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희비
수인 세계는 많이 발전했지만 전자 기술이나 수술 같은 정밀한 기술은 없었다. 이곳에서 지식을 얻는 가장 좋은 매개체는 책이었다. 누아가 육아에 대해서 알아볼 때 책부터 찾아본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렇다 보니 누아는 당연히 아이를 지우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책부터 찾아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생에서는 아이를 지우려고 하는 이가 없었다. 아이는 종족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고, 임신은 신의 축복으로 생각했다. 지울 생각도 하지 않는데 방법을 쓴 책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누아는 수많은 동물을 만나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물어볼 때마다 동물들은 아이를 왜 지우냐며 누아를 미친놈 취급했지만 굳이 그들에게 자세한 내막을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미친놈 취급받아도 별로 상관이 없고, 거슬리면 죽이면 그만이었으니까.
겨우 알아낸 방법은 크게 다쳐야 하는 것밖에 없어 라핀에게 알리기는 꺼려졌다. 계획하에 일부러 다치게 한다고 해도 라핀이 위험한 건 변치 않았다. 수인 세계에는 수술도 없으니 크게 다쳤다가 라핀이 회복을 못 하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제가 라핀을 좋아한다는 것을 라핀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만, 라핀이 다치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런 걸 알려줘선 안 되겠지.
누아가 근심에 잠겨 동굴에 도착해가고 있을 때,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오네.”
“…블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블란이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 동굴 근처에서 블란의 체취가 느껴진다 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나? 누아가 한껏 경계하며 블란을 바라보자, 그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확인 좀 하려고 왔는데.”
누아는 블란에게 이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미행한 건지부터 묻고 싶었지만 놈은 제 할 말부터 꺼내고 있었다.
하기야, 이곳의 위치를 아는 건 저밖에 없었으니 미행밖에 더 있나. 물어보는 것이 더 멍청한 것 같아 누아가 말을 삼키자, 블란이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말을 이었다.
“네가 아이를 지우는 방법에 관해 묻고 다닌다던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
누아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정색했다.
젠장, 이럴까 봐 물어볼 때마다 제가 묻고 다닌다는 건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는데 그새 입 싼 새끼가 블란에게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앞에서는 제 편인 척하다가 뒤에서는 야비하게 블란한테 붙는 놈들도 더러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누가 누구 편인지 알게 될 줄이야.
“알 필요 없잖아.”
누아가 여러모로 짜증을 느끼며 질문을 무시하려 하자, 블란이 누아의 어깨를 팍 밀치며 동굴 안의 단단한 돌벽으로 밀어 넣었다.
하필 동굴 길목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회피할 수도 없는데…. 누아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는데, 블란이 말을 이었다.
“전부터 의심스럽다 싶었는데…, 역시 네 놈이 라핀을 데리고 있는 거지?”
“…….”
그저 소문만 듣고 온 줄 알았더니, 거기까지 알아낸 건가.
저번에 블란을 늑대 소굴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라핀이 죽었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는데 연기였나? 저도 블란을 속이려고 허위 소문을 퍼뜨렸지만, 정말 징글징글한 놈이었다.
일단 블란도 추측일 뿐인 것 같으니 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뺌을 했다.
“무슨 라핀이야? 헛소리할 거면 꺼져.”
“네놈이 임신시킬 만한 건 라핀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왜 자꾸 나한테서 라핀을 찾냐고? 그놈은 탈출해서 행방불명된 지 오래야. 그리고 아이는 내 얘기 아니니까 알 필요 없고.”
“늑대 무리 중에서는 임신한 암컷이 하나도 없는 거 다 확인했어.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누아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씨발, 그딴 건 왜 확인한 거야.
확실히, 누아가 쓰레기 취급 받아가며 질 나쁜 정보를 수소문할 정도로 가까운 지인이라고는 늑대 동료들밖에 없긴 했다. 다른 종족 중에서는 라핀 외의 가까운 이가 없으니까.
블란 놈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라핀의 일이라 그런지 유독 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누아가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말없이 상황을 살피는 동안, 블란이 동굴 안쪽으로 눈짓을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네놈이 이 동굴 안에 라핀을 꼭꼭 숨겨놓은 것 같거든? 이 안에 집이 있는 것도 봤고.”
“그런 거 아니야.”
“집들이 한번 시켜주지 그래? 우리가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새로운 집 한번 안 보여주려고?”
“참나, 누가 들으면 우리가 절친한 사이인 줄 알겠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누아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하자, 블란이 표정을 확연히 굳히며 동굴 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강한 힘에 주먹 쥔 손이 까질 정도였으나, 그는 아픈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누아에게 윽박질렀다.
“내가 한가하게 집들이하자고 이러는 것처럼 보여?! 당장 문 열라고!”
“…….”
블란이 당장 눈앞에서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댔지만, 누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무서운 것은 라핀을 그에게 빼앗기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무서움과 별개로 끈질긴 자식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놈은 집 안을 확인시켜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반응이었다.
놈과 일대일로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라핀과 동맹이 엮인 문제라 그럴 수도 없고…. 그럴싸한 거짓말로 블란을 속이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왔다. 녀석도 확신이 있으니까 숨어서 저를 감시하는 것도 그만두고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다.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건만, 결국 피를 보아야 악연이 끝나려는 걸까.
잠깐 생각하던 누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왜 아이를 지우는 방법에 관해 물어보고 다니느냐고 물었지.”
“그래.”
블란은 대답하면서도 위협을 멈추지 않았다. 또 허튼소리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저 새끼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 말하기 싫은데…. 누아는 제가 한 선택이 맞는지 한참을 뜸 들이며 고민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이 임신했어.”
“하, 역시 네가 데리고 있었군.”
블란 역시 세간에 떠도는 소문 내용을 들었던 터라 라핀이 임신했다는 건 추측한 바였다. 수컷 토끼가 늑대의 아이를 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라핀에게는 보지가 달려 있고 수컷도 임신시킬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수도 없이 사정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누아가 저를 속이고 몰래 라핀을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개할 뿐이었다.
누아는 고작 블란에게 비아냥이나 들으려고 솔직하게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더는 라핀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선을 긋기 위함이었다.
“물론, 내 아이야.”
사실 아직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블란에게 알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알았다가는 더 집착이 심해질 것이고 무조건 제 아이일 거라며 라핀을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누아가 거짓말로 블란의 의심을 떨치려고 하자, 블란이 작게 조소를 흘렸다.
“웃기지 마. 네 아이인데 왜 지울 방법을 수소문하고 다니는데? 내 아이라서 지우겠다는 거 아니야?”
“네 희망 사항 말하지 말고. 나는 라핀이 지우길 원하니까 방법을 찾는 것뿐이야.”
“네 아이를 지우도록 정보를 직접 캐묻고 다닌다고?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네 핏줄에, 네가 좋아하는 상대면 당연히 낳게 해야지.”
“넌 그럴지 몰라도, 난 라핀이 싫어하는 걸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딴 말도 안 되는 이유에 내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야생적 관념과는 전혀 다른 누아의 행보에, 블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딴 빈약한 이유를 대봐야 믿지 않는다는 투였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누아는 라핀이 제 아이를 품었을 확률이 더 높은데도 지울 방법을 찾아 다니는 중이었다. 오직 라핀이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이기적인 이유만으로.
누아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블란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네 아이가 맞다고 쳐. 그럼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설마 라핀이 네 아이 좀 뱄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서 이래?”
“…아니.”
누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심 그러기를 바라긴 했지만, 단순하게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핀이 제 아이를 품었다는 것으로도 블란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손해 볼 것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도 말한 이유는….
“너도 라핀이 내 아이를 낳는 건 싫겠지. 그러니까 아이 지우는 방법을 알아봐 줘.”
“…뭐?”
블란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반응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후, 블란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하하하, 한참을 웃던 그는 웃겨서 눈물까지 난다는 듯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거…, 알고는 있었지만 미친 새끼네. 라핀이 품은 애가 내 아이일 수도 있는데, 내가 알아 온 방법으로 지우라고?”
블란은 라핀이 품은 아이가 제 아이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듯했다.
하긴, 저 역시 블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있긴 했다. 그렇지만 동요를 드러내선 안 됐다. 누아는 뻔뻔하게 표정 변화 없이 그를 설득했다.
“생각을 해봐. 라핀이 누구 아이를 품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해?”
“그건….”
블란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라핀이 도망가기 직전까지 누아가 철통 보안을 하는 바람에 라핀과 만난 적도 몇 번 없었다. 최근에 몸을 맞댄 건 누아가 라핀에게 노팅한 것을 알았을 때, 그때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누아의 아이일 확률이 높았다. 다른 것도 아닌 노팅까지 했으니 누아의 아이일 확률이 높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블란은 처절하게 누아의 아이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음에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었다.
블란이 절망감에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트렸다. 그것을 본 누아는 그가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라핀을 처음으로 품은 건 너였을지 몰라도, 마지막은 나야.”
“이….”
씨발 새끼가…!
블란이 흉흉한 눈으로 누아를 바라보며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저를 도발해오는 누아에게 고함을 지르고 멱살을 쥐고 싶었지만, 화를 내면 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 그러지 못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지만, 승부에서 져본 적이 없는 블란에게는 예민한 문제였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누아 앞에서는 더더욱.
블란은 애써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는, 여유로운 체를 하며 누아에게 물었다.
“…알아봐 주면?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블란의 생각에, 놈이 라핀을 데리고 있다는 것과 라핀이 임신한 상태라는 걸 생각보다 쉽게 시인하고 부탁하는 걸 보면 그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제 아이일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라핀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법을 수소문하고 다니는 걸 보면…. 누아와 라핀 사이에 어떠한 불화가 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하면 라핀을 누아에게서 데려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블란이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며 묻자 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뭘 줘야 해? 라핀이 내 아이를 낳지 않는 것만으로도 동기는 충분할 텐데.”
“이런, 씨발….”
누아가 한없이 가볍게 대답하자, 블란이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맞는 말이었다. 블란은 라핀이 누아의 아이를 낳기를 절대 원치 않았다. 아무리 제가 라핀을 좋아한다고 한다지만, 누아의 아이까지 제가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방금까지 집들이를 해야겠다며 친한 척을 했지만 두 늑대는 악연에 가까웠다. 가능하면 평생 안 보고 살고 싶은 수준이었다. 만일 정말로 라핀이 누아의 아이를 낳는다면…. 라핀은 책임져도 아이는 넘길 거다.
아무래도 라핀과 누아 사이의 아이가 걸린 일이라, 제가 그에게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는 게 없는 듯했다. 블란은 잠시간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를 지우려면… 라핀이 크게 다치면 될 거야.”
“내가 그걸 모르겠어? 그런 건 안 돼. 라핀의 몸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야, 나라고 라핀이 다치는 걸 원하는 줄 알아? 네가 방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말한 것뿐이야.”
누아의 냉정한 반응에, 블란이 괜히 언성을 높이며 해명했다. 블란도 라핀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누아의 아이를 지우는 일이라고 해도 몸에 무리가 가는 걸 하길 원치 않았다. 그저 방법을 찾기에 아는 걸 말해줬을 뿐이었다.
저를 쓰레기 취급하는 듯한 누아의 반응에 블란은 화가 확 올라왔지만, 겨우 분노를 눌러 삼키며 눈을 감았다.
“하아, 알았어. 최대한 안전한 방법으로 알아봐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이미 조건은 말했을 텐데.”
“고작 그딴 거로 타협하기엔 너무 싸지 않나?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야생에서 아이를 지우는 것은 금기시된 것도 아니었고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몇날 며칠을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
블란의 앞에서는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 누아는 그렇지 못했다. 라핀의 출산이 임박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뤘다가 라핀이 아이를 낳게 된다면… 누아에겐 다행이었지만, 어쩌면 라핀이 극단적으로 다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됐다. 블란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아이를 지우는 안전한 방법을 찾아주는 것은 제 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라핀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누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이 말을 이었다.
“내가 방법을 찾아오면, 라핀을 다시 늑대 소굴로 데려와.”
“너한테 라핀을 넘기라는 얘기야? 그건 안 돼.”
“라핀의 의견을 따라주고 싶다며. 선택권을 주자는 거지. 너인지, 나인지.”
“…라핀은 너나 나나, 둘 다 싫다고 할 텐데.”
누아가 조금 힘없이 대답했다. 누아는 이미 한 번 차인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만일 라핀이 저에게 마음이 있었더라면 아이를 지우자고 하는 일도, 지울 방법을 제게 알아 오라고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전에 누아가 라핀에게 블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라핀은 단호하게 싫다고 대놓고 말했었다. 아마 블란도 저와 같은 미래일 듯했다.
둘 다 선택하지 않으니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라핀이 제 마음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차이는 것도 굳이 두 번은 경험하기 싫은 것이었다. 게다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게 라핀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강제로 시키는 거 아닌가.
누아가 답지 않게 자신 없는 투로 말하자 블란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까봐야 아는 거 아닌가. 나한테는 라핀에게 잘해줄 기회조차 주지 않았잖아. 이제부터 잘해주면 되지.”
“…….”
기회….
기회가 있었더라면 라핀이 블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미 수많은 기회를 지나쳤으면서, 어딜 보고 라핀이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자신만만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아는 코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으며 물었다.
“만일, 라핀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땐 셋이 같이 살아야지.”
“뭐야? 방금은 라핀 의견을 따라준다면서? 말이 다르잖아.”
“너 영영 라핀 안 보고 살 수 있어? 다른 짝이랑 만나서 새집 살림을 할 수도 있는 건데?”
“…….”
누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라핀이 다른 짝을 만난다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악질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라핀을 놓을 수 없었다.
물론 라핀이 블란의 짝이 되는 것도 그만큼 싫었지만…, 라핀을 영영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누아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어. 단, 방법이 확실한지 보고 난 후에야. 라핀이 확실하게 아이를 지우게 되면, 그때 데려가지.”
“흠, 좋아.”
블란이 벽을 내리쳤던 주먹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라핀을 보지 못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라핀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때에 비하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 라핀을 보지 못한다지만, 조급하진 않았다. 블란은 특유의 화려한 외모와 능글맞은 성격으로 동물을 꾀어내는 것을 잘해, 꽤 유명한 마당발이었다. 그러니 정보전에서는 누아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라핀을 데리고 있는 누아에게 유리한 상황 같으면서도, 블란에게도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블란은 표정을 너그러이 풀어 보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또 보지. 다음에는 라핀도 같이 보자고.”
“…….”
누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블란은 한시라도 더 빠르게 라핀을 만나기 위해 동굴을 빠져나갔다.
동굴에 남은 누아는 눈발 속으로 사라져가는 블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한참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 누아는 웬일로 거실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는 라핀과 맞닥뜨렸다.
누아가 평소 워낙 이른 시간에 먹이 채집과 수소문을 끝내고 돌아오는 탓에, 라핀은 자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라핀이 소파에서 불편하게 졸고 있었다.
침대에서 편히 자면 될 것을 왜 여기에서 불편하게 이러고 있지? 라핀을 침대로 옮기려고 다가가던 중, 누아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를 마중 나온 걸까?
헛된 기대일지도 모른다고, 라핀은 별생각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누아는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단숨에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아가 소파 앞으로 다가가자 라핀이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스르르 떴다. 라핀은 초점 없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누아를 올려다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누아 님….”
“추운데 왜 여기서 졸고 있어.”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지만, 누아는 애써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며 라핀을 마주했다.
누아는 라핀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고백까지 한 마당인데 제 성격 때문인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게 어려웠다. 좋아한다고 티를 내는 게 낯간지러웠다. 도대체 고백은 어떤 용기로 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덤덤한 척 대답하며 라핀을 침대에서 쉬게 하려는데, 라핀이 대답했다.
“뭐 알아낸 거 있나 싶어서요.”
“…….”
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누아는 대번 실망스러워졌다. 라핀은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마중 나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호감을 얻어야 할 마당에 누아는 오늘 허탕을 쳤으며 블란에게 거처를 들키기까지 했다. 라핀에 대한 정보까지도. 누아는 음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대한 정보를 찾아보고는 있는데… 어렵네.”
“…….”
누아는 늑대 무리에서는 우두머리였고, 사냥에서는 단연 일등 공신이었다. 초식 동물이 먹는 음식도 잘 구해와 한 번도 꿀려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제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누아가 자신 없이 대답하자 라핀이 어느새 졸음이 다 깬 눈으로 누아를 바라봤다. 마주친 서로의 눈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얽혀들었지만, 누아는 괜히 라핀이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것만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배고프겠다. 아침 챙겨줄 테니까, 기다려.”
“…….”
라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라핀은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났고, 집에 아무도 없기에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누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소파에서 깜빡 졸았던 거고.
깼을 땐 누아가 와 있었는데, 고백도 무시하고 냉정하게 굴어놓고서는 마중을 나와 있었다는 것이 민망했다. 그래서 용건이 있었던 척 묻는다는 것이 누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하아, 누아에게 정을 줘서는 안 되고, 그러지 말자고 냉정한 방법까지 제시해 놓고서는 왜 자꾸 그의 눈치를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저는 토끼이고, 그는 늑대이다 보니 본능적으로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일까?
라핀이 눈치를 살피며 그를 따라가 식탁 의자에 앉는 동안, 누아는 아침에 부지런히 구해온 식자재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누아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자, 금방 식탁 위는 음식들로 가득 메워졌다. 평소에도 라핀이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구해오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가짓수가 많았다. 최근 라핀이 임신 때문에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라핀이 평소 잘 먹는 음식들로 채운 상차림이었다.
진수성찬에 라핀이 놀라고 있을 때, 누아가 맞은편 식탁 의자에 앉으며 음식을 권했다.
“얼른 먹어. 배고프겠다.”
“뭐, 뭘 이렇게 많이 챙겼어요?”
“요즘 잘 못 먹잖아.”
“잘 못 먹진 않았는데….”
라핀은 수많은 음식을 보며 침을 꼴깍였다.
처음에는 제가 단순히 살이 찐 줄 알고 음식을 자제하던 것이었고,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다이어트는 그만뒀지만 그래도 제가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조금 적게 먹은 정도였다.
식사량을 많이 줄이지 않았는데도 누아에게는 그 미묘한 차이가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매일 삼시 세끼를 함께 식사하는 것도 모자라 제가 먹는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기까지 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긴 했다.
어쨌든 누아는 제가 입맛이 없는 줄 아는 눈치였지만, 사실 그 반대였다. 누아가 구해다 준 신선한 음식에는 걸신이 들린 것처럼 식욕이 돋았다. 아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누아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도, 배는 어서 음식을 넣어달라고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음식을 한입 먹었지만 왜인지 성에 차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건초에 이어 당근을 먹어도 뭔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
“왜 그래? 입맛이 없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분명 입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아가 정성스레 차려준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있었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과.”
“응? 뭐라고?”
“사과가… 먹고 싶어요.”
식탁 위를 가득 메운 재료들을 흘겨보던 라핀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제 앞에 수많은 음식이 있었지만 콕 짚어 사과를 먹고 싶었다. 빨갛고 상큼하고 당도 높은 사과가.
살면서 몇 번 먹어본 적도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먹고 싶었다.
“사, 사과? 지금 겨울이라서 없을 텐데….”
라핀의 요구에 누아가 드물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아는 라핀이 원한다면 뭐든 가져다줄 의향이 있고 먹이를 구해 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구해 오겠다고 확언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생에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니니, 제철에 나는 과일만 구할 수 있었다. 이런 계절에, 산에서 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찾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누아가 못 구해 오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라핀은 대번 표정을 굳혔다. 라핀은 누아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끝내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임신한 것도 서러운데, 사과도 못 먹고….”
이상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단지 사과가 먹고 싶을 뿐이었는데, 누아가 못 구해 온다고 하니 모든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어린애도 아닌데 원하는 음식 하나 못 먹었다고 눈물이 볼가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세상을 잃은 것처럼 서러웠다. 사과를 먹지 못하는 서러움과 임신했다는 서러움,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라핀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흐으으….”
“라, 라핀.”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제가 왜 이러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감정의 폭포에 저도 휘말려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눈물바다가 된 식사 자리에 누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말을 떠듬거리며 라핀을 살피던 누아가 다급하게 일어나며 다른 의자에 걸쳐있던 외투를 껴입었다.
“아, 알았어. 울지 마. 구해 올게.”
“흐으, 네…? 사과를, 흐, 구해 온다고요? 겨울이라서 못 구하는 거, 아니었어요…?”
“…있겠지.”
어떻게든 구해 오겠다는 누아의 모습에 펑펑 쏟아지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라핀이 거짓말처럼 눈물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누아가 허리를 굽혀 라핀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엄지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싹싹 닦아줬다.
“일단 먹고 있어.”
“…네.”
라핀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가 피식 웃고는 허리를 펴고 밖으로 나갔다.
쿵!
묵직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라핀은 제가 사과 하나 때문에 울고불고했던 것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랬지?
라핀은 물끄러미 고개를 내려 부푼 제 배를 내려다봤다. 입맛도 그렇고, 아이 때문에 감정 또한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나간 누아를 붙잡고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아이가 먹고 싶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하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쪽팔려….”
라핀은 작게 중얼거리며 제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하나둘씩 해치워 나갔다.
아까는 당장 사과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며불며 서러워했는데, 누아가 사과를 구해 준다고 해서 그런지 마음이 평온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지경인데도 단순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주체할 수 없이 오락가락했다.
***
“뭐야…. 왜 안 오지?”
아침밥을 챙겨주고 나간 누아는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데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 탓에 라핀은 혼자서 점심을 챙겨 먹어야 했고, 뒷정리도 스스로 해야 했다. 아침에 누아가 챙겨준 것이 많이 남아 있던지라 점심을 차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평소 누아가 했던 일을 하면서, 라핀은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를 혼자 남겨두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치고는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데…. 제가 탈출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답지 않았다. 사과를 찾으러 간다고 해놓고서는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거지? 설마 아직도 사과를 구하는 중인가?
나가기 직전의 누아는 한겨울이라 사과를 구하기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확실히 사과 철이 아니긴 했다. 제철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척박한 겨울이기까지 해서, 저도 도망치느라 산을 뛰어다니는 동안 사과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니, 없으면 그냥 돌아오면 되지…. 이렇게 해가 다 져갈 때까지 산을 샅샅이 뒤질 필요는 없는데. 여전히 사과를 먹고 싶긴 했지만, 내일이 되면 언제 사과 생각을 했었냐는 듯 깨끗하게 잊을 것이다. 그만큼 충동적인 욕구였다.
미련하게 아직도 사과를 찾아 산을 돌아다닐 누아를 생각하니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해졌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라핀은 거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기다리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에 입술을 작게 벙긋거렸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야생은 하루가 멀다고 사건 및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어제 반갑게 인사하던 친구가 다음날 주검으로 발견되는 것도 흔한 일인 곳 말이다.
누아는 제가 아는 동물 중에서 가장 강했고 곰과의 대결에서도 이겼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예 적수가 없는 것도 아닐 터다. 그에게 타격을 줄 만한 동물은 어디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피가 마르는 듯했다. 고작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었지만, 그가 죽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는 밉지만 죽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문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달칵.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라핀이 맨발로 후다닥 달려 나오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아가 보였다. 그의 손에는 탐스러울 만큼 빨갛게 익은 커다란 사과가 들려 있었다.
누아는 뛰어나오듯 저를 마중 나온 라핀을 보고 입꼬리를 빙긋 올렸다.
“그렇게 뛰어나올 정도로 사과가 먹고 싶었어?”
“…….”
표정이며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것이며…. 평소의 누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함에 마음 졸였던 것이 단번에 탁 놓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라핀은 다행이라고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해졌다. 제가 먹고 싶다고 울며 조르긴 했지만 이성이 돌아오고 나니 누아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 고집을 들어주겠다며 이 겨울에 사과를 찾으러 나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점심 먹은 지 한참 지났는데….”
라핀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민망해서 괜히 투덜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거리를 좁혔을 때,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불쾌하면서도 스산한… 언젠가 많이 맡아본 냄새.
비릿한 피 냄새였다.
라핀은 불쾌한 냄새의 정체를 깨닫고,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어, 어디 다쳤어요? 피, 피 냄새가 나는데.”
“…아니. 안 다쳤는데. 얼른 들어가서 사과 먹자. 씻어줄게.”
누아는 아주 짧게 뜸을 들이더니 딴청을 부렸다.
뭔가 이상했다. 라핀은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다가, 사과를 쥐지 않은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소, 손이 왜 그래요?!”
라핀은 기겁하며 다급하게 누아의 오른손을 잡아 제 눈앞으로 끌었다.
사과를 쥐지 않은 오른손은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스치거나 넘어진 수준이 아니었다. 피가 줄줄 흘러서 바닥에 툭툭 떨어질 정도였다.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나무 마루 위로 붉은 핏방울이 진하게 번져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나 했는데 역시 사고가 있었던 거였어! 아까 머릿속으로 그렸던 사고 현장이 머리에 다시금 그려지면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라핀이 누아의 흉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자, 누아가 상처 난 손을 말아 쥐어 상처를 숨겼다.
“내 피 아니야.”
“누아 님 피가 아닌데 이렇게 철철 흐른다고요? 얼른 손 내놔요.”
남의 피라는 말을 믿어주기엔 피가 너무 많이 났다.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단호하게 대꾸하며 누아의 손을 확인하던 라핀은 칼처럼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깊은 상처를 발견했다. 얼마나 무서운 흉터인지 아찔함에 작은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라핀은 새파란 안색으로 손을 벌벌 떨며, 누아의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야, 약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요.”
라핀은 구급상자를 찾으러 다급하게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렇지만 라핀은 원래 구급상자를 어디에 두는지도 모를뿐더러, 혼비백산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무작정 누아의 책상을 뒤적이는데, 어느새 방까지 따라 들어온 누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 있는 줄도 모르면서.”
“…….”
누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책장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줬다. 떡하니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는데 급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민망하고 머쓱했다.
라핀은 양손으로 구급상자를 받으며,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다.
“이, 일단 거기 앉아 봐요.”
누아를 침대 끝에 걸터앉게 한 라핀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구급상자를 뒤적였다. 약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류가 꽤 많았다.
라핀은 그중 깊은 상처에 쓰는 약을 꺼내고는 그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손 이리 주세요.”
“내가 할게.”
“혼자 치료하려면 불편하잖아요. 게다가 오른손이기도 하고. 얼른 줘요.”
“…….”
누아는 오른손잡이였다. 활동할 때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을 다쳤으니, 왼손으로는 스스로 치료하기 불편할 게 뻔했다.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누아에게 손을 내놓으라고 재차 말했지만, 그는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상처 난 손을 숨겼다.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면 아플 텐데, 왜 저러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치료해주고 싶은데 상처를 방치하다 못해 혹사시키는 누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빨리요.”
“라핀, 그러다 침구에 피 묻어.”
“안 묻게 주면 되잖아요.”
라핀은 말이 통하지 않겠다 싶어 결국 무력으로 나섰다. 누아의 상처 난 손을 잡고 제 쪽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누아는 라핀이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누아는 호락호락하게 손을 내어주지 않고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버텼다. 라핀을 밀어내려고 하지도 않고 손에 힘을 굳건히 주고 꿈쩍 하나 하지 않았다.
라핀은 그런 누아에게서 손을 가져가려고 아등바등하다가, 힘 조절을 잘못해 몸을 휘청였다.
“헉…!”
라핀이 순간 휘청이며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하자 누아가 반사 신경으로 라핀을 팔로 빠르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라핀은 바닥으로 고꾸라지지 않고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게 됐다.
“라핀, 괘, 괜찮아?”
누아는 마치 제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서는 말까지 떠듬거렸다. 맞닿은 몸에서 그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임신했으니 조심해야 하는 몸인 건 맞는데,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을 텐데….
라핀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임신한 줄도 모르고 산등성이를 뛰어다니며 도망치고, 생존만 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만 먹고, 과격한 섹스까지 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안정기에 들어섰으니 넘어질 뻔한 정도로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텐데.
과잉보호에 괜한 머쓱함을 느낀 라핀이 맞닿은 누아의 몸을 조심스레 밀어내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요. 치료할 때까지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라핀이 그렇게 말하며 누아의 손을 다시 제 쪽으로 끌고 가자, 누아가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내주었다.
라핀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고집불통…. 순순히 주면 좀 좋아? 고백을 받은 날 이후로 누아가 조금 사근사근해지긴 했지만 본래 심성이 보통은 아니다 보니 마냥 순하지는 않았다.
라핀은 퉁명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눈을 대번 커다랗게 떴다.
“어….”
아까는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상처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날카롭게 찢겨나간 상처는 굉장히 깊어서, 자칫하면 뼈가 다 드러났을 정도였다.
이렇게 큰 상처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붕대를 감아야 하나? 그냥 약을 바르면 되나? 아, 소독을 먼저 해야겠구나!
라핀은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이 처음이라 마음만 바쁘고, 몸은 갈피를 못 잡고 허둥거렸다. 라핀이 엉성하게 구급상자를 뒤적거리자 누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내가 한다고 했잖아.”
“아, 아니에요. 그런데 왜 다친 거예요?”
“…….”
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눈이 보였다.
라핀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일단 소독이 급하다 싶어 대꾸 대신 알코올 솜을 꺼냈다. 라핀은 환부에 아주 조심스럽게 솜으로 톡톡 소독하며 물었다.
“사과 때문에 다친 거죠?”
“…….”
“어디 긁힌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런 거예요?”
“…….”
라핀이 추궁하듯 물었지만, 누아는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환부에 소독솜이 닿을 때마다 안면이 움찔하는 걸 보면 아픈 게 분명한데 미련하게 신음까지 참고 있다.
아무래도 끝까지 시치미를 뗄 기세이기에, 라핀은 솜으로 환부를 꾹 눌러버렸다. 그러자 누아가 보기 드물게 미간을 왈칵 조이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윽!”
“아파요? 반응이 없길래 안 아픈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
“그래서 뭐 때문에 다친 거예요? 무슨 약을 발라야 할지 알아야 하니까 대답해요.”
“…….”
라핀이 천연덕스럽게 또 묻자, 누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시치미에는 시치미로 대꾸하기로 한 것이 조금은 통한 것 같았다.
누아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총에 맞았어.”
“…네?”
라핀은 그렇게 이유를 캐물어 놓고는, 막상 답을 들으니 너무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총? 내가 아는 그 총? 갑자기 총은 왜…?
산 아래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동물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총을 들진 않았다. 간혹 사냥한답시고 총기를 들고 산에 들어오거나, 블란이 말한 대로 꽁꽁 언 호수에 피 묻은 칼날을 숨기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야생동물을 법으로 지키고 있는 마을이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재수 없게 사냥꾼이라도 만난 걸까? 라핀은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며 마저 물었다.
“초, 총은 갑자기 왜요?”
“인가에 내려갔다가 인간이랑 마주쳤거든.”
누아의 대답에 라핀의 심장이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이미 많이 놀라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 한마디를 더 할 때마다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라핀은 사색에 질린 얼굴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위험하게 거긴 왜 갔어요!”
“이 겨울에 사과 구할 곳이 거기밖에 더 있어? 그리고 인가는 당근 챙기려고도 자주 갔었어. 근데 사과밭 주인은 참… 터프하더라. 사냥총을 어디서 났는지, 참나.”
“…….”
당근을 구할 때도 인가에 갔었구나. 워낙 먹이를 구하는 데 능통한 늑대니까 어디서 주워 오는 줄 알았지, 위험하게 인가에서 구해 오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가에서 구해 오는 건 줄 알았더라면 당근 따위 안 먹어도 된다고 말했을 거다.
일전에 누아가 인간이랑 싸우면 제가 이길 거라고 위풍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 총 앞에서는 호랑이라도 별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이 무서운 것이었다.
만약, 빗맞지 않았다면…. 상상했을 뿐인데도 꼬리털이 삐쭉 설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하마터면 사과 하나를 먹으려다가 누아가 죽을 뻔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왈칵, 라핀의 눈시울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가 먹고 싶다고 울기까지 했지만, 안 구해 줬어도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끝냈을 텐데…. 제가 사과를 구해 달라고만 안 했어도 안 다쳤을 텐데….
죄책감이 극심했다. 라핀이 아랫입술을 앞니로 꾹 깨물며 울음을 참자,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누아가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별거 아니야. 스쳐 지나갔어.”
“뭐가 별거 아니에요! 죽을 뻔했는데!”
“아냐, 난 멀쩡하다고. 이딴 거 하나도 안 아파.”
누아는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저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저러는 거라는 건 알겠지만, 저는 정말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피 칠갑이 돼서 그런 말이 나와요? 고작 사과 구하러 인가까지 가는 게 말이 돼요?”
“먹고 싶다고 했잖아.”
“이렇게까지 해오라는 게 아니었어요….”
인간에게 잡히는 것도, 죽을 뻔하는 것도. 전부 다 라핀이 경험했던 것들이었다.
전부 다 끔찍한 기억이다. 그날의 악몽을 몇 번이고 꿀 정도로 처참한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누아에게 정이 깊이 들어버렸는지, 그가 제게 아무리 모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겪지 않기를 바랐다.
라핀이 진정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콧잔등을 붉게 물들이고 목소리를 떨자, 누아가 별일 아니었다며 대꾸하던 것을 멈췄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라핀은 뒤늦게 제 감정이 과하게 몰아쳤다는 걸 깨닫고 민망해졌다. 라핀은 코를 훌쩍이며 감정을 추스르고, 마저 말을 이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요. 그냥 먹지 말라고 하라고요….”
“싫어.”
누아는 제 말에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거절은 단호했다.
그에 라핀은 언제 슬펐냐는 듯 황당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마음은 아니더라도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정말 한 번도 져주지를 않는다.
라핀은 속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가 언제 또 크게 다쳐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라핀의 표정이 완전히 굳자 누아가 말을 이었다.
“울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게 더 아파.”
“…….”
아까 라핀이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하면서 울어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단 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선 말은 낯간지럽기 짝이 없다. 라핀은 다른 의미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다정한 말 같은 건, 누구도 제게 해준 적 없기에 면역이 없었다.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간지러웠다.
라핀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대답을 듣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싶었지만, 사안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라핀은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이, 지울 방법… 알아봐 주신다고 했잖아요. 아이 키우게 되면, 그때는 키워주겠다고 했잖아요.”
“어?”
라핀의 말에 누아가 크게 반응하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정적과 함께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누아는 뒤늦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라핀에게 되물었다.
“아, 아이… 낳을 거야?”
“…….”
라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라핀은 아직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누아에게 아이를 지울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게 되는 건 피하고 싶으니 방법은 알아둬야겠다 싶어서였다.
아이를 지운다는 건 평범한 동물은 생각도 못 할 이야기였다. 종족 번식을 위해 진실한 사랑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종족도 많았고, 합의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종족도 많았다.
그렇지만 토끼가 늑대의 아이를…, 그것도 돌연변이를 낳는다면. 그건 의미가 다를 듯했다. 종족의 번식을 위해 낳는 것인데 돌연변이는 토끼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지 않나. 궁극적인 목적에 맞지 않았다. 라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는 아이를 제 몸에 품고 있고, 가정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이번이 제가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중해졌다.
라핀은 힐끗 누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저를 사랑한다고 했고, 종족은 달라도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외모도 출중했고 무엇보다 사냥 능력이 뛰어났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흠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제 생각은 끔찍하게 해줬다. 본래의 성격이 개차반인데 제게만 잘해주는 것에 묘한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고….
라핀의 말을 누아는 무언을 긍정으로 이해했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뻐 보이는 얼굴을 했다. 당장이라도 기뻐서 날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핀은 혹여 그가 큰 기대라도 할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직 안 정했어요.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뿐이에요”
“알아.”
라핀이 초를 치듯 가능성을 운운했지만, 누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시커멓게만 보이던 늑대가 저렇게 순수하고 맑게 웃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제 앞에서 한 번도 웃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런 환한 기쁨은 확실히 처음이었다.
이미 열기가 오를 대로 오른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심장이 거센 뜀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가쁘게 뛰었다. 라핀은 누아와 단둘이 있을 때 간간이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여태까지는 심하게 놀라서 이런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매우 놀랄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단순히 놀라서 생긴 변화라기에는, 너무나도….
라핀이 제 이상 반응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데, 누아가 사뭇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낳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힌 줄 알았어.”
“그런 걸 어떻게 빨리 결정해요…. 아무튼, 괜히 인가에서 얼쩡거리다가 먼저 죽으면 그것도 못 하니까 위험한 짓 좀 하지 말아요.”
“…….”
“누아 님이 먼저 죽기라도 하면, 이 집도 차지할 거고, 재산도 다 뺏어갈 거예요.”
“그건 상관없는데…, 알았어. 앞으로 위험한 짓 안 할게.”
라핀이 일부러 모난 말을 하며 엄포를 늘어놓자, 드디어 누아가 라핀이 원하는 말을 해줬다. 누아는 상관없다고 했지만 라핀은 제 협박이 통한 것 같아 만족스러워졌다.
라핀은 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새끼손가락을 그에게 내보였다.
“앞으로 인가에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알았어.”
누아는 애처럼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는 라핀의 모습이 황당한 눈치였지만, 흔쾌히 다치지 않은 왼손의 약지를 내걸었다. 엄지로 도장도 확실하게 찍었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효력 하나 없는 약속이었지만 이상하게 안도가 됐다. 빈말로라도 그러지 않겠다고 순순히 말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라서 오히려 더욱 안심됐다. 저리 떳떳하게 안 하겠다고 하니, 앞으로는 인가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라핀이 굳어 있던 표정을 사르르 누그러트리고 얽었던 손가락을 풀어내자 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과 미리 많이 구해 오길 잘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요.”
“너도 쓸데없이 자책하지 마. 넌 늑대들한테 꼬여서 그런 짓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게 됐는데 내 걱정을 하고 싶어?”
“그건…. 그렇긴 한데, 신경 쓰이는 걸 어쩌라고요.”
라핀도 제가 왜 이렇게 누아를 걱정하는지 이상했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러고 보면 아까 누아의 맑은 미소를 마주했을 때, 심장이 거세게 뛰었었다. 놀란 것도 아닌데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고 마음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었다.
뭐야….
설마, 제가 누아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라핀도 아주 어렸을 때, 몸이 이렇게 되기 전에 짝사랑쯤은 해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시절이었지만, 그때 느꼈던 풋풋한 감정만큼은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감각이 딱 지금과 같았다.
그럴 수가 있나? 분명 방금까지 누아는 성격이 좋지 않고, 제게 안 좋은 짓들을 일삼았고, 어쩌면 저를 임신시킨 늑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종족도 완전히 다른데…. 좋아할 수가 있나? 그게 가능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지만, 누아가 저를 좋아하는 걸 보면 종족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수백 가지 있는데….
그 수백 가지 이유를 넘어서 제가 누아를 좋아한다고?
아니겠지, 아닐 거다. 단지… 그래, 누아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과하게 의식되는 거다. 괜히 저까지 그 감정이 옮을 뻔한 거다.
라핀은 엉성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누아의 환부에 약을 아낌없이 듬뿍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나름 온 신경을 다 써서 감은 건데 막상 매듭을 짓고 나니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라핀은 풀고 다시 감을까 하다가, 다시 해도 잘할 자신은 없어 그만두고 멋쩍게 말했다.
“붕대는… 내일 다시 갈아요.”
“음, 그래야겠네. 고마워. 근데 라핀, 사과는 안 먹어?”
“…네? 사과요?”
그러고 보니, 사과를 구해 오다 다친 거였지. 상처에 정신이 팔려 사과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라핀이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늦게 구해다 줘서 먹고 싶지 않아졌어?”
“네? 안 먹고 싶은 게 아니라…. 그건 조금 이따가 먹을게요. 그런데 안 피곤하세요? 주무실 시간 훨씬 지났잖아요.”
사과를 먹고 싶긴 한데, 지금 라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누아의 얼굴에 피곤함이 없긴 하다만 그래도 분명 피곤할 거다. 그의 취침 시간이 훨씬 지나기도 했고, 아침에 사냥 다녀온 것도 모자라 사과를 구하러 인가까지 가기도 했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과였다. 게다가 치료에는 충분한 숙면이 좋기도 하다니 얼른 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누아가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같이 누워 있어줘.”
“…….”
평소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끌어안고 잤으면서 오늘은 왜 부탁하듯 말하는 거지….
라핀은 누아의 그런 행동마저도 이상하고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거절해도 되는 건가? 거절하면 혼자 자려나? 한 번도 누아가 혼자 자는 걸 본 적이 없으니 궁금했다.
그렇지만….
“…알겠으니까, 얼른 누워요.”
라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에 누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빠르게 침대에 누웠다. 라핀이 누울 자리를 비워둔 채였다.
…애도 아니고. 여태까지 그가 저보다 훨씬 몸집도 크고 강하고 강압적인 느낌 때문에 무섭게만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왜일까. 제 말을 다 들어주고 희생하기까지 하고, 또 솔직한 날것의 감정이 눈에 띄게 드러나니 딱 철없는 애들처럼 느껴졌다.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만 하고 감정 표현에는 서툰 애들 말이다.
라핀은 누아를 감정 기복이 오락가락하고 이중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여태까지 누아가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졌다.
라핀은 불을 끄고 천천히 누아의 옆자리에 몸을 눕혔다. 자연스럽게 누아를 등진 채 눕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후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핀.”
“…왜요?”
“…….”
꽤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아직도 안 자고 있었나.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지만, 누아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왜 불렀던 거지? 그냥 제가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해 보려고 불렀던 건가? 아니면 심심해서? 별생각이 다 드는데, 별안간 귓가에 보드라운 것이 쪽 소리를 내고 떨어져 나갔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간지럽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귓가에 모든 감각 기관이 몰린 것 같은 느낌에 라핀은 휙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예요…!”
“키스하고 싶어.”
“예…? 갑자기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라핀은 당혹스러움에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잔다면서 귓가에 뽀뽀하질 않나, 이젠 키스? 그것보다, 여태까지 키스한다고 허락받은 적도 없지 않았나?
막무가내로 하는 것보다는 허락을 구하는 게 낫긴 했지만, 물어보면 제가 허락할 것 같은가? 모든 방면에서 당황스러웠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거절해야 하는데 너무 황당해서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라핀이 묻자, 누아가 붕대로 엉성하게 감겨 있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려니까 갑자기 손이 아파.”
“…손이 아픈 거랑 키스가 무슨 상관인데요?”
“네가 키스해 주면 안 아플 것 같아.”
“…….”
그냥 손이 아프다고 했으면 믿었을 텐데, 손이 아프니까 키스해 달라고 하니 엄살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논리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제가 바보로 보이나? 키스가 진통제라도 되냐고? 라핀은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거절했다.
“그게 말이 돼요? 그냥 자요.”
“아아, 아프다….”
누아는 갑자기 신음을 흘리더니, 미간을 좁히며 다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라핀은 엄살떠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흘겨봤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얼굴에 생기가 없어서 정말 아파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엄살을 부리는 거라고 확신했으면서 그 모습에 줏대 없이 마음이 동요했다.
…엄살이 아닌가? 진짜 아픈가?
총상이었으니, 어쩌면 저렇게 아파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까는 총상쯤이야 별것도 아니라며 허세를 부렸지만, 이제는 허세를 부릴 만한 기운조차 없는 걸지도 몰랐다.
분명 개수작 같은데…. 라핀은 머뭇거리다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진통제 찾아볼게요.”
“없어.”
누아가 즉답하면서 라핀의 팔을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그는 일어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다시 라핀을 침대에 눕히다 못해 품에 바짝 안기까지 했다. 라핀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히다시피 하다가 고개를 위로 올려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아까 구급상자에 약 종류 되게 많던데요…. 찾으면 있을지도 몰라요.”
“없어. 내가 알아.”
“…….”
누아의 확신 담긴 말에 라핀은 할 말을 잃었다. 구급상자 안에 온갖 희귀한 약이 다 있던데, 가장 흔한 진통제가 없다니. 말도 안 됐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진통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픈 거랑 키, 키스는 상관없잖아요…. 그게 무슨 마법도 아니고.”
라핀이 냉정하게 대꾸하자, 누아는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일그러트리고 있던 얼굴을 평소처럼 되돌렸다.
…역시 엄살이었구나. 연기 되게 잘하네. 정말 그가 아파하는 게 아닌지 걱정과 함께 죄책감이 몰려왔었는데…. 말도 안 되게 키스를 해달라고 하는 걸 듣고 엄살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으면서, 연기에 단번에 마음이 흔들렸다니. 제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그의 뻔뻔함에 라핀이 황당해하는데, 누아가 입을 열었다.
“안 한 지 되게 오래됐잖아, 우리.”
“…….”
농밀한 교접은 제가 도망쳤다가 잡혔던 바로 직후 제 발정기 때가 마지막이었고, 이후로 손장난이나 페팅은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키스도 하지 않았다.
섹스 같은 건 제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안 하는 것 같은데… 키스는 상관없지 않나? 그와 입맞춤하면 숨쉬기 힘들어지긴 했지만,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평소대로 멋대로 입술을 맞추면 됐었을 텐데…. 왜 여태까지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는 듯 제게 키스를 요구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왜 안 했는데요?”
“…하면….”
“네? 뭐라고요?”
누아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라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해 달라고 하자, 누아가 라핀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키스하면…, 자제 못 할 것 같아서.”
“…자제요?”
“더 하면 안 되잖아.”
“…….”
그러니까… 키스했다가는 저를 덮칠 것 같아서 참았다는 건가?
오늘 왜 이렇게 할 말을 잃게 되는 일이 많은지…. 예상 못 한 이유였지만, 듣고 나니 이해가 되긴 했다. 그는 자제력이 티끌만큼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제가 임신했다는 이유로 여태까지 제게 손대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유를 듣고 나니까 그에게 키스를 해줘도 되는 건지 불안해지는데…. 괜히 입맞춤했다가 틀어막고 있던 욕망이 봇물 터지듯 폭발해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그, 그러면 오, 오늘은 참을 수 있고요?”
“손도 다쳤으니까 못 하겠지.”
누아는 보란 듯이 붕대로 감겨 있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과격하게 움직였다가는 엉성하게 감은 붕대도 풀리고 상처도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누아라고 한들, 손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상 제게 크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거였다. 한 손의 누아는 제가 이길 수 있지 않나? 음, 못 이기려나…?
아무튼 지금 그가 제게 하는 조심스러운 태도와 상태를 보았을 때 저를 덮칠 것 같진 않았다. 고백한 이후로 그는 제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고 있었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니 키스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싶어졌지만, 사실 라핀에게는 누아에게 키스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 누아를 좋아하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까 누아와 약속을 나눴을 때, 혹시 제가 누아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그를 싫어해야만 하는 관계인데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 왜인지. 단순히 그가 제게 고백을 해서 의식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제가 그를 좋아하는 건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라핀은 꽤 오랜 시간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했고, 누아는 라핀이 대답하기까지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라핀은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다.
“해….”
“응?”
“해주면…, 그때는 얌전히 잘 거죠?”
라핀이 머뭇거리며 조건을 내걸었다. 제 마음 확인도 중요하지만, 누아를 쉬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옥신각신하다가는 잠도 못 잘 판이니 이렇게라도 재워야겠다.
라핀이 그런 생각으로 묻자, 누아가 눈을 번뜩였다.
“바로 기절할 수 있어.”
“…기절 말고 잠이요.”
기절할 수 있다는 게 그만큼 바로 잘 수 있다는 과장 표현인 건 알겠지만…. 하아, 누아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괜한 선택을 한 게 아닌지. 제가 이런 늑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고민한 게 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르고 싶어졌지만, 이미 해주겠다고 말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눈 감아요.”
“응.”
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답답할 정도로 고집이 세면서, 이럴 때만 말을 잘 듣는다.
“…….”
잠깐 황당함을 느끼던 라핀은 눈을 감은 누아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는 그를 거절할 수 있음에도 그의 옆자리에 누운 것도,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키스해 주겠다고 대답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가 부탁하기는 했지만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빨리… 확인하고 저도 확 자버리자.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애들이 하는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꽉 다물린 입술이 맞닿기만 하고 아무런 교류 없는 입술 박치기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인용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아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라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맞대고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맞닿아 있던 라핀의 입술이 덩달아 벌어지며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흣….”
질척한 살덩이가 얽히고 뜨거운 숨이 공유됐다. 혀를 빨아 당기고 여린 부위를 훑고…, 누아는 라핀이 느끼는 부위만을 철저하게 자극했다.
오랜만이다 보니 더 자극적이었다. 온몸에 긴장이 축 빠지고 질끈 감고 있던 눈꺼풀도 속절없이 파르르 흔들렸다. 손끝과 발끝은 저릿저릿했다.
그가 키스를 잘한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배로 강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아, 으읍….”
숨이 모자라 라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누아가 숨 쉴 틈을 주려는 듯 입술을 떨어트렸다.
“푸하…!”
라핀은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흉부를 크게 들썩이며 그간 막혀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끝난 걸까? 몰아치던 입맞춤에 누아가 억눌렀던 욕망을 폭발해낼 것만 같아 겁에 질렸었는데, 그나마 자제해서 다행이었다.
라핀이 열이 오른 정신을 추스르며 두 눈을 스르르 뜨자,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 누아와 두 눈이 마주쳤다. 금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곧바로, 누아는 라핀의 뒷머리와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춰왔다.
“흐읍…!”
잡아먹힌다…!
티끌만큼 남아 있던 자제력을 잃었는지, 입맞춤이 갈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작은 숨결 하나까지도 전부 삼키며 라핀의 모든 것을 탐하려고 달려들었다. 라핀의 야생적 감이 더 했다가는 위험해질 것 같다고 경고를 보냈다. 누아는 지금 자제력을 잃고 있었다.
라핀이 그만하려 고개를 뒤로 물렸지만, 누아는 바싹 추격하며 혀를 끌어당겼다. 몸을 밀어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역으로 바싹 달라붙을 뿐이었다.
라핀이 낑낑대며 누아를 밀어내고 있는 새, 라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누아의 손이 스르르 라핀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단번에 속옷 안까지 침투한 손은 라핀의 자지를 손으로 콱 쥐었다.
“흐으읍…!”
오래간만의 입맞춤에 필요 이상으로 자극됐다 보니 라핀의 자지는 발기해 있었다.
라핀도 수컷이다 보니 성기를 쥐어 잡히면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라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다행히 이번에는 누아가 순순히 입술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려줬다.
“자, 잠깐만요…!”
라핀은 그의 복근을 밀어내고 있던 손을 내려, 제 성기를 쥔 누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라핀은 누아가 손을 다쳤으니 선을 넘진 못할 거라고, 손 하나를 사용하는 누아는 제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까딱하면 큰일 날 뻔했다.
라핀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누아를 바라봤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누아에게서는 아예 다른 말이 나왔다.
“하, 라핀…. 나 아파.”
“힘주니까 아프죠! 상처 터져요, 그만해요….”
“거기 말고.”
누아는 라핀에게 잡힌 손을 빼내더니, 흉측할 정도로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드러난 누아의 것은 라핀의 성기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못했다.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크게 발기하다 못해, 쿠퍼액을 줄줄 흘리며 금방이라도 씨물을 뿌려댈 것처럼 꺼떡거리고 있었다.
저만큼 발기했으면 정말 아플 것 같은데…. 라핀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단호해지려고 노력했다.
“화, 화장실 가서 빼고 와요….”
“나 손 다쳐서 자위도 못 해.”
“…반대쪽 손은 멀쩡하잖아요.”
“나 오른손잡이야.”
오른손을 다쳤으니, 왼손으론 못 한다는 말이었다.
…자위하는데 오른손 왼손이 중요한가? 본인이 불편하다니 트집을 잡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붕대를 감은 오른손으로 자위하란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상처가 악화되어 붕대를 새로 감아야 할 것이다.
“그, 그래도 안 돼요. 자제한다면서요, 무리하면 안 된다면서요….”
“그러니까 도와줘. 이 상태로는 못 자겠어. 조금만 만져줘.”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요….”
분명 아까는 키스만 해주면 곧장 기절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서는…. 몇 분이나 지났다고 말이 달랐다.
라핀이 약속을 지키라며 불퉁하게 항의하자, 누아가 모르는 척 눈을 굴리다가 라핀의 몸을 바싹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이러고 잘까?”
몸이 바싹 달라붙으면서 그의 딱딱한 기둥이 제 것과 비벼졌다. 제 것은 옷 안에 있었지만, 그의 것은 덩그러니 바깥으로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라핀은 제가 그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누아가 제게 ‘부탁’해서 들어준 것이니 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억지에 묘하게 끌려가고 있는 거였다.
지금도 그러했다. 서로의 발기한 남성기가 비벼지니 미칠 것 같았다. 누아는 이대로 잠든다고 하더라도, 저는 눈 뜬 채로 고문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안겨 어디 가서 자위도 못 하고, 이렇게 아플 정도로 발기한 채로 몇 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손으로라도 해결해주는 게 낫나? 누아가 진정되면 찰싹 달라붙어 자더라도 지금보단 덜 야릇한 느낌이지 않을까?
라핀은 누아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느새 끌려가고 있었다. 제 성격이 거절 한번 못하도록 무른 것인지, 아니면 토끼라서 성욕에 취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이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옷 너머로 맞닿은 두 개의 성기가 위아래로 은근히 비벼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아가 그새를 못 참고 몸을 은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간….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망설이다가,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리며 체념하듯 말했다.
“그럼… 빠, 빨리 싸야 해요…?”
“응.”
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며 라핀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라핀은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태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숱하게 몸을 겹치는 동안 라핀은 늘 애무를 받는 쪽이었다. 아예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그 탓인지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사정시켜야 하는데…. 그래야 누아가 얼른 잘 텐데….
키스해 달라고 하는 건 어설프게라도 할 수 있었는데, 누아의 성기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제 것과는 색깔과 크기, 핏줄이 선 느낌도 완전히 달라서는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거부감이 들었지만, 몇 날 며칠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거부감이 덜해질 것도 아니었다. 라핀은 오랜 마음의 준비 끝에 누아의 성기 기둥을 두 손으로 쥐었다.
“…….”
누아의 것은 눈으로 보이는 만큼이나 크고 딱딱하고 뜨거웠다. 매번 닿을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었지만 오랜만이라서 더 생소했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지. 제가 자위를 하는 것처럼 흔들면 되는 건가? 라핀이 침을 꼴깍이며 누아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누아가 한숨 같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라핀, 이렇게 만지는 것도 좋긴 한데… 빨리 싸라면서. 이래서야 잘 수 있겠어?”
“자, 잠깐만요….”
분명 누아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거였는데, 어째 제가 더 다급한 상황이 됐다.
라핀은 누아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슬쩍슬쩍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다행히 손아귀 안에서 그의 것이 맥박치며 핏줄이 더 굵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후….”
“…….”
누아가 뜨거운 숨결을 내뱉자, 라핀이 움칠 몸을 굳혔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에 누아가 제 앞에서 성기를 흔들며 자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느끼는 모습을 보고, 라핀은 제가 관음증이 있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야릇한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이 딱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저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남성기가 단단해지고 보지는 벌름거리다 못해 속옷까지 젖어들고 있었다. 누아의 성욕만 해결하면 저도 그럭저럭 해소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저에게까지 열기가 옮고 있었다.
…이래서야 누아만 해결해 주고 저는 눈 뜨고 고문당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지, 그렇게 바싹 붙어 비비고 있으면, 제가 발기했다는 걸 알아챌 텐데 과연 대신 한 발 빼주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 라핀이 불안한 생각을 이어 가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하아….”
누아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라핀을 바라봤다. 눈앞의 라핀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저를 만지는 데 집중해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저를 사정시키겠다고 바짝 집중했으면서도 우스울 정도로 어눌한 손길인 것이 퍽 귀여웠다.
누아는 라핀이 제게 아예 마음이 없다 못해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짝사랑이 아닌 쌍방이 되기 위해 점수를 따는 중이었는데…. 사과를 구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저렇게 제게 미안해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때의 총격이 생사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긴 했다만, 라핀이 저를 이렇게 걱정할 줄이야. 정말 저를 싫어했더라면 이렇게 심각하게 저를 생각해 주지는 않을 거라고 저 좋을 대로 생각하게 됐다. 기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 탓에 어리광을 부리게 됐다. 전부 다 받아주는 게 기분 좋아 이상한 부탁까지 하고 말았다.
여태까지 모든 건 제 마음대로, 뭐든 억지로 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락을 구하니 허무하게도 라핀은 뭐든 제게 해주고 있었다.
혹시 라핀은… 이런 것에 약한가? 죄책감이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걸까?
제 추측이 맞다면, 추악하지만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만, 계속해서 꾸준히. 라핀이 제게 마음을 돌릴 때까지. 마음을 돌리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하더라도, 제 곁에는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이용할 것이다.
시커먼 욕망에 잠겨 라핀을 바라보던 누아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라핀이 뭔가 불편하다는 얼굴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남의 성기를 만져주는 것이 편치 않을 건 알고 있지만, 제 것을 만지는 데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불편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혹시 자세가 불편하기라도 한 걸까?
편한 자세로 바꿀까 생각하던 누아가 그 순간 라핀의 아랫도리를 발견하고 탄식을 터트렸다.
아…, 저래서 저랬구나.
아까 라핀의 성기를 만져줬을 때까지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 것을 만져주면서 흥분한 모양이었다. 이런 요망한 토끼. 라핀은 늘 제 생각을 뛰어넘었다.
누아는 입꼬리를 얄궂게 올리며, 라핀에게 말했다.
“라핀, 후우… 네 것도 같이 하자.”
“네? 아니, 저,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다 봤는데.”
누아는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라핀의 남성기를 옷 밖으로 꺼내게 했다.
역시나 라핀의 성기는 옷 너머로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발기해 있었다. 저렇게 발기해서는 귀엽기만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니. 하마터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아, 안 돼요!”
누아가 라핀의 성기를 자신의 것과 비비려고 하자 라핀이 안 된다며 허둥지둥 말렸다.
그렇지만 늘 그랬듯이 힘의 차이는 대단했다. 고작 누아의 한 손, 그것도 주력으로 쓰지도 않는 왼손에 져버렸고, 옥신각신하다가 불시에 라핀의 것과 누아의 것이 비벼졌다.
“흐읏…!”
“하….”
서로의 민감한 부위가 부딪히듯 세게 비벼졌다. 라핀과 누아의 입에서 동시에 옅은 숨이 뱉어졌다.
잠깐 비벼진 것이었지만 확실히 손으로만 만지는 것과는 달랐다. 누아는 저를 말리느라 성기를 놓은 라핀의 손을 감싸 제 것을 만지게 하며 말했다.
“놓으면 안 되지.”
“아, 아니…. 저는 됐다니까요.”
“지금 빼두는 게 좋을걸.”
“괜찮은데요…,”
“네가 아니라 내가 안 괜찮아.”
“…….”
“네가 내 옆에서 이렇게 세운 채라고 생각하면… 잠 못 잘 것 같거든.”
누아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먹잇감을 옆자리에 두고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누아는 말을 잃은 라핀의 두 손을 손수 이끌어, 성기의 어느 부위를 잡아야 할지 고쳐줬다. 그렇지만 라핀의 손은 워낙 작아서 제 것을 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는지 두 개를 한 번에 쥐게 하려니 자꾸만 미끄러트렸다. 누아의 성기 하나를 만지는 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는데 두 개를 동시에 만지려니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참 답답하면서도, 그게 또 라핀 같아서 귀엽고 좋았다. 누아는 왼손으로 라핀의 한쪽 손등 위를 덮어 힘을 줬다.
“제대로 잡고 흔들어야… 빨리 싸지.”
“흐으, 흣…!”
거센 자극에 라핀이 잇새로 작은 신음을 삼켰다. 몸이 달아오른 탓에 작은 자극에도 전율이 일었다. 그의 앞에서 모른 척 흥분한 것을 참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가 만져주니 기다렸다는 듯이 닳고 닳은 것처럼 반응하게 됐다.
라핀은 제가 이렇게 몸이 달았다는 것을 숨기려 안간힘을 다해 숨을 참았지만, 누아는 라핀의 손을 감싼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게 했다.
탁탁탁, 두 성기가 용두질 치면서 비벼졌다. 방금도 미칠 것 같았는데 더 첨예한 자극에 발끝과 손끝이 곱아들었다. 꼬리털이 바짝 서고 온몸이 뻐근했다.
아니, 아까는 왼손이라서 혼자 못 빼고 온다더니, 이렇게 능숙해도 되는 건가? 라핀은 이제야 속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억울함에 숨을 팍 터트리며 그에게 항의하듯 외쳤다.
“흐읏, 오른, 손잡이… 라면서요!”
“하…, 그래서 잘 못, 하잖아.”
“흐윽, 아니, 아닌데….”
라핀이 항의하려다가, 요도구를 매만지는 손에 눈을 질끈 감고 말끝을 흐렸다. 못 하기는. 여차하면 왼손잡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능숙하면서! 혼자 화장실 가서 빼고 올 수 있었으면서!
라핀의 억울함과 반항기가 심해지자, 누아는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더 했다가는 불만이 거세질 것이었다.
누아는 라핀이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더 빠르게 놀렸다. 라핀의 것을 부지런히 만져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라핀은 민감한 몸을 가지고 있어, 조금만 만져줬을 뿐인데도 쿠퍼액을 줄줄 흘렸다. 절정이 다가오는 듯해 보였다.
다행히 누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라핀의 손길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라핀이 만져준다는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때보다 흥분됐다. 누아도 곧 절정이었다.
“흐으응, 아흐읏….”
“하…, 라핀.”
“읏, 흐읍…!”
누아는 폭주하듯 날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앞에 살짝 벌어져 있는 라핀의 입술에 돌진하듯 입술을 맞췄다.
정제되지 않은 숨이 섞여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개의 성기를 비비는 누아의 능란한 손에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어느새 누아와 라핀, 둘의 머릿속은 오직 사출의 욕구만으로 가득 찼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라핀의 입술이 잡아먹히듯 입술이 삼켜졌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일순간 누아의 손아귀 힘이 바싹 들어갔다.
“읏!”
“하아…!”
끊어지는 신음과 함께 문질러지던 두 개의 자지 끝에서 묽은 정액이 팍 튀어 올랐다.
라핀의 두 손과 누아의 왼손이 정액으로 뒤덮여 질척거렸다. 라핀은 분명 누아에게 속았다며 항의를 하던 중이었는데…, 번뜩이는 쾌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서 항의하던 것도 잊고 말았다.
라핀이 혼몽한 눈으로 뜨겁게 숨을 내뱉고 있을 때, 누아의 보드라운 입술이 라핀의 이마에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그리고 누아는 다친 손을 탁자 쪽으로 뻗어 휴지로 손에 묻은 정액을 닦아주며 말했다.
“잘 자.”
“하아, 하아….”
나는…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요. 땀에 젖은 몸도, 정액으로 더럽혀진 손도 씻고 싶은데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숨은 한없이 헐떡거렸고 절정의 여운에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 라핀은 누아의 토닥거림에 거짓말처럼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
“…….”
아…. 망할.
어제 그런 짓을 하다가 깜빡 잠들었구나.
라핀은 잠에서 깨자마자, 어제 누아와 그런… 다시 떠올리기도 민망한 짓을 하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하….”
왼손으로는 혼자 못 한다고 거짓말하더니…. 누아한테 또 속았지.
그의 옆자리에 누운 것과 입맞춤을 한 것까지는 제 선택이었다지만, 그의 것을 만져준 것은 부탁의 탈을 쓴 강요에 가까웠다. 단칼에 거절해도 됐을 텐데, 제가 사과를 구해 달라고 한 것 때문에 다친 게 계속 마음이 걸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쩌다 보니 삽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고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는데…. 하루 지나 생각하니, 직접 그의 것을 만진 건 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라핀이 탄식하듯 한숨을 쉬며 옆자리를 힐끗 쳐다보자, 누아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원래 그의 수면 시간은 지금이 아니었지만 일이 많았던 탓인지 깊게 잠든 모습이었다.
저를 꽉 끌어안고 있던 손은 자면서 느슨해진 상태였다. 저도 모르는 새에 팔베개를 해줬는지 오른팔은 제 머리 뒤에 있었고 힘이 풀린 왼손만이 제 몸 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라핀은 민망하기도 하니 먼저 일어날까 싶어져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가, 제게 팔베개를 해준 오른팔 끝의 다친 손바닥을 보게 됐다.
“…….”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저의 두 손으로 누아가 다친 부위를 붕대 위로 천천히 쓸었다. 어제 이 오른손을 미끼로 여러모로 속았으면서도, 저 때문에 다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따끔따끔 아팠다.
제가 사과를 먹고 싶다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이기적이게도, 그만큼 저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제 마음도 함께 들썩였다. 그의 마음을 거절해야겠다 싶으면서도, 그 대단한 늑대 우두머리가 제 말 한마디에 끌려다니는 걸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별 볼 일 없고 무리에서도 버림받은 제가 대단한 것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누군가가 제게 사랑을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저에게 다정하게 굴어준 것도, 몸이 변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사랑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단단하게 마음의 벽을 쌓았다. 어차피 저 같은 걸 좋아할 반려도 없을 거라고 미리 선을 그어놓았다. 그래서 제가 그렸던 미래는 늘 저 혼자였다.
그렇게 스스로 부정했지만, 라핀은 그 누구보다 온정을 갈구했다. 제게 못된 짓을 한 늑대한테 다정한 보호 몇 번 받았다고 견고하게 쌓았던 마음의 벽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래서 확인을 하기 위해 어젯밤에 그와 입맞춤을 했다. 어쩌다 보니 손장난까지 이어지게 됐지만…. 그사이에 라핀은 제 마음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입술을 맞췄을 때, 그가 단순히 저를 성욕 처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좋아하는 감정이 흘러넘치듯 밀려왔다.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느껴져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누아가 단순히 성욕을 처리하기 위해 저를 안았던 것이 아니라, 저를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고. 좋아하기 때문에 임신 후에는 접촉을 참았던 것을 알게 되니 더 진심이 확 와닿았다.
라핀이 그때의 감정을 되새기고 있을 때, 뒤에서 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핀, 뭐 해?”
라핀은 몰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퍼드득 떨었다.
라핀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아는 비몽사몽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의아함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라핀이 자신의 다친 손을 만지고 있어서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라핀은 그저 다친 부위를 확인하고 있었을 뿐인데, 왠지 누아가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까 봐 지레 걱정이 됐다. 라핀은 눈에 띄게 허둥지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이건…! 부, 붕대가 풀린 것 같아서요!”
“붕대? 아아, 나중에 다시 묶어줘. 어차피 약도 다시 발라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럴까요….”
라핀이 어정쩡하게 수긍했다. 다행히 그는 제가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것을 이상하게 오해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라핀은 제가 너무 지레 걱정하고 허둥댄 것 같아 뒤늦게 멋쩍어졌다.
라핀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누아의 금안이 라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말도 없이 제 얼굴은 왜 이렇게 빤히 바라보지? 혹 자다가 침이라도 흘렸던가? 눈곱이라도 끼었나? 기절하듯 푹 잤으니 그럴 수도 있다.
라핀이 의식하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는데, 누아가 부스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마.”
“…….”
제가 걱정하고 있었던 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했던 건가.
펄쩍 뛰면서 걱정하지 않았다고 부정해야 하는데, 꾹 다물린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빠듯해져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제 마음을 확신했다.
나…, 누아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를 싫어해야 할 수백 가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하고 나니 마음의 벽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라핀이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자기 고개를 푹 숙여버리자, 누아의 눈이 대번 커다래졌다.
“라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안 아파요.”
“얼굴 한번 봐봐.”
라핀은 기분이 오묘해서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저를 보려는 누아를 양손으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누아는 라핀의 밀어내는 손길을 손쉽게 제압하고,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라핀의 상태를 살피려 들었다.
“얼굴이 엄청 빨간데….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야?”
“더, 더우니까 떨어져요.”
“이 날씨에 덥다고? 열나는 거야?”
라핀이 대충 둘러댄 변명에 누아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집 안이라지만 한겨울이었다. 따끈한 이불을 덮고 찰싹 달라붙어 자도 추울 판에 더워서 얼굴이 새빨개졌다니. 몸이 허한 게 아닌지 걱정됐다.
누아가 상태를 살피려는 듯 몸을 가까이 댈수록 라핀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저를 챙겨주는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아도 저를 좋아하고 저도 누아를 좋아하니 만사형통 아닌가 싶어도, 라핀에겐 아니었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었다. 늑대는 평생에 한 반려만 둔다고 하니 평생 이어질지도 몰랐지만, 라핀은 토끼였다. 평생에 걸쳐 한 명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신이 없었다.
물론 제가 함께하던 토끼 무리에도 ‘세기의 로맨티시스트’라고 불리는 아저씨가 하나 있긴 했다. 그렇지만 감정은 일방적으로 좋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지라, 결말은 별로 좋지 않았었다.
토끼인 제가, 늑대인 누아를 만나도 되는 걸까.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종족도 다르니까, 누아가 저에 대한 마음이 식기라도 하면….
게다가 라핀은 만삭이었고 누아와 블란 중 누구의 아이일지 모르는 아이를 품고 있었다. 누아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았는데, 혹 그 아이가 블란의 아이라면? 반대로 지웠는데 누아의 아이였다면?
누아는 누구의 아이이든 낳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라핀은 일생일대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낳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를 좋아하게 되니 고민의 골이 더 깊어졌다.
고민이 많으니 지금 당장 누아에게 제 마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라핀은 머뭇거리다가 아무런 이유나 갖다 붙이며 누아를 밀어냈다.
“어, 어제 생각나서 그런 거니까…!”
“…….”
“미, 민망한데, 왜 자꾸 보려고 해요…. 좀 떨어져 주세요….”
“아.”
라핀이 꽤 그럴싸한 이유를 말해가며 누아를 밀어내자, 어떻게든 제 상태를 살피려고 육탄으로 들어오던 몸이 멈춰 섰다.
라핀이 힐끔 올려다보자,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씰룩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
“나는 일어날 건데, 넌 좀 더 누워 있을래?”
“네….”
…차라리 마음을 들키는 게 덜 민망했으려나. 이른 아침부터 야한 생각이나 하는 변태가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워졌다.
라핀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커다란 손이 라핀의 뒷머리를 이불 위로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한참 뒤에 떨어졌다.
하아…. 저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둔 심각한 상황인데, 누아의 앞에서만 서면 왜 이렇게 우스워지는 것 같지. 라핀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터트렸다.
***
“라핀, 아침 먹게 일어나.”
“…네에.”
누아의 말에 라핀이 이불에 묻혀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라핀은 토끼였다. 땅 아래로는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라핀은 미적거리며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도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식탁 위에는 탐스럽고 빨간 사과가 놓여 있었다.
라핀은 어제 누아에게 사과를 가져오는 게 위험한 일이라면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이중적이게도 새빨간 사과를 보자마자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먹고 싶지 않았던 척을 하려 애써 보아도 사과가 미친 듯이 당겼다. 제 의지가 얄팍한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아이가 미친 듯이 사과를 원하고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한 성깔 하는 것 같고 고집도 센 것 같다.
라핀이 침이라도 뚝뚝 흘릴 듯 사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누아가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제부터 먹고 싶어 했잖아. 얼른 먹어.”
“아니, 뭐…. 그다지….”
라핀은 멋쩍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한 건데 누아가 제 마음을 다 안다는 식으로 얘기하니 괜히 민망해졌다. 그렇게 미친 듯이 먹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며 티끌만 한 자존심이라도 챙기고 싶었지만, 어제 그가 다치면서까지 구해온 것을 알고 있기에 변명할 수가 없었다.
라핀은 거짓말로 자존심을 챙기기보다는 은근슬쩍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누아가 사과를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그릇에 올려줬다.
와…. 라핀은 사과를 먹은 적이 있었지만, 어디서 주워다 먹는 게 전부라서 이렇게 예쁘게 잘린 걸 보는 게 처음이었다.
예쁘기도 예쁜데… 라핀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이렇게 잘 잘라요? 혹시 과일 좋아하세요?”
“응? 아니. 전혀 아닌데.”
라핀은 칭찬으로 한 말이었는데, 누아는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육식 동물이라 그런가? 과일을 좋아하냐는 말이 혹, 그의 자존심을 깎아 먹기라도 하는 걸까? 제가 모르는 육식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쓰일지도 몰랐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무안해졌다.
라핀은 괜히 더 오해를 살까 싶어 말없이 사과 조각을 베어 물었다. 정적 속에서 아삭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입안에서 상큼하고 달콤한 과즙이 느껴졌다.
과일을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펑펑 울 정도로 먹고 싶어 해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훨씬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귀와 꼬리가 바짝 설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
더, 더 많이 먹고 싶다!
라핀은 누아에게 무안을 사고 있던 것도 잊고, 단번에 한 조각을 해치우고 두 번째 조각을 베어 물었다.
라핀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정신없이 사과를 먹자, 맞은편에 정색하고 앉아 있던 누아의 표정이 단번에 누그러졌다. 그는 식탁 위로 턱을 괴며 라핀에게 물었다.
“맛있어?”
“엄청 맛있어요! 겨울인데 엄청나게 다네요.”
“하우스에서 키우던 걸 훔쳐 온 거니까.”
하우스….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지만, 제철이 아닌 사과를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 새삼 인간의 기술이 부러워졌다. 이러니 수인 세계가 인간처럼 집을 짓고 따라하게 됐나 보다.
그나저나…. 인가까지 내려가서 다사다난하게 구해온 사과를 저 혼자 욕심껏 먹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미안해졌다. 이렇게 맛있는 걸 저만 먹어도 되나 싶었다.
아까 누아에게 과일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정색하고 아니라고 했지만, 이 사과는 정말 맛있었다. 혹시 맛있는 사과를 못 먹어봐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누아가 가여워졌다.
라핀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사과 바구니에서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사과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는 옷으로 뽀득뽀득 닦아 누아에게 내밀었다.
“누아 님도 하나 먹어 보세요.”
“…나 과일 안 좋아한다니까? 됐어. 너 많이 먹어.”
누아는 라핀이 내민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누아가 사과를 먹지 않는다는 건, 이 많은 사과를 라핀 혼자 다 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깨달은 거지만 저는 누아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이에게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라핀이 당근을 가장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사과가 진입 장벽이 낮아서 추천하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라핀은 조금 침울해져, 웅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맛있는데…. 저만 먹는 것도 너무 미안한데….”
“…….”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은 소화 기관의 구조도 다르고 입맛도 확연히 달랐다. 제가 맛있다고 느끼더라도 그에겐 아닐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서운하게 느껴지는지. 좋아하는 이와 공감대가 맞아야 대화도 통하고 그러는 건데, 생각해 보면 누아와 저는 전혀 다른 종족이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를 좋아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라핀이 괜히 침울해져서 사과를 깨작거리자, 누아가 머뭇거리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럼… 딱 한입만 먹을게.”
“정말요? 그래요! 아니, 작은 거니까 그냥 하나를 다 먹어봐요. 진짜 맛있어요.”
라핀에게 사과 하나는 먹고 나면 배가 찰 정도로 커다랗게 느껴졌지만, 대식가인 누아에게는 간식 같은 수준일 것이다.
라핀이 그렇게 말하며 내밀고 있던 사과를 흔들자, 누아가 조심스럽게 사과를 받아 들었다.
“…….”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라핀이 빤히 그를 바라보자, 누아가 마지못해 입을 크게 벌리고 껍질도 까지 않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제가 먹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아삭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라핀은 누아가 가져온 사과가 얼마나 신선한지, 당도가 높은지 알고 있기에 소리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음식이기에 그도 맛있다고 느낄지 기대가 됐다. 저와 그는 완전히 다른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대를 하게 됐다.
라핀이 두 눈을 빛내며 기대 어린 눈빛으로 누아를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가 잘 먹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새 꼭지까지 완전히 해치워버렸다. 손에 아무것도 남지를 않았다.
라핀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을 떠듬거렸다.
“꼭지는…. 설마, 씨도 먹었어요?”
“응? 응.”
“그, 그건 먹는 거 아니에요! 사과 씨에는 독도 들어 있다고요! 얼른 뱉어요!”
라핀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누아의 등을 퍽퍽 때리듯 두들겼다.
도대체 꼭지랑 씨는 왜 먹은 거야? 딱딱하고 맛도 없어서 먹기 힘든 것도 있지만, 사과 씨앗에는 독성이 있었다.
독이라니. 누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어제는 총에 맞아서 돌아오더니, 오늘은 독에 중독돼서 죽게 생겼다니. 그를 좋아한다고 자각하자마자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이와는 함께하지 못할 운명인 걸까.
라핀이 울먹거리며 그의 등을 열심히 두드리자, 누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켁, 독?”
“네! 그러니까 얼른요!”
“아냐, 잠깐. 때리지 말아 봐. 씨앗 한두 개 먹는 정도론 어떻게 안 돼. 여태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그, 그래요?”
라핀이 목소리를 벌벌 떨며 등을 때리던 손을 멈췄다. 어디선가 사과 씨앗에는 독성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하나를 먹는 정도로는 치명적이지 않은 건가? 정말인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반응에 의심부터 들었지만, 독을 먹은 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 치명적인 독이라면 벌써 반응이 나왔을 텐데, 눈앞의 누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심지어 안색이 평소보다 더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사과 씨앗의 독성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세차게 뛰던 심장이 평정을 찾고 글썽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무안한 감정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건 사과를 여러 번 먹어 봤다는 건가?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몇 번이고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으면서. 게다가 몇 번 먹어 봤으면 씨앗이랑 꼭지는 먹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왜 그런 식으로 먹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혹시… 사과, 많이 드셔 보셨어요?”
라핀의 물음에 손을 얹고 있던 누아의 등이 뻣뻣하게 근육으로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누아가 난감한 얼굴로 외면하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음, 응.”
아니…. 아까 과일 좋아하느냐는 말에 정색하기에 육식 동물 사이에서는 과일을 좋아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챙기려고 그랬던 거라면 맛없는 척을 해야지, 꼭지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혹시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을까? 육식 동물은 과일을 좋아하는 걸 자존심 상해하는 것일까 하는 것도 추측일 뿐인지라, 도대체 그가 왜 그런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해진 라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과일, 안 좋아한다고 하시는 것치고는 잘 드시던데….”
“…그다지 잘 먹진 않았는데.”
“아뇨, 엄청 잘 드시던데요. 저도 꼭지랑 씨앗까지는 안 먹는데…, 그것까지 다 드셨잖아요. 왜 그러신 거예요?”
“…….”
누아가 소심하게 반박했지만, 라핀은 물러서지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이유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아직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기도 했다. 토끼는 원래 호기심이 많다는데, 지금이 딱 그러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따지는 것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추궁을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동안 대답도 못 하고 있다가 고해성사하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사과 좋아해.”
사과를 꼭지까지 남김없이 먹는 것을 보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놀랍게 느껴졌다.
근데 이게 뭐라고 저렇게 심각하게 대답해? 무슨 심각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어져, 라핀은 덩달아 심각하게 그에게 물었다.
“예상하긴 했는데…, 왜 거짓말하셨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음. 그게 나쁜 의도로 속인 건 아니었어. 단지….”
“……?”
단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웠는데, 누아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애먼 곳으로 회피했다.
도대체 뭐길래 저러는데? 라핀이 무슨 이유여도 괜찮으니 말해 보라며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자, 누아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네 것까지 내가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아예 입도 안 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딱 봐도 너무 잘 익었잖아.”
“…….”
…뭐?
누아가 사과를 안 좋아하는 척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이유 없는 거짓말을 하진 않으니까.
그렇지만 설마 저런 이상한 이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사과를 너무 좋아해서, 한입 먹으면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누아의 자제력이 바닥 수준이라는 건, 이전의 경험들로 알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뭐랄까. 저런 말도 안 되는 귀여운 이유일 거라고는….
귀엽다고?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에 얼굴을 확 붉혔다. 누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제 얼굴을 보고 있었더라면 또 열이 나는 게 아니냐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제가 그를 좋아한다고 인정했더라도,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크게 생긴 늑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것도 시커먼 늑대 우두머리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말이 돼? 라핀은 미친 생각을 하는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게 때렸다.
철썩! 이마를 때리는 소리가 주방에 크게 울려 퍼지자, 깜짝 놀란 누아가 고개를 퍼뜩 들고 라핀을 봤다. 누아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라핀의 머리를 감싸며 외쳤다.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뇨….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뭐? 이상한 생각?”
“아, 아무튼…. 하아, 누아 님이 구해 오신 건데, 왜 제 눈치를 봐요….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죠.”
라핀은 귀엽다는 생각을 애써 지워내고, 누아의 팔을 붙잡으며 타일렀다. 어차피 사과는 누아가 구해온 것이었다. 저를 위해 구한 거긴 했지만, 아무튼 제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사과를 너무 많이 가져오는 바람에 다 먹기도 전에 상할 판이었다.
라핀이 먹고 싶으면 먹으라며 사과 바구니를 누아 앞으로 끌고 오자, 누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어.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라니까?”
“어차피 저는 사과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소화도 못 시키고. 오히려 누아 님이 더 잘 드시는 것 같은데, 남은 거 같이 먹어요.”
“앞으로 인가도 안 가기로 약속했으니, 이만한 품질의 사과를 구해오는 것은 마지막일 거야.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
“썩어서 버리는 게 더 싫어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요.”
“…….”
“저, 저도 그게 좋아요. 좋아하는 음식을…, 음, 나눠 먹으면 좋잖아요.”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이와 함께 나눠 먹으면 좋다는 말로 설득하고 싶었지만, 차마 ‘좋아하는 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 끝에 걸려 간질간질하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제 마음을 말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기도 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낯간지러웠다.
라핀이 얼굴을 발그레 물들인 채 머뭇머뭇 말하자, 누아가 유심히 라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같이 먹으면 되잖아.”
누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손아귀에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한입에 커다란 사과 반쪽이 사라지는 모습에 라핀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왜 그런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설득에 성공한 라핀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 이어질 듯했다.
라핀은 예쁘게 깎인 사과 조각을 씹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들고 그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맞다, 앞으로 씨랑 꼭지는 먹지 말아요. 씨앗에는 독성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많이 먹으면 분명 안 좋을 거예요. 꼭지는 원래 먹는 게 아니고요.”
“…알았어. 나는 다 먹는 건 줄 알았지.”
“저 깎아 준 거는 살만 발라서 주셨으면서….”
“꼭지랑 씨앗은 별로 맛없으니까.”
누아가 머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못 먹는 거니까 맛없는 건데, 그냥 맛이 없는 음식인 줄 알고 먹었던 건가…. 라핀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사과 하나 때문에 별 경험을 다 하네. 먹고 싶다는 충동 하나를 못 이겨서 남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던 늑대가 크게 다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제가 누아를 좋아한다는 자각도 하고, 이제는 사과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누아를 귀엽다고까지 생각하게 됐다.
아이가 갑자기 사과만 원하지 않았어도, 누아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이 때문에 점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묘했지만, 지금 느끼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