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1화 (11/16)

런, 래빗, 런! 4권

11. 역풍

블란은 왠지 누아가 의심스러워 그의 뒤를 밟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일부러 집에 있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누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짐과 달리 아예 마주치지를 않으니 뒤를 쫓을 수도 없었다.

그저 추측에서 나온 의심이었기에 블란은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누아는 지금도 라핀을 찾고 있을지 모르는데. 괜히 기다리다가 누아가 먼저 라핀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딱 오늘까지만 기다려 보고 내일부터는 저도 나가야겠다. 블란이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마침 그날 누아가 늑대 소굴로 돌아왔다.

블란이 기척을 느끼고 방에서 나오자, 누아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블란은 그 모습을 의심스레 훔쳐보다가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오면 인사 좀 하지?”

블란의 부름에 누아가 책상을 뒤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블란을 돌아봤다. 잠시간 블란을 쳐다보던 그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듯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뭐 반갑게 인사할 사이인가?”

“그건 그런가.”

블란은 누아를 라핀이 도망친 날 이후로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한집에 살면서 지긋지긋하게 보다가 며칠 만에 보게 되니 정말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반갑지는 않지만.

블란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누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긴 한데, 평소랑 크게 다를 거 없이 멀쩡해 보였다. 물론 평소에 놈을 눈여겨보지 않았던 터라 정확하진 않았다.

아무튼, 일주일 동안 집에도 못 돌아오고 토끼만 쫓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멀끔했다. 물론 집이 아닌 바깥에서도 씻을 순 있다. 누아는 블란과 달리 무식하게 냉수마찰 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렇지만 라핀이 도망친 와중에 면도까지 멀끔하게 한 것은 이상했다.

게다가 이놈, 며칠 전에 구급상자를 챙겨갔다고 했지. 보고를 들은 대로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역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블란은 놈을 수상쩍게 바라보다, 급히 표정을 바로 고치며 말했다.

“라핀 죽었다는데, 뭘 그렇게 찾으러 돌아다녀.”

“뭐? 라핀이 죽었다고?”

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치 처음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근래 누아는 늑대 굴에 들어오질 않았으니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모를 순 있겠지만…. 누아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중이라서 그런가? 뭔가 미심쩍었다.

블란은 절로 눈을 가늘게 뜰 뻔했지만, 타고난 연기력으로 유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더라. 하긴, 너랑 내가 둘이 나서서 못 잡았으면 이 산에는 없다고 봐야겠지. 죽었거나.”

“…그런 걸까.”

누아가 어쩐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탈출한 라핀을 찾으려고 온 산을 다 뒤지고 다녔는데 죽었다는 결론에 탈력감을 느끼는 듯했다.

블란은 일순간, 저도 모르게 누아의 반응에 공감했다. 한 번도 사냥에 실패해본 적 없는 둘이었다. 한 가지 표적을 노려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는데, 고작 토끼 한 마리를 잡지 못했다는 게 어이가 없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토끼가 죽어서 못 잡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존심 회복에 도움이 되겠으나 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핀은 제가 반려로 삼으려던 토끼였다. 저를 속인 것은 여전히 용서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둘 다 잠시간 말이 없었다. 서로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블란은 잠시간 라핀을 떠올리다가, 이러자고 놈에게 말을 건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집에는 왜 온 거야? 보니까, 아직 토끼 잡는 거 포기 못 한 것 같은데.”

“애들이 자꾸 와달라고 하잖아. 없으니까 힘들다고. 그래서 종종 들르는 거야.”

“…….”

블란도 그런 이유로 늑대 굴로 돌아온 적이 있긴 하지만, 방금 책상 위를 뒤적거리고 있던 손길이 뭔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별것도 아닌데 블란은 누아의 모든 것을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블란은 천천히 그가 뒤적거리던 책상을 바라봤다. 특별할 건 없었다. 그의 큼직한 손이 한 책 표지 위를 짚고 있다는 것을 빼고는.

블란은 책 쪽으로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손에 있는 책은 뭐야?”

“아, 이 책….”

누아는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러니 더 의심스러웠다. 저 책이 뭐길래? 블란이 은근히 보여 달라고 표정으로 압박하자, 누아가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책 표지를 블란에게 내보였다.

제목은 <썰매견의 비밀>이었다.

“…….”

뭐 저딴 게 집에 있어? 쟤는 저걸 읽으려는 거야?

저 책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빗나가자 짜증이 솟구쳤다. 블란이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자, 누아는 블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 눈이 많이 쌓였더라고. 썰매 재밌어 보이지 않아?”

“…아니.”

블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늑대와 흡사하게 생긴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놈들이 썰매에 인간을 태우고 눈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긴 했다만, 그건 인간을 따르는 개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인간들한테 잡혀서 썰매나 끌려는 생각은 아니지?”

“설마.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보려는 것뿐이야.”

“…그래. 잘 생각했다.”

블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악연인 누아라지만, 그가 인간에게 복종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싫다.

그런데 도대체 갑자기 왜 썰매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라핀을 못 찾았다는 것 때문에 미치기라도 했나?

고작 대화했을 뿐인데 힘이 축 빠졌다. 블란이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누아는 책 하나를 챙기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본 블란은 퍼드득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누아를 쫓아가야 한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블란은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뒤를 밟았다.

***

누아는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는 거침없이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혹시 북쪽 산으로 넘어가려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로 놈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실망스러웠다. 누아가 라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라핀이 죽었거나 북쪽 산으로 넘어갔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김에 미행은 때려치우고 북쪽 산으로 넘어가야겠군.

그간 북쪽 산으로 넘어갔다가 그쪽의 늑대들과 싸움이 날까 봐 못 넘어갔었는데, 누아랑 협력해서 넘어가면 꽤 괜찮을지 몰랐다. 놈과 협력하는 건 싫었지만 좋은 생각 같았다.

블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누아에게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누아가 한 동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뭐야, 저 새끼 어디 가.”

북쪽 산이 아니라 동굴? 벌써 쉬려는 건가?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기려는 거라고 하기에는 뜬금없었다. 그다지 주위에 위협이 될 만한 것도 보이지 않고.

동굴 안쪽까지 들여다봐야 하나. 미행했다는 걸 들킬 위험이 있었지만, 블란은 조심스럽게 안쪽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안쪽에서 본 광경에 미간을 확 좁혔다.

저게 뭐 하는 거지?

라핀을 찾으러 다니거나, 아니면 어디에 숨겨놓은 줄 알았더니만…. 누아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뭘 만드는 거야….”

누아는 커다란 나무 책상 위에 목재를 한가득 쌓아놓고서는, 수인 모습으로 나뭇가루를 풀풀 날리면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 누아는 어려서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손재주도 꽤 있었고. 그 누구보다 투박하게 생겨서는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

그렇지만 늑대가 그런 일을 할 일이 잦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한테 이런 일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다. 만드는 일이야 다른 종족에게 맡기면 됐고, 그 시간에 사냥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서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몰래 하고 있었던 건가.

이제 우두머리까지 됐으니 대놓고 한다고 욕할 늑대도 없는데 왜 굳이 숨어서 하는지. 뭐, 숨기고 싶은 게 다들 있기 마련이니 이해는 됐다.

아니, 그런데 라핀을 잡으러 간다고 해놓고 이럴 일인가? 사실 라핀한테는 별 마음도 없었나? 하는 짓을 봐서는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았는데, 제가 오해한 걸까? 단지 먹이로서 집착했던 건가? 왜 라핀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저러고 있는 거지?

혹시 몰라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누아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작업에만 집중했다. 어딜 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제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블란은 혀를 쯧, 차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라핀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잡아둔 것도 아니고…. 실연의 상처로 미치기라도 한 건가?

“…괜히 시간만 뺏겼네.”

블란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아가 의심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당분간은 무언가를 만드느라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차라리 조금 이따가 와야겠다. 블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

“휴우….”

한참을 뚝딱거리던 누아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누아는 몬드의 부탁에 늑대 굴에 들렀다가 서재에서 썰매에 관련된 책을 찾아왔다. 라핀이 슬슬 만삭이 되어가는 것 같으니 무사히 아이를 낳으면 썰매를 끌어줄 생각이었다. 처음 썰매 얘기를 했을 때 꽤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으니 분명 좋아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호기롭게 작업을 시작했는데, 썰매를 만드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실물로 썰매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데다가 책에 그려진 그림만 보고 만들려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질감이 느껴졌다.

여기에 끈을 달면 얼추 썰매 역할을 할 것 같긴 한데, 볼품없는 모양새에 라핀이 실망할 것 같았다. 썰매 타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니 이왕이면 완벽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누아도 썰매를 끌어본 적도, 타본 적도 없으니 엉성한 것이 당연했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겠냐마는…. 그래도 아직 기한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다듬으면 되겠지.

누아는 휴식을 취하며 동굴 바깥을 바라봤다. 한겨울이라 해가 늦게 떠,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곧 있으면 라핀이 일어날 것이다.

그전까지 보초를 자처하며 동굴 입구로 나오는데, 차가운 겨울 냄새 사이로 익숙한 체취가 코끝에 스쳤다.

“…블란이 왔었나.”

익숙한 체취였다. 꽤 가까운데…. 설마 여기까지 왔던 건가?

라핀이 죽었다는 소문에 포기한 줄 알았더니…. 워낙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놈이다 보니, 저를 떠보려고 그랬던 건가 싶어졌다.

저는 동굴 초입에서 썰매를 만드는 중이었고, 집은 동굴 아주 깊은 곳에 지어 놓았던지라 블란이 이곳을 들여다봤어도 집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지은 것이기도 했고.

집의 위치가 들키면, 그것도 모자라 라핀을 잡았다는 걸 들키면….

다른 곳에 또 거처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옮길 곳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보안을 더 철저히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누아는 짜증스러움으로 깊게 팬 미간 주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폈다.

***

“으음…. 누아 님…?”

라핀이 막 자다 깨,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평소 자고 일어나면 누아의 묵직한 팔이 제 허리를 감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무게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이질감을 느낀 라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옆자리를 확인했다. 침대 옆자리는 휑한 시트와 베개만이 라핀을 반길 뿐이었다.

“…….”

일순간, 라핀은 저번에 토끼 소굴에서 무리에서 버림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만 같은 써늘한 기분.

그렇지만 이내 불안을 지워냈다. 제게 집착하는 수준이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늑대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러니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라핀이 포근하게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엄지발가락에 딱딱한 것이 팍 치였다.

“아야!”

발에 치인 것은 딱딱하고 묵직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뭐야? 라핀이 찔끔 눈물 맺힌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책이 발치에 놓여 있었다. 제가 책을 읽지는 않았으니, 누아가 읽다가 대충 둔 것처럼 보였다.

“뭐야…. 제대로 정리해놓지.”

누아도 성격이 꽤 깔끔한 편인데, 웬일로 이렇게 내동댕이쳐 놨대? 라핀은 대신 정리해 주려고 허리를 굽혔다가, 책 제목을 보고는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생애 첫, 토끼 아이-성공적인 육아를 위한 첫걸음>

“…토끼 아이?”

라핀이 책을 주우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누아의 친구 중에 아이가 생겨서 임신과 출산에 관심을 가졌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늑대도 아니고 토끼 아이를 다루는 책이라니…. 이런 건 왜 읽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저번에 <토끼가 자랐어요!>라는 책을 읽기도 했었지. 혹시 그 임신했다는 친구가 토끼였던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누아는 저 이전까지만 해도 토끼 고기를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들었다. 그런 그에게 토끼 친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구역에 토끼는 저밖에 없었고.

설마… 저를 임신시키려고 이런 책을 읽는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당장 책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어지는 와중에, 문득 크게 부푼 제 배가 눈에 들어왔다.

“…….”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부풀었다. 더는 단순히 살이 쪘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최저점을 찍었던 건강은 점점 활력을 되찾고 있었지만, 자유로이 산을 뛰놀던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그러니 혹시 배에 복수가 찬 걸까 싶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설마… 제가 임신한 건 아니겠지?

저는 수컷이었고, 상대는 늑대였다. 그러니 절대로 임신 같은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적으론 불가능할지 몰라도 제 몸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술과 실험을 받았다. 암컷과 같이 아래에는 보지까지 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제 몸이 이상하긴 했다. 배에 유달리 살이 찐 것뿐만 아니라, 미열도 있었고, 입맛이 예민해지기도 하고, 과하게 많이 먹기도 하고, 간혹 배에 통증도 있었고….

설마 이게 임신 증상이었던가? 싸한 기운에 라핀은 누아의 책장에 꽂혀 있던 임신 관련된 책을 꺼내 빠르게 넘겼다.

‘임신 증상’ 챕터에 최근 느낀 것과 똑같은 증상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하….”

눈을 휘둥그레 뜬 라핀이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몸 안쪽까지 변했을 줄은….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임신이 가능한 몸이었다니. 아이를 품었다니….

그런데 누구의 아이지?

라핀은 핏기 가신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기억을 더듬어 임신 증상이 나타나던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렸다. 열병과 겹치면서 명확하진 않지만, 토끼의 임신 기간을 생각하면 누아와 교접을 한 횟수가 더 많았다. 임신 확률을 높이는 노팅까지 했었고.

그러니 그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셋이 함께 침실에서 뒹굴었던 날에는 블란이 제 안에 사정했었다. 블란의 아이일 가능성도 버릴 수 없었다.

누아도 제가 품은 아이가 블란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걸 알 텐데, 이런 책은 왜 읽는 거지?

그러고 보면 처음 저를 잡아 왔을 때 암컷 토끼를 데려와서 토끼를 번식시키려고 했었다. 블란의 아이디어였지만, 당시 누아는 조금 솔깃해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

그런 이유로 제가 아이를 낳게 하려는 거였을까. 그렇게 잔인한 늑대였던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제가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었다는 것도, 임신했다는 것도,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는 것도.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저만 모르고 있었다.

달칵.

그때, 방문이 열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누아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라핀, 일찍 일어났네.”

“…….”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더 자지 그래.”

라핀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누아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다정하게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극도의 혼란스러움이 분노로 뒤바뀌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지, 이런 책은 왜 읽고 있었던 건지, 낳게 하려는 건지, 낳으면 잡아먹으려는 심산인지…. 화를 내면서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목구멍에 뭔가 턱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라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기만 하자, 이상함을 눈치챈 누아가 라핀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잠깐만, 너 얼굴이… 왜 그래?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추워서 그래?”

“…….”

저렇게 저를 위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저를 열심히 속였다기보다는 제가 심하게 눈치 없었던 거지만…. 단전에서부터 배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라핀은 숨을 고르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요?”

“뭐?”

“이 책이요.”

라핀은 손에 들린 책을 누아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제가 눈치가 없는 편이라, 지금껏 제 앞에서 이런 책을 대놓고 읽어도 몰랐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이런 책을 읽었는지.

라핀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아 님 친구가 임신해서 관심 가졌다고 그러셨으면서….”

“…….”

“그게 저였어요?”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곧장 나오지 않는 대답에 라핀은 더욱 확신을 가졌다.

그게 제 얘기가 맞구나.

임신한 거였구나. 내가.

갑자기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진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라핀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넘어질 뻔하자, 누아가 다급하게 라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넣으며 몸을 지탱했다.

“라핀, 속이려던 게 아니라―.”

“속인 건 아니겠죠. 말을 안 했을 뿐이니까. 대놓고 이런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보고 재밌었겠죠.”

“아니야! 웃음거리로 생각한 적 없어.”

누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해명했다. 노란 눈동자 너머로 복잡한 감정이 혼재된 것이 보였다.

“그러면 왜 말 안 했는데요?”

“알면 스트레스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안정기가 될 때까지는….”

“안정기? 지금 그깟 스트레스가 중요해요?!”

라핀은 이유라도 듣자 싶었지만, 막상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토해내듯 소리를 말을 크게 내뱉었다.

누아는 저를 배려했다는 식이었지만, 그런 건 원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라핀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낳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모르지만, 아무튼 낳고 싶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임신이었다. 이상한 몸을 가진 수컷 토끼와 수컷 늑대 사이에 나온 아이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토끼일지 늑대일지도 모르고, 둘 다 아닌 돌연변이가 나올 수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데, 누아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라핀은 이상함을 느끼며, 누아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누아 님은 왜, 안정기가 될 때까지 저를 내버려 뒀어요? 설마, 토끼 농장이라도 만들어서 잡아먹으려고요?”

“뭐? 토끼 농장? 그건 뭔데?”

누아는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안 그래도 심각하게 패여 있는 미간 주름을 더 선명하게 만들며 되물었다.

모르는 척 오리발을 내미는 거라기에는 연기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제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걸까? 라핀은 따지던 기세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암컷 토끼를 데려와서 새끼를 치게 할 거라고.”

“새끼? 저번에는 내가 반려도 따로 있으면서 너랑 성교한다고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토끼 농장?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내가 그렇게 상종 못 할 쓰레기야?”

“…….”

“…미치겠군.”

라핀이 부정하지 않자, 누아가 작게 조소했다. 설마하니 라핀에게서 그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상처라도 받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제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막 대해 놓고서는 좋게 봐주길 바랐던 건가? 물론 최근 들어서는 그가 잘해줬고, 또 그런 그에게 끌리기도 했지만…. 그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널 잡아먹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으니 오해하는 것도 이해해.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 생각은 추호도 안 했어. 진즉에 그만둔 생각이라고.”

“…….”

“그냥 새끼를 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핏줄을 잡아먹으려고 낳게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생판 남인 너조차도 못 잡아먹어서 이러고 있는데, 핏줄은 가능하겠냐고?”

“…….”

라핀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오히려 라핀이 묻고 싶었다. 다시 잡아 와서는 살찌우고 잡아먹겠다고 하더니만, 그게 아니라 ‘못’ 잡아먹고 있는 거였다고?

왜?

제게는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면… 정말 낳아서 기를 생각이었어요?”

“그래. 그러니까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공부도 하는 거잖아. 내가 잡아먹을 생각만 했으면 낳게만 하면 됐지.”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었다면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누, 누아 님이 아이를 키울 생각이었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저는… 낳기 싫어요. 하물며 누아 님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요. 제, 제가 만약 블란 님의 아이라도 낳으면 어쩌려고요?”

어느 종족이든 그렇겠지만, 야생에서는 종족의 번식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개인이 잘사는 것보다는 응당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니 누아도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 핏줄이니까 낳아야 한다는 책임감.

그렇지만 라핀이 기억을 되짚어 봤을 때, 제가 누아의 아이를 뱄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횟수나 노팅을 떠올렸을 때 누아의 아이일 확률이 높긴 했지만 임신은 딱 한 번을 했다고 해도 기적처럼 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만둬야 했다.

라핀이 그런 생각으로 말하자, 누아의 단호한 대답이 들렸다.

“상관없어.”

“…네?”

“블란 새끼 애여도 상관없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라핀이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누아 님은 블란 님을… 싫어하시잖아요. 핏줄이니까 잡아먹지도 않을 거라면서 그게 왜 상관이 없어요?”

“…….”

“블란 님의 아기면 잡아먹겠다는 거예요?”

“아니야! 그래도 안 잡아먹어.”

“그러면요?”

“…….”

누아는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만 라핀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를 나쁜 방향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라핀이 물러서지 않고 대답해 달라는 시선을 보내자, 누아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실…, 아예 상관이 없는 건 아니야. 이왕이면 내 애였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블란의 아이라고 해도 키우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왜 누아 님이 키우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아이는 낳는 과정도 쉽지 않지만, 낳는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키워야 했다. 스스로 먹잇감을 구하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위해 먹이도 구해줘야 하고, 아프지 않게 보살펴줘야 하고, 사냥감의 표적이 되지 않게 지켜줘야 하고….

할 일이 대단히 많은데, 떠올리고 보니 누아가 지금 제게 해주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래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그게 제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 선심 쓰듯 키워주겠다고 하는 걸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소리라면, 호의일지는 몰라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핀이 그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누아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가 블란한테는 안 가기를 바라니까.”

“…….”

소유욕인 걸까. 그의 소유욕이 남다르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 블란에게 가지 말라는 건 이해해도….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그의 말이 진짜라면 저를 잡아먹지도 못한다고 하고, 새끼도 잡아먹을 생각도 없다고 하고, 장난감 취급도 하는 게 아니면….

저를 왜 데리고 있는 거지?

저를 데리고 있는 것이 더 손해 아닌가?

늑대에 비하면 너무나도 약해서 툭하면 침대에서 자고, 먹이도 구해다 줘야 하고…. 제가 이곳에서 마냥 편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만, 누아의 입장에서는 봉사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육식인 늑대와 달리 초식하는 라핀의 먹이를 따로 구해 와야 하는 데다 병시중도 들어줬으니 귀찮기 짝이 없을 터다.

기묘한 느낌의 끝에 라핀은 이전에도 생각했던, 말도 안 되는 가설 하나에 도달했다.

“저…, 누아 님.”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괜히 비웃음거리나 되는 게 아닐까. 만일, 제 추측이 맞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을까. 수많은 상념이 오갔다.

그렇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명확하게 알아야 할 때라 넘어갈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입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라핀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

“저를 좋아하세요?”

“…….”

라핀의 물음에 누아가 멈칫 몸을 굳혔다. 숨 쉬는 것도 멈춘 것처럼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또한 멈췄다. 갑자기 정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핀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만일 누아가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오해를 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 굴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뭐라고 대답할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라핀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대답을 기다렸고, 그는 한참 후에야 두 눈을 마주했다.

그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비장하기도 하고, 긴장감이 서린.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그래.”

“…….”

“너를 사랑하고 있어.”

표정만큼이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긴장한 티가 뚝뚝 묻어났다. 긴장이 제게까지 옮은 것 같았다. 라핀은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다가 숨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라핀의 반응은 그의 온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수많은 추측 끝에 나온 한 가지 가능성이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듣고 나니 믿기지 않았다.

“나도 내 행실을 아니까 당황스러울 건 알아. 그렇지만 나도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어.”

“…….”

누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라핀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늑대의 우두머리인 그가 왜 저 같은 토끼를 좋아하는 거지?

그의 성격에 큰 결함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누누이 생각했듯 그 정도는 야생에서 큰 결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암컷 늑대가 원하는 상일 것이다. 강하고 먹이도 잘 구해오고 생활력도 좋으니까. 제 편이라면 누구보다 든든할 상대였다.

충분히 좋은 짝을 만나고도 남을 텐데, 왜 굳이 나를?

“…아니야, 아니에요. 누아 님은 지금 착각을 하는 거예요.”

추측의 끝은 부정이었다. 그가 저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누아가 수컷 늑대가 아닌 암컷 토끼였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상적인 반려가 아니었다. 나약하고, 먹이도 못 구하고, 무리에서 버림받아 혼자 지내고, 몸은 평범치 못했다.

암컷 토끼한테도 보일 커다란 흠이었다. 상대가 늑대라고 해서 그 흠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하자, 누아가 대번 미간을 좁혔다.

“착각?”

“저 같은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이를 낳고 블란 님이 저를 포기하면, 그때는 저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장난감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아…,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소리라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누아는 라핀의 말이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는 듯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차이는 게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부정당하는 건 더 최악이네. 라핀,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도 몇 날 며칠을 고민했고,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

누아의 확고한 대답에 라핀이 아랫입술을 말아 살짝 깨물었다. 착각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저를 좋아한다고…

대화에 휘말려 제게 고백한 게 아니라 몇 날 며칠을 고민했었다니. 믿을 수 없으면서도,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여태까지 그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이 속속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를 살찌우려던 게 아니라 임신 중이니 모자람 없이 먹이려고 한 것이었고, 잘 때 안고 자는 것도, 그간 섹스하지 않았던 것도, 이렇게 살이 올랐는데도 저를 잡아먹지 않은 것도, 아이를 낳으면 블란의 새끼라도 키워주겠다고 하는 것도… 다 저를 좋아해서였다.

진짜다, 진짜였다. 누아가 저를 좋아한다.

누아의 진심을 알았지만, 마음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하루 만에 제가 임신했다는 것, 그게 늑대의 아이라는 것, 누아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복잡한 심경에 라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리자, 누아가 라핀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근처 책상에 올려놓더니 빈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좋은데…. 어떻게 말해야 믿어줄지 모르겠네.”

누아는 맞잡은 손을 이끌더니,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늑대 특유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갗을 콕 찌를 때마다 따끔거렸다.

라핀이 반사적으로 눈썹을 파르르 떨자, 그는 금방 날카로운 이빨을 거두고 질척한 혀로 살갗을 핥았다. 간지럽고 오묘한 느낌에 라핀의 몸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발바닥이라도 핥으면 믿어줄래?”

“발바닥은 왜….”

“복종의 의미로.”

“하아…, 싫어요. 그러지 마세요.”

라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발을 핥는 것으로 복종을 드러내는 종족도 있었지만, 그게 복종의 뜻이면 이전에 보지랑 뒷구멍을 핥아댄 건 무슨 의미인데?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라핀은 간절한 얼굴을 하는 누아의 모습을 잠잠히 바라봤다. 무엇을 해야 마음을 믿어줄 거냐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심각하게 생각하던 라핀은 조심스럽게 마저 입을 열었다.

“누아 님, 절 좋아한다고 하셨죠.”

“응.”

누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제게 갓 고백한 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라핀은 충분히 지쳐 있었다.

잠시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라핀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지우는 방법을 알아 오시면, 그럼 믿어드릴게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누아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들었다.

누아의 차가운 얼굴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게 무서웠다. 심장이 반쪽으로 쪼그라드는 것처럼 오싹했다. 그렇지만 라핀은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누아 님은 제가 당연히 아이를 낳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

“평생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도 생각 안 했고요. 더군다나 늑대의 아이예요. 낳다가 제 몸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아이가 무슨 종족으로 태어날지 몰라요. 혹, 돌연변이일 수도 있다고요.”

“그건 그렇지만…, 꼭 그런 방법이어야겠어?”

“…….”

누아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제 마음을 증명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냐는 듯, 다른 방법이 간절한 눈치였다.

누아는 라핀이 임신했다는 걸 알자마자 혼자 육아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라핀, 그리고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차곡차곡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알아 온 방법으로 없애버려야 한다니. 자신이 라핀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가혹하다고 느껴선 안 됐지만, 너무나도 처참했다.

누아는 대답 없는 라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방법은 알아야겠어요.”

누아가 다른 방법을 주면 하겠다고 애원했지만, 라핀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라핀은 저를 좋아한다고 하고 애틋하게 달라붙는 누아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제 배가 불룩하게 나올 정도로 자라난 아이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도 무서웠다. 입맛이 까다로워진 것이, 그러면서도 누아가 챙겨준 건 많이 먹게 된 것이, 간혹 배가 아팠던 것이… 제 배에 품은 아이가 저를 알아달라는 신호였다는 걸 알게 되니 망설여졌다.

애초에 알게 된 지 한 시간 만에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단 방법은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라핀은 더 단호해지기 위해서 누아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알려주시면, 그러면 누아 님이 정말 저를 좋아한다고 믿어줄게요.”

“…….”

라핀은 누아가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냉정한 방법이었고, 마음을 인정해주든 말든 뭔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동요하는 것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착잡한 듯 마른세수를 하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식은 상상도 못 했는데….”

누아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생각에 잠겼다. 제가 아는 라핀은 살면서 마주친 그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다. 라핀에게 몇 번이고 못된 짓을 한 제게도 마음을 조금 열어줄 만큼 모질지 못했다.

그러니 제가 처음 라핀이 임신했다는 걸 알아챘을 때 사실을 알렸어도, 라핀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연약한 심성으로는 아이를 지우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지만 여태까지 누아가 라핀을 잘못 봐왔던 걸까? 지금 눈앞의 라핀은 단호하게 아이를 지우려고 하고 있다.

연약한 천성이 냉정해질 만큼 라핀은 제가 싫은 걸까? 제가 아이를 키워주면 저와의 접점을 버릴 수 없을 테니까, 그마저의 가능성도 지워버리고 싶은 걸까?

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령 제가 아이를 지우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라핀은 제게 마음을 돌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라핀이 제 고백을 안 받아줘도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께 살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해다 주고, 함께 자고, 도망치면 잡아 오고. 지금과 바뀌는 건 없을 거다.

그렇지만….

“알았어, 찾아볼게.”

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수락했다.

이기적이지만, 라핀이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라핀이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더 간절했다.

그렇기에 누아는 그 누구보다 라핀이 아이를 지우지 않길 원하면서도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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