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토끼뜀
“우으으….”
라핀은 희미하게 정신이 들자마자 옅은 신음을 흘렸다. 몸은 돌덩이에 눌린 것처럼 무거웠고,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렸는지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어제 이후로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열과 몸살 기운이 있었다. 멀쩡한 몸으로 시도해도 성공할지 불분명한데 이런 몸으로 어떻게 탈출하지? 어제까지만 해도 신이 저를 도우나 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자신감이 사라졌다.
라핀은 흐린 정신으로 눈을 떴다가, 뒤늦게 몸이 왜 이렇게 무거웠는지 알아차렸다.
“아…. 누아 님…. 일어나세요.”
제가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누아가 제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도 마주 보고 누운 채로.
누아는 야행성인지라 라핀이 자는 시간에는 저를 안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라핀이 깨워도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라핀은 누아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어내려고 했으나, 위에서 보면 제 몸이 가려질 정도로 몸집이 커다란 늑대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단잠을 깨우는 손길이 거슬렸는지 라핀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으음…. 더… 자.”
“읏….”
라핀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귓가의 솜털을 스치는 누아의 목소리가 유달리 자극적이었다. 누아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에 비해 매우 낮아서 울림도 강했다.
이놈의 늑대는 왜 자다 일어난 목소리조차도 자극적인지…. 라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의 목소리와 숨결을 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또 다른 난관이 라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타구니를 비비는 기둥이 느껴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위치상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누아의 성기였다.
그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성기가 단단하게 발기한 채였다. 완전히 발기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누, 누아 님, 좀 비켜주세요…. 저 무거워요….”
“…….”
“으, 누아 니임….”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라핀은 힘이 빠졌고, 누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 꼴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았다. 라핀은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리다가 힘으로 밀어내는 것을 끝내 포기해버렸다,
“도대체 왜 안 일어나는 거야….”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무거운데.
라핀은 체념하고 누워 있다가, 문득 그를 간지럽히면 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고 있더라도 간지럼은 탈 테니까.
라핀은 숙면 중인 누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그의 허리에 손을 얹고 간지럽혔다. 그렇지만 기대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간지럼도 안 타나? 평소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간지럼을 안 타는 쪽이 어울리긴 한다만….
어느새 라핀은 누아를 깨우려는 목적보다 그를 간지럽히고 싶다는 목적이 더 커졌다. 원래 토끼는 종족 특성상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의 허리에 손을 대는 것마저도 조심스럽던 손길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옷 너머를 간지럽히던 손은 어느새 누아의 상의 아래로 들어가 맨 허리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누아의 허리는 근육 때문인지 유달리 단단했다. 근육이 지나치게 많아서 무감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누아가 한숨을 쉬었다.
“뭐 하는데….”
“깨셨어요?”
누아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라핀이 금방 화색을 띠었다. 라핀의 돌변한 표정에 누아가 잠결에도 황당함이 드러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야하게 만져대는데, 안 깨겠어?”
“…네?”
“아픈 줄 알고 내버려 뒀더니만… 다 나았다고 이러는 거야?”
누아가 말하면서 하반신을 더욱 바짝 맞붙였다.
몰랐는데, 아까부터 제 사타구니를 쿡쿡 누르던 누아의 성기는 좀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져 있었다. 남사스러워서 얼굴에 피가 몰렸다.
“그, 그게 아니라아…, 가, 간지럽힌 거예요…!”
“이게 간지럽힌 거라고?”
“네! 그, 그리고 저 아직 아파요! 저 아직 열도 나고, 땀도 나고….”
라핀이 믿어 달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 아픈 척 연기를 해보였는데, 불리한 상황이 되니 아프다고 열심히 둘러대게 됐다.
라핀이 쫑알쫑알 변명하자 누아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호박색 눈이 반쯤 사라지면서, 그는 말없이 라핀의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힉…!”
갑작스러운 접촉에 라핀이 몸을 움츠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누아의 손은 차가운 편이 아니었으나, 라핀이 열병을 앓고 있는 탓에 차갑게 느껴졌다.
라핀이 본능적으로 손길을 피하려 몸을 뒤틀었지만 누아에게 짓눌린 몸으로 도망쳐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결국 누아에게 잡힌 라핀은 그대로 그에게 맨 허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또 성교로 흘러가는 건가? 라핀이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으나 의외로 허리에 닿는 손길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아힛, 힉! 아, 간지러워요!”
누아는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아예 대놓고 손가락 끝을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며 간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라핀은 조건 반사처럼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싶지 않은데, 간지러워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라핀이 천진하게 웃는 모습에 누아의 시선이 단단히 고정됐다.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라핀이 기진맥진하며 헐떡거릴 때가 되어서야, 누아는 간지럼을 멈추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손만 댔는데 간지럽대.”
“하, 하아, 손만 댄 게 아니라 간지럽혔잖아요….”
“내가 그랬나?”
라핀은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로 울 것처럼 말했으나, 누아는 시치미를 뚝 뗐다. 방금까지 열성적으로 괴롭히던 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라핀이 황당해하고 있을 때, 누아는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가슴 만질 때는 간지럼 안타던데. 부분적으로 간지럼을 타는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지. 라핀이 되묻자, 누아가 보란 듯이 옷 너머로 유두를 콱 꼬집었다. 옷 너머로 있음에도 정확히 돌기를 쥐어 비트는 손길에 라핀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흣…!”
“…….”
누아는 라핀의 그런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라핀이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고 멀쩡한 대화를 쭉 이어 가고 싶으면서도, 라핀이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추악한 음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누아는 이러다가 또 이성을 잃고 덮치는 게 아닌가 싶어 이제 라핀을 그만 놀려야 한다고 욕구를 꾹꾹 눌렀다. 라핀은 환자였고, 앞으로는 막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 입은 한껏 빈정대는 소리를 냈다.
“정말 가슴은 간지럼을 안 타나 봐?”
“아으흣, 이건, 꼬집는 거잖아요…!”
아까는 간지러워서 웃던 라핀이 이제는 유두를 괴롭히는 손길에 울먹거렸다.
그 모습에 누아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였다. 라핀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것을 보고는 긴장감으로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당장이라도 섹스로 이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라핀은 다급하게 누아의 손목을 붙잡으며 저지했다.
“저, 정말 아직 아파요….”
“…….”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요….”
라핀은 누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조심조심 그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끌어내렸다. 다행히 누아는 순순히 손을 내렸다.
라핀은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 외출하신다면서요….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요?”
“아.”
누아는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얼빠진 얼굴을 했다.
뭐야…. 전날 밤까지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행사라면서 욕지거리를 하더니만, 잊어버린 걸까? 설마 시간이 지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라핀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누아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귀찮은데, 가지 말까.”
“네?!”
라핀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누아가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놀라? 뭔 쓸데없는 생각 한 거 아니지?”
“아니, 놀란 게 아니라요…. 빠질 수 없는 행사라면서요?”
라핀은 어제 온종일, 누아가 외출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어제 새벽에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탈출 시뮬레이션을 돌렸었다. 그런데 그가 나가지 않는다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랐다.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온 기회인데. 이런 식으로 놓칠 순 없었다.
라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아가 라핀에게 잡힌 손에 힘을 바짝 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누아와 라핀의 손은 덩치만큼이나 크기 차이가 월등히 났다. 그의 손을 맞잡고 있으니 라핀의 손이 아기 손처럼 보일 정도로 쏙 가려졌다.
손에 피 안 통하게 왜 이러나. 라핀이 손을 힐끔힐끔 내려다보고 있을 때, 누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떨어지기 싫어서….”
“네? 뭐라고요?”
공기에 흩어질 듯 작은 목소리였다. 라핀에게는 그가 입술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라핀이 손에서 시선을 떼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뭐긴, 미친 거지.”
누아는 갑자기 손을 내치듯 놓더니, 라핀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몸을 비켜줬다.
그는 열심히 깨워도 잘 못 일어날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고는 믿기지 않게 멀쩡한 얼굴과 몸짓으로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리고는 라핀을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저녁에 올 거니까, 얌전히 집 지키고 있어.”
“집을 지키라고요? 제가 무슨 수로 늑대 집을 지켜요.”
“아니….”
라핀의 물음에 누아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는 듯 웃음을 흘린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얘기야. 가령 도망이라든지….”
“아, 안 해요!”
라핀은 누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라핀이 강하게 부정하자 누아의 두 눈이 대번 가늘어졌다. 의심이 물씬 묻어나는 눈초리였지만, 그는 잠시간 쏘아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한숨처럼 말했다.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
라핀이 황당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가 뭐가 안전해?
누아 입장에서는 관대하게 저를 살려주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식사를 챙겨주는 것에 더불어 다른 포식자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누아가 제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안전하다고 하기에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 오갔고, 늑대 둘의 싸움에 혹사당하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복상사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누아가 곁에 있으면 블란이 저를 못 건드리긴 하지만, 누아가 백날 곁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늑대 둘이 화해를 하거나 제게 관심을 끄지 않는 이상 둘 사이에서 괴로운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겠지.
그러니 그의 이곳에 남아 있으라는 듯한 누아의 말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탈출이 멀지 않았다. 라핀은 남몰래 생각하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
누아가 나간 후, 라핀은 빠르게 탈출할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옷과 속옷은 일찌감치 빼앗겨 실종된 지 오래였고 챙길 짐도 없었다. 라핀은 휘휘 고개를 저으며 놓고 간 게 없나 찾다가, 장식품이 들어 있는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누아의 방에는 값나가 보이는 보석이 꽤 있었다. 블란도 아닌 누아가 휘황찬란한 보석을 장신구로 사용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고, 사냥 후 전리품으로 받아온 것처럼 보였다.
“챙겨 갈까….”
라핀은 진열대 안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보석을 훔쳐 달아나면 적어도 이번 겨울에는 호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이번 겨울이 뭐냐, 몇 해는 사치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야.”
그렇지만 라핀은 금방 생각을 접었다. 도둑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담력이 세지도 않을뿐더러, 토끼가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돌면 도로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대신 라핀은 먹이 보따리에서 도토리 몇 개를 주머니에 챙겼다. 다른 건 양심상 못 챙기겠으니 먹을 거라도 챙겨야겠다 싶었다.
점심이 되자 라핀은 조용한 틈을 타 방문을 살짝 열었다. 좁은 시야로 보이는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늑대들이 자는 시간이고 제가 일부러 그런 시간에 도망치기로 했으니까.
라핀이 안심하고 문을 더 여는데, 커다란 인영이 제 앞을 가렸다.
“어….”
설마… 벌써 들킨 거야?
라핀이 또르르 시선을 위로 올리자, 블란이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뒤덮었다. 라핀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을 때,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라핀, 오랜만이네.”
“아…, 브, 블란 님.”
라핀이 당황스러움에 말을 더듬거리며 마주했다.
해사하게 웃는 것으로 보아 블란은 제가 도망가려고 했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들키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쿵쿵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잦아들지를 않았고 머릿속은 온갖 걱정으로 뒤덮였다.
누아의 말로는 블란도 같이 제사를 한다고 했는데, 왜 남아 있는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라핀이 고장 난 기계처럼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자, 블란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아.”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까 몸은 괜찮아?”
난교를 한 날 이후, 블란과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를 며칠 동안 앓게 한 주범인 누아와 블란의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다. 블란이 제 안부를 묻는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마치 ‘잘 잤어?’ 하고 묻는 투다.
지금 제가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며칠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면 좀 더… 걱정해야 하지 않나?
라핀은 그와 깊게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럭저럭….”
“괜찮은지 보고 싶었는데, 누아가 사냥도 안 나가고 방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서 물어보질 못했어. 참나, 그 새끼가 끼지만 않았어도 좋았는데….”
“…….”
좋았다고?
누아가 끼기 전에도 충분히 안 좋은 상황이었다. 라핀이 노팅의 후유증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 멋대로 침범해서 저를 협박한 거였다. 어떻게 그런 상황을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라핀이 황당함에 말을 잃은 동안, 블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웬일로 나왔어?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
그럴 리가 있나….
라핀은 그런 거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블란의 기분을 건드려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왕이면 저렇게 기분 좋은 채로 쭉 방심해 있기를 바랐다. 라핀은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펴며 대답했다.
“배고파서요.”
“누아가 음식 챙겨줬다고 하지 않았어?”
블란이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힘만 좋은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라핀은 그가 자세히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대답했다.
“아…, 챙겨는 주셨는데, 저번에 다 먹었거든요.”
“참나. 그 새끼는 재깍재깍 안 챙겨 오고 뭘 하는 거야.”
라핀은 거짓말하는 게 양심 찔려 시선을 회피한 것이었으나, 블란의 눈에는 그 모습이 엄청나게 처연해 보였다.
게다가 라핀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작고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더 야위어 보이기까지 했다. 라핀이 살이 빠진 이유는 근래 지독하게 앓아누운 탓이었으나, 블란은 라핀이 살이 빠진 이유가 누아 탓이라고 생각했다.
“라핀, 내가 그 새끼가 준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걸로 챙겨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네….”
라핀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무리 맛있는 걸 가져와도 제가 먹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집을 나갈 거니까.
라핀은 맛있는 먹이를 챙겨 오든 뭐든 필요 없으니 나가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듣기 좋은 말로 순화했다.
“그나저나 오늘 의식인지, 뭔지 한다던데. 블란 님은 안 가세요? 누아 님은 훨씬 전에 나가셨는데….”
“아아, 가야 해. 출발하기 전에 너 보려고 잠깐 들렀어.”
“아하….”
“그런데 너 보니까 더 가기 싫다. 쨀까?”
“…….”
블란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지독하게 거절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누아도 아까 저런 소리를 하던데 다들 지독하게 가기 싫은 눈치다.
믿지도 않는 걸 억지로 하려니 가기 싫은 건 이해하지만, 라핀은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라핀이 정색하지 않으려 바들바들 입꼬리를 떠는데 블란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농담이야. 나도 빠지고는 싶은데, 그랬다가는 길길이 날뛸 놈이 한둘이 아니라. 오는 길에 먹을 거 있으면 챙겨 올게.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당근이요.”
라핀이 골똘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당근은 이 근처에 별로 없는지 누아도 많이 못 구해왔었다. 구하기 힘든 만큼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라핀이 나름 전략적으로 대답하자, 블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같은 거 먹고 싶어 하네. 귀엽게.”
“…아무튼 부탁드려요.”
당근이 나 같다니. 눈코입도 안 달린 당근 같다고 하는 게 영 찜찜했지만, 토끼 하면 당근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라 따질 수가 없었다.
라핀이 힘없이 대답하자, 누아가 갑자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뽀뽀.”
“…네?”
“입술에 뽀뽀해주면 가져다줄게.”
블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말에 라핀은 일순간 뽀뽀의 정의를 다시 떠올렸다.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블란의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을 바라봤다가 대번 얼굴을 붉혔다.
“그, 그걸 제가 왜 해야 되는데요?”
“나도 받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
“배고프다면서. 얼른.”
“…….”
라핀이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당근이고 뭐고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블란을 어서 쫓아내야 했다. 게다가 그가 평소 요구하는 것치고 뽀뽀는 양호한 수준이기도 했고.
라핀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 굽혀주세요.”
“응.”
키 차이 때문에 입술을 맞추려면 까치발을 들어야 할 수준이었다. 라핀이 수치심을 무릅쓰고 부탁하자, 블란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순순히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왕 해줄 거라면 눈이라도 감아주면 좋을 텐데, 푸른 눈은 부담스럽게 라핀을 코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데 눈도 감아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냥 제가 눈을 감으면 되겠지.
라핀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은 채, 블란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 꾹 눌렀다. 아이가 막무가내로 입술을 맞추는 것처럼 보드라운 두 입술이 마찰에 뭉개졌다.
블란은 어설픈 입맞춤을 얌전히 받다가, 라핀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입술을 벌렸다. 그리곤 덩달아 벌어진 라핀의 입술 사이로 질척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흐으….”
고작 혀를 섞었을 뿐인데, 라핀의 입에서 흐릿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블란은 그에 잘게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아무리 음란한 종족인 토끼라도 그렇지, 이렇게 민감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당근이고 뭐고 종일 제 타액이나 먹게 하고 싶었다. 침이든 정액이든 배불리 먹여줄 자신 있었다.
시커먼 음심은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점점 부피를 키워갔다. 블란이 라핀의 뺨을 잡은 채로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자, 라핀의 고개가 자연스레 위로 젖혀졌다.
“으으응…!”
입술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은 뽀뽀라고 내숭을 떨더니만, 이건 키스로 섹스를 하는 느낌이었다.
숨쉬기가 버거워진 라핀은 블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블란은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진하게, 몇 번이고 입술을 다시 겹쳐가며 라핀의 입술을 탐했다. 라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서 바짝 선 젖꼭지를 꼬집고 유린하기도 했다.
블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는 라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뽀뽀라더니! 어쩐지 그답지 않게 귀여운 스킨십을 요구한다 싶더니만, 이러려고….
라핀이 억울함에 차 타액으로 흥건해진 입술을 닦아내고 있을 때, 블란은 더 달려들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뽀뽀 열 번 해주면 당근 열 개 가져올게.”
“이게 무슨 뽀뽀…! 하아…. 다녀오세요.”
라핀은 그에게 따지려고 언성을 높이다가 그만뒀다. 블란을 빨리 쫓아내고 싶었고, 입맞춤을 열 번 했다가 제 명에 못 살 지경이었다.
라핀이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휘휘 고개를 젓자, 블란은 열 번의 입맞춤을 하지 못한 게 아쉬운지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렇지만 아쉬운 것과 별개로 기분이 좋은 듯 그는 맑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쁘게 기다려.”
“…….”
예쁘게 기다리기는 개뿔….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이 기분 좋은 얼굴로 라핀의 이마에 입술을 새처럼 쏘고 떨어졌다.
블란은 겉옷만 걸치더니 곧장 밖으로 향했다. 좁은 복도를 통해 나가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라핀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하….”
들키는 줄 알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라핀은 밖으로 향하려다가 멈추고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지금 당장 나가면 블란과 마주칠 테니 조금 시간을 두어야 했다.
라핀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재정비했다.
***
라핀은 블란이 멀리 나갔을 거라고 생각될 때쯤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좁은 복도를 지나쳐 현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라핀은 전장에 나가기 전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비장하게 현관 문고리를 붙잡았다.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밀어내기까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천천히 움직인 덕에 다행히 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라핀은 좁은 문틈 사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바깥을 살폈다.
워낙 좁은 틈새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동굴 안에 검은 늑대와 은빛 늑대가 좌우로 따로 무리를 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늑대의 우두머리인 누아와 블란과 함께 살면서 늑대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들킨 것도 아니고, 자는 걸 보고 있는데도 그러했다.
여, 역시 괜히 도망칠 생각을 했나?
두려움에 포기할까 싶었지만, 이곳에 남는다고 해도 저에게 미래는 없어 보였다. 누아는 저를 안 잡아먹는다고 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몰랐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도망은 시도해 보는 것이 좋았다.
라핀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첫째로 살핀 것은 블란과 누아였다. 둘은 의식을 하러 갔는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둘이 없는 걸 확인한 라핀은 다음으로 다른 늑대들의 상태를 살폈다. 검은 늑대와 은빛 늑대의 무리가 나뉜 가운데, 몇몇은 우두머리를 따라갔는지 평소보다 수가 적어 보였다.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물러서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후우….”
라핀은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이완시키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오는 동안 다행히 저를 의식한 늑대는 없었다. 라핀은 허리와 무릎을 굽혀 최대한으로 체구를 줄이고, 발끝은 바짝 세워 발소리를 줄였다. 커다란 돌과 벽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몸살 기운과 자세가 불편한 탓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첩자가 된 기분에 긴장감에 손에 땀이 쥐어졌지만,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뭔가… 맥이 풀렸다. 워낙 부하들이 많으니 경계가 삼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오고 보니 막상 그렇지 않았다. 다들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상과의 괴리에서 탈력감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제 생각만큼 경비가 삼엄했더라면 여기까지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핀이 안도하며 출구를 바로 코앞에 두고 숨을 내쉬었을 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어디서 토끼 냄새 나지 않아?”
“……!”
라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커다란 돌 뒤로 몸을 숨겼다.
라핀이 짠 조잡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계획은 나름 토끼와 늑대 간의 차별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핀이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늑대는 토끼의 몇 배는 더 인기척과 후각에 매우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라핀은 돌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슬쩍 빼고 목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저번에 저를 계곡에 내던졌던 검은 늑대, 소즈가 깨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베티가 눈을 비비며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웬 토끼? 졸려서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잘 맡아봐. 이거, 그때 그… 누아 님이 데리고 다니는 흰 토끼. 그 토끼 냄새잖아.”
“…진짜네.”
베티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베티는 소즈와 함께 라핀을 몰아세웠던 늑대라 라핀의 체취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대답에 라핀은 헉 숨을 완전히 삼켰다. ‘그 토끼’라고 콕 집어 말하는 것을 보아, 제가 집 밖으로 나온 걸 확신한 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늘이 도운 듯 순조로웠는데, 탈출을 코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긴장감으로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쪽인 것 같은데….”
라핀이 손 하나 꼼짝 못 하는 사이에, 둘은 체취의 근원을 파악하며 거리를 좁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라핀의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초조해졌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제는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라핀은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쳐 보자며, 쏜살같이 출구로 튀었다.
“저 새끼, 잡아!”
“헉…!”
라핀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즈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뒤에서 쫓아오는 늑대는 소즈와 베티, 단둘이었다. 라핀이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력을 다해 뛰었다. 고지가 바로 앞이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저번에도 느꼈듯 늑대의 뜀박질과는 비교할 것도 아니었다. 분명 동굴 출구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뛰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일순간 머리가 콱 붙잡히며 뒤로 젖혀졌다. 그대로 몸 위를 덮치는 소즈의 몸뚱어리에 앞으로 엎어졌다. 동굴을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널브러진 것이다.
“아악!”
붙잡힌 머리채는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했고, 거칠거칠한 돌바닥에 쓸린 무릎과 팔꿈치와 손바닥이 쓰라렸다.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피부가 까져서 피가 나는 게 느껴졌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픔보다도 두려움이 더 컸다. 라핀은 다급하게 피가 나는 손바닥을 맞대고 싹싹 비볐다.
“사, 살려주…, 흐읍!”
“시끄러.”
등 뒤에 올라타 있는 소즈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입을 커다란 손으로 틀어막았다. 비명이 그의 손바닥에 먹혀들었다.
소즈는 라핀의 완전히 틀어막은 채 뒤를 힐끗 살폈다. 소동이 있었지만, 다행히 깬 늑대는 없었다. 이렇게 소즈가 다른 늑대의 눈치를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토끼 새끼 때문에 얼마나 맞았는지….”
소즈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뿌드득거리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라핀은 그에 울먹거리다가 뚝 멎을 만큼 당황스러워졌다. 나 때문에 맞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댕그란 눈을 굴리며 저를 잡은 두 늑대를 바라봤다.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소즈는 입술이 터져 있었고, 베티는 광대뼈 부근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라핀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 베티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대장이 그렇게 아끼는 토끼인 줄 몰랐는걸.”
“그러니까 왜 이딴 토끼를 아끼느냐고! 이 작은 토끼 때문에 형님의 위상이 얼마나 떨어진 줄 알아?”
소즈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며 언성을 높였다.
동맹을 맺은 관계라고는 해도, 은빛 늑대와 검은 늑대 사이에는 은근한 세력 싸움이 존재했다. 동맹 때문에 몸으로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제 늑대 부족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무시했다.
은빛 늑대들은 누아가 흰 토끼를 잡아먹지 않는 걸 보고는 비아냥거림을 일삼았다. 어째서 늑대 부족 대장이라는 게 토끼를 업고 다니느냐고, 설마 토끼랑 친구를 맺은 거냐며, 어떻게 그런 품격 떨어지는 짓을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누아의 부하 늑대들은 처음에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었다.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인데 고작 저 토끼를 아껴서 저러겠냐고. 단지 맛있는 걸 아껴 드시는 분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귀하디귀한 술을 토끼한테 가장 먼저 먹이고, 위험한 인가까지 내려가 당근을 서리해 오고, 사냥터에 업고 나온 것을 보니 점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진짜로 저희의 우상인 대장이 같잖은 토끼를 마음에 둔 것인가 하고.
그래서 제가 처리해 주려는 것이었다.
제 대장이 토끼 하나 때문에 위상이 더 깎이기 전에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아는 토끼가 계곡에 빠지자마자 몸을 날려 물에서 건져냈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시끄럽게 낑낑 울어대는 토끼를 보듬어 주기까지 했다. 응어리져 있던 불안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계곡 사건이 있고 다음 날, 베티와 소즈는 누아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충격적이었다. 저희가 멋대로 행동하긴 했지만 단순히 먹잇감에게 장난을 친 대가라고 하기에는 과한 처분이었고, 무엇보다 대장에게 맞는 건 처음이었다.
소즈는 그날 혼났던 기억을 떠올리고 부르르 몸을 떨고는, 원망 어린 시선으로 라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꼴도 보기 싫은데 잡아먹을까.”
“흐으읍….”
소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누아와 블란이 저를 잡아먹는다고 엄포를 놓을 때와는 달랐다. 이건 진짜였다.
오싹함에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라핀은 살려달라고 더 애원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막혀 있는 터라 애원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아, 이대로 죽는구나.
블란도, 누아도 아닌 다른 늑대에게 잡아먹히는구나.
라핀은 세상에 남긴 것도 없었다. 돈도 지위도 없었고, 가족은 저를 버렸으며, 저를 기억하는 토끼는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저를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신경도 안 쓸 것이다.
그러니 저 하나 죽는다고 슬퍼하고, 큰 공백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부터 그런 토끼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살 것이다.
그러니 인생에 미련 가질 게 하나도 없는데, 생을 마감하는 것은 왜 이렇게 두려운 건지. 아까부터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눈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라핀이 동그란 눈물을 툭툭 흘리며 숨죽여 우는데, 베티가 사색이 되어서는 고개를 저었다.
“뭐? 잡아먹겠다고? 그랬다가 들키면 우리 죽어!”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너, 누아 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거야? 바로 알아챌걸. 후각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네 입에서 토끼 냄새가 펄펄 날걸.”
“그건 그렇지만….”
베티의 설득에 소즈가 기세를 죽였다. 소즈가 누아를 존경하는 만큼 부정할 수 없었다. 소즈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콧김을 뿜으며 씨근덕거렸다.
“그러면! 나더러 이 토끼가 이렇게 나돌아 다니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음….”
베티가 말없이 제 턱을 쓸며 라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앞에서 제 생사의 갈림길이 정해지고 있었다. 잡아먹는 게 안 된다고 말려도 소즈는 어떻게든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핀이 벌벌 떨고 있을 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베티는 인심 썼다는 듯 후하게 말했다.
“토끼야, 너 나가라.”
“네…?”
“살려줄 테니까, 나가라고.”
라핀인 당황한 눈으로 베티를 바라봤다. 베티의 말에 당황한 건 라핀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소즈는 펄쩍 뛰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토끼를 왜 풀어줘?”
“어차피 먹을 건 많고, 토끼 한 마리 없어진다고 큰 문제 생길 것도 아니잖아. 제 발로 나갔다고 하면 어쩌겠어.”
“그렇지만 저 토끼를 살려준다니. 그건 좀….”
“너, 누아 님 위상이 문제라면서. 꼭 죽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베티의 제안은 현명했지만, 소즈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제 아래에 있는 토끼를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소즈는 여전히 라핀을 죽이고 싶어서 속이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이 작은 몸뚱어리를 한입에 삼키고 싶었다. 그렇지만 들키면 이번에는 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존경하는 누아에게 쫓겨날지도 몰랐고, 어쩌면 저를 죽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제 대장은 이 작은 토끼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소즈는 머뭇거리다가, 라핀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짓누르던 몸도 비켜줬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는 라핀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쪽은 절벽이니까, 북쪽 산으로 넘어가. 또 잡혀 오면 그땐 진짜로 죽여 버릴 줄 알아.”
“네, 네…!”
라핀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즈가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썩 꺼지라는 손짓이었다.
라핀은 다급하게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까 심하게 돌바닥에 넘어진 탓에 무릎이 따끔따끔 아팠다. 냉혹한 겨울바람에 까진 상처가 더 부르텄는지 점점 더 아파졌다.
걷는 것도 힘들어 두 다리가 절뚝거렸지만, 라핀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얀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유난히도 눈발이 많이 날리는 날이었다. 라핀은 하얀 눈 속에 제 몸을 감추며, 북쪽 산으로 뛰었다.
고대하던 탈출이었다.
***
“흐흐흠, 흠….”
제사를 끝낸 블란은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걸었다.
평소 수면 시간인 점심에 제사를 치르느라 피곤했지만, 라핀에게 당근을 가져다주기로 약속했으니 피곤함을 무릅쓰고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하필 오늘은 이례적인 폭설이 내려 야생의 당근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 탓에 블란은 인가까지 내려와야 했지만, 라핀이 제게 뽀뽀를 해줬던 걸 떠올리면 기쁘게 먹이를 구할 수 있었다.
라핀이 뽀뽀를 한 번밖에 안 해주기는 했어도 하나만 먹이는 건 쪼잔한 것 같아 당근을 넉넉히 챙겼다. 라핀은 소식하는 편이라 많이 먹진 못했지만, 저장해두면 오래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좋아하겠지.”
당근을 등에 진 블란은 늑대 소굴로 향하며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당근을 주면서 혼인 이야기도 해야겠다. 봄이었다면 꽃다발을 만들어서 청혼했을 텐데, 혹독한 겨울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이 퍽 아쉬웠다.
뭐, 언젠가 하면 되겠지. 라핀과 함께할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니 자연스레 발걸음도 경쾌해졌다.
그렇게 돌아간 늑대 소굴의 늑대들은 다들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블란은 불면증을 앓고 있었지만, 아침에 땀을 쭉 뺄 정도로 단련한 데다가 인가까지 다녀와 피곤한 상태였다.
라핀에게 당근만 챙겨주고 저도 어서 잠을 청해야겠다. 블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핀, 예쁘게 기다렸어?”
블란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라핀을 찾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또 자고 있나? 하긴, 라핀은 잠꾸러기니까 그럴 수 있었다. 블란은 피식 옅은 웃음을 흘리며 가장 먼저 누아의 방을 찾았지만, 제 생각과는 달리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제 침대로 갔나? 블란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가 표정을 완전히 굳혔다. 여기에도 라핀은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웃음기 어려 있던 입매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온몸이 싸늘해졌다. 다급해진 블란은 쥐 잡듯 온 방을 쏘다니며 라핀을 찾았다. 욕실부터 지금은 쓰지 않는 방들까지 하나하나 열고 정신 나간 놈처럼 샅샅이 뒤졌다.
그렇지만 라핀의 털끝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블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눌렀다.
“…하.”
어쩐지….
그러고 보면, 오늘 라핀이 답지 않게 예쁘게 굴었다. 이상하다는 걸 진즉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블란은 그저 오랜만에 만나서 예쁘게 구는 줄 알았다. 그간 누아 놈이랑 단둘이 있던 게 지긋지긋해서 제게 뽀뽀도 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칠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피곤함과 분노에 블란의 눈은 핏줄이 터져 벌겋게 충혈됐다. 블란은 곧장 박차고 집을 뛰쳐나와, 자는 제 부하들을 깨워 라핀을 봤는지 수소문했다.
“토끼요? 아니요. 다들 자고 있었는데….”
“저도 못 봤습니다.”
“갑자기 토끼는 왜 찾으세요? 집에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다들 자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느냐며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아무리 자는 시간이라도 그렇지, 제 부하가 한두 명도 아닌데 어떻게 한 명도 봤다는 놈이 없지? 이러라고 부하로 데리고 있는 게 아닌데…. 전부 다, 하나같이 무능한 새끼들뿐이었다.
블란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한껏 예민하기도 했고, 라핀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모든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놈들과 더 말을 섞었다가는 엄한 곳에 화를 낼 것 같았다.
블란이 말없이 동굴을 빠져나가려 하자, 부하 중 하나가 다급하게 블란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세요?”
“토끼 잡으러.”
“예? 토끼요? 그 토끼, 어차피 누아 님 거 아닙니까.”
블란을 붙잡은 부하 늑대가 그럴 필요 없지 않으냐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블란은 ‘누아 님 거’라는 말이 심히 거슬렸다. 마음 같아서는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칠 듯이 분노가 치솟았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후우…. 아니야, 이놈들은 상황을 모르잖아. 보고 들은 게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블란이 겨우 화를 다스리는데, 다른 은빛 늑대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누아 님이 토끼를 그렇게 애지중지한다지?”
“웃겨, 늑대로 태어나서는 토끼를 애지중지한다니. 늑대의 수치가 따로 없지. 어떻게 그런 놈이 대장이 됐는지 모르겠어. 저러다가 반려라도 삼겠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말이야.”
은빛 늑대들은 맞장구를 치며 킬킬거렸다. 놈들이 보고 들은 건 전부 누아와 라핀의 이야기였다. 늑대 부하들은 블란과 라핀의 접점을 모르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블란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됐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전부 제 얘기 같았다.
블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어금니를 꾹 깨물며 말했다.
“그게 왜 걔 거야?”
“네? 그거야 누아 님이 잡아 온 토끼니까….”
“내 반려야.”
“…예?”
“라핀, 내 반려라고.”
엄연히 말하면 아직 정식 반려는 아니었지만, 조만간 반려로 삼을 생각이었다.
블란의 폭탄 발언에 모여 있던 은빛 늑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당황했는지 아무도 쉽게 입을 놀리지 못했다.
블란은 그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놈들이 라핀을 싫어하는 건 토끼라서가 아니라 누아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괜한 흠을 잡는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저….”
“…….”
은빛 늑대들은 다급히 블란에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블란은 놈들을 내치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금 이야기해 봐야 바뀔 것도 없었고,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라핀이 더 멀리 도망치기 전에 잡아 와야 했다.
***
누아는 제사를 끝낸 후, 블란이 늑대 소굴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별장에 잠시 들렀다.
다른 늑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전에 사냥을 나왔다가 넓고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근처에 계곡이 있는 게 노후에 생활하기 편하겠다 싶어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손을 타지 않는 집은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누아는 시간 날 때마다 별장을 관리하러 오곤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노후 준비를 위해 온 게 아니었다. 근래 블란이 자꾸만 라핀을 건드리니, 라핀을 이곳으로 옮길까 싶었다.
이곳으로 라핀을 옮기면 감시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묶어놓든 해서 탈출을 막을 방법을 고안할 예정이었다. 더는 블란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그간 라핀을 간병하느라, 그리고 블란과 단둘이 남겨두지 않으려고 곁을 지키느라 별장 정리를 못 했는데, 오늘 블란이 잠시 외출하는 것 같으니 그사이에 빠르게 정리할 심산이었다.
한창 청소를 하던 누아는 점심의 나른함이 몰려와 잠깐 동굴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쐤다.
폭설인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블란 놈이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기에 저도 안심하고 별장으로 온 건데 날씨가 너무 궂어서 어쩌면 먼저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겠다. 블란이 홀로 남은 라핀에게 또 뭔 짓거리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어서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졌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냄새에 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핀?”
왜 여기서 라핀의 피 냄새가 희미하게 나지?
늑대 소굴에서 멀리 떨어진 동굴이었다. 아무리 후각이 뛰어난 누아라고 한들 거기에서 나는 체향까지 맡을 재간은 없었다.
누아는 제가 헛것을 맡은 건가 생각하면서도, 확인을 위해 좀 더 바깥을 돌아다녔다.
킁킁….
누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이하고 예민하게 후각을 세웠다. 그러나 라핀의 피 냄새는 무슨, 겨울 특유의 차가운 냄새만이 후각을 가득 메웠다.
착각인 걸까, 아니면 눈발이 거세고 바람이 심한 날이라 체취가 공중에 빠르게 흩어진 걸까.
라핀이 나왔을 리가 없다. 늑대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 그 토끼가 무슨 수로 나왔겠어.
그랬지만….
누아는 거센 눈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참이라고 생각하면서 홀린 듯이 피 냄새의 출처를 찾아다녔다. 제가 맡은 비릿한 피 냄새가 라핀의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
“하아, 하악….”
라핀은 거친 숨을 내쉬며 가파른 산을 깡충깡충 올랐다.
파스슥, 눈을 짚는 발바닥이 동상 걸릴 듯 시렸지만, 산을 뛰어오르는 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베티와 소즈는 라핀에게 북쪽 산으로 떠나라고 했다. 다시 잡혀 돌아오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그들의 말은 블란과 누아가 하는 협박과는 달랐다. 두 눈에 담긴 원망과 증오, 선뜩한 살기가 단순히 위협이 아니라는 걸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라핀은 다시는 늑대들에게 잡히지 않겠노라고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러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 안에 북쪽 산으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라핀은 아직까지도 열병과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멀쩡한 토끼도 하루 만에 산 하나를 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라핀은 몸살 기운도 있는 데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기까지 했으니 체력이 일찍이 바닥났다.
동굴에서 빠져나온 지 네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겨울이라 금방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안 그래도 추운 날인데 해가 떨어지니 더 써늘해졌다.
“하아…. 이놈의 눈.”
게다가 밤이 오고 있는 시커먼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 껴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많이.
궂은 날씨만 아니었더라면 도망가는 데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라핀은 커다란 돌에 몸을 숨기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도토리를 내려다봤다.
도토리는 동글동글하고 작아서 손에 쥐기 딱 좋았다. 블란이 제 뒷구멍에 도토리를 넣었을 때를 생각하면 짜증 나는데, 이상하게 누아가 챙겨준 도토리는 다 귀여웠다. 모양이나 크기로 생각하면 작아서 딱히 다를 것도 없는데 말이다.
좋다고 해도… 오늘 안에 먹을 걸 못 구하면 이거라도 먹어야겠지. 아쉬움을 삼키고 돌에 등을 기대려는데,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눈이 아래로 푹 꺼졌다.
“헉!”
라핀은 뒤로 확 넘어질 뻔했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눈이 우수수 아래로 움푹 꺼져 있었다.
이게 뭐지? 라핀은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그곳을 들여다봤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토끼 굴이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입구가 나뭇잎과 눈에 가로막혀 있어 몰랐는데, 토끼 굴이 숨겨져 있었다.
라핀의 우중충했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토끼 굴을 발견했다고 만사가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밖에서 눈 맞으면서 쉬는 것보다야 실내가 훨씬 안락하고 좋았다.
남의 집이라 막 들어가는 게 조심스러웠으나 라핀은 침을 꼴깍이곤 안으로 쏙 몸을 밀어 넣었다.
“실례합니다….”
라핀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하며 굴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니 가장 먼저 넓은 거실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원래 토끼 대가족이 사용했던 곳인 듯 꽤 넓었다.
그렇지만 이 산에 토끼가 모두 떠났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듯, 생활감이 하나도 없었다. 바닥에 마른 나뭇잎이 쓰레기처럼 나돌아다니는 걸 보아 오래전에 집을 비운 것 같았다.
“하….”
라핀은 휑한 곳을 보니 긴장이 탁 풀렸다. 토끼 굴 주인이 저를 쫓아내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막상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니…. 이건 이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라핀은 급격하게 몰려오는 두통과 피곤함을 느끼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잎을 모았다. 몇 개 없어 바닥에 까는 게 고작이었지만, 나름의 깔개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딱딱해…. 차가워….”
그렇지만 눕고 보니 나뭇잎 위는 너무나도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간 호화로운 침대에서 잤다고 오랜만에 누운 흙바닥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나뭇잎들은 눕자마자 바스러져 가루가 됐고, 흙바닥은 돌처럼 딱딱하게 얼어 차가웠다. 없던 병도 생길 환경이었다.
불편함에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한번 누우니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찬바람을 쐐서 그런가?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무릎과 손바닥에는 빨간 피가 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다지 피가 많이 나지 않았었는데, 겨울의 건조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쓸려 부르터 있었다.
라핀은 어렴풋이 약을 바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곳에 그런 귀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끙끙 앓는 것뿐이었다.
몸을 새우처럼 옹그리고 몸이 따듯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아침 누아가 제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아닌데, 정말 아닌데….”
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하니,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의 말대로 누아의 곁이 가장 안전하고 편한 게 아니었나 하고,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누아가 저를 잡아먹지도 않겠다고 했고, 몸이 나으면 썰매를 끌어주겠다고 했었는데….
늑대 둘 사이에 있는 것이 힘들어 탈출한 것이지만, 못내 미련이 남았다. 라핀은 귓가에서 웅웅 맴도는 말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누아는 곧장 피 냄새를 쫓았지만, 흐릿하게 풍기던 피 냄새는 금방 겨울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무언가 찜찜했지만 누아는 추적을 그만뒀다. 늑대 소굴에는 수많은 늑대가 있었고 라핀에게 잡아먹지 않겠다고 한 이후였다. 굳이 라핀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누아는 제가 뭔가 착각한 것 같았다. 제가 맡은 것이 라핀이 아닌 다른 토끼 냄새라고 생각해도 별로 동하지 않았다. 토끼 고기를 가장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라핀을 곁에 둬서 그런지 토끼를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늑대 소굴로 돌아왔는데, 동굴 안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다들 전전긍긍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아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다 검은 늑대 무리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허억, 형님…!”
누아의 등장에 늑대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함구했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단박에 정리되더니 어색한 공기가 동굴 안을 감쌌다.
누아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반대쪽을 살폈다. 제 부하들뿐만 아니라, 블란의 부하 놈들도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몬드.”
“네, 네…!”
누아가 고작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몬드가 군기 바짝 잡힌 군인처럼 허리를 바짝 폈다. 평소의 능구렁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어…, 그게 말입니다….”
몬드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뭔데 저렇게 말에 뜸을 들일까.
누아가 어서 말하라고 날카롭게 쏘아보자, 몬드가 무서운 듯 꼬리털을 삐쭉 세우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토, 토끼가… 나가서….”
“…토끼?”
누아가 표정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더 캐묻기도 전에, 누아는 아까 맡았던 라핀의 체취를 떠올렸다. 더불어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던 것까지.
착각인 줄 알았는데, 진짜 라핀이었나? 라핀이 탈출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피 냄새가 나고 있었던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설마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누아가 더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자, 몬드가 사색이 되어서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나 똑바로 보고해.”
“언제 나간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사를 끝내고 돌아오신… 블란 님이 갑자기 토끼가 사라졌다고….”
“…….”
몬드가 말하면서 힐끗 누아의 눈치를 살폈다. 토끼가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건만, 몬드는 더 눈치 볼 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또 뭐가 있는데?”
누아가 어서 더 말하라고 눈짓을 주자, 몬드가 침을 꼴깍이며 말을 이었다.
“블란 님이… 갑자기 토끼가 자기 반려라고 하더니 잡으러 나가셨습니다.”
“반려라고?”
“예에, 그… 워낙 믿기지 않는 소리다 보니, 이걸 말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하하…. 토끼는 머, 먹잇감이지 않습니까?”
몬드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시선을 땅바닥으로 돌렸다.
사실, 몬드는 제 형님에게 있어 그 하얀 토끼가 단순히 ‘먹이’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다른 늑대들은 만지지도 못하게 애지중지하는 것도 그렇고, 토끼가 계곡에 빠졌던 날 다급하게 구해주고 삭삭 물기를 닦아주던 모습까지…. 평소의 누아를 안다면 미묘한 분위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 대장이 토끼를 짝사랑…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믿을 수 없지만, 그런 것처럼 보였다.
몬드가 어정쩡하게 말하다 입술을 꾹 다물자, 누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간 동안 말이 없던 누아는 거슬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물었다.
“하…. 너희, 아무도 못 봤어?”
“예, 예에…,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아무도 못 봤답니다.”
몬드는 누아가 돌아오기 전에 토끼를 잡아야 할 것 같다고, 본 자식 없냐고 캐묻고 다녔지만, 아무도 목격한 녀석이 없었다. 급히 잡으러 나간 녀석들도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땅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솟았는지. 어떻게 목격자 하나 없을 수 없는지 모르겠다.
누아가 더 물어봐야 소득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무작정 나가려는데, 어디선가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그때 깨어 있었습니다.”
녀석은 검은 늑대 무리 중에서도 가장 소심하고 몸체가 작은 놈이었다. 사냥도,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이라 다들 무리에서 쫓아내자고 했었지만, 누아가 거둬들인 놈이었다.
같은 무리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인데…. 누아가 의외라고 생각하며 녀석에게 눈짓을 주자, 놈이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작게 열었다.
“토, 토끼를 보, 보진 못했지만…. 베, 베티랑 소즈가 동굴 입구에서 어, 언성 높여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러니까 베티랑 소즈는 토끼를 봐, 봤을 것 같은데요….”
“…….”
그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무서운지 말을 몇 번이고 더듬어가며 말했다.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불안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다.
베티랑 소즈…. 베티와 소즈는 저번에 라핀을 계곡에 빠트렸던 녀석들이었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부하 늑대들도 같은 생각인지 ‘설마.’ 하며 소즈와 베티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들도 소즈와 베티가 라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에 무작정 편을 들어줄 수 없는 눈치였다.
누아는 무리 사이에 숨은 베티와 소즈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아까, 근처에서 토끼 피 냄새를 맡았거든.”
“…….”
“근데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베티, 소즈. 어떻게 생각해?”
“…….”
베티와 소즈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입도 벙긋 못 했다. 후환이 두려워 말이 안 나오는 듯했다.
설마 이 두 놈이 라핀을 죽인 걸까? 피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무슨 짓을 한 거지. 누아가 냉담한 시선으로 베티와 소즈를 바라보자, 소즈가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떨다가 바닥에 엎어지며 소리쳤다.
“부, 북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을 넘어가라고….”
“야, 너…!”
“어쩔 수 없잖아!”
베티가 그걸 왜 말하느냐고 화를 내려고 했지만, 소즈는 자백을 멈추지 않았다.
“낮에 자고 있었는데, 토끼가 도망 나온 걸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 잡아먹자고 했는데, 베티가 풀어주는 게 낫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누아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토끼가 도망가려고 집을 나왔고, 그걸 소즈와 베티가 발견했다….
소즈는 원래 저를 잘 따르다 못해 존경심까지 내비치는 녀석이니 제가 라핀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꼽게 보였을 거고, 베티는 그런 소즈의 소꿉친구이니 편을 들어준 것일 터다. 그러니 잡아먹으려는 소즈를 말렸겠지. 그렇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소즈와 베티는 처분을 기다리는 듯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누아는 그런 둘을 냉담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둘을 처분할 명분은 충분했다. 먹잇감을 풀어주다 못해 도망가야 할 방향까지 알려줬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라핀을 잡아 오는 것이 급선무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아까 맡았던 피 냄새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누아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대장 역할은 몬드가 맡는다.”
“네?!”
뜬금없는 말에 몬드가 고개를 들더니, 대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제,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어딜 가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할 수 있어.”
누아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격려하듯 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아가 몬드를 늘 곁에 가까이 뒀던 이유는 제 비위를 잘 맞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리더십이든, 사냥 능력이든. 그래서 언젠가 제가 우두머리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몬드에게 넘기리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어차피 라핀은 금방 잡아 올 테니 그리 긴 시간을 비우진 않을 터였다. 그 기간 정도는 몬드가 잘 지휘할 수 있을 듯했다. 차기 우두머리가 될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더 좋고.
“어차피 금방이야.”
“그건 압니다. 그깟 토끼, 하루면 잡아 오실 거니까…. 그러니까 저한테 안 맡기면 안 됩니까? 전 하루라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건 안 돼. 곧 밤이야. 게다가 오늘은 블란도 없잖아.”
벌써 밤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먹이를 멸종시키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서 이틀 치, 배부를 만큼만 잡는 것이 이 숲의 규정이었다. 늑대들은 오늘도 먹이를 구하러 사냥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블란의 부재도 문제였다. 은빛 늑대와 검은 늑대가 함께하는 곳에 우두머리가 없다면 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대장의 임시직을 맡은 블란의 임무가 막중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몬드는 한껏 울상이 되었지만, 누아는 모르는 척 단호하게 말했다.
“금방 돌아올 거라니까.”
“꼭… 오셔야 합니다? 나가서 토끼랑….”
몬드는 꼭 돌아오라며 재차 강조하면서도, 민망하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급해 죽겠는데 뭔 소리를 하려고 질질 끄는 거지? 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녀석의 뒷말을 재촉했다.
“토끼랑 뭐?”
“크흠, 사, 살림 차리면 안 돼요.”
“…이제 미친 소리도 하는군.”
누아는 거침없이 몬드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렸다. ‘뻑!’ 소리가 나도록 세게 때렸지만, 몬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헤거리며 웃었다. 저 넋 빠진 놈….
그나저나 토끼와 살림이라. 라핀과 저만 머물 별장까지 꾸리던 마당이었으니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금방 그 생각을 지워냈다.
잡아먹지 않는다고, 도망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도 뛰쳐나간 토끼가 뭐가 예쁘다고 함께 살까.
검은 늑대 무리에는 규칙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배신자는 거둬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무리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산에서도 내쫓아버린다. 그 이후에도 영역을 침범하려 들면 사살도 가능했다.
이는 동료였던 놈들에게도 칼같이 지키는 규칙이니, 먹잇감인 토끼한테 기회를 줄 이유는 없었다.
이번에 토끼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러면….
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몬드에게 간단히 해야 할 일을 전달했다. 몬드는 누아의 말을 듣다가 소즈와 베티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지 물었지만, 그건 그의 재량에 맡겼다.
제가 처분을 내리면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고, 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남들에게는 고작 ‘식량 보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죄목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실제로도 그러한데, 누아는 더 큰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할 일을 끝낸 누아는 지체 없이 아까 라핀의 피 냄새를 맡았던 동굴 방향인 북쪽으로 달려갔다.
누아는 라핀을 다시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가 맡은 피 냄새가 별일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
늑대에게 벗어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라핀은 금방 새로운 토끼 굴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에게 잡혀 오기 전까지 비슷한 곳에서 혼자 잘 살았었다. 최소한으로 먹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건 라핀이 반평생 해왔던 일이라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라핀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몸이 안 좋은데 겨울바람까지 쐰 탓에 열이 다시 펄펄 끓은 것이다. 과장하자면 이러다 뇌수가 끓어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아와 함께 있을 때는 그가 간호를 해주고 밥도 챙겨 줬었지만, 탈출한 이후부터는 라핀이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결국 아무것도 못 먹고 곯아떨어지기를 수회, 다행히 오늘은 차도가 있어 바깥에서 먹을 것을 구해왔다.
“으으, 추워.”
라핀은 코끝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토끼 굴 안으로 돌아왔다.
라핀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몸에 쌓인 흰 눈을 툭툭 털어내고 코를 훌쩍거렸다. 겨울이 되면서 털이 풍성하게 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라핀은 방금 바깥에서 구해온 풀때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풀때기는 맛있어 보이기는커녕, 배를 채우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양이 적고 상태도 비실비실했다.
게다가 그간 늑대들이 챙겨 준 호화로운 음식에 입맛이 맞춰졌는지 이런 걸 먹으면 속이 안 좋았다. 예전에는 이런 마른 풀도 맛있다고 먹었는데, 지금은 역한 느낌이 들어서 좀 힘들었다. 어떨 때는 헛구역질까지 하곤 했다.
늑대에게 붙잡혀 있던 곳을 ‘우리 집’이라고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제가 몇 달 동안 생활했던 곳이었고, 정신 나간 늑대들을 빼면 워낙 좋은 곳이었다. 따듯하고 넓고, 먹이도 많았고….
라핀은 풀을 씹으며 그 집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 거기 생각해서 뭐 할 건데.”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돌아가면 이제는 둘 싸움에 터져나가는 게 아니라, 개죽음당할 것이었다. 어쩌면 단번에 죽이지 않고 고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누아와 블란을 속이고 이렇게 도망쳤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잡아 오려고 벼르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더 멀리 도망쳐야 하는데.
라핀은 열이 조금 떨어지자마자 곧장 이 토끼 굴을 떠날 생각부터 했다. 저 혼자 살기에는 넓고 좋은 곳이었지만, 오랫동안 몸을 숨길만 한 곳은 아니었다. 누아와 블란은 소유욕이 강한 편이었으니 분명 샅샅이 산을 뒤지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더 먼 곳으로, 베티와 소즈의 말대로 북쪽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대부분 영역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산 하나를 넘어가는 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늑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강한 늑대라고 해도 다른 무리의 영역을 침범하면 싸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북쪽 산에서 가족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라핀은 먹던 것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으, 몰라…. 만나면 뭐 어쩌려고?”
어차피 저를 버린 가족들이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고 기뻐할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멸의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며 떠나라고 할 이들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더 우울해지고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분명 자유를 찾아 늑대에게서 벗어났는데, 자꾸만 머리가 아팠다.
결국 현실 도피를 택한 라핀은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북쪽 산에 가족이 있을 거라는 것도 결국 추측일 뿐이었고, 산은 워낙 높고 넓으니 같은 산에 있더라도 만날 확률이 희박했다.
가족 같은 거 안 만나도 돼. 어차피 혼자였잖아.
라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은근히 기대감을 키우며 다 먹은 풀때기를 치우고 다시 일어났다. 왠지 마음이 급했다.
***
여전히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라핀이 늑대 소굴에서 탈출했던 날에 비하면 덜했지만, 그래도 이동하기에 궂은 날씨였다.
“으으, 배고파….”
뽀드득, 뽀드득. 라핀이 토끼 몸으로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언덕을 오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토끼 굴에서 나온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배에서는 벌써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하기야, 생존을 위해 먹은 수준이었으니 금방 배가 꺼지는 것도 당연했다.
지독한 굶주림을 느낄 때마다 라핀은 늑대 집에서 챙긴 도토리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건 정말 굶어 죽겠다 싶을 때 먹을 거라고 아끼는 중이었다.
사실 도토리는 라핀이 당근만큼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고, 워낙 작아서 아껴 먹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늑대한테 잡혔다가 살아남았다는 기념품도 아닌데 아끼게 됐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건가? 근래에 만난 동물이라고는 블란과 누아밖에 없는데, 누아는 제게 맛 좋은 먹이도 챙겨주고 말도 종종 나눴으니 떠오르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건지, 요즘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라핀은 금방 지치는 것을 느끼고 두꺼운 나무뿌리에 몸을 숨기고 휴식을 취했다.
“후우….”
라핀이 숨을 내쉬자,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늑대 굴을 탈출하던 날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네 시간을 내리 달렸는데, 지금은 팽팽하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그만한 체력이 나지 않았다.
라핀은 대충 가늠으로 북쪽 산과의 거리를 살폈다. 제 저질 체력으로는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았다.
늑대들은 이미 여기를 지나쳤을까? 일전에 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그는 산 하나를 하룻밤에 오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던데. 그들이 뒤에서 쫓아오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쳤을지도 모른다고 가정을 하니 어쩐지 한시름 놓였다. 동선이 꼬이면 더 추적이 힘들 것 같아서였다.
조금 마음이 놓인 라핀은 소복하게 쌓인 흰 눈을 이불 삼아 뒹굴뒹굴 굴렀다. 춥긴 하지만 눈의 부드러운 촉감이며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좋아 재미있었다.
그렇게 잠시 마음 놓고 쉬는데, 문득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응?”
라핀이 분홍빛이 도는 작은 코를 빠르게 벌렁거렸다. 흐릿하지만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극도로 배고픈지라 흐린 냄새임에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당근 냄새다!”
당근이다.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도 입에 침이 고였다. 최근에는 마른 풀때기만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는 게 고작이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근처에 있다니. 그간 고생이 심했으니 어서 먹으라고 신이 주신 선물 같았다.
라핀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힘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깡충깡충 뛰어가는 걸음걸이에는 신난 기분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냄새가 가까워질수록 신이 났다. 당근을 어떤 식으로 먹을까? 생으로 먹어도 맛있을 거고, 건초랑 같이 먹어도 맛있을 거다.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고 있을 때, 언덕 아래에 당근이 놓인 것이 보였다.
저기 있다!
폴짝 낚아채려던 라핀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다급히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당근이 왜 이런 곳에 있지?
당근은 땅에 파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눈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가 버리고 간 것처럼. 게다가 이렇게 펑펑 내리는 눈이 당근 위에는 하나도 안 쌓여 있었다.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야생적 감각이 조심하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라핀이 곧장 다가가지 않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당근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형님!”
묵직한 목소리였다. 낯설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같기도 했다.
누구지? 라핀이 숨은 몸을 더 움츠리자 곧이어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왜 왔어.”
블란이었다.
그간 블란은 동서남북 이리저리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산을 샅샅이 뒤졌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거센 눈바람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체취로 추적하는 것도 불가했고,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어젯밤, 이 근방에서 토끼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 산은 토끼가 거의 씨가 마른 듯했으니 라핀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토끼의 발자국은 먹이를 구하려 방황했던 기색이 역력했다. 이 근처에 터를 잡은 것 같았다.
발자국을 따라 체취가 짙게 나는 곳까지 갔었지만, 눈 때문에 토끼 굴이 어디에 있는지 당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차피 굴을 파헤치고 잡아내는 건 힘드니, 라핀이 좋아하는 당근을 두면 제 발로 오지 않을까 하는 전략이었다. 마침 당근도 가지고 있으니 행동으로 옮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라핀은 블란을 보자마자 숨을 ‘헉’ 하고 크게 들이마셨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늑대는 후각이 워낙 좋으니 금방 제가 있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그러니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두 발이 묶인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블란을 대장이라고 부르던 은빛 늑대가 라핀의 시야에 들어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것보다, 내가 늦을 수도 있으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늑대 굴에 누아 님도 안 계셔서 엉망진창이에요. 그나마 몬드가 대리로 하고 있긴 하지만…. 검은 늑대를 따라야 하느냐고 불만이 엄청나다고요!”
“그럴 줄 알고 네가 당분간 내 역할 좀 대신해 달라고 했잖아. 애들 설득도 하고, 중재도 하고.”
“그게 가능하면 제가 왔겠습니까! 블란 님이 토끼를 반려라고, 그런 말씀을 하셔서 여러모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저한테는 무리라고요!”
“하….”
블란이 짜증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왜 하필 다 잡아가는 지금…. 토끼도 후각이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니, 이런 식으로 늑대가 여럿 뭉쳐 있으면 라핀이 눈치챌 것이다.
블란이 일단 녀석을 돌려보낼 궁리를 하는데, 문득 코끝에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블란은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깐. 어디서 토끼 냄새가 나는데.”
“……!”
블란이 고개를 돌린 방향은 정확히 라핀이 있는 쪽이었다.
라핀은 하얀 눈에 폭 숨어 있는 데다가 하얗고 작은 체구 덕분에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블란은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올 기세였다.
라핀이 블란에게 눈을 고정한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리는데 툭, 하고 딱딱한 것이 등에 부딪혔다.
“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무언가 잘못된 걸 알 수 있었다.
부딪친 것은 돌처럼 딱딱했지만, 돌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아까는 없었던 돌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흐븝…!”
“조용히 해.”
라핀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보다 커다란 손이 입을 가로막는 것이 먼저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라핀이 뻣뻣하게 굳었다.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기절한 라핀이 휘청거리자, 뒷덜미가 가볍게 물리더니 몸이 가볍게 공중으로 대롱대롱 떠올랐다.
라핀을 낚아챈 것은 발걸음 소리도 없이 숲속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