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발각
일전에 저를 포획했던 인간들의 목적은 실험이었다. 작은 케이지 안에 갇혀 도망갈 틈이 없었다. 그렇게 평생을 바늘 같은 주사를 맞으며 살 줄 알았지만, 의외로 실험이 끝난 후 그들은 자신을 자연에 방생했다.
그와 달리, 늑대들의 목적은 먹이였다. 저를 이용해 번식시켜서 토끼의 개체 수를 늘리고 잡아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저 외의 다른 토끼가 제 자리를 대신해 준다면 탈출할 수도 있겠으나, 그 확률은 아주 희박했다. 제가 알기로 이 산에 남은 마지막 토끼는 자신이었으니까.
인간에게 잡혔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니 마냥 그들이 저를 풀어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특히 비밀로 협박을 하는 블란이 있으니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가 돌아다닐 수 있는 반경은 누아의 방, 블란의 방, 거실, 화장실이 전부였다.
누아와 블란이 사냥하러 갈 때는 화장실 앞에 있는 반대쪽 복도로 향했다. 그러니 그쪽에 출구가 있는 듯한데, 라핀은 괜히 그쪽을 기웃거리다가 도망가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가 보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이곳 지리를 알고 도망갈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이곳에 저와 누아, 블란만 있는 건 맞을까.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니까 다른 늑대도 있을 확률이 높은데….
“휴우….”
늑대들이 낮에 잠을 자는 사이에 끙끙대며 고민을 해보아도 이렇다 할 결론은 없었다. 지금처럼 그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바깥 구경을 하는 게 제일 나은 방법 같은데, 안겨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심란한 라핀이 깊게 숨을 내뱉자마자, 라핀의 가슴께를 끌어안고 있던 두꺼운 팔이 움찔거렸다.
제 숨소리에 일어난 걸까? 설마 겨우 그 정도에 깰까 싶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귓가에서 나지막한 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불만이야?”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라핀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서워서 절로 겁이 났을 뿐더러, 바로 귓전에서 울리니 느낌이 이상했다.
“이, 일어나셨어요?”
“왜 한숨 쉬었는데.”
그는 라핀의 물음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는 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러는 것일 터다. 뭐만 하면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게 아닌지 의심부터 하고 봤으니까.
이번에는 정말 도망갈 궁리를 하다 답이 안 나와서 한숨을 쉰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괜히 경계만 높아지지. 라핀은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
“아, 그게…. 팔이 가슴을 눌러서, 답답해서요.”
“…….”
대충 둘러댄 말이었으나, 누아는 라핀을 안고 있던 팔을 치워줬다.
라핀은 자유를 찾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쪽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꽤 오랜 시간 안겨 있던 탓에 겨울인데도 몸이 후끈거렸다.
라핀이 멀리 가지 않고 접촉이 닿지 않은 차가운 시트에서 열을 식히자, 누아가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로 황당하다는 웃음을 흘렸다.
“토끼가 뭐 이렇게 굴러다녀.”
웃음과 목소리에 황당함이 한껏 물들어 있었다.
라핀은 ‘침대 위니까 굴러다닐 수도 있지….’ 하고 퉁명스럽게 생각하다가도, 웃는 누아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평소에는 잘 웃지 않는 데다가 인상이 사나웠다. 그런데 지금은 잠결이라 그런지 인상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고, 심지어 웃고 있었다. 느낌이 색달랐다.
늑대라고 다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아가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워낙 귀한 표정이라 그런가? 무의식중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 즈음 누아가 입을 열었다.
“안 잤어?”
분명 몇 시간 동안 같이 누워 있는데, 라핀의 얼굴이 너무 멀쩡해서 물어보는 듯했다. 그에 라핀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밤에 자니까요.”
“그런 것치곤 어제는 잘 자던데.”
“…….”
그날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렇지만 정말 세상모르고 잤기 때문에 할 말은 없었다.
다행히 누아는 무어라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던 듯 부스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머리를 대충 정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물 마실 건데, 너도 마실래?”
“아, 네…. 저, 저도 같이 나가요.”
“그러든지.”
침대가 좋다고 한들, 그렇다고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물이라도 마시러 좀 돌아다니고… 겸사겸사 탈출할 때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야지.
몰래 그런 생각을 하며 누아와 함께 방을 나오던 라핀은 곧장 블란과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단정한 모습이었다. 옷매무새도 깔끔했다. 은빛이 도는 머리칼과 푸른 눈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가만히 있는 모습이 꼭 그림 같았다.
시선을 느낀 걸까. 블란은 라핀을 발견하자마자 무표정하던 표정을 달리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그의 얼굴에 장난스럽게 미소가 감돌 때쯤, 누아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가냐?”
“어.”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가만히 보면 둘은 친한 건지 모르겠다. 같은 집에 살고는 있지만 딱히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누아는 블란에게 별로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블란이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니까.
저럴 거면 왜 같이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둘의 관계가 아주 많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라핀이 금방 궁금증을 지워내고 있을 무렵, 블란이 라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가타부타 무슨 말도 없이 라핀의 양 뺨을 손으로 꼬집었다. 뺨이 쭉 늘어나는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아…!”
“인사 안 해?”
얼굴을 마주했는데 먼저 인사 안 한다고 저러는 모양이다. 이런 꼰대 같은 늑대…. 라핀은 불퉁스럽게 겨우 그에게 인사했다.
“아녀하세여….”
볼이 양쪽으로 늘어진 탓에 발음이 줄줄 샜다. 다행히 블란은 제대로 들은 듯 눈웃음을 지으며 뺨을 놓아주었다.
“옳지.”
블란이 금방 뺨을 놓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얼얼한 감각은 오래갔다. 역시 무식하게 힘만 센 늑대였다. 라핀이 볼가를 문지르며 속으로 신랄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블란이 라핀의 정수리 부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쉬워서 어쩌지. 라핀이랑 못 놀아주겠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누아가 블란에게 나가냐고 물었다. 블란과 누아는 교대로 사냥을 나간다고 했으니… 오늘은 블란이 사냥을 가는 날인가 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유가 온 것만 같았다. 라핀은 해맑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다녀오세요.”
“와아…. 냉정하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더 말 섞을 것도 없이 어서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라핀이 시치미를 뚝 떼자 어느새 물을 두 잔 따라온 누아가 거들어줬다.
“농땡이 부리지 말고 나가.”
“여기 냉정한 놈 하나 더 있네.”
블란은 여기저기서 나가라고 하는 게 퍽 서운한지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렸다. 그렇지만 그 애처로운 시선에 흔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블란은 살가운 말을 듣긴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계획을 바꿨다. 그는 도둑처럼 빠르게 허리를 굽히더니 라핀에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쪽.
순식간에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눈 깜빡할 새 일어난 일에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다녀올게.”
“저 개새끼가….”
라핀은 일순간 제 입에서 나온 말인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욕설은 누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도둑키스를 당한 건 라핀인데 어쩐지 그가 더 화난 것처럼 보였다.
누아는 블란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도 씨근덕거렸다. 그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이 새끼, 저 새끼거리며 욕설을 하더니, 라핀을 내려다보며 주의를 줬다.
“저 새끼가 잘해줘도 믿지 마. 속이 시커먼 놈이야.”
“…안 믿어요.”
라핀이 한숨 쉬듯 대답했다.
처음에 누아에게 잡혀서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블란이 조금 착해 보였다. 은색 털과 벽안의 눈이 달빛처럼 아름다웠고, 말투도 우아하고 상냥했다. 씻겨 주겠다고 할 때 고난이 있긴 했지만 저를 아예 먹잇감 취급하는 누아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아도 까 보면 더 나쁜 놈일 수 있지만, 겉만 깨끗하지 속이 시커먼 블란보다는 겉은 시커멓고 속은 깨끗한 누아가 나았다.
이미 블란을 믿지 않는 라핀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아는 그런 라핀의 반응이 찜찜한지 재차 강조했다. 블란의 외모에 혹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큰코다친다고. 그 말에 귀에 딱지가 앉을 때쯤이 되어서야 그는 화제를 돌렸다.
“심심하겠네. 돌아다닐 곳도 없고.”
“그건 누아 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그는 제가 도망갈까 봐 감시를 도맡은 늑대였다. 쓸데없이 경계심이 높은 바람에 잘 때는 안고 자기까지 하는 그런 늑대.
상황은 다르지만, 그 역시 다른 곳을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건 같았다. 그러자 누아가 “하긴.” 하며 작게 수긍했다.
“너만 없었어도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어.”
“저 감시하느라 못 나가는 거예요? 그럼 저랑 같이 가면 되잖아요.”
“너랑?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누아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라.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내심 탈출을 위한 선로를 알아볼까 하고 말을 꺼낸 거긴 했으나, 저런 식으로 나오니 라핀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싫으면 말아요.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라핀은 토라진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차피 누아가 제 말을 다 들어줄 거라고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음에 기회를 봐야겠네. 아직 누아에게 제가 탈출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라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누아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누아가 의외의 말을 해왔다.
“그럼 업혀.”
“네?”
“내가 너 업고 있으면 도망 못 갈 거 아니야.”
“…….”
확실히….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으면 도망가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먹고 공격한다면 도망칠 수도 있지만, 라핀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도망갈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탈출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하다만, 어중간하게 시도해서 잡혔다가는 그대로 즉살이었으니 신중하게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라핀이 누아를 바라보자 그가 라핀의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널따란 등을 내보였다.
“업혀.”
“…그럼 실례할게요.”
라핀은 거부하지 않고 조심스레 그의 등에 몸을 기댔다. 체중을 싣고 그의 목을 끌어안자, 시야가 대번에 위로 쑥 올라갔다.
누아는 무겁지도 않은지, 무게가 느껴지는 기색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라핀이 막연히 출구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던 복도로 향했다.
긴 복도에는 방문이 몇 개 있긴 했지만 굳게 닫혀 있어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문틈 새로 나오는 빛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도 끝에는 방문과는 다른 철제문이 있었다. 누아가 라핀을 한손으로 업은 상태로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누르자, 문이 끼기긱-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헙….”
라핀은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늑대가 무리 생활을 할 거라고, 그러니 누아와 블란만 있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숫자의 늑대들이 있을 거라고는….
이제 알았는데, 이 집은 커다란 동굴 안에 지어진 집이었다. 누아와 블란은 우두머리였는지 검은 늑대와 은색 늑대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부하 늑대들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늑대들이 일어나는 시간치고 이른 때인지 대부분이 자고 있었다.
라핀은 수많은 늑대에 섬찟 소름이 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저 많은 늑대들이 제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가더라도 잡힐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라핀이 늑대들의 시선을 피해 누아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수많은 늑대 중 한 검은 늑대가 누아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었다.
“대장!”
“몬드.”
몬드라고 불린 검은 늑대는 꼬리를 흔들며 누아에게 다가오다가, 누아의 등에 업힌 하얀 몸을 발견하고 눈을 번쩍 떴다.
“그 토끼는 뭡니까? 저번에 잡아 온 녀석 아닙니까?”
“응.”
“왜 데리고 나왔습니까? 설마 저희 선물입니까?”
“내가 미쳤냐? 귀한 토끼를 선물하게?”
누아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꾸하자 한소리 들은 몬드가 깨갱 소리를 냈다. 귀와 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러면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풀어주시려고요?”
“풀어주긴. 산책 좀 시켜주려고 데리고 나온 거야.”
의외의 말에 몬드와 더불어 라핀까지 깜짝 놀랐다. 라핀은 그저 그가 바깥에 무슨 할 일이 있어서 데리고 나온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라, 제가 한 말이 나가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산책을 해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맛이 떨어질까 봐 해주는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뭘 제대로 먹지 못해서 살점이 없으면 맛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식량의 정서가 좋지 않다고 맛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누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라핀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자, 놀란 눈을 한 몬드가 궁금한 걸 대신 물었다.
“산책이요? 곧 죽을 놈 산책은 왜 시켜요?”
“곧 죽이지 않을 거니까 그렇지.”
“아…. 그 임신시켜서 새끼를 치게 하겠다는 그 계획이요? 암만 그래도 대장님이 어화둥둥 산책시킬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누가 어화둥둥이래?”
“아니에요? 그래 보이는데.”
누아가 말조심하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으나, 몬드는 그게 보이지도 않는지 장난스럽게 키들거렸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다른 늑대들 역시 킬킬대며 웃었다.
위압감을 봐서는 놀려대는 걸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누아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대로 떠들라는 듯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늑대들에게서 어디 가느냐는 물음이 따라붙었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 서니 한기가 온몸을 훅 덮었다. 간만의 외출이니 상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오니 그렇지도 않았다. 구름 낀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우중충했다. 마치 재난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날씨에 누아가 작게 혀를 찼다.
“쯧, 날씨가 안 좋아서 여기서 보기만 해야겠다.”
“…그렇네요.”
라핀이 동감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뛰어나가 놀고 싶었지만 이런 날씨에 나갔다가는 눈사람이 되기 십상이었다.
못 나가는 대신 눈에라도 많이 담아 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바깥 풍경을 빤히 쳐다보던 라핀은 좀 전에 들었던 궁금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누아 님.”
“왜.”
누아는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블란 님이랑 형제예요?”
“뭐?! 씨발, 그 새끼랑 나랑? 형제 같아?”
누아는 방금까지 뭔 말을 해도 눈길 하나 안 줄 것처럼 굴더니, 말만 들어도 기분 나쁜지 발작하듯 대답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사실 라핀도 그 둘이 형제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털색도, 눈 색도, 성격도. 라핀은 놀란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맞다고 했으면 너 생명 위험할 뻔했어. 근데 그딴 건 왜 물어?”
형제 같지 않다고 했음에도 누아는 여전히 화가 난 듯 목소리가 씨근덕거렸다.
괜한 걸 물었나? 그렇지만 궁금한데…. 질문을 취소할까 했지만, 라핀은 누아의 재촉하는 시선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가족도 아니면서 왜 같이 사는 건지 궁금해서요. 친하지도 않아 보이는데.”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늑대들도 은빛 늑대와 검은 늑대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가족도 아닌데, 색도 다른 늑대가 왜 함께 지내는 건지 궁금했다.
누아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아 라핀이 조심스럽게 이유를 답했다. 그러자 누아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궁금해할 수도 있지. 그런 반응인 듯했다. 그는 화를 누그러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맹을 맺었거든.”
“네? 늑대가 동맹을 맺어야 할 일이 있어요?”
“늑대보다 강한 동물은 많으니까. 특히 인간 놈들.”
‘인간’이라는 말에 라핀은 반사적으로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몸을 흠칫 떨었다.
인간이 토끼보다 강하다는 건 몸으로 배워 알고 있었지만, 늑대랑 싸워도 인간이 이긴단 말이야? 라핀은 새로 안 사실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늑대가 인간한테 져요?”
“상황에 따라 달라. 맨몸으로 붙으면 늑대가 이기는데, 놈들은 도구를 쓰잖아.”
“도구요? 올가미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 평범한 방법도 있지만, 늑대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꾼들이 있어.”
“…….”
겁도 없다. 어떻게 늑대를 잡을 생각을 하지? 라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누아가 한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멀리, 호수 보여?”
라핀이 시선을 옮기자 엄동설한에 꽝꽝 얼어붙은 호수가 보였다. 가서 뛰어놀아도 깨지지 않을 듯 견고해 보였다.
갑자기 호수는 왜? 의아하게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는 먹이를 찾기가 힘들잖아. 굶주린 늑대들이 후각을 바짝 세우고 있을 때, 얼음에다가 다른 동물의 피를 발라놓은 칼날을 박아 넣지.”
“…….”
“늑대 놈들이 피 냄새에 정신이 팔려 얼음을 핥다가 통각을 잃고, 칼날까지 핥아 혀가 잘려나가는 거야.”
라핀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연상했다. 늑대가 아픈 줄도 모르고 날카로운 칼날을 혀로 핥아먹는 장면을. 혀가 조각나고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모르겠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끔찍하네요.”
늑대는 먹이 사슬의 상단에 있는 동물이니 무서운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라핀이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가라앉히는데, 누아가 한숨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황당하게 죽은 우두머리 놈이 많아. 같이 살다가 죽은 놈들도 많고. 그러다가 블란과 나만 살아남았고, 동맹을 맺게 된 거야. 그러니까 형제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그럼 물어보지 마.”
“네….”
라핀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이제 그 둘이 형제가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 더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대화가 끊기고, 둘 사이에는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기만 했다. 날이 꽤 쌀쌀했다. 이만 들어가자고 이야기할까 고민하는 라핀에게 먼 곳을 바라보던 누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토끼도 인간들한테 다 잡힌 거야? 왜 작년부터 털끝 하나 안 보이지?”
토끼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년부터’라는 예리한 말에 라핀은 짚이는 게 있었지만,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글쎄요.”
“늑대한테 잡혀 왔어도 의리는 지키려고? 토끼 놈들 다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면 넌 살려줄 수도 있는데.”
누아는 협상가처럼 굴면서 토끼의 거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다.
정보를 알려주면 살려주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꽤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같잖은 의리 따위를 지키는 게 아니었다.
“의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요. 버림받았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뭐?!”
누아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어쩐지 화를 내는 것 같았는데, 토끼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지 않나…. 라핀이 깜짝 놀라 몸을 작게 옹그리자 누아가 뒤늦게 한숨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방금까지 버럭 화를 낼 것처럼 굴더니, 이번엔 또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고저 없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세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렇지만 기분 탓이겠지. 늑대가 한낱 먹이에 불과한 토끼의 기분을 살필 이유가 없으니까. 라핀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작년 이맘때쯤에 자고 일어나니까 혼자였어요.”
대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혼자 남은 라핀은 이곳저곳, 토끼들이 잘 다니던 곳들을 다 가 봤었다. 그렇지만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일 년 내내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찾아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정황상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저를 버렸다는 걸. 그들은 저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귀찮은 짐짝 취급했으니까.
그렇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멀리 간 것일 거라고, 다시 찾아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거처도 옮기지 않았으나, 돌아온 토끼는 없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면 우스웠다. 인간에게 잡혀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잘 지냈으면서, 고작 인간의 손 한번 탔다고 취급을 달리하는 게. 아랫도리에 뭐 하나 인위적으로 생겼다고 악의 근원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 또한.
그렇지만 그보다 더 우스운 건 그들에게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저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나게 굴었다면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달콤한 맛을 보여주고 앗아가다니.
예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늑대에게 잡히기 이전부터 저는 나락을 걷고 있었다. 같은 종족인 토끼들조차도 제게 잘해준 이 하나 없었으니, 누아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를 죽이려고 한 흉악한 늑대한테 마음을 여는 게 말이나 되나…. 라핀이 누아의 등에 기대 몰래 한숨을 내뱉자, 그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투로 말했다.
“그게 작년 일인데 한 마리도 못 마주쳤다면… 꽤 멀리까지 갔나 보군.”
“아마도 그렇겠죠.”
“네 짝 만들어줄 때까지 살려 두기로 했는데, 운이 좋네.”
누아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간 죽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다행이긴 했지만, 이미 늑대에게 잡혀 왔다는 상황만 해도 다행이 아니었다.
라핀은 우울한 생각을 하며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은 늘 제게 차갑고 가혹했다. 이번 겨울은 이전보다 더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 몬드라는 늑대가 누아를 불렀다.
“형님! 같이 술 마셔요.”
“술? 술이 어디서 났어?”
누아가 뒤를 돌자, 몬드가 손에 한 병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병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꼬드기듯 말했다.
“좀 전에 사냥 다녀온 놈이 구해온 건데… 이게 그렇게 귀한 거래요.”
“술이 귀해 봤자지.”
누아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사실 누아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술은 깨나 팔자 좋은 수인들이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음료였다. 수인들이 먹는 술은 인간들이 먹는 것과 달리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누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제가 데리고 다니는 녀석들이 귀한 것만 생겼다 하면 제게 바쳤기 때문이었다. 제가 미친 듯이 좋아하는 토끼 고기도 아니고, 술 정도는 그들끼리 마셔도 괜찮았다.
누아가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몬드가 믿어달라는 듯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이건 되게 오래된 술인데… 꽤 전통이 있는 거래요. 저희들끼리 먹기 좀 그래서, 대장님 오면 같이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됐다. 너희들끼리 마셔.”
“에이, 형님. 기분 안 좋을 때 이게 세상만사 다아- 잊고 지낼 수 있게 해준다잖아요. 요즘 사냥 소득도 별로 없는데, 오늘은 이거나 마시고 내일부터 힘내서 일하자고요.”
“말만 번지르르하지.”
몬드의 장사꾼 같은 말에, 누아는 결국 옅은 웃음을 터트리며 넘어갔다.
누아는 여전히 라핀을 등에 업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바글바글한 늑대들 사이에 멈춰 선 그는 업고 있던 라핀을 내려놓았다.
그 덕분에 라핀은 갑작스레 두 다리의 자유를 찾았지만, 수많은 늑대들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늑대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너무나도 무서웠다.
라핀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자, 누아가 바닥에 궁둥이를 붙여 앉으며 말했다.
“옆에 앉아.”
“…….”
이렇게 늑대가 많은 곳에 앉으라고? 늑대는 누아와 블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늑대들을 마주하고 있으라고?
진수성찬을 앞에 둔 듯 입맛을 다시는 늑대들의 시선을 단번에 받고 있자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얌전히 집에 있을 테니까, 잠시만 놓아주면 안 될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랐지만, 누아는 라핀의 속도 모르고 팔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무지막지한 힘에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는 새, 고급스러운 도자기 잔에 술을 따른 몬드가 누아에게 건넸다. 곧장이라도 술판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에 라핀은 우물쭈물하다가 누아에게 귓속말을 하듯 작게 말했다.
“저는 집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뭔 소리야. 너도 마셔야지.”
“예?”
누아의 말에 놀란 건 라핀뿐만이 아닌지, 수십 마리의 늑대의 시선이 누아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술잔을 라핀에게 내밀었다.
“마셔.”
“아이고, 그 아까운 걸 왜 토끼한테 줘요!”
몬드가 한 잔 주는 것도 아깝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라핀은 물끄러미 술잔을 바라봤다. 겨우 한 잔인데 저렇게 아까울 만큼 좋은 걸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술에 대해 들어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기에 한 잔 주는 것도 저렇게 아까워하고, 세상만사를 잊게 해준다는 건지 궁금했다.
더군다나 좀 전까지 토끼 무리가 저를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했던 터라 마음이 나락까지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걸 마시면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잊을 수 있을까 싶어졌다.
라핀은 술을 마치 마법의 비약 대하듯 신성하고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받들었다. 그에 수많은 늑대들의 참담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꿀꺽.
술을 입에 털어 넣자, 혀에서 엄청나게 쓴맛이 느껴졌고 목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라핀은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크으으….”
쓰디쓴 맛에 잔에 입술을 떼자마자 아저씨 같은 소리가 나왔다. 미간은 절로 찌푸려지고, 타들어갈 듯했던 목의 열기는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술이 세상만사를 잊게 해준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는지 쓰기만 하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열도 오르는 것 같았다.
라핀이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몬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토끼가 보기와 달리 담이 세구만. 저 귀한 술을 한 번에 마시고.”
그는 여전히 술이 아까운 듯 보였다. 그는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공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참나, 귀하고 좋은 술이라더니, 별로 좋지도 않은 것 같은데…. 라핀이 잔을 꼭 쥐고만 있자, 누아가 옆에게 물었다.
“더 줘?”
“아니여….”
“그럼 잔 이리 줘.”
누아의 말에 라핀이 후다닥 잔을 돌려줬다. 잔을 나눠 쓰는 행동에 몬드가 기겁하며 누아의 손에 들린 잔을 앗아가려고 했다.
“형님, 제가 잔 닦아드릴게요. 아, 아니다. 제 거 아직 안 썼는데, 새 잔 쓰세요.”
“됐어. 뭘 같은 사내끼리 그딴 걸 신경 써. 됐고 술이나 마시게 내놔.”
그는 몬드의 손길을 가볍게 피하고 몬드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직접 술을 따라 마셨다. 아까까지만 해도 술에 심드렁하더니만 지금은 적극적이었다. 아무래도 술을 좋아하면서 한번 내빼 본 모양이었다.
누아가 술을 한 잔 들이켜자, 다른 늑대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술이라는 것에는 마음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늑대들은 점점 말이 많아졌고 목소리가 커졌다. 동굴이다 보니 목소리가 웅웅 울려 보다 더 시끄럽게 들려왔다.
라핀은 영문도 모르고 그 판에 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 힘들어졌다. 여전히 수많은 늑대들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시끄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졸리고 머리가 아프고 무거웠다. 평소 이 시간에 자지를 않으니 졸릴 리가 없는데, 술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라핀이 눈을 비비적거리자, 누아가 그것을 보고는 술을 마시려다 말고 물었다.
“졸려?”
“에? 네…. 좀 졸리네요.”
저는 아주 엑스트라처럼 신경도 안 쓰기에 물어볼 줄 몰랐다. 의외의 물음에 라핀이 조금 놀랐다가 정상적으로 대답하자, 그가 피식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흘렸다.
“얼굴 보니까 취했네.”
“치해요? 그게 뭐지…. 제 얼굴이 어떤데요?”
치한 게 뭐지. 졸린 건 맞는데. 라핀이 무거운 얼굴을 갸우뚱거리며 묻자 누아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얼굴이… 음, 핏빛이야.”
“예?! 그거 멀쩡한 거 맞아요?”
그냥 졸린 줄 알았는데 얼굴이 핏빛이라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갑작스럽게 걱정이 몰려왔다. 술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렇지만 저와 같이 술을 나눠 먹은 누아와 다른 늑대들은 다 멀쩡해 보이는데? 왜 나만….
“멀쩡한 건 아니지. 졸리면 자.”
라핀이 몽롱한 머리를 굴리며 억울해하는데 누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까는 안 보내주더니, 이제는 환자라고 돌려보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돼요?”
“누가 잠 고문하냐?”
누아는 저를 나쁜 놈 취급하지 말라는 듯,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아니…, 자기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면서…. 라핀도 할 말은 있었지만, 누아에게 말대꾸해서 좋을 건 없었다. 라핀은 오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느라 저릿저릿한 다리를 일으키려고 하며 말했다.
“그럼 먼저 안으로 들어갈게요….”
“뭔 소리야? 들어가면 네가 안 보이잖아. 내 허벅지에 머리 대고 자라고.”
그러나 저지당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잠 고문하냐면서 말과 행동이 달랐다.
그는 정녕 수많은 늑대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탈출 못 할 게 뻔한데, 왜 굳이 그의 눈앞에 있어야 하는 거지? 라핀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취한 머리는 깊게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라핀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는데, 탄탄한 허벅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우니 생각보다 편했다.
물론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수많은 늑대들의 시선은 여전히 느껴졌고, 그의 허벅다리에 대고 누우니 “저 토끼 간도 크다.”, “미쳤군. 죽을 셈인가?” 하며 무어라 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렇지만 라핀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모르는 척 누아의 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연스러운 차단이었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라핀은 좀 전까지만 해도 저는 늑대들의 시선을 받으며 잘 수 없을 거라고, 누아가 뭔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한 것이 무색하게도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
술자리가 끝난 후, 누아는 완전히 취한 라핀을 업어 들고 제 방으로 향했다.
라핀은 깊게 잠들었는지 업어 가도 정신을 못 차렸다. 늑대 놈이었으면 그냥 내팽개치고 왔을 텐데, 토끼다 보니까 수많은 늑대 놈들 사이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물론, 두고 간다고 한들 제 먹이를 훔쳐 먹는 미친놈은 없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업어 들고 오긴 했는데, 좀 전에 몬드가 제게 토끼를 어화둥둥 하냐고 했던 소리가 머리에 떠오르며 갑자기 억울해졌다. 정말 내가 이 토끼를 상전 취급하고 있나?
술을 마셔서 그런가, 갑자기 화가 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누아는 도착하자마자 괜히 라핀을 던지듯이 침대에 내려놨다. 험악하게 다뤘음에도 라핀은 불편한 기색만 보일 뿐 쿨쿨 잤다.
세상모르고 자네…. 늑대들 사이에서 저렇게 뻗는 안일한 토끼가 있다니. 누아는 제가 그런 지경까지 몰아 놓고서는 혀를 차며 라핀을 내려다보다가, 몸에 열이 후끈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손부채질을 했다.
“하아….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간만에 도수가 센 술을 마셔서인지, 제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저처럼 뜨거운 건 라핀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을 업고 들어올 때, 무겁지는 않은데 불덩이를 안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저 토끼는 고작 한 잔을 마셔 놓고선 알코올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녀석도 덥겠지. 누아는 그의 열을 식혀줄 심산으로 입고 있던 상의를 위로 훌러덩 끌어올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음…?”
놈의 아기자기한 젖꼭지가 핑크빛이었다. 사내 놈 젖꼭지에 시선이 가는 것도 처음이긴 한데, 유난히 붉었다. 젖꼭지 양쪽의 크기가 조금 다른 걸 보아, 한쪽은 부은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마치 벌레한테 물린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가슴에서부터 이어진 붉은 자국은 배를 타고 아래까지 이어졌다. 매일 저와 같이 잠드는데 저는 벌레에 물린 곳이 없었다. 왜 라핀의 몸만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벌레가 토끼 피를 좋아하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약을 발라줘야 할 것 같았다. 누아는 다리에도 물린 게 아닌가 하의를 벗기다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 왜 속옷을 안 입었어?”
몰랐는데, 라핀은 속옷을 안 입고 있었다.
원래 속옷을 안 입는 편이었나? 그러고 보면 어제 제가 너무 바짝 달라붙어서 자니 엉덩이에 제 성기가 닿는다고 부담스러워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같은 수컷끼리 자는데 뭘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나’ 하며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을 들으니 저도 덩달아 이상하게 느껴져서 하반신에 거리를 두고 잤다.
그런데 속옷을 안 입고 다니니 더 민감하게 느껴졌던 걸까? 그런 거라면 이해는 되는데…, 아니, 왜 속옷을 안 입고 다니냐고? 토끼라는 종족은 이해할 수 없었다.
투덜거리면서도 털도 없고 아기자기한 남성기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흘렀다. 토끼라 그런가, 별로 크지도 않네. 제 것이랑 달라서 그런지, 같은 사내놈의 성기를 보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라핀이 알면 수치스러워할 만한 생각을 해가며 바지를 발목까지 끌어내리고 훌렁훌렁 벗겼다.
아니나 다를까 허벅다리에도 물린 것처럼 붉은 자국이 덕지덕지 나 있었다. 다리 뒤에도 났나? 하얀 허벅다리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던 누아는 그의 사타구니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내가 취해서, 헛것이 보이나?”
처음에는 엉덩이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모양이 꼭 여성기 같았다.
원체 마른 몸이라 살이 없는데, 저쪽만 살이 접힐 수도 있나? 누아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대자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음모가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좋은 촉감에 누아가 그 부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라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으응….”
명백하게 ‘불편하니까 만지지 마’라는 표시였지만, 라핀이 뒤척이면서 몸을 뒤집으니 그 정체가 확연하게 보였다. 그에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왜 저게 저기에 달려 있어?”
라핀의 하반신에는 여성기가 달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누아는 제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볐지만, 다시 보아도 그대로였다.
누아는 끝내 ‘꿈인가?’ 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도수 높은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취할 법도 했다. 제게 딱히 술 마시고 잠드는 술버릇 같은 건 없지만, 모르는 사이 잠이라도 든 모양이다.
제가 왜 이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말이 안 되니까 꿈인 거였다. 아무래도 저번에 블란 놈이 암컷이 아니냐고 헛소리한 것이 꿈에서 실현된 것 같다. 문제는 좆도 함께 달려 있다는 거지만.
좆은 둘째 치고…, 확실히 라핀은 찔찔이처럼 생겼어도 예쁘긴 했다. 늑대 기준에는 체구가 많이 작아서 암컷이라고 착각할 법도 했다. 그래도 매번 녀석을 안고 자면서 수컷인 것을 확인했는데, 이런 꿈을 꾸는 건 좀 이상했다.
살다 살다 별 꿈을 다 꾼다고 그냥 넘겨도 됐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그 부위로 시선이 갔다. 성욕과 묘한 호기심이 들끓었다.
늑대는 평생에 한 명만을 반려로 삼기 때문에, 누아는 실제로 여성기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라핀의 몸에 이런 게 달려 있는 꿈이라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쌓였으니 빼줄 때도 됐다 싶어졌다. 곧 발정기가 올 때가 됐기도 했고.
누아는 라핀의 양 발목을 붙잡아 벌리게 하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핀의 두 다리를 제 허벅다리에 얹게 한 다음, 음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보지를 벌리니 분홍색 여린 살결이 보였다. 색이 젖꼭지 색 만큼이나 예뻤다. 색깔도 예쁘고 엄청나게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보였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 판타지 아닌가? 누아는 작게 헛웃음을 지으며 보지 안에 손가락으로 입구에 대고 꾹 눌렀다.
“으….”
위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스쳐 지나가는 소리처럼 아주 작고 여렸다.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한 손가락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작은 부위는 의외로 손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안쪽은 손가락 한 개가 한계라는 듯이 따듯한 내벽이 꽉꽉 손가락을 조이며 오물거렸다.
이런 곳에 박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기대를 하며 군침을 삼켰다. ‘늑대의 짝은 단 한 명’이라는 습성 때문에 반려를 선택하는 건 무척이나 신중해야 할 일이었고, 그에게는 아직 짝이 없었다. 즉 동정이었다.
이런 자극적인 경험이라고는 몽정밖에 안 겪어 봤는데, 이렇게 실제 같은 몽정은 처음이라 어서 빨리 제 것을 이곳에 밀어 넣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좁은 보지에 검지를 전부 다 밀어 넣은 누아는 아주 느릿한 손길로 추삽질했다. 그 손길에 비좁은 구멍에서 점점 애액이 흘렀고, 손가락이 깊게 안을 찌르고 나올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졌다.
“흐, 으응…. 웅….”
그렇게 홀린 듯이 안을 쑤시던 중, 갑자기 라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금방이라도 깰 것 같은 모습에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보지를 쑤석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곧 깰 듯하던 라핀의 바르작거림이 잦아들고 나서야 제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차피 꿈인데, 깨든 말든 상관없지 않나? 게다가 안쪽은 제가 왜 풀어줘야 하고? 상상인데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는 거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누아는 보지를 쑤시던 손을 쑥 빼냈다. 거친 손이 단번에 빠져나가며 내벽을 긁어댔다. 라핀은 그 기묘한 감각에 허리를 들썩였다.
“흐으으….”
누아는 라핀의 작은 입술을 바라보며 허리춤을 풀었다. 속옷과 바지를 살짝 끌어내리자 쿠퍼액을 질질 흘릴 만큼 발기한 성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퉁 튀어나왔다.
그의 것은 처음 보는 이라면 ‘몽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커다랬고 검붉었다. 과연 한 늑대 일족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위용이었다.
예전에 먼 곳까지 사냥을 나갔을 때, 검은 늑대 놈들이랑 헐벗고 몸을 씻은 적이 있었다. 그때 몬드가 뭐라고 했더라? 반려가 침상에서 이걸 보면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워낙 장사치만큼 입 발린 소리를 잘하는 놈이라 흘려듣긴 했다만, 썩 빈말도 아닌 크기였다.
누아는 반쯤 발기한 제 좆을 용두질하듯 두어 번 훑고는 귀두를 입구에 꾹 눌렀다. 두툼한 귀두가 보지에 걸치듯 들어가자, 라핀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 으으우…. 브으….”
“…뭐라고?”
단순히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누아가 허리를 숙이자, 라핀이 여전히 끙끙 앓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으… 란…, 하지….”
일방적이긴 하지만 나름 몸을 겹치는 중인데, 거의 악몽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젖꼭지부터 보지 색깔 판타지까지 다 반영한 꿈이라면 좀 더 달가운 얼굴을 했으면 좋겠는데. 왜 하필 악몽 꾸는 놈을 상대로 몽정을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튼 라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누아는 조금 더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성기를 밀어 넣었다.
살금살금 자지가 보지 안으로 모습을 감춰갈수록 라핀의 신음이 조금씩 격해지기 시작했다.
“으, 으으아, 아흐읏-.”
“후우우….”
누아가 한숨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귀두만 넣었을 때도 내벽이 오물오물 씹는다 싶었는데, 기둥까지 밀어 넣으니 아찔한 쾌감이 몰려왔다.
얼른 좆을 뿌리까지 쑤셔 넣고 마음껏 박고 싶은데 꿈이라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조금 더 내벽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굳이 이런 것까지 현실감 넘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내벽이 조이는 맛이 상당히 좋았기에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벽이 풀리기까지 기다리는데, 자고 있던 라핀이 몸을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자는 동안에도 아픔을 느끼나 싶을 때, 라핀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으, 흐윽, 잠, 깐만요…. 아, 아파아….”
라핀을 일어나자마자 눈물을 흘려댔다. 눈물이 눈가를 타고 귀 쪽으로 흘러내렸다.
큰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라핀은 보는 이의 심장이 저릿해질 정도로 서글픈 모습이었다. 차가운 누아의 심장마저 녹여버릴 듯했다. 누아는 자기도 모르게 라핀의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며 물었다.
“아파?”
“네에…, 흑, 어…?”
라핀은 누아의 손에 볼을 기대고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이다가, 문득 끄덕임을 멈췄다.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서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을 때, 라핀은 제 앞에 있는 늑대의 정체에 아랫입술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누, 누아 님…?”
라핀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다가, 누아를 보고는 눈이 대번 커다래졌다. 이전에 없을 만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파래졌다.
누아는 라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박긴 했지만, 막상 귀신이라도 본 듯한 저런 얼굴을 하는 라핀을 보고 있자니 미간이 좁아졌다.
섹스하는데 저딴 얼굴을 하고 있으면… 기분 나쁘지. 누아는 일부러 허리에 힘을 주며 자지를 뿌리까지 꾹 밀어 넣었다. 고환이 볼기짝에 닿도록 체중을 실어 밀어 넣자, 라핀의 얼굴이 언제 파랬냐는 듯 고구마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아흐으윽…! 아, 잠깐, 이게, 무슨…, 흣… 아으윽!”
단번에 아랫도리를 꿰뚫고 들어오는 삽입에 라핀이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사슴처럼 길고 하얗던 목은 어느새 핏대가 서고 피가 몰린 것처럼 붉어졌다. 삽입이 버겁다는 표시였다.
작은 토끼의 생식기에 늑대의, 그것도 늑대 중에서도 우람한 것을 넣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누아는 그것을 보고도 삽입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라핀이 아프다고 한들 꿈일뿐더러, 처음 보는 보지의 맛이 너무나도 쫄깃하고…. 하, 씨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홀했다. 아예 모르면 모를까, 이렇게 맛을 봤는데 무를 순 없었다.
“하…, 씹.”
누아는 욕지거리를 하며 허리를 뒤로 물렸다. 보지에서 구렁이 같은 좆이 반쯤 빠져나오더니, 누아가 다시 밀자 좆이 구멍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흉포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라핀은 그에 정신을 못 차리고 헐떡거리다, 침대 시트에 머리를 마구잡이로 비비적거리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아흐으으, 으으으, 누, 누아 님…. 자, 잘못….”
“후우…, 뭐?”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달뜬 신음에 라핀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아가 격렬한 허리 짓을 멈추고 성기를 귀두만 걸치도록 빼내자 라핀이 모자란 숨을 끅끅 몰아쉬며 다시 말했다.
“자, 잘못했, 어요…. 그, 흐으윽, 으니까….”
“뭐?”
좆이 다 까질 때까지 박아 넣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 봤더니만…. 라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당한 말이었다. 제가 지금 혼을 내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뭘 잘못했는데?”
“아, 아래, 흐, 응, 이런 거…, 달려서….”
누아는 라핀의 말을 듣고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잠시간 생각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랫도리에 여성기가 달려서 잘못했다고 하는 것 같았다.
누아는 처음 마주하는 성교의 황홀함에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힘 빠지는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뭔, 헛소리야…. 좋은 거 달아놓고, 후우, 뭘 잘못했대.”
오히려 칭찬하고 싶은 부위였다. 처음 여성기가 달린 걸 봤을 때에는 뭐 이딴 꿈이 다 있나 싶었는데, 박고 보니 미친 듯이 좋았다. 꿈에서 깨어나 라핀을 마주하게 되면 아랫도리를 까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니 조금 더 아껴주고 칭찬을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꿈은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언제 깰지도 모르니 시간이 아까웠다. 일 초라도 더 섹스하고 싶었다.
누아는 거의 다 빼냈던 자지를 다시 넣기 시작했다. 체중을 실어서 완전히, 라핀의 상체 위로 제 상체를 완전히 무너트리듯 박자 제 몸 아래에 있는 라핀의 작은 몸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아흐으, 윽…!”
마치 작살에 꽂힌 것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숨 쉬기 힘든 듯 가끔 숨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위로는 버겁다는 티를 내는 것치고, 아랫도리는 착실하게 좆을 받아먹고 있었다. 허리에 힘을 주어 밀어 넣으면 내벽이 열렸고, 맛있다는 듯이 따듯한 내벽으로 오물오물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윗입과 아랫입이 하는 말이 다르니…. 내가 꼴리는 대로 듣는 수밖에.
누아는 애꿎은 시트만 잡는 라핀의 손을 떼어내 제 목에 두르게 했다. 라핀이 영문도 모르고 양팔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자 누아가 참았다는 듯이 더 거칠게 아래를 맞붙였다.
“아, 하아, 으으, 아아-!”
일순간 자극점이 건드려졌다.
라핀은 아랫도리가 찢어질 듯 아파 눈물이 줄줄 흘리다가도, 어느 지점을 귀두로 콱 긁어대자 자지러지며 아랫도리로 좆을 꽉 물었다. 허벅다리가 벌벌 떨리고 손끝 발끝에 전류가 돈 것처럼 찌릿했다. 라핀이 헉헉 달뜬 숨을 쉬며 누아를 바라봤을 때, 누아의 입꼬리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사냥감의 공략법을 알았다는 포식자의 미소였다.
철퍽, 철퍽, 철퍽!
정사의 장면을 보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때리는 게 아닌가 싶은 격렬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런 소리가 날 만큼이나 거세게 라핀의 내벽을 짓찧어주는 중이었다.
“아, 아흐윽, 아, 하지, 하아, 아앗!”
그리고 라핀은 그런 폭력과도 같은 섹스에 착실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라핀의 몸이 남다르게 민감한 건지, 아니면 누아가 처음으로 정사를 가지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게 잘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아는 후자라고 생각하며 남몰래 뿌듯해했지만, 실상은 그의 좆이 너무 커서 어디를 찔러도 극점에 닿은 탓이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라핀의 보지는 연이은 마찰에 발갛게 달아오르고 붓기까지 했다. 고작 이틀 전에 블란이 아랫도리를 들쑤시는 바람에 아랫도리 사정이 괜찮아진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이 엉망이 됐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더욱 처참해질 것 같았다. 아랫도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게 커다란 걸 두 번이나 받아들였으니 보지가 다물리지 못하고 계속 벌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지만, 라핀의 보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에 혹시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 안 돼…, 앗, 아, 그, 그만, 해요, 아흑…, 제발…. 아, 아래….”
라핀은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시트에 문질러진 뒷머리가 엉망이 되어 헝클어졌다.
누아는 아까부터 그만해 달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라핀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라핀의 거부가 꽤 필사적이었다. 누아의 탄탄한 배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기도 했고, 은근슬쩍 제 아래에서 치닫는 자지를 피해 침대 헤드 쪽으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누아는 슬금슬금 도망가는 라핀의 마른 허리를 쥐어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래가, 왜.”
“아흐으윽! 쌀, 것 같…, 으응! 하앗!”
쌀 것 같으니 그만 자극하라는 거였다. 그렇지만 누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고작 그런 말로 저를 멈춰 세울 줄 알았냐고 말하는 것처럼 오히려 더 거칠게 라핀을 몰아세웠다. 못질을 하는 것처럼 거세고 빠르게 쿵쿵, 안을 때려댔다.
“싸.”
“아으흑, 하, 아아, 거기 하지, 마요…!”
누아는 짧게 말하며 라핀의 바짝 선 좆을 한 손에 콱 쥐었다. 세게 쥐어 잡은 것도 모자라 사정을 강요하듯 라핀의 좆을 위아래로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여러 군데에서 오는 쾌감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래를 받는 속도가 미친 듯했다. 그의 골반에 치닫는 엉덩이가 매질을 당한 것처럼 뜨거웠다. 쾌감의 폭포에 눈앞이 희미해지고, 곧 혼절할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차라리 기절하면 좋을 텐데. 라핀이 그렇게 이성을 놓으려던 때였다.
“아앗-!”
누아가 극점을 찌른 채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자극점을 귀두로 후벼 파는 감각에 라핀은 허리를 활처럼 휘며 절정에 닿고 말았다.
좆을 꽉 쥐어 잡은 누아의 손 안에서 터진 정액은 그의 손가락 틈새를 타고 넘쳐흘렀다. 그의 핏줄 선 손등 위로 질척한 정액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누아가 대놓고 사정하라고 종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핀은 그의 손에 파정한 것이 부끄러웠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아, 흐으…. 제가 그만… 머, 멈추라고 했잖아요….”
라핀은 울상을 지으며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그가 제 자지를 만지지 않았더라면 사정을 참았을 텐데. 이런 민망한 꼴 보이지 않았을 텐데…. 괜히 구시렁거리게 됐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휙 돌려버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아직 아랫도리에는 여전히 누아의 불기둥이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이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라핀이 숨을 헐떡이며 눈을 굴리는데, 누아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누가 뭐래?”
누아의 웃음소리에 라핀이 멍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정말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이빨에 목덜미에 구멍이 난 일이 있었기에 그는 마냥 무섭게만 느껴졌는데… 웃는 얼굴을 보니 딱히 무서운 얼굴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서글서글한 얼굴도 할 줄 알았다.
신기함에 라핀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그가 언제 웃었냐는 듯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라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뭘 하려는 걸까 싶을 틈도 없이 그가 대뜸 라핀의 몸을 뒤집었다.
라핀은 몸 안에서 성기가 돌아가는 느낌에 기겁했으나, 누아는 라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성기를 깊게 밀어 넣었다.
“아, 으읏, 아직… 하, 하면 안 되는…, 아아-!”
아직 사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이었다. 쾌감이 들이닥치면 견딜 재간이 없었다.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싶었으나 누아가 허리를 꽉 누른 탓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엉덩이를 들라면 들고, 뒤에서 돌진해오는 그의 것을 온전히 받는 수밖에 없었다.
“하, 아으으, 아!”
체위가 바뀐 탓인지, 아니면 내벽이 풀린 건지 삽입이 더 깊어졌다.
라핀이 다시금 절정에 다다를 듯이 자지를 배에 닿을 듯 곧추세우고 있을 때, 뒤에서 허리를 격하게 놀리던 누아가 욕설을 내뱉었다.
“하, 씹….”
술을 마시기도 했고, 또 자세가 바뀌니 성기를 박을 때마다 뭉툭한 흰 꼬리와 탐스러운 엉덩잇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른 몸이라서 잡아먹어도 살점이 없을 것 같다고. 살을 찌워야겠다고 라핀에게 먹일 먹이를 잔뜩 가져오기까지 했었는데, 이제 보니 엉덩이에는 살점이 꽤 있었다.
누아는 허리를 고정하던 손을 떼어내고 라핀의 엉덩이를 한 손에 콱 쥐어 잡았다. 왜 여태까지 만진 적 없는지 안타까울 정도로 촉감이 좋았다. 마냥 살덩이도 아니고 적당히 근육이 있어 쫀득한 감이 있었다.
이거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드는 촉감에 엉덩이를 찹쌀떡 주무르듯 하다가 터트릴 기세로 콱 잡자 라핀의 입에서 곧장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 흣, 아, 아파, 요…!”
“큿….”
아프다는 말이 진심인지 엉덩이를 꽉 쥐어 잡는 순간에 내벽이 바싹 조여졌다. 자지를 잘라먹을 듯 구는 내벽에 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곧 절정에 닿을 것 같았다. 좆이 터질 것만 같은 빠듯한 감각에, 누아는 전력 질주를 하듯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비좁은 보지 사이로 흉포한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었다.
“아, 아으읏, 아, 아흐흑…!”
“하아, 하아!”
폭발하듯 추삽질하자 둘의 입에서 격렬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라핀의 입에서도 더는 비명이나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성기에 맞춰 한계까지 벌어진 보지가 아픈 건 여전했지만, 그가 흉포하게 아래를 치받을 때마다 성기 끝에서 묽은 액체가 픽, 픽 터져 나온 탓이었다. 셀 수 없이 연이은 사정이 이어지는 바람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라핀이 기절할 듯 눈을 혼몽하게 감고 있을 때, 누아가 온 체중을 실어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그의 묵직한 몸이 등 위로 엎어지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하아, 아으으읏-!”
“후우…. 씹….”
절정이었다. 누아가 길게 사정하는 것과 동시에 뱃속에 뜨거운 액체가 울컥울컥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정액은 체온과 비슷하니 그럴 리는 없겠거니 싶었지만, 아랫도리가 워낙 뜨거워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블란이 그랬던 것처럼 사정량은 오줌에 견줄 정도로 많았다. 라핀은 제가 만약 토끼가 아니라 암컷 늑대였다면, 이 정도 정액을 받으면 단번에 임신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는 임신이 가능한 암컷도, 늑대도 아니니 그럴 일은 없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라핀의 배가 완전히 묵직해질 때가 되어서야, 누아는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귀두를 보지에서 빼냈다.
“흐, 으으으….”
보지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던 자지가 빠져나가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우유 같은 정액이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라핀이 어서 아랫도리를 닦아내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아가 갑자기 라핀의 몸을 붙잡았다. 왜 이러냐고 묻기도 전에 몸이 다시 뒤집어졌다.
눈부신 전등의 불빛이 정면으로 쏟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둠이 들이닥쳤다. 누아가 전등을 가리도록 얼굴을 가져다대더니 입술을 맞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가볍게 부딪치는 듯하더니, 입술 사이를 벌리고 말캉한 것이 안을 침범했다.
“흐읍….”
이상한 감각이었다. 블란이 입맞춤을 하고 간 적은 있어도 말캉한 혀가 입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라핀이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눈앞의 수컷은 눈을 감은 채 감미롭게 라핀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단순히 혀가 맞부딪치고 비벼지는 게 아니었다. 뜨겁고 말캉한 혀는 라핀의 가지런한 치열을 훑고, 여린입천장을 꼼꼼히 훑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걸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의 혀가 여린 부위를 건드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제 몸 속 깊숙이 들어오던 때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섹스는 아프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훑는 감각이 부드럽고 좋기까지 했다. 라핀이 매달리듯 그의 팔을 붙잡자 입맞춤이 더 농밀해졌다.
그렇지만 한계는 있었다. 늑대 놈들은 몸이 튼튼한 만큼 폐활량도 좋은지, 아니면 라핀이 요량이 없는 건지 입맞춤을 하는 것뿐인데도 숨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라핀이 그의 어깨를 때리듯 두드리고 나서야 그의 입술이 아쉽다는 듯이 떨어져나갔다.
“하아, 하아….”
라핀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모자란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질식사라도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조명을 등진 채 반쯤 감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누아는 붉은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꼭 맛있는 음식을 모자라게 먹은 뒤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과 비슷했다.
“하…, 라핀.”
그는 으르렁대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얼굴을 다시 가까이 들이댔다. 다시 입술을 맞추려는 걸까 싶어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그의 입술이 향한 곳은 입술이 아닌 볼이었다.
그는 젖살처럼 보드라운 볼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누아 나름대로는 약하게 문 것이었지만, 늑대의 이빨이 워낙 날카로운 탓에 라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따가웠다.
누아는 점점 아래로 향하더니, 볼에 이어 턱까지 잘근거렸다. 그렇게 목덜미까지 자연스럽게 내려오던 중에 문득 그가 깨무는 것을 멈췄다.
“……?”
뭐지? 안 깨물면 좋긴 한데, 갑자기 멈추니까 무언가 이상했다. 라핀이 그의 눈치를 보려 슬금슬금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으나 그의 동그란 머리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술이 라핀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덮은 밴드 위로 입술이 닿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깨물고 그러더니, 상처가 있는 부위라 멈칫한 모양이었다.
제가 낸 상처면서 깨물면 아플 거라는 건 아는 걸까. 라핀이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무언가가 아랫도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삽입할 듯 보지를 쿡쿡 찌르는 것은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였다.
안심하고 늘어져 있던 몸이 단숨에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라핀은 다시금 그의 어깨를 붙잡고,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접촉을 피해 위쪽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 저, 잠깐, 만요…. 끄,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왜 또 섰냐는 말이었다. 파렴치하게 세우더라도 삽입은 안 할 수도 있지만, 음부를 귀두로 모르는 척 쿡쿡 찌르는 것은 분명히 그럴 의도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핀이 더는 무리라며 그를 피하려 했지만, 누아는 뜨거운 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네가… 이렇게 내 걸 세웠잖아.”
“네에…? 무, 아니, 저는,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라핀은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요? 제가 한 거라고는 그저 송장처럼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 제게 입술을 맞추고 아쉽다는 듯이 턱과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은 건 누아였다.
그렇지만 그는 늘어져있는 라핀의 모습이 유혹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는 라핀의 양쪽 오금을 꾹 누르더니, 보지 입구에 귀두를 대놓고 문질렀다.
격렬한 정사의 후유증으로 보지는 무언가가 닿기만 해도 아팠다. 다시 박아 넣으면 정말 내벽에 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라핀은 그 감각에 진저리를 치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 흐으윽, 누, 누아님…! 저, 정말 못 하는데…. 차라리 제가 손으로 빼드리면 안 될까요…?”
“뭐?”
라핀의 말에 누아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손으로 빼주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아, 아니면 입으로….”
라핀이 작은 목소리로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저 욕구를 풀기 위함이라면 삽입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많았다.
간단하게는 손으로 훑어서 사정을 종용하는 방법도 있었고, 이건 좀 싫지만… 입으로 빨아서 빼는 방법도 있었다. 입으로 빼주는 건 비위가 상하고, 턱도 아프고 해서 싫긴 했지만 삽입보다는 나을 듯했다.
그런 생각으로 말했으나 누아의 눈빛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 그는 황당한 말을 들은 것처럼 헛헛한 숨을 내뱉더니 낮게 으르렁댔다.
“발랑 까져서는….”
손으로 빼주겠다는 말도, 입으로 빨아주겠다는 말도 전부 불통이었는지 누아가 더 험악해졌다. 어쩐지 그의 심기를 더 건드린 것 같았다.
예열하듯 보짓살을 문지르던 누아의 좆이, 조개 같은 보지를 벌리고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달궈진 내벽을 가로지르고 들어오는 성기의 느낌에 라핀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마구잡이로 저어댔다. 라핀은 눈물 젖은 얼굴로 누아에게 매달렸다.
“아, 흐으윽, 아, 누아 님…. 제, 제발요….”
“씹…. 하.”
내벽에는 이미 좆길이 나 있는 데다가, 안에 질펀하게 싸지른 정액이 윤활제 역할을 해줘 마찰이 덜했다. 그는 멈추는 법 없이 불도저처럼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심지어 체중까지 실어가며 박자, 마치 고환까지 삽입할 것처럼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허, 으윽, 아아-!”
숨이 콱 막히고 눈이 번쩍 떠지는 감각이었다. 벅찬 감각에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라핀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누아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철퍽, 철퍽, 퍽!
다시금 살갗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라핀은 아까까지만 해도 누아가 제 상태를 봐줬다고, 그마저도 기껍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제 상태를 봐주기는 무슨. 누아는 늑대와 토끼의 근본적인 차이를 모르는 것처럼 아랫도리를 맞붙여왔다.
폭주하듯 몰아치는 감각에 라핀이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지만, 벅찬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하면 제 몸이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기절한 새에도 안에다가 사정을 해댔는지 보지와 누아의 자지 사이에는 하얀 거품이 일어 있었다. 배에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뜨겁고, 이상했다.
눈을 감고 아랫도리에서 퍼져 나오는 쾌감에 잠식되어 가고 있을 때 라핀의 눈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감각에 흐릿하게 눈을 뜨자, 누아도 힘든 듯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힘들면… 그만 하라고….
라핀은 입 밖으로 웅얼거리며 하얀 손을 휘적거렸으나, 두 손이 잡혀 머리맡으로 올려지는 게 먼저였다.
아래를 치받는 살덩이에 쉴 새 없이 몸이 흔들렸고, 어지럼증을 동반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번에는 진짜 기절이었다.
***
“으, 으으….”
몸살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뼈 마디마디가 닳은 것 같았고 웅웅 울려댔다. 게다가 몸은 돌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손 하나 꿈쩍하기 힘들었다.
뒤척거리다가 겨우 눈을 뜬 라핀은 그제야 제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를 깨달았다. 누아가 제 몸 위에 올라타 짓누르듯이 껴안고 있었다.
그가 저를 껴안고 자는 건 이제 꽤 익숙해졌기에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이렇게 찌부러트릴 듯 체중을 실어 안은 건 처음이었다. 은근슬쩍 피하거나 치우고 싶은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유로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자 겹쳐 있는 헐벗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와 누아의 다리였다. 허벅지 두께는 그의 것과 제 것이 거의 두 배 차이가 났고, 누아의 것은 살이 아니라 죄다 단단한 근육이었다.
하아, 덩치도 커다란데 죄다 근육이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라핀이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때, 갑자기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처럼 띵 하고 울렸다.
“으으….”
머리가 왜 이렇게 아파….
몸을 짓누르는 누아의 체중에 모르고 있었는데, 속도 말이 아니었다. 안 아픈 곳이 하나도 없어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필름처럼 머릿속에 재생됐다.
어젯밤의 정사 장면이었다.
“헙…!”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다가, 손바닥으로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게 무슨 기억이지?
누아와 잠깐 바깥 구경을 하다가 술이라는 걸 마셨고, 그러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잤다. 거기가 기억의 끝인 듯했는데, 순간 제가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리고 그의 흉포한 것을 받고 있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누아에게 들킨 적도 없는데….
라핀이 경악스러움에 머리채를 쥐어뜯었으나, 온몸을 덮친 고통은 현실이었다. 누아의 맨몸이 닿는 것도 현실이었고.
어째서, 왜…?
울상으로 추론을 하니, 블란이 제 비밀을 말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아는 제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왜 아랫도리를 깠겠냐는 거였다.
그리고 다른 토끼들이 저를 무시하고 무서워했던 것과 달리 몸을 겹치기까지 했다. 블란과 반응도 똑같은 것을 보아, 블란이 저를 속였다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
라핀이 속았다는 배신감에 애꿎은 시트만 구겨가며 부들부들 떠는데, 누아가 위에서 뒤척거렸다.
“으음….”
뒤척거리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가 라핀을 완전히 짜부라트릴 듯 팔에 힘을 주고 강하게 끌어안자, 라핀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 무, 무거워요…!”
무거운 것도 무거운 거였지만, 거친 정사에 온몸이 끊어질 듯 아프던 참이었다. 그 몸뚱어리 위로 굴러오니 온몸이 바스라질 것 같았다.
라핀이 두 발을 침대 매트에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지르자, 잠기운에 취해 있던 누아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어…? 미안.”
다행히 일찍 깨어난 누아는 제가 라핀을 짓누르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반대쪽으로 굴러가며 상체를 일으켰다.
혹 라핀의 뼈가 부러진 건 아닐까 라핀의 상태를 살피던 누아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벗고 자는 스타일이 아닌데 제 몸은 알몸이었으며, 심지어… 제가 일어남에 따라 이불이 걷어지면서 라핀의 알궁둥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뽀얀 알궁둥이는 복숭아처럼 발갛게 익어 있었다. 누가 봐서는 매질을 당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고, 드러난 두 허벅다리에는 뭔지 모를 액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게다가 라핀의 등과 팔, 그리고 허벅다리에 울혈과 같은 자국이 있는 것도…. 누가 봐도 격렬한 정사 후의 상태였다.
“…꿈이 아니었어?”
“예?”
누아의 혼잣말에 라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눈을 깜빡였다.
누아는 라핀이 무슨 반응을 보이건 말건,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누아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라핀의 한쪽 허벅다리를 받치고 위로 끌어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라핀이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기겁했다.
“무슨, 잠깐만요…!”
라핀이 다급하게 허벅다리를 모으려고 들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무지막지한 힘의 차이에 비밀스러운 부위를 훤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
그리고 누아는 그 부위를 보자마자 깊은 숨을 터트렸다. 꿈이 아니었다. 라핀의 아래에는 정말 보지가 달려 있었다.
어제 혹사시킨 탓에 보지는 퉁퉁 부은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끈덕진 애액도 이리저리 묻어있었다. 심지어 지금, 제 눈앞에서 조개처럼 다물린 보지가 벌름이더니 허연 씨물을 뱉어냈다.
“으, 흐으….”
라핀은 아래에서 왈칵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옅은 신음을 흘렸다. 야릇한 소리에 누아의 미간 주름이 깊어지고 있을 때, 라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하지 마세요….”
“…뭐?”
누아가 음부를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들자, 라핀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누아는 어젯밤의 일이 꿈인 줄만 알고 라핀의 내벽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고 흉포하게 삽입했다. 게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게 싫어서 최대한 많이 교접하려고 굴었다.
힘들어하는 라핀을 붙잡고 셀 수 없을 만큼 연달아 몸을 겹쳤다. 중간에는 라핀이 기절한 걸 알았지만, 어차피 꿈이니 기절하든 말든 아래만 조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그렇게 폭군처럼 군 탓일까. 라핀은 누아가 이번에도 그럴 줄 알는지 벌벌 떨어댔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내려놓았다.
“안 해. 씻겨줄 테니까 일어나.”
꿈이 아닌 걸 아는데 더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누아가 깔끔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벌벌 떨던 라핀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라핀의 얼굴 위로 의문이 두둥실 떠올랐다. 왜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처럼 굴지? 표정도 말투도 아무 짓 안 할 것처럼 보였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라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혼자 씻을 수는 있고?”
“…….”
라핀이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곡을 찔렸다.
온몸을 뒤덮은 액체며, 여전히 아랫도리에 가득 담고 있는 늑대의 씨물. 게다가 누아가 제 몸을 완전히 짓누르고 잔 탓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씻고 싶은데,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 근육이 아파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라핀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누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씻겨준다고 할 때 받아.”
“…….”
뭐 엄청 대단한 걸 해주는 것처럼 생색내네…. 라핀은 그런 누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면 제 손해였다.
라핀은 침대에서 일어날 요량으로 옷을 찾았다. 그렇지만 도무지 옷을 어디다가 벗어던졌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찾기를 포기한 라핀이 하얀 이불로 몸을 둘둘 둘러매며 몸을 가리고 있자, 누아가 황당한 걸 봤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와서 가리면, 뭐가 달라져?”
“…아, 알몸으로 일어나는 것보단 낫잖아요.”
어차피 씻겨줄 때 제 몸을 보겠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몸을 가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누아의 빤한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런 몸을 가지고 있다 보니 남의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라핀이 꿋꿋하게 온몸을 애벌레처럼 꽁꽁 싸매자, 누아가 턱을 쓸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아니던데.”
“…….”
뭐가 아니라는 걸까. 이불로 몸을 칭칭 가리는 것보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게 낫다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누아의 말을 흘려들은 라핀은 가슴께까지 이불을 꽁꽁 둘러 싸맸다. 이불을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처럼 두르고 나서야 만족한 라핀이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끄응….”
겨우 몸을 일으키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상태가 말이 아닌 탓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라핀이 머쓱하게 누아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못 일어나겠어요….”
안 그래도 몸이 무거웠는데, 이불까지 돌돌 둘러 싸매니 더 무거워졌다. 욕심을 부리면 화가 되어 돌아온다더니. 딱 그런 모습이었다.
민망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황당해하는 누아의 얼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디든 숨고 싶어졌을 즈음 누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손잡고 일어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라핀에게 뻗어왔다.
그의 손은 거친 심성을 드러내듯이 크고 작은 흉터가 많이 나 있었다. 솔직히 손 같은 거 잡기 싫었지만, 제 몸을 뒤덮은 땀과 정액들을 얼른 닦아내고 싶었다.
라핀이 탐탁지 않게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였다. 보지 틈새로 물컹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끈적한 액체가 허벅다리를 타고 흐르는 감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으….”
뭐, 뭐야. 이거….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지만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몸 안에 담고 있는 것이 더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라핀이 빳빳하게 굳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누아가 라핀을 품에 끌어안았다. 라핀이 눈을 커다랗게 뜬 것과 동시에 그는 라핀의 등과 오금을 받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늑대 놈들에게 안겨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매번 깜짝깜짝 놀랐다. 라핀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멱살을 힘껏 쥐며 버둥거렸다.
“아, 저기, 잠깐…!”
“좀 가만히 있어. 그러다 떨어진다.”
“…….”
떨어진다고? 라핀은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멱살 잡기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멱살을 잡는 건 좀 이상하니까…. 게다가 이대로 누아가 저를 놓친다고 해도, 제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있으면 최소한 엉덩방아는 찧지 않을 테니까…. 라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안기듯 굴자 누아의 걸음이 일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평소대로의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
라핀은 욕조에 늘어지듯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끈한 물이라 그런가, 삐거덕거리던 근육이 다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 좋다.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자, 누아가 옆에서 물을 찰박이며 물었다.
“좋냐?”
나직한 목소리에 라핀이 퍼뜩 고개를 들고 누아를 바라봤다. 그는 물의 온도를 맞추기 위함인지 한쪽 손을 욕조 안에 넣은 채 라핀을 잠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제 몸을 드러내는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그러니 숨길 것도 없는데도 조금 민망했다. 라핀은 그의 시야에 보이지도 않을 음부를 가리기 위해, 허벅다리를 조심스럽게 오므리며 대꾸했다.
“좋긴 뭐가 좋아요….”
“표정이 그렇던데.”
“제 표정이 뭐 어때서요?”
“기분 좋은 찔찔이?”
“…….”
놀리듯 한 말이었으나 표정에는 놀리는 기색이 없었다. 누아의 눈에는 제가 정말 바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라핀이 입술을 꾹 다물며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제가 그렇게 못생겼나? 투명한 물 위로 제 얼굴을 살피자, 정말 찔찔이 같은 모습이 비쳤다.
평소 제 얼굴이 모났다거나,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누아의 얼굴을 밥 먹듯이 자주 봐서 그런가? 라핀의 눈에 그는 워낙 냉철하고 매섭게 생겼다 보니 그에 비해 제 얼굴이 흐물흐물하고, 흐릿하고, 또 얼빠진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가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저런 소리를 듣고도 기분 상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욕하실 거면… 나가세요.”
“뭐?”
라핀의 말에 누아의 표정이 확연하게 굳었다. 방금까지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는데 그보다 더 정적으로 굳었다. 화를 내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건만, 두 눈에는 냉기가 철철 흘렀다.
“하…. 기껏 도와줬더니 날 쫓아내?”
누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하며 욕조 안에 담그고 있던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젖은 손이 머리를 쓸어 올리니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바짝 서 있었다.
헉…. 아무리 욱했다고 하더라도 제 처지는 알았어야 했는데. 라핀은 뒤늦게 반성하며, 허둥지둥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변명했다.
“쪼, 쫓아내는 게 아니라요! 저, 저를 욕실까지 옮겨 주셨으니까…. 귀, 귀중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볼일 보시라는 거였어요….”
라핀이 비굴하게 이유를 덧붙였다. 절대로 꺼지라고 쫓아낸 게 아니라는 듯이 열심히 입을 털어댔다.
다행히 구차한 별명이 통했는지, 험악했던 누아의 표정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마에 서 있던 핏줄 역시 사라져 있었다.
“너 혼자 두고 가면, 몸은 알아서 씻을 수 있고?”
“그게….”
“나올 땐 또 어떻게 나올래? 굼벵이처럼 기어서 올래?”
“…죄송해요.”
결국 반박도 못 하고 라핀이 사과했다. 솔직히 세월아 네월아 하며 천천히 하면 혼자서도 씻을 순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라핀이 비굴한 목소리를 내자, 누아가 작게 숨을 내뱉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라고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널 혼자 나뒀다가 욕조에 머리 깨고 뒤질까 봐 있는 거야. 너 죽으면 내가 여태까지 너한테 한 짓이 다 뻘짓이 되잖아.”
“예에….”
라핀은 결국 그를 쫓아내기를 포기했다. 괜히 또 한마디 거들었다가는 애꿎은 화만 들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누아는 폭신폭신한 샤워 볼에 거품을 내어 라핀의 몸을 닦아줬다. 라핀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손길을 받는 것이 영 어색해 몸을 쭈뼛댔지만 누아는 민망하거나 어색하지도 않은지 거침없었다.
라핀은 그의 손길을 받으며 한껏 어색해하다가도, 문득 블란과 몸을 겹쳤을 때도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섹스를 하고 난 후에도 제 몸은 지금처럼 난잡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알 수 없는 액체로 흥건했었다. 그런데도 깨어났을 때 몸이 보송보송했던 걸 보면, 블란은 아마 제가 의식을 잃었을 때 씻겨준 모양이었다.
의도치 않게 블란이 제 몸을 씻겨줬다는 걸 알게 되니 민망해졌다. 제멋대로 몸을 겹칠 땐 언제고 뒤처리는 깔끔하다니…. 늑대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누아는 라핀의 몸에 샤워기를 대고 거품이 다 씻겨 내려가게 하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과정부터는 귀찮은지 대충하는 것 같았다.
가볍게 훑듯이 라핀의 몸을 닦아준 그는, 아까 라핀을 돌돌 싸매고 있던 이불로 다시 라핀의 몸을 감싸려고 했다.
이러면 이불이 젖을 텐데? 라핀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그의 손길을 살짝 밀어냈다. 혹 그가 기분 나빠할까 싶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불 젖잖아요. 차라리 옷을… 주시지….”
“방에 가서 줄 테니까 걱정 마.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니까.”
“…….”
왔다 갔다 하는 건 귀찮고, 안아 들고 가는 건 안 귀찮은가? 논리가 이상했지만, 무식하게 힘만 센 늑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사실은 반쯤 체념과도 같은 결론이었다.
라핀은 결국 그의 고집에 못 이겨 순순히 이불로 제 몸을 둘둘 말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 공중에 떠올랐지만, 누아는 이상하게도 요지부동이었다.
왜 출발을 안 하지? 뭔가 잘못됐나? 라핀이 물음표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저를 살짝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까처럼 안아.”
“네?”
“목에 팔 두르라고.”
라핀이 눈을 끔뻑거렸다. 팔? 팔은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팔을 두르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을 기세였다.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목에 팔을 두르자 그제야 누아가 그제야 만족한 듯 걸음을 옮겼다.
설마 씻고 나온 직후라 물먹어서 체중이 늘었나? 무거워서 떨어트릴 수도 있으니까 목에 팔을 두르라고 한 건가? 그런 거라면 뭐…. 라핀은 쉽게 납득하고는 그의 품에 안겨 누아의 방으로 돌아갔다.
***
“앞으로 이 방 안에서만 생활해.”
몸을 씻은 후, 누아의 잘 시간에 맞춰 나란히 누워 있을 때였다. 라핀은 그를 등지고 누워 있다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늑대 놈의 낯짝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귀 못 알아들어? 말 그대로 내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어차피 먹을 것도 방 안에 있고, 나올 일도 없잖아.”
그의 말대로 굳이 나갈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음식도 보따리 채로 챙겨 줬으니까. 그렇지만 탈출을 꿈꾸는 라핀에게 활동 범위가 줄어든다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반경을 넓혀도 모자랄 판에 더 좁아지다니.
제가 뭘 잘못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누아를 바라보고 있던 라핀은 결국 하다못해 이유라도 들어야겠다 싶어졌다.
“…왜요?”
“왜, 네가 나가서 할 일이라도 있어? 아아, 탈출하려고?”
“네?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 말 들어.”
“…….”
그렇지만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단순히 늑대의 변덕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늑대의 변덕에 라핀이 할 말을 잃자, 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싫어?”
“아, 아니요…. 안 나갈게요.”
할 말은 많았지만, 당분간은 누아의 변덕에 맞춰 줘야겠다 싶었다. 늑대들은 원래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하니까 금방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라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하며 다시 몸을 반대쪽으로 틀려고 했다. 그런데 대뜸 누아의 단단한 팔이 라핀의 허리를 감싸며 막아섰다.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라핀이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등 돌리지 마.”
“왜….”
“하라면 할 것이지, 넌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
이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나….
그렇지만 라핀은 결국 체념하다시피 하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아까까지 자기도 했고, 또 그와 마주 누워 있는 이 상황이 어색해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 있는지라 생각이 깊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겨우 하루 전까지만 해도 누아는 블란과는 다르다고 저 혼자 미화했었다. 지난날의 경험 때문에 선뜻 도움 요청하지는 못했지만, 블란처럼 눈이 휙 돌아가서 저를 탐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을 마주하니 누아 역시 블란 못지않은 무뢰한이었다.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섹스는 더 과격했다. 섹스의 후유증이 그때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하아, 블란에 이어 누아까지 이상하다니…. 점점 상황이 안 좋아졌다. 더 나빠지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그렇지만 여전히 마땅한 답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아와 집 밖을 나섰을 때 본 바글바글한 늑대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방법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라핀은 머리를 기댄 가슴팍이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느끼며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댔다.
***
라핀은 누아가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 드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나름대로 누아의 품에 안겨 있으며 탈출할 계획을 짜긴 했는데, 기회는 단 한 번뿐인 데다가 적당한 타이밍이 오기를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누아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라핀은 드넓은 침대에 누운 채 식량 보따리에서 꺼내온 것을 야금야금 먹었다.
살이 오동통하게 차올라 늑대 놈들에게 잡아먹히기 좋게 될 생각은 없었지만, 입이 심심하니 먹게 됐다. 라핀이 무료하게 도토리를 오독오독 씹고 있는데 대뜸 문이 열렸다.
누아는 사냥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일찍 돌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들자, 블란이 웃음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신선이 따로 없네.”
“…….”
팔자 좋다는 말이었다. 사냥감으로 잡힌 놈답지 않다는 비아냥도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닌데…. 나도 고민이 많은데…. 라핀은 한없이 억울했지만, 대꾸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대꾸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그와 말을 섞기 싫었다.
저를 그렇게 협박해 놓고선, 말을 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누아에게 제 비밀을 밝혔다니. 거짓말쟁이가 따로 없었다.
라핀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휙 뒤집어썼다. 소심하지만 나름의 항의 표시였다. 그러자 터벅터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 소리가 멈추고 왠지 모를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몸 묵직하고 무거워졌다. 블란이 라핀을 이불째로 끌어안으며 제 몸을 겹친 것이었다.
“으…. 무거….”
라핀이 옅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납작하게 침대에 엎어졌다. 블란은 근육량도 많고 키도 저보다 훨씬 컸기에 저보다 체중이 두 배는 더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몸으로 짓누르듯 끌어안으니 숨이 턱 막히고 갑갑해졌다.
왜 이러는 거야…. 항의 표시 좀 했다고 죽일 셈인가? 라핀이 끙끙 소리를 내자, 블란이 라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핀. 그런 모습도 귀엽긴 한데, 왜 침대 밖으로 안 나와? 설마 나랑 누아 새끼 침대에서 뒹굴고 싶어서 그런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뭐? 이 침대에서 뒹굴어? 설마 여기서 섹스를 하자는 말인가? 그냥 놀자는 뜻이든 후자의 뜻이든 극구 사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보 위로 몸을 더듬는 손길이 이어졌다. 라핀은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블란을 떨쳐내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흔들었다.
돌덩이처럼 우직한 사내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라핀이 몸을 끙끙거리며 흔들어대자 블란이 마지못해 짓누르던 몸을 일으켰다. 라핀은 그제야 겨우 이불 속에서 머리를 쏙 빼내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런 게 아니라, 누아 님이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뭐? 참나, 가지가지 하네. 그 녀석 나갔으니까 나와.”
“…….”
그래도 되는 건가? 라핀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블란이 뭐 하냐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안 나와? 거기서 뒹굴래? 난 그것도….”
“아, 아뇨…! 나가요.”
사실 이제 블란에게 다리를 벌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제 약점을 누아에게 다 까발려 버렸으니까. 그렇지만 라핀이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애초에 먹잇감으로 잡혀 온 신세였으니, 그가 구르라면 구르고 핥으라면 핥아야 하는 신세였다.
라핀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아가 사냥을 끝내고 일찌감치 돌아오는 건 아닐지 불안했지만, 지금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게 나았다.
라핀이 나름 빠른 몸놀림으로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내려오던 순간, 알싸한 통증이 허리를 덮쳤다.
“악…!”
허리야 저번에도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더 심각했다. 바닥을 지탱하던 두 다리가 맥없이 풀려버렸다.
라핀이 무릎이 꺾이듯 무너지려고 하자 블란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라핀의 허리를 감쌌다. 눈 깜빡할 새라고 할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
라핀이 깜짝 놀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때, 블란이 낮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라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
왜 그러기는. 늑대 놈들이 하루도 저를 가만두지 않으니까 그렇지….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라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핀은 원치 않는 블란의 부축을 받아 거실로 나왔다. 라핀은 그대로 블란이 그의 방으로 저를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향한 곳은 거실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라핀이 식탁 옆에 서서 그를 멀뚱멀뚱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더니 그릇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당근 요리를 가져왔다.
누아가 챙겨준 날것과 달리 그가 가져온 당근 요리는 고급스러워 보였다.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이건 왜 가져오나 싶은 의문스러움이 더 컸다. 라핀이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블란이 식탁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라핀, 그렇게 힘없는 것도 다 밥을 안 먹어서 그런 거야. 얼른 먹어.”
“…….”
신선이 따로 없다고 하기에 제가 간식 먹는 걸 본 줄 알았는데. 그냥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나 보다.
그가 챙겨 준 당근은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다. 예쁜 갈색에 초록색 푸른 잎까지 싱그러워 보였고, 플레이팅도 예뻤으니까.
그렇지만 간식까지 거나하게 먹은 라핀은 배가 불렀다. 이러면 안 됐지만, 정말 배부른 소리가 나왔다.
“저 밥 먹었는데요….”
“뭐?”
블란이 미간을 확 좁혀지면서 두 눈에 냉기가 흘렀다.
그의 급격한 표정 변화에 라핀의 몸이 움칠 떨었다. 밥 먹었다는 말이 저렇게 화를 낼 말이던가? 기껏 당근을 예쁘게 챙겨 줬는데, 배부르다고 안 먹어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챙기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그가 왜 화를 내는 건지 영문도 모르고 있을 때, 그가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라핀,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 자꾸 어디서 음식이 나서 야금야금 주워 먹는 거야?”
“누아 님이… 보따리째로 챙겨주셔서. 거기서 꺼내 먹거든요.”
누가 봐도 제가 잘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꼭 제가 죄를 저지른 것만 같아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라핀이 조심스레 대답하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걔가? 그 새끼는 뭔 생각인데 먹이한테 밥을 챙겨줘?”
“…….”
그러는 당신은 무슨 생각인데 같이 먹자는 건데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냥 배불러도 먹는다고 할걸…. 지금이라도 먹는다고 할까? 라핀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가 당근이 담긴 그릇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싱크대에 우수수 버렸다.
아, 아까워…! 저녁에 먹을 수 있는데! 라핀이 입만 벙긋거리는데, 블란이 짜증 섞인 얼굴로 라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엔 나랑 먹어.”
“예?”
“내가 챙겨줄 테니까, 먹지 말라고.”
“…….”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까부터 좀체 예상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요구를 하는 거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 단순한 요구조차도 라핀이 들어주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고 싶어도… 저, 누아 님이 제 식량을 보따리 채로 챙겨 놓으셔서 안 될 것 같아요…. 식사할 때도 지켜보시고….”
라핀의 말이 길어질수록 블란의 이마에 생긴 주름이 더 깊어졌다. 못마땅해 보였다.
그는 “그 새끼는 그냥 먹이라더니,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라고 작게 읊조리며 누아 욕을 하다가, 갑자기 뭔 생각을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래도 뭐… 제일 좋은 건 나 혼자 먹고 있으니까.”
“네…?”
좋은 게 뭐지? 남몰래 보약이라도 따로 챙겨 먹고 있는 걸까 싶었을 때, 블란이 저에게 다가왔다.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는 모습에 불안을 느낀 라핀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봤지만, 어느 순간 엉덩이에 식탁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아연해진 라핀이 뒤를 돌아 봤다가 앞을 본 순간, 블란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헉,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동시에 블란이 저돌적으로 입술을 겹쳐왔다.
“흐읍…!”
예고도 없는 입맞춤에 깜짝 놀라 허리를 뒤로 물렸지만 블란은 라핀의 양쪽으로 식탁을 짚으며 따라왔다. 입술은 떨어지기는커녕 더 바짝 붙었고, 그 탓에 허리만 아프고 자세가 불편해졌다.
두 혀가 뜨겁게 얽히고, 뭉근하게 예민한 부위를 문지르기까지 하니 점점 몸에 힘이 빠졌다. 식탁을 짚고 있는 팔이며 허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버티다 못한 라핀이 식탁을 뒤로 짚고 있던 한쪽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자 그가 아쉽다는 듯이 떨어져나갔다. 그렇지만 끝은 아니었다. 그는 라핀의 오금과 엉덩이를 받쳐 들더니 그대로 식탁 위에 앉도록 했다.
라핀이 상황을 파악할 새 없이 다리를 벌리게 하더니 다리 사이로 제 두꺼운 허벅다리를 밀어 넣었다.
다리를 못 오므리게 한 블란이 무릎으로 예민한 부위를 문질렀다. 라핀의 몸은 좀 전의 입맞춤으로 달아올랐던 참이라, 옅은 자극에도 곧장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아흣….”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지난날의 정사가 빠르게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감겼다.
라핀은 이어질 행위를 알기에 묘한 열감에 휩싸이면서도,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바짝 주며 저지했다.
“흣…. 아, 블란 님…. 저 아픈데…, 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늑대들과 몸을 겹치다 보니 음부가 다물릴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누아와 몸을 겹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음부에 천이 스치는 것만 해도 비명이 나올 것 같은데, 그 상태로 블란의 것까지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일순간 원치도 않는 상상을 해버렸는데 참혹했다. 쓸데없이 현실감 있는 상상으로 한층 더 절박해졌다. 라핀이 애원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약하게 비비적거리자, 당장이라도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짓쳐들어올 것 같던 기세를 식혔다.
그렇지만 마주친 두 눈은 여전히 눈은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겠는지 뜨거운 숨을 뱉으며 라핀의 뺨과 귓불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아직 박지도 않았는데 아프다고? 얼마나 둬야 낫는 건데?”
그는 근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게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렇지만 라핀의 몸을 탐하는 이가 블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라핀이 ‘누아 님도 있잖아요.’라고 말하려던 때, 블란은 대답을 바라던 건 아니었는지 엉덩이를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아!”
“뒷구멍 풀어줬잖아.”
보지가 아픈 건 알겠으니, 뒷구멍에 박는 건 어떠냐는 말이었다. 그에 라핀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저, 정말 못 걸어다녀요….”
지금도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할 판인데, 거기까지 혹사당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 누아에게 활동 반경을 제한당한 지금도 크게 움직이지 않긴 하지만 아파서 못 움직이게 되는 건 경우가 달랐다.
라핀이 울먹울먹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자, 블란이 시선을 마주하다가 두툼한 흉근이 오르내리도록 크게 한숨을 터트렸다.
“하아…, 그럼 박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거지?”
“네?”
“삽입만 안 하면 괜찮은 거냐고.”
“에? 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라핀이 어물쩍 대답했다. 저번에 보지에 안 박는다고 하더니 뒷구멍에 도토리를 넣은지라 이번 말 역시 완전히 믿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때 같은 말장난이 아닌, 대놓고 ‘삽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믿어도 되는 걸까? 사실, 제가 아프다고 칭얼거려도 들어줄 거라고는 기대도 않던 참이라 삽입만 안 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래?”
라핀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은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 입꼬리를 예쁘게 올리며 맑게 웃는 모습이었지만, 라핀은 그 미소에 어쩐지 더 불안해졌다. 웃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지는 상대는 처음이다.
라핀이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자, 그가 허리를 굽히더니 라핀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춰왔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벌어지는 듯하더니 가볍게 살점을 쪽 빨아들였다. 부드럽지만 잡아먹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소름이 돋아 몸이 작게 움츠러든 라핀의 티셔츠 아래로 자연스럽게 들어온 손이 가슴 돌기를 만지작거렸다.
“아, 흐읏….”
라핀의 가슴은 두 늑대가 집착적으로 물고 빤 탓에 퉁퉁 부어 있었다. 그 탓에 약한 접촉에도 평소보다 자극이 더 날카롭게 다가왔다.
늑대가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행위이니, 분명 싫어야 하는데… 왜 제 몸은 이다지도 느끼는 건지. 라핀은 민감한 제 몸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라핀이 사소한 스킨십에도 흠칫흠칫 떨면서 반응하자 블란은 마음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토끼는 태생부터 민감한 것 같았는데, 어째 손을 탈수록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보면 라핀이 제게 먼저 섹스하자고 달려들 때도 오지 않을까. 블란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며 자연스레 라핀의 속옷과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맨다리 사이를 바라보자, 라핀이 아프다고 한 게 영 엄살은 아니었던 듯 보지는 방금 양물을 받아낸 것처럼 퉁퉁 붉게 부어 있었다. 며칠 전에 격렬한 정사를 하긴 했다만, 어쩐지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흠…. 토끼는 몸이 연약하니까 회복이 더딘 걸 수도 있다. 제 짝으로 정했으니, 앞으로는 상태를 보고 적당히 몸을 겹쳐야 할 것 같다.
블란이 뒤늦게 반성하며 라핀의 허벅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뭐야. 너, 몸이 왜 이래?”
방금까지 기분 좋아 보이던 블란이 갑자기 냉랭해지자, 라핀이 깜짝 놀랐다.
“…네?”
“누가 네 몸을 이렇게 해 놨냐고.”
블란의 눈에 들어온 라핀의 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꼭 물고 빨린 것처럼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분명 생긴 지 얼마 안 된 울혈이었다.
이건 제가 만든 흔적이 아닌데. 설마….
블란은 라핀의 상의를 위로 확 위로 걷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위쪽 역시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하….”
블란은 그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씨발…, 어쩐지. 보지는 하루 건드리고 놔뒀는데 이상하게 부어 있다 싶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토끼와 늑대 사이에 회복 속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반성까지 했는데, 딴 놈의 짓이었단 말이지?
블란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눈빛으로 라핀을 추궁하자, 라핀이 목소리를 가냘프게 떨며 대답했다.
“누, 누아 님이….”
“누아?”
라핀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대답했건만, 살벌했던 표정이 더 날카롭게 굳었다. 그에 라핀이 토끼 귀를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블란은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할 때도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거나 속내 모를 표정을 했었다. 그렇게 늘 여유롭게만 보이던 그에게도 이렇게 무서운 표정이 있었다니. 평소와 달라서 그런지 누아보다 블란이 더 무섭게 보였다.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라핀은 블란이 왜 저를 저런 눈빛으로 쏘아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누아에게 제 신체의 비밀을 알린 건 블란이지 않나.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협박하고 저를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겁에 질려 있었다.
“브, 블란 님이 말해서… 누아 님이… 그랬어요.”
“뭐라고?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말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라핀이 말을 심하게 더듬거리자, 블란이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다시금 추궁했다.
그의 반응에 라핀은 한층 더 억울해졌다.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게 누군데. 비밀 때문에 저를 가지고 놀아 놓고선, 그렇게 쉽게 밝히고…. 억울함과 분노에 차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고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했다.
“블란 님이… 제 아래에, 이, 이런 거 달렸다고 누아 님한테 말해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왜, 왜 모르는 척하고…, 흐, 왜 저한테 화, 내세요…?”
그러나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냉철하게 따지려고 했는데, 일순간부터는 눈물이 눈가를 타고 뺨까지 빠르게 흘러내렸다.
화도 나고, 억울하고, 무섭고….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억울하게도 라핀은 화가 나면 눈물부터 터지는 편이라서 말싸움에는 재능이 없었다.
라핀이 훌쩍 소리를 내며 흐릿한 시야를 손으로 닦아내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란과 눈이 마주쳤다.
“뭐? 라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걔한테 언제 말했다고.”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빗물처럼 흘러내리던 눈물이 뚝 그쳤다.
어…? 무슨 소리지?
“네…? 브, 블란 님이 말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걸 왜 말하는데? 비밀 지켜준다고 했잖아.”
“…….”
“설마… 내가 비밀도 안 지키는 버러지 같은 새끼인 줄 알았어?”
“…….”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버러지 새끼인 줄 알았다.
그가 말한 게 아니었다고? 그럼 누아는 왜 제 옷을 벗긴 거지? 딱히 의심이 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어젯밤에 술이라는 걸 마시고 어지럽고 졸려서 그의 무릎에 대고 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러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누아에게 덮쳐지고 있었고…. 혹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게 있는 걸까?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순간도 흐릿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라핀이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에, 블란도 함께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한 웃음소리에 라핀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 누아 새끼…. 관심 없는 척 온 지랄을 다 떨더만, 이런 거였어?”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누아 님이 제, 제 비밀을 어떻게 안 거예요?”
라핀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아가 제 비밀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는데, 그는 아는 것 같았다.
라핀이 눈물 젖은 얼굴로 블란을 올려다보자, 그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답했다.
“네가 예뻐서 그래.”
“네…? 그게 무슨….”
“네가 이렇게, 훌러덩 벗겨 먹고 싶을 만큼 예뻐서 그렇다고.”
블란은 저와 누아가 무뢰한처럼 굴어 놓고선, 일이 이렇게 흐른 건 다 라핀 때문이라며 탓을 돌렸다.
블란과 누아는 늑대 중에서도 우두머리로서 한 암컷을 간택할 수 있는 지위였다. 그런데도 둘이 파트너를 두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둘 다 성에 차는 파트너를 만나지 못해서였다.
여태까지 마음에 둔 짝이 없었기에 취향이 똑같을 줄도 몰랐다. 어쩜 그렇게 거짓말도 뻔뻔하게 잘하는지. 누아 새끼도 언제든 라핀을 홀라당 벗겨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제 앞에서는 관심 없다는 척 고상하게 있던 게 황당했다.
“하…, 씹, 내 짝인데….”
블란이 성을 내며 욕지거리를 흘렸다. 어디든 분노를 풀고 싶었다. 라핀은 내 거라고 영역표시를 진하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제가 봐도 라핀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은 붉은 울혈과 이빨 자국이 잔뜩 있었고, 보지는 퉁퉁 부어 있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콱콱 짓찧어대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토끼를 반려로 삼기도 전에 가냘픈 숨을 꺼트릴 것만 같았다.
핏발 선 눈으로 라핀의 몸을 훑던 블란은 누아가 손대지 않았을 법한 부위를 찾았다. 그러다가 딱 한 군데를 발견했다.
블란은 슬그머니 웃으며 라핀의 가슴팍을 꾹 눌러 식탁 위에 등을 대고 눕게 했다. 라핀이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라핀의 두 다리를 위로 들게 하더니 오밀조밀 꽉 다물린 뒷구멍을 손으로 쓸었다.
“여기는 안 건드렸지?”
“네…?”
“그 새끼가 여기에다가도 씹질했냐고.”
라핀이 단번에 말귀를 못 알아듣자, 블란이 가운뎃손가락으로 말랑한 뒷구멍을 쿡쿡 찔렀다. 그곳은 며칠 전에 도토리를 종일 품고 있었던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완전하게 꾹 다물려 있었다.
라핀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퍼드득 몸을 튀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럼 됐어.”
뭐가 됐다고? 라핀이 이해하기도 전에, 꽉 다물린 뒷구멍에 두툼한 성기 선단이 닿았다. 라핀은 그제야 뭐가 됐다는 건지 깨닫고 말았다.
“헉…!”
라핀이 화들짝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블란에게 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족쇄에 걸린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황급히 상체라도 일으키려고 해도 그가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라핀의 가슴을 꾹 누르는 바람에 그마저도 막혀버렸다.
젠장! 어디에도 도망갈 구석을 찾지 못한 라핀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그에게 호소했다.
“삽입은 안 하겠다고 야, 약속 했잖아요!”
분명 그랬다. 이번에는 말장난도 아니었다. 라핀이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했다.
“약속은 안 했는데.”
“말로 약속했잖아요!”
손깍지 걸고 도장까지는 안 찍었어도 라핀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뻔뻔스러운 말이라니. 라핀이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따져 물었으나, 블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앞보지 간수를 제대로 했을 때 얘기고.”
“무슨….”
“뒷보지까지 따먹히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지.”
“…….”
라핀은 ‘뒷보지’라는 단어를 생에 처음 들어봤지만, 그게 뒷구멍을 이야기한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그냥 자고 일어났는데 누아가 제 몸을 탐하고 있었던 것을 제 탓으로 돌리다니…. 그때 상황은 불가항력이었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블란이라는 게 가장 황당했다. 며칠 전까지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다른 늑대들에게 비밀을 소문내겠다고 협박하던 블란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변덕을 하루 이틀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만두게 됐다.
“그, 그래도 거기는 안 들어가요….”
블란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뒤에 삽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라핀이 고개를 젓자, 블란이 왜 안 되냐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번에 풀어줬잖아.”
“예? 이게 훨씬 크잖아요!”
그가 제 뒷구멍에 머금게 했던 도토리는 도토리 중에서도 작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블란의 것은 다른 수컷의 성기 중에서도 월등하게 컸다. 견줄 것이 전혀 안 됐다.
라핀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블란은 당장이라도 삽입할 듯하던 기세를 죽였다.
“흠, 그런가….”
“네, 네!”
라핀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도토리로 풀어준 수준으로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을 터다. 그러자 잠깐 생각하던 블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빨아달란 말이지?”
“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앗!”
라핀이 황급히 아니라고 했으나, 블란은 라핀의 두 다리를 접게 했다. 무릎을 접게 하고 가슴팍 쪽으로 꾹 누르니 자연스레 엉덩이가 들렸다.
블란은 망설임도 없이 뒷구멍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꽉 다물린 뒷구멍에 대고 바람을 후우, 불자 오밀조밀 주름지게 다물려 있던 구멍이 물고기 아가미처럼 작게 뻐끔거렸다. 블란은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고는, 곧장 혀를 가져다 댔다.
“히, 흐으으…!”
라핀은 뒷구멍에 물컹한 혀가 닿자마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지를 핥아질 때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아랫도리가 빠듯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는 그런 이상한 감각.
그렇기에 곧 제 몸을 덮칠 감각을 알았다. 더 큰 쾌감에 이성이 잠식되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라핀은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슬금슬금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브, 블란 님, 이거 시, 싫어요…. 이상, 해요….”
그렇지만 블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골반을 콱 잡고 오히려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엉덩이에 콧대를 문지른 그는, 마치 예의를 갖추고 노크하듯 조심스럽게 뒷구멍을 혀로 쿡쿡 찔렀다.
“흐, 흐읍…,”
라핀의 아랫입술을 깨문 탓에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거의 먹혀 들어가는 듯 들렸다. 다른 행위는 몰라도 뒷구멍을 빨리면서 신음을 흘리는 음탕한 토끼가 되기는 싫었다.
그렇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블란은 힐끗 라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라핀이 숨을 죽이는 게 싫었다. 더 열띤 소리를 내주기를 바랐다.
승부욕이 돋은 블란은 어디 한번 참아 보라는 듯이 라핀의 음부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츄우웁, 추읍…. 질척하게 흡착하는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빨아 당기자, 라핀이 꾹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쳤다. 억누르고 있던 달콤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흣, 하으읏, 아!”
“하….”
그제야 블란이 만족했다. 이거였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라핀의 신음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 듣고 싶어졌다.
블란은 라핀의 신음을 더 듣고자 더 진득하게 뒷구멍을 빨아 당겼다. 억지로 소리를 내게 하려고 일부러 이를 세워 여린 살에 따끔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흐으읏, 아, 제발…. 시, 싫어…. 흐, 으응…!”
라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블란에게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짝 선 라핀의 자지는 금방이라도 묽은 액을 터트릴 것처럼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 으읏, 하아…. 아, 그만, 그만해 주세요…. 흣, 이, 이거 좀….”
이제 와서 세울 자존심도 없다며, 이런저런 자존심을 다 버렸던 라핀이었다. 그렇지만 뒷구멍을 빨아주는 것만으로 사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뒷구멍은 생식기조차 아닌 부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만두라는 말을 곱게 들어줄 블란이 아니었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더 게걸스러워졌다. 그는 혀를 넓적하게 펴 뒷구멍 전체를 핥기도 하고, 혀를 날카롭게 세워 내벽까지 핥아댔다. 혀뿌리까지 넣을 듯 힘을 주어 안쪽을 긁어대기도 했다.
물컹한 것이 제 안을 헤집는 감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더 큰 문제는 블란이 뒷구멍을 빨 때 이따금씩 그의 단단한 콧날이 보지에 닿는다는 거였다.
“힉, 아, 흐으, 아, 안돼요, 그만, 흐으윽, 으응!”
보지는 일전의 정사로 퉁퉁 부어 있던 탓에 겉면만 스쳐도 몸이 물고기처럼 펄떡 뛰어오를 정도로 예민했다. 두 민감한 부위를 동시에 자극하는 행위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라핀은 그의 혀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봤지만, 종용하듯 엉덩이를 흔드는 꼴밖에 되지 못했다. 라핀은 분홍빛 자지에 핏줄이 서도록 사정을 참다가 결국 자존심에 못 이겨 제 것을 손에 쥐었다.
“흐, 으읏, 아앗…!”
바들거리는 손으로 힘없이 쥔 것뿐이었지만, 터질 듯 서 있던 자지 끝에서 묽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보지가 축축해지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사정을 하면서 뒷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구멍이 혀를 물 듯하자, 블란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정하고 헐떡거리는 라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자지가 쥐어진 채였다.
라핀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블란은 그가 쾌감에 못 이겨 자위까지 하는구나 싶었다. 황당했지만, 잘 느끼면 좋은 거였다.
들리지 않게 웃음을 흘린 블란이 뒷구멍을 더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빨아줬다. 사정한 직후라 자극이 날카로운 바늘 같았다. 그의 혀가 닿을 때마다 온몸이 부들거렸다.
“아아, 흐으윽, 으, 제발, 흐, 블란 니임….”
라핀은 이러다 정말 이상해진다고, 무섭다고 말하고 싶은데 머리가 몽롱해지고 혀에는 힘이 풀려갔다.
블란은 구멍이 잘 보이도록 볼기를 양손으로 활짝 벌리고, 탐욕스럽게 핥아댔다. 혀끝을 뾰족하게 세우고 피스톤질하기도 했다.
뒷구멍은 이제 겉면도 내벽도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이만큼 조임이 풀렸으면 안쪽은 손가락으로 쑤시든 어쩌든 이런저런 방법으로 넓힐 방법이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꼭 불량 식품을 먹는 것처럼 라핀의 음부에서 입술을 떼기가 싫었다.
“춥….”
블란이 마지막으로 보지도 함께 빨아주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핀은 수용성이라도 됐던 것처럼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제가 뒤를 빨아주는 동안 도대체 몇 번을 사정한 건지, 라핀의 마른 배는 희멀건 액체로 덕지덕지 뒤덮여 있었다.
너무 정신없이 빨았나? 너무 많이 사정하면 기절해버리니 적당히 해야 했는데, 라핀의 반응에 심취해 눈을 까뒤집고 뒷구멍을 애무해버렸다.
뭐…. 오늘은 라핀이 기절해도 꼭 여기에 삽입할 거니까. 블란은 젖어 있는 입가를 손으로 대충 닦고, 아직도 위용을 유지하다 못해 더 크게 발기해 있는 자지를 그의 뒷구멍에 비볐다.
그러자 라핀이 고개를 힘없이 저으며 숨 섞인 목소리로 거부했다.
“브, 블란 님…. 하, 하지 마세요….”
“하… 잘만 느껴 놓고선, 왜 갑자기 하지 말래?”
“흣, 안 느꼈어요….”
“이렇게 싸질러 놓고 안 느꼈다고?”
블란은 그의 배를 손가락으로 훑어 라핀의 눈앞에 보여줬다. 일부만 훑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란의 손은 정액으로 완전히 흥건해져 있었다.
눈앞에 증거를 들이미니 라핀은 더는 억울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삽입은 싫어 꿍얼거리자 블란은 라핀이 무얼 걱정하는 건지 금방 눈치채고 최대한 다정스럽게 말했다.
“충분히 풀어줬으니까, 안 아플 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는 제 사정이 아니라 그런지, 늘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면서 쉽다는 듯이 말했다.
라핀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블란이 라핀의 뒷구멍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라핀이 몸을 퍼뜩 떠니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봐, 내가 정성스럽게 풀어줬더니 어서 먹여 달라고 움찔거리잖아.”
“아, 아닌데….”
어서 먹여 달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깜짝 놀라서 그런 건데….
그렇지만 블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지, 그는 뒷구멍에 완전히 양물의 선단을 맞췄다.
그대로 허리에 힘을 주고 뭉근하게 누르자, 앙증맞은 뒷구멍이 금방 안쪽 살을 내어주며 거대한 좆대가리를 빨아들였다.
“흣, 아아, 으읏, 안, 돼애….”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들어오는 성기에 라핀이 몸을 비틀었다. 그렇지만 블란이 꿋꿋하게 라핀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바람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라핀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블란이 아무리 정성스레 뒤를 핥아줬다고 한들 작은 도토리와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훨씬 더 큰 압박감이 온몸을 내리 눌렀다.
라핀은 좀 전에 뒷구멍을 빨릴 때, 흐릿하게 보지를 유린당할 때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삽입하니 달랐다. 뒷구멍에 삽입하는 건 훨씬 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하고 아프고 힘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애꿎은 발끝과 손끝을 오므리며 간신히 버티는데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던 자지가 일순간 멈춰 섰다.
벌써 다 들어온 걸까? 라핀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힐끗 아래를 바라봤으나, 아직도 반도 안 들어와 있었다.
“흐으으, 왜, 아, 아직도….”
왜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 억울함에 눈물이 퐁퐁 흘러내렸다.
라핀이 펑펑 울기 시작하니 뒷구멍의 조임도 더 강해졌다. 블란은 끙, 미간을 좁히며 숨을 내뱉었다.
제가 아무리 라핀의 뒷구멍을 빨고 혀로 쑤셔 줬다지만, 그래봐야 혀였다. 깊은 안쪽까지 풀어주지 못했다 보니 안쪽은 엄청나게 뻑뻑하고 비좁았다. 그런데 울기까지 하니 좆 껍질이 다 까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좁아졌다.
블란은 라핀도 아프고 힘들어서 우는 거라는 걸 알겠지만, 그렇다고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누아 새끼가 질투에 불을 지른 탓에 누아가 라핀의 뒷구멍을 따먹기 전에 제가 먼저 첫 번째를 가져가고 싶었다. 의미 없는 승부욕이었다.
“후…, 라핀. 후우, 울지 말고… 힘 빼.”
“흐으윽, 아, 못, 으으, 해요…, 그만, 빼, 빼주세요… 흐윽….”
저번에 힘을 풀었더니 차츰차츰 성기가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왔던 기억이 있었다. 풀어봐야 블란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거니와 이번엔 정말 몸이 반으로 쪼개질 듯 아파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라핀이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자 블란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반쯤 넣었던 성기를 조금 빼냈다. 그렇지만 끄트머리는 여전히 안에 머금고 있는 채였다.
분명 그가 처음 귀두를 삽입할 때도 찢어지겠다 싶었는데, 어느새 성기 반을 넣은 게 익숙해진 건지 살 것 같았다.
라핀이 작게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 블란은 라핀의 몸이 이완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완전히 겹치며 깊게 박아왔다.
“아아, 아아윽…!”
철퍽!
끄트머리만 걸쳐 있던 성기가 단번에 살결을 치며 뿌리까지 꿰뚫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깊은 삽입에, 라핀은 달궈진 쇠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경련했다.
“후우….”
블란은 흉흉한 성기를 뿌리까지 삽입하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누아 새끼와 구멍 동서가 됐다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놈 대신 제가 라핀의 모든 첫 경험을 가져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뒷구멍의 내벽도…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보지에 삽입했을 때만큼이나 황홀했다. 그렇지만 조임이 너무 심해서 작열감이 엄청났다. 블란은 이러다 좆을 끊어먹겠다 싶어져 라핀의 엉덩이를 양손에 쥐고 쫙 벌렸다.
안 그래도 활짝 벌어져 있던 구멍이 더 넓게 벌어졌다. 뒷구멍은 자그마한 접촉에도 상처가 나기 쉬운 예민한 부위였다. 라핀은 벌어진 뒷구멍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에 늘어져 있던 몸을 격렬하게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아, 흐으으, 아, 안 돼요…! 흐윽, 찌, 찢어져요, 흐윽….”
“후, 그러게, 힘 빼라니까….”
“으, 으흐윽, 아흐으윽.”
라핀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못 한다고 고개를 저었다. 압박감에 숨도 막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힘을 빼라고….
라핀이 좀처럼 힘을 풀지 못하자 블란은 숨을 내뱉으며 토끼를 품에 꽉 끌어안고 제 성기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늑대 나름대로는 다정한 행위였을지 몰라도, 몸이 달라붙으면서 성기 기둥이 더 깊게 들어왔다. 더 버거워졌다. 몸 위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체중에 발버둥 쳐도 몸 안의 좆만 요동칠 뿐이었다.
결국 반항도 못 하고 오랜 시간을 숨만 주고받으니, 믿을 수 없게도 압박감이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펑펑 울던 라핀의 눈물이 잦아들고 마른 가슴이 위로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울면서 꽉 조이던 조임 또한 조금 풀렸다.
블란은 칭찬하듯 라핀의 둥근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 이제 진정이 돼?”
“으, 흐으, 빼, 읏, 빼주시면 안 돼요…?”
라핀이 다시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거리며 물었다. 아까보다는 부담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제 몸을 덮치고 있는 둔탁한 감각은 여전했다. 지금 당장 말하는데도 배가 울려서 제 몸 안에 들어온 성기의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라핀이 울먹거리며 코앞에 있는 블란과 눈을 마주하자, 그가 안쓰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
“흑, 왜요….”
“말했잖아.”
블란은 그렇게 말하며 라핀의 아랫입술을 대뜸 깨물었다. 나름 살짝 깨문 거였지만 늑대 이빨이 워낙 날카롭다 보니 라핀의 입에서는 옅은 비명이 나왔다. “아!” 하고 입술이 벌어지자 그 틈을 타고 물컹한 살덩이가 라핀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천천히 입속을 탐하는 동안 라핀과 마주한 시선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어디를 핥아줘야 반응하는지 보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라핀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결국 피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블란은 이전에 기억해 뒀던 여린 부위를 공략했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다가 입술을 쪽 소리가 나도록 빨고 혀를 얽어댔다.
“으응….”
타액을 교환하는 행위는 몇 번에 걸쳐 이어졌다. 입술이 떨어져 끝났나 싶으면 다시 입술을 맞춰왔다.
연인이 하듯 한없이 부드러운 행위에 라핀의 성대에서 긁는 신음이 흘렀지만, 길게 이어지니 점점 벅차왔다.
블란이 제 욕구를 자제하며 부드럽게 빨았는데도 길어진 입맞춤에 라핀의 예쁘장한 핑크빛 입술이 사과처럼 익어가고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붓기 시작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라핀이 그의 가슴께를 붙잡자, 블란이 아주 조금 떨어졌다. 라핀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에게 말했다.
“흐, 수, 숨 못 쉬겠어요….”
“…하.”
블란은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반쯤 내리깐 눈으로 라핀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라핀의 턱주가리를 아프지 않게 우물거렸다. 더 입술을 맞추고 숨을 교환하고 싶은데, 라핀이 힘겨워하니 다른 곳에 여운을 푸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은근슬쩍 라핀의 안에 들어와 있던 성기가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귀두가 내벽을 천천히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찌릿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조금 적응했다고 쾌락을 느끼는 것이었다.
“흐, 으읏, 으….”
라핀은 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감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침대 시트라도 구겼을 텐데 식탁 위에는 붙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곳저곳 손을 더듬던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께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작은 주먹에 그의 상의가 사정없이 구겨지자 블란은 제 멱살을 잡은 라핀의 손을 치우더니 제 목에 감게 했다.
무언가 잡을 곳이 있다는 것에 작은 안정감이 생겼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블란은 반 이상 빼낸 성기를 다시 깊게 쑤셔 박았다.
“아앗!”
그새 처음처럼 비좁아진 곳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성기에 고개를 위로 확 젖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거센 감각이었다.
답지도 않은 배려를 하느라 인내심이 다 닳은 블란은 퍽, 퍽 고환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깊고 빠르게 추삽질하기 시작했다.
“아, 아으, 하윽!”
박힐 때마다 라핀의 하얀 다리가 블란의 어깨에 걸쳐진 채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블란의 것이 예민하고 깊은 곳을 찌를 때면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성기를 조였고, 스르르 빠져 나갈 때면 기진맥진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블란은 그 감각이 너무나도 황홀해, 이를 악물고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힘을 바싹 줬는지 거칠게 삽입했다가 뒤로 빠지는 블란의 엉덩이에 두 개의 보조개가 깊게 파일 정도였다.
라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냥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아서 무섭고 아프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추삽질을 할수록, 안을 가득 채워줄수록, 아프고 거칠게 안을 짓찧어줄수록 전류처럼 찌릿한 감각이 아랫배를 메웠다.
“아, 흐으응, 앗! 아, 흑, 제발, 제발요….”
배덕한 쾌감이었다. 라핀은 그의 목을 꽈악 끌어안고, 귓가에 대고 무엇인지 모를 것을 애원해댔다.
“하아, 씹…!”
블란은 애원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알아들은 건지 욕설을 삼키더니 라핀의 클리토리스를 거칠게 문지르며 살을 빠르게 부딪쳤다.
자극점을 찌르는 힘과 속도가 빨라진 데다, 민감한 부위를 동시에 자극하는 행위에 라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머리로 오르는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말도 안 되지만, 뇌가 절절 끓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흐윽, 아으, 아앗!”
커다란 몸체 아래서 경련하듯 떨고 있던 라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정하고 말았다. 애처롭게 흔들리던 자지 끝에서 액체가 투둑투둑 터져 나왔다.
라핀은 제가 사정했다는 걸 늑대가 모르고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명백한 사정의 반응에 블란이 거칠게 박아대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하…, 또 쌌네.”
블란이 놀리듯 웃으며 정액을 뱉어낸 라핀의 귀두를 엄지로 문질렀다. 요도구를 자극하자 미처 나오지 못했던 정액이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손을 적시는 정액은 거의 투명한 물에 가까웠다. 소변이나 그런 건 아니고, 근래 라핀이 수도 없이 사정한 탓에 색이 옅어진 것이었다.
블란은 그것을 음험한 눈으로 바라보다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튀었다. 누아 놈이 밥을 먹이고 있다는데, 제대로 먹이고 있는 거 맞아? 부실하게 챙겨주는 거 아니야? 정액이 왜 이렇게 묽어?
라핀이 제 아래에서 이런 맑은 정액을 흘리는 것도 좋지만, 우유 같은 정액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제 피부만큼이나 하얀 정액을 배에 쏟아냈을 때 얼마나 절경이었던지….
정액이 옅어진 원인을 누아 탓으로 돌리며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라핀이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흐으, 그, 그래서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여태까지 라핀이 사정하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라핀은 심하게 부끄러워했다.
그래서일까. 이제 보지에 이어 뒷구멍까지 개통하는 마당에, 블란은 마치 첫 경험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풋풋해졌다.
“그랬나?”
블란이 못 들었다는 듯 웃으며 라핀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단순하게도, 성질부리고 있던 게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라핀은 그런 블란의 심경 변화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더니만, 지금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설마 욕구 불만이었나? 거의 매일같이 몸을 겹치긴 하지만 매번 제가 먼저 기절하니, 늑대의 성욕을 분출하기에는 모자랐던 걸까?
라핀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블란이 제게 몸을 치댈 때마다 식탁이 끼익거리며 버거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견고하고 튼튼해 보였던 식탁이 지금은 너무나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이러다 무너지는 거 아니겠지? 라핀이 불안감에 힐끗 식탁을 내려다보자, 블란이 잘생긴 눈썹을 잘게 일그러트렸다.
“나 봐.”
“네…? 아, 흐읏, 자, 잠깐만, 아아…!”
라핀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며 코앞에 있는 블란을 바라본 순간, 그가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를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격렬한 몸짓에 식탁이 더 버겁게 삐걱대는 소리를 냈지만, 그때쯤엔 라핀의 귀에는 제 달뜬 숨밖에 들리지 않았다.
퍽, 퍽! 세게 치닫는 탓에 몸이 위로 올라갈 정도인데도 블란은 여전히 라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든 순간을 담겠다는 듯이 집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러고 보면 키스할 때부터 계속해서 저런 시선이었다. 한번 의식되기 시작하니 끝없이 부담스러웠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라핀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피하듯 고개를 돌리자, 그가 라핀의 양 볼을 잡고 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했다.
“하아, 다른 생각, 후우, 하지 마.”
블란이 불만스럽게 말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똑바로 마주친 그의 두 눈은 질투로 들끓고 있었다.
다른 생각이라니? 설마….
“아니, 아응, 시, 식탁, 하아, 무너질까, 봐, 흐으읏, 앗!”
“후,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나 보지?”
“아, 아으윽, 하아, 아아!”
식탁 걱정을 했던 것뿐인데, 블란은 다른 잡념 따위는 들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내벽을 짓찧어댔다.
마치 여태까지는 봐줬다는 것처럼 험악한 기세의 추삽질이 이어졌다. 사정없이 아래가 짓찧어졌다. 마찰에 진탕이 된 내벽은 용암처럼 들끓었다. 뱃속을 가득 메우는 압박감에 자꾸만 속이 갑갑해졌다. 자칫하면 숨이 넘어가겠다 싶을 만큼 버거운 감각이었다.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다. 분명 제 몸은 식탁 위에 누워 있음에도 마치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수시로 일었다.
아찔하고 무서웠다. 그럴 리 없겠지만, 무너져서 심연 깊은 곳까지 떨어질 것만 같았다. 라핀이 블란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바짝 주고 단단한 어깻죽지에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얼굴을 흥건하게 덮고 있던 눈물의 그의 옷깃에 닦였다.
한시도 가만히 못 있게 들쑤시는 날카로운 감각에 라핀이 그의 품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고 있을 때였다. 돌연 블란의 커다란 손이 라핀의 둥근 뒤통수를 감쌌다. 그리곤 숨이 막힐 만큼 세게 끌어안아 품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틈도 없이 바짝 밀착했다.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울릴 정도였다.
“으우, 응, 흐으, 으, 으읏!”
치워낼 힘도 없는 라핀은 가슴께에 대고 뜨거운 숨을 터트렸다. 그게 기폭제가 된 것처럼 블란은 자극점을 짓누르다 못해 긁어댔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에 다시금 사정을 종용하는 몸짓이었다. 한없이 민감한 라핀의 몸은 그의 의도대로 반응을 보였고 허리가 바르르 전율했다. 추삽질이 멈춘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리고 이내,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팍 타졌다.
“하…, 좋아….”
뒷구멍에다가 사정한다고 라핀이 임신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블란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라핀의 안에 남겨두고 싶었다. 완전히 뒷구멍에 정액을 털어놓은 블란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리며, 깊게 삽입되어 있던 성기를 빼냈다.
구멍에서 좆 선단까지 끈적한 액체가 이어졌다. 블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꽉 다물려 있던 뒷구멍이 공기를 머금듯 뻐끔거렸다. 안쪽에 거나하게 싸지른 정액이 넘쳐 아래로 흘러 식탁을 적셨다.
식탁에 정액이 튀다니.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본다면 더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나 싶을 거다.
그렇지만 블란은 늑대고, 눈앞에 둔 건 식량과도 다름없는 토끼라서 그런 걸까? 블란은 라핀이 기절한 채 식탁 위에서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입맛이 돋고 탐스럽고…, 또 귀여웠다.
그런 모습을 음미하듯 살피고 있자니, 블란은 다시금 제 좆대가리가 꺼떡거리며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또 박으면 안 되겠지. 토끼를 반려로 두려면 종족 간의 체력 차이를 인정해야 했다.
블란은 아쉬운 대로 라핀의 뺨을 우물거리며 양쪽에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말랑말랑한 볼을 한 움큼 물고 쪽 빨아 당겼다.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 뺨에 하고 나서 보니, 마치 새 신부가 연지곤지를 찍은 모습처럼 됐다.
“내 사랑스러운 짝인데. 내 반려인데….”
누아가 라핀을 건드린 정황을 발견했지만 선뜻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라핀은 누아의 사냥감이었고, 그걸 냉큼 취한 도둑놈이 저였으니까.
게다가 은빛 늑대 부족과 검은 늑대 부족은 먼 옛날부터 동맹을 맺어온 관계였다. 과거에 여러 가지 요인으로 늑대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예전만큼의 위상을 못 떨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두 늑대 부족이 힘을 합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늑대 종족이 다시 지금과 같은 위상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
개인 간의 일이라면 사나이 대 사나이로 싸우고 볼 텐데, 저를 믿고 따라온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검은 늑대 부족이나 은빛 늑대 부족은 서로 세력이 비등비등했다. 겨우 토끼를 반려자로 얻기 위해서 싸우기에는 출혈이 너무 컸다.
분명 두 늑대 부족이 싸우지 않고 넘어갈 방법은 있었다. 라핀을 나눠 가지는 것.
어차피 라핀과는 종족이 달랐고, 그의 아랫도리에 보지가 달렸다지만 임신을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니 굳이 반려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반려가 아니라면 꼭 한 명과 섹스하라는 하라는 법도 없으니 애첩 삼아 같이 나눠 먹으면 됐다.
그렇지만 블란은 라핀을 나눠 먹기 싫었다. 그 새끼랑 구멍 동서를 하다니. 그게 말이 돼? 당장 오늘만 해도 라핀의 몸에 누아가 남긴 흔적들을 보며 속이 몇 번이나 뒤집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선수를 쳐야겠지.
블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라핀을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
기절한 라핀을 씻기는 시간은 즐거웠다.
힘없이 축축 늘어지는 몸을 씻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워낙 체력이 좋은 블란은 지칠 줄을 몰랐다. 몰래 손장난도 쳐가면서 하느라 라핀을 씻기는 이 시간이 연인과 간지럽게 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부 씻긴 후 라핀을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감싸고 안아드니, 포대기에 싼 아기 같은 모습이 됐다. 얼굴도 그렇고, 따듯한 습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양 뺨도 그렇고 모든 순간이 귀여웠다.
“하아, 어쩜 이렇게 예쁘지?”
블란이 변태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흔히 말하던 그 콩깍지인가? 처음 봤을 때부터 예뻐 보였으니 첫눈에 반한 건가? 아랫도리를 보고 난 후에 더 예뻐 보였고, 성교할 때 엉엉 울면서 제게 달라붙을 땐 더 예뻐 보이고…. 안 예쁠 때가 없었다.
블란은 잠든 라핀의 얼굴 이곳저곳 입술 도장을 찍다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방 침대에 눕혀 편히 재우려는 생각으로 좁은 복도로 나왔을 때, 별안간 귀가한 누아와 마주쳤다.
“…….”
방금까지만 해도 비눗방울처럼 몽글몽글했던 기분이 단숨에 굳었다. 블란은 웃던 표정을 대번 굳힌 채 누아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반겼다.
“왔냐.”
“응.”
같은 집에 살고는 있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이였다. 근래에는 묘하게 더 거리가 생겼고.
그래서 누아는 무감하게 대답하며 지나치려고 했다. 블란의 품에 안긴 포대기 아래 하얀 종아리가 힘없이 덜렁거리는 걸 보기 전까지는.
누아의 미간이 대번 좁아졌다. 처음에는 시체라도 안고 있는 건가 했는데, 다리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누아는 저를 지나치려던 블란의 어깨를 붙잡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포대기에 눈짓을 주며 물었다.
“뭐야, 그거.”
“라핀.”
“뭐?”
당당한 대답에 누아의 미간에 패어 있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은연중에 라핀의 다리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확신을 받으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누아는 왜인지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며 라핀을 도로 받아가려 손을 뻗었다.
“네가 걔를 왜 안고 있는데? 이리 내놔.”
그렇지만 블란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리며 누아의 손길을 피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누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블란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토끼 잡으면 다 너 줄게. 너 사슴도 좋아하던가? 사슴도 줄게. 그러니까 라핀은 나한테 넘겨라.”
“…뭐?”
앞으로 토끼를 잡으면 다 제게 주겠다는 건 획기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애초에 토끼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참이었다. 사슴은 양도 많고 맛도 있지만 취향이 확고한 누아에게는 토끼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 먹잇감이었다.
게다가 저 새끼가 하는 말은 별로 신용이 가지도 않았다. 저런 후한 제안을 할 새끼가 아니었다. 누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어. 걘 내 먹이야. 내놔.”
“내 반려기도 하지.”
그렇지만 블란도 누아 못지않게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반려? 누아는 일순간 제 귀가 멀쩡한가 청력을 의심했다. 잘못 들었다고 하려 했는데, 블란이 라핀을 바라보던 애틋한 시선을 떠올리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싶었다.
“얘가 왜 내 반려야.”
“너도 봤을 텐데. 얘 몸에 내가 남겨뒀던 흔적을.”
“…….”
그러고 보면 며칠 전, 라핀을 안았을 때 그의 몸이 벌레에 물린 것처럼 얼룩덜룩한 걸 봤다. 금방 아랫도리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렸지만.
그런데 그게 전부 블란의 소행이었다고? 당시에는 벌레라도 물린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블란 놈이 벌레처럼 물고 빨았을 걸 상상하니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내 먹이한테 왜 그딴 짓을 한 거지? 게다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라핀은 토끼야. 종족이 다르다고.”
늑대의 반려가 토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늑대의 개체수가 부쩍 줄어들고 있으니 종족 유지를 위해 번식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특히 블란과 같은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늑대는 더더욱 강한 후세를 남겨야 했다. 그런데 수컷 토끼를 반려로 삼겠다고? 말도 안 됐다.
누아가 심각하게 반응했지만, 블란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대답했다.
“알아.”
“아는 녀석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그럼 너는? 너도 라핀이랑 섹스했잖아.”
“…….”
허를 찌르는 말에 누아의 입이 꾹 다물렸다. 순간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싶었지만, 저 역시 라핀의 몸에 이런저런 흔적을 남겨뒀으니 그걸 본 것일 터다.
그렇지만, 제가 라핀과 섹스를 했대도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무튼… 안 돼. 라핀은 내 거니까 너한테 못 줘.”
녀석에게 라핀을 넘기기가 싫었다. 제가 라핀과 섹스했다고 한들, 그게 블란에게 라핀을 넘겨야 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었다.
대화가 좀처럼 통하지 않자 블란은 속이 갑갑해졌다. 벽에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쉽게 라핀을 넘길 거라고 생각은 않았지만, 넘기지 않는 이유가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꼭 제 것을 주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애새끼 같았다.
“이리 내놔.”
누아가 또 손을 뻗었다. 이번 역시 블란은 가뿐하게 피했으나, 두 늑대의 눈빛이며 몸짓이 자칫하면 몸싸움이 될 법한 기세였다. 다행인지, 곤히 잠든 라핀이 품에 안겨 있는 탓에 둘 다 거세게 나오지는 못했다.
결국 기세에 밀린 건 블란이었다. 라핀을 품에 안고 있어 적극적으로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누아는 블란의 품에서 라핀을 앗아가고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내 토끼 건드리지 마.”
“그게 먹이를 보는 눈이야?”
블란이 비꼬듯 말했지만, 누아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