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6)

9. 씨앗

이상한 꿈을 꿨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소복한 흰 눈 사이였는데, 꿈속은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넓고 푸르른 들판에는 노랗고 빨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라핀은 가장 아름답다는 이유로 봄을 좋아했다. 봉우리를 틔우는 자연의 생명력에 경외감과 감탄이 연달아 일어났다.

꿈에서라도 봄을 봐서 좋네. 라핀이 토끼 몸으로 푸릇푸릇한 들판에 대자로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파사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인기척에 고개를 휙 돌리니, 검은 늑대 형체를 한 누아가 풀밭에 서 있었다.

“헉…!”

아름다운 꿈인 줄 알았건만, 악몽이었나?

이제는 하다 하다 꿈에서까지 추격전을 벌이는구나. 현실에서는 이미 잡혔는데도, 마음은 쫓기는 중인 모양이다.

어차피 꿈이니까 도망은 안 가도 되겠지.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아가 갑자기 입에 커다란 바구니를 물고 돌아왔다.

갑자기 웬 바구니? 궁금해하는데, 누아가 라핀에게 받으라는 듯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발로 쓱 밀었다.

“이거 제게 주는 거예요?”

“…….”

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이 안을 들여다보니, 수많은 과일과 채소가 담겨 있었다. 사과, 당근, 건초 등…. 어디서 구해온 건지 전부 벌레 먹은 자국 없이 깨끗하고 상태가 좋았다.

그런데 이걸 갑자기 왜 주지? 누아가 대가도 없이 이럴 리가 없는데…. 꿈이니 말도 안 되는 전개로 흘러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의심부터 하게 됐다.

라핀이 선뜻 받지 않고 머뭇거리자, 누아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보일 것 같은 늑대가 눈물을 흘리니 라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울어요?!”

“…….”

라핀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두 발로 서서 누아의 얼굴을 살피려 들자, 누아가 키를 맞춰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라핀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누아가 워낙 크기도 했고 끊임없이 울어서 눈물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우는지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제가 이거 안 받아서 그래요?”

“…….”

누아가 퐁퐁 눈물 흘리는 것을 멈추고 라핀을 바라봤다. 말은 않았지만, 그렇다는 것 같았다.

“바, 받을 테니까 더 울지 말아요.”

라핀은 급히 바구니를 들어 보려고 했지만 제 몸체보다 크고 무거워서 받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줘도 뭐 이리 큰 걸 줘…. 난감해하던 라핀은 직접 바구니 안으로 들어가서 안에 있는 건초를 뜯어 먹었다. 바구니를 전부 받지는 못해도 내용물을 먹으면 되겠지.

라핀이 열심히, 맛있다는 듯 먹자 누아가 거짓말처럼 눈물을 뚝 그쳤다.

“휴우….”

그에 라핀이 먹다 말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꿈이고 좋은 사이도 아니었다. 울든 말든…. 오히려 울면 속이 통쾌해야 하는데,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늑대는 옆에 앉아서 라핀이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라핀은 평소 소식하는 편인데, 꿈이라 그런지 바구니 안에 있는 걸 전부 다 먹고서야 배가 불렀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니 누아가 그제야 온전히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올렸다.

말도 안 되는 꿈을 한두 번 꿔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 느낌이 기묘했다.

***

“으음….”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춥지도 않았고 바닥이 푹신했다. 얼마나 푹신한지 저를 깊게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 푹 잠겨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기묘한 꿈을 더 꾸고 싶기도 했다. 곧바로 잠들면 그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이 다시 가물가물해지고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핀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실내인지 제 몸은 수인화가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마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저는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물에 젖은 천이 허벅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살펴본 천은 너덜너덜하고 엉성했다. 한쪽이 마감이 안 된 걸 보아, 어디선가 찢어낸 것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이런 게 왜 이마 위에 있었지? 아니, 그것보다….

라핀이 천을 쥔 채 주변을 살피자 제가 지냈던 늑대 집과는 다른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블란과 누아가 함께 사는 집이 고급스럽고 깔끔한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차분하고 순박한 느낌이 감돌았다. 젊은이보다는 노인이 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누아한테 잡혀 왔었는데… 그가 아니었나? 라핀이 선뜩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네.”

“…….”

라핀이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누아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아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그는 제가 기억하는 모습보다는 수척했고, 피곤해 보였다. 용맹함을 드러내던 노란 눈은 피곤함으로 빛이 죽어 있었고, 피부는 거칠거칠해 보였다.

분명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이는데, 그를 둘러싼 흉흉한 분위기는 얼음 파편처럼 날이 서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라핀이 침을 꼴깍이며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누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라핀.”

누아의 목소리는 동굴처럼 낮고 울림이 있는 편이었다. 그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하면 자극이 심해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였고, 무의식적으로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도망쳤다가 붙잡힌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며 목소리가 너무나도 냉담해서 몸이 벌벌 떨렸다.

라핀은 늑대에게 예쁨받기를 바란 적도 없으며, 도망친 이후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가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태도를 달리하는 늑대를 직접 마주하니 무서워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라핀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도망치고 재미있었어?”

“…….”

재밌을 리가 없었다.

라핀은 쫓기는 몸이었다. 종족 간의 신체 능력 차이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몸이 이례적으로 좋지 않다 보니 잡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탈출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어도 북쪽 산까지 가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딱딱한 흙바닥에 누울 때마다 누아의 방에 있던 넓고 푹신한 침대가 떠올랐다. 추울 때는 제 몸을 뒤에서 끌어안아 주던 커다란 온기가 떠올랐다. 상태 나쁜 풀때기를 먹을 때는 그가 저를 위해 챙겨줬던 눈서리 낀 당근이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도 늑대 소굴에서 살았던 생활은 좋지 않았다. 늑대한테 수시로 희롱당하고, 무시당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떠오르는 게 많던지. 누아가 먹이를 보따리째로 챙겨줬던 일, 계곡에 빠졌던 날 누아의 등에 업혀 왔던 일, 그가 저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했던 일, 다 나으면 썰매를 끌어주겠다고 한 일….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었더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전부 다 불편했던 나날이었다.

라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하지 않자, 누아가 고개를 잘게 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아니지, 질문을 달리해야지.”

“…….”

라핀이 긴장감에 침을 꼴깍였지만,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뭐지? 라핀이 새카만 눈으로 누아를 바라보자, 누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뜸을 들였다.

주위를 감도는 서늘한 분위기에 라핀의 심장 언저리가 저릿해졌다. 누아가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잘근 깨물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었어?”

“…네?”

“그렇게 겁도 많으면서. 늑대 무리도 넘어서 도망칠 정도로 싫었어?”

“…….”

라핀은 누아가 단순히 제가 도망을 쳐서 화가 났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마주친 두 눈은 배신감에 휩싸여 있었다.

라핀과 누아는 고작 포식자와 사냥감의 관계였다. 그렇지만 누아는 마치… 제게 무언가를 기대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실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누아는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꿈처럼 마냥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저는….”

라핀은 입은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누아가 싫은 건 아니었다. 분명 짜증 나는 점도 있었지만, 혐오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가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니었다. 누아와 성교도 힘들긴 했지만, 그보다도 블란과 누아 사이에 끼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을 뿐이었다.

애초에 토끼가 늑대랑 같이 사는 게 말도 안 되지 않나. 누아는 저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마음이라는 게 언제 바뀔지 모르니 기회가 있다면 도망치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말한다고 바뀔 건 없었다. 결국 싫은 거랑 다름없지 않나.

라핀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라핀이 손에 들려 있던 천을 애꿎게 만지작거리자 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핀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기가 무섭게, 커다란 손에 의해 멱살이 콱 쥐어 잡혔다.

“커헉…!”

방금까지 앉아 있던 라핀은 멱살이 잡힌 채 침대 바깥으로 끌어올려졌다.

무지막지한 힘에 라핀은 숨이 턱 막혔고, 순식간에 몸에 힘이 빠져 손에 쥐고 있던 천을 떨어트렸다.

“눈 떠.”

“흐으윽….”

멱살이 잡힌 지 고작 십 초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라핀의 하얗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목에는 핏대가 바짝 섰다.

라핀은 목이 조여지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누아의 말에 겨우 눈을 떴다. 눈물이 차서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그의 웃옷 한쪽 소매가 살짝 뜯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제 이마를 덮고 있던 젖은 천과 같은 색, 같은 재질이었다.

“나를 그런 식으로 꼬드기고…. 네 마음대로 휘둘리는 날 보면서 재밌었겠어?”

“켁, 누, 누아… 끅, 니임…, 흐윽….”

라핀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누아를 보기 위해 힘겹게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가 두, 셋으로 흐리게 보였다.

점점 힘이 빠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좀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핀은 힘을 쥐어짜 제 멱살을 쥐고 있는 누아의 제 손을 겹쳤다.

“…….”

누아의 노란 눈동자가 라핀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을 겹친 작은 손은 핏기가 가셔 새파래져 있었다.

멱살을 쥔 아귀힘이 조금 풀려 숨은 쉴 수 있게 됐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다시 라핀의 멱을 단단히 쥐어 잡은 그는 냉정하게 라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덕분에 정리가 잘 됐어.”

“컥, 이거, 끅, 좀….”

“애초에 한입에 잡아먹었어야 했는데.”

“커억, 컥, 자, 잘못… 해, 했… 흐….”

누아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악력이 점점 더 세졌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잘못했다고 빌려고 했지만, 목이 졸린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라핀의 얼굴은 저도 모르는 새 터져 나온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터질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아의 손등 위를 겹치고 있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갈 무렵, 누아는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라핀을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윽!”

다행히 누아가 라핀을 내동댕이친 곳은 매트리스 위였다.

“씹…, 살이 너무 빠졌어. 이래서야 먹을 것도 없잖아.”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까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라핀의 체중을 가늠하는 듯했다.

그 말에 라핀은 잔기침을 터트리며 제 몸을 내려다봤다. 그간 잘 못 먹어서 살이 빠지기는 했지만, 고작 일주일이었다. 아무리 살이 많이 빠졌더라도 큰 차이가 있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몸이 너무 좋지 않다 보니 오히려 몸이 부어 있었다. 그렇지만 누아에게는 빠져 보이는 듯했다.

“저녁에, 다시 늑대 굴로 돌아간다. 잘 먹고 재우면 다시 살이 찌겠지.”

“저, 누, 누아 님….”

“말하지 마.”

라핀이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누아가 곧장 가로막았다. 누아의 목소리는 얼음 파편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서 있었다.

“네 알량한… 잔꾀에 넘어가는 건 이제 됐으니까.”

그는 많이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자려는 것처럼 보였다.

누아는 잘 때마다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제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잤었는데….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작은 변화가 왜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어색한 거리가 둘 사의 심리적 거리와 닮아 있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

누아는 자고 있었지만, 라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묶어둔 것도, 껴안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누아가 드문드문 라핀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그렇고, 어차피 도망을 가더라도 근처에 블란이 있을 것 같았다. 잡힌 이후 곧장 기절해서 이곳의 위치가 어딘지는 몰라도 창밖이 밝은 걸 보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블란은 저를 어떤 의미로든 좋아하는 듯하니 차라리 그에게 잡히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 수도 있었다. 배고프다는 말로 속이고 도망을 쳤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을 것 같지만, 싹싹 빌면 용서해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누아에게서 도망쳐 블란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아가 저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해준 적이 있어서 그런 걸까? 당근에 홀려 블란이 놓은 덫에 걸려들려고 했을 때 저를 붙잡은 것도. 제 옷을 찢고 적셔서 이마에 올려준 것도. 제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는 저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살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숨이 막히도록 멱살을 쥐어 잡힌 건 충격적이긴 했지만, 마주했던 두 눈빛과 저를 매트리스 위로 내치던 손에 망설임이 묻어 있음을 알았다. 이번에는 꼭 살을 찌워서 잡아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말에는 다짐이 실려 있었지만, 이번 역시 말뿐일 것 같았다.

이제야 깨달은 것인데, 고작 토끼 한 마리 잡아먹겠다고 삼시 세끼 신선한 걸 챙겨주고 종일 병간호를 해주는 늑대는 없을 것 같으니까. 토끼를 번식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과한 감이 있었다.

겨울에 먹이를 구하기 힘든 건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탈출하고 보니 올해는 씨가 마른 수준이었다. 누아는 제 먹이를 보따리째로 챙겨줬었는데, 그렇게 많이 구하려면 도대체 산을 몇 바퀴 돌아다닌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제가 자만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누아는 저에게 뭘 바라는 걸까.

“…….”

라핀은 매트리스에 누운 채로 힐끗힐끗 누아를 살폈다. 그는 제게 살이 빠졌다고 타박했지만, 저보다는 그가 더 살이 많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사냥 실력을 생각하면 못 먹을 이유가 없을 텐데,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엄청 피곤해 보이던데…. 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

라핀은 걱정 어린 눈으로 누아를 살피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얼굴을 들여다보자 확실히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그가 자는 모습은 꽤 봐왔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수척하고 까칠했다. 게다가 아무리 눈을 감았다고 하더라도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혹시 심각한 건가?

라핀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고 제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나는지 체크했다.

음…. 예상과는 달리, 제 이마가 훨씬 더 뜨거웠다. 열은 오히려 제가 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상태를 살피던 도중, 갑자기 라핀의 팔목이 콱 붙잡혔다. 눈꺼풀에 덮여 있던 노란 눈동자가 드러난 것도 그와 동시였다.

흉흉한 빛을 띠는 노란 눈이 똑바로 저를 직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힘이 하나도 없어서 덜 무서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을 마주하니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아, 저… 아픈 게 아닌가 하고….”

라핀이 떠듬떠듬 말을 잇자, 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핀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눈치였다.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내가 등신처럼 보여?”

라핀이 믿어달라며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지만, 누아에게서 나온 답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라핀이 알량한 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전 진심으로 거, 걱정돼서….”

“걱정? 날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

라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호의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니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별일 없어도 의심이 많던 그에게 도망까지 쳤으니 경계가 더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은 달랐다. 라핀이 얼굴 위로 억울함을 고스란히 드러내자 누아가 한숨처럼 말하며 손목을 놓았다.

“더 자. 저녁에 이동할 거니까.”

“…….”

“누워.”

라핀이 망부석처럼 서 있자, 누아가 어서 눕지 않고 뭐 하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라핀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픈 것 같진 않아 다행인데, 그럼 왜 저렇게 수척해진 거지? 다시 누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잠깐 고민하던 라핀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에 멍해졌다.

설마… 나 때문인가?

아프지도 않은데 일주일 만에 저리 피곤한 낯을 하고 있다는 건 큰 사건이 있다는 거였다. 제가 탈출한 것 이외에 큰 사건이 있었더라면 저를 쫓지 않았을 텐데, 추적을 멈추지 않았으니 저 때문이라는 추측은 금방 확신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부하 위에서 군림하던 늑대가 고작 토끼 하나 도망갔다고 초췌해졌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누아는 집착이 비정상적으로 심한 편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으음….”

라핀은 분명 누아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랫배가 묵직해지고 열이 달아올랐다.

몸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달이 났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았는데 자지가 뻣뻣해졌고, 보지는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고 있었다.

제 몸이 왜 이러지? 혼자 있을 때는 안 이랬는데….

혼자 있는 거면 자위라도 할 텐데, 누아가 바로 앞에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어디 구석이라도 가서 처리할까 싶어도, 괜히 자리를 옮겼다가 누아의 오해를 살 가능성이 컸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라핀이 최대한 안 좋고 썰렁한 생각을 하며 열기를 가라앉히던 중, 뒤늦게 제 몸이 왜 이리 달아오르는지 깨달았다.

아…, 발정기구나.

발정기는 고자가 아닌 이상 겪는 자연의 섭리였다. 생각해 보면 늘 이맘때쯤 왔던 것 같은데, 날짜 개념 없이 살다 보니 잊고 있었다.

어쩐지. 근래 몸에 열이 자주 오르고 몸이 묵직하다 했다. 전조 증상이 있었지만, 지독한 감기를 앓던 터라 발정기가 오려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라핀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발정기라는 것을 인식하니, 달뜬 감각이 진정되기는커녕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군가 만져줬으면 좋겠다.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누아의 아랫도리를 바라봤다. 그가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은 덕에 사타구니가 잘 보였다. 그의 것은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오른쪽으로 수납된 것의 윤곽이 선명했다.

라핀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 속의 것을 상상하다가, 이성을 차리고 확 시선을 돌렸다.

미쳤어! 저걸 왜 봐?

여태까지 라핀은 발정기가 올 때마다 남근을 용두질하는 것으로 달래곤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을 만지고 싶었다.

아래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던 성기가 떠오르다니. 제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 아무도 모를 터지만, 누구에게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라핀이 발정기가 온 것을 숨기려 최대한 몸을 옹그리고 끙끙대는데, 잠시간 눈을 감고 있던 누아가 작은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작은 몸이 새우처럼 돌돌 말려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낑낑거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누아가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라핀이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지만 미처 가리지 못한 쫑긋 솟은 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얼핏 보이는 이마는 식은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아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열병에 시달리는 중인가?

아까 기절한 라핀을 눕히면서 알았던 건데 라핀의 몸 열기가 상당했다. 이놈의 토끼는 왜 이렇게 연약한지. 제 눈에 라핀은 반쪽이 된 것 같았다.

누아는 그런 라핀이 가여워서 기절한 녀석의 이마 위에 차가운 천을 덮어줬지만, 애써 동정심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잘해줬는데. 죽이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도망친 토끼였다. 불쌍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아프든 말든 죽지만 않으면 잡아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살을 찌우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다만, 도망만 안 가면 살찔 때까지 기다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누아가 애써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작은 손이 누아의 손을 잡아 왔다.

작은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아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 작은 손길 한 번에 커다란 몸이 대번 굳었다.

“흐으으, 누아, 님. 저 좀 어떻게….”

“…….”

부정확한 발음으로 울먹거리던 라핀은 누아의 손을 제 뺨에 끌어다가 고양이처럼 비비적거렸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상황이지. 또 저를 꼬드기려고 잔꾀를 부리는 건가?

누아는 의심에 찬 눈으로 라핀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하….”

총명함을 띠던 검은 눈동자는 혼몽하게 풀려 있었고 얼굴은 발그레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를 쓰는 게 아니라, 발정기가 온 것 같다.

누아에게는 평소의 라핀이 가만히 있어도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발정기가 오니 더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열에 잠식된 몽롱한 얼굴이 그 어떤 것보다 야했다.

씨발. 이놈의 토끼는 수컷이라면서…. 발간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것이, 수컷을 유혹하는 모양새 같았다. 제가 아니라 블란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 옷을 훌러덩 벗고 덮쳤을 것이다.

누아 역시 아랫도리가 빠듯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저는 라핀과 성교하러 온 게 아니라 도망친 고얀 것을 벌하러 온 것이었다. 이 요망한 토끼한테 휘말리면 안 됐다.

“흐윽, 누, 누아 니임…. 제발….”

“…….”

분명 보잘것없고 하찮은 토끼인데….

그런데도 누아는 계속 라핀에게 눈길이 갔다. 이 조그마한 것이 제게 매달릴 때 불길처럼 욕망이 뜨겁게 치솟는 것을 느꼈다. 라핀에게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겠냐고 묻고 나쁜 길로 인도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휘말려선 안 된다. 누아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뱉으며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참았다. 비틀린 마음은 없던 참을성도 만들었다.

누아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자, 라핀은 제 얼굴을 손에 비비는 정도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너 지금 무슨….”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살결에 누아가 놀란 눈으로 라핀을 내려다봤지만, 라핀은 멈추지 않았다.

라핀의 부드러운 입술이 누아의 손바닥에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쪽쪽 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라핀은 새가 쪼듯 가볍게 입술을 맞추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맺힌 얼굴로 애원했다.

“너, 넣어, 흐윽, 아, 아니….”

“…….”

발칙한데….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토끼한테 홀려 정신 못 차리는 늑대라니. 이보다도 수치스러운 수식어는 없을 터다.

누아는 끌려가듯 손을 빼지 않고 라핀의 입맞춤을 느꼈다. 간지럽기만 하고 어설프기만 한데, 누군가에게도 한 적 없을 것 같은 그 어설픔이 마음을 뻑적지근하게 했다.

당장이라도 라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다. 바지를 벗기고 탐스러운 엉덩이를 벌려 야한 구멍에 좆을 쑤셔 넣어주고 싶었다. 좆이 그렇게 먹고 싶었냐고 고환이 엉덩이를 세차게 때리도록 박고 싶었다.

누아는 라핀이 입술을 맞추던 손을 뒤로 물리더니, 보드랍고 작은 입술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라핀.”

“으응…?”

“날 이용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해줘야지.”

“…좋아하는 거?”

누아가 나름 힌트를 줬지만, 라핀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몽롱한 얼굴을 했다.

발정기가 왔으니 제대로 된 사고가 힘들 텐데, 퀴즈까지 내는 건 너무했나? 하긴, 굳이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라핀은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를 것이다. 둔해 빠진 토끼가 뭘 알까.

누아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거라는 기대를 버린 순간, 라핀이 자그마한 손으로 누아의 양 뺨을 감쌌다. 그리고 누아가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라핀이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입술을 할짝할짝 핥았다.

“…….”

이건 또 뭐지?

제가 좋아하는 걸 맞춰 보라고 했더니만, 개처럼 제 입술을 핥아댄다. 물론 개에 비유하기에는 게걸스럽지도 않았고, 혀도 작고 소심한 몸짓이었다.

누아가 황당함에 가만히 있자, 라핀이 꼭 감고 있던 눈을 반쯤만 뜨고 누아의 눈치를 살폈다. 발정기 때문에 이성이 바닥난 와중에도 정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사실 정답은 키스였는데. 이 정도면… 합격점이었다. 누아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리고, 붉은 살덩이를 제 입안에 삼켰다.

“으응….”

누아는 입술을 물기도 하고, 작은 혀를 빨아 당기기도 하며 라핀의 입안을 마음껏 희롱했다. 그럴 때마다 라핀은 풍성한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라핀은 어떻게든 해달라고 애원했었지만, 조금 입맞춤이 길어졌다고 누아의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아등바등했다. 누아는 그런 라핀의 뒷머리를 붙잡고 끈질기게 입술을 탐했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라핀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누아가 만족할 때까지 입술을 탐한 후 뒷머리를 놓아주자, 라핀이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라핀은 아까보다 더 상기된 얼굴로 모자란 숨을 헐떡거렸다. 하얀 토끼가 아니라 만개한 붉은 장미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 누, 하… 숨, 못 쉬겠….”

“힘들어?”

“흐으, 네….”

라핀이 넋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술은 누아가 물고 빨아서 퉁퉁 부어 있었고,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누아는 그것을 음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꼭 제가 발정기가 온 것처럼 금방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이제 그만할래?”

“네?”

숨이 차 헐떡거리던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아를 쳐다봤다. 생각도 못 한 말인지 당황스럽고, 난처해 보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입술을 우물거리기도 했다.

망설이던 라핀은 다시 누아의 손을 붙잡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라핀은 제 손을 붙잡으면 뭔들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통하지 않으리라. 누아가 마음을 단단히 먹는데 라핀이 그의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로 끌고 갔다.

“뭐 하는….”

“흐으, 더, 해요…. 네?”

누아는 당황스러움에 뻣뻣하게 굳었지만, 라핀은 누아의 손등을 감싸 꾹꾹 눌렀다.

손바닥 아래로 라핀의 음부가 적나라하게 만져졌다. 하의 너머로 만지는 것인데도 그 아래에 있는 남성기가 바짝 서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라핀의 뜻대로 순순히 해주지 않을 것이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누아는 점점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라핀이 도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흔치 않아서 모든 것이 아찔했다.

…그래, 일단 옷만 벗기자. 바지는 벗겨줘도 섹스는 안 할 수도 있으니까.

절제력이 바닥나기 시작한 누아는 라핀의 바지를 벗겼다가,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뭐야.”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이 토끼의 특징인가 했더니만, 오늘 라핀은 하얀 속옷을 입고 있었다.

속옷을 입은 모습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어울렸으나, 매번 바지를 벗기면 나체가 되던 몸을 봐왔던지라 라핀이 속옷을 입은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토끼는 원래 안 입는 거 아니었어?”

“으응?”

“속옷.”

라핀은 누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못 알아듣는 듯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라핀은 뒤늦게 “아.”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워, 원래는 입어요. 근데 그때는….”

라핀은 열에 취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평소보다 말투가 늘어졌고 나무늘보처럼 느렸다. 그때는 뭐? 누아가 답답하게 뒷말을 기다리자, 라핀에게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블란 님이 훔쳐 가서…. 없어서 안 입은 건데요.”

“하….”

누아가 허탈한 숨을 터트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태까지 토끼는 원래 속옷을 안 입는 습성이 있다든지, 혹은 이상한 성벽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제게 속옷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을….

제가 그 정도도 안 해줄 것 같았나?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라핀이 제 눈치를 보느라 당연한 요구조차 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핀은 조막만 한 머리로 늘 이상한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

누아는 할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라핀이 속옷을 챙겨 입은 모습이 신선해 벗기지 않기로 했다.

누아가 속옷을 옆으로 밀어내니 가려져 있던 음부가 드러났다. 제가 노팅을 해서 엉망이 되었던 보지는 그간 안 건드렸다고 멀쩡해져 있었다. 노팅을 한 이후 걱정되어 약을 꾸준히 발라줬었는데, 괜찮아져서 다행이었다.

축축해진 보지를 누아가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자, 라핀은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던 라핀은 괜히 엉덩이를 달싹거리다 칭얼대는 소리를 냈다.

“흐, 거기, 그만 보고…. 빨리요….”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박아달라는 말이었다. 그 증거로 수치스러워하면서도 활짝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지 않았다.

“어디에 해줄까.”

“앞에….”

“앞이 어딘데.”

누아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하며 라핀의 자지에 손을 뻗었다.

“흐읏…!”

누아는 라핀의 자지를 속옷 한쪽으로 빼내고 기둥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발정기의 열에 뒤덮여 뜨겁고 딱딱했고, 조금 건드렸을 뿐인데도 요도구를 벌름거리며 투명한 쿠퍼액을 흘려댔다. 잡고 흔들어주면 곧장 정액을 뿜어내기라도 할 것 같은 애처로운 모양새였다.

누아가 일부러 요도구 부근을 엄지로 막고 살살 문지르자, 라핀이 몸을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뒤틀었다.

“아흐으응! 아, 거기, 흐, 말고요…!”

“그럼?”

“으응…!”

누아가 이번에는 둥근 고환을 매만졌다.

애꿎은 곳을 만지는 손에 라핀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발정기의 열에 취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면 좋으련만, 흐릿하게 남은 이성이 라핀을 더 수치스럽게 했다.

하아, 그것보다… 누아도 발정기에 저를 이용했으면서 저한테는 야박하게 구는 것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아, 흣, 돼, 됐어요! 손 떼요.”

라핀은 제 자지를 만지는 누아의 손을 치우게 하고, 제가 직접 잡고 위아래로 용두질 쳤다.

누아는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자위의 현장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핀은 제 앞에서 다리를 벌린 채 남성기를 흔들고 있었다.

과하게 야한 장면이었다. 평생, 저렇게 야한 것은 처음 봤다.

누아가 당황스러움과 더 보고 싶은 욕망에 아무런 조치도 못 하는 사이, 금방 라핀의 자지 선단에서 하얀 정액이 터져 나왔다. 조붓하게 다물린 여성기에도 물기가 흘렀다. 고작 몇 초 사이에 라핀이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

라핀이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숨을 헐떡였다. 분명 사정했음에도 발정기의 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발정기 때는 늘 한 번 사정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남성기를 쥐고 흔드는 것만으로는 두 번, 세 번 사정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라핀은 이보다 더 큰 쾌락을 알고 있었다. 라핀이 남근을 잡고 있던 손을 스멀스멀 아래로 내리자, 누아가 라핀의 손목을 붙잡아 매트리스에 꾹 눌렀다.

“하, 라핀. 좀 가만히 있어.”

누아는 아까 라핀의 이마 위에 얹었던 찢어진 천을 가져와서 라핀의 손목을 칭칭 묶었다.

라핀을 괴롭히려는 목적이었으니 자위를 하든 말든 무시하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야한 장면에 제 좆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게 무슨. 푸, 풀어주세요!”

“…….”

라핀은 묶인 손이 불편하다며 칭얼대는 소리를 냈지만, 누아는 그것을 한 귀로 흘리고 라핀을 엎드리게 했다.

상체는 엎드린 상태로 엉덩이를 치켜들도록 자세를 고정한 누아는 라핀의 회음부에 입술을 맞췄다.

“흐익!”

불시에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라핀이 기겁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워낙 예민한 부위이기도 했고 뽀뽀를 할 만한 부위가 아니었다.

라핀이 하지 말라며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누아가 그보다 더 빠르게 라핀의 보지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내벽이 바짝 조여졌지만, 아직 남아 있는 발정기의 잔재가 금방 길을 내어주었다. 누아는 일부러 손가락을 굽혔다 펴며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 여기, 엄청 젖었어. 알아?”

“으으응, 모, 몰라요….”

라핀이 얼굴을 침대에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누아는 라핀이 직접 제 보지 상태를 보게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지금 하려던 건 따로 있었으니까.

누아는 보지를 손가락으로 헤집는 채로 하얀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변태 같은 행위에 라핀이 엉덩이를 퍼드득 떨며 기함을 했다.

“아, 뭐 하는… 흐윽!”

누아는 라핀의 말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녀석의 뒷구멍을 혀로 핥아줬다.

누아는 평소 제 열기에 못 이겨 박는 데 집중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최대한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제 좆 상태는 그렇지 못했지만 오늘이 아니고서야 언제 라핀이 안달 난 걸 보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혀끝을 세우고 주름진 구멍 입구를 촘촘히 핥아주니, 라핀이 토끼 몸을 하고 있을 때처럼 낑낑 소리를 냈다.

“아흑, 아, 거기로는, 으응, 싫어요….”

“…….”

두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누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행위를 재개했다. 라핀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엉덩이에 코를 박고 뒷구멍을 길게 핥았다. 뱀처럼 진득하게 핥는 행위에 라핀이 귀를 삐쭉 세우며 진저리를 쳤다.

“아흐으…!”

보통 뒷구멍은 생식기로 쓰이는 부위도 아니니 굳이 애무할 필요는 없지만, 이전에 블란과 함께 한 침대에서 뒹굴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라핀은 뒷구멍에 박는 것만으로도 발기했다.

아마 라핀을 그렇게 야해 빠진 몸으로 개발한 건 블란이겠지. 그 새끼가 아니고서야 라핀의 몸을 개발할 놈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생겼다. 질투에 눈이 먼 누아는 뒷구멍의 주름을 핥기도 하고, 좁은 구멍을 혀끝으로 쿡쿡 찌르기도 했다. 이곳은 보지와 달리 핥으면 핥을수록 구멍이 더 좁아지려고 했다.

빨기 힘들게…. 누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빠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뺐다. 이제 보니 라핀의 엉덩이에 보조개가 깊게 파여 있었다. 힘을 과하게 줘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긴 한데 너무 힘을 줘서 방해됐다. 누아는 일부러 엄한 목소리를 내며 녀석의 엉덩이를 톡톡 쳤다.

“엉덩이에 힘 빼.”

“아, 시, 싫어요…! 뒤에, 그마안….”

엄하게 목소리를 냈음에도 라핀은 웅얼거리며 힘을 빼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앞을 빨아줄 때나 뒤를 빨아줄 때나 똑같이 잘 느끼는 것 같은데, 뒤를 핥아주는 건 정말 싫은가 보다.

그렇지만.

찰싹!

“아흐윽!”

누아의 손바닥이 라핀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라핀은 손이 묶여 있는 탓에 아파도 엉덩이를 들썩이는 수준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라핀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비명을 내지르자, 누아가 제가 때려 열이 오른 부위에 손바닥을 얹으며 말했다.

“라핀.”

“흐, 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데, 나는 왜 들어줘야 하지?”

누아는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붉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다정히 문질러줬다. 라핀은 이상하게도 그 손길에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배에 닿을 듯 바짝 선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줄줄 흘렀다.

누아는 조금 엉덩이를 만져주다가, 다시 뒷구멍에 혀를 가져다 댔다. 매섭게 때린 효과가 있는지 한 치의 진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하던 조임이 좀 풀려 있었다.

일순간 제가 너무 세게 때렸나 후회가 됐지만, 제 기준에서는 정말 약하게 때린 것이었다. 늑대들과 장난을 할 때보다 약하게 때렸으니 괜찮을 거라고, 제 기준에서 생각했다.

누아는 살짝 풀린 뒷구멍을 혀끝으로 콕콕 찌르다가 안쪽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으윽!”

억지로 좁은 통로를 쑤시고 들어가자 라핀이 크게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들썩거렸다.

라핀이 본능적으로 다리를 침대에 짚고 기어가려고 했지만, 두 팔을 묶어둔 탓에 누아에게 크게 방해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누아는 도망치는 엉덩이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안쪽을 탐했다.

“아으으, 흐으, 으으응…!”

진득하게 공략하니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점점 길을 내주었다. 누아는 그것을 안쪽까지 깊게 핥아달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혀를 길게 빼내 안쪽을 희롱했다.

게걸스레 그 부근을 전부 침으로 적시는데, 스르르 내려온 무언가가 누아의 입을 가로막았다. 라핀의 속옷이었다. 속옷을 엉덩잇살에 걸쳐 뒀었는데, 걸친 것이 풀리면서 누아의 입술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한참 좋았는데…. 좀 전까지만 해도 속옷을 입은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좋은 시간을 방해한 속옷이 너무나도 짜증스러웠다. 원수 보듯 흉흉한 눈으로 속옷을 보던 누아는 애무를 멈추고, 속옷 중앙 부분을 이빨로 깨물었다.

드드득!

그 상태로 거칠게 고개를 돌리자, 속옷이 찢겨나갔다. 속옷은 너덜너덜하게 중앙에 구멍이 크게 뚫려서 자지와 보지, 그리고 뒷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사실상 속옷의 기능을 잃은 것이다.

라핀은 또 속옷을 잃게 된 충격에 빠졌지만, 누아는 속옷을 찢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좀 편하네.”

“내 속옷….”

라핀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혼잣말처럼 작게 흩어진 소리는 누아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라핀이 절망에 빠졌든 어쩌든, 누아는 착실하게 진도를 이어가 보지를 쑤시던 손가락을 뒷구멍에 밀어 넣었다.

찌걱, 찌걱…. 보지에 그랬던 것처럼 추삽질하자, 라핀이 누아를 돌아봤다. 마주친 검은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 거기에… 하실 거예요?”

“그래.”

“…….”

라핀은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다가 얼굴을 다시 침대에 푹 묻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척 봐도 싫어하는 반응이었다. 거기는 싫다고 해도 누아가 들어주지 않을 걸 알고 체념한 눈치였다.

누아는 토끼가 체념한 것을 확인하고 뒷구멍에 성기 선단을 가져다 댔다. 이제 더 칭얼거리지 않을 테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상 박으려니 라핀의 서글픈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렇게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삼키고 있을 것이 훤히 그려졌다.

…젠장.

누아는 라핀의 몸 위로 엎어지며 녀석의 등에 가슴을 문대고 체중을 실었다. 누아는 거리를 좁히고는 라핀의 귀에 대고 달래듯 말했다.

“한 번만 하고 보지에 박아줄게. 그럼 됐지?”

“…….”

“그것도 싫어?”

누아는 라핀의 귓가에 입술을 맞추며, 엉덩이 골짜기 사이에 성기를 위아래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그것은 뒷구멍에 삽입될 듯 입구를 꾹 누르다가도, 아래로 쭉 미끄러지면서 보짓살까지 문질렀다.

라핀이 아슬아슬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군다나 귓가는 라핀의 약한 부위 중 하나였다. 귀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이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숨, 나직한 목소리까지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성을 다잡기 힘들었다.

“흐으읏, 시, 싫은데….”

“…….”

그런 와중에도 라핀은 뚝심 있게 싫다고 했다. 그만큼 뒷구멍으로 한 섹스가 싫었다.

라핀의 거부 반응에 누아가 아쉬움을 느끼며 뒷구멍 삽입은 포기하려는데, 라핀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딱 한 번만 하는 거죠…?”

라핀이 눈물을 머금어 빛을 내는 눈으로 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꼭, 꼭 한 번만 해야 한다고 확인받으며 애처롭게 떠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귀여웠다.

“응.”

라핀의 허락을 받은 누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녀석의 눈가에 입술을 맞췄다. 라핀의 눈가에서는 눈물의 짠맛이 났다. 별거 없는 염분의 맛이었지만, 누아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어 눈가를 두어 번 더 핥아줬다.

누아는 개처럼 얼굴을 핥아주면서, 하반신을 라핀에게 바싹 맞붙여 귀두를 뒷구멍에 걸쳤다.

뒷구멍은 많이 풀어줬다고 한들 여전히 아무것도 못 받을 것처럼 다물린 곳이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이곳이 자신의 혀와 세 손가락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빠듯하지만 좆까지 받을 수 있는 신비한 곳임을 알고 있었다.

허리에 힘을 주어 꾹 누르자, 뒷구멍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넓게 벌어졌다. 딱 기둥 넓이만큼만 벌어진 그곳은 버겁게 누아의 성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흐으윽, 아, 아으…!”

귀두가 들어올 때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켠 라핀이, 기둥까지 삼켜지자 끙끙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라핀은 눈을 감으면 이 버거운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했지만, 시야를 가려도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늑대 놈의 성기는 쓸데없이 크고 길어서 끝을 모르고 들어왔다.

성기가 배꼽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는 듯한 감각에 라핀은 끝내 참지 못하고 매트리스에 발을 동동 굴렀다.

“흐, 으, 아파…. 아파요…!”

“하…. 조금만, 더.”

누아는 얼마 안 남았다는 듯 말하며 라핀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술을 맞췄다.

그렇지만 아래에 들어오는 것은 다정하지 않았다. 누아는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했지만, ‘조금’이 아니었다. 누아가 익숙해지라는 듯 천천히 넣는 바람에 그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딱딱한 고환이 라핀의 볼기에 닿았다. 누아가 완전히 성기를 삽입하고 숨을 내뱉었을 때쯤엔 라핀이 완전히 기진맥진해 엎어져 있었다. 아까는 그렇게 섹스하자고 유혹하더니만, 고작 삽입한 것만으로 무너진 것이다.

“하아, 라핀. 일어나야지.”

“흐윽…. 이, 이거 못, 흐, 하겠어요….”

“앞에도, 박아달라며. 후우, 그때까지 버텨야지.”

누아는 이것도 못 버텨서는 앞에는 박힐 수 있겠냐며 놀리듯 말했다.

사실 누아의 마음 같아서는 어디든 제멋대로 못질하듯 거칠게 박고 싶었다. 그렇지만 토끼의 체력이 먼저 바닥날까 봐 최대한 녀석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

그는 찰박찰박 귀여운 소리를 내며 하반신을 맞부딪치다 보지도 만져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보지에도 박을 거니 미리 풀어두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누아는 라핀의 앞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매트리스가 흥건하게 젖은 걸 알아챘다.

끈적하게 묻어난 것을 쓸어 확인하니 땀이나 단순한 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점성 있으면서도 하얗고, 밤꽃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겨우 뒷구멍에 삽입했을 뿐인데 라핀이 바로 사정한 것이었다.

뭐야, 나랑 하는 게 그렇게 좋았나? 누아는 애써 기분 좋음을 참으며 라핀의 눈앞에 제 젖은 손을 펼쳐 보이며 능글거렸다.

“넣기만 했는데 간 거야?”

“흐으윽…. 아, 아닌데….”

“이렇게 좋아해서, 하지 말라고 한 건가?”

애널은 일반적으로 섹스하는 부위가 아니었다. 흥분한다고 스스로 젖는 부위도 아니고 씨물을 뿌린다고 해서 임신이 되는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런 부위로 섹스하면 보지로 받는 것보다 아프고 버거울 테니 싫어하는 것도 이해했었다. 그래서 아까 봐주려고 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뒷구멍에 삽입한 것만으로도 사정하는 모습이라니.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아프다고 운 건 귀여운 내숭으로 보였고, 이곳으로 섹스하면 너무 느끼기 때문에 싫다고 발뺌한 것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누아는 좀 전까지 배신감으로 떨어놓고서는 금방 마음의 벽을 허물어트리며 말했다.

“하긴, 뒷구멍으로… 느끼는 거, 흔치 않을 거야.”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해해.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 얼굴을 확 붉혔다.

“네가 원하면….”

“으응…!”

“여기로만 섹스하는 것도, 좋지.”

누아는 애널의 조임이 너무 과해서 보지에 박는 것이 더 취향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이 좋아한다면 보지 말고 이곳으로만 관계를 맺을 의향이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해줄 테니 앞으로 도망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거였지만, 라핀은 그 말에 퍼드득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절대 안 된다며 격렬하게 고개를 젓고, 발가락으로 매트리스를 쿵쿵 때렸다. 서러운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아, 흐윽, 시, 싫어요…!”

누아는 발버둥 치는 라핀을 내려다보며 당황스러워졌다. 제가 심기 거슬리는 말을 했던가?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뒷구멍을 좋아하기에, 보지를 양보하고 앞으로도 여기로 박아주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제 세심한 씀씀이에 라핀이 감동할 줄 알았건만 반응은 그와 정반대였다.

뭐가 문제였던 거지? 누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데, 라핀이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말고, 흐으윽….”

“…….”

“앞에…, 흐으, 보지로 하고, 싶은데… 흐.”

“하….”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누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 때문에 싫다고 난리를 친 거였어?

누아는 뒷구멍에 박던 것을 대번 빼내고 엎드려 있는 라핀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녀석의 무릎을 잡아 벌리고 음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헉…! 뭐, 뭐 하는 거예요!”

“보지에 박아달라며.”

“힉!”

누아는 대답하기가 무섭게 보지를 벌리고 혀로 진득하게 핥았다. 라핀의 말을 들어주지 않기로 했던 것은 새까맣게 잊고, 어서 보지에 박아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원래는 라핀을 끈덕지게 괴롭혀주다가 한참 후에야 좆을 박아줄 생각이었다. 그때 귀찮지 않도록 미리 손가락으로 보지 구멍을 풀어줬다. 그러니 당장 앞 구멍에 박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는 보지까지 핥아줘야 성에 찰 듯싶었다.

“흐으으, 아니, 그거, 읏, 말고…!”

뒷구멍에 그랬던 것처럼 누아가 음부에 코를 묻고 보지를 물고 빨아대자, 라핀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버둥거렸다. 보지에 좆을 박아달라고는 애원하면서도 혀로 핥아주는 건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보지에 물이 많아지는 것도, 제가 보기엔 앙증맞기만 한 남근이 힘을 받고 곧추서는 것도, 신음을 흘리느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것도 전부 누아가 잘 알고 있는 반응이었다. 싫은 건 아니구나.

라핀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꼼지락거리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누아의 어깨를 발바닥으로 짚고 밀어내려고 낑낑거렸다. 손이 묶였으니 발로 밀어내려는 모양새였다.

누아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가소롭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제 어깨를 누르는 하얀 발도 귀여워 발바닥을 진득하게 핥아줬다. 그러자 라핀에게서 간지러워서 그런 건지 모를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힉, 흐, 그거 하, 하지 마요…!”

웃음과 신음이 뒤섞인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핥아서 라핀이 꺄르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까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발정기 도중이었고,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른 참이었다. 아쉽지만 누아는 라핀을 간지럽히는 것을 다음으로 미뤄두고 단단해진 귀두를 보짓살에 맞췄다.

누아의 성기는 애널 섹스 도중 그만둔 탓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발기해 있었다. 누아가 밑동을 한 번 훑은 뒤 삽입하자, 성기가 젖은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흐읏!”

라핀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렇게나 갈구하던 보지 삽입이었다.

침과 애액으로 녹진하게 풀린 곳에 단번에 성기를 뿌리까지 넣으니, 라핀이 경련하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 잠깐, 빼, 으, 아으으, 으으응….”

라핀은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연달아 나오는 신음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원래 라핀이 심하게 민감한 편이긴 했어도 지금의 반응은 유달리 격렬했다.

누아는 혹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지 라핀의 얼굴을 살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누아의 복근 위로 따듯한 물이 쏟아지는 게 먼저였다.

툭, 툭, 투두둑….

처음에는 한두 방울 떨어지던 것이 점점 힘차게 쏟아졌다. 누아가 제 배를 내려다보니, 촘촘하게 짜인 자신의 복근 위로 투명한 물이 쏟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것은 정액도 오줌도 아닌 투명한 물이었다.

“하….”

투명한 물은 쪼개진 틈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배꼽, 그리고 라핀과 결합되어 있는 부근까지 흘러내렸다. 툭툭 떨어진 물로 매트리스가 젖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아는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물줄기를 내려다보다가 포물선을 그리던 물줄기가 방울이 될 때가 되어서야 묘한 얼굴로 숨을 뱉었다. 아까는 뒷구멍에 삽입한 것만으로도 사정하더니, 이번에는 보지 삽입만으로 분수를 터트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생긴 몸인지 모르겠다.

제 눈에는 뭘 싸내든 예쁘긴 하다만, 오늘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싸대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파서 그런지 땀도 흠뻑 흘리던데 이러다가 탈수가 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으흐, 으으, 흐아아….”

누아의 걱정을 모르는 라핀은 여전히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절정 후의 여운에 전율하고 있었다. 사정감과 배뇨감이 단번에 해소된 여운은 너무나도 극심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누아는 그런 라핀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라핀을 품에 끌어안고 자세를 바꿨다. 라핀은 단순히 체위를 바꾸려는 건 줄 알고 혼몽하게 몸을 맡겼지만 금방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아, 흐읏, 잠깐, 아앗!”

누아가 라핀의 엉덩이와 등을 받쳐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공중에 뜬 라핀이 깜짝 놀라 허리를 비틀어대 봤지만, 그것이 통했을 리가 만무했다. 라핀은 꼼짝없이 커다란 품에 갇혔다.

“아흐으, 아! 내려, 으, 내려주세요!”

“좀 있어 봐.”

누아는 무신경하게 말하더니, 침대 아래로 내려가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성기가 이전에 없을 만큼 깊게 파고들었다. 예민한 점막이 두툼한 것에 마구잡이로 짓찧어졌다. 예민한 곳을 노리고 피스톤질을 하던 때와는 다른 자극이었다.

“아흐윽, 으, 아으, 그만….”

“…….”

“침대, 흐윽, 침대로….”

침대로 가요, 제발…. 그렇게 애처롭게 말했지만, 얄궂게도 점점 더 침대에서 멀어졌다.

버둥대면 몸속 깊숙이 뿌리박은 성기가 요동치니, 결국 라핀은 어쩔 수 없이 누아의 허리에 감아 엉덩이를 최대한 띄우는 수밖에 없었다. 손이 묶여 있는 터라 다리로 안는 게 최선이었다.

누아는 라핀을 단단히 안고서는 성큼성큼 이동했다. 늘 그랬듯이 그에게서는 무겁다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 덕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들지 않았지만, 평소 지내던 늑대 소굴이 아닌지라 누아가 갑자기 섹스 도중에 어디를 가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원래 누아가 살던 늑대 굴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라핀이 살던 토끼 굴에 비하면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사정할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뒤덮어 자세히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라핀이 누아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는 사이 엉덩이에 딱딱하고 안정감 있는 것이 닿았다. 내려다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나무 식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아, 하….”

라핀은 박혀 있던 성기가 조금 빠져나가고 나서야 주변을 살필 겨를이 생겼다.

누아가 라핀을 안고 온 곳은 주방이었다. 누아에게 매미처럼 매달리는 데 힘과 정신을 다 쏟느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인테리어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이뤄진 원목 가구들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줬다. 화려한 장식품이 많았던 저번 집을 생각하면 늑대가 살기에는 비교적 소탈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것보다… 몸을 겹치다가 난데없이 왜 주방으로 오냐고? 라핀이 불만스럽게 누아를 노려봤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식탁 위에 놓인 잔에 물을 마셨다.

목마른 거면 혼자 다녀올 것이지, 왜 나까지….

라핀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누아가 입에 물을 머금은 채로 제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물을 마시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에 라핀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다가 얼굴을 반대로 돌리며 거부했다.

“필요 없, 어요….”

“…….”

아까보다는 자극이 줄었어도 삽입 중이라는 건 여전해, 라핀이 말을 더듬거리며 답하자 누아가 왜 안 마시느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핀은 목이 타긴 했지만 일전에 저런 식으로 물을 받아마셨다가 섹스하던 중에 소변을 지린 적이 있어 트라우마가 됐다. 방금도 싸낸 마당에 이제 와서 챙길 자존심도 없다만…. 또 그런 꼴을 보이기 싫었다.

단호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지만, 억센 손이 볼을 꾹 누르더니 정면을 바라보도록 고개를 돌리게 했다. 둘의 시선이 맞닿기가 무섭게, 누아는 눈을 반쯤 감고 입술을 맞췄다.

“으응…!”

입술 너머로 따듯한 물이 넘어왔다. 넘실거리며 들어온 물은 목구멍을 타고 마른 목을 축였다.

라핀은 가뭄 난 듯이 갈증이 났던 터라 물이 여느 때보다 달게 느껴졌지만, 또 물을 싸낼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그러려면 마시지 않아야 하는데, 본능을 따르는 몸은 열심히 꼴깍이며 물을 받아먹었다. 몇 번 반복하니 컵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내 의지력이 이렇게 바닥에 치달았구나. 라핀이 자책하는데 누아가 다시금 라핀의 몸을 들고 이동하려고 했다.

그에 라핀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묶인 손으로 누아의 단단한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아, 자, 잠깐만요….”

고양이 꾹꾹이 수준의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누아는 안아 들려는 것을 멈추고 품 안의 라핀을 내려다봤다. 라핀은 은근슬쩍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몸을 물리며 말했다.

“흐, 그냥 여기서, 해, 해요…. 힘들어요….”

“뭐가 힘들어?”

누아는 ‘안고 가는 건 나인데, 왜 네가 힘드냐.’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의아해했다.

늑대랑 말이 안 통하는 게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긴 하다만…. 묻는 표정이 너무 순진무구해서 대답하기가 민망했다. 지치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건데, 그걸 입으로 풀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미친 듯이 민망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아…. 걸을 때마다 아, 안이 들썩대서…, 힘들어요.”

“아….”

라핀이 어물쩍 말을 흐렸지만 누아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누아는 설마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교접된 아래를 내려다봤다. 누아는 박기만 해봐서 받아내는 라핀의 입장은 아예 생각도 못 해본 눈치였다.

하긴, 원체 배려심이 없긴 했지…. 처음 늑대에게 잡혀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배려라는 걸 받아본 적이 손에 꼽힐 것이다. 라핀이 누아에게 뭘 기대하냐는 듯 한숨을 삼키자, 누아가 알겠다는 듯 라핀의 가슴께를 눌러 식탁에 등을 대고 눕게 했다.

식탁은 침대와는 달리 딱딱해서 눕기만 했는데도 불편했다. 라핀이 본능적으로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이는데, 누아가 성기를 깊게 밀어 넣으며 라핀과 상체를 밀착시켰다.

“아, 잠깐, 흐으으…!”

“근데….”

단번에 예민한 곳을 짓눌러주는 귀두에 라핀의 목이 뒤로 젖혀지는데, 귓가에 촉촉이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히도 낮게 으르렁대는 날것의 목소리였다. 라핀이 눈을 질끈 감자, 누아가 느릿하게 추삽질하며 말을 이었다.

“너 여기 누워 있으니까, 엄청… 맛있어 보여.”

“…예?”

다른 의미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말이었다. 바짝 올라와 있던 성감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지금 눈앞에 둔 남자는 늑대였다.

블란과 식탁에서 성교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는 맛있어 보인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무엇보다도 누아가 제게 살찌워서 잡아먹겠다는 이야기를 한 이후라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가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라핀이 오싹함에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을 때, 누아가 별안간 몸을 불편할 정도로 수그리며 바짝 선 유두를 입에 물었다.

“아흐으!”

라핀은 누아가 제 젖꼭지부터 먹으려는 건가 싶어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단번에 먹어 해치우지 않고 혀로 돌기를 꾹꾹 누르고 핥아댔다.

처음에는 그것이 혀로 맛보는 것처럼 느껴져 무서웠지만, 행위는 점점 농밀해졌다. 쪽쪽 소리를 내며 빨기도 하고, 돌기를 혀끝으로 꾹꾹 짓뭉개기도 했다. 돌기가 반항하듯 바짝 섰지만 금방 짓뭉개지기를 반복했다.

“흐으, 아앗, 아아!”

라핀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젖꼭지 애무와 동시에 추삽질까지 하니, 라핀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아래에서 헐떡거렸다. 드문드문 이성이 돌아올 때마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입이 의지를 벗어나 한껏 벌어졌다.

“아, 이제, 흐으, 그만, 하…, 모, 못 하겠어요….”

발정기의 열에 취해 먼저 몸을 겹치자고 달려든 건 라핀이었는데, 먼저 끝내자고 제안한 것도 라핀이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절대로 제가 조루거나 체력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저 늑대가 너무나도 뛰어난 것이었다. 누아의 발정기는 이미 지나갔는데, 어찌 저리 절륜한지. 늑대 종족이 특출나게 정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이건 너무 심했다.

“하아, 조금만 더 참아.”

“흐윽, 아니….”

누아는 이번에도 ‘조금만’이라는 말로 라핀을 꼬드겼다. 라핀은 정신없이 흔들리며 ‘조금’이 ‘조금’이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 안에 깊게 박힌 성기가 부피를 더 키우는 것이 느껴졌다. 사정의 신호였다. 그 신호가 반갑게 여겨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과연 누아가 한 번으로 만족할지는 몰라도, 그때까지만 버티자며 끙끙대는데 누아가 대뜸 추삽질을 멈추며 라핀의 요도구를 엄지로 틀어막았다.

“흣…?”

누아가 사정을 참으면서 라핀도 사정을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 왜 갑자기?! 라핀이 안달감에 엉덩이를 달싹이며 누아를 올려다보자, 그가 대뜸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씨물.”

“으응?”

“씨물, 싸달라고 해.”

사실 누아는 예전부터 저런 음란한 말을 라핀에게서 듣고 싶었다. 그때는 제가 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소 크게 아이를 바란 적도 없을뿐더러, 라핀은 토끼에다가 수컷이었다. 귀한 토끼라서 그런지 유독 눈길이 가는 찔찔이 같은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정해야 했다.

단순히 몸 궁합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제가 토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저 먹잇감이 도망친 거였다면 배신감을 느낄 이유도, 이런 식으로 화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배신한 동료를 용서하지 않듯이 먹잇감에게는 더 냉철해야 했다. 곧장 잡아먹으면 되는 걸, 굳이 살을 찌운다는 이유로 시간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토끼는 제 복잡한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저 또한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제 품에 안긴 토끼는 왜 저런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짓고 있었다.

“말하면 끝내줄게.”

“아흐으읏…!”

누아는 뻔뻔스럽게 말하며 아주 느릿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라핀은 아주 천천히, 내벽이 딸려 올라가는 느낌에 머리가 저릿저릿해졌다. 아, 이런 미친 늑대…. 라핀은 몸을 부르르 떨며 늑대를 내려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끝내준다는 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왜 저딴… 상스러운 말을 요구하는 건지. 늑대들은 부끄러움이란 게 없는 모양이다.

한 번 수치스럽고 마느냐, 계속 괴롭힘 당하느냐. 라핀이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자, 누아가 라핀의 귓가에 혀를 밀어 넣으며 재촉했다.

“응? 어서….”

“아, 그거, 하지 말아요…!”

라핀은 낮은 목소리가 귓가의 솜털을 스치고 눅눅하게 젖어드는 것도, 혀가 귀를 핥아대는 것도. 전부 다 미칠 것 같았다.

라핀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누아는 오히려 더 몸을 바싹 붙이며 끈덕지게 그를 괴롭혔다. 라핀은 평소 누아를 보며 쓸데없이 체력만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괴롭히는 데 천재적인 기질을 보였다. 여러모로 나쁜 것들뿐이었다.

라핀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자 식탁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끼긱, 거리며 흔들리는 식탁에 라핀은 두려움에 아래에 힘을 바싹 줬다.

“읏!”

성기를 바짝 조이는 내벽에 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늑대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늑대 소리는 당장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섬뜩했다.

아까 맛있어 보인다고까지 하던데, 목을 긁는 소리까지 들으니 정말 그가 저를 한입에 넣고 잡아먹을 것 같았다. 라핀은 어서 이 행위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원하던 말을 해주었다.

“아, 흐, 씨물… 아, 아으, 안에, 하윽, 싸주세요! 아으읏!”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핀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요도구를 놓아준 덕에 사정할 수 있게 됐지만, 다시 빳빳하게 발기하는 데에는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는 정도로도 흔들거렸던 식탁은 곧 무너질 것처럼 끼긱끼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소리였다.

라핀은 식탁이 너무 불안정하게 느껴져, 누아에게 매달리다시피 멱살을 쥐어 잡았다.

“아, 흐아아, 아! 좀! 처, 천천히…!”

“후우, 싸 달라면서.”

라핀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시킨 건 누아였지, 제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누아는 네가 싸 달라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굴었다. 추삽질은 오히려 빨라질 뿐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게 달려드는 무지막지한 힘에 라핀은 제가 발정기인 것도 잊고 다리를 벌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몇 번인지도 모르게 맞부딪힌 엉덩이가 매질당한 듯 얼얼했다. 한계까지 벌어져 포악한 성기를 받는 부위도 쾌감이 느껴지는 만큼 아팠다. 그렇지만 아픔보다도 허리 아래에서 올라오는 쾌감이 너무 컸다.

쾌감의 극한까지 몰려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단순히 쾌감을 느끼는 거면 좋을 텐데, 너무 과해서 위험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무서웠다.

“아흐으, 아, 나, 못, 흐으, 못 해, 으응, 힉!”

“하아, 하….”

라핀은 저도 모를 말을 외치며 도리질을 쳤고, 누아는 대답 없이 사납게 허릿짓을 해댔다.

몸 안에서 다시금 늑대의 성기가 불뚝거렸다. 노팅을 할 때처럼 불뚝거린 탓에 라핀의 마른 뱃가죽이 꿈틀거렸다.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감각에 라핀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지르자, 누아가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자지를 깊게 처넣었다.

“하윽!”

“큿…!”

다행히 노팅은 아니었지만, 여태까지 닿은 적 없던 곳을 들쑤시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라핀이 허리를 젖히는 것과 동시에 엉덩이가 바짝 조여졌다.

꿀럭꿀럭, 생명력을 가진 듯한 것은 몸속 깊은 곳에서 퍼져나갔다. 누아의 사정량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배가 정액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무서운 느낌이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라핀에게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눈꺼풀이 묵직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누아의 성기는 여전히 몸 안에 있었고, 여전히 커다란 위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만 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라핀은 믿기 힘든 그를 믿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후우, 그래. 다 먹어서 꼭….”

어두워져 가는 시야에서 누아가 입을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했지만, 귀가 먹먹해지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먼저였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든 기절이었다.

***

내가 미쳤지.

라핀은 정신이 들자마자 머리를 매트리스에 푹 박았다.

사정을 마지막으로 라핀은 안도하고 정신을 놓았었다. 약속을 했으니 이대로 끝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드문드문 정신이 들 때마다 제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떨 때는 옆으로 누워 있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제가 그의 성기 위에 올라타 들썩거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흐린 정신에도 더는 못 한다고 울며불며 도망을 시도했었다. 그렇지만 라핀이 무릎으로 일어서려고 하면 누아가 제 허리를 잡아 눌렀다. 겨우 뽑혀 나갔던 성기가 구멍을 깊숙이 채우고, 안에 있는 액체가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라핀, 흘리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하며 구멍 사이로 흘러나온 정액을 밀어 넣었던가?

회상하던 라핀은 보지에서 물이 울컥 흘러나오는 느낌에 확 생각을 지워냈다. 그렇게 섹스하고도 또 흥분하다니. 제가 발정기가 맞긴 하나 보다.

그런데 저는 발정기라지만, 이 늑대는 왜 그랬던 거야? 그는 오히려 늑대 발정기 때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너무 집요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라핀은 힐끗 제 옆자리를 바라봤다. 누아가 나란히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평소처럼 껴안은 채는 아니었지만, 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천으로 묶였던 제 손은 풀려 있었다.

“…….”

라핀은 조심스레 몸을 돌려 눕고 누아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 엄청 피곤해 보여서 내심 걱정했었는데…. 정사 때 힘이 넘쳤던 걸 생각했던 걸 보면 제 기우였던 걸까.

그의 눈 아래에는 여전히 짙은 음영이 져 있었다. 저걸 보면 피곤한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도 저를 괴롭힐 힘은 있다니.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변태 늑대였다.

라핀은 그가 자는 사이에 화풀이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 몸으로 또 도망치는 것에 지치기도 했고, 왜인지… 늑대 소굴에서 살고 있을 때만큼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그런 걸까, 어차피 도망치더라도 잡힐 거라고 생각하니 힘이 빠진 건가? 아니면 늑대들의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짓에 익숙해졌거나 체념한 것일까?

정확히 어떤 이유로 도망갈 생각이 안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라핀은 지금 도망갈 기력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괜한 오해를 받느니 잠을 더 자서 모자란 체력을 채우는 것이 좋았다.

라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

“으으으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라핀은 뻑적지근함을 느끼고 몸을 쭉 피고 기지개를 켰다.

지나친 교접에 근육통이 있긴 했지만, 섹스의 후유증보다는 몸이 아픈 게 더 컸던 터라 깊게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오래 잤는지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누아도 깨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팠던 것도, 지나친 정사에 시달렸던 것도 저였다. 그런데 어째서 늑대가 더 힘들다는 듯이 자고 있는 건지….

자업자득이지. 한 번만 하겠다고 꼬드기더니, 기절한 저를 붙잡고…. 어휴, 라핀은 진절머리 난다며 치를 떨었다.

꼬르륵….

라핀은 작은 소리가 나는 제 배를 내려다봤다.

누아에게 잡혀 올 때도 굶주려 있었는데, 에너지 소모가 심한 발정기를 보내고 곯아떨어진 탓에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도저히 누아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곳은 원래 머물던 늑대 집이 아니라서 식량 보따리도 없었다. 아까 섹스하면서 주방으로 갔을 때, 식량을 보관하는 곳이 있던데…. 거기에는 제가 먹을만한 게 있으려나?

라핀은 여전히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누아 외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그가 개인 소유한 집인 것 같았다. 늑대가 사는 곳이라 제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으면 먹어도 되지 않을까?

라핀은 여전히 곤히 자는 누아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흔들다가, 미동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잡힌 손을 빼내려 꼼지락댔다. 자고 있으면서도 손을 붙잡고 있는 힘은 왜 이리도 좋은 건지. 깍지까지 끼고 있어 손을 빼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으음….”

한창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누아가 잠꼬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깍지 낀 손을 억지로 빼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 눈치였다.

라핀은 놀라 얼어붙었지만, 이 정도로 포기하기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허기가 졌다.

라핀은 포기하지 않고 손을 빼내는 데에 집중했다. 살면서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후우….”

숨까지 참고 있었더니 손깍지를 다 빼냈을 때는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열이 내려 다시 하얘진 피부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올라오니 라핀이 좋아하는 홍당무 같은 모습이 됐다.

이제 침대를 벗어나는 것뿐이다. 라핀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고 바닥에 발바닥을 대는데, 대뜸 배가 팔에 감싸지더니 뒤로 끌어당겨졌다.

“어엇…!”

무지막지한 힘에 라핀은 종이 인형처럼 끌려가 커다란 품에 안겨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핀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거리니 스산한 목소리가 닿았다.

“어디 가.”

라핀은 그의 두 눈을 마주한 것도 아니고 그가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니었지만, 직감적으로 제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늑대 소굴에서 도망치기 전에도, 그는 제가 허락 없이 이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제가 무슨 짓만 하면 도망칠까 봐 지긋지긋할 정도로 꼬투리를 잡았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도망을 쳤으니까 그때보다 더 신경 곤두세우고 있을 거다.

“그게….”

라핀은 정말로 배가 고파서 먹을 게 없나 둘러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말을 하기 전부터 슬슬 걱정됐다. 도망가려고 했다고 또 화를 내면 어쩌지? 이번에는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또 변명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가 제 목을 졸랐던 건 아니지만, 멱살이 잡혀 숨이 막혔던 기억이 몇 분 전 일처럼 생생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길까 봐 지레 겁이 났다.

제대로 된 말을 하려고 말을 고르는데, 라핀의 배에서 단숨에 분위기를 허물어트리는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났다.

꼬르륵….

꾸오옥….

처량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워낙 작은 소리이니 라핀은 내심 저만 들었기를 바랐다. 라핀이 힐끗 뒤를 보며 누아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제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렸구나. 라핀은 얼굴을 홧홧하게 붉히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배가… 고파서.”

“…하아.”

누아는 그게 깊게 숨을 내뱉었다. 마치 답도 없는 구제 불능을 봤다는 반응이었다.

라핀은 저라고 꼬르륵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가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이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라핀이 고개를 푹 숙이자 누아가 부스럭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

“……?”

누아는 회색 트레이닝 바지만 입은 채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기다리라고 했지만, 종일 누워 있었더니 몸이 영 찌뿌둥했다. 라핀은 그를 따라 곧장 몸을 일으키려다가, 제 몸은 아무것도 안 입은 나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바지라도 입어 놓고서는, 왜 나는 아무것도 안 입힌 거야…. 늑대 놈은 자기만 홀랑 챙겨 입고 배려라는 게 없었다. 라핀은 두리번거리며 제 옷을 찾았지만, 어딜 봐도 제 옷은 없었다. 밑으로 내려가 침대 아래를 들여다봐도 없었다. 꼭꼭 가지고 다니던 도토리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제 옷을 갖다 팔았나, 태웠나…. 지난 정사에 허리도 아프고 몸도 후들거리는데 옷까지 보이지 않으니 슬슬 짜증이 났다. 결국 찾다 못한 라핀은 바닥에 나뒹구는 커다란 상의를 주워들었다.

“입어도 되겠지….”

품이 커다란 회색 후드 집업이었다. 누아가 입고 있던 회색 운동복 바지의 세트인 것 같았다. 그와 세트를 하나씩 나눠 입는 것 같아 내키지는 않았지만, 안 입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옷이 커서 엉덩이가 다 덮였다. 하반신이 허벅지부터 훤히 드러나는 게 민망하긴 했지만, 나신도 숱하게 본 사이에 이 정도 보인다고 못 나갈 건 아니었다.

라핀은 지퍼를 쭉 올리고 갓 걸음마를 뗀 동물처럼 어기적거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누아는 주방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의 드넓은 등에 손톱자국이 적나라하게 나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맹렬한 사투를 한 거지? 예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 제가 도망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핀은 사뭇 진지해졌다가, 무의식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잠깐, 힘드, 어, 으으…, 아으!’

‘후, 내 몸에, 매달려.’

습기 찬 듯 흐릿한 기억에는, 제가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다가 그의 등을 넓게 끌어안고 소리 높여 울고 있었다.

그것으로는 만족이 안 됐는지, 자신은 그의 어깨를 할퀴고 그의 어깨를 깨물어댔다. 그만하라는 반항이었다. 그러나 누아의 몸을 이룬 탄탄한 근육에 이는 박히지도 않았고, 손톱 또한 마찬가지였다.

억울함에 더 열심히 손톱을 세우고 긁어댔었는데…. 저거 내가 그런 거구나.

라핀은 자괴감에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늑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토끼라니. 어떤 의미로 보면 토끼에게는 가문 대대로 영광으로 삼을 만한 엄청난 업적이었지만, 몸을 겹치던 도중에 일어난 일이라… 차마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업적이었다.

라핀이 괜히 후드 집업 앞쪽을 꾹꾹 잡아 내리며 하반신을 가리고 있을 때, 누아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누워 있으라니….”

라핀을 본 그의 눈이 대번 커다래졌다. 말끝을 늘리던 그는 후드 집업을 입은 라핀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목울대를 크게 울렁였다.

“…까. 크흠, 흠. 말 정말… 말 더럽게 안 듣네.”

뒷말에는 영혼이 없었다. 분명 내용은 짜증을 내는 것 같은데, 얼굴이며 목소리에는 화가 하나도 묻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기분 좋은 걸 참으려는 표정이었다.

뭐지? 이상했지만, 누아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라핀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누워 있는 게 더 힘들어요.”

“그러면 뭐….”

누아가 의외로 금방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섹스해서 그런가? 잡혀 왔을 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분위기에, 라핀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여기는 도대체 어디예요?”

“내가 말 안 했나? 내 별장이야.”

별장? 그런 것도 있구나…. 늑대 우두머리는 토끼 우두머리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다르구나.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라핀은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고 힐끗 그를 흘겨봤다.

제가 나왔을 때부터 누아의 두 눈동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제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화하는 중이니까 노골적인 시선도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대화가 끝나도 끈덕진 시선은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누아는 뒤늦게 두 눈에 총기를 되찾고, 먹이 창고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더니 시뻘건 것을 라핀에게 내밀며 물었다.

“네가 먹을 만한 게 없는데, 이거 먹을 수 있나?”

“…….”

생고기였다.

아니…, 초식 동물한테 육류를 권하다니. 고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라핀이 보기에는 흉물스럽기만 했다. 라핀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이런 건 소화를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

비록 지금은 수인 형체를 하고 있더라도 라핀은 초식 동물이었다. 라핀이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하자, 누아의 얼굴 위로 작은 실망감이 스쳤다.

실망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제가 안 먹으면 그가 먹을 테니 음식을 버리는 것도 아닌데. 라핀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도토리 한 알을 후드 집업 주머니에서 꺼냈다.

작고 동그란 도토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 극한 상황에 먹자며 아끼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도망에 실패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제는 아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라핀이 도토리에 묻어 있는 하얀 털과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입술 앞에 가져다 대자, 누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먹게? 아니, 그걸로 배가 차?”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죠. 먹을 게 없는데 어떡해요.”

라핀이 딱딱한 도토리 껍질을 까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도토리 한 알 정도로는 배를 채우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생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먹는 건 익숙했다.

워낙 작은 도토리였던지라 몇 번 씹으니 입안에서 형체 없이 사라졌다. 라핀이 아쉬움을 느끼며 혀로 입맛을 다시자, 누아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더 말 섞을 것도 없고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그는 금방 아까 라핀의 이마 위에 올려져 있던 천을 들고 돌아왔다.

“손 내밀어 봐.”

“……?”

갑자기 손은 왜? 뭐라도 주는 걸까 싶어 순순히 손을 내밀자, 그가 라핀의 두 손목을 모으더니 그 위로 천을 칭칭 감았다.

순식간에 천 쪼가리가 라핀의 손목을 억세게 조였다.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에, 라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엑?! 자, 잠깐만요! 손은 왜 묶어요?!”

“네가 먹을 만한 거 구해 오려고.”

“네에? 그게 묶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구해 오려면 나가야 하는데, 네가 그새 또 도망갈 수도 있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먹이를 구해 준다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상의를 하고 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묶어버리는 게 어디 있어?!

라핀이 이리저리 반항을 시도했지만, 누아의 억센 힘에 그대로 묵살됐다. 라핀은 허망하게 눈앞에서 제 손목이 묶이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좀 전에 섹스할 때에도 손목이 묶여 불편했었는데…. 라핀이 망연자실하게 손목을 내려다보자, 팔목을 단단하게 묶은 누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면 풀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 더 좋고.”

“하아…. 그래도 이렇게 묶는 게 어디 있어요….”

“한 번 도망친 너를 손목만 묶은 게 다행인 줄 알아.”

“…….”

그건… 그렇네. 누아의 성격에 손목만 묶어놓는 거면 양반이었다.

라핀이 납득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누아가 미묘하게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아까 정사 중에도 묶고, 또 묶으면서 좋아하는 걸 보면 역시 누아는 좀 이상한 취향을 가진 것 같다. 라핀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

누아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 심심해진 라핀은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조를 살폈다. 손목이 묶여 있어 불편했지만, 두 발은 자유로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곳은 원래 지내던 늑대 소굴처럼 동굴 깊숙한 곳에 지어지긴 했지만 집 크기는 훨씬 작았다. 이야기를 나눴던 주방, 누아와 함께 몸을 겹쳤던 방, 창고로 보이는 방, 그리고 화장실이 전부였다. 토끼 굴에 비하면 넓은 편이었지만 우두머리 늑대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소박했다.

몸을 겹쳤던 누아의 방은 더 볼 것도 없고, 라핀은 창고로 보이는 방으로 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누아의 성격상 무언가를 어지럽히지 않았는데, 이곳은 유달리 어수선했다.

특히 나무 조각들이 책상 위, 바닥 할 것 없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다듬어져 깔끔하고 길쭉한 것도 있고 쓰고 남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조각도 있었다.

라핀은 길쭉하게 뻗은 나무토막을 소심하게 만지작거리다가 아까 불안하게 삐걱거리던 식탁이며 침대가 이것과 같은 나무로 만들어졌었다는 걸 알아챘다.

“직접 만드는 건가?”

라핀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집에서는 어쩐지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가구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데에 흥미가 있나?

수인들이 쓰는 가구는 인간들이 버린 것을 수인이 쓰기 알맞도록 보수해서 쓰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했다. 사는 곳이 산등성이다 보니 재료를 수급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집도 짓는 마당에 가구를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의외로 집과 가구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녀석들은 라핀과 같은 작고 약한 종족이었다. 생존과 관련해 튼튼한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이 있기도 했고, 기술이 좋으면 약한 종족이라도 우대받기에 전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기술을 배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늑대인 누아가 직접 가구를 만든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누아 정도의 지위가 되면 그냥 사서 써도 될 텐데 말이다. 혹시 취미인 걸까?

“신기하네…. 상상도 안 되는데.”

누아가 이렇게 섬세하고 손기술을 필요로 하는 걸 한다고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라핀의 안에서 누아는 무식하게 힘만 센 늑대였다. 물론 다른 동물보다 체력도 좋고 힘도 좋으니 신체적으로 우월하겠지만, 섬세함과는 동떨어져 보여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라핀은 신기함을 느끼며 서랍장이며 책장이며 모든 가구를 한참을 구경했다. 몰랐는데 이 방을 채운 모든 물건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라핀은 처음 이 방을 발견했을 때, 누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세히 둘러보니 어쩌면 누아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과는 다른 누아의 속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같았다.

뭔가 그에 대해 깊게 알면 알수록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었다.

***

누아는 양손 한가득 먹이를 챙겼다. 처음에는 분명 라핀이 허기를 달랠 정도만 챙겨서 가져오려고 했는데, 마른 건초를 챙기다 보면 도토리를 먹이고 싶었고, 도토리를 챙기다 보면 당근을 먹이고 싶어졌다.

탈출한 놈이 뭐 예쁘다고 먹이를 챙겨주나 싶다가도, 못 먹어서 그런가 말랑하던 볼살이 홀쭉해진 걸 보면 뭐든 먹여서 살을 찌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누아는 산 곳곳을 신출귀몰하며 먹이를 한가득 챙기다가, 라핀이 꼬르륵대던 걸 떠올리고 급히 복귀했다. 맛있는 걸 많이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른 먹이는 것도 중요했다.

“나 왔어.”

누아가 집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지만,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라핀이 그렇게 배고프다며 칭얼거리기에, 돌아오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줄 알았다. 손목도 불편하니까 풀어달라고 할 것 같았고.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라핀?”

누아는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여전히 이렇다 할 대답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또?”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손목까지 묶어놨는데 도망쳤을까 싶으면서도 수많은 늑대를 제치고 도망친 것이 라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손목을 묶어놓은 정도로 라핀을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씨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누아는 빠른 걸음으로 제 방으로 돌아가 침대 이불을 확 걷었다. 자는 걸까 싶어 침대를 둘러봤는데도 없었다.

이 망할 토끼. 좀 봐줬다고, 저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데, 이상하게도 체취는 이 근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건가 했는데, 제가 막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지 못했으니 그런 건 아닐 터다. 라핀은 빠른 듯해도 늑대보다는 느렸으니까.

누아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업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일순간, 누아는 가파르게 뛰던 심장이 단번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

누아는 거친 숨을 씩씩 내뱉고 있었는데, 라핀은 그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라핀은 엉덩이를 받치는 의자 좌판에 머리를 기대어 엎드려 자고 있었고, 양 뺨은 발그스레했다. 드넓고 푹신한 침대를 두고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누아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온갖 감정들이 단번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허무하고, 농락당한 기분이고…. 그런 와중에 자고 있는 모습이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자각을 하고 나니, 어쩐지 콩깍지가 더 짙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찔찔이 같다고 생각했던 토끼가 이렇게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자고 있던 라핀이 기척을 느끼고 눈을 비볐다.

“아…, 오셨네요.”

“…….”

라핀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마침 생각난 것에 잘됐다 싶은 얼굴로 누아를 올려다봤다.

“맞다, 속옷 구해 오셨어요?”

“…아니. 없더라.”

누아는 언제 분노에 차 있었냐는 듯,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며 라핀의 손목을 묶어뒀던 것을 풀어줬다.

사실 누아는 라핀이 속옷으로 입을 만한 것을 구해 뒷주머니에 챙겨왔는데, 충동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

옷에 이어서 속옷까지 숨기다니. 선녀와 나무꾼도 아니고 왜 자꾸 숨기는데? 속옷을 입히지 않는 건 블란 같은 미친 변태나 하는 짓이었다. 토끼 수컷인 라핀을 덮치는 것도, 속옷을 숨기는 것도.

제가 블란이 하던 짓을 고스란히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블란이 왜 그딴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됐다. 씨발, 살면서 블란을 이해하게 되다니. 평소 블란을 미친 새끼, 변태 같은 새끼라고 생각했기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 그래요? 하긴, 구하기 힘들죠….”

누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자신을 힐난하고 있을 때, 라핀은 얼굴을 대번 실망감으로 물들였다.

수인 옷을 구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종족마다 옷 사이즈와 특성이 달라서 구할 수 있는 곳이 제각기였다. 그러니 종족이 다른 누아는 토끼 옷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를 법도 했다. 게다가 이 산에 토끼가 멸종되다시피 한 지 오래됐으니, 토끼 옷을 파는 장사꾼도 별로 없을 터다.

“내 것 중에 네가 입을 만한 게 있나 찾아볼게.”

“…알았어요.”

없을 것 같지만…. 라핀이 어쩔 수 없이 수긍하자, 누아가 은은하게 웃으며 아까 집에 들어오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먹이 보따리를 주워 들었다.

누아가 그것을 라핀에게 건네자, 라핀은 받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냐는 얼굴이었다.

“먹을 거. 꺼내서 거실에서 먹어.”

“네?”

라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받으며 보따리 안을 들춰봤다.

보따리 안은 일전에 늑대 소굴에서 받았던 것처럼 제가 먹을 만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때보다 양이 적긴 했지만, 제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구해 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제가 찾을 때는 반나절을 돌아다녀도 상태 나쁜 풀때기를 구해오는 게 고작이었는데… 양도 그렇지만 상태도 다 좋아 보였다.

라핀은 놀란 눈으로 보따리 안쪽과 누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했어요? 밖에 먹을 거 하나도 없던데….”

“네가 못 찾은 거겠지.”

“…….”

겨울은 늘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그건 라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 누아는 뭐가 저렇게 쉬워 보일까.

그것은 한 늑대 일족의 우두머리에게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 먹이를 한 보따리 챙겨온 걸 눈앞에 두고 있기에, 라핀은 반박하기를 포기했다.

라핀이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억누르고 거실의 식탁에 앉아 당근을 꺼냈다. 보따리 안을 들춰볼 때부터 선명한 주황빛이 시선을 이끌었다. 입이 고급이 됐는지 뭘 먹어도 입맛이 없었는데, 당근을 보니 없던 식욕이 샘솟았다.

라핀이 먹으려고 입을 벌리는데, 가만히 있던 누아가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

“…….”

누아의 말에 라핀이 그를 힐긋 쳐다봤다. 속옷을 찾아보겠다고 해놓고서는 왜 저기에 앉지?

라핀은 그에게 왜 앉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여기가 그의 집이고 방금 제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 온 늑대에게 너무 매정한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라핀은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손에 들린 당근을 내려다봤다. 누아가 맛 좋은 당근을 구해오는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할 듯했다. 이건 최상급이었다. 라핀은 더 지체하지 않고 당근을 입에 넣었다.

아삭!

베어 무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 안에 단맛이 확 퍼졌다. 라핀이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자, 누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무슨 맛이야?”

라핀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맞은편에 앉은 누아를 바라봤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그 음식 같지도 않은 게 맛있어?’ 하고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눈을 마주하고 보니 정말 궁금한 눈치였다.

하긴, 그는 육식 동물이니 당근 같은 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을 거다. 궁금해할 법도 했다. 라핀은 한 움큼 입에 담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엄청 달아요!”

“달아? 아무 맛도 안 나게 생겼는데…. 풀이랑 비슷한 맛인 거 아니야? 풀은 엄청나게 쓰던데.”

“그거랑은 달라요. 당근이 훨씬 더 아삭하고 달고, 맛도 진하고 영양가도 좋고….”

라핀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당근이었다. 당근은 그렇게 무시할 것이 아니라고,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하고 싶은데 말솜씨가 좋지 않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하려나? 라핀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자, 누아가 턱을 괴며 더 말해보라는 듯 눈짓을 줬다.

황금색 눈이 당근에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올곧게 저를 쳐다봤다. 내용에는 별 흥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고,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라핀은 열변을 토한 것이 조금 머쓱하고 어색하게 느껴져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맛있는데….”

“그렇겠지. 맛있다고 얼굴에 쓰여 있어.”

“…….”

제가 그렇게 티를 냈던가 싶다가도, 방금 당근을 물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으니 보였을 것이다. 부끄럽다….

이미 다 들켜버렸지만, 라핀은 얼굴을 푹 숙이고 당근을 오독오독 씹어 넘겼다. 제가 당근을 특출나게 좋아한다는 걸 숨기려면 그만 먹어야 하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멈출 수 없었다.

라핀은 앉은 자리에서 당근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평소라면 먹다 말고 배부르다며 남겼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배가 찼는데도 더 먹고 싶었다.

라핀은 먹이 보따리를 기웃거리다, 여전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누아에게 물었다.

“더 먹어도 돼요?”

“응? 응. 어차피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허락을 받아.”

“아….”

누아가 구해 온 거니까 허락받은 건데…. 하긴 그렇네. 라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마음 놓고 먹어도 되겠다. 라핀은 더는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른 건초를 집어 들었다. 당근이 더 남아 있어 그걸 먹어도 됐지만,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기 위함이었다.

마른 건초는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가 구해온 마른 건초를 먹으면 속이 역했는데, 오늘은 입맛이 좋은 덕분인지 맛있기만 했다.

“평소엔 쥐꼬리만큼 먹더니만, 웬일이래? 못 먹긴 했나 봐?”

라핀이 야금야금 먹고 있자, 누아가 좀 의외라는 듯 말을 걸어왔다. 많이 먹는다고 혼내는 건 아니고 정말 신기하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핀은 당근을 먹을 때 빼고는 그다지 음식에 의욕적인 편이 아니었다.

라핀도 제가 그랬었다는 걸 알기에, 멋쩍게 손에 쥔 길쭉한 건초를 옷소매로 반쯤 가려 작아 보이게 했다. 많이 먹는다고 따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망쳤다가 잡혀 온 다음에 뻔뻔스럽게 많이 먹고 있는 게 민망했다.

“그러게요…. 많이 배고팠나 봐요.”

“그러니까 앞으로 그딴 짓 좀 하지 마. 내가 너 때문에 며칠을….”

누아는 불만스럽게 말하다가 말고, 손바닥으로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사 후 깊게 잤던 덕분인지, 잡혀 온 직후 봤을 때보다는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러지 말고 좀 쉬세요.”

“다 먹고, 같이 누워.”

“알겠어요….”

라핀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가 얼굴에 은은한 웃음기를 띠었다.

라핀은 그가 단순히 집착이 심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단순히 그런 이유로 저를 쫓아온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그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사랑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

식사를 끝낸 둘은 침대 헤드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라핀은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은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저녁은 늑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이자, 누아가 늑대 굴로 데려가겠다고 누누이 말했던 때이기도 했다.

온 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돌아가는 것이 허무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주하기 꺼려지는 이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제가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던 누아의 부하도 있었고, 블란도 있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블란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아예 예상조차 힘들었고, 누아의 부하들이 정말로 제게 앙갚음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컸다.

라핀의 마음은 점점 불안감을 눈덩이처럼 키워가며 소란해지는데, 그 사정을 모르는 누아는 태평하게 라핀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배만 튀어나오네.”

다른 이들에 비하면 여전히 마른 편이긴 하지만, 과식해서 그런지 배만 조금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누아는 그것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섹스할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발정기가 온 라핀을 보고 이성을 잃었던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옷을 다 벗겼을 때 팔이나 다리 같은 부위는 다 말랐던 거로 기억한다.

더 많이 먹여서 다른 부위에도 살이 오르게 해야지. 누아가 흐뭇하게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라핀의 배를 만지작거리던 누아의 손바닥 아래로 이상한 느낌이 났다.

쿵!

“아야….”

“뭐야, 왜 그래? 방금….”

배가 마치 누아의 손을 쳐내는 느낌이었다. 누아가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라핀은 얻어맞은 것처럼 배를 감싸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누아가 당황한 얼굴로 허둥대자, 라핀이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밥 먹고 누워서 그런지 살짝 배가 아프네요. 체했나 봐요.”

“…….”

라핀의 말에, 누아는 그에 멍하니 라핀의 배를 내려다봤다. 엄연히 말하면 앉아 있었지, 누워 있지 않았는데….

분명히, 방금 배가 손을 거부하듯 쿵 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났었다. 그건 배에 힘을 준다고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 입 짧고 조금 먹는 라핀이 보따리째로 챙겨온 음식을 빠르게 해치우는 걸 봤던지라,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들었다.

이건 마치 라핀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누아는 퍼뜩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거였다면 제가 알아채지 않았을까? 아까 섹스까지 했는데.

…아니야, 티가 안 나는 이들도 간혹 있다. 특히 라핀은 원체 마른 편이었고, 워낙 체구가 작았다. 아까 라핀의 나체를 마주했을 때는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못 살폈을 수도 있었다.

“라핀, 너 혹시….”

누아는 곧장 라핀에게 물어보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건지,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누아가 진중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자, 라핀의 얼굴 위로 궁금증이 떠올랐다. 라핀은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그러니까, 입맛이 유달리, 아니야, 그건 봤고. 혹시 최근에 속이 메스껍거나, 몸이 무겁다거나, 열이 났다거나, 뭐… 그런 증상 없었어?”

“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궁금하니까 물어보지. 대답해.”

누아가 언제 물어보는 걸 망설였냐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라핀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너무 뜬금없는 걸 물어보기도 했고.

라핀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그랬어요. 속이 메스꺼워서 잘 못 먹기도 했고, 아직도 몸살감기가 다 안 나았는지 근육통이 자주 오긴 해요….”

“몸살감기?”

“네, 저번에 계곡에 빠진 이후로 계속 아프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열이 안 떨어져서 몸이 무겁기도 했고요.”

“…….”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하….”

라핀이 독심술사라도 되냐는 듯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지만, 누아는 대답 대신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라핀을 보던 누아의 시선이 하릴없이 떨렸다. 라핀의 대답을 들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이어졌다.

라핀이 임신을 한 것 같다.

임신….

제가 라핀의 몸 안에 씨물을 뿌렸었고, 녀석이 임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임신이라는 생각이 드니 순수한 기쁨보다는 막막함부터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라핀이 임신이 가능한 몸인 줄 몰랐고 누아는 아이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라핀은 수컷에다가 토끼였다. 늑대의 아이를 뱄으니 어떤 종족이 나올지도 미지수였고, 멀쩡히 낳을 수 있는지도….

아니다. 이건 전부 다 핑계다.

그것보다 더 누아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라핀이 블란의 아이를 밴 건지, 제 아이를 밴 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최근 들어서는 저와 섹스를 많이 했지만, 당장 일주일 전에는 난교하면서 블란이 라핀의 보지에 대고 사정을 했으니 그의 아이일 가능성을 지울 수 없었다.

희박하긴 하지만, 몇몇 동물들은 임신 중에도 발정기가 오곤 했다. 발정기가 온 걸 보면 임신한 지 좀 된 것 같은데… 안정기는 지났나?

“하…, 씨발.”

“왜,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혼잣말이야.”

라핀이 겁을 먹자 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이 둔감한 토끼는 제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평할 리가 없었다.

너 임신한 것 같다고 알려줘야 하나?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알려야 할 것 같은데, 그랬다가 라핀이 또 도망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안 알려줘도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미리 아는 게 나으려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라핀이 제 아이를 품은 거면 좋을 텐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아이를 키워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준비도 하지 않았지만…, 라핀이 낳은 아이가 제 아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 아이인지 알아볼 수 있으려나? 블란과 저의 특징이 완전히 다르니 라핀과 붕어빵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는 쉬우려나?

누아가 다시 깊이 생각에 잠겼을 때, 라핀은 아까부터 생각해왔던 것을 물어볼 타이밍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이제 원래 집으로 돌아가요?”

“뭐? 집?”

“누아 님이 아까… 저녁 되면 돌아간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누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다.

원래 집이라…. 조금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임신한 라핀이 있기에는 이곳이 훨씬 더 안전하고 좋을 것 같았다. 안락하고 다른 늑대도 없고. 특히 돌아가면 블란을 마주할 수도 있었다. 블란에게는 라핀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가면 블란이랑 마주치게 될 텐데. 그래도 가고 싶어?”

“제가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셔서 물어본 건데요.”

“그럼 나중에 가자.”

“네?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누아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라핀은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누아는 한 늑대 무리의 대장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검은 늑대 무리를 이끌고 사냥을 나가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제가 늑대 소굴을 나온 지 꽤 됐으니, 그가 자리를 비운 것도 그쯤 됐을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되나? 무리 생활을 할 때 대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우두머리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무리는 극심한 혼란스러움을 느낄 터다. 잡히기 전 블란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도 그러한 내용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듯했다. 누아 대신 몬드가 우두머리 노릇을 해주고 있대도 한계가 있을 텐데.

라핀이 생각에 잠기자, 누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문제가 생겨도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네가 신경 쓸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렇게 가고 싶어?”

“아뇨! 안 가고 싶어요.”

라핀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라핀이 강하게 부정하자, 누아의 석고상처럼 단단하던 표정이 은은하게 풀렸다.

“블란 때문에 가기 싫지? 걔 영영 보기 싫지?”

“영영이요? 음, 그것도 그렇고….”

영영 보고 싶지 않은 수준은 아닌데…. 블란이 제게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더 만나기 꺼려지는 늑대는 따로 있었다.

저를 계곡에서 내던졌던, 그리고 도망갈 때 마주쳤던 두 늑대. 늑대 소굴에서 도망치게 해준 걸 생각하면 고마워해야겠지만, 저를 계곡에 던졌던 감각은 여전히 선명했다.

계곡에 내던졌던 것과 탈출하다가 잡혔을 때 저를 잡아먹으려고 한 것은 진짜 죽이려고 한 것이었다.

누아 또한 저를 죽일 뻔했었고, 그 이후에 저를 잡아먹겠다는 말을 밥 먹듯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부 윽박뿐이었던 것 같아 그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늑대 분들이 저보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서….”

“뭐?”

라핀이 표정을 구기며 누아의 부하 이야기를 하자, 누아의 표정이 대번 심각해졌다.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라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누아는 라핀의 양어깨를 붙잡고 저와 시선을 일직선으로 마주하도록 했다.

“누가 그딴 얘기를 했어?”

“…….”

난처했다. 누아가 제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말투며 표정이 꼭 저 대신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지 말하면 보복해버릴 기세였다.

라핀이 입술에 지퍼를 단 것처럼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누아가 멋대로 추측을 이었다.

“설마 내 부하들이 전부 몰려와서 그렇게 말했어? 너 세워두고? 이 새끼들이….”

“아뇨! 아뇨! 전부는 아니에요!”

“그럼 누구인데.”

라핀은 나름 그들을 지켜주려고 함구한 것이었지만, 말을 안 했다가는 관계없는 늑대들까지 머리채를 잡힐 분위기였다.

“그, 저번에 저 계곡에 던진… 그분들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어쩐지 고자질을 한 기분이 됐다.

그래도 털어놓고 보니 양심은 찔려도 속이 시원했다. 저는 안 말하려고 나름 노력했고, 그들이 제게 한 행동에 비하면 이 정도 고자질은 해도 되지 않을까. 라핀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하….”

누아가 이마를 짚었다. 몬드한테 뒤처리를 부탁하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정리했는지 모르겠다. 돌아가서 제대로 밟아주고 와야 하나?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죄가 먹이를 풀어준 것이라고, 그것 가지고 크게 처벌할 수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제가 도를 넘는 처분을 내릴까 봐 냉정히 몬드에게 넘긴 것이었고.

분명 그랬는데… 라핀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가 뻗쳤다. 어떻게 임신한 라핀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누아는 저도 도망친 라핀을 잡아 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열의를 불태웠으면서, 언제 그랬었냐는 듯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제 손으로 직접 그 둘을 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직접 처분을 할까.

누아가 미간에 패인 주름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자, 라핀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지금 그게 중요해? 그 새끼들이 너 다치게 한 것도 맞지?”

“네, 네? 다쳐요?”

라핀은 갑자기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이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빡이자, 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피 났었잖아. 네가 도망친 날에 분명 네 피 냄새가 났었어.”

뭔 소리지? 라핀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렇기에 갑자기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잠깐 생각하던 라핀은 뒤늦게 누아가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아 무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때 도망치다가 잡혀서 넘어졌었거든요. 그래서 손바닥이 좀 까졌었는데… 때리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요.”

“넘어졌었다고?!”

누아가 펄쩍 뛰며 눈을 흉흉하게 떴다. 아이를 가졌는데 넘어졌다니! 혹 큰일이 난 게 아닌가 싶지만, 방금 손으로 느꼈던 태동은 힘찼었다. 다행히 아이는 지킨 듯했다.

큰 문제는 없었던 듯해도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만약 잘못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라핀이 아이를 가진 게 달갑지 않다는 듯 이런저런 이유를 대놓고서는, 막상 아이를 잃을 뻔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을 받았다.

누아가 안색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반응하자, 라핀이 당황해서 고개를 빠르게 휘휘 저었다.

“아, 아뇨…, 그건 도망치는 절 잡느라 넘어진 거예요. 정말 그분들은….”

“라핀, 넌 아까부터 왜 자꾸 그놈들 편을 들어주는 거야?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는데.”

“편들어 주는 게 아닌데…. 그리고 큰일이 났을 수도 있지만, 안 그랬잖아요. 고작 넘어진 것뿐이에요….”

“…….”

라핀이 누아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우물 말했다. 어깨는 작게 움츠러들어 있었고 두 눈동자는 힐끗힐끗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아아…. 그에 누아는 치미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제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라핀을 괴롭힌 녀석들인데, 애꿎은 라핀에게 화를 내면 안 됐다.

라핀은 이제 아이를 가진 토끼였다. 라핀이 품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몰라도, 나쁜 영향이 갈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아는 애써 화제를 돌려보려 머리를 굴리다가, 아까 라핀의 멱살을 잡고 매트리스 위에 던졌던 것과 발정기가 온 라핀에게 마구잡이로 삽입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아…, 미친 새끼.”

“예?”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일단 자고…. 아니다, 약을 발라야…. 하, 씹. 이 집에는 약이 없잖아.”

누아는 죄책감에 욕설을 내뱉었다가, 그 말에 놀란 라핀을 보고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뒷구멍에 무리하게 삽입하기도 했고, 평소보다 길었던 정사였다. 라핀의 음부가 또 혹사당해서 퉁퉁 부었을 게 뻔한데, 이 집에선 활동을 잘 안 하다 보니 약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약을 가져다 놔야겠다. 라핀에게 필요한 게 또 뭐가 있지? 맞다, 혹시 모르니 감기약도 가져와야 하나? 그건 임신한 상태로 먹어도 되는 건가? 뭘 먹여야 하는 거지?

누아는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약을 가져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누아가 당장이라도 늑대 소굴로 돌아가 약을 가져올 기세로 몸을 일으키자, 라핀이 놀란 눈으로 누아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요?”

“약 가지러 집에 다녀오려고.”

“약이요? 갑자기 약은 왜 찾아요? 어, 어디 아파요?”

라핀이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며 말했다. 라핀은 누아가 아파서 약을 찾는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누아는 지금 라핀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황당함에 가득 찼다. 누아가 할 말을 잃었을 때, 라핀은 그걸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검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누아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되게 피곤해 보였는데…. 누아 님도 감기 걸렸어요?”

“…….”

라핀의 물음에 누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까 라핀이 저의 이마에 손을 댔을 때는 같지도 않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저를 기분 좋게 속이려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아는 라핀이 도망친 걸 알아챈 이후 그를 찾기 위해 일주일 동안 산을 동분서주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수염조차 정리할 여유도 없었고, 피곤함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까지 했었다.

그렇다고 한들, 늑대는 쉽게 아픈 생물이 아니었다. 특히 누아는 늑대 중에서도 월등하게 튼튼하고 강하여 잔병치레를 한 기억이 아주 어렸을 적을 빼고는 없었다. 평생에 아팠던 횟수를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리라.

그런 저를 걱정하는 저보다 작은 생물이 있다니.

황당하고, 하찮고, 귀엽고…. 누아가 할 말을 잃자 라핀은 무언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표정을 더 심각하게 굳히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혹시… 저한테 옮은 거 아닐까요? 이 집, 방이 두 개던데 제가 거기로….”

“아니야. 난 아프지도 않고, 어딜 간다고. 허락도 안 해줄 거야.”

라핀이 곧장 이라도 옆방으로 넘어갈 기세이기에, 누아는 단단히 라핀의 손목을 붙잡고 침대에 도로 앉혔다.

방금까지 제 걱정을 해주는 척하더니만 또 어디를 가려고. 설마 저한테 떨어지려고 저런 건가? 그만큼 라핀이 고단수이던가? 누아는 대번 심술 맞은 기분이 됐지만, 라핀은 같이 있는 것도 걱정된다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그러면 약은 왜 찾아요?”

“몰라서 묻는 거야? 네 약 찾는 거잖아.”

“저요?”

누아의 말에 라핀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토끼 같은데, 토끼 같은 짓을 잘한다.

너무나도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의외라는 반응에 누아는 괜한 멋쩍음을 느끼며 목 뒤를 긁적였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내가 좀… 섹스를 거칠게 했잖아. 그래서 약 발라주려는데, 이 집에 약이 없어서 그래.”

“아….”

라핀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얼굴을 홧홧하게 붉혔다. 둔한 토끼는 제가 누가, 어디에 바를 약을 찾고 있었던 건지 이제야 깨달은 눈치였다.

누아는 원체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검은 늑대 무리와 사냥을 나갈 때마저 의사소통에 차질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꼭 설명하게 만드는 놈들이 귀찮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라핀이 이렇게 멍청한 반응을 보일 땐 귀여웠다.

아무튼 라핀이 정말 제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누아가 라핀의 팔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자 라핀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이만 자요. 약이 급한 것도 아니고, 피곤하시잖아요.”

“…….”

누아는 라핀이 머뭇거리며 말하는 모습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야심한 밤은 누아의 활동 시간이었지만 라핀에게는 하루를 종료하는 시간이었다. 제가 자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매번 라핀을 안고 잤기 때문인지, 제가 피곤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일단 오늘은 라핀이 잘 시간이니, 재우고 내일 챙겨 오자.

“그래. 일단 자자.”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도망친 라핀을 잡아 왔고, 제가 맡았던 피 냄새가 크게 다친 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고…. 이 작은 몸에 아이를 품고 있는 것까지 알았다.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순순히 불을 끄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누아는 평소처럼 라핀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손을 아래로 내려 배를 만지작거렸다. 옷 너머로 만졌지만, 배를 만지니 라핀의 몸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여기에…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직접 배를 만지고 있자니,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까는 단순히 많이 먹어서 튀어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나와 라핀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예전에는 라핀을 토끼 농장 만드는 데 이용해서, 토끼를 낳으면 죄다 잡아먹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라핀이 제 아이를 낳는다면, 그것이 토끼라고 해도 예쁘게 키워주고 싶었다.

게다가… 늑대에게 반려란 평생의 짝이었다. 만약 라핀이 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제 반려가 된다면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늑대와 토끼 사이에 관념의 차이가 있다는 건 알지만, 누아는 그래도 작은 기대를 키워갔다.

***

밤에 라핀과 함께 잠들었던 누아는 일찌감치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리가 편안해서 더 자려면 잘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늦은 밤은 누아의 수면 시간도 아닐뿐더러 해야 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누아는 라핀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휘휘 흔들며 곤히 잠든 것을 확인했다. 잠시간 라핀을 묶어둘까 싶었지만, 라핀이 평소 잠들면 잘 안 깨어난다는 걸 알기에 놔두고 집 밖으로 나섰다.

해가 떨어진 겨울 산은 부쩍 온도가 낮아져 써늘했지만, 누아는 입꼬리를 빙긋 끌어올렸다. 당장 어제까지는 암울한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뭘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길 가다가 토실한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해도 놔줄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넘쳐났다.

누아가 늑대의 모습을 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늑대 소굴로 돌아오자, 동굴에 있던 몬드가 귀신을 본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억, 형니임!”

오랜만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 만에 조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몬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양 핼쑥해져 있었다.

몬드는 버선발로 헐레벌떡 뛰어나오더니, 급기야 손을 뻗어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누아의 얼굴을 더듬으려고 했다.

“제가 헛것을 보는 거 아니죠? 정말 돌아오신 거 맞죠?”

“헛것은 아닌데,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야.”

“네?”

몬드가 놀란 얼굴을 하더니 다급하게 누아의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격에 젖어 있던 몬드의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토끼를 못 잡으신 거예요?”

“뭐….”

누아가 어정쩡하게 말끝을 뭉뚱그렸다.

라핀을 찾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몬드에게는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지만, 이곳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괜히 제가 라핀을 잡았다고 말했다가 블란이 저를 역추적이라도 하면 라핀을 빼앗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 새끼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누아의 말에 몬드가 당장이라도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 울상을 지었다. 눈물 한번 보인 적 없는 놈이었는데, 그간 저 대신 역할을 맡은 것이 퍽 힘들었던 눈치다.

당분간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데. 좀 미안하네. 누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몬드를 내려다보자, 그가 눈에 띄게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한데 눈치가 보여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왜 저런 표정이야. 그렇게 힘들었나?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려나? 누아가 잠시 생각하고 있을 무렵, 몬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왜?”

“외람된 이야기지만, 블란 님 쪽도 별 소득이 없는 것 같은데…. 두 분이 못 찾을 정도면 그 토끼가 죽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몬드는 누아의 앞에서 라핀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퍽 조심스럽고 무서운 듯, 몸을 잘게 떨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라핀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누아와 블란은 다른 늑대들보다도 사냥감을 잡는 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데, 둘이 나서서 토끼 한 마리를 못 잡았다고 하니 믿기 힘들 것이다.

아무래도 이건 몬드한테는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었다. 누아는 몬드를 따로 부르려다가, 뒤늦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몬드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맞다, 내가 처리하라고 한 건 어떻게 했어?”

소즈와 베티 이야기였다. 라핀을 계곡에 빠트려 죽이려고 했던 것도 모자라 쫓아낸 두 녀석. 늑대 소굴로 돌아오자마자 이 얘기부터 하려고 했는데 몬드가 너무 불쌍하게 달려들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누아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묻자, 몬드 역시 대번 표정을 굳혔다. 잠깐 머뭇거리던 몬드는 누아만 들으라는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즈와 베티는 무리에서 방출하는 거로 정리했습니다.”

“방출?”

누아가 의외라는 목소리를 냈다.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는 종족이었다. 무리에서 방출이란 죽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저도 방출을 해버릴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몬드가 녀석들에게 그런 처벌을 내렸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녀석들의 죄명은 고작 먹잇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누아의 물음에 몬드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전에 사건도 있고… 또, 아무리 그냥 먹이라고 해도 누아 님이 곁에 두고 있던 토끼이지 않았습니까. 혹, 너무 과한 처분이었습니까? 다시 데려올까요?”

“아냐, 잘했어. 안 그래도 쫓아낼 생각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몬드가 아쉬움이 철철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직접 처분을 내리긴 했지만, 몬드는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하기야 꽤 오랫동안 늑대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아도 여태까지 함께한 동료를 방출하는 건 늘 힘들었다. 냉혈한이 아닌 이상, 동료를 방출하고 마음 편할 리가 없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서 돌아와서 몬드가 짊어진 마음의 짐을 덜어줘야겠다 싶지만, 별장에는 임신한 라핀이 있었다. 몬드에게는 미안해도 지금 제게는 임신한 라핀이 훨씬 더 중요했다.

“몬드, 이따가 할 얘기 있으니까 기다려.”

“할 이야기요? 음, 네.”

몬드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했던 동료를 퇴출한 것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누아가 또 뭔가를 부탁해올까 봐 불안한 낯빛이었다.

그런 몬드를 뒤로하고 누아는 집 안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나가기 전과 똑같았다. 블란 역시 나가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거실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놓았던 컵도, 널브러진 잡지도 전부 다 그대로 놓여 있었다.

누아는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가 구급상자를 챙기고 더 챙길 게 없나 주변을 둘러봤다. 예전에 라핀 먹으라고 챙겨뒀던 먹이 보따리를 챙길까 하다가, 괜히 눈에 띌 것 같아 그만뒀다. 먹이야 앞으로 제가 구해다 주면 되는 거니까.

누아는 간소하게 짐을 챙기고 방을 나오려다가, 다시 제 방을 돌아봤다.

어렸을 적부터의 추억이 있고,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제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이 이곳을 오는 마지막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이곳이 애틋하고 그립게 느껴졌다.

누아는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전등을 끄고 집 밖을 나섰다.

***

누아는 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몬드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고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니, 저 멀리 연기가 폴폴 올라오는 인가가 보였다. 12월이 끝나가는 때라 그런지 커다란 침엽수에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게 인상적이다.

두 늑대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서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몬드는 수다스러운 편이었는데, 누아가 굳이 먼 곳까지 데리고 나오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빳빳하게 긴장한 채였다.

먼 곳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누아는 이곳이면 안전하다 싶어 입을 열었다.

“라핀을 찾았어.”

“예? 그게 정말입니까?”

누아의 말에, 긴장으로 돌처럼 굳어 있던 몬드의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누아가 라핀을 못 찾아서 또 나갈 거라고 말했던 터라, 번복하고 돌아와 다시 우두머리 역할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 이야기면 좋았을까. 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 마저 말을 이었다.

“근데 임신을 했어.”

“네? 누, 누가요?”

“내가 했겠어?”

“…….”

누아가 묻자, 방금까지 환하게 만개했던 몬드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괴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오싹한 얼굴이 됐다.

“설마… 그 토끼가 임신했다는 말입니까?”

“응.”

누아가 표정에 미동도 없이 대답하자, 몬드는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안색이 나빠졌다. 누아와 블란이 라핀의 비밀을 알고 달려들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아, 아니, 그 녀석은 토끼이고…. 무엇보다 수컷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임신을 했다는 말인지…. 사실 암컷이기라도 했던 겁니까?”

“수컷은 맞는데…, 아무튼 좀 특이한 토끼였어. 그러니까 안 잡아먹고 곁에 두고 있던 거고.”

구태여 몬드에게 라핀의 비밀에 대해 전부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라핀이 임신을 했다는 것만 알리면 됐다.

누아의 한참 부족한 설명에 몬드는 말이 안 나오는지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컷 토끼가 늑대의 아이를 뱄다는 걸 이해하기 힘든지, 이상한 탄식 소리만 연달아 터트렸다.

“아니…. 허, 참…. 어떻게 형님 걸, 하아…. 그, 근데 그 임신…. 누아 님의 아이는 맞습니까?”

“…아마도.”

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제 아이인지, 블란의 아이인지 확신은 없었다. 그저 제 아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라핀이 품은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더라도 블란에게 넘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라핀이 가정을 꾸린다면 그건 저와 함께여야만 했다.

블란이 라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 아이일지도 모르니 무조건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블란이 라핀, 그리고 미래의 아이까지 마주치지 않게 해야 했다. 오늘은 그 정리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혹 다른 놈들이 나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토끼 찾으러 갔다고 해. 토끼는 죽은 것 같다고 말 흘려주고.”

“네? 왜 그렇게까지…. 살아 있다면서요?”

“내가 라핀을 만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블란이 날 미행해서라도 찾아올 거야. 그 새끼, 애들한테 반려라는 소리를 한 걸 보면 라핀을 반려로 삼을 생각인 것 같으니까.”

“아, 하긴 그렇죠….”

블란이 앞서 한차례 난리를 치고 갔던 터라, 몬드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아만 블란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늑대 종족은 모두 블란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놈 취급을 했다. 동맹 관계이지만 종족 간에 경쟁의식과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블란이 고상한 생김새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몬드는 블란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뭐든 이해할 기세였다. 누아가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몬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다 누아와 다시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그럼 아이를 낳으면, 그때 돌아오실 거죠?”

“그때는….”

누아가 생각에 잠겨 말끝을 흐렸다. 만약 라핀이 낳은 아이가 제 아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데려와도 될까.

부하들의 반발이 심할 것도 걱정되지만, 지금 가장 큰 걱정은 제 아이가 아니라 블란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거였다.

누아는 저의 복귀를 간절히 원하는 몬드를 위해 빈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끝내 그러지 못하고 회피했다.

“…아직은 몰라. 혹 토끼를 낳는다면 늑대가 득실득실한 곳에서 키워도 되는지도 의문이고. 무리에서 벗어나야 할 수도 있어.”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 아이가 맞아서 떳떳하게 데려올 수 있는 처지가 되더라도, 과연 토끼를 늑대 소굴에서 키워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하물며 라핀도 그런 위협을 받았으니 새끼라고 안 받을 리 없었다.

혹 제가 늑대들에게 악감정이라도 사서 라핀과 아이들에게 보복이 갈 수도 있으니까…. 제가 다치는 건 상관없지만, 라핀이나 아이가 다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누아의 대답에 몬드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며 수긍했다.

“그럼… 언제 돌아올 거라고 확신은 못 하시겠네요.”

“그래서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혹 내가 안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누아는 말끝을 흐리며 몬드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오늘 늑대 소굴로 돌아와서 할 일이 꽤 여럿 있었다. 라핀을 괴롭혔던 베티와 소즈에게 내린 처분을 확인하는 것과 라핀이 바를 약을 구해오는 것.

그리고… 오늘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용건.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두머리를 넘길 절차를 밟으려고.”

우두머리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

누아는 늑대 무리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적당했고, 가장 힘이 세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냥 능력이 탁월했다. 그래서인지 역대 우두머리들과 비교했을 때 충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조금 더 우두머리 자리에 있어도 괜찮겠지만, 다른 무리와 짝을 이루고 무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제 역할을 다른 늑대에게 물려줘야 했다.

누아는 라핀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무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핀을 제 짝으로 들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만에 결단을 내린 내용을 몬드에게 말하자, 몬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누아가 늦게 돌아올 줄만 알았지 아예 무리에서 나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몬드는 입술을 두어 번 벙긋거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빠르진 않지. 다들 이때쯤이면 짝을 구해서 나가잖아.”

“그렇지만…, 그래도요. 아니, 형님은 반려 구하는 데는 별 관심도 없어 보였잖아요. 그러니까 더 갑작스러운 것 같고….”

몬드는 어떻게든 잡고 싶은지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누아가 더 말해 보라며 잠잠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자, 몬드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우두머리 역할이 하기 싫은 거야?”

“아뇨,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제가 뭔데 그걸 가리나요.”

몬드가 그건 절대로 아니라며 온몸을 다 이용해 강하게 부정했다.

나이 순서대로 우두머리를 맡는 곳도 있지만, 누아가 몸담은 무리는 개개인의 능력도 따졌다. 그러니 이곳에서 우두머리 자리를 물려준다는 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과도 같았다.

몬드는 격하게 부정하다가 난처한 얼굴을 하며 누아에게 부탁했다.

“그렇지만 아직… 제가 우두머리를 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안 듭니다. 우두머리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형님 마음이지만, 준비가 될 때까지라도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아와 몬드는 그렇게 회포를 조금 더 풀다가,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몬드가 제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의외로 일이 잘 풀렸다. 우두머리 자리에서 당장 내려오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몬드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됐다. 일이 하나하나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

늑대 소굴에서 용무를 마치고 별장으로 돌아온 누아는 가지고 온 물건들을 대충 정리하고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라핀은 여전히 꿈나라에 있었다. 나가기 전에 묶어놓을까 고민했었는데, 고민한 게 허무해질 만큼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누아는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기온 떨어진 밤의 겨울 산을 돌아다니고 온 터라 라핀의 온도로 데워진 침대 속이 유난히 따듯하게 느껴졌다.

저를 등지고 누워 있는 라핀의 몸을 끌어안으려고 하는데, 라핀이 갑자기 뒤를 돌며 누아와 몸을 마주했다. 라핀은 기척에 잠이 깼는지 눈을 흐리멍덩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음…, 누아 님…?”

커튼도 쳐지고 불도 꺼져 있어서 주행성인 라핀의 눈에는 뵈는 것도 없을 텐데, 금방 누아를 알아챘다. 비몽사몽 할 텐데 곧장 저를 찾는 라핀의 모습이 좋았다.

“더 자.”

누아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라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가 슬슬 떠오를 시간이 다 돼가지만, 제 토끼는 잠이 많은 편이었다.

나름 더 재우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손바닥이 라핀의 머리에 닿으니 라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핀은 방금보다 더 잠이 깬 듯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

라핀의 손이 누아의 가슴팍에 닿았다. 라핀은 캄캄한 시야에 제 손이 어디에 있는지도, 거리감도 잘 모르는 듯 대담하게 누아의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라핀 쪽에서 먼저 부쩍 거리를 좁히자 누아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라핀은 특별한 의도 없이 다가온 것이었으나, 누아에게는 유혹처럼 느껴졌다.

당혹스러웠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누아가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있자 라핀이 조금 더 킁킁거리다가 몸을 뒤로 물렸다.

“겨울 냄새 나는데…. 밖에 나갔다 왔어요?”

“아, 응.”

누아는 라핀이 금방 다시 거리를 벌리는 게 아쉬웠다. 누아가 군침을 삼키곤 짧게 대답하자, 라핀이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얼굴을 마주 보려는 것 같은데, 아직 시야가 어둠에 적응이 안 돼 잘 안 보이는 눈치였다.

“이 밤에 어디를요?”

“약 가지러 잠깐 나갔다 왔어. 그리고 밤이라고 해봐야, 나한테는 한창 활동할 시간이야.”

“맞다, 그렇죠.”

라핀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은 일주일 동안 혼자 지냈다고 늑대의 습성을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아는 라핀을 다시 재우려고 했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라핀의 잠겨 있던 목소리도, 혼몽하던 두 눈도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누아는 라핀을 더 재우려는 것을 그만두고 말을 꺼냈다.

“잠 다 깼으면 약이나 바를래?”

“아아….”

어젯밤, 아랫도리에 약을 발라주려고 했던 것까지 이야기했던 터라, 라핀의 얼굴 위로 난처함이 드러났다.

라핀은 음부에 약을 발라야 한다는 걸 민망해하는 듯하면서도, 아프긴 아픈 듯 망설이고 있었다. 누아는 그 모습에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난 김에 바르자.”

“…….”

“다리 벌리고 있어.”

“네….”

라핀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덮고 있던 이불을 거뒀다.

하의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라 다리만 벌리면 됐지만, 라핀은 민망해하며 후드 집업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음부를 가리려 했다.

그 모습에 누아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숱하게 몸을 겹쳤는데, 아직도 음부 보이기를 부끄러워하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라핀과는 아직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앞으로 함께 살고 아이도 키우려면 이 정도는 익숙해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누아는 아까 정리했던 구급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침대에 앉은 누아는 라핀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게 하고 양 허벅다리를 잡아 벌리게 했다.

누아가 라핀의 다리를 스트레칭할 때처럼 완전히 벌리게 하자, 라핀이 허겁지겁 누아의 손등을 제 손으로 감싸며 저지했다.

“이, 이렇게까지 벌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약만 바르면 되는 건데….”

“상태를 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워낙 좁은 부위라 이렇게 벌려야 보인다고.”

누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며 라핀의 음부를 내려다봤다. 사실 라핀의 말대로 약만 바르면 되는 거지만,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보지의 상태는…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척 봐도 혹사당해 퉁퉁 부어 있었다. 살짝 벌려 보니, 입구는 살짝 벌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누아가 작게 탄식을 흘렸다.

“하….”

타이밍도 안 좋지. 왜 하필이면 임신 기간에 발정기가 오느냐고.

그거에 눈 뒤집혀 달려든 저에게도 잘못이 있긴 했지만, 라핀이 그렇게 나오면 누구든 불가항력일 것이다. 너무 유혹적이었으니까.

누아가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보지를 오랜 시간 들여다보자, 라핀이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거, 거기 그만 봐요….”

“왜, 약 발라야 한다니까.”

누아는 이유를 대가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보지 상태를 진심으로 샅샅이 살피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말… 시선을 떼기 힘든 부위였다.

몸을 겹칠 때마다 들여다봤는데도 늘 신기하고 예뻤다. 털도 안 났으면서 안쪽은 뭐 이렇게 야한 빛을 띠고 있는지…. 이걸 제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꼭꼭 숨겨 두었어야 했는데, 라핀을 단순히 잡아먹을 먹잇감으로만 생각했던 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누아가 과거의 일을 통탄하고 있는데, 눈앞의 보지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누아는 그에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라핀, 여기가 젖는데.”

투명한 애액으로 젖었을 뿐만 아니라, 입구가 뻐끔거리고 있었다. 성욕을 느낄 때 일어나는 가장 흔한 변화였다.

저도 라핀의 음부를 보며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긴 했다만, 라핀도 같은 생각일 줄은 몰랐다.

일이 흥미롭게 흘러갔다. 누아가 놀리듯 말하자 라핀이 허벅다리에 힘을 주며 다리를 모으려 들었다.

“아, 안 그랬어요…!”

“거짓말.”

누아는 라핀의 버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보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을 밀어 넣고 갉작이니, 안쪽에서 찔꺽대는 소리가 났다. 별다른 애무도 하지 않았는데 보지는 안쪽부터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젖었으면서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몸에 물어보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필사적으로 하는 모습이 가여우면서도 귀여웠다.

누아가 빈정거리며 라핀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라핀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참고 있었다.

“흐, 으으…. 하지, 마세요….”

“…….”

누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욕구를 참았다. 당장이라도 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라핀이 임신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선 안 됐다.

박으면 안 되겠지.

잠깐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누아는 낮게 숨을 내쉬며 라핀의 허벅다리를 고정하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아무런 성욕도 못 느꼈던 척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핀, 네가 내 무릎에 엎드리는 게 낫겠다.”

“…네?”

“이 자세로 약을 바르는 건 안 되겠어.”

“아, 아까는 상태를 봐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는데, 네가 너무 부끄러워하잖아. 시야에 내가 안 보이면 보지도 안 젖지 않겠어?”

“…….”

누아가 덤덤하게 말하며 구급상자를 뒤적거리자, 라핀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누아의 시선이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는지 라핀은 단번에 거절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구급상자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누아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라핀이 머리 굴리는 소리 같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누아가 연고 약을 꺼내자 라핀은 벌어져 있던 두 다리를 다소곳하게 모으며 물었다.

“정말 약만 바를 거죠?”

“그럼 또 뭘 하겠어.”

“그게….”

누아가 무안할 정도로 덤덤한 투로 역으로 묻자, 라핀이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더 깊게 묻기에는 부끄러운 눈치였다.

라핀은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누아에게 다가왔다. 보지가 젖으면서 남성기도 발기했는지 후드 집업 앞쪽을 애처롭게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는 채였다. 굳이 그렇게 잡아당기지 않아도 후드 집업 기장이 길어서 주요 부위가 덮어지는데, 어떻게든 발기한 걸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애석하게도 다 티가 났다.

누아는 옷을 확 들춰버리고 싶은 변태 같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애써 억누르고 라핀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으며 가까이 이끌었다.

“더 가까이 와.”

누아는 라핀을 가벼운 인형처럼 덜렁 들고 자세를 제대로 잡도록 이끌었다. 앉아 있는 제 무릎 위에 배를 대고 엎드리게 하자 라핀은 살짝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됐다.

누아는 봉긋 드러난 라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엉덩이가 예뻐서,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

손이 닿자마자 움찔, 라핀의 몸이 떨렸다. 마치 예기치 못한 접촉에 깜짝 놀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약을 바른다고 했으니 엉덩이를 만진 정도는 파렴치한 짓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누아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뒤늦게 라핀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엉덩이에 긴장이 뻣뻣하게 들어간 것이 손바닥 너머로 느껴졌고, 짧고 둥근 꼬리도 삐쭉 털이 서 있는 채였다. 라핀은 누아를 의식하지 않으려 누웠는데 오히려 보이는 게 없으니 더 긴장한 눈치였다. 라핀이 이렇게 긴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핀, 부끄러우면 눈 감고 있어.”

“…….”

라핀은 대답 없이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누아의 시야에서는 동그란 뒤통수만 보여서 그가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는 보이지 않았다.

누아는 라핀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이유로 제 무릎 위에 엎드리도록 했지만, 사실 그리 선량한 이유가 아니었다. 제가 라핀의 야한 보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성욕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 자세는, 또 이것대로 좀… 난감했다.

라핀이 제 몸에 엎드려 있는 것도 그렇지만, 라핀은 보지뿐만 아니라 엉덩이까지 예쁘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일전에는 이 엉덩이에 좆을 문대며 자위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누아는 욕망이 들끓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손가락 끝에 연고를 짰다. 어서 약이나 발라주고, 혼자 화장실에 가서 자위하든 해야겠다.

누아가 보지에 손가락을 넣고 꼼꼼히 바르자, 약이 녹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라핀의 안에서 애액이 더 흘러넘친 것인지 좀 전보다 더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찌걱, 찌걱….

“흐, 으읏, 으….”

젖은 소리뿐만 아니라 라핀이 신음을 꾹꾹 눌러 참는 소리를 내니 방 안에 열기가 삽시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누아는 남몰래 혀를 입술로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약을 발라주겠다고 한 것도, 엉덩이가 보이도록 엎드리게 한 것도 모두 누아가 자초한 것이었다. 전부 제가 벌인 일이라는 걸 아는데, 어쩐지 신이 제게 인내심 테스트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버티기 힘든 건 라핀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쑤시는 누아의 손놀림이 점점 음탕해지고 있었다. 분명 약을 발라준다고 했었는데, 얼마나 더 바를 셈인지 이전에 약 발라줄 때와 느낌이 달랐다.

동물적 감이 위험을 감지했다. 라핀이 이만하면 된 것 같다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보지를 들쑤시던 손가락이 두어 개로 늘어났다.

“아흐윽…!”

누아가 보지에 삽입한 검지와 중지를 벌리니 보지가 좌우로 길게 벌어졌다. 마치 좆을 쑤시기 전에 내벽을 늘리는 행위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라핀은 다급하게 손을 뒤로 뻗어, 누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누, 누아 님….”

“…….”

라핀이 다급하게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누아와 두 눈을 마주하고 몸을 주춤했다. 누아가 서슬 퍼런 눈으로 라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라핀은 제 배에 문질러지는 딱딱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말았다. 누아의 발기한 성기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약 바르는 거 말고 다른 할 일 있냐는 듯 시치미를 떼더니만, 얼마나 지났다고 그렇고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라핀은 누아가 마치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라핀은 긴장감에 목울대를 출렁이며 머리를 굴렸다. 라핀은 누아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며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잠시, 만, 으읏, 아…!”

“…….”

그렇지만 누아는 한쪽 손으로 라핀의 등허리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말도 없이 보지 안쪽을 거세게 들쑤셨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 신음에 삼켜졌다. 라핀은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깨물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한쪽 손으로는 안쪽을 들쑤시는 누아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애꿎은 시트를 구겼다. 고작 누아가 제 등허리를 누르고 있을 뿐인데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두어 개가 안을 들쑤시는 것인데도, 좆질 당하는 기분이었다. 누아의 손가락이 새삼스럽게 너무 굵고 길었다.

라핀이 헐떡거리는 것밖에 못 하던 중, 보지 입구에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올 것처럼 문질러졌다. 이러다 정말 손가락 세 개는 들어올 판이라, 라핀은 애써 다물고 있던 입을 벌렸다.

“흐, 윽… 야, 약 바르, 는, 거라면서요….”

“약 바르는 거야.”

누아는 라핀을 바보로 아는 것인지 뻔뻔한 소리를 하며 안쪽을 쑤시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약지가 들어올 틈을 기다리는 듯 벌어진 보지 입구를 매만지는 것도 여전했다.

“그, 그럼, 손가락은 왜 자꾸… 느, 늘리는데요.”

“꼼꼼히 발라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 아으흣…!”

손가락의 개수를 늘리는 것과 꼼꼼히 바르는 것의 상관성이 무어란 말인가. 라핀이 반박하려고 했지만, 안쪽에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오면서 말이 삼켜졌다.

찌걱, 찔걱….

손가락 세 개가 안쪽을 헤집고 다닐 때마다 난잡한 소리가 방에 울렸다. 무법지대처럼 아무렇게나 들쑤시는 것 같은데, 누아의 손끝은 라핀의 쾌락점을 예리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물이 자꾸만 흘렀다.

“흐으, 읏, 하아….”

빼라고 해야 하는데, 그가 예민한 곳을 찌를 때마다 라핀의 엉덩이가 의지와 달리 들썩거렸다. 마치 더 깊게 박아달라는 것처럼. 더 해달라는 것처럼 야하게 허리를 들썩였다.

앞보지에서는 녹은 약과 애액이 가득 차 누아의 손을 타고 투명한 물이 툭툭 떨어졌고, 라핀의 남성기 끝에서는 몽글몽글 쿠퍼액이 맺혀 후드 집업 앞쪽을 적셨다.

안쪽을 갉작대는 손가락에서 벗어나려 몸을 몇 번 들썩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팔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다. 라핀이 헐떡거리며 누아의 몸에 기대고 있을 때, 보지를 쑤시던 손가락 세 개가 쑥 빠져나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꽉 찼던 압박감이 대번 사라지니 공허감이 몸을 감쌌다.

이제 약 다 바른 건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었다. 라핀도 사정하기 전에 끝났으니, 어디 가서 혼자 해결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라핀의 등허리를 누르고 있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손 치우는 걸 잊은 건가? 라핀은 조금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이제 그만… 놔주세요.”

“…….”

“…누아 님?”

라핀이 의아하게 다시 뒤돌아봤으나, 누아는 제 젖은 손을 바라본 채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왜 대답이 없어? 라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때, 누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뒷구멍에도 약 발라야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침전물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뒤, 뒷구멍? 물어보기도 전에 누아가 또 손에 연고를 짜기에, 라핀은 누아의 손목을 잡고 있던 것을 놓고 허겁지겁 뒷구멍 위를 손으로 가렸다.

“네? 거, 거긴 괘, 괜찮은데요…?”

“아니지, 거기에도 박았잖아. 바르는 김에 바르면… 하, 좋지.”

누아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놈 같았다. 말로는 약 바르면 좋다고 회유하고 있으면서, 표정이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뭔 일을 칠 것같이 스산했다.

“손 치워 봐.”

“아니, 저…. 여, 여기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아, 안 아파요….”

라핀은 양손을 다 동원해 엉덩이를 가렸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엉덩이라도 가려 보자는 마음이었다.

누아가 불만스럽게 라핀의 손을 치워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치워지기가 무섭게 라핀이 다시 엉덩이를 손으로 가리자, 누아가 힘을 실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핀.”

“저, 정말 안 아프다니까요…!”

“고집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야.”

누아가 다그치듯 하는 말에 라핀은 한없이 억울해졌다.

누가 봐도 약을 발라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쪽은 누아였다. 라핀은 당신이야말로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웬만한 말로는 이길 수가 없는 늑대라는 걸 알기에 반박도 나오지 않았다.

라핀이 골똘히 머리를 굴리며 누아를 설득할 만한 방안을 고민하는데, 누아가 갑자기 라핀의 손등을 쳐냈다.

“아!”

아픈 건 아니고 따끔한 수준이었지만, 놀라게 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라핀이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자 누아가 그 손을 치워내고 뒷구멍에 젖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풀어주지 않았음에도 약 때문인지 손가락이 단번에 매끈하게 뒷구멍으로 진입했다.

“흐으읍….”

라핀은 뒷구멍으로는 성교한 적이 몇 번 없던 터라, 앞보지에 비하면 흥분을 덜 느꼈었다. 스스로 젖는 부위가 아니라서 아프게만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한껏 달아오른 상태라 그런지 저릿한 쾌감만이 느껴졌다. 게다가 앞을 만질 때는 전날의 격렬한 정사 때문인지 조금 아팠는데, 뒷구멍으로는 금방 그만둬서 그런지 아프지도 않았다.

라핀은 누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제 몸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저번에는 섹스하다 말고 오줌… 을 싸질 않나, 지금은 뒷구멍으로 보지보다 더한 쾌감을 느끼지 않나. 죄다 라핀이 생각하는 정상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누아의 수려한 손가락이 애널 안쪽을 자극하니 통통하게 발기한 라핀의 성기가 꺼떡거렸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지만, 뒷구멍을 자극하는 거로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누아의 앞에서는 더더욱.

라핀은 아까 쳐내진 손으로, 앞으로 기어가려 아득바득 시트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저, 이거, 하아, 시, 싫…. 흣…!”

쾌감이 일 초마다 부피를 몇 배씩 키우며 머리를 잠식했다. 어찌할 방안이 없어 애꿎은 매트리스를 긁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반항의 전부였다.

쿵, 쿵, 쿵….

라핀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이 하얗고 까맣게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아…, 흑!”

어찌할 방도 없이 바짝 발기해 있던 라핀의 자지 끝에서 묽은 정액이 픽 튀었다.

자지에서 나온 정액은 그대로 침대 시트와 누아의 바지를 더럽혔다. 누아의 허벅지와 침대 시트 위로 점성 있는 정액이 길게 늘어졌다.

바지가 젖은 것을 누아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엉덩이를 내보인 것보다 더 민망했다. 고작 사정 하나를 못 참아서….

숨고 싶은 마음에 라핀이 침대 시트에 얼굴을 콱 묻어버리자,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핀….”

허리를 짓누르던 손으로 귓가를 매만졌다. 검지와 엄지가 귓불을 만지자 오싹함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잘 느끼네.”

약만 바른 건데.

누아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뒷구멍을 쑤시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보지며 뒷구멍이며 갑작스러운 허전함에 움찔 조여졌다. 이제 제 배를 문지르고 있는 누아의 성기가 제 몸을 꿰뚫는 것일까?

아까는 보지를, 지금은 뒷구멍을…. 어디로 삽입을 하려는 거지? 앞은 아직 좀 부어 있고, 두 쪽 다 약도 방금 막 발랐는데…. 무리인데….

다음에 이어질 행위를 예측한 라핀이 고민에 잠기는데, 누아가 라핀의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 얼결에 그와 똑바로 마주하게 된 일촉즉발의 상황에 라핀의 심장이 쿵, 쿵, 쿵 가쁘게 뛰었다.

“쉬어.”

“……?”

그렇지만 누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라핀은 제가 말을 잘못 들은 건가 했지만, 누아는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라핀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새, 누아는 유유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려서일까, 찬 공기가 흘러들어오며 후끈 달아 있던 방의 열기를 식혔다.

“…뭐야?”

라핀이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들쑤시더니만 저렇게 나간다고?

이러는 건 누아답지 않을뿐더러, 게다가… 방금 스쳐 지나가듯 본 누아의 앞섶은 크게 부풀어 있었다. 하의에 억눌려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제 배를 쿡쿡 찌르던 크기와 경도를 생각했을 때 완전히 발기한 상태 같았다.

안 그래도 인내심 없는 누아가 저 상태로 그만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

라핀이 깊게 숨을 내뱉었다.

누아가 그만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중간하게 남아있는 몸의 열기에 불쾌감을 느꼈다.

라핀은 힘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막 깊게 잤다가 깨어난 참이라 잠도 오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