낳을 만한 안전한 곳…. 그런 곳이 있나? 이런 혹한기에, 게다가 블란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라핀을 내놓을 수가….
“나가자. 어서.”
누아는 퍼뜩 한 장소를 떠올리고, 라핀이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누아는 라핀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와 동굴 한구석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누아가 이것저것 가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쌓아놓는 작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딱딱한 나무 조각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침 마차 안장용으로 만들려고 구해 왔던 푹신한 풀 더미가 있었다. 풀 더미가 아주 많지는 않아도 곧 토끼의 몸이 될 라핀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여기, 여기에 들어가.”
“…….”
라핀은 헐떡거리며 수풀 더미를 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동굴에서는 수인 모습을 하고 있던 라핀의 모습이 작은 하얀 토끼로 변했다. 작은 토끼는 끙끙거리면서도, 폴짝 풀 더미 사이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정말이구나….”
누아는 풀 더미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 라핀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낳는 거구나. 은연중에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방법을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되다니.
아직 라핀은 낳을지 말지 선택하지 못한 것 같던데…. 누아는 라핀이 아이를 낳기를 바랐지만, 라핀은 괜찮은 걸까. 마음은, 그리고 몸은?
누아는 막상 출산의 때가 오니 두려워졌다. 누구의 아이를 낳을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늑대의 아이를 가지게 된 라핀에게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출산하다가 죽는 동물도 더러 있는데, 토끼가 늑대의 아이를 배기까지 했으니 순산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저보다 무서울 건 라핀일 거였다. 그러니 곁을 지켜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누아는 한평생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지금은 초조해하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이 가장 무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영겁 같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아는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혹 피 냄새에 다른 포식자가 나타날지도 몰라 지키는 중이기도 했고, 라핀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닌지 불안해서 자리를 벗어날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동굴 입구와 안쪽을 끊임없이 수색하며 돌아다니던 중, 입구 근처에서 익숙한 늑대를 마주했다. 블란이었다.
“이 새끼야.”
블란은 무척이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만나면 인사는 하는 사이였는데, 오늘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누아를 보고 수인 모습을 바꾸더니, 성큼성큼 동굴 안쪽으로 들어와 누아의 멱살을 덥석 쥐어 잡았다.
“라핀은 왜 안 데려오는 건데?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누아에게 약을 건넨 이후로 블란은 다시 라핀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줄곧 들떠 있었다. 그렇지만 급한 사안은 아이를 지우는 것이었고, 약의 효능을 정확히 알려면 며칠 지나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기다렸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누아에게는 소식이 없었고, 라핀의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약속을 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누아는 멱살을 잡힌 채 블란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고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었다. 누아는 화가 난 블란의 손을 온 힘을 다해 팍 떼어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약속이 불발돼서 말이야.”
“…뭐?”
블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약을 건넸는데 불발되었다는 건….
블란은 무언가 생각하다,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빠드득 갈며 화를 냈다.
“그 까마귀 새끼…! 그 새끼가 확실하다고 했는데…!”
블란은 약의 효능을 의심하고 있었다. 약이 효과가 들지 않아서 약속이 불발됐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누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 조건은, 네가 방법을 찾아오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 아이를 낳는 것까지가 조건이었거든.”
“이 새끼가….”
그는 말장난에 속았다는 듯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애써 화를 누그러트리며 누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라핀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야?”
“그렇게 됐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금의 라핀은 아이를 낳으려고 풀 더미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누아가 거짓말 아닌 말로 블란을 돌려보내려는데, 갑자기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잠깐, 이 냄새…. 혹시, 지금 라핀이 아이를 낳는 중인 건 아니야? 안쪽에서 라핀의 냄새가 짙게 나는데. 피 냄새도 나고.”
“…아니야.”
씨발, 이 새끼는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안쪽에서 확실히, 그래. 그 냄새잖아!”
블란도 저만큼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으니 착각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안쪽에서 라핀이 아이를 낳는 중이라는 걸 확신한 듯,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누아는 그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아니라고, 이 새끼야!”
“그럼 아이를 보여줘. 나도 아이 아빠 후보인데 보여줘야 맞는 거 아닌가?”
블란은 당장이라도 집 안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의 말대로 블란은 유력한 후보였다. 블란의 핏줄이더라도 누아가 키워주기로 라핀과 약속했지만, 야생에서 핏줄이란 중요했다.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보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그가 라핀을 찾는 것보다 더 심하게 집착할 것이다.
이런 말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누아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내 아이야. 그러니까 네가 봐야 할 이유는 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내 눈으로 똑바로 봐야겠어.”
블란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어딜 보고 아이 아빠를 확신하는가. 저 놈이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으니 꼭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블란이 그런 생각으로 대꾸하자, 누아가 당연한 것 아니냐며 대답했다.
“라핀이 나랑 사귀기로 했으니까. 설령 네 아이라고 해도 라핀은 너한테 가지 않아.”
“…사귀기로 했다고? 하, 보나 마나 협박했겠지.”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라핀은 내가 좋다고 했어.”
누아는 이전에 라핀을 잡아먹겠다고 협박한 전적이 있어 찔리긴 했지만, 라핀이 저를 좋아한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입꼬리가 씰룩거릴 정도로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런 소중한 기억을 블란과 나눴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블란 놈을 떼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누아의 의도와는 달리 어쩐지 블란의 표정은 더 당당해졌다.
“라핀이 너 같은 새끼를 좋아하는 것도, 아이의 핏줄이 누구인지도 라핀을 만나봐야 확인할 수 있겠네.”
“…….”
“네 말대로 네 아이라면 나도 순순히 손 떼지. 그러니까 어서 보여 달라고.”
누아는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지만, 블란은 누아가 허풍을 떠는 거라고 확신했다. 라핀의 안목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저 쓰레기 같은 새끼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라핀에게 직접 물어보면 단번에 아니라고 할 게 뻔했다. 그때 라핀에게 저와 누아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된다. 블란은 라핀이 누아처럼 시커먼 새끼보다는 저를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블란이 어떻게든 라핀을 만나 꼬실 생각을 하는 사이, 누아는 생각에 잠겼다. 오늘 어떻게든 블란을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저 새끼는 아이가 제 핏줄인지 확인하러 다시 올 것이다. 무조건이었다.
게다가 라핀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진짜였다. 아이가 누아의 아이이고, 라핀이 블란을 확실하게 거절하면. 그러면 더는 블란이 이곳을 찾아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잠깐 생각하던 누아는 블란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내 아이가 맞으면, 그러면 더는 안 오겠다는 거지?”
“사귀는 사이라는 건 왜 빼? 둘이 정말 마음 맞아 사귀는 사이고 아이도 내 핏줄이 아니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 더는 안 찾아오겠어.”
“…….”
“대신 하나라도 아닐 시에는, 약속한 대로 늑대 소굴로 데려와야 할 거야.”
마음 맞아 사귀는 중인 건 사실이었으므로 당당할 수 있었지만, 라핀의 아이가 누구의 핏줄을 물려받게 될지는 반반이었다. 라핀을 데리고 있는 누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큰 도박이었다.
그렇지만…,
“알겠어.”
누아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라핀이 블란의 아이를 낳는다면 블란은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라핀이 블란에게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블란이 제 아이를 키우겠다고 고집하면 아이만 보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안 돼.”
“뭐? 이 새끼가…, 또 그딴 말로 나를 속일 작정이지?”
블란은 기다릴 만큼 많이 기다렸다. 이번에도 말장난 같은 것으로 제 뒤통수를 칠까 봐 신경이 머리끝까지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또 다음으로 미루자고?
블란이 장난하냐며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지만, 누아는 저도 어쩔 수 없다며 대답했다.
“네 말대로 라핀은 지금 아이를 낳는 중이고,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적어도… 오늘은 안 돼.”
“정말 낳는 중이었어? 하…, 역시 허세였군.”
블란은 묘한 냄새에 라핀이 혹시 안에서 아이를 낳는 중인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설마 진짜였을 줄은 몰랐다.
아이가 누구의 핏줄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라핀의 앞에서는 온갖 선한 척 다 해놓고서는, 사실 남의 핏줄이면 제대로 키울 생각조차 안 하고 있던 게 아닌지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블란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다, 표정을 냉랭히 굳히며 말을 이었다.
“라핀이 내 아이를 낳으면, 네가 어떻게 할 줄 알고 다음으로 미뤄? 장난해?”
“하아…, 내가 아무리 쓰레기여도 아이를 바꿔치기하거나 죽이진 않아.”
“말장난이나 하는 새끼를 어떻게 믿어. 적어도 아이는 확인해야겠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블란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겠다는 듯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자업자득인가….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상대를 만나버렸다. 누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통증이 느껴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
블란과 누아는 결국 오늘 아이만 확인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블란은 원래 라핀에게 정말 둘이 마음 맞아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까지 확인하려 했지만, 출산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찌 됐든 몇 개월 만에 라핀을 볼 수 있고, 다음에도 보기로 했으니 괜찮았다.
누아와 블란은 라핀이 있는 곳과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앉아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대부분은 블란이 누아에게 라핀의 상태를 묻는 것이었다. 블란은 고집을 부려 아이를 확인하겠다고 했지만, 라핀을 진심으로 좋아하기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늑대의 눈에 라핀은 너무 작고 연약했고, 그 몸에 어떻게 늑대의 아이를 뱄는지 아직도 신기했다. 둘이 라핀의 안에 사정한 양을 생각하면 불가능도 가능케 만들 양이었지만 정말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둘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토끼가 낑낑 우는 소리가 멎고 라핀의 몸 위를 뒤덮고 있던 풀의 움직임이 멎었다.
“…….”
이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병아리가 우는 것처럼 삐약거리는 소리였는데, 확실한 건 라핀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드디어 아이가 나온 듯했다.
둘은 아이가 누구의 핏줄을 물려받았는지 그렇게 궁금해했으면서, 막상 아이가 나오니 돌처럼 굳었다. 누구 하나 먼저 확인하려는 이가 없었다. 둘 다 라핀의 아이가 제 아이이길 원했지만, 아직 누군가의 부모가 될 준비를 마치기에는 일렀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둘은 조심스럽게 라핀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잘 나왔는지도 궁금했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한 라핀의 상태도 걱정됐다.
누아는 조심스럽게 수풀 더미를 들춰 안쪽을 확인했다. 아직도 하얀 토끼 모양을 한 라핀은 색색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걸 보아 죽은 것 같지는 않고 지쳐서 탈진한 것처럼 보였다. 아이를 낳다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던 누아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응?”
안심한 상태로 라핀을 바라보던 중, 라핀의 아래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겨울이라 풍성해진 하얀 털 아래에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품 아래에 두 마리의 형체가 바들거리며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둘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
“으으….”
라핀은 희미하게 정신이 들자마자 옅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 힘들고 아파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당장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낳은 기억은 있는데 연달아 느껴지는 배의 통증에 어떻게 생겼는지, 살았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기절해버렸다.
끙끙거리며 간신히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부터 보였다. 아무래도 기절한 저를 누아가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모양인지 저는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숨소리가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아가 옆으로 턱을 괸 채 졸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작은 수인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
아이가 건강하게 나왔는지 확인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보다도 종족과 생김새를 보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 곁에서 곤히 자는 아이는 분명… 하얀 늑대와 검은 토끼였다.
라핀이 아이를 확인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새, 꾸벅꾸벅 졸고 있던 누아가 눈을 떴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라핀이 깨어난 걸 알아챘다.
“으음…, 일어났어? 깜빡 잠들었다.”
“저, 누아 님….”
라핀은 떨리는 눈으로 누아를 바라봤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두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술렁이고 있었다. 라핀은 목이 메어 침을 꼴깍이고는, 뒤늦게 그에게 물었다.
“이 아이들은 혹시….”
“네 아이야.”
라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누아가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정말?
정말로 이 아가들이 내 몸에서 나왔다고?
그렇게 힘들어하며 제 배로 낳았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라핀이 믿기 어려운 듯 가만히 있는 동안 누아가 곤히 자는 아이들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검은 토끼는 노란 눈, 흰 늑대는 검은 눈을 가졌더라. 어떻게 딱 반반씩 닮았는지….”
아까, 누아도 블란과 아이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했는데 라핀이 늑대를 낳은 것도 놀라웠고, 누가 봐도 아이가 누아와 라핀을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란의 은빛 털이나 푸른 눈동자의 특징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누아는 어떤 아이를 낳아도 키우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제 아이임을 확인하자마자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반면, 블란은 제 아이가 아니라는 것에 충격을 받은 건지 실망을 한 건지 누아도 눈치채지 못한 새에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라핀과 아이들을 집 안 침대로 옮겨놓고 나자 라핀도 아이도 무사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렇게 함께 잠들었던 것이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누아가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동안, 라핀은 허탈하게 숨을 터트렸다.
“…하.”
라핀은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하루하루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아이가 누아의 핏줄인 것을 확인하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상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간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가장 저를 괴롭히던 것은 블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는 경중을 가리자면 다른 고민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괜히 제 욕심 때문에 낳았다가 아이가 불행한 건 아닌지와 같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누아의 핏줄을 원했고, 제 잘못된 선택으로 그의 아이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라핀의 표정이 허탈함으로 물들고 있을 때, 누아가 그런 라핀을 바라보다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라핀, 내가 너를 왜 좋아하게 됐냐고 물었었지.”
“…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해 보니, 오늘 그가 제 발을 씻겨줄 때 나눴던 대화를 말하는 듯했다.
정확히는 제가 물어본 게 아니라 대화가 자연스레 흘러간 거였는데…. 아무튼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느냐며 라핀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까, 네 아랫도리에 보지가 달린 것 때문에 눈이 갔었던 것 같거든.”
“…….”
아니…. 겨우 그것 때문에? 그런 이유로 좋아질 수도 있나? 오히려 싫어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제 몸에 저주처럼 남은 낙인인데…. 설마 늑대들은 보지만 달리면 다 좋아하는 걸까? 블란도 제게 호감을 보였었는데, 설마 그런 가벼운 이유였나?
나는 그런 이유로 누아를 좋아한 게 아니었는데….
긴장이 확 풀릴 정도로 황당하고, 허탈하고, 서운하고…. 괜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라핀이 한껏 울적해지고 있는데, 누아가 그 말이 끝이 아니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계기였을 뿐인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네가 체구가 작은 것도, 피부가 하얀 것도, 눈이 새카매서 보석 같은 것도 예쁘게 보였어.”
“…….”
“귀도 길쭉해서 요염하고, 꼬리도 짧고 뭉툭해서 귀엽고.”
“자, 잠깐만요. 아래에 그, 그거 달린 것 빼고는 모든 토끼가 다 그렇잖아요?”
라핀은 그의 말을 듣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그의 말을 끊었다. 막상 이유를 말해주니 제가 다 민망한데,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죄다 흰 토끼들이 공통으로 가진 특징이었다. 오직 라핀만이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누아가 좋은 이유를 하나로 짚기는 뭐하지만, 저는 예를 들어 털이 까맣고 눈이 노랗고 꼬리가 긴 것 때문에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누아는 저를 그런 단순한 이유로 좋아한다고 하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샐쭉해지는 라핀에게 누아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대꾸했다.
“아닌데? 그럼 내가 토끼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았겠어? 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잡아먹지도 못했겠지.”
“…….”
아, 맞다. 누아는 토끼를 잡아먹는 늑대였지. 그것도 토끼 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늑대. 최근 들어서는 저를 잡아먹겠다는 협박도 하지 않아서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면 정말로 누아한테는 그게 흰 토끼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한 번도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 점들을 꼽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라핀이 민망함에 이불 아래에 숨겨진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자, 누아가 손을 뻗어 라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살 정리해줬다.
“너는 모르겠지만, 암컷 늑대들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
“…….”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이었으나, 라핀은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다른 애들한테는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니…. 그러면 지금,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걸까?
라핀은 이전에 다른 토끼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라 그게 사랑이었는지 가물가물하고 지금 누아를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라핀의 첫사랑은 따로 있었다.
뭣도 모를 아주 어릴 적에는 아무에게나 설렐 법도 한데, 그런 적도 없고 제가 처음이라니. 사실 첫사랑이라고 해봐야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핀은 제 첫사랑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털 빛깔이 콩고물 묻은 것처럼 갈색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우습게도, 변명일지도 모르는 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까 그가 말한 제게 반하게 된 이유가 특별한 거라고 된 것처럼 느껴졌다.
라핀은 가슴께가 아플 정도로 빠듯해지는 것을 느끼다가, 조금 진정이 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상해요.”
“뭐?”
“이유를 들으니까, 더욱더 저 같은 걸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의 첫사랑이란 말에 동요하고 심장이 뛰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그가 저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라핀이 솔직하게 대꾸하자, 누아가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근데 마음이 그렇게 된 걸 어떡해.”
“…….”
그건… 그렇네. 논리도 없고 이상한 이유였지만, 라핀 역시 누아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잘난 외모도 좋고 사냥 수완이 뛰어난 것도 좋고, 무뚝뚝하다가 다정해진 것도 좋은데… 말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어려웠다.
굳이 뭣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하기보다는, 여우비가 스며들듯이 마음이 기울었다는 쪽이 옳았으니까.
크게 반박하지 못하고 있던 라핀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잠깐만요.”
“응?”
“제가 처음이면…, 식사할 때 무릎에 앉게 하고, 아까 바, 발도 씻겨주고 하는 걸 왜 당연하다고 했어요?”
“…….”
“그것도 해봤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사귀는 게 처음이라면 저처럼 잘 몰라야 정상 아닌가? 게다가 누아는 저를 무릎에 앉힐 때도 그렇고, 발을 씻겨줄 때도 그렇고 모든 걸 자연스럽게 행했다. ‘연인이라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상한 문화라고 생각했지만, 늑대 고유의 문화라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훨씬, 많이 이상했다. 누아의 첫사랑이 저라면 사귀는 것도 분명 처음일 텐데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굴었던 거지? 늑대의 문화라고 하더라도 처음이라면 어색할 법도 한데….
라핀이 진실을 밝히라며 빤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자, 누아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해봤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연기한 적은 없어. 그리고 늑대 사이에선 그게 공공연한 문화라고 들어서 아는 거라고.”
“…….”
“뭘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봐?”
뭐긴, 이번만큼은 절대로 아닌 것 같다고 확신이 들으니까 쳐다보는 거지.
“…아니에요.”
그렇지만 라핀은 더 추궁하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그의 무릎에 앉은 거나 발을 씻겨준 것이나 제가 손해 본 것도 아니니 더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연인이라면 못 해줄 행위도 아니고 말이다.
라핀이 대화를 끊고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려고 하는데, 누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어 시선을 붙잡았다.
“아, 아무튼 라핀.”
“네?”
“그러니까…, 함께 살림 차리게 된 거 우울해하지 않았으면 해.”
“…네?”
라핀은 대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우울해한 건 맞는데, 함께 살림을 차리게 된 거로 우울해했다고? 무슨 소리지?
라핀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누아가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다 뒤늦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울적한 표정 짓고 있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
딱히 그와 살림을 차리게 된 걸 우울해한 적은 없는데. 제 이중성에 실망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제 표정을 보고 작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구구절절 저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건가? 그런 이유라면 조금 귀여울 듯한데, 제가 멋대로 부풀려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아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머니까.
라핀은 제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울하지 않아요. 단지….”
라핀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리자, 누아의 표정이 궁금증과 근심으로 물들었다. ‘단지?’ 하며 애타게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겠지. 라핀은 제가 어쩔 수 없이 가정을 꾸리는 거라고 오해하는 것이 싫어, 고해성사하듯 마음속 깊은 곳에 걸어 잠그고 있던 문을 열었다.
“누아 님 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뭐?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데?”
“저는,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선뜻 낳거나 지우겠다고 선택을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
“막상 낳고 나니까, 누아 님의 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작 누구의 아이인지 고민하느라 아이를 지울 뻔했다는 게… 제가 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말을 마치니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확 차올랐다. 줄곧 아이를 지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우지 못했었는데…. 누아가 구해온 약을 먹었더라면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핀이 제가 나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 눈물을 주르륵 흘리자 진지하게 듣던 누아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누아는 당장이라도 라핀을 품에 안고 다독이고 싶었지만, 둘 사이에 아기가 누워 있어 어쩔 수 없이 라핀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라, 라핀! 그, 그게 왜 나쁜 거야. 하나도 안 나빠.”
“정말요?”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지.”
누아는 라핀을 어떻게든 위로해 보려 했지만,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 없는 모난 입이라 그럴싸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라핀을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좀 더 착하게 살았더라면 라핀과 어울리는 상대가 됐을 텐데, 제 인생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누아는 라핀의 눈물을 멎게 할 그럴싸한 말을 떠올리다, 조심스럽게 마저 입을 열었다.
“정말 나쁜 건, 어떻게든 널 내 곁에 두려고 한 나야.”
“…….”
“네 인생,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책임’이라는 말로 내 곁에 두려고 했다고.”
누아는 라핀이 누구의 아이를 낳든 목숨을 바쳐서 책임지기로 했지만, 사실 말만 그럴싸한 것이지 누아의 이기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오직 라핀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책임이니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겠다는 생각에는 과장이 없긴 했지만, 속내는 시커멓기만 했다.
라핀이 제 속내를 안다면 기함하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누아는 고작 ‘내가 더 나빠’라고 말하는 게 위로가 될 리가 있느냐고,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라핀은 거짓말처럼 눈물을 멈췄다. 라핀은 토끼 모습일 때처럼 코끝을 붉게 물들인 채 훌쩍였다.
“그, 그게 뭐가 나빠요…. 남의 아이라도, 키우겠다는 게 쉽지 않은 건 저도 안다고요….”
“…….”
누아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제 시커먼 속내에 라핀이 도망칠 거라는 누아의 생각과 달리, 라핀은 누아를 옹호해주고 있었다.
그런 라핀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위로를 해줘야 하는 것도 잊고 마음이 크게 벅차오른 누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곤히 자는 두 아이를 피해 라핀의 몸 위에 올라타 입술을 맞췄다.
“사랑해.”
“…….”
“시작은 이상했을지 몰라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해줄게.”
이미 라핀에게 제 마음은 고백했지만, 누아는 다시 한번 더 제 마음을 고백했다.
쓰레기 같은 짓을 한 제게 나쁘지 않다고 위로를 해주는 라핀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옆에서 자고 있는데도 파렴치한 짓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이성이 흔들렸다.
누아가 라핀의 몸을 와락 껴안자, 라핀은 두 눈을 깜빡이다가 그의 널따란 등 위로 손을 올렸다.
“…저도 노력할게요.”
라핀도 다짐하듯 말을 속삭였다.
라핀은 한 번도 누군가와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거라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몸이라, 제가 아는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저주 같은 존재라고. 평생 냉혹한 산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게 제 빌어먹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컷 토끼의 몸으로 수컷 늑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도 늑대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평범함과 거리가 멀지도 몰라도, 이것이 제 종착점이었다.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기까지는 맞춰 나가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쩌면 라핀이 걱정했던 대로 큰 시련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라핀은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아이가 있는 지금 더 큰 안정감을 느꼈다.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확신했다.
라핀은 부디, 지금처럼 안정감 있고 충족감으로 가득한 생활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