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래빗, 런! 3권
7. 기회
라핀은 시야를 확보하기조차 어려운 새카만 수풀 속을 허우적거리며 뛰었다.
커다란 무언가가 자꾸만 저를 쫓아왔다. 도망치느라 누가 따라오는 건지 돌아볼 틈도 없었다. 마음은 급한데 진흙 위를 뛰는 것처럼 걸을 때마다 몸이 푹푹 잠겼다.
어느새 가슴께까지 진흙 같은 것이 차올라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함정에 걸린 것처럼 더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제가 뭐에 쫓기고 있는 건지 정체나 좀 알자. 저를 죽이려는 포식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라핀이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형형한 빛을 내는 눈동자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을 헤치고 나온 그것이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블란과 누아는 아니었다.
예전에 저를 실험대 위로 올렸던 하얀 가운을 입은 인간이었다.
“흐으으….”
그때의 인간은 저렇게 눈에서 빛을 내지도, 흉악하게 생기지도 않았었다. 지금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괴수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그때의 그 인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려 생사의 고비를 넘기던 날보다 더 무서웠다. 안 그래도 도망갈 퇴로를 잃었지만, 두 발이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흐윽, 끄윽…!”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처로운 숨소리만 색색 나올 뿐이었다.
그러는 새에도 진흙은 어느새 목 끝까지 차올랐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뒤로 갔다가는 인간에게 잡힐 게 뻔했다.
기척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동물적 감이 제 바로 뒤까지 왔다는 걸 말해주었다.
라핀이 뒤를 돌아보며 정체를 확인하려고 할 때, 무언가가 제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수면 아래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웅웅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저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이상함을 느끼던 중 갑자기 눈앞에서 섬광이 폭발하듯 번쩍였다.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빛에 라핀은 눈을 질끈 감았다.
***
“헉…!”
라핀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깊은 수풀과 제 앞에 있던 괴수처럼 생긴 인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신, 어둑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라핀, 왜 그래?”
누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핀은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굴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두운 숲속이 아닌, 누아의 방이었다.
라핀은 뒤늦게 추격전이 전부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숨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제가 늑대의 집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따지고 보면 누아는 저를 잡아먹을 늑대인데, 구원자라도 만난 것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인간에게 실험을 당한 이후 쫓기는 꿈을 간혹 꾸긴 했었지만, 오랜만이기도 하고 이번의 꿈은 유달리 생생했다. 아무래도 몸도 안 좋고 상황이 끝까지 내몰려 이딴 악몽을 꾼 듯했다.
라핀은 한참 후에야 숨을 고르고 이마에 흐른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하…, 꿈이….”
“뭐야, 아픈 게 아니라 꿈 때문에 그런 거였어? 무슨 꿈이었는데 그래?”
라핀이 한숨처럼 대답하자 누아는 굳어 있던 표정을 사르르 풀었다. 아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꿈이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반응이었다.
아픈 것보다야 악몽이 훨씬 나은 건 맞지만 라핀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이제는 꿈이라는 걸 알았으니 안도할 만도 한데, 누아의 물음에 악몽을 떠올리니 심장이 다시 세차게 박동했다.
라핀은 도톰한 이불을 꽉 그러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시야가 꿈속의 숲과 비슷했다.
“인간이 저를 막… 쫓아왔어요. 저, 저를 잡으려고….”
“…….”
“근데 막, 진흙이 몸까지 차올라서… 도, 도망갈 수도 없었어요.”
꿈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저를 쫓아오던 인간의 모습, 그리고 저를 족쇄처럼 붙잡던 찐득한 진흙의 촉감까지.
라핀의 목소리는 염소가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고작 악몽이었지만,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이 기괴하리만큼 끔찍하게 변질되니 혹 예지몽을 꾼 건 아닌지 싶은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누아는 꿈 내용을 듣고 가볍던 태도를 굳혔다. 누아와 라핀은 이전에 인간에게 잡혔을 때의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래서 누아는 라핀이 인간에게 개조를 당한 이후로 토끼 무리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악몽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누아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라핀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그에 이리저리 방황하던 라핀의 시선이 단박에 누아에게 고정됐다.
“라핀.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
“인간에게 쫓기는 일도, 잡아먹히는 일도…. 내가 그렇게 안 만들 거야.”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장난기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물씬 묻어났다.
라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려움의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꿈에서 깼을 때 그에게 의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위로받는 상황은 기대조차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저를 위로해주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다정한 말과는 거리가 먼 그가 저를 위로해주는 것은 백번 고마웠다. 그렇지만….
“저 잡아먹을 거잖아요.”
“…….”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위로하지 마세요….”
생각해주는 건 갸륵하지만,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봐야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누아는 저를 잡아먹을 날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밥도 챙겨주면서 살을 찌우고 있는 거고.
굳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말에 넘어갈 정도로 아주 멍청하지도 않으니까.
라핀이 힘없이 웃으며 위로를 밀어내자, 누아가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안 잡아먹어.”
“왜요? 토끼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요. 저 살찌워서 잡아먹는다고 하셨잖아요.”
“이유? 그냥 잡아먹기 싫어.”
“…….”
라핀이 대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내뱉었다. 저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일까.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야지.
그렇지만 너무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일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라핀이 두려움으로 벌벌 떨던 것도 잊고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자, 누아는 좋은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 믿고, 걱정하지 말고 자.”
“…알겠어요.”
라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굳이 반박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를 캐물어 봐야 ‘그냥’이라고 퉁 치는데 뭐 하러 힘을 뺄까. 지금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다른 곳에 굳이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누아는 부드럽게 표정을 풀더니, 다시 옆에 몸을 뉘었다. 라핀 쪽을 보며 옆으로 누운 그는 라핀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일정한 박자로 도닥였다. 으레 어른들이 아이를 재울 때 하는 행동과 비슷했다.
위로해준 것도, 지금 이러한 행동도 전부 누아와 어울리지 않았다. 뭘 잘못 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한 건 그러한 행동에 안심하는 저였다. 늑대가 그렇게 싫다고 탈출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마당인데…. 잘 생각해 보면, 저는 누아는 꽤 괜찮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저를 덮친 것이나 노팅했던 것을 떠올리면 블란이랑 다름없었지만, 저를 계곡에서 구해준 일이나 저를 업고 바깥 구경을 하게 해준 것,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매일 아침 공수해주는 것…. 단순하게도 누아에게는 별다른 의미 없을 행동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렇게 누아와 저만 있으면, 그와 블란 사이에서 쥐어짜이는 일도 없을 텐데.
그렇지만 이 늑대 굴에 잡혀 있는 이상 그런 걸 기대하긴 힘들겠지. 둘은 미우나 고우나 동맹 관계라니까.
“안 자?”
라핀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아가 물어왔다. 그는 라핀이 안정을 찾았음에도 자지 않고 눈만 깜빡이는 게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라핀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렴치한 짓을 당하고도 그가 조금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이 호구 같았다. 그렇게 당하고도 기대하는 게 있다니.
…하기야, 여전히 저를 버린 토끼 무리가 종종 떠오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지.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나름 잘 지냈었다고, 아직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미련을 못 버렸으니까. 제 성격에 기대를 버리는 게 쉽지 않을 거다.
“…지금 자면 꿈이 이어질 것 같아요.”
아무튼, 라핀은 솔직하게 대답하기가 민망해 대충 둘러댔다. 실제로 다시 잠에 들었다가 또 악몽을 이어서 꾼 적도 있기에 바로 자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다.
라핀이 그럴싸하게 둘러대자, 누아가 그런 이유였냐는 듯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또 악몽 꾸면 내가 깨워줄 테니까, 마음 놓고 자.”
“…누아 님은 안 주무세요?”
“난 원래 이 시간에 안 자잖아.”
“…….”
라핀이 금방 수긍했다. 그렇긴 하네. 제가 자는 밤에는 그가 저를 안고만 있는 거라는 걸 깜빡했다. 저도 누아가 자는 점심에는 제가 그의 죽부인처럼 안겨 있긴 하지만, 저는 같이 잠들 때가 많아서 그도 그럴 줄 착각했다.
라핀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는 라핀의 가슴을 다독거리던 손으로 라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정리해주며 말을 이었다.
“넌 늑대랑 같이 자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워. 나보다 무서운 놈도 있어?”
“…….”
“인간은 좀 까다로운 상대긴 하지만, 나 곰도 잡았었어. 인간이라고 못 잡을 거 없는데. 그게 나보다 무서워?”
곰도 잡았었다니. 사람을 반으로 찢어 죽이는 곰이랑 싸워서 이겼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긴 했다. 늑대는 무리 생활을 했고 민첩했다. 그리고 이전에 늑대가 곰을 이겼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라핀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믿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게 누아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게요.”
누아가 진짜 곰과의 싸움에서 이긴 늑대이든, 뭐든…. 그의 말대로 인간을 누아보다 더 무서워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누아는 강했고, 비정상적으로 소유욕이 짙으니 만약 인간이 저를 데려가려고 하면 한판 붙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아가 저를 잡아먹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연기를 저렇게 잘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를 온전히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워낙 변덕이 심하니, 저를 불쌍하게 여기고 지금은 저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마음먹을지도 몰랐다. 그러다가도 금방 마음이 바뀌어 잡아먹고 싶어 할 수도 있는 거고.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위로를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라핀이 표정을 누그러트리자,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챈 누아가 다정스럽게 말했다.
“잘 자.”
누아는 허리를 굽히더니 라핀의 이마에 입술을 부드럽게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 쪽, 소리를 내며 라핀의 이마를 간질였다.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쿵쿵거렸다. 멋대로 뛰는 심장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라핀이 어깨를 미세하게 움츠리자, 그는 피식 웃더니 처음처럼 라핀의 옆자리에 눕고 그를 품에 안았다.
그렇게 다시 잠들었던 라핀은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서 깼다.
악몽은 시작일 뿐이었다. 감기 때문에 기침이 나서, 열이 갑자기 확 올라서, 뒤척거리다가 허리가 빠질 듯이 아파서. 갖은 이유로 잠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난교의 후유증으로 아픈 것뿐만 아니라, 이전에 왔던 감기 몸살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누아는 정말 라핀의 예전 부모님처럼 살펴줬다. 잠기운과 약 기운에 취해서일까. 그때만큼은 누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했다.
***
라핀은 그날로부터 나흘이 지나고 나서야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아직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아니다 보니, 누아는 여전히 라핀에게서 신경을 거두지 못한 채 주위를 맴돌았다.
반성의 의미로 저러는지는 몰라도, 뭐…. 조금 고맙긴 했다. 몸이 아플 때 제 곁을 지켜준 이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의 부모님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좋았다.
그렇지만 라핀은 이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데, 누아가 제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곤란했다.
그렇다고 괜히 경계심을 드러냈다가 감시가 더 심해질지도 모르고…. 그의 관심을 떨어트릴 방법을 생각하던 라핀은 몸이 완전히 다 나은 척 연기하기로 했다. 몸이 괜찮아지면 과잉보호도 이전처럼 줄어들 것이다.
침대 위 간이 테이블에서 누아가 끓여준 음식을 먹던 라핀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갑자기 뭔 소리야?”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라핀을 구경하던 누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침, 점심까지만 해도 별다른 말이 없다가 갑자기 왜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타이밍이 별로였나? 라핀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꿋꿋하게 이어 가기로 했다.
“갑자기가 아니라, 오전부터 컨디션이 좋더라고요.”
“그래 보이긴 했는데,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고 다 괜찮아진 건 아니잖아.”
“다 나은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이제 사냥을 같이 나가도 될 정도로 몸도 가뿐하고요.”
누아는 난교한 날 이후로 저녁 사냥도 안 나가고 있었다. 온전히 간호에 집중하기 위해 몬드에게 사냥 지도를 임시로 위임했다고 들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 없다고 말리고 싶어도, 그가 없으면 귀신같이 블란이 침실을 침입하곤 했으니 말릴 수가 없었다.
아무튼, 누아도 제 생활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다른 곳으로 분산될 것이다. 어쩌면 사냥을 같이 나가면서 탈출할 통로도 찾아볼 수 있을 테고.
라핀이 몸이 가뿐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파닥거리자, 누아가 갑자기 다른 소리를 해왔다.
“이거 다 먹은 거야?”
“네? 네.”
라핀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가 빠르게 간이 테이블을 아래로 치웠다.
아예 무시하겠다는 건가? 정말 몸이 온전히 다 나을 때까지 참아야 하나? 그만큼 탈출도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
라핀이 곰곰이 좋은 방안이 없나 생각하고 있는데, 누아가 라핀 옆의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흠, 다 나았다고….”
누아가 혼잣말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라핀의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평소 잘 때도 허리에 손을 감고 잔다지만, 라핀은 매번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이렇게 자는 시간이 아닐 땐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런 식으로 농밀하게 만질 땐… 성교 전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몸이 다 나았다고 곧장 섹스라도 하려는 건가? 하루가 멀다고 몸을 겹치던 성욕을 생각하면 욕구 불만이라도 왔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너무 이르지 않나?
라핀이 나무토막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을 때, 몸을 휘감고 있던 손가락이 허리를 쿡 찔렀다.
“윽….”
근육통이 있는 부위를 정확히 자극하는 손에 라핀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지자, 누아가 손을 떼며 말했다.
“아직이잖아.”
“아, 아니, 멀쩡해도 그렇게 세게 누르면 아파요.”
“…….”
라핀이 허둥지둥 변명했지만, 누아는 믿지 않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대화는 끝났다는 듯 바닥에 내려놓았던 간이 테이블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할 듯한 반응에 라핀은 이판사판으로 누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휘어감듯 끌어안은 누아의 배 근육이 훅 단단해졌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저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오늘은 나가요, 네?”
“…라핀.”
누아가 테이블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퍽 난감하다는 얼굴로 라핀을 돌아본 그는 배를 감싼 라핀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어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답답해서 그런 건 알겠는데, 아직 안 돼. 괜히 나갔다가 더 몸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
“봐봐.”
누아는 잡고 있던 라핀의 손을 끌어다 누아의 이마에 손을 얹게 했다.
갑자기 그의 이마는 왜 만지게 하는 거지? 의미는 모르겠지만 따듯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반대쪽 손을 이끌어 라핀의 이마 위에 얹게 했다. 확실히 라핀의 이마가 더 뜨거웠다.
“아직 열도 있잖아. 이래도 다 나았다고 할 거야?”
“이건 미열….”
“근육통은 조금 줄었을지 몰라도, 아직 열은 안 떨어졌어. 발열에는 찬바람이 쥐약이니까 열 떨어질 때까지는 외출 못 해.”
“아니, 제 말 좀….”
“그렇게 억울하면 밥이나 잘 챙겨 먹고 얘기해. 맨날 쥐꼬리만큼 먹으면서 어떻게 낫겠다는 거야?”
“…….”
라핀이 반박하려고 입을 열어 봤지만,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누아의 잔소리에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누아가 테이블에 눈짓을 주며 하는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직 치우지 않은 테이블 위로 라핀이 먹다 남긴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다 나았다고 속이는 건 무리인 것 같다. 대번 심드렁해진 라핀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누아의 손을 치우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더 대화할 것도 없었다.
라핀이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버리자, 누아가 다시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다 나으면 같이 나가자. 그때는 너 하고 싶은 거 시켜줄게. 그래,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눈싸움이라도 할래?”
“…늑대랑 눈싸움을 어떻게 해요. 저 죽이려는 거예요?”
라핀이 삐쭉거리며 대답했다. 늑대랑 눈싸움했다간 다시 앓아눕게 되지 않을까? 그는 나름대로 놀이를 생각하고 말한 거겠지만, 라핀의 머릿속에는 일방적인 구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라핀이 단박에 거절하자, 누아가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러면 썰매는 어때? 썰매 타 봤어?”
“썰매요? 그거, 사람들이나 타는 거 아니에요? 썰매견이 끌어주는 거.”
“우리도 타면 되지. 나무판자 모아다가 썰매 만들어 놓을 테니까,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
썰매에 정신이 팔려서 뭔가 휘말린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썰매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라, 그런 거 필요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썰매든, 탈출이든. 뭘 하든 몸이 다 나은 후에나 할 수 있었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라핀은 당분간은 허튼짓 말고 회복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
늑대들이 저를 건드리지 않으니 비교적 평탄한 나날이 흘러갔다.
누아의 방에 갇힌 건 불편했지만, 괜히 나갔다가 블란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걸 알기에 탈출을 시도해 보진 않았다. 게다가 원래 라핀은 겨울에는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 야외에 잘 안 나가기도 했고.
누아에게 따듯하고 좋은 잠자리와 풍족한 먹이를 받으니,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겠다고 전전긍긍하던 마음도 사그라졌다.
탈출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지만, 계속 오늘처럼 저를 건드리지 않으면 눌러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나날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단순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다 좋은 건가 하고.
몸이 다 나으면 이런 호사도 금방 없어지겠지만, 두렵진 않았다. 누아가 저를 잡아먹지 않겠다는 변덕인지 모를 말을 했으니 당분간 목숨은 안전했고, 몸이 다 나으면 누아가 썰매를 태워준다고 했기에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일 점심엔 밖에 나갔다 올 거야.”
“네? 밖이요?”
자려고 누워 있던 라핀은 등 뒤에서 들린 누아의 말에 졸음이 확 달아났다.
외출한다고? 평범한 일상에서 나눌 법한 대화였지만, 간호를 목적으로 사냥도 안 나가던 누아가 하니 폭탄선언처럼 느껴졌다.
라핀이 뒤를 돌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눕자, 누아가 움찔 몸을 떨더니 대답했다.
“응. 간호해야 하니까 최대한 빼려고 했는데…. 미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은 왜 섬기라는 거야?”
누아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은 늑대 우두머리끼리 큰 행사가 있었다. 옛날에 비하면 편리한 기술이 보급되긴 했지만,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비과학적인 의식이 그러했다.
수인 부족들은 우두머리를 대표로 곡물이 마르지 않음을 태양과 조상에 대고 감사했다. 물론 누아와 블란은 의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딱히 조상에게 감사하지도 않을뿐더러, 한다고 날씨가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숭배해야 하는지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전통이라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것뿐이었다.
누아는 귀찮아 죽겠다며 투덜거리다가, 그래도 다행인 것 하나는 있어 표정을 살짝 누그러트렸다.
“그래도 내일은 블란도 같이 나가니까, 저번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아….”
이건… 기회인가?
방금까지 탈출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탈출 계획을 짤 때 누아만 생각했지 블란이 없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몇 날 며칠 이곳에 있으면서 둘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건 처음이었다.
누아는 하늘을 섬기기 싫다고 욕하고 있었지만, 라핀에게는 하늘이 저를 도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일이 일생일대의 기회다. 누아와 블란이 없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늑대들이 바글바글한 동굴을 나가는 것만 해내면 됐다.
라핀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모르는 누아는 라핀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사락사락 넘기며 말했다.
“혹시 뭔 일 있으면 몬드한테 부탁하고.”
“…….”
딱히 부탁할 거 없을 텐데. 라핀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등을 돌렸다.
라핀은 긴장된 얼굴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내일 점심에 도망가야겠다.
미리 세워둔 탈출 계획은 거창할 것 없이 늑대들이 자는 낮에 도망가는 것이었다. 낮에는 동굴에 무리를 지은 부하 늑대들도 자고 있을 거고, 깨어 있다고 해도 저녁보다는 경비가 느슨할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렇게 늘 때를 노렸지만 누아가 늘 저를 끌어안고 자는 탓에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늑대 둘이 자리를 비운다니. 가장 큰 두 가지 난관이 사라진다.
라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누아를 바라봤다. 그는 라핀이 탈출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팅과 난교 이후로 라핀의 몸이 많이 안 좋아졌고, 지금도 극진한 간호를 받는 중이니 방심하고 있는 듯했다.
저를 믿고 있는 누아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또 언제 태도를 돌변할지 모른다. 워낙 변덕이 심하니까.
나가야겠다.
늑대 둘의 노리개 취급에서 벗어나야겠다.
혹 일을 그르치면 어쩌지? 그러면 정말 묶여버릴지도 모른다. 아니지, 당장 잡아먹힐지도 모르지. 상상만으로도 긴장이 돼 몸이 발발 떨렸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며 라핀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데,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핀.”
“네, 네…?”
라핀은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퍼뜩 몸을 떨었다. 탈출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또 누아에게 속내를 읽힌 것만 같았다.
쿵쿵쿵, 아직 탈출은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붙잡힌 것 같아 심장이 떨리는데, 누아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돌아누워.”
“…에?”
“방금처럼 마주 보고 누우라고.”
“…….”
들킨 건… 아닌가?
라핀은 조심조심 몸을 돌리며 누아를 살폈으나, 그는 입을 다문 채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혀 있었지만, 제가 도망칠 생각을 했단 건 모르는 듯했다.
그럼 이런 걸 왜 시키는 거지? 대뜸 마주 보고 누우라는 그의 의중은 알 수는 없었으나,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원래 그런 늑대였다. 원래 속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는 늑대.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함이 차차 줄어들었다.
마주 보고 안긴 채 자는 것이 마치 다정한 연인을 연상하게 해서 불편하긴 해도 오늘이 누아와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라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노팅과 난교를 떠올리면 싫었지만, 그에게는 고마운 것도 많았으니까.
마지막이다.
라핀은 누아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이 맞닿은 근육이 점점 더 딱딱해져도 라핀은 신경 쓰지 않고 머릿속에서 탈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일이 급격히 당겨졌지만, 내일이 결전의 날이다. 라핀은 부디 탈출에 성공하게 해달라고, 어스름한 새벽이 될 때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