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래빗, 런! 2권
4. 변화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라핀은 세상모르고 꿈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누아는 라핀의 옆에 나란히 누워 그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봤다. 어쩜 이렇게 평화로운 얼굴로 잘 수가 있는지…. 좀 전까지 나름의 접전이 있었다고는 믿기지도 않게, 꿈쩍도 안 하고 잘 잔다.
“…….”
이렇게 태평해서 어떻게 험난한 야생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니지, 그래서 야밤에 바깥을 싸돌아다니다가 저한테 잡힌 건가?
게다가, 오히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은근히 늑대 소굴에서도 잘 버티고 있었다. 다른 토끼였다면 심장마비가 먼저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은근히 담이 센 토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귀엽게 보이다가도, 다시금 속이 뜨거워졌다. 잠든 라핀에게서 블란 특유의 체취가 풀풀 풍겼기 때문이었다.
씹…. 누아는 욕설을 삼키며 라핀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설마 라핀도 블란 새끼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아니어야만 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보잘것없고 하찮은 토끼는 감히 늑대의 반려를 넘볼 수 있는 종족이 아니니까…. 온갖 이유를 대가며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했다.
혼란스럽게 생각하던 누아는 조심스레 라핀을 품에 끌어안았다. 라핀의 몸에서 블란의 냄새가 나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의 머리에 코를 묻고 깊게 들이마시니 방금 씻어낸 향기로운 샴푸 냄새 너머로 라핀의 체향이 은근하게 났다.
라핀은 몸이 특이한 토끼라서 그런 걸까? 그가 풍기는 살 내음은 꼭 마음을 진정시키는 안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비누로 씻었을 텐데, 왜 제가 썼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좋게 느껴지는 걸까.
누아는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늦은 밤은 제가 가장 활달하게 활동할 시간이라 잠은 오지 않았지만, 짜증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
“으으….”
라핀은 눈을 뜨기도 전에 골골대는 소리를 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버거워지고 있다. 어쩜 이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식탁에서 정사를 치른 탓인지, 온몸이 삐걱거리고 허리가 유난히 저렸다. 특히 어제는 블란이 제 뒷구멍을 혹사한 탓에 그 부위가 유난히 아팠다. 열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고, 찢어진 게 아닌가 싶게 따갑고…. 통각을 마비시키는 약초가 있다면 쥐어뜯고 싶은 수준이었다.
라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자,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시선을 위로 올리니 누아가 시커먼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무감한 표정인데, 내용 때문인지 걱정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파 보이면 제 몸 위에 올려둔 팔이나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안 들어주겠지. 라핀은 반쯤은 체념하고 입을 열었다.
“네…. 헙?”
라핀은 자기가 말하고 깜짝 놀라서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걸걸했다. 어제 비명과 같은 신음을 내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버린 모양이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니 얼굴에 열기가 뜨끈뜨끈하게 올렸다. 라핀이 입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려던 참에 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라핀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댔다.
“왜 그래? 정말 안 좋기라도 한 거야?”
마주 보고 안겨 있던 자세였는데 얼굴까지 가까이 들이대니 꼭 연인과도 같은 모습이 됐다. 정말 몸이 안 좋긴 했지만, 라핀은 당황스러움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뒤로 물리려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목소리가 이상해서요….”
“물 줘?”
“네…? 네.”
누아가 먼저 제게 물을 주겠다고 제안한 거 맞아? 그의 배려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목이 아픈 건 맞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가 제 몸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몸을 누르던 묵직한 체중이 사라졌지만 몸은 여전히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고 아팠다. 라핀은 끙끙거리며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헤드에 베개를 받치고 등을 기댔다.
이게 뭐라고 힘들지…. 라핀이 작게 한숨을 쉬고 있는 사이, 누아가 물이 든 유리컵을 들고 돌아왔다. 그에게서 컵을 양손으로 받아 든 라핀은 꿀꺽꿀꺽 찬물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건조해서 칼칼했던 목이 그제야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듯했다.
라핀이 물 한 컵을 단번에 다 마실 기세로 꼴깍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잠잠히 바라보던 누아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블란의 반려가 되기로 했다면서?”
“케헥! 켁! 케엑!”
듣도 보도 못 한 소리에 물이 목에 턱 걸렸다.
사레들린 라핀은 이러다 목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침을 했다. 얼굴과 목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진 후에야 진정한 라핀은 혹시 그가 농담하는 건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기대와 달리 누아는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진심인가?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라핀은 진심으로 화난 얼굴로 그에게 대꾸했다.
“반려요? 제가, 그분의? 제가 왜요?”
“아니면 됐어.”
“…….”
라핀이 싸우자는 식으로 대꾸했지만, 힘이 빠질 정도로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엄청난 말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블란이 누아에게 그런 헛소리를 한 걸까? 아니지, 그럴 리가 없다. 블란은 저를 반려로 생각한다기보다는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럼 왜?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혼자 추측하는 것보다 물어보는 게 확실했다. 라핀이 조심스럽게 이유를 묻자, 누아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마치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듯이 쯧, 혀를 찬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당분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지 않나요?”
“아니, 앞으로는 사냥 나갈 때도 같이 나가.”
“네? 사냥 때도요?”
탈출하지 말라고 매번 눈을 부라리더니만,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바깥 구경까지 시켜주겠다는 거지?
당황스러움에 라핀이 눈만 깜빡거리자, 누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저를 쏘아보며 물었다.
“싫어?”
“아, 아뇨…. 조, 좋아요!”
라핀이 고개를 휙휙 젓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와 함께 사냥을 나가는 건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였다. 어쩌면 누아가 사냥에 정신 팔린 사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핀이 기회를 저버릴까 열심히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추궁했다.
“좋다고? 탈출 생각하는 거야?”
“예…?”
아니….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먼저 같이 나가자고 제안한 건 누아였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블란도 그렇고 원래 늑대들은 변덕이 심한가?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제 속내를 훤히 들춰본 것 같아 찔렸다. 라핀은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 아닌데…. 가, 같이 나가자고 제안하신 건 제가 아니라 누아 님인데….”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
“안 굴렸어요….”
거짓말인 탓에 라핀이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히 누아는 몇 번 압박을 주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꼭 탈출이 아니더라도, 누아와 함께 있으면 블란도 함부로 제게 손을 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매번 누아가 나갔을 때 손을 뻗어오곤 했으니까.
누아도 제 비밀을 알았으니 조심해야겠지만, 그래도 몸을 겹친 건 딱 한 번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블란보다는 누아가… 나, 낫겠지? 확신은 없지만, 나아야만 했다.
라핀은 힐끗힐끗 누아의 눈치를 보며 다행이라고 안도했지만, 사실 다행인 상황은 아니었다. 라핀의 ‘다행’이라는 기준이 너무나도 밑바닥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누아가 모든 걸 다 해준 탓에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과한 감이 있었지만, 워낙 몸이 안 좋다 보니 편하게 느껴졌다. 꼭 요양을 온 듯한 느낌도 나고…. 누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블란을 마주하지 못한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날. 본격적으로 사냥을 따라가는 날이 되었다.
모든 동물이 잠들었을 것 같은 야심한 밤. 누아는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끼며 나갈 채비를 하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라핀에게 눈짓을 줬다.
“나가자.”
“네.”
라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덮고 있던 이불을 주섬주섬 치워내고 그를 따라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디뎠다.
그렇게 양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일어났을 때였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두 다리가 꺾이듯 하며 휘청거렸다.
“악!”
쿵!
비명과 동시에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라핀이 재빠르게 이불을 붙잡았지만, 이불과 함께 그대로 맨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었다.
매트를 짚고 넘어진 덕에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지난 정사로 엉덩이가 아프던 참에 엉덩방아까지 찧으니 꼬리뼈부터 척추까지 찌르르한 고통이 타고 올라왔다.
“아야아…. 흐으….”
눈물이 핑 돌았다. 라핀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꼬리뼈 부근에 손을 얹자, 누아가 황당한 얼굴로 다가왔다.
“뭐야, 왜 이래?”
“으….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그날 정사 이후로 한 번도 두 다리로 걸은 적이 없었다. 누아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나름 회복을 한 건데 왜 아직도 몸이 이렇지? 처음으로 보지에 삽입했을 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뒷구멍에 삽입했던 후유증이 큰 것 같았다.
흔히 성교할 때 쓰이는 부위가 아닌 뒷구멍에 삽입해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라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누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쯧쯧거렸다.
“이래서야 같이 사냥 못 가겠는데.”
“가, 갈래요…. 갈 수 있어요.”
외출이야말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누아가 또 언제 변덕을 부리고 저를 집에만 가둬둘지 모르니,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잡아야 했다.
라핀이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누아가 손을 뻗어 일어나는 것을 도와줬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한두 발짝 걸어 보니 다행히 못 걸을 수준은 아니었다. 갓 걸음마를 뗀 것처럼 어정쩡하고 거북이처럼 느리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걸을 수 있으니 사냥을 따라갈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이렇게 걸을 수도 있고…. 따라갈 수 있어요.”
라핀은 그가 안 된다고 할까 봐 급히 말을 더 보탰다. 그렇지만 누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라핀을 바라보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상태로 따라오는 건 무리야.”
“아….”
라핀이 탄식을 터트렸다. 안 되는데…. 나가야 하는데….
라핀이 불안한 시선으로 누아를 올려다보자,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드넓은 등을 내보였다.
“업혀.”
“네?”
“내가 네 속도에 맞춰줘야 해? 성가시게 하지 말고 업히라고.”
라핀은 그의 말을 듣고도 선뜻 업히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당장 며칠 전에도 업힌 적이 있으니 그가 저를 못 업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깃털을 업은 것처럼 무거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안 될 것 같은데….”
라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의 숨소리와도 같은 작은 소리였으나, 그걸 귀신같이 알아들은 누아는 늑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냐는 듯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너도 못 업을까 봐?”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절 업으면 사냥은 못 하실 거 아니에요.”
걷는 건 그렇다 쳐도 사냥은 달랐다. 사냥은 민첩함이 생명이었다. 누군가를 업고서 평소대로의 속도를 낼 리가….
“가능할 것 같은데.”
…없다고 생각했지만, 누아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토끼 하나쯤은 제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듯이.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힘 좋고 재빠른 늑대라, 단순한 허세와 오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저를 사냥할 때의 재빠름을 알고 있으니 더 체감이 크게 다가왔다.
하긴, 저를 업는 건 일도 아니겠지. 라핀이 수긍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려던 참에 누아가 말을 이었다.
“방해되면 다른 놈한테 넘기면 되지.”
“…네? 다른 놈이요?”
“그때 봤지? 몬드라는 녀석이랑 검은 늑대들. 다 같이 사냥하는 거거든.”
“아….”
다른 늑대도 같이 사냥하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라핀이 그의 목을 안으려다 말고 어정쩡해지자, 그 정적을 이상하게 여긴 누아는 뒤를 힐끗 올려다보며 라핀의 손을 잡았다.
“왜, 싫으냐?”
누아는 그렇게 물으며 붙잡은 라핀의 손을 끌어 제 목을 끌어안게 했다. 자연스레 그의 널따란 등에 라핀의 상체가 닿았다.
라핀은 끌려가듯 그에게 업히면서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다른 늑대는 좀 무, 무서우니까요….”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익숙한 게 나은 걸까? 저번에 술자리에서 다른 늑대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누아도 저를 먹이로 생각하는 건 같았지만, 다른 늑대들은 눈빛이 달랐다. 누아처럼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살점을 뜯어먹을 것처럼 날것의 본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군침이 줄줄 흐르는데 우두머리인 누아의 먹이라서 참는 눈치였다.
라핀이 그 눈빛을 회상하며 누아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자, 가만히 듣던 누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라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받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안 무섭다는 거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라핀은 그에게 안기자마자 제가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누아는 그 늑대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것 같던데, 다른 늑대를 더 무서워했다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인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무서워요!”
“뭐? 내가 무섭다고?”
“어….”
그러나 제가 그의 생각을 잘못 읽었던 걸까? 라핀이 무섭다고 하자마자, 누아의 목소리가 삼엄해졌다.
무서워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라핀도 나름 눈칫밥 먹으며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늑대들의 생각은 정말 읽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아까부터 생각을 많이 했더니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어, 그, 그게…. 적당히 무, 무서워요….”
고심 끝에 나온 말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이었다.
머저리 같은 놈! 라핀이 자책하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푹 기대자, 아래에서 헛웃음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또 뭐야…. 다른 놈한테 안 넘길 테니까 징징거리지 마.”
어…?
다행히 누아는 짜증을 내지 않고 헛소리를 들었다고 치부하려는 모양이었다. 화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라핀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누아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방을 빠져나왔을 때, 거실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는 블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마주한 건 꼬박 이틀만이었다. 일부러 피해 다닌 건 아니지만, 지난번 일도 있고 그렇다 보니 꼭 제가 도망 다녔던 것처럼 느껴졌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제게 인사해 오려나? 긴장돼서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누아는 블란을 본 척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어쩌다 보니 라핀도 블란을 무시한 꼴이 됐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누아에게 업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빠르게 출구 쪽으로 향하는데 소파에서 일어난 블란이 재빠르게 좁은 복도를 막아섰다. 출구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막혔다.
“야.”
길을 막아선 블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라핀과 누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아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자 블란이 둘을 번갈아 보며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사냥.”
“라핀이랑? 쟤를 이렇게 업고서?”
블란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토끼와 함께 사냥을 간다는 것도 황당한데, 그것도 업은 채로 간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그 부분은 라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누아가 안 될 것도 없다는 얼굴을 해서 별 타격이 없나 했는데….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누아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건성으로 대꾸했다.
“뭐가 문제인데?”
“토끼를 사냥터에 데리고 간다니. 제정신이야? 위험해. 두고 가.”
“네 곁에 두는 게 더 위험해.”
누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블란으로 쏘아봤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늑대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랭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듯한 기세에 라핀은 울상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제 앞에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누아가 블란의 어깨를 밀치듯 하며 출구로 향했다.
뭐야? 왜 이래?
그 사이에서 어쩌다 둘의 대화를 들은 라핀은 한없이 당황스러웠다. 두 늑대의 사이가 원래 돈독한 것 같진 않았지만, 이렇게 눈만 마주쳐도 싸울 것처럼 나빠 보이지는 않았었다.
싸우기라도 한 걸까? 나를 블란 곁에 두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밖을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안일한 생각이었다. 사냥터는 늑대에게도 위험한 곳이었다. 평소 누아는 저를 방 밖으로도 못 나가게 했으면서, 굳이 저를 사냥터로 데려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누아는 며칠 전에 제 비밀을 알아챘고, 그걸 저주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누아 역시 저주처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를 외딴 산 어딘가에 버리려는 걸지도 몰랐다. 라핀과 함께 다니던 토끼 무리들이 했던 것처럼, 누아도 제 늑대 무리에게 저주가 퍼지기 전에 그러려는 걸지도 몰랐다.
라핀은 누아와 블란이 저를 버려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식으로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따끔했다.
늘 버림받기만 했다. 그깟 실험이 뭐라고. 제 아랫도리가 뭐라고….
늘 불길하게만 여겨졌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자신을 버렸다. 저주 같은 건 없다고 억울해했지만, 늘 기구하게 사니 정말로 제가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늑대들과 함께한 시간이 제게는 늘 괴롭고 진창을 굴러다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최근 이틀간 침대에서 몸 편히 있었다고 그런 걸까? 버림받는 쪽보다는 늑대와 함께 사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버림받는 것 자체가 라핀에게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늑대 소굴에서 탈출은 하고 싶으면서 버림받고 싶지는 않다니. 제가 생각해도 이상한 마음이었다.
***
집 밖으로 나오자, 누아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늑대들이 이쪽으로 오다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드러낸 늑대는 저번에 봤던 몬드였다.
“엥? 형님. 뒤에 그 토끼는 왜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아, 혹시 별식입니까?”
“우와아아!”
별식이라는 소리에 다른 늑대들이 환호를 질렀다. 맛있는 토끼 별식이라며 그들만의 축제가 벌어지려는 참에 누아가 동요도 없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헛소리하지 마. 이제부터 같이 사냥 나오기로 했으니까.”
“예? 얘랑요? 왜요?”
“가자. 늦었다.”
누아는 몬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더는 묻지 말라는 반응에 부하 늑대들은 별수 없이 입 다물고 누아를 따랐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암흑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별빛과 달빛만이 길을 밝히는 완연한 어둠. 주행성인 라핀의 눈에는 어스름하게밖에 보이지 않는데, 늑대들은 아는 길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야행성의 눈을 타고나서 그런지 거침없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사냥감이라고 할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다들 말 한마디도 않고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그저 업혀 있기만 한 라핀도 덩달아 숨을 죽이게 되는 삼엄함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수풀을 헤치고 다녔을까. 앞장을 서고 있던 누아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저기 있다.”
누아가 방향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디에? 라핀도 그곳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니, 혹 저 콩알만 하게 보이는 저걸 말하는 걸까 싶은 게 보였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것도 저 멀리에 있는 걸 어떻게 발견한 건지 놀라웠지만 일상적인 일인 듯 아무도 놀라는 이가 없었다.
뒤따라오던 늑대들은 누아의 말에 매복하듯 몸을 낮추고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갔다. 멀리 있는 사냥감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그러면서도 느리지 않은 속도로 수풀을 헤쳤다.
뒤늦게 사슴이 기척을 느끼고 늑대 무리를 발견했지만 때는 늦었다. 라핀이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도 누아와 블란에게 잡혔던 것처럼 사슴은 빠르게 내달렸지만 금방 덜미를 붙잡혔다.
저번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사슴의 목덜미에도 늑대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목덜미에 구멍이 뚫린 채 찐득한 피를 흘리는 모습은, 꼭 일전의 제 모습 같았다. 그저 사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임에도 라핀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사냥을 성공한 늑대들이 사슴을 끌어오자 몬드가 커다란 사슴 크기에 감탄했다.
“캬아, 형님! 엄청 큰 사슴입니다. 오늘 첫 사냥감이 이렇다니. 오늘 포식하겠는데요?”
“봤어.”
다른 늑대들도 환호를 내질렀지만, 누아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다음 사냥감을 잡기 위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누아의 써늘한 반응에 다른 늑대들은 당장이라도 식사를 할 것처럼 사슴에게 달려들다가도 흥을 죽이고 사슴을 등에 짊어졌다.
이어진 사냥은 순조로웠다. 사냥은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누아가 사냥감을 발견하면 부하들이 대신 사냥을 나서는 방식이었다. 특이한 점은 누아가 직접 손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저번에 저를 사냥했을 때에는 누아가 저를 사지에 몰고 달려들었는데 말이다.
때에 따라 다른 걸까? 라핀이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몬드가 누아의 곁에 서며 말했다.
“형님, 오늘따라 직접 실력 발휘를 안 하시는데, 혹시 토끼 때문입니까? 제가 업고 있을까요?”
혹시 누아가 사냥을 못 하는 이유가 저 때문인 걸까? 그러고 보면 두 손으로 저를 받치고 있어서 손을 못 쓰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저를 업고 사냥을 나온 건 무리수였던 것 같은데…. 라핀은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늑대한테 업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라핀이 허겁지겁 누아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자, 잠시 가만히 있던 누아가 고개를 저었다.
“별식 타령 하는 놈한테 어떻게 넘겨.”
“노리는 거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형님 거니까 안 잡아먹을게요.”
“됐어. 네 할 일이나 잘해.”
“아니…. 토끼를 업어 키우시나…. 사냥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누아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지나치자 몬드가 이상하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누아의 변덕은 저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보기에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몬드는 누아의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마음을 바꾸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설득을 그만뒀다. 다시 사냥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핀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아가 저를 버리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이 시간쯤이면 꿈나라에 가 있을 시간이라 그런 걸까? 점점 졸음이 쏟아져서 눈꺼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냥이 언제 끝나려나….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먼저 자도 되는 건가? 아냐, 잠든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세했지만, 해일처럼 몰려오는 수마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핀은 자기도 모르는 새 눈을 감고 꾸벅거리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야….”
꿍, 하고 부딪힌 이마가 아팠다. 라핀이 졸다가 깨서 이마를 문지르자, 누아가 힐끗 뒤에 시선을 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뭐 하냐.”
“아, 죄, 죄송해요…. 조, 졸음이 와서….”
혹 사냥을 방해한 것일까 싶어 라핀이 허둥지둥 사과했다. 그러자 누아가 별이 총총 뜬 새카만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 말했다.
“그냥 자. 어차피 깨어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는데.”
“…….”
도움이 안 되는 건 맞지만…. 오히려 방해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는 사이에 뭔 일이 생기면 어째….
라핀이 온갖 불안감에 자지도 않고 우물쭈물하자, 누아가 여태까지 잡은 사냥감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누아는 몸을 돌리며 저를 따라오던 늑대들에게 말했다.
“이만 잡았으면 됐다. 돌아가자.”
“엑? 벌써요?”
“먹을 만큼 잡았잖아.”
누아의 말에 뒤따라오던 늑대들이 오늘 잡은 식량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이른 철수긴 했지만, 오늘은 사냥 효율이 좋아 모든 늑대가 배부를 양은 되었다.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늑대들은 조금 아쉬운 눈치면서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리더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누아가 철수를 위해 걸음을 돌리고 힐끗 라핀을 올려다보자, 라핀은 티 나게 좋아하며 머리를 누아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잘 생각인 모양이었다.
누아는 제 어깨를 간지럽히는 머리칼에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속도는 이제야 지친 것처럼 점점 느려졌다.
***
간단히 요기를 한 누아는 라핀을 업고 집 안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부터 꿈나라로 간 라핀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라핀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 눕히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우음….”
라핀은 포근한 이불을 덮고 나서야 만족스러운지, 잠결에 웃음을 실실 흘렸다. 사냥감으로 잡혀온 토끼라고는 믿기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
황당하네…. 편히 자라고 침대에 눕혀 놓긴 했지만,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가 늑대 굴이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걸까?
누아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라핀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찔찔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평소 이미지에 따른 감상이었는지 입 다물고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은 꽤 봐줄 만했다.
블란이 말한 ‘예쁘다’ 수준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시선을 끌 만한 얼굴이었다. 매서운 늑대들과 달리 토끼는 유순하고 순진하게 생겨 외모가 생소하기도 하고. 여태까지 봐왔던 토끼 중에서도 특히나 청초하다. 저와 같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다른 늑대들도 라핀을 힐끗힐끗 많이 쳐다봤다.
씹…, 생각해 보니까 왜 이렇게 내 걸 탐내는 놈들이 많은 거야?
누아는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워, 짜증스럽게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
쿵, 쿵, 쿵 뛰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울렸다. 작은 체구만큼 심장도 작을 텐데 울림이 대단했다.
그렇게 작은 체구를 꽉 끌어안고 있자니, 며칠 전 술을 마시고 라핀을 안았던 일이 떠올랐다. 여전히 믿을 수 없고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수컷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지….
누아는 라핀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그가 단잠에 푹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웬만해선 안 깰 것을 확인한 그는 라핀의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슬금슬금 내려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었다.
남근이 달린 곳을 지나 더 깊은 곳을 매만지자, 도끼 자국처럼 가운데가 움푹 파인 부분이 있었다. 음란한 토끼가 속옷을 입지 않는 편인 데다가, 옷 재질이 워낙 얇다 보니 그 부위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그게 달려 있었단 말이지….
사실, 그날의 기억은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 제정신이 아니었다. 꿈처럼 기억이 흐리멍덩했다. 그렇지만 직접 손으로 만지니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으응….”
음심을 담아 중지로 꾹꾹 문지르자 라핀이 불편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움츠렸다. 작은 뒤척임에 누아가 급히 이성을 되찾고 손을 뗐지만, 머릿속을 채운 열기는 그대로였다.
“…….”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소리까지 죽였다가, 문득 제가 왜 이 녀석의 눈치를 봐야 하나 싶어졌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만지는 것뿐이잖아. 사냥감 상태를 확인하는 게 뭐 어떻다고….
열기에 휩싸인 머리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음부를 옷 너머로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해야 음부에 보지가 달린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고민은 아주 잠시였다. 잠깐 주저하던 손은 라핀의 허리춤에 있는 밴드를 붙잡고 단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
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역시 앙큼한 토끼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쯤 되면 속옷을 챙겨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워낙 특이한 음부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니 일부러 안 입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기로 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말랑해 보이는 작은 남근이었다. 이상하게도 남근을 봐도 거부감이 들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저와 같은 걸 다리 사이에 달고 있다고 한들, 제 것과는 모양도 크기도 전혀 다르기 때문인 듯했다. 색도 딴판이고, 심지어 털도 없어서 제 좆과는 아예 다른 것으로 보였다.
누아는 라핀의 한쪽 어깨에 턱을 기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핀의 남근을 손에 쥐었다. 보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자지가 말랑말랑했다. 이거 발기하면 쓸 수 있는 거야? 아니지, 이 앙큼한 토끼가 좆을 왜 쓰겠어. 아래에 그런 게 달려 있으니 굳이 쓸 필요가 없지.
멋대로 결론을 내린 누아는 촉감을 즐기며 성기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기둥을 주무르고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니, 금방 발기해져서 딱딱해졌다. 요도구가 벌름거리더니 투명한 쿠퍼액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좆같이 안 생겼어도 좆은 좆이라는 건가.
“흐으응, 으응….”
라핀은 자는 중에도 쾌감을 느끼는지 몸을 바르작거리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누아는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은근한 배덕감이 몰려왔다. 아니,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짓을 하고 있지만.
누아는 붉은 혀로 입술을 할짝이고는 라핀의 성기를 단단히 쥐었다. 그리곤 팔뚝에 바짝 핏줄이 설 만큼 용두질을 더 세고 빠르게 이어 갔다.
“우으, 흐으아….”
탁, 탁, 탁! 살갗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방을 메웠다. 반대쪽 손으로는 엉덩이를 터트릴 듯 세게 그러쥐었다. 양쪽 손에 각각 다르게 쥐어지는 촉감이 좋았다.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은 음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금방 손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왈칵 터져 나왔다. 라핀이 사정한 것이었다.
“하아, 하….”
사정 후라 그런지 라핀의 뺨에는 발긋한 홍조가 올라와 있었고 반쯤 벌어진 입술도 평소보다 붉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을 찬찬히 감상하고 있는데, 작은 머리통이 제 어깨에 툭 기대졌다.
몸에 실리는 작은 체중이 기분 좋았다. 언제 아쉬워했냐는 듯 금방 마음이 벅차올랐다. 누아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올라가려던 찰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분명 보지를 확인하겠다고 아랫도리를 깐 것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핀의 좆을 만져주고 대딸까지 해주고 있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같은 사내의 좆을 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수준이었지, 예쁘다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만져줬는지 모르겠다. 물론 촉감이 좋긴 했다만.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누아는 금방 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물고 빨아도 라핀은 자고 있으니 그냥 없던 일인 척해야겠다.
대딸을 그만둔 누아는 본래 목적을 상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핀의 두 다리를 벌리게 했다.
“하…, 여기 있네.”
고환보다는 뒤에, 뒷구멍보다는 앞에 제가 찾던 부위가 보였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두 번 봐도 신기한 부위였다. 왜 수컷인 라핀의 몸에 이런 게 달려 있는지… 신기했다.
그곳을 빤한 시선으로 들여다봤다. 아파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뒷구멍도 발갛게 부어 있었지만, 그쪽에는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날, 꿈인 줄 알고 내벽을 풀어주지도 않고 억지로 삽입했었다. 잠깐 그날을 회상하고 있자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손가락도 빠듯할 것 같은 이… 바늘구멍 같은 곳에 제 것을 넣었다고? 말이 돼?
이제는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아는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라핀의 오금을 눌러 다리를 더 벌리게 했다. 다리가 개구리처럼 활짝 벌어지면서 조개처럼 다물려 있던 보지 또한 함께 벌어졌다.
누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곳에 중지를 밀어 넣었다. 보드랍고, 따듯하고, 축축했다. 좀 전에 사정한 덕분인 듯했다.
찔꺽, 찔꺽….
손가락을 뒤로 뺐다가 넣고,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이곳저곳을 천천히 만져주자, 금방 젖은 소리가 났다. 점점 더 애액이 많아지기까지 했다. 보니까 자면서 사정까지 하던데, 원래 다들 잘 때도 이렇게 잘 느끼나? 왠지 보통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토끼가 민감해서 그런 것 같았다.
손가락을 감싸는 촉촉하고 따듯한 살결을 느끼고 있자니 뱃속에서 욕정이 요동쳤다. 성기가 손가락 말고 자신을 넣어 달라며 존재감을 점점 더 키워냈다.
“하아….”
누아가 나직하게 뜨거운 숨을 터트렸다. 한 번도 성교해 본 적 없을 때는 섹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아는 맛이 무섭다는 게 이런 걸까? 금단 현상처럼 또 그 맛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세상모르고 자는데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까도 녀석의 자지를 대신 만져주고 사정시켰는데 태평하게 자잖아. 모르잖아. 없던 일인 척 지나가도 되는 거잖아. 누아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쳤다.
더 하면 라핀이 잠에서 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내벽에 중지와 더불어 검지까지 밀어 넣자, 라핀이 바르작거리며 붉은 입술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흐으응….”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라핀은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보지를 쑤시던 누아의 손을 붙잡았다. 불편함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치우고 싶어 하는 손길이었다.
그렇지만 누아의 눈에는 먼저 손을 잡아 오는 작은 손이 유혹처럼 느껴졌다. 여기를 더 만져 달라고 이끄는 것 같았다.
“하, 제기랄….”
누아가 들릴 듯 말 듯 욕지거리를 하며 어금니를 꽉 짓이겼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턱관절이 움찔거렸다.
천천히 한다고 라핀이 어딜 가는 것도 아닌데, 절제력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누아는 좁은 구멍에 약지까지 성급하게 밀어 넣었다. 두 개의 손가락도 버거워하는데 세 개나 삽입하니 내벽이 꽉 조이면서 손가락을 힘껏 밀어냈다.
침입을 완강히 거부하는 내벽은 그날 밤과 같았지만 이미 누아의 아랫도리는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어서 속옷 안에서 빼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런 손장난 따위는 그만두고 어서 좆을 넣고 싶었다.
“우흐, 흐으, 하아….”
누아는 세 개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벽을 후벼 파듯 했다. 억지로 길을 트려고 하니 잠든 라핀이 움찔거리며 다리를 벌렸다. 제 딴에는 불편해서 그러는 듯했는데, 다리가 벌어지는 것에 따라 누아의 눈에는 점점 더 음욕이 번들거렸다.
찰팍거리며 내벽을 후비던 손을 단번에 빼내자 손가락이 투명한 애액으로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얼마나 질질 싸댄 건지 손등을 타고 맑은 액이 흘러내렸다.
손등을 핥으며 말간 액을 닦아낸 누아는 단단히 여며져 있던 바지춤을 풀었다. 철그럭 소리를 내며 바지와 속옷을 조금 끌어내리자 몽둥이 같은 성기가 퉁 튀어나왔다. 한 줌에 쏙 들어오던 라핀의 것과 달리, 흉흉할 만큼 커다랗고 핏줄도 바짝 선 것이었다. 쿠퍼액도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고작 토끼인데. 온전한 암컷도 아닌, 수컷에 보지가 달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흥분되는 거지?
이렇게 곧 성기를 터트릴 것처럼 발기할 것까지 있냐고. 누아는 이런 제 반응이 이상했지만, 이미 발기한 걸 어쩌겠는가. 굳이 가라앉힐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삽입할 건데. 누아는 일단 발기한 좆을 보지에 문지르고 봤다.
“하아….”
라핀의 음부에는 까슬까슬한 털도 나지 않아서 한없이 부드럽고 보송보송했다. 그러면서도 음탕하게 젖어 있다니….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귀두를 입구에 대고 문지르자, 서로의 생식기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만큼 젖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누아는 흐린 눈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라핀을 뒤집어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그 위로 가볍게 올라탄 누아는 침대 시트에 손을 짚고 그대로 허리를 아래로 꾹 눌렀다. 귀두가 보짓살을 꾹 누르니 조붓하게 다물려 있던 살덩이가 벌어졌다. 이윽고 음부 사이로 버섯 갓 모양의 귀두가 모습을 감췄다.
“하….”
겨우 귀두만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벽은 꼭 엄청난 것을 받았다는 듯이 격렬하게 움찔거렸다.
허겁지겁 귀두를 조여 오는 내벽의 맛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만치만 넣어도 황홀한데, 기둥까지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 거칠한 음모가 보드라운 엉덩이에 닿을 때까지 완전히 짓누르며 삽입하면 내벽이 얼마나 저를 반길까.
상상만으로도 완전히 발기한 성기에 더 빠듯하게 힘이 몰렸다. 여차하면 노팅이라도 할 것 같은 감각에 누아는 숨을 깊게 내뱉으며 저 자신을 진정시켰다. 티끌만큼 남아 있는 이성이 노팅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있자니, 이제야 제 아래에 깔린 라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 흐으우….”
라핀은 시트에 대고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번처럼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겨우 귀두밖에 넣지 않았는데 버거운 눈치였다.
어떻게 자는데도 저렇게 애처로운 얼굴을 하지? 심장이 빠듯해졌지만, 내벽에 자리 잡은 좆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불쌍해도 좆은 빼기 싫었다.
그래도… 저 나름 풀어줬다고 저번처럼 내벽이 좆을 잘라먹을 듯 굴지 않았다. 저번에도 별일 없었으니, 작열감이 덜한 오늘은 더 괜찮지 않을까 멋대로 추측했다.
“후우….”
누아는 느른한 신음을 흘리며 허릿심을 줬다. 느릿하게 귀두에 이어 기둥의 일부를 밀어 넣으려 하자, 다행히 내벽이 쩌저적 소리와 함께 길을 내줬다.
예상은 했지만, 허겁지겁 좆을 조이는 내벽의 맛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하아, 젠장. 미치겠군…. 욕구를 억누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 팔랑거리는 귀를 꽉 쥐고 제 마음껏 처박고 싶었다. 라핀의 몸 위에 제 몸을 완전히 포개고 고환이 엉덩이에 닿을 때까지 꾹꾹 짓누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없던 일인 척하려면 최대한 인내하고 기다려야 했다. 누아는 라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머리로는 라핀이 정신을 차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달리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침대 시트를 손으로 억누르고 있느라 팔뚝에 굵은 핏줄이 바짝 섰다. 점점 자세를 낮춰가며 반 이상 삽입했지만, 곯아떨어진 라핀은 끙끙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 어차피 기절한 것 같은데, 더 박아도 되지 않나. 내벽에 좆길도 난 것 같은데 욕심껏 박아도 되지 않을까.
욕정을 참는 것이 힘들었던 누아의 이마에는 송골송골한 땀이 맺혀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누아는 지탱하고 있던 몸을 완전히 무너트리며, 라핀의 몸 위에 완전히 제 몸을 겹쳤다.
“으으응!”
거칠거칠한 음모와 고환이 보드라운 엉덩이에 비벼지자, 라핀은 숨이 막힌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반동을 이용해 허리만 세차게 움직이니 한결 더 편하고 욕구대로 좆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누아가 라핀의 가슴을 끌어안고 욕심껏 내벽을 헤집는데, 무언가가 자꾸만 제 배를 간지럽혔다.
뭐야? 초를 치는 감각에 시선을 내리니, 뿅 하고 튀어나와 있는 앙증맞은 하얀 꼬리가 보였다. 늑대의 꼬리와 달리 아주 짧고 복슬복슬한 것이었다.
불만스러웠던 누아의 시선이 단숨에 차분해졌다. 누아는 조심스레 라핀의 짧은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보기에 라핀은 쥐방울만큼 먹는 것 같은데, 잘 먹고 자란 토끼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보기에도 좋고 촉감도 좋았다.
누아가 봉긋한 엉덩이와 함께 꼬리를 쓰다듬자, 라핀이 우물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우으, 흐즈 므으….”
“응?”
“흐므우….”
얼굴을 베개에 박고 있는 탓에 새어나오는 발음이 불분명했다. 신음은 아닌 것 같은데….
누아는 여전히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몸을 바짝 들이댔다. 단단한 가슴팍을 녀석의 등에 맞대면서 반대쪽 손으로 라핀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뭐라고?”
누아가 물어보며 라핀의 입에 귓가를 가져다대자,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우…, 하지 마아….”
라핀은 뭐가 그렇게 싫은지 손을 엉덩이 쪽에 대고 휘적거렸다. 아까는 음부를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꼬리를 못 만지게 하려는 것 같았다.
누아는 허우적거리는 라핀의 팔목을 단단히 부여잡으며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기껏 제대로 들어주려고 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저딴 소리다.
두 손을 족쇄처럼 붙잡고 머리맡에 짓누르자, 라핀이 “아.” 하는 옅은 소리를 흘리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깔려 있던 속눈썹이 올라갔다. 밤하늘을 닮은 새카만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흣, 으…, 누아… 님?”
라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주한 보이는 누아의 얼굴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이어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과 미약한 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윽…!”
라핀은 제 하반신 상태를 보려고 했지만, 자세 때문에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쯤은 알 수 있었다. 라핀이 긴장감에 눈치를 보며 누아를 돌아보자, 마주친 그의 두 눈이 음욕으로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저, 이, 이게 무슨….”
일전에 누아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어도, 제가 자는 사이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라핀이 당황스러움을 가감 없이 드러냈으나, 누아가 허리를 뒤로 물리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아읏….”
내벽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좆이 뒤로 빠져나가면서 귀두가 거칠게 여린 살을 긁었다.
예민한 부위를 긁는 행위에 라핀이 누아를 밀어내려 몸을 달싹였다. 그렇지만 짓눌린 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느껴지는 묵직한 체중이며, 팔목을 가볍게 그러쥐고 침대에 짓누르는 그의 솥뚜껑만 한 손이며…. 그 아래 눌린 제 모습은 영락없는 사냥감의 모습이었다.
“아, 비켜주-, 읏!”
라핀이 비켜달라고 누아에게 하소연하려고 했지만, 입술을 벌리자마자 무언가가 겹쳐졌다. 누아의 입술이었다.
그의 윗니가 라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더니 그대로 라핀의 입속을 침범했다. 혀를 빨아 당기고 얽는 행위가 한없이 거칠었다. 키스는 서로의 마음을 향유하는 행위였지만, 이건 아니었다. 일방적인 약탈이었다.
입맞춤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누아가 가만히 있던 하반신까지 놀리기 시작했다.
철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록 깊게 박아 넣으니, 뇌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헉 소리가 절로 나는 버거운 감각에 라핀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가 금안과 마주쳤다.
마주친 두 눈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선뜩했다. 라핀은 엄습하는 두려움에 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몸에 긴장이 들어가니 저절로 아랫도리도 바짝 조여졌다. 누아는 그에 옅은 신음을 흘리더니 맞댄 입술을 떨어트렸다.
“하…, 적당히 조여.”
제가 멋대로 자는 토끼를 건드려 놓고서는, 누아는 뻔뻔스럽게 힘 풀기를 강요했다. 라핀은 힘을 풀 수도 없을뿐더러, 놈만 좋은 꼴을 해주기 싫었다. 뭐가 좋다고 삽입하기 수월하게 도와주겠는가.
아, 혹시… 그가 제 안쪽을 버겁다고 느끼면 성기를 빼지 않을까?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 라핀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아랫도리를 조였다. 그러자 누아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윽!”
“흐읏, 으, 왜… 시, 싫어요…. 제가 왜…. 누아 님이 빼세요….”
라핀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러나 확실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누아가 예상치 못한 반격을 받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이렇게 나오겠다고?”
잠깐 내려다보던 누아는 라핀의 손을 결박하지 않은 손으로 라핀의 가슴팍을 콱 끌어안고, 손끝으로 작고 둥근 돌기를 굴렸다. 둥근 알갱이가 뭉개지자 라핀이 곧장 반응을 보였다.
“아, 하아읏…! 마, 만지지, 마요…!”
아니나 다를까 라핀이 몸을 퍼뜩 떨었다. 의도적으로 아랫도리를 바싹 조이던 힘 역시 흐느적거렸다.
그럼 그렇지. 토끼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토끼였다. 어디서 늑대를 이기려고 해? 누아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돌기를 끈덕지게 자극했다. 그러고 보면 불그스름하던 젖꼭지 색이 예뻤는데…. 엎드려 있어서 두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돌기를 손 안에 굴리다가 떼니, 유두가 금방 팽팽하게 세워졌다. 부드럽게 만져주다가 불시에 콱 꼬집자, 라핀의 몸이 완전히 흐드러졌다.
“아읏!”
라핀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아랫도리도 좆을 잘라먹을 듯 조이다가 풀렸다. 아까처럼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탐스럽게 조이는 수준이었다.
지금 얼굴 볼만할 것 같은데…. 누아는 젖꼭지며 얼굴이며 보지 못하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다, 라핀을 이끌고 자세를 달리했다.
누아가 라핀을 제 무릎 위에 앉게 하니 힘없이 늘어지며 누아의 가슴에 제 등을 기댔다. 여전히 후배위하는 자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엎드려 누워 있을 때보다는 라핀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누아는 라핀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까 못 봐서 아쉬워했던 부은 젖꼭지가 아찔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누아는 젖꼭지를 음험한 눈으로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일순간 좆이 불룩거리며 노팅할 것 같은 느낌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 뭐가 이렇게 섹스하기 힘들어…. 어차피 라핀은 제 것이었다. 그러니 뭐든 제멋대로 해도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그래도 노팅은 아니었다. 암컷 늑대도 노팅은 받아들이기 버거워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토끼한테 어떻게 노팅을 하겠는가. 맛있게 잡아먹을 생각은 있어도 섹스하다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누아가 추삽질하는 것도 멈추고 마음을 다스리는데, 앞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아가 흐릿하게 눈을 뜨자 라핀이 누아를 돌아보며 흐느끼는 게 보였다.
“아, 제발요. 하, 아파요….”
누아를 돌아본 라핀은 벌건 얼굴로 애원하고 있었다. 눈물로 뒤덮여 처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평소처럼 찔찔이같이 보여야 정상인데….
누아는 제 고생이 무력해지는 것을 느끼며 라핀의 귓불을 콱 깨물었다. 라핀은 귓가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울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
“후, 씹…. 라핀.”
불룩.
라핀은 제 몸 안에 품고 있는 좆이 움칠하는 느낌에 눈물을 히끅 멈추고 눈을 번쩍 떴다.
“아흐윽!”
아래를 벌리며 들어오는 좆이 울컥거리며 더 부피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 예민한 부위였기에 작은 자극이어도 더 커다랗게 느껴졌다. 라핀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아랫배를 감싸며 몸을 콩벌레처럼 작게 움츠렸다.
“아, 이, 이거 이상….”
“후우, 씹, 안 해. 안 할 거니까, 자극 좀, 읏, 하지 마.”
“흐으, 제, 제가 뭘….”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뭘 자극하지 말라는 거야!
라핀은 한없이 억울했으나, 화를 내려니 내벽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혹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좆에 자극이 될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아와 라핀이 하던 것도 전부 멈추고 숨까지 죽이자, 다행히 내벽 안에서 요동치던 좆이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살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여럿 경험해 본 라핀이라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움에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아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숨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 노팅할 뻔했네….”
“노, 노팅이요?”
노팅.
노팅은 몇몇 동물들이 발정기에 하는 행위였다. 생식기를 부풀려 암컷의 생식기에서 수컷의 것이 사정할 때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임신 확률을 높이는…, 말 그대로 야생적인 행위였다.
라핀은 그 말에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습기 찬 듯이 눅진하고 뜨겁던 공간의 열기도 단번에 차디차게 식었다. 라핀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그, 그런 걸 왜 해요! 저, 저는 흐, 으으, 토, 토끼인데! 아기도 못 낳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는 수컷이고, 토끼이고…. 비록 일반 수컷과 같은 몸은 아니었지만, 임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저한테 노팅을 하려고 했다고? 안 그래도 흉기처럼 커다란 성기를 불뚝거리면서?
라핀이 도리질을 치며 도망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두려움이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제대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두 다리를 질질 끌며 허겁지겁 기었다.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는 라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아는 무언가 속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누아는 라핀의 가냘픈 손목을 콱 부여잡고 라핀의 등에 제 가슴팍을 기대며 포복을 더 낮추게 했다. 라핀이 엉덩이만 위로 치켜든 자세가 되자 누아는 그대로 뒤에서 성기를 박아 넣었다.
“허억…!”
도망가려고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단번에 깊은 곳을 내찔렀다. 오장육부가 쪼그라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라핀이 반사적으로 깊게 숨을 들이켜자, 누아가 라핀의 귓전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못 낳는지, 어떻게 알아.”
“네? 흐읏, 못, 낳으니까, 그런… 응, 아아!”
라핀이 반박하려고 했지만, 무자비한 폭력처럼 추삽질이 이어지면서 삼켜졌다.
“씹…!”
미친 듯이 좆을 때려 박는 누아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누아는 라핀이 수컷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음부에 이런 게 달려 있다고 해도, 선이 여리다고 해도, 좆이 작다고 해도 제 눈에는 엄연한 수컷처럼 보였다.
그러니 여태까지 단 한 번조차 임신의 가능 여부조차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토끼가 늑대 새끼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데… 노팅할 뻔했다는 말에 아연실색하는 라핀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누아는 아이를 바란 적도 없었으며, 라핀과는 반려도 아니고 먹잇감과 포식자의 사이였다. 그러니 정답이 명확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기분 나빠 하며 라핀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아으으, 아! 하아, 아! 아!”
봐주는 것 없이 욕구대로 라핀의 두 팔을 붙잡은 채 퍽퍽 박으니 라핀의 몸이 인형처럼 힘없이 나풀거렸다.
일방적으로 누아의 성적 쾌감을 좇는 폭력적인 행위처럼 보였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워낙 민감하다 보니 라핀은 몇 회에 걸쳐 사정했다.
연이은 사정에 라핀은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눈이 까무룩 뒤집어지려 했다. 보지는 말할 것도 없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계속해서 사정한 좆은 아스팔트에 쓸린 것처럼 아팠다.
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평소 같았으면 확 기절해버리기라도 할 텐데, 오늘은 제가 잠든 사이 노팅당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깨어 있다고 막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니지만 라핀은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누아에게 애원했다.
“아, 흐으, 아아, 노, 팅 싫어요! 하, 하지… 마요. 아, 으흣…!”
“하아, 노팅, 후, 안 해.”
“으으, 하아, 아, 다음에도… 하, 하지, 으응, 마세요….”
“안, 한다니까. 널, 죽일, 하아, 것도 아닌데.”
누아가 제가 그럴 이유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라핀에게는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죽일 것도 아니라고? 그럼 토끼 농장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 누아가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는 몰라도, 당장 며칠 전까지 겁박당했던 라핀에게 기껍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래도 정말 누아는 노팅할 생각은 없는지, 미친 듯이 치닫다가도 잠깐 행위를 멈췄다가 다시 이어 갔다. 흥분하다가도 진정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탓에 섹스는 저번보다 길게 이어졌다. 흘레붙은 두 몸은 땀범벅이었다. 농탕질의 끝이 보인 건 닿지 않아야 할 곳에 누아의 성기가 닿았을 때였다.
“아흐으윽…!”
누아가 노팅한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행위에 내벽의 조임이 풀려 깊은 곳까지 성기를 품을 수 있게 된 탓이었다.
생각도 못 한 부위를 자극당해 라핀의 성기 끝에서 말간 액체가 피빅 튀어나왔을 때, 내벽 안에서도 뜨거운 것이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하….”
누아는 사정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완전히 라핀의 몸 위에 엎어졌다.
그는 사정의 여운을 즐기며 라핀의 날렵한 턱이며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흉이 지지 않을 정도로 약한 장난질이었다.
끝내 이어진 사정에도 라핀은 좀처럼 정신을 놓지 못했다. 그가 노팅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액이 퍼지는 따스한 감각을 느끼고 있자니 찜찜했다.
라핀은 단 한 번도 제가 임신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없다. 애초에 몸에 보지가 생겼더라도 이곳으로 성행위를 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으니까. 블란과 누아와 몸을 겹치게 됐을 때도 거기까지는 생각도 안 했다.
누아 앞에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고 단언했는데, 아래에 보지가 생긴 것도 그렇고 실험실에 있을 때 온갖 실험에 주사를 맞은 것이 떠오르니 오싹한 기운이 제 몸을 덮쳤다.
노팅은 안 했더라도 안에 사정하면 위험한 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지만, 현실도피가 먼저였다. 너무 끔찍한 생각이다 보니 이 문제 자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라핀은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눈을 감았다. 바라지도 않던 기절이었다.
***
“아, 으으….”
눈을 뜨기도 전에 앓는 소리가 먼저 났다.
으윽, 미친 늑대…. 누아는 왜 제가 잘 때 건드리는 거야! 블란과 있을 때는 온 시간이 긴장 그 자체인데, 누아는 꼭 저를 안 건드릴 것처럼 무감하게 굴었다. 그래서 경계를 누그러트리고 잠들면 그 틈을 타서 저를 덮쳐들었다.
그 탓에 누아에게 느껴지는 배신감은 블란보다 더했다. 저한테는 관심도 없는 척, 먹이로만 보는 척하더니 왜 자꾸 이러는 거냐고!
기절한 새 씻겼는지 몸은 보송했지만, 여전히 아랫도리는 좆을 받는 것처럼 벌어진 느낌이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애벌레처럼 끙끙거리며 몸을 옹그리고 있자니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평소 제 몸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가 없었다.
라핀은 옆자리 침대 시트 위를 손으로 휘적거려 봤지만, 침대 시트만 만져질 뿐이었다. 라핀은 혹 제가 방향 감각을 잃었나 싶어 이불 속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진짜로 누아가 없었다.
휑한 빈자리를 보고 있자니 두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평소에는 옆자리에서 자는 것도 모자라 껴안고 있는데, 웬일로 감시를 안 하지?
라핀은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도 꿈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지, 아직 시트에 미세한 온기가 남아 있으니 화장실에 간 것일 수도 있다.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었다. 게다가 어차피 누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핀의 관심은 금방 다른 쪽으로 쏠렸다. 어제 그의 밑에 깔려 애원하고 울부짖은 탓인지 목이 칼칼하고 아팠다. 목구멍이 가뭄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메말랐다.
물 마시고 싶다…. 거실에서 가져와야겠다며 몸을 일으키는데, 발에 땅을 짚고 일어나자마자 라핀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으으….”
꼬리뼈부터 엉덩이까지 둔탁한 통증이 찌르르 지나갔다.
일어나기 전부터 느껴졌던 통증은 일어나니 배로 컸다. 어제 누아를 받느라 다리를 한계까지 벌리고 있던 탓에 허벅다리 안쪽 근육이며, 계속 성기가 들락날락한 음부, 계속 힘을 주고 있었던 하복부 등…. 근육통이 안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
이 망할 늑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걸음을 내디딘 라핀은 갓 태어난 사슴처럼 어기적어기적 걷게 됐다.
허리를 부여잡고 엉성한 걸음으로 방문으로 향하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며 커다란 인영이 라핀의 눈앞을 막아섰다. 커다란 덩치에 고개를 드니, 누아가 미간을 왈칵 구기고 있었다.
“어디 가.”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건가 했는데, 바깥에 나갔다 왔는지 그에게서 차가운 겨울 냄새가 풍겼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돌로 깎은 작은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푸른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누아의 두툼한 몸이며 얼굴 윤곽에 푸른 능선이 따라붙었다. 그 탓에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험악한 얼굴이 잘 보였다.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온 건지 궁금했지만, 누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물 마시려고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눈 감고 들으면 제 목소리라고 생각도 못 할 괴상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메말라 있는 건지 침을 삼키니까 비릿한 피 맛이 날 정도였다.
걸걸한 아저씨 같은 목소리였으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누아의 얼굴 근육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그는 언제 화를 내는 것처럼 날카롭게 굴었냐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기다려.”
꼭 인간들이 강아지에게 명령이라도 할 때 말하는 듯한 가벼운 투였다.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려다가 말고, 자세를 낮추고 라핀의 오금을 콱 끌어안았다.
“악!”
예고도 없이 두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공중에 뜬 몸은 누아의 어깨에 걸쳐졌고, 두어 번 흔들리더니 푹신한 곳에 내팽개쳤다. 다름 아닌 침대 위였다.
이게 뭐야? 그냥 침대에 누우라고 말하면 될 것을 매번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무식하게 힘만 센 늑대들의 방식인 모양이었다.
역시 힘만 센 놈들은 답이 없다. 라핀이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누아가 침대 헤드에 베개를 받쳐주고 몸을 기대게 하고 방을 나갔다.
라핀은 방금까지 욕이란 욕은 다 해 놓고서는, 등에 받친 푹신한 베개에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쭉 벌렸다. 아, 편하다. 무엇보다 허리에 부담도 안 가서 좋았다.
이 모습을 보면 또 기분 좋은 찔찔이 같아 보인다고 하려나? 또 놀림받기 싫어 라핀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누아가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담아 돌아왔다.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라핀에게 유리잔을 내밀었다.
“마셔.”
“네….”
왠지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라핀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컵을 받아 들고 꼴깍꼴깍 목을 축였다.
가뭄 난 것처럼 메말랐던 곳에 물이 들어오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물이 달았다. 단번에 물을 마시고 나서야 누아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물 마시는 것도 못마땅하다는 시선이었다.
라핀은 누아에게 물도 편히 못 마시게 하는 거냐고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제 처지를 알기 때문에 욕을 삼키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빤한 시선을 느끼고 있자니 자연스레 어젯밤이 연상됐다.
어제, 그는 제 몸 위에 올라타 무자비하게 허리를 놀리면서도 제게서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았다. 정욕이 번들거리는 금안으로 저를 빤히 바라봤고, 심지어 입술을 맞추는 순간에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저를 놓지 않겠다는 집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선이었다.
왜 지금 그때의 시선이 떠오르는 거야…. 기억을 떠올렸을 뿐인데도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라핀은 물을 다 마신 후 이불을 쥐어 땀을 자연스럽게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더는 시선을 버틸 수가 없었다. 곱게 말했지만, 보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아는 라핀이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앞으로 물 마시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예…?”
“내가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라핀은 애꿎은 이불만 바라보던 시선을 들고 누아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게 착 달라붙어 있었는데, 미간의 주름 하나가 불만스러움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거지?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간 게 화가 났던 걸까?
사실 라핀은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나가려던 찰나에 누아가 돌아와서 문턱에서 잡히지 않았나. 그리고 라핀이라고 반박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안 계셨잖아요….”
“뭐?”
“어제 그, 그런 짓해서 목도 아픈데…. 물 마시고 싶은데, 누아 님도 없고…. 말라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해요….”
말라 죽을 것 같다는 건 과장이긴 했지만, 물 한 모금 못 마시게 하는 건 너무했다. 양심적으로 물은 마음껏 마시게 해줘야지….
라핀이 구시렁거리며 불만을 표출하자, 굳어 있던 누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내가 잘못했네.”
“에?”
하소연이 통한 걸까? 뜬금없이 누아가 반성을 했다.
반성하는 누아라니. 늑대가 반성하는 모습은 살면서 처음 봤다. 라핀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을 때, 누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안 떨어질 테니까 됐지?”
“뭐, 뭐가 돼요…?”
“내가 없어서 그랬다며. 내가 같이 있으면 목마르고 말라 죽을 것 같은 일 없을 거 아니야.”
“아….”
라핀이 작게 탄식했다. 싫은데….
안 그래도 감시가 심한 편이라고, 제발 좀 떨어져 달라고 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렇지만 이번 역시 보복이 두려워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젠장…, 괜한 소리를 했다. 라핀이 애꿎은 빈 컵만 만지작거리는데, 누아가 그것에 힐끗 눈짓을 주며 말했다.
“다 마셨으면 컵 내놔.”
“…네.”
라핀은 컵을 돌려주고 꾸물꾸물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가만가만 쉬는데 빈 잔을 치우던 누아 쪽에서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또 뭐야, 왜 쳐다보는데? 라핀이 의아한 시선으로 누아를 마주 보자, 그가 헛기침하며 뜬금없는 물음을 해왔다.
“근데… 너 많이 아프냐?”
“네? 어디요?”
아픈 곳을 말하자면 수십 군데가 넘었지만, 어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라핀이 되물으며 눈을 깜빡거리자 누아가 흘기듯이 라핀의 하반신에 눈짓을 주며 말했다.
“어제 좆 받은 곳 말이야.”
“…아.”
라핀이 어벙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차마 그곳의 안부를 묻는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라핀이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대뜸 누아가 곤란하다는 듯이 제 뒷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트리며 묻지도 않은 걸 얘기했다.
“아니, 어기적거리면서 걷는 꼴을 봐줄 수가 있어야지.”
“…….”
“신경 써 달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
누아의 말투는 가면 갈수록 짜증이 실렸다. 왜 난데없이 성질을 부리는지…. 가장 황당한 건, 라핀은 누아에게 신경 써 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봐 달라고 쇼를 한 게 아니라, 정말 아팠다.
아직도 음부가 그의 좆 모양대로 벌어져 있는 것 같았고, 걸을 때마다 천이 스쳐서 따끔거리니까 어쩔 수 없이 우스운 꼴로 걸은 거였다. 지금 화를 내야 할 건 누아가 아니라 저였다.
“그럼 신경 안 쓰시면 되잖아요….”
“뭐?”
라핀이 꿍얼꿍얼 대답하자, 누아의 부산스럽던 움직임이 대번 멈췄다. 그 탓일까, 조금 전에 씨근덕거리며 무어라 할 때보다 되묻는 말 한 글자가 더 묵직하고 서늘하게 들렸다.
블란은 누아보다 무서운 늑대니까 말조심한다고 노력하는데, 욱하고 치솟는 성격 때문에 일을 치르고 말았다.
나름 말을 참고 고른 거였는데… 라핀은 뒤늦게 제 대답을 후회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누, 누아 님 탓 안 하니까… 거,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말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속으로는 존나게 누아 탓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욕만 하지, 놈에게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제발 신경 꺼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누아는 제 말을 듣고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누가 널 걱정한대? 내가? 널?”
“…….”
“눈앞에 알짱거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
내가 눈앞에 알짱거리는 게 아니라, 네 놈이 못 나가게 해서 그런 거잖아….
계속해서 듣다 보니, 이 늑대는 뭐든 남 탓으로 돌리는 데 아주 일가견이 있다. 뭐만 하면 내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실상은 제 좆대로 하고 있는 거면서.
“아…, 오해해서 죄송해요. 누아 님이 절 걱정할 리가 없는데.”
“…….”
“아랫도리는 아프긴 한데…, 더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라핀이 힘없이 웃으며, 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말투에 은근슬쩍 가시를 세웠다. 무식하게 힘만 센 누아가 뜻을 알아들었을까 싶었지만 어렵게 말한 것도 아니니 알아들었겠지 싶었다.
라핀은 누아를 무서워하면서도 나름 할 말은 다 한 기분이었다. 속이 조금 시원해졌을 때쯤, 아무 말 없던 누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옷 벗어.”
“네?”
“상처에 약 발라주겠다고.”
약을 발라주겠다고? 갑자기?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를 해주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라핀이 옷도 벗지 않고 머뭇거리자, 누아가 답답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네 목, 기껏 치료해 줬는데 걸레짝이 됐잖아. 더럽게.”
“아….”
라핀이 의아하게 제 목을 내려다보니, 하얗던 붕대가 어느새 누런색으로 변해 있었다. 접착력이 떨어졌는지 흐느적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매번 자고 일어나면 누아의 품 안이었다 보니 땀범벅이었고, 늑대들과 정사를 가질 때면 격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땀이 비처럼 흘렀다. 아, 그건 격렬한 운동이 맞긴 한가…? 아무튼, 관계가 끝난 후에는 저를 손수 씻겨주기까지 했으니 물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어서.”
“…….”
그러고 보면 벌써 목 상처 치료는 꽤 여러 번 받았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치료를 어색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누아도 딱히 저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기보다는, 눈에 걸리적거리니까 치료해 주려는 것 같고.
라핀은 고분고분 셔츠 단추를 풀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목 상처는 셔츠를 안 벗어도 약 바를 수 있잖아?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누아는 이미 구급상자를 들고 온 참이었다. 라핀은 도로 옷을 입는 것도 뭣해 셔츠를 개어 옆자리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누아는 라핀의 맞은편에 앉아 구급상자를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뚜껑을 열었다.
“…….”
달그락달그락, 상자 안에서 약을 꺼내던 누아가 고개를 들더니 라핀의 상박을 말없이 바라봤다.
묘한 시선에 분위기가 그날처럼 미묘해졌다. 뭐지? 시선이 조금 아래로 가 있는 듯한데. 라핀이 침을 꼴깍 삼키며 누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가 속눈썹이 반쯤 내려가도록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부었다.”
그의 시선은 목덜미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유두였다.
라핀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저렇게 노골적인 시선은 알 수밖에 없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식욕보다는 음욕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라핀이 은근슬쩍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했으나, 금방 의도를 눈치챈 누아가 손목을 붙잡아 불같이 저지했다.
“읏….”
누아는 손목을 붙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라핀의 톡 튀어나온 유두를 검지로 힘 있게 눌렀다.
바짝 서 있던 알맹이가 손가락에 눌려 모습을 감췄지만, 알맹이 주변을 둘러싼 흰 살결도 퉁퉁 부어서 핑크빛이 돌고 있었다.
누아는 손가락 아래의 돌기를 뭉근하게 굴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부은 건 유두뿐만이 아니었다. 눈처럼 뽀얗던 라핀의 상반신은 난리가 나 있었다. 간밤의 일을 모른다면 피부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물어뜯었던가? 누아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던 터라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일전에 라핀을 잡아먹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과 달리 아직 녀석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녀석을 이용해 토끼 농장을 지으려는 생각도 변함없기도 했고. 그러니 이런 식으로 잡아먹을 듯 이빨 자국을 잔뜩 내놓은 게 이상했다.
내가 왜 그랬지? 누아가 심각한 얼굴로 라핀의 상체를 살피는데, 자꾸만 시선이 이빨 자국이 난 곳보다 젖꼭지로 향했다. 부어오른 젖꼭지를 보고 있자니 어제처럼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고 식욕이 돌았다.
암컷도 아니고 젖도 나오지 않는데 저렇게 부어서는….
누아는 남몰래 입맛을 다시다, 라핀의 마른 허리를 두꺼운 팔로 감싸 제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헉…!”
반대쪽 손으로 조막만 한 엉덩이를 받쳐 들어, 제 허벅다리 위에 앉히기까지 했다. 눈 깜짝할 찰나였다.
순식간에 누아의 무릎에 앉아 마주 보게 된 라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동요한 티를 냈다. 애도 아니고, 다 커서 무릎에 앉다니. 민망함에 라핀이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버둥거렸으나 누아가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힘만 빠졌다. 금방 반항을 포기한 라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왜요? 약은 그냥 바르면 되잖아요….”
단순히 목덜미만 치료할 것이라면 이렇게 몸을 바짝 붙일 필요가 없었다. 지나친 밀착은 오히려 치료를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이유나 변명 대신 라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누아의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했고, 너무나도 가까웠다. 어색했다.
라핀의 귓가가 꽃잎처럼 붉게 물들었을 때, 누아가 대뜸 허리를 굽히더니 유두를 한입에 물었다.
“아읏…!”
누아는 입에 문 유두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작은 돌기에 닿는 따듯한 점막과 자극에 라핀이 어깨와 팔이 부르르 떨렸다.
라핀이 급하게 누아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누아의 손이 라핀의 마른 등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가슴에 완전히 묻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흡착이 더 심해졌다.
“하, 아으, 왜, 왜 이러세요…!”
“…….”
“누아, 님…!”
라핀이 기겁하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왜 이러냐고? 그냥… 맛있어 보였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이유가 있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말해 보아야 라핀이 뭔 그딴 이유가 다 있냐고 할 테고, 맛있는 돌기에서 입술을 떼어내는 시간이 단 일 초도 아까워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하, 으으, 누, 누아 님.”
촉촉이 젖은 목소리가 누아의 귀에도 녹아드는 듯했다. 더없이 야살스러웠다. 사내의 음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라면 만점을 주고 싶을 만큼.
누아는 유두를 빨다가 말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제가 빤 곳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부어 있던 유두를 물고 빠니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었다고 한들 수컷의 가슴일 뿐이었다. 손에 차고 넘치는 것도 없는 밋밋한 부위. 그런데 왜 이렇게 맛있고 자극적으로 보이는지. 풍만함도 없는데 왜 이렇게 물고 빨고 싶은지 모르겠다.
누아는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라, 이 요망한 토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지고 빨아주는 거라며 끝끝내 이유를 돌렸다.
다시금 유두를 입에 물고 얼마나 괴롭혔을까. 끙끙거리며 신음을 참던 라핀은 힘이 다 빠졌는지, 얼굴을 누아의 어깨에 기대며 졸라댔다.
“아, 흣, 거기 그러지 말고…. 야, 약 발라주세요…. 네?”
“시켜먹지 마.”
“아니….”
누아의 단호한 말에 라핀이 황당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시켜먹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약 발라준다고 했으면서….
그래도 누아는 약 발라준다고 하고 애먼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뒤늦게 유두에서 입술을 뗐다. 얼마나 게걸스럽게 빨았는지 젖꼭지에서 누아의 입술까지 얇은 은실이 이어졌다. 젖꼭지 부근도 완전히 침 범벅이었다.
누아는 한참 후에야 가슴에서 시선을 떼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라핀의 목덜미를 감은 너덜너덜한 붕대를 풀어냈다.
물렸던 곳은 이전처럼 흉측하게 이빨 자국으로 구멍이 뻥 뚫려 있지도 않았고 피가 울컥울컥 나오지도 않았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수인의 의학으로는 이 정도가 최선인 것 같았다.
라핀은 손으로 상처를 매만져 상태를 확인하고는 누아에게 말했다.
“이제 약 안 발라도 될 것 같은데요.”
“왜.”
누아가 솥뚜껑처럼 큼지막한 손에 아기자기한 연고를 든 채 말했다.
이질감이 드는… 정말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누아는 약도 안 바를 것처럼 거칠고 무서운 인상이었다. 실제로 그의 손에도 자잘한 흉터가 져 있기도 했고.
라핀은 그 모습을 보고 왠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나저나 왜냐고?
“살도 차올랐고, 이제 안 아프니까요…?”
“약 발라달라고 조를 땐 언제고. 꺼냈으니까 그냥 발라.”
“…….”
조른 게 아니라, 자기가 발라준다고 하고 애먼 짓을 하니까 말린 건데….
왜 자꾸 왜곡되는 건지. 라핀이 투덜거림을 삼키고 있을 때, 누아는 기껏 구급상자까지 꺼내온 게 아깝다는 듯 손가락에 연고를 쭉 짜냈다.
손가락 한 마디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약초 연고를 듬뿍 짠 그는, 어울리지도 않게 솜털처럼 가벼운 손길로 톡톡 환부를 건드렸다.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흉이 지기는 했지만, 정말 아프지 않았다. 그런 부위에 닿는 손길은 꼭 이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괜히 제 얼굴까지 낯간지러워질 만큼 가벼운…. 그래, 마치 참새가 가볍게 통통 튀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런 태도를 받고 있자니, 라핀은 의아해지기만 했다. 어차피 흉터를 낸 것도 누아였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도 흉터는 깨물지 않고 지나가더니만, 혹 반성이라도 하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휘발됐다. 이 늑대가 그럴 리가 없지. 워낙 변덕이 심한 늑대니까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겠거니 싶었다.
누아의 행동에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애틋한 손길을 받고 있자니 라핀은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라핀은 약을 발라주는 누아의 손을 붙잡아 저지했다.
“이, 이만하면 됐어요.”
“…….”
붙잡은 누아의 손끝이 잠깐 멈칫했던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제가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 누아를 놀라게 한 건가 싶었는데, 라핀의 착각이었던 듯 금방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어쨌든, 지나치게 간지러웠던 손길이 떨어지니 어색한 분위기는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상처 치료가 끝났으니 이제 좀 떨어져도 되겠지. 라핀이 은근슬쩍 누아의 품에서 벗어나려는데, 갑작스레 사타구니 사이로 큼직한 손이 파고들었다.
“앗!”
뱀처럼 스르륵 파고든 손은 그대로 보지에 닿았다. 하의를 입었기에 맨살을 직접 만진 건 아니었으나, 지나친 마찰로 인해 퉁퉁 부어 있던 참이라 야트막한 접촉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라핀이 부르르 떨자, 누아가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도 발라야지.”
“…….”
“다쳤잖아.”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보지를 문질렀다. 아프니까 약을 바르는 건 좋은데…. 라핀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직접 발라주시려는 건 아니죠…?”
손가락을 문대는 모습이 꼭 직접 발라주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이런 부위까지 직접 약을 발라주는 정성을 보일까 싶었지만, 누아는 정말 그럴 생각이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
“문제 있어?”
“당연하죠….”
“뭐가 당연해.”
“…….”
덤덤한 반응에 라핀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가? 놀리려고 모르는 척하는 건가 싶었는데, 눈을 마주하니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이런 대답하기 정말 싫지만…. 라핀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느, 느끼니까요….”
“…….”
라핀의 말에 누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런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수치스러워져 라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더러운 음담패설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가 커다랗게 들릴 정도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의 허벅지에 앉아 있어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 같았다.
지독한 어색함에 라핀이 괜히 옷자락을 쥐었다 펴고 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누아의 입이 열렸다.
“…그럼 네가 직접 바르든지.”
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구급상자에서 다른 연고를 꺼내 라핀에게 넘겼다.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서 의외였다.
“바지 벗고 약 발라.”
“…….”
속옷은 안 입었으니까, 하는 말이 뒤따랐다.
제발 속옷 좀 줬으면 좋겠는데, 이 늑대들은 무슨 고집인지 제게 바지는 줘도 속옷은 안 줬다. 본인들은 멀쩡히 속옷을 입는 걸 보면, 아마 늑대 특유의 변태적인 성향인 듯했다.
아무튼… 그건 둘째 치고 라핀이 누아의 품에서 벗어나 약을 바르려고 했지만, 누아는 무릎 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수긍한다 했다. 체념한 라핀은 결국 숨을 깊게 내뱉으며 바지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꼼지락꼼지락 바지를 내리니 수줍게 음부가 드러났다. 민망해서 얼른 약 바르고 바지를 도로 입어야겠다 싶었다.
라핀은 손끝에 연고를 짜내고 조심스레 다리를 벌렸다. 조심조심 손가락을 음부에 가져다대고 보니, 문득 꼭 자위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 약을 바르는 건 혼자서 남몰래 해야 할 듯한데, 누아는 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음부에 약 바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저렇게 심각하게 볼만한 행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차라리 우스운 자세라고 놀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이 가라앉아 더 민망했다.
열병이라도 나는 것처럼 머리가 홧홧했다. 라핀은 뒤늦게 무릎을 모으며 누아에게 부탁했다.
“저… 누아 님, 다른 곳 보시면 안 돼요?”
부담스러운데….
뒷말을 겨우 삼키자, 누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왜 그래야 하냐는 듯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뭐? 약이든, 너든 둘 다 내 거잖아. 제대로 바르는지 봐야지.”
“…뭔 논리지.”
“뭐라고?”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 누아가 화내기 전에 급히 수습했다.
여전히 무슨 논리인지는 이해 못 하겠지만, 그는 저를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늑대였다. 그러니 수치심을 주는 행위로 저를 놀리려는 걸 수도 있었다.
라핀은 누아를 더 설득해 봤자 어차피 그가 제멋대로 할 걸 알았다. 어쩌면 약까지도 제가 발라주겠다며, 스스로 바를 기회마저 박탈해갈 수도 있었다. 그는 그만큼 변덕이 심하니까.
단념한 라핀은 더듬더듬 하반신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부어서 핑크빛으로 물든 보지를 만졌다가 얼굴을 확 구겼다.
“으….”
혹사당한 그곳은 손이 살짝 닿는 것도 아프다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약을 바르려는 몸짓이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라핀의 손가락은 겨우 보지 겉쪽 살을 방황했다.
차마 안쪽까지 손가락을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만져본 적 없는 부위였다. 음부를 씻을 때 만진 적은 있으나, 무서워서 늘 스치듯 만지는 게 고작이었다. 늑대의 혀, 두터운 손가락, 그보다 더 큰 좆까지 넣었던 곳인데 제 손가락 하나 넣기가 두려웠다.
라핀이 질질 시간을 끄는 것을 눈치챈 누아는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투로 재촉했다.
“겉에만 깔짝대지 말고 제대로 발라.”
“바, 바를 거예요.”
“이래서 어느 세월에 바르려고?”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 몸에 약을 바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핀은 어쩐지 사채업자에게 돈 갚을 시간을 달라고 비는 것처럼 구차한 말투였다.
그러나 악덕 늑대는 못 기다려 주겠는지, 보지를 만지고 있는 라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왔다.
“안쪽까지 꼼꼼히 발라야지.”
“아흐흣…!”
그는 힘을 주어, 억지로 보짓살 사이로 라핀의 손가락을 비집어 넣게 했다. 라핀의 검지가 좁은 틈 사이로 모습을 감추기가 무섭게 누아는 손을 잡아끌며 상하, 좌우로 흔들게 했다.
“아흐읏…!”
“이렇게… 내벽도 풀어주고.”
“아! 흐으으, 아, 잠….”
“안에서 손가락도 움직여야지.”
“아으응!”
라핀은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누아가 이끄는 대로 내벽을 만졌다. 변주를 주듯 손가락이 찌르는 부위를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쾌감에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연고가 녹은 탓인지 내벽이 점점 미끈미끈하고 축축해졌다. 분위기는 금방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라핀은 열기로 몽롱해진 머리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도, 문득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짧은 손가락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이곳이… 늑대의 좆을 받아들였단 말이야? 그게 가능해?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누아의 사타구니에 몽롱한 시선을 가져갔다. 발기한 것인지, 바지 위로 몽둥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 보였다.
저런 걸 받았다니…. 정말 안쪽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라핀은 두려움에 모골이 송연해지면서도 침을 꼴깍 삼켰다.
뜨거운 숨과 틀어 막힌 신음이 전부였던 공간에 꼴깍이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연하게 울려 퍼졌다.
“하, 씹…, 지금 어딜 봐?”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생각한 건 라핀뿐만이 아니었는지, 누아가 금방 라핀의 눈길을 눈치채고 화를 냈다.
남의 음부를 함부로 쳐다보다니. 기분 나쁠 만한 행위였다. 라핀도 누아가 제 음부를 빤히 바라봤을 때 기분이 안 좋았으니까….
“죄, 죄송, 죄송해요….”
라핀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말을 떠듬거리며 사과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 모습이 너무 구차했다.
라핀이 코를 작게 훌쩍거리는데, 누아가 반대쪽 손으로 라핀의 뒷머리를 콱 당겼다.
“아!”
두피가 뜯겨나갈 것 같은 고통과 동시에, 라핀의 고개가 들리면서 눈물 어린 시야에 누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언제 진지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냐는 듯이 벌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안이 번뜩거렸다. 머리채를 쥐어 잡는 손이며, 눈빛이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뭐야…. 좆 못 받아서 울 정도로 애 탔어?”
“흐으읏…. 그, 그런 게 아니라….”
라핀은 제 뒷머리가 잡아당겨지고 있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뒷머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뻐근하고 아팠다. 그럼에도 해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 너무 커서….”
“…….”
“어떻게 이런 걸 받았나 하고…. 미, 믿을 수가 없어서….”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라핀도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뒤늦게야 제가 헛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들어주지도 않을 어쭙잖은 이유를 나불나불….
힐끔 누아를 올려다보는데, 라핀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있는 손에 더 힘이 발끈 들어갔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바짝 서면서 라핀의 목이 더 뒤로 젖혀졌다.
“아윽!”
라핀이 무슨 말이든 해보려 다급하게 입을 벌렸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흐읍!”
입 안으로 뜨끈하고 물컹거리는 혀가 침범했다.
평소와 같은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조금 다른, 조급함이 느껴졌다. 혀를 얽는 속도며 입천장과 치열을 훑는 행위에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벌어진 턱이 아릿하게 아파왔고, 입술 틈새로 맑은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입맞춤에 라핀은 평소보다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입술 틈이 조금 벌어지는 듯하면 누아는 다시 입을 베어 물며 입술을 맞춰왔다.
동그랗게 떠져 있던 눈은 어느새 혼몽하게 풀렸고 눈가에 고였던 뜨끈한 눈물이 볼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티끌만큼 남아 있는 이성은 일방적인 약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라핀의 몸은 완전히 그의 품에 갇혀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허벅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아선, 한쪽 손은 누아의 손에 쥐어진 채 보지를 쑤시고, 뒷머리는 누아에게 잡아당겨지고 있었다.
허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버린 라핀은 흐물흐물해졌다. 힘에 겨워 얼굴이 새빨개지자 누아가 뒤늦게 입술을 떼어냈다. 보지를 쑤시던 손을 쑥 빼게 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
“후….”
라핀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누아가 흥분을 갈무리하듯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혼몽한 라핀의 눈앞으로 그 손을 이끌었다.
라핀의 검지는 연고가 녹은 탓인지 아니면 몸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투명한 애액이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다. 확실한 건 전부 연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는 점이었다.
“약 바르라고 했지, 자위하라고 한 거 아닌데.”
누아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다시 눈가가 뜨끈해졌다. 억울했다.
“이건, 흐, 제가 그런 거, 아닌데….”
“네 몸에서 나온 거야.”
“아, 알아요…. 근데 자위한 거 아니에요…. 정말 아닌데…. 누아 님이….”
“내가 뭐.”
누아는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처럼 뻔뻔하게 대꾸했다.
뭐냐니. 라핀이 황당함에 할 말을 잃자 누아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아아, 혀 좀 빨아줬다고 이렇게 됐다는 거야?”
“…….”
그는 입맞춤했다는 말을 음험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고작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물고 빨린 아랫입술이 유난히 퉁퉁 부은 느낌이 났다. 거울은 안 봤지만 붕어처럼 퉁퉁 부었겠지…. 이상한 모습일 게 자연스레 연상됐다.
라핀이 말없이 제 아랫입술을 만지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눕혀졌다. 눈 깜빡할 새에 몸이 전복되어 누아의 무릎에 앉아 있던 몸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시야는 천장에 가 있었다.
곧이어 라핀의 음부에 무언가가 비벼졌다.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제는 익숙한 것이었다. 등줄기에 긴장이 확 올라왔다.
“헉…!”
라핀은 화들짝 놀라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완전히 발기해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좆이 만져졌다. 손끝에서 좆이 마치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어, 저, 저 정말, 모, 못 해요…! 방금 약도 발랐고….”
라핀이 다급하게 그를 설득하려 했다. 기껏 약을 바른 참이었다. 곧장 삽입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나.
라핀이 기겁하며 좆을 밀어내려 했지만, 늘 그랬듯 거대한 몸체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귀두로 두어 번 보지를 문질러댔다.
“알아.”
“아니….”
라핀이 울상을 지었다. 네가 뭘 알아! 전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알면서 저렇게 귀두를 문지를 리가 없었다.
하반신에 대고 미끄덩거리는 성기는 당장이라도 몸 안으로 쳐들어올 것 같았다. 혹사당한 내벽을 쿵쿵 떡방아 찧듯 하며 제 약한 부위를 마구 문지를 것 같았다.
라핀이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누아가 갑자기 라핀의 두 다리를 들게 했다. 그는 제 오른쪽 어깨에 라핀의 두 발을 얹게 한 다음 라핀의 허벅다리 사이에 좆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허벅지 붙여.”
“네, 에?”
“두 번 말해야 알아들어?”
“아, 아뇨….”
허벅다리 사이에 누아의 좆이 있어서, 그래도 되는 건가 확인한 거였는데….
라핀이 허겁지겁 다리를 모으자 라핀의 허벅다리 사이로 누아의 좆이 끼었다. 몰랐는데, 제 허벅지 넓이보다 더 좆이 길었는지 허벅지로 끼고도 그의 좆 대가리가 튀어나왔다.
라핀은 늑대들과의 섹스 후에 안쪽이 진탕된 것 같다고, 뱃가죽이 찢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었는데…. 이제 보니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렇게 큰 걸 받고 속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 더 모아. 더, 더.”
라핀이 나름 허벅지에 힘을 주고 모은 거였지만, 누아는 이만큼으로는 불만족스러운지 라핀의 무릎을 모아 가슴에 닿도록 끌어안았다. 허벅지 사이에 좆이 꽉 끼워지면서 서로의 자지가 비벼졌다.
“흐읏….”
불시에 성기가 비벼지는 감각에 라핀이 신음을 겨우 참았다.
뭐 하는 행위인가 했더니만, 이런 거였어? 라핀이 침을 꼴깍이자, 누아는 그 상태로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삽입하듯 허리를 움직였다.
“후….”
“흐읏, 으으… 응…!”
라핀의 허벅지에 가히 주먹만 한 고환이 턱턱 부딪힐 때마다 서로의 성기가 거칠게 비벼졌다. 분명 삽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만큼 저릿한 감각이 라핀의 몸을 덮쳤다.
아프지가 않고 쾌감만 느껴지는 행위가 더없이 어색했다. 차라리 아픈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날것의 쾌감이었다.
원치 않는 쾌감이 나락까지 저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흐으으으…. 아아.”
라핀은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지면서, 희미하게 차라리 섹스가 이렇게 쾌감만 느끼는 행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도망갈 생각은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죽기 전에 집도 주고 밥도 주고 쾌감도 주는…. 왜, 마지막 만찬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죽기 전에 이렇게 좋은 걸 다 준다면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짙은 쾌감이었다. 하얗게 질린 머릿속은 멀쩡한 사고를 불가하게 했다.
라핀이 부끄러움도 잊고 헐떡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처롭게 서 있던 남성기 끝에서 불투명한 액체가 튀어 올랐다.
“아흐흑…!”
그대로 뿜어져 나온 점성 있는 정액은 라핀의 마른 배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누아는 그 모습을 잠잠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누아의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했지만, 라핀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하, 하아, 하아….”
라핀은 사정의 여운에 가슴팍을 크게 오르내리며 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숨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지. 심장이 터질 듯 아프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을 때, 누아가 잠깐 멈췄던 몸짓을 다시 재개했다.
라핀은 방금 막 사정한 몸이었다. 예민함이 극도로 치달아 있는데 또 자극을 주니, 라핀의 몸이 화들짝 펄떡였다.
“아흐윽으, 아!”
서로의 성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행위가 더 거칠어지기까지 했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더 거세졌고, 한 번 사정한 탓에 정액이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도 났다.
방 안을 가장 크게 메운 것은 라핀의 신음이었다. 라핀은 거칠게 얼굴을 이불과 베개 따위에 비비적거리며 울먹거렸다.
“흐윽, 아흣, 아아, 저, 으흑, 바, 방금, 쌌는데….”
“난, 후, 아직 안 끝났잖아.”
누아는 라핀의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한 손으로 고치고, 반대쪽 손으로 라핀의 양쪽 볼을 꾹 눌러 정면을 보도록 고정했다.
“우으으….”
라핀의 얼굴은 볼이 꽉 눌려 입술은 붕어처럼 툭 튀어나오고, 모양 빠지게 울어서 눈물콧물이 가득한 우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누아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라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라핀의 얼굴을 반찬 삼아 수음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본 채 허리를 뭉근하게 움직였다. 황금색 눈동자에 욕정이 가득했다.
라핀은 좀 전까지 ‘이런 행위면 섹스보다 낫지 않나’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며 철회했다.
누아는 유사 성교마저도 쉽게 끝내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비벼진 성기는 이러다 껍질이 다 까지는 게 아닌가 싶었고, 좆이 쓸린 허벅지 안쪽 살이 아려왔다.
그는 쓸린 좆이 아프지도 않은 걸까? 라핀이 누아를 힐끗 올려다봤지만, 그는 저를 똑바로 바라본 채 거칠게 허리만 놀렸다. 아프기는커녕 흥분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마안, 흐으으, 아, 그, 그만, 으, 해, 주세요….”
참다못한 라핀이 밀어내려고 하반신에 손을 뻗자, 손끝에 거뭇거뭇한 음모가 닿았다. 털이 없는 제 음부와는 상반된 곳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종족 자체가 다르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생명체 같았다. 어색하고 이상해 저지하던 손이 굳자 누아가 제 음모를 만진 라핀의 손을 붙잡아 침대에 억눌렀다.
“하아, 이 새끼가, 후우, 어딜 만져.”
“으으….”
손가락 사이에 껴오는 누아의 손 마디마디가 울퉁불퉁하고 두꺼웠다. 그에 라핀은 일전에 누아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저를 가두기 위해 수갑을 가져오든지 해야겠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라핀은 그 말을 듣고 기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굳이 수갑 가지고 기겁할 필요가 없었다. 이 남자 자체가 수갑이고 결박, 그 자체였으니까. 이렇게 붙잡히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일전에 열심히 도망칠 방법을 모색했었는데,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도 무력감이 들었다. 손을 잡힌 지금, 어쩐지 평생 도망치지 못할 것 같다는 오싹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소름이 돋기가 무섭게, 누아는 송골송골 정액이 맺혀 있는 라핀의 자지를 직접 만져줬다.
“아으윽, 아아, 만지지, 아!”
라핀이 허리를 파르르 휘며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건드리지 않아도 감각이 과해서 넘칠 듯 말 듯 했던 몸이었다. 그런데 직접 손으로 귀두를 쓸어주고 요도구를 문질러주니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또 쌀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정액이 터질 것 같아 라핀이 몸을 부르르 떠는데, 누아가 대뜸 요도구를 엄지로 꾹 눌렀다.
“아흐읏?”
사정의 문턱에서 가로막혔다. 빨리 해방시키고 편해지고 싶은데 못 싸게 하니 라핀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안달복달했다. 라핀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누아를 올려다보자, 그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장난치듯 말했다.
“같이 가.”
“…네? 읏, 아아!”
어디를?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몸이 매섭게 맞부딪쳤다. 여태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아흐윽, 아아! 놔주, 흐응, 읏, 쌀 것…. 아!”
몸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고 눈앞이 점멸하듯 했다. 이러다 사정도 못 하고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끝까지 몰려났다. 눈을 뜨고 있다가는 눈동자가 위로 휙휙 뒤집어질 것 같아 질끈 감았다.
“큿…!”
누아가 고집스레 막고 있던 성기 끝을 놓아주자마자, 라핀의 배 위로 묽은 액체가 픽픽 튀었다. 두 개의 성기에서 힘차게 쏟아져 나온 액체의 대부분 허벅다리와 배에 쏟아졌고, 일부는 라핀의 턱 끝에 튀었다.
흥건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토끼와 늑대의 신체적 차이에는 정액의 양에도 있는지, 누아의 정액량이 두 배는 많은 느낌이었다.
“하아, 하아, 하….”
라핀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더럽혀진 제 마른 배를 내려다보다가, 아직도 제 허벅다리에 끼워져 있는 늑대의 성기를 보고 말았다.
그의 성기는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립해 있었다.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위용에 라핀은 그가 한 번 더 행위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누아는 욕구를 자제했다. 다만 넘치는 여운을 즐기듯 라핀의 허벅지와 말랑한 엉덩이에 좆을 문댈 뿐이었다.
“후우….”
한참 동안 라핀의 몸에 남근을 비비적거리던 누아는 깊게 숨을 내뱉더니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열성적인 운동을 한 것처럼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옷을 벗은 것도 아니었고 성기 하나만 달랑 내놓은 채였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었을 뿐인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외설적으로 보이는 걸까.
라핀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누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시선이 딱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누아의 얼굴이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어느새 콧날이 비벼지고 숨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가 됐다.
또 입맞춤하려는 걸까.
라핀이 눈을 스르르 감았을 때, 대뜸 이마가 콩 부딪쳤다.
“아야…!”
“잘 거면 밥 먹고 자.”
“…….”
누아는 난데없이 박치기하고는 몸을 일으켜 라핀과의 거리를 벌렸다.
라핀은 황당하게 눈을 뜨고 부딪친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 와중에 무슨 밥 타령을 해…. 솔직히 라핀은 너무 힘들어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러나 누아는 제가 챙겨 먹지 않으면 재우지 않을 기세로 저를 보고 있었다.
라핀은 끝내 누아의 시선에 못 이기고 먹이 보따리에 손을 뻗었다. 도토리나 몇 개 까먹다가 자야지 싶었는데, 손끝에 얼음처럼 차갑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앗, 차가!”
라핀은 반사적으로 손을 보따리에서 빼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뭐지? 얼음?
설마 얼음을 먹으라고 가져다 준 건가? 확인을 위해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넣고 꺼내니, 하얀 눈서리가 껴 있는 당근이 나왔다.
이상하다. 분명 저번에 챙겨온 보따리에는 도토리나 풀만 많았지 당근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설마… 아까 이걸 가지러 나갔다 온 걸까? 라핀이 당근을 들고 누아를 바라봤으나, 그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
라핀은 다시금 당근을 내려다봤다. 일어났을 때 누아는 자리를 비웠었고, 겨울 냄새를 한껏 묻히고 돌아왔었다. 이렇게 눈서리가 낀 당근은 좀 전에 챙겨 온 거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거라고 생각하니 기껍지 않았지만, 챙겨준 당근은 정말 탐스러워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니까. 게다가 공복 상태였다. 공복에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격렬한 운동을 했으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듯했다.
라핀은 어쩔 수 없다며. 내가 안 먹으면 늑대가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그런 생각을 하며 당근을 오독오독 깨물었다.
라핀이 말없이 당근을 먹자, 누아는 감시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