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태풍의 눈
별장에서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하루가 멀다고 덮쳐들었던 누아는 웬일인지 저를 건드리지 않았다. 약을 바른답시고 보지와 뒷구멍을 손가락으로 들쑤신 것이 마지막이었다.
대신, 이상한 짓을 했다. 의미 없이 배를 만지작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예전의 흥미가 섹스였다면 이제는 관심이 제 배로 흘러간 것 같았다.
왜 자꾸 배를 만지는 건지….
라핀은 멍하니 제 배를 내려다보며 배를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면 요즘 배가 부쩍 많이 나왔다. 도망쳤던 동안 제대로 된 걸 못 먹다가 갑자기 맛있는 걸 폭주하듯 먹었더니 살이 찐 모양이었다.
나름 목숨 걸고 탈출한 거였는데, 붙잡히자마자 모양 빠지게 너무 먹어댔나?
그런 생각이 드니 민망했지만, 제 걱정과 달리 누아는 맞은편에 앉아 제가 식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건초 좀 더 가져다줄까?”
그것도 모자라, 저런 식으로 다정하게 더 먹으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요즘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매번 맞은편에 앉아서는 제가 먹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구경했다. 그것도 모자라 더 먹으라며 권유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사냥과 채집에 천부적인 능력을 갖춘 누아라도 매일 제 먹이의 식량을 보급해 오려면 귀찮을 텐데…. 그렇지도 않나?
아…. 설마 그건가?
라핀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설마, 누아가 매번 저를 살찌워서 잡아먹겠다고 했는데 그게 착착 진행되는 중이라서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
그렇게 생각하니 밥을 먹던 라핀의 얼굴에 무거운 근심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누아는 예전에 제게 안 잡아먹겠다고 했지만, 도망치다가 붙잡힌 후에는 살을 찌워서 잡아먹겠다고 대놓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가 이상하리만큼 제게 잘해줘서 어렴풋이 누아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래도 저는 수컷이었고 토끼였으니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지능적으로 저를 안심시켜놓고 살을 찌우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먹던 것도 먹기 싫어졌다. 다이어트라도 해야 할 판에 이렇게 살이나 피둥피둥 찌우고 있다니….
라핀이 갑자기 먹던 건초를 그릇 위에 내려놓자, 라핀을 구경하던 누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그만 먹게?”
“네….”
라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내려다봤다. 그만 먹겠다고 다짐했지만, 식탐은 여전해서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런 상황에 군침이 돌다니. 정말 뱃속에 거지든 뭐든 들긴 든 모양이다.
라핀이 탐스러운 먹이를 보지 않으려 일부러 누아 쪽으로 그릇을 밀어냈다. 그러자 누아가 그릇 위에 수북하게 담겨 있는 음식을 내려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왜 이렇게 못 먹어?”
“예? 어….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입맛이 없다고? 갑자기? 아, 설마… 토할 것 같아?”
“네? 그건 아닌데요.”
갑자기 토할 것 같냐니. 단순히 입맛이 없다고 한 거에서 왜 그런 질문으로 튀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혹시 체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라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아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혹시 뭐 다른 게 먹고 싶어서 그런 거야?”
“예? 아니요?”
“다른 음식을 구해 와야 하나…. 토끼가 먹는 게 또 뭐가 있지?”
“…….”
누아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라핀은 표정을 굳혔다. 아까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라고 할지… 누아는 저를 먹이는 데 집착하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누아가 저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먹이’로서 좋아하는 거였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저… 요즘 입맛이 많이 돌아서 과하게 먹었던 거지, 오늘도 충분히 먹었어요. 그렇게 물어볼 정도는 아니에요….”
음식을 남기긴 했지만, 자신이 평소 먹던 양을 생각하면 충분히 많이 먹은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누아가 저런 식으로 물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게다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건 평소를 말하는 거지, 지금은 네가 홀….”
“……?”
누아가 말을 공격적으로 늘어놓다가, 갑자기 입막음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을 멈췄다.
뭐지? 홀? 라핀이 궁금증에 뒷말을 기다리자, 누아가 수상쩍을 만큼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홀…, 홀가분한 몸이 아니잖아. 아직 감기 안 나았다며. 아플 때는 영양 보충을 더 잘해줘야 하는 것도 몰라?”
“…….”
홀가분한 몸이 아니라니. 맞는 말이긴 했지만, 찝찝했다. 마치 살이 쪘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 같았다. 누아가 말을 어색하게 끊었던지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나? 라핀은 여전히 평균에 비하면 마른 편에 속했다. 그렇지만 제가 살이 찔수록 늑대에게 먹을거리가 많아진다고 생각하니, 생전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던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됐다.
이곳에서 운동하기는 글렀으니, 식이 조절뿐이다….
라핀이 혼자 생각에 결단을 내리고 의지를 다지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누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라핀, 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네? 아, 아닌데요…?”
“표정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
독심술사야? 누아가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제가 생각을 잘 못 숨기는 건지 모르겠다.
라핀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우물거리자, 누아가 라핀이 남긴 그릇 위를 넓적한 접시로 덮으며 말했다.
“음식은 덮어놓을 테니까 입맛 돌면 먹어. 먹고 싶은 거 생기면 말하고.”
“네….”
“그럼 방으로 가자.”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보폭으로 라핀에게 다가온 그가 라핀의 허리를 감싸고 부축하듯 했다. 그에 라핀이 밀착하지 않으려 주춤거리며 말했다.
“저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라핀은 며칠 전, 식사 후에 일어나다가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고 식탁을 붙잡았었다. 가벼운 현기증일 뿐이었고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누아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때도 왜 저렇게 유난스러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누아는 그날 이후, 라핀이 식사를 마치면 꼭 이런 식으로 부축을 해줬다. 제가 늘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넘어진다고 뭔 일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라핀이 이런 부축은 필요 없다며 에둘러 말했지만, 누아는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누가 너 못 걷는대? 이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
한마디로, 네 걱정하느라 이러는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하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보니 퍽 곤란했다.
라핀은 결국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앉게 됐고, 누아는 라핀을 앉히고는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책을 가지고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보면, 누아가 제 배를 자주 만진다는 것 외에도 요즘 다른 변화가 생겼다.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별장 생활을 하기 전에도 누아는 어울리지 않게 책을 자주 읽는 편이니 이상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가 근래 읽는 책 제목들은 뭔가 이상했다.
그가 일주일간 읽은 책의 제목은 대충 이러했다.
<토끼가 자랐어요!>, <내 몸을 위한 음식: 초식동물 편>, <태교에 좋은 101가지>, <아빠가 된다는 것>, <초보 육아일기> 등….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이상한 제목들도 있었다.
<토끼가 자랐어요!>라는 동화를 제외하고는 죄다 한 가정의 초보 아빠가 읽을 만한 책들이었다. 왜 갑자기 저딴 책들을 읽는지 모르겠다. 아직 반려도 없으면서. 혹시 어디 가서 아이라도 생겨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책 리스트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핀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헉 숨을 삼켰다.
아, 설마….
“…진짜인가?”
라핀은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제가 늑대 소굴에 갇혀 있는 동안 누아는 바깥에 잘 나돌아 다녔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집돌이처럼 방에 콕 박혀서 안 나갔지만, 아무튼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어쩌면 저를 잡아 오기 전부터 사귀던 애인, 혹은 반려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애인이 있냐고 물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저와 몸을 겹치고 노팅하고 발정기도 함께 보내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게 누아가 저를 단순한 장난감 취급한 거라고 생각하면 가능성 있었다. 누아를 그만큼 쓰레기라고 보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바람둥이를 알고 사귀는 게 아니지 않나. 나중에 밝혀지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하아….”
라핀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누아를 다른 늑대들보다는 조금 착하고, 정 있는 늑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다른 짝이 있으면서 저와 몸을 겹쳤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랬다.
뭐? 늑대는 평생에 한 명만 반려로 삼는다더니…. 순 새빨간 거짓말이네. 고상한 늑대인 척하더니만, 블란도 그렇고 누아도 그렇고 다 이상한 늑대뿐이다.
라핀이 씨근덕대며 애꿎은 이불을 구기자, 누아는 그게 거슬렸는지 책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뭐야. 왜 갑자기 화가 났어?”
“…화 안 났는데요.”
아까부터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지 누아는 쉽게 제 속내를 간파했다. 라핀이 구차해 보일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부정하자, 누아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하긴, 감정이 오락가락한다고 하더라.”
“네? 뭐가 오락가락해요?”
“아…, 음, 책에서 보니까 아프면 좀 그렇다고 하더라고.”
“…….”
라핀은 오묘한 표정으로 누아를 바라봤다. 그는… 유식한 척을 하고 싶은 걸까? 그와 함께 지낸 지가 얼마인데, 이제 와서 유식한 척을 하다니. 게다가 그에게 필요한 건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올곧은 성품이었다. 아기 책보다는 배려나 참을성에 관한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라핀이 속으로 그의 성품에 트집을 잡고 있을 때, 누아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내 욕 하는 눈인데.”
평소 누아가 제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은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 그것도 세 번 연속으로 내리 맞추니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독심술 책이라도 읽으셨어요?”
“뭐? 진짜야?”
라핀의 물음에 누아가 대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냥 찔러본 건데 맞았냐는 반응이었다.
그는 라핀이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기분이 복잡 미묘해 보였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황당한 것 같기도 하고…. 온갖 기분이 다 섞인 복합적인 표정이었다.
누아는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딴 책 없어. 그냥 네 표정에 다 티가 나서 그런 거야.”
“…그렇구나.”
라핀이 멋쩍게 대답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괜히 물어봐서 욕하고 있던 것만 들켜 버렸다.
좁은 방 안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처럼 누아가 책이라도 읽으면 좋을 텐데, 노란 눈동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마땅한 주제 없나.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라핀은 머리를 굴리다, 누아의 손에 덮어져 있는 책 제목을 보고 ‘저거다!’ 싶어졌다. 책 제목은 <아이를 올곧게 키우는 법>이었다.
“근데… 누아 님. 저, 조금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또 뭔데.”
라핀이 누아와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묻자 누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좀 전에 궁금하다고 하고 독심술을 배워왔냐는 말을 했던지라, 이번에는 달가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상한 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냉랭한 반응에 말하기가 뭣했지만,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자고 마음먹었으니 라핀은 애써 자연스럽게 말문을 텄다.
“혹시 어디… 반려라도 두셨어요?”
“…뭐?”
저는 누아에게 다른 반려가 있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책 제목을 보아…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그러니 누아에게는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좋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반려가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물어보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누아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방 안을 채우던 어색한 분위기가 단숨에 시베리아 허허벌판처럼 냉랭함으로 뒤바뀌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살벌한 분위기에 라핀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요즘 읽는 책들 제목이 다 그렇잖아요.”
“…….”
“하물며 지금 읽는 책도….”
“라핀.”
누아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라핀의 말을 끊었다. 라핀이 말을 멈추자, 누아가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피며 말했다.
“네가 오해할 수 있겠다 싶은데…, 그딴 질문은 나한테 해선 안 되는 거야.”
“…….”
“도대체 날 뭐로 봤으면 반려가 있냐는 말을 해? 내가 반려를 두고 너랑 이렇게 한집, 한 침대에서 잘 것 같아?”
“그건….”
라핀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누아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 안에서 그의 이미지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만…. 늑대들은 한 반려만 만난다고도 하고, 반려가 있는데 저와 한집 살이를 할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요즘 그가 자꾸 이상한 책을 읽는 걸 보기도 했고, 또 오늘 그가 저를 살찌우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그런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이유야 어쨌든, 라핀은 그를 정말 쓰레기로 오해한 것이 미안했다. 라핀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금 억울한 투로 물었다.
“그러면, 그런 책은 왜 읽으시는 거예요?”
솔직히 책만 아니었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는 하지 않았을 거다.
다른 이도 아니고, 누아는 아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편견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이는 귀찮다고 싫어할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저런 책만 읽어대니 그런 쪽으로 생각이 튈 수밖에 없었다.
라핀이 그의 손에 들린 책에 눈짓을 주며 묻자 누아가 드러난 책 표지를 내려다봤다. 그는 저도 느끼는 바가 있는지 은근슬쩍 제목을 손으로 가리며 멋쩍게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읽는 거야.”
“네? 갑자기 아이 키우는 법이 궁금해요?”
“어, 어. 친구가 아이가 생겼다고 하더라고.”
“친구요?”
라핀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누아한테도 친구가 있구나. 저도 없는 친구가, 배려심 하나 없는 누아한테는 있다는 게 의외였다.
하기야, 제가 특이한 케이스지 대부분 친구가 하나쯤은 있긴 했다. 특히 누아는 늑대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우두머리이니 그와 친구 맺고 싶어 하는 늑대도 있을 것이다.
라핀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렇구나…. 제가 오해했네요. 죄송해요.”
“…그럴 수 있지.”
누아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지만, 답지 않게 화를 삭였다. 제 행동이 오해를 살 만하다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누아를 상종도 못 할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또 그런 취급을 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아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반려가 없었다는 사실에 갑갑했던 마음이 탁 트였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라핀은 방금까지 어색하게 그의 눈치를 보던 것도 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의외로 아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뭐? 내가?”
누아는 책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에 라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남의 일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책을 찾아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자기 애면 모를까, 남이 애를 가졌다는 소식에 저렇게 책을 여럿 찾아보는 것도 흔치 않을 터다.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며 물으니 누아의 표정이 알쏭달쏭 오묘해졌다. 딱히 이상한 걸 말한 것도 아닌데, 꼭 살면서 처음 들은 것처럼 그랬다.
왜 저러지? 라핀이 기웃거리며 누아의 표정을 살피자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나 봐.”
“……?”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그랬나 봐는 뭐야? 반응이 영 시시했다.
그나저나 아이라니….
야생의 세계에서는 아이를 좋아하든 말든 새끼를 낳아 종족의 번식에 일조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라핀은 그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저와 함께하던 토끼들은 다 떠나서 암컷 토끼를 만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저는 남들과는 다른 몸을 가지고 있어 이해해주는 이를 만나는 것도 힘들 거라 생각했다. 또한 라핀은 가족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기에, 제 아이도 저처럼 괴로울까 봐 가정을 꾸리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 의지로 꾸리지 않는 것과 못 꾸리는 것에는 심리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가 제가 가진 콤플렉스라면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고.
라핀은 제가 일반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능했더라도 가정 같은 건 꾸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보니 깊게 생각하면 늘 씁쓸해졌다.
지금 당장 누아가 반려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저에게 걸맞은 반려를 만나고 새끼를 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
“라핀이 죽었다고?”
부하 늑대가 사정사정해서 동굴로 돌아오자마자 블란은 뜬금없는 소문을 들었다. 다름 아닌 라핀의 부고였다.
“네, 그러니까 이만 수색을 멈추고 돌아오시는 게 어떠신지….”
블란에게 소문을 전한 부하 늑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며칠 전부터 라핀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두머리 둘이 토끼를 찾으러 다니고는 있지만, 사실 토끼는 죽은 지 오래됐다는 내용이었다.
누구는 굶어 죽었다고 하고, 다른 이는 다른 동물에게 습격당해 죽었다고 한다. 어디서 퍼진 건지도 알 수 없고, 근거도 하나 없는 소문이었다. 그렇지만 소문은 차차 늑대 사이에서 퍼졌다.
아무도 소문의 출처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믿었다. 그만큼 토끼는 여린 존재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 그러니 부하 늑대들은 두 우두머리가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원래처럼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고작 토끼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블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대번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내 두 눈으로 확인을 못 했는데, 그딴 말은 왜 하는 거야? 너희가 봤어?”
“그렇지는 않지만…. 누가 잡아먹으면 시체도 못 찾는 게 야생 아닙니까. 블란 님도, 누아 님도 그렇게 혈안이 되어 산을 뒤집고 다녔는데 아직도 못 찾은 걸 보면 ̄.”
“씨발, 조용히 해!”
블란이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말을 끊었다.
고함이 동굴 안에 웅웅 메아리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큰소리가 나자, 동굴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가 블란의 눈치를 살폈다.
블란은 보는 눈도 많은 데다가, 화를 낸다고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알았다. 늑대 부하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한 이상하지도 않은 소문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라핀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블란은 다시 언성을 높이는 대신 어금니를 까드득 깨물며 턱 근육을 움찔거렸다. 코로 깊게 숨을 내뱉은 블란은 목소리를 줄이고 낮게 으르렁대며 말을 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데…. 아가리 꿰매버리기 전에 좀 닥치고 있어.”
“…….”
“라핀이 죽었다고? 난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딴 말 못 믿어.”
블란이 분노로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분위기를 단숨에 압도하는 기세는 여전했다. 다들 곁눈질로 이쪽 상황을 보고 있을 때, 소문을 전한 은빛 늑대가 고개를 수그리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
블란은 고개를 옆쪽으로 돌리며 시선을 위로 치켜 올렸다. 라핀이 죽었다는 근거도 없는 소문 때문일까? 심장이 쿵쿵거리며 진정이 안 됐다. 화제라도 돌려야 평정을 찾을 듯했다.
검은 늑대 무리 쪽을 바라보던 블란의 머릿속에 문득 궁금증 하나가 스쳤다. 블란은 다시 부하 늑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누아는, 그 새끼는 어디 갔어?”
“누아 님도 토끼 찾는다고 잘 안 들어오십니다.”
“후우….”
블란이 숨을 깊게 내뱉었다. 누아도 라핀을 못 찾은 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마음이 복잡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늑대 우두머리 둘이 나서서 토끼 한 마리를 못 찾았다니. 정말 죽은 걸까?
저마저도 라핀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으니,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블란은 라핀이 죽었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제가 처음으로 좋아한 상대였다.
고작 토끼인 녀석을 반려로 삼으려고 하기까지 했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벌써 라핀이 탈출한 지 이 주일이 지났다. 아무리 작고 느린 토끼의 몸으로 이동했다고 해도 옆 산으로 넘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작은 토끼가 늑대 둘을 따돌릴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신체 능력만 따지면 당연히 늑대 쪽이 뛰어나니, 지능 싸움에서 졌다는 건데…. 라핀이 그럴 만큼 똑똑했는가 하면 아니었다. 제가 반려로 삼으려고 했던 이에게 이런 비유는 조금 이상할지 몰라도, 라핀은 과하게 순진해서 호구 같은 면모가 있었다. 똑똑했다면 일찌감치 도망쳤을 테고.
그런 라핀이 어떻게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지….
블란은 넌지시 검은 늑대 무리 쪽을 바라봤다. 며칠 블란이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도 난리가 난 은빛 늑대 무리와 달리, 유달리 차분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몬드가 대신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지….
잠깐 생각하던 블란은 제 앞에 수그리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누아 새끼, 저번에 언제 왔다 갔어?”
“어…, 일주일쯤 전에 오셨다 가셨습니다.”
“그날 수상쩍은 행동은 없었어?”
“수상한 행동이요?”
블란의 물음에 부하 늑대가 골똘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오랜만에 누아가 돌아온 걸 봤지만, 원체 누아에게 큰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눈여겨보지는 않았었다. 별다른 사건도 없었고, 지나가다 들은 대화로는 아직 토끼를 못 잡았다는 것뿐이었다.
부하 늑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글쎄요…. 별다른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앞으로 몬드가 대신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둘이 대화를 오래 나눴던 것 빼고는 별거 없었습니다.”
“그래?”
“집에도 들르셨는데…. 아, 구급상자를 들고 가셨습니다.”
“구급상자? 그건 왜?”
구급상자라는 말에 블란이 눈을 번뜩였다.
그다지 대단한 걸 말한 것도 아닌데 과하게 반응을 보이는 블란에, 부하 늑대는 움찔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그, 글쎄요? 어디 다친 게 아닐까요? 멀쩡해 보이긴 했는데요.”
“흠…. 알았어.”
블란은 부하 늑대에게 돌아가라고 손짓을 주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누아가 구급상자를 챙겨 갔다고? 누아가 다친 것일 수도 있지만, 부하 늑대가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고 했다. 누아는 큰 상처가 아니고서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자잘한 상처 따위 금방 나을 거라고 침만 바르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구급상자를 미리 챙겨 갔단 말이지? 그걸 어디에 쓰려고?
토끼를 찾으려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블란은 몸 누일 수 있는 아무 곳에서나 자곤 했다. 아마 누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불편하게 구급상자를 챙겼다니. 의심스러웠다.
아무래도 라핀을 위해 구급상자를 챙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당장 누아, 그 새끼를 찾아야겠다.
***
“왜 안 빠지는 거야….”
식사를 마친 라핀은 제 배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쭉댔다.
누아가 저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며 다이어트를 시작했지만, 한번 찐 살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하필 배에만 살이 쪄서 거울을 볼 때마다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쩜 이렇게 배에만 살이 찔 수 있는 거지?
심란했다. 더 먹고 싶어서 서러워 죽겠는 걸 참는데, 왜 이렇게 살이 안 빠지는 건지. 살다 살다 제가 살에 강박증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식탐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 생존을 위한 수준으로 먹는 데에는 이골이 난 저였는데 요즘은 너무 먹고 싶어서 베개를 쥐어뜯고 싶어질 정도였다. 라핀은 제가 이렇게 식탐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스트레스받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었다. 애써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고 싶었지만, 라핀은 딱히 취미라고 할 것도 없는 데다가 또 늑대의 집에 갇힌 신세라서 할 수 있는 게 제한되어 있었다. 무얼 해도 누아의 시야 안이었고. 그나마 할 만한 게….
잠깐 생각하던 라핀은 방에서 수건을 챙겨 들었다. 갈아입을 옷을 찾던 라핀은 서랍장 안에 있던 후줄근한 티셔츠 하나를 꺼내 들며 누아에게 물었다.
“저, 이거 제가 입어도 돼요?”
“내 옷을? 상관은 없는데, 그건 왜?”
“씻고 갈아입으려고요.”
라핀이 덤덤하게 대답하며 입을만한 바지를 찾으려 서랍장을 뒤적였다.
속옷은 아직 못 구했다고 했지. 종족마다 옷 사이즈와 특성이 다른데, 토끼가 멸종되다시피 한 이 산에서 옷을 구하기 쉽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그러니 저번에도 이해했던 거고. 그렇지만 지금은 부탁한지 시간이 꽤 흘렀고, 누아 능력이면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 이상했다.
차라리 제가 구해보자 싶어 함께 사러 가자고도 말했었지만, 누아는 안 된다고 했다. 답답한 늑대였다.
그나저나 바지는… 죄다 너무 커 보이는데? 기장도 그렇고 허리도 그렇고. 상의는 커도 어깨가 드러나는 정도였지만, 바지는 바닥에 끌리고 허리가 맞지 않아 흘러내릴 정도였다. 트레이닝 바지는 허리에 끈이 있으니까 괜찮으려나?
라핀이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들고 고민하고 있는데, 누아가 갑자기 우왕좌왕했다.
“씻는다고? 잠깐 기다려.”
“예? 뭘 기다려요?”
“나도 같이 씻게.”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갈아입을 옷과 수건, 속옷을 빠르게 챙겼다. 정말 같이 욕실에 들어갈 기세기에 라핀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뇨! 저는 혼자 씻고 싶은데요….”
“뭐?! 혼자 씻겠다고? 위험하잖아!”
라핀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누아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씻는 게 뭐 어떻다고? 라핀은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욕실에 뭐 육식 동물이라도 있어요? 씻는 게 뭐가 위험하다고 그래요.”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또 어지럼증이 도져서 넘어지면 어떡해.”
“딱 한 번 그랬어요. 아시잖아요.”
“갑자기 배가 아플 때도 있었잖아.”
“그건… 가끔인걸요. 아무튼 씻는 건 겨우 십 분이라고요.”
가끔 배가 쿵 하고 울릴 정도로 아플 때가 있긴 했지만, 씻는 데 한두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겨우 몇 분이었다. 게다가 현기증이나 배가 아픈 건 잠시일 뿐인데, 그것 때문에 같이 씻기는 너무 과잉보호 아닌가? 아니, 이게 보호가 맞긴 한가?
라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누아를 올려다보자, 누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딱 십 분 안에 씻고 나오는 거야.”
“…….”
누아는 같이 씻지 않겠다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는 드넓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되지도 않는 불쌍한 모습을 보였다.
저런다고 어깨가 좁아 보이지도 않건만, 라핀의 양심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같이 씻을 걸 그랬나? 요즘은 같이 씻어도 별일 없던데….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라핀은 휙휙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야. 그는 요즘 저를 씻길 때마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제 몸을 훑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비누칠 해주겠다며 가슴이며 엉덩이, 성기 부분을 스치듯 만지곤 했는데 그 느낌이… 정말 오묘했다. 대놓고 만지는 것도 아닌데, 몸이 저릿저릿해서 발기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러다 선 넘는 거 아니야?’ 하고 걱정했지만, 딱 거기에서 끝났다. 섹스 때마다 시달리는 라핀으로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농락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하필 요즘 몸도 겹치지 않아서 그런지 아쉬움이 치밀었다.
라핀은 침을 꼴깍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쉽다니? 제가 욕구불만도 아니고…. 꼭 발정기 때처럼 성적인 욕구가 이성을 넘길 듯한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것이 싫었다. 제가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예전만 해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라핀?”
라핀이 퍼뜩 고개를 드니, 누아가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는 듯 허리를 굽히고 제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 아니요. 저 십 분 안에 씻고 나올게요.”
라핀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누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는 여전히 라핀이 혼자 씻겠다는 걸 곱지 않게 보는 듯했지만 돌아서는 라핀을 붙잡지는 않았다.
***
욕실로 들어선 라핀은 옷을 훌러덩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하얀 나신 위로 뜨끈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욕실 안에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으으, 좋다아….”
라핀이 눈을 살포시 감은 채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씻겠다고 한 거였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토끼 몸을 하고 있을 때 씻는 건 힘들었지만, 수인화를 하고 있을 때 뜨끈한 물로 씻는 건 편하고 좋았다. 물이 몸을 타고 흐를 때마다 잡념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십 분 안에 씻고 나오겠다고 약속한 바람에 반신욕을 하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기회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아쉬움을 덜어냈다.
라핀은 흰 머리칼이 완전히 젖은 후에야 샤워기를 끄고 샴푸를 찾았다. 라핀은 선반에 올려져 있는 샴푸를 꺼내 손 위에 짜내다가 몸을 멈칫했다.
“…이만했나?”
라핀은 갑자기 든 생각에 멍하니 샴푸 통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누아의 성기가 이만했던 것 같은데.
샴푸 통은 길쭉하고 매끈한 디자인이었다. 그의 성기는 핏줄이 서서 이렇게 매끈하진 않지만, 두 손으로 쥐어야 다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게 비슷했다. 길이도 몽둥이처럼 길어서, 몸에 들어오면 일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이 들곤 했었다.
그의 성기를 연상하며 샴푸 통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라핀은 뒤늦게 “헉!” 소리를 내며 샴푸 통을 바닥에 내던졌다.
내용물이 가득 들어 있던 통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물기 젖은 타일 바닥 위를 굴렀다.
“아니, 내가 왜, 그딴….”
라핀은 말을 떠듬거리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고작 연상만 했을 뿐인데, 남몰래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가쁘게 쿵쿵 뛰었다.
진짜 수컷의 음경을 만진 것도 아닌데 꼭 늑대 놈의 것을 만진 것 같아서 손이 어정쩡해졌다. 라핀은 곧장 더러운 세균을 박멸해버리겠다는 듯이 벅벅 손을 씻었다. 정신을 깨우기 위해 거칠게 세수까지 했다.
“휴우….”
처음에는 누아가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지를 않나, 살을 찌워서 저를 잡아먹는 건 당연한 건데 크게 실망하지를 않나, 반려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며 땅을 파지를 않나…. 이제는 샴푸 통을 보고 누아의 성기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매번 제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정점을 찍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저는 누아를 그만큼 의식하고 있었다.
수컷 늑대한테 이런 감정을 느껴서 뭘 할 수 있다고. 라핀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절로 그려지는 참담한 미래에 머리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 들어온 제 몸에 울상을 지었다.
“넌 또 왜 그러는 거야….”
미친 거 아니냐는 이성과는 달리, 하반신의 남성기는 통통하게 발기해 있었다.
찬물로 샤워라도 해서 가라앉혀야 하나 싶었지만, 아직 나오기로 약속한 십 분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욕실에 시계는 없어도 아직 몸에 물만 끼얹은 정도라 한 발 빼기에는 여유가 있었다.
라핀은 힐끗 닫힌 욕실 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별일 없을 것이라며 조심스레 제 남성기를 손에 쥐었다.
“으응….”
남성기를 쥐고 가볍게 위아래로 흔드니 금방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식으로 자위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성욕을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라핀도 다른 이들만큼이나 성욕을 느끼고 몽정도 하는 평범한 수컷 토끼였다. 신체 구조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보지는 씻을 때 빼고는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지를 쥐고 흔드는 것보다 보지를 쑤셔 박히는 일이 더 잦아졌다. 누아가 간혹 자지를 만져줄 때도 있긴 했지만 저를 놀리려고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박게 해주지는 않고, 보지에 박으면서 자지를 만져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사정을 의도적으로 막으려고 할 때거나….
누아가 제 것을 만져주던 때를 떠올리니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자지가 더 단단해지는 것과 동시에 보지가 축축해지고 벌름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무언가를 받기 위해 준비를 하는 느낌이었다. 사정 때가 다가오면 늘 이랬는데, 새삼스럽게 그 변화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얼른 사정하고 찝찝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만 오가는 느낌이었다.
“흐으…, 왜 이래….”
라핀이 울먹거렸다. 왜 이러지?
분명 자지는 터질 듯이 발기했는데 사정은 안 된다니. 정작 사정을 참고 싶을 때는 안 참아지더니만, 갑자기 제 몸이 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사정이 안 되는 갑갑함과 동시에, 이상하게 아래를 만지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보지든 뒷구멍이든 상관없었다. 아래가 간지러워서 만지고 싶었다. 만지면 이 안달 난 느낌이 해소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는 나갈 수도 없었다. 누아가 속옷도 안 구해줘서 바지만 입으면 발기한 것이 다 드러날 것이다. 나가면 몰래 자위할 틈도 없고.
잠시간 망설이던 라핀은 욕실 벽에 한쪽 손을 짚은 채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남은 손을 뒤로 뻗었다.
“흐읏….”
보짓살을 벌리고 손가락 한 마디를 넣으니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보지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만 닿아도 아팠던 부위였는데, 성교를 며칠 쉬니 언제 퉁퉁 부어 있었냐는 듯 멀쩡히 나았다.
문제는 나은 것뿐만 아니라 쑤시고 싶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아예 섹스를 모르고 살던 때에는 ‘토끼는 음란한 종족이다’라는 말을 듣고 치욕스러워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왜 다른 동물들이 토끼를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한때 늑대들한테 휘말려서 평생 할 섹스를 다 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더는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안 건드렸다고 보지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제 모습이 그들 못지않은 변태처럼 느껴졌다.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래를 쑤시는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뜨거운 쾌감이 머리를 잠식해 얼른 사정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 아흐으….”
쏴아아―.
라핀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으며 보지를 쑤셨다. 애액인지 물인지 모를 것으로 다리 사이가 완전히 습해졌다. 어느새 검지 하나는 보지에 세 마디가 다 들어가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찔꺽대는 소리가 났다.
깊게 쑤셨다가 빼기를 반복하니 손등을 타고 투명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몸을 뒤덮은 쾌감에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지만,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 때문인지 조급함 때문인지 더 사정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미치겠, 네….”
라핀이 굳게 닫힌 문을 힐끗 보고 울먹거렸다. 빨리 사정하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모자란 느낌이었다. 라핀의 손가락은 누아의 손가락에 비하면 짧고 얇아서 깊은 곳을 제대로 쑤셔주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를 더 넣어야 하는 걸까….
제가 원하는 압박감을 느끼려면 손가락 하나는 더 넣어야 할 듯했다. 그렇지만 보지로 자위하는 것도 처음인데 손가락을 두 개나 넣으려니 망설여졌다. 이보다 훨씬 두껍고 커다란 것도 받아냈고, 고작 손가락 두 개일 뿐이지만 넣으면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겁이 났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 상태로 욕실 밖으로 나가면 더 큰 문제가 생길 테니, 어떻게든 사정하고 제 몸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라핀은 머뭇거리다 중지를 조심스럽게 보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으읏….”
한 마디, 두 마디…. 라핀은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신음을 삼켰다.
내벽을 풀어놨던 터라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삽입하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쪽을 가득 메우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더 심했다. 고작 손가락 두 개를 넣는 것만으로도 입구가 빠듯하고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어떻게 이곳으로 늑대의 성기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분명 자위를 하는 것뿐인데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찔하고 무서웠다. 그렇지만 손을 뒤로 물렸다가 다시 안으로 넣을 때마다 압박감만큼의 충족감이 함께 몰려와서 물릴 수가 없었다.
“으흣, 아으…!”
쿨쩍, 쿨쩍….
샤워기 물소리와 더불어 몸 안쪽에서 나는 젖은 소리, 점점 격앙되어 가는 신음이 좁은 욕실 안에서 웅웅 울렸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정사를 나누는 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난잡한 소리였다. 혹 소리가 바깥까지 들린다면 그가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러니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고대하던 절정에 다가갈수록 절제력이 사라졌다.
보지를 들쑤시는 손에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보지를 거세게 털듯 하자, 내벽이 벌어지고 좁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일순간 강하게 수축했다.
“으읏, 흐으, 하, 아아…!”
거센 신음과 함께 자지 끝에서 묽은 액체가 팍 터져 나왔다. 보짓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쪽에서 넘쳐난 투명한 애액이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의 사정이라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양이 많은 탓에 밤꽃 냄새가 훅 욕실 안을 메웠다.
“하아, 하아….”
라핀은 사정을 끝내자마자 쭈그리고 앉아 벌건 얼굴로 헐떡거렸다.
약속한 십 분 안에 씻고 나가야 하는데…. 어서 뒤처리하고 욕실을 나서야 했지만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당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자니, 뒤늦게 후회가 몰렸다. 내가 왜 보지를 쑤시면서까지 자위를 한 거지? 누아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대며 한 거지만, 이런 건… 이상했다.
발정기도 아닌데, 아니, 여태까지 겪었던 발정기에도 보지를 만지진 않았는데…. 생각이 깊어질수록 제가 그만큼 이상하다는 걸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젠장. 라핀이 쪼그려 앉은 채로 샤워기 물로 정액 묻은 손을 씻어내는데, 갑자기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라핀이 화들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자, 누아가 열린 욕실 문 앞에 라핀 못지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왜 그래?!”
“왜, 왜 들어오셨―.”
“또 배 아파서 그래? 어지러워서 그러고 있는 거야?”
누아는 라핀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라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거기….”
라핀이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누아에게 멈춰 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누아는 멈추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만에 누아는 라핀의 바로 앞에 다가섰다. 샤워기 물을 끄지 않아 물은 쏟아지고 있었고, 그 탓에 누아의 옷이 흥건히 젖어 들었다.
검은색 셔츠 잠옷이 젖어 들면서 단단한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누아의 몸은 언제나 이상적이었지만, 옷이 타이트하게 달라붙으니 진가가 여실히 드러났다. 아예 헐벗은 벗은 모습은 많이 봤어도 이렇게 옷 입은 채로 젖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가릴 건 다 가린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대단한 걸 본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왜 이래? 라핀이 당혹스럽게 몸을 손으로 가리자, 누아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라핀?”
“아, 아니…. 왜 들어오셨어요! 씨, 씻는다고 했잖아요….”
“십 분 안에 나온다며.”
“벌써 십 분이 지났어요? 아, 아니지. 어떻게 십 분을 칼같이 지켜요. 빠, 빨리 나가세요.”
“이십 분 기다렸어.”
“…….”
고작 몸을 적시고 자위한 게 전부인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혹 누아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따질 수가 없었다.
라핀이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자, 누아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으로 라핀의 모습을 훑어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어디 아파?”
“안 아파요….”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 얼른 일어나. 오랫동안 씻으면 몸에 안 좋다고.”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라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들었다. 라핀은 고작 몸에 물을 끼얹기만 했지만, 다 씻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 잠깐만요…!”
라핀은 몸을 지탱하며 최대한 일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지금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리려고 했다.
“왜 이래?”
라핀의 거센 반항에 누아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누아는 라핀이 왜 이러는지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누아의 관점에서 라핀은 그 누구보다 연약한 생명체였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늑대의 아이를 배기까지 했으니 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데, 라핀이 혼자 씻겠다고 했다.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제가 생각해도 씻는 것조차 막아서는 건 너무 심했다. 안 된다고 할지 이 정도는 내버려 둘지 고심하는데 라핀이 십 분 안에 씻고 나오겠다고 해서 극적으로 타협을 본 것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이십 분이 지나도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약속한 시간의 두 배가 지나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확인하려고 욕실 문고리를 잡다가도, 라핀이 싫어할 게 뻔해서 멋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눈치 한번 보고 산 적 없는 누아였지만, 이제는 라핀이 싫어할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욕실 앞을 방황하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 봐도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혹시 사고가 난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렇게 이십 분을 기다려서 연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앉아 있으니 온갖 걱정이 누아를 휩쓸었다.
그렇게 누아가 일어나라며 억지로 라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던 누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발기했어?”
“…….”
누아의 물음에 라핀이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도 제가 왜 발기했는지 이유를 몰랐다. 분명 자위를 하고 가라앉혔었는데, 왜 또 이렇게 된 건지….
욕실에 들이닥친 누아를 봤을 때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몸을 튈 정도였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쪼그라들면 쪼그라들었지, 발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물에 젖은 모습을 보자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발기한 것이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 아득바득 버틴 거였는데…. 다 들켜버렸다. 라핀은 차마 누아를 볼 수가 없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따졌다.
“제, 제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건 미안한데, 왜 흥분한 거야?”
“…….”
누아의 물음에 라핀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차마 그의 몸을 보고 이렇게 됐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느니 확 혀를 깨물어버리는 게 나았다.
젠장…. 늑대들에게 파렴치한 짓을 당하고도 블란과 누아를 잘생겼다고 생각했듯, 저는 심각할 정도로 시각적인 것에 약했다.
백번 양보해서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발기까지 하는 건 너무했다. 예전에는 분명 평범하게 암컷 토끼를 예쁘다고 생각하고 쑥스러워했는데, 이제는 수컷 늑대의 몸을 보고 발기하는 몸이 됐다. 하루가 다르게 미쳐가는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샤워기에서 여전히 물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데, 누아는 그것을 끄지도 않고 라핀만을 빤히 바라봤다. 분명 부담스러운데 발기한 성기는 시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핀은 애써 누아의 젖은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
“저, 아, 아직 못 씻었으니까… 얼른 나가요.”
“이 모습을 보고 그냥 나가라고?”
“…….”
라핀이 머뭇거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마음 같아서는 ‘그럼 욕실에 같이 남아서 뭘 하겠다고요?’ 하고 날카롭게 따지고 싶었지만, 설핏 그의 하의 너머로 두툼하게 발기한 성기 그림자가 보여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 욕실에 남아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머릿속에 명확하게 그려졌다.
누아와 몸을 안 겹친 지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겹치던 누아치고는 꽤 오랫동안 안 했다.
별다른 터치 없이 꼭 안고만 잘 때 의외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들었지만, 붙잡혀 온 이후부터 급격히 몸을 겹치는 횟수가 줄었으니 이제는 정말 잡아먹을 생각이 든 건가 싶었다. 그에게 다른 애인이나 반려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대도 은근슬쩍 살을 찌우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그런 이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나신을 본 것 정도로 발기한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던 건가?
라핀이 혼란스러워하는데, 누아가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라핀.”
“…….”
“내가 정말 나가길 바라?”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적나라한 음담패설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몸이 간지러웠다.
라핀은 말없이 누아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몸을 더 바싹 붙였다. 세게 틀어져 있는 샤워기 물이 그의 몸 위로 정통으로 쏟아져 내렸다.
상박에 이어 그의 검은 머리칼까지 완전히 젖어 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라핀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며 제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체격 차이 때문에 라핀이 그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다.
“…….”
라핀은 다가오지 말라고, 정말 나가길 바란다고 부정해야 했지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라핀이 긴장감에 침을 꼴깍이자, 그의 머리칼 끝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이 라핀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눈썹 바로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라핀이 움찔 눈을 깜빡였다. 누아는 그것을 엄지로 닦아주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매번 너는….”
“…….”
“나를 못 참게 만들어.”
마주 보고 있는 누아는 어쩐지 저도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이 반쯤 일그러져 있었다.
물방울을 닦아주던 누아의 손이 뺨을 감싸더니, 그가 허리를 굽히면서 두 입술이 포개졌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숨이 섞이고 말캉한 살덩이가 넘어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갈급하게 타액을 빨아 당겼다. 몇 날 며칠 참은 것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이 아니면 입맞춤을 못 하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몰아쳐 오는 입맞춤에 금방 숨이 부족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그만하라고 몸을 뒤척였지만 누아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야수처럼 더 달려들며 라핀을 욕실 벽 쪽으로 밀어 넣었다.
라핀의 등에 차가운 욕실 타일 벽이 닿으면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라핀이 놀라 흠칫 몸을 떨자, 반응을 눈치챈 누아가 입술을 떼고 라핀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허리와 등을 끌어안아 제품에 들어오도록 했다. 싸늘하게 식었던 온기가 금방 달아올랐다.
“라핀.”
“읏….”
몸이 따듯해지는 건 좋은데, 라핀의 발기한 자지가 누아의 단단한 허벅지에 비벼졌다. 안 그래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성기가 더 배꼽을 향해 추켜세워졌다.
누아는 일부러 허벅다리로 제 성기를 더 거칠게 문대더니, 허리를 감싸던 손을 아래로 내려 흰 둔부를 그러쥐었다. 손바닥 자국이 날 정도로 강한 악력에 엉덩이가 벌어졌다.
누아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구멍도 함께 벌어지며 벌름댔다. 라핀은 정말 제가 발정이라도 난 것 같아 급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이, 이제 그만해요.”
“도와줄게. 내가.”
“이게 뭐가 도와주는 건데요….”
“빨리 씻고 나가야지. 오래 씻는 것도 몸에 안 좋아.”
“흐읏….”
누아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보지 사이로 손가락 한 마디를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말하는 내용은 의사처럼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데, 목소리와 몸을 만져대는 손길은 음습했다.
슬그머니 더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안쪽을 갉작거렸다. 물과 애액이 섞여 젖은 소리가 평소보다 더 적나라하게 퍼졌다.
고작 손가락 하나일 뿐인데. 라핀이 스스로 두 손가락을 보지에 넣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별것도 안 했는데 벌써 사정할 것처럼 몸이 달았다. 분명 제 몸인데, 어느 부분을 자극해야 더 느끼는지는 누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라핀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고 있을 때, 누아가 라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라핀, 혹시….”
“흣….”
“혼자 여기 만졌어?”
누아의 물음에 라핀이 신음을 흘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누아가 본 것도 아니고 알 리가 없었다. 단순히 저를 떠보는 것 같은데, 고작 몇 분 전에 자위했던 터라 아니라고 반박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 그만…, 하으읏!”
“엄청 축축한데. 쑤신 것처럼 풀어져 있잖아.”
“으, 하아.”
누아의 손가락이 보지가 아니라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라핀이 달뜬 신음만 흘리고 부정하지 않자, 누아의 입꼬리가 얄궂게 올라갔다. 목소리도 한껏 장난스러워졌다.
“진짜 혼자 풀기라도 했어? 대답을 못 하네.”
“아니, 흣…, 만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
“…….”
라핀이 입을 우물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누아한테는 특히 말하기 힘든 이유였다.
그렇지만 누아는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빙긋 입꼬리를 올린 얼굴로 내벽을 헤집었다. 그의 손끝이 라핀이 유달리 예민하게 느끼는 부위를 정확하게 후벼 팠다.
“아흐읏…!”
전기라도 오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에 라핀이 무너지듯 누아의 몸 위에 몸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는데, 마치 단단한 벽에 몸을 기댄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누아는 보지를 쑤시던 손가락을 하나 더 늘리며 재차 물어왔다.
“응? 뭔데 그래. 또 발정기라도 왔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누아가 속살거리며 귓가에 입술을 맞췄다. 아래를 헤집는 손길이며 귓가에 간지럽게 달라붙는 숨결이며 목소리가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대답하지 않았다가는 계속 이런 식으로 괴롭힐 것 같다. 손가락이며 발가락이며 옴짝달싹하게 되는 감각에,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솔직히 고했다.
“사정할 수가… 없어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라핀이 수치심을 무릅쓰고 말했건만, 누아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노란 눈을 깜빡였다.
아니, 더 자세히 설명해줘야 해? 이만치 말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 숨고 싶은데….
라핀이 누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하지 않자, 뒤늦게 누아에게서 조금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설마…. 이제는 좆 만지는 거로는 사정이 안 돼?”
“…….”
라핀이 부정하지 않고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섹스하다가 오줌까지 쌌었으니 이젠 더 수치스러워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만큼 부끄러웠다. 이제 누아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확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누아는 라핀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봤다. 길쭉한 토끼 귀는 축 늘어져 있었고, 얼핏 보이는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내 그는 라핀이 왜 대답하지 않는지 알아챘다.
“하, 씹….”
누아가 욕설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라핀의 부른 배를 내려다봤다. 라핀의 배에는 아이가 있었다. 책에서 봤는데 태아 앞에서 욕하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안정기가 되면 가벼운 성교는 가능하다고 하던데…. 라핀이 언제 임신했는지를 모르니 지금이 안정기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질 안에 손가락을 넣는 것도 세균 때문에 안 좋을 수도 있다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책 내용을 떠올린 누아는 보지에 넣었던 손가락을 단번에 빼냈다. 그러자 몸을 기대고 있던 라핀이 고개를 들어 누아를 바라봤다.
“으…?”
라핀의 표정에는 의아함과 조금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핀은 쾌감에 약했고, 굳이 색마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발기한 상태로 멈추는 것은 아쉬울 것이다.
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라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럼 내 도움이 더 필요하겠네.”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샤워기 레버를 내렸다.
서로의 몸을 적시던 물이 꺼졌다. 젖어 있던 몸이 금방 써늘하게 식었다. 라핀이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떠는데, 누아가 대뜸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돌발행동에 라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뭐, 뭐 하세요…!”
“가만히 있어.”
누아가 입고 있는 옷이 이미 젖어 있긴 하다만, 젖은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라핀이 왜 이러냐고, 어서 일어나라며 엉거주춤하게 몸을 굽혔다. 그렇지만 라핀이 말리는 것보다 누아가 라핀의 자지를 입에 무는 것이 더 빨랐다.
“아, 아흣…!”
성기가 부드럽고 따듯한 점막에 둘러싸이자마자, 라핀이 크게 숨을 터트렸다.
분명 아까는 제가 자지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사정하지 못하는 몸이 됐다고 망연자실했는데, 누아가 입에 문 것만으로 절정에 다다를 것처럼 머리가 저릿해졌다.
제 몸이 이상해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든 누아를 원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혀가 아래에서 위로 기둥을 훑는 것을 느끼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흐으, 으응….”
나름 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하는데, 입은 자꾸만 벌어지고 야릇한 기분이 느껴질 때마다 틀어막은 손에 힘이 풀렸다. 손 틈이 하릴없이 벌어지면서 막은 것이 무색하게 신음이 다 흘러나왔다.
일찌감치 흥분해 있던 몸이라 금방 사정 욕구가 몰려왔다. 빨아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정하고 싶다니. 그가 저를 정말 조루 취급할까 봐 참고 싶었지만, 축축한 점막이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라핀은 그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그의 머리를 당겼다. 누아가 붉은 혀를 내민 채로 조금 떨어져 나갔다. 그의 입술과 라핀의 성기 사이에 질척한 은실이 이어졌다.
“저, 이제, 응, 그만….”
“…….”
“이제 그만, 해도 되, 될 것 같아요….”
내리깔고 있던 누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금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라핀은 그의 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배고픈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의 그 눈빛.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숨조차 제 마음대로 쉬기 힘들었다.
분명 행위는 멈췄는데 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라핀이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누아가 다시금 입을 벌리더니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흐읏! 왜, 아니, 그만… 하라니, 으응!”
누아는 라핀의 만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히려 좀 전보다 게걸스럽게 성기를 빨았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압박하기도 하고, 귀두가 목젖에 닿을 정도로 깊게 담기도 했다.
라핀이 누아의 머리칼을 세게 쥐고 잡아당기듯 거부했지만, 그의 애무는 점점 더 강하고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이제는 입술을 모으며 사정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일순간, 머릿속에서 하얀 불꽃이 휘몰아쳤다.
더는 역부족이었다.
“흐읏 아흣, 그만, 그만…, 아, 하으…!”
끝내 라핀은 고개를 완전히 젖히며 누아의 입안에 사출했다. 못 참고 그의 입에 싸버렸다는 황망함이 몰려왔지만 생각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탈력감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머릿속이 휘발됐다.
“하아, 하아….”
라핀은 탈력감에 그의 머리 위로 상체를 기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 뜀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은 가쁘게 뛰었고 머리가 몽롱했다.
라핀이 숨을 고르는 새, 누아는 뒤늦게 성기에서 입을 떼더니 바닥에 정액을 뱉었다. 라핀이 두 번째로 사정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꽤 짙었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던 누아는 무릎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라핀의 고개가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
펠라치오 다음은… 늘 그랬듯 삽입인가. 라핀이 누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다음에 이어질 행위를 예측하고 있을 때, 누아가 라핀에게 손을 뻗었다.
“다 씻었으면 나가자. 감기 걸리겠다.”
움찔. 라핀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지만, 의외로 누아는 다정하게 라핀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뜨겁게 젖은 서로의 몸이 맞닿았다.
“…네?”
“가자.”
라핀이 저도 모르게 의아한 목소리를 내는데 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라핀을 부축하며 욕실에서 나오게 했다. 사실 아직 씻지 못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라핀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파우더 룸에 도착하자 누아는 가운을 라핀의 몸에 걸치게 했다. 라핀의 머리는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지만, 몸은 젖었던 터라 차게 식어 있었다. 몸을 포근히 감싸는 가운의 느낌과는 별개로 여전히 라핀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왜 끝났지? 그런 분위기 아니었나?
라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누아는 자신이 흠뻑 젖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라핀의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방금 라핀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성기를 빤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아까… 내가 잘못 본 건가. 분명 그 역시 흥분해 있었는데?
라핀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그의 하반신을 확인했다. 옷이 흥건히 젖은 터라, 바짝 달라붙은 하의 너머로 그의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 있는 것이 보였다. 징그러울 정도로 커다란 것이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기둥을 본 라핀은 불에 덴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올렸다. 아니, 저렇게까지 흥분했으면서 참는다고? 제가 아는 누아는 절제력이 얄팍하기 그지없는데, 왜 저러는 거지? 이유를 추측하려 했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라핀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다, 제 머리가 어느 정도 말랐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누아 님은… 안 해요?”
“뭐를.”
“그… 아래요.”
“아래가 뭐 어때서.”
“…흥분하셨잖아요.”
“…….”
누아는 뻔뻔히 대꾸하다가, 라핀의 말에 힐끗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지가 달라붙어 아랫도리 상태가 다 보인다는 걸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누아는 언제 난처했었냐는 듯, 다시 평소처럼 표정을 굳혔다.
“도와줄 거 아니잖아.”
“…네?”
“나름대로 참고 있는 거야. 그런 식으로 자극하면 안 좋을걸.”
“…….”
누아의 말을 즉, 네가 대신 해소해줄 거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세에 눌린 라핀이 입을 꾹 다물었지만, 한껏 억울한 표정이 됐다. 평소에는 제멋대로 잘만 건드리면서 지금은 왜 선비인 척 굴어? 그리고….
“제가… 왜 못 도와줘요?”
묘하게 승부욕이 들끓었다.
어쩌면 정말 제가 미친 걸지도 몰랐다.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거니까.
그렇지만 그보다도 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간 저를 건드리지 않은 이유도, 지금 흥분한 게 뻔히 보이는데 그냥 넘어가는 이유도. 그리고… 그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이렇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누아는 라핀이 이런 식으로 도발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잠시간 얼빠진 표정을 보였다. 고개를 돌리며 설핏 헛웃음을 흘린 누아는 다시금 라핀과 두 눈을 마주했다.
방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다시 마주친 두 눈에는 욕망의 불꽃이 넘실거렸다.
“라핀, 나랑 섹스하고 싶어?”
“…….”
“나한테 박히고 싶어서 그렇게 도발하는 거야?”
누아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저를 먹잇감 보듯 했다. 지금 낸 목소리에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음산한 살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라핀은 그와 동등한 종족도 아니다 보니,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수명이 반절로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용기가 났다. 오늘의 그는 저를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아니지만, 저, 저도… 그 정도는 해결해줄 수 있어요.”
용기가 났다고 해도 목소리는 겁에 질려 볼품없이 떨렸지만. 아무튼 라핀은 굳이 삽입이 아니더라도 그를 사정시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라핀의 말에 누아가 호기심이 돌았는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정도?”
“방금 누아 님이 해주신 거요…. 이, 입으로 하는 거….”
손으로 빼주는 것이 가장 거부감이 덜하겠지만, 과연 그를 손장난 정도로 사정시킬 수 있는 테크닉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입으로 해주면 금방 사정하지 않을까 싶었다. 빠는 것도 잘할 자신은 없지만…. 누아가 제 것을 물기만 해도 굉장히 자극적이었으니까, 입에만 넣으면 그도 제가 흥분했던 만큼 느끼지 않을까?
라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누아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툭하면 입으로 빨려고 해.”
“네에? 제가 언제 그랬어요?”
라핀이 억울함을 느끼고 곧장 반박했다. 제가 남의 성기 빠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언제 툭하면 입으로 빨려고 했다고….
터무니없는 날조에 라핀이 씩씩거리며 따졌지만, 누아는 그것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건 됐고, 바닥에 앉아봐.”
“…바닥에요?”
“도와주겠다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 거야?”
“…….”
앉으면 뭘 하려고….
라핀이 더 물으려다가 말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와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누아는 바지춤을 풀더니 발기한 성기를 밖으로 꺼냈다. 분명 바지가 젖어서 그 형체가 적나라하게 다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물이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과연 입에 다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크기였다. 이런 걸 제가 빨겠다고 자청했다니…. 이전에도 빤 적이 있었으면서 깜빡 잊고 있었나 보다.
근데 분명 빠는 건 됐다고 하지 않았나? 방금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왜 성기를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또 변덕이라도 난 걸지도 모르지. 그는 워낙 변덕이 심한 편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라핀이 미간을 살포시 좁히며 입술을 벌렸을 때, 누아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말했다.
“입 다물고 있어. 먹고 싶어도 참아.”
“…네? 먹고 싶은 거 아닌데.”
라핀이 작게 꿍얼거렸지만, 충분히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가 오해하고 성기를 입에 물려고 했으니까.
라핀이 머쓱해하며 입을 다물자, 누아가 자지를 손으로 그러쥐더니 위아래로 흔들며 용두질했다.
탁, 탁, 탁. 거세게 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아 본인도 모를 미세한 변화들이 라핀의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졌다.
성기가 더 단단해지고 부피를 키웠다. 울퉁불퉁 서 있던 핏줄은 굵어졌고, 요도구는 무언가를 뿜어낼 것처럼 빠끔거렸다. 늑대의 성기는 징그럽게 크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이상하게 야해 보였다.
“하아….”
“…….”
누아의 숨소리 또한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시각이며 청각이며 무엇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긴장감에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라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남몰래 보지와 뒷구멍을 꾹 눌렀다. 관음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래로 피가 몰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사정해 놓고서는 또 흥분할 것 같았다.
진득하게 섹스를 해도 두 번이나 사정하고 나면 지쳐서 곯아떨어졌다. 지금도 온몸이 후들거리는데, 왜 자꾸 흥분되는 건지….
이게 전부 누아 때문이다. 누아가 저를 이상하게 만들었고, 또 제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해서 그런 거다.
라핀이 누아 탓을 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자, 누아가 흥분으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핀, 나를 제대로 봐야지.”
“아니…, 보고만 있는 게… 뭐가 도와주는 건데요. 이, 이럴 거면, 혼자 하는 거랑 다름없잖아요….”
“달라.”
무안하리만큼 누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라핀이 그에게 노출증이라도 있는 거냐며 따지려고 얼굴을 올려다봤다가, 몸을 돌덩이처럼 굳혔다.
올려다본 누아는 미간을 좁히며 흥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라핀은 매번 섹스할 때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의 흥분한 얼굴을 맨정신에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라핀이 흥분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봤을 때는 완전히 못 볼 꼴이었는데, 누아는 아니었다. 머리와 셔츠가 다 젖은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못해 농염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네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돼.”
“…….”
그를 보고 흥분한 게 양심에 찔리기라도 한 걸까,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저릿했다.
라핀은 결국 따지지 못했다. 입을 열면 제가 흥분했다는 걸 다 들킬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라핀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누아는 다시 자위를 재개했다.
“하…. 후우.”
누아의 성기는 사정이 다가올수록 하나의 생명체처럼 꺼떡꺼떡 움직였다. 누아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며 몸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 아래로 근육이 왈칵 도드라지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뒤이어 요도구가 빠끔거리더니, 이내 묽은 정액이 픽 튀어나왔다.
“읏…!”
라핀의 얼굴 위로 멀건 정액이 난잡하게 튀었다. 라핀이 사정하기 직전에 눈을 질끈 감아서 망정이지, 눈꺼풀 위에도 정액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하마터면 눈에 들어갈 뻔했다.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린 정액이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정액은 원래도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그 비릿한 냄새가 짙고 역했다.
얼른 닦아달라고 하고 싶은데 입을 벌리면 정액이 들어왔다. 입술을 꾹 참고 기다리던 중에 일순간 토기가 왈칵 치솟았다.
“우욱…!”
“라핀?”
“웩, 웨엑!”
라핀은 비위가 상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헛구역질을 했다.
달아올랐던 몸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발갛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분명 이전에는 정액을 먹은 적도 있는데 고작 한 방울 입에 닿은 것 가지고 비위가 상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라핀도 제가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은지 이해를 못 하는 만큼, 누아 역시 혼란스러운 듯했다. 농염함이 흘러넘치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어찌할 줄을 몰랐다.
“가, 갑자기 왜 이래?”
“으으, 비려서….”
“정액? 정액 때문에 그런 거야?”
“우으….”
라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가 라핀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몸을 일으키고 세면대로 이끌었다.
누아는 정액을 먼저 닦아줘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물을 세게 틀고 얼굴을 손으로 대신 닦아줬다.
어푸어푸! 힘겹게 얼굴에 묻은 정액을 전부 씻어 내렸지만, 입안에 감도는 정액의 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욱…. 웨엑….”
결국 라핀은 다시금 속이 쏠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조금 게워냈다. 식사하긴 했지만, 살을 뺀답시고 조금밖에 안 먹었다 보니 거의 위액에 가까웠다.
한 방울 먹은 정액을 아예 몸 밖으로 뱉어버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멀미하듯 울렁거리던 속이 단박에 진정되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솔직히 정액 한 방울 먹었다고 토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 의지가 아니라 몸이 거부한 것이지만, 손에 대고 토한 것이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화가 났을까. 그랬겠지. 라핀이 빠르게 사과하려는데, 누아가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는 다시 라핀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이제 괜찮아? 더 토할 것 같아?”
“흐으…, 아뇨, 이제 괜찮은데…. 죄송해요.”
“뭐가?”
누아는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그가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라핀은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그, 제가, 누아 님 손에… 토했잖아요?”
“아, 그거? 난 네 얼굴에 사정까지 했는데, 뭘 그것가지고 사과를 하고 그래. 이제 괜찮으면 나가자. 속옷 입을 것도 줄게.”
“속옷이… 있어요?”
누아는 대단한 이야기라도 할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놀라운데, 라핀은 속옷 얘기에 더 놀랐다. 영영 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언제 구해왔지?
라핀이 놀라 하는데, 누아는 무슨 당연한 얘기를 하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몸을 따듯하게 해야 좋잖아.”
“…….”
“가자.”
누아는 라핀을 부축하며 이끌었다.
라핀은 그에게 끌려 욕실을 빠져나오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단순히 저를 살찌우고 잡아먹으려는 거라기에는… 너무 다정하지 않나?
죽일 거면 도망친 저를 잡아 왔을 때처럼 냉정하게 구는 게 맞지 않나? 이렇게 해서 누아 좋을 게 뭐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두둥실 떠올랐지만, 라핀에게는 좋은 변화였다. 왜 이렇게 변했냐고 물어볼 수가 없어서, 라핀은 어정쩡하게 걸음을 옮겼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