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2. 비밀관계

분명 밤에도 자고, 낮에도 블란의 품에서 잠들었는데도 또 잠이 들었다.

누가 보면 기면증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라핀은 환자였다. 목덜미를 꿰뚫린 치명상이 낫지 않았을뿐더러 블란이 제 몸 안을 방망이로 휘젓고 다녀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근육통이 일었다.

후유증에 골골대고 있을 때 누아가 당근을 가져다주고 눕게까지 했으니, 힘들고 아프고 배부른 라핀은 잠이 솔솔 올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라핀은 야행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밤에 정신이 말똥말똥하게 돌아왔다. 밤낮이 바뀌다니. 늑대들에게 잡혀 낮이라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늘 잠자리에 들던 야심한 밤에 깨어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무료하게 침대 시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할 일이 없나 생각하는데 일찌감치 일어난 누아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나갔다 올게.”

“어디 가세요? 으….”

갑작스러운 인사에 라핀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한시도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 안달인 늑대가 갑자기 어딜 나간다는 건지 궁금해 일어나려고 했는데 낮에 혹사당한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라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를 짚었으나, 다행히 누아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너 하나 잡아먹겠다고 굶어 뒈질 순 없잖아.”

말은 즉 다른 생물을 사냥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말 한번 예쁘게 하네….

라핀은 저 대신 희생당할 다른 생물이 안타까웠지만, 원래 생물이란 제 고통이 제일 중요한 거였다.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 다, 다녀오세요.”

“…….”

라핀이 고분고분 인사하자 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인상인데, 눈까지 가늘게 뜨니 더 무서웠다.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은 것처럼 몸을 움츠리는 라핀에게 누아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가겠다고 아등바등할 땐 언제고 고분고분한 척이야? 이러고 뒤통수 깔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저 때문에 일 못 나가셨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다녀오시라고 한 건데….”

“넌 너무 말이 길어.”

“…….”

물어보기에 허둥지둥 이유를 덧붙였을 뿐인데, 누아는 변명은 됐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그 손짓이 입 다물라는 수신호가 된 것처럼 라핀이 입술을 꾹 다물자 누아가 라핀과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신신당부했다.

“아무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블란이 대신 감시해 주기로 했으니까.”

“브, 블란 님이요…?”

라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블란이라고? 세상을 잃은 것처럼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으나, 누아에게는 그런 변화가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는 하루하루 번갈아 가면서 사냥을 나가는 편인데, 그날은 드물게 같이 나갔거든.”

“아….”

라핀이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를 내자, 누아가 그제야 라핀이 겁에 질려 있다는 걸 알았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블란이 너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

“…….”

다른 의미로 잡아먹을 것 같아서 두려운 건데….

그렇지만 라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누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걔가 좀 쓰레기 같긴 해도, 남의 것을 훔쳐 먹진 않아. 그리고 이상하게 걘 널 살리고 싶어 하더라.”

“…….”

잡아먹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걸까.

직접 잡아먹진 않아도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애꿎은 입술 껍질만 뜯으며 우물거리는 것뿐이었다. 누아에게 제 비밀을 밝힐 수가 없었으니까.

라핀의 표정이 좀처럼 풀리지 않자, 누아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갈색 보따리를 질질 끌고 왔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저 보따리는 뭐지? 침울한 와중에도 호기심이 들끓는 라핀의 앞에서 누아가 보따리를 풀며 말했다.

“심심하면 여기 음식 쌓아놓은 거 먹어.”

“음식이요?”

“그래.”

보따리 안에 음식이 있다고? 라핀이 의아한 시선으로 보따리 안을 들여다보자, 당근과 더불어 겨울에 자주 먹는 칡 줄기, 나무줄기 등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전부 다 라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긴 했지만…. 이런 것에 관심도 가지지 않을 늑대가 왜 이런 걸 한 보따리나 가지고 있는 거지? 라핀은 입안에 군침이 돌아, 침을 한 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토끼는 저런 거 먹는다기에 구해 왔지.”

“…….”

“이런 거 안 먹어? 저번엔 잘 먹던데.”

“아뇨! 먹는 음식은 맞는데….”

라핀은 말끝을 흐렸다. 제가 먹고, 좋아하는 음식도 맞는데… 그가 왜 제 생각을 해서 음식을 구해다 주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당근을 챙겨줬을 당시에는 짝지어줄 암컷 토끼를 구해 올 때까지 살려두려고 그러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 같지만은 않았다. 이 정도 식량이면 매일 배불리 먹으며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였다. 생존할 정도만 먹이면 될 텐데, 이렇게 저를 호의호식시켜줄 이유가 있을까?

낮에 블란과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 라핀은 묘하게 누아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음식까지 구해주니 정말 누아가 저를 잡아먹는 포식자가 아니라 조력자처럼 느껴졌다.

별다른 의미가 없을 걸 알고 있음에도 상황이 척박해서 누군가에게든 의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누아가 왜 제게 잘해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누아는 라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 너무 말라서 뜯어먹을 살점도 없잖아. 포동포동하게 살 좀 찌우라고.”

“…아.”

“아무리 짝짓기할 토끼를 구해줄 거라지만…, 참나. 그게 쉬운 일도 아니고.”

당장 잡아먹을 건 아니지만, 혹여 짝짓기할 토끼를 못 구할 수도 있으니 먹기 좋게 살을 찌우라는 뜻이었다.

늑대가 제 생각을 해 배려를 해준 게 아닐까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급격한 현실감이 몰려왔다. 누아를 포식자가 아니라 조력자처럼 느꼈던 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제 편이 되어줬던 적도 없는데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라핀이 침울함에 입술을 꾹 다물자, 누아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대답.”

“…네. 머, 먹을게요. 살도 찌우고요….”

“그래.”

라핀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누아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라핀은 공허한 눈으로 방을 떠나는 커다란 등을 바라보다, 혼자 방에 남아 있는 것도 어색해 누아의 배웅을 나왔다. 탈출하지 않겠다고 고분고분 답했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만은 않으니 탈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집의 구조를 알아볼 생각으로 쫄래쫄래 누아를 따라 나온 라핀은 거실에 있던 블란과 마주쳤다.

그와 마주치니 머릿속에 그 사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누아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뒤로 숨자 블란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라핀, 일어났네.”

“…….”

상냥한 표정, 말투였으나 라핀에게는 악마의 탈을 쓴 늑대처럼 보일 뿐이었다. 상냥함은 무슨, 이죽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토끼를 잡아먹을 수 있을까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라핀이 누아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자 누아의 셔츠 밑단에 주름이 졌다. 그래봐야 토끼 힘이라서 늑대로서는 손쉽게 뿌리칠 수 있음에도, 누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누아가 의아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라핀은 누아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블란이 더 무서워서 차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라핀이 누아의 옷자락을 너무 강하게 쥐어 잡은 바람에 작은 주먹이 벌벌 떨었으나, 블란은 그 두려움을 못 본 척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네가 토끼를 잘 구워삶았나 본데?”

“뭔 소리야.”

누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라핀을 떨쳐내지 않았다. 그저 조금 귀찮음이 묻어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누아가 사냥에 나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블란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성큼성큼 라핀에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라핀이 몸을 움찔 떨었으나 블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라핀의 등허리를 감싸 누아에게서 떨어트렸다. 라핀이 헉, 하며 망연자실하게 누아의 옷자락을 다시 붙잡아 보려고 손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라핀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블란이 위에서 말을 꺼냈다.

“라핀은 두고, 얼른 다녀와. 다른 놈들한테 먹이 다 뺏기면 어떡해.”

“…그래.”

누아는 잠시간 라핀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라핀은 점점 멀어지는 누아의 뒷모습에 손을 뻗고 싶었지만, 사실 누아도 제 편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라핀은 집 구조는 알아보지도 못한 채 거실에 블란과 단둘이 남고 말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허리에 블란의 팔이 감겨 있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위에서 블란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가 절로 다닥다닥 부딪힐 정도로 급격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몸을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라핀을 본 블란은 픽 웃음을 흘리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핀. 그렇게 무서운 티를 내면, 나 기분 상하는데.”

“…저, 저기….”

“이리 와.”

블란에게서 나온 말은 회유적이었으나, 사실은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길 때문에 강제로 데려가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블란의 방에 가까워졌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두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묵직한 걸음으로 어정쩡하게 따라가는 라핀을 향해 블란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언제 기절한 거야? 기절한 줄도 모르고 박아댔네.”

“…….”

기절하고 나서도 박아댔구나…. 어쩐지 일어났을 때 배 안쪽이 혹사당한 것처럼 아프더라니. 내벽을 까뒤집어 볼 수 없지만, 안에 시퍼런 멍이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핀은 어떻게 기절한 상대에게 그딴 짓을 할 수 있냐며 항의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따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블란은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는 라핀을 제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블란과 마주쳤을 때부터 무서웠지만, 그 일이 벌어졌던 장소에 블란과 단둘이 들어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공황 상태라도 온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고 덥지도 않은데 목덜미 뒤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두려움에 떨다 못해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려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먹을 꽉 쥐며 겨우 정신을 다잡는데, 라핀의 처지와 달리 블란은 빙긋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벗어.”

무례한 명령을 하는 거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산뜻한 말투였다.

라핀은 벌벌 떠는 눈으로 고개를 들고 블란을 바라봤다. 그는 말투만큼이나 말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장난감을 대하듯 가벼운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그것보다…. 라핀은 옷을 벗기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서, 설마 또 해요?”

“그럼 한 번 먹고 끝인 줄 알았어?”

“…네.”

라핀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지만, 한 번으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박한 심정으로 말하는 라핀과 달리 블란은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하,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뒷걸음질 치는 라핀의 팔뚝을 커다란 손으로 콱 쥐어 잡았다.

“아!”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라핀이 고통에 몸을 옹그렸으나, 블란은 더 힘을 주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큰 비밀을 숨겨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 정도도 못 해주겠다고 하면 어떡해.”

“읏….”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 그런 말도 있잖아?”

“…….”

물론 그런 말이 있긴 했지만, 이런 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협박이었다.

“알면 얌전히 옷 벗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란은 여전히 제게 선택지를 주겠다는 듯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놓아주었다.

말하자면 억울한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애초에 평등하지 않은 관계였다. 같은 선에 서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관계였다.

무작정 하기 싫다고 내빼봐야 들어줄 늑대가 아니었다. 라핀은 마냥 싫다고 하기보다, 한 번이라도 섹스하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설득을 시작했다.

“아, 아까 했는데…, 다음에 하면 안 돼요? 저, 정말 허리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아무것도 못 하겠단 말이에요….”

“아파?”

다행히 무작정 싫다고 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먹혀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처럼 굴던 블란의 표정 위로 걱정스러운 감정이 물들었다.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 라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껏 엄살을 부렸다.

“네! 엄청 아파요! 배도 아프고, 아, 아랫도리도 화끈거리고….”

사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아프긴 했다. 그렇지만 마치 아파서 손 하나 꼼짝 못 하겠다는 듯이 얼굴에 오만상을 하고 아픈 부위를 줄줄이 읊었다.

라핀이 한참을 쫑알쫑알 말하고 있는데, 블란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랫도리? 어디 말하는 거야. 네 아랫도리 달린 게 너무 많아서 뭔지 모르겠는데.”

“…….”

진지하게 듣는 줄 알았더니만…, 아가리에서 나오는 말을 보니 혼신의 연기인 게 분명했다.

제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불방망이 같은 것으로 아래를 들쑤셔 놓고서는…. 어딘지 뻔히 알면서 굳이 어딘지 입으로 확인하려 드는 쓰레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험악한 욕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으나, 지금은 그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라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인내심을 가지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니까…. 보…, 보지가 아파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기분은 꼭 더러운 음담패설을 나누는 것 같았다. 제 입을 톡 떼어다 버리고 싶을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잠깐의 수치로 섹스를 덜 할 수 있다면, 라핀은 얼마든지 저속한 말을 할 수 있었다.

라핀이 조금 더 엄살을 부려 볼까 싶어 찌르르한 허리에 손을 얹었을 때, 블란이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흠…. 그럼 어쩌지? 그럼 네 밑에 보지 달렸다고 소문내도 돼?”

“…….”

“누아 말고도, 내가 아는 늑대들한테 다 소문내면 재밌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

블란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꼭 한 번은 봐줄 것처럼 굴더니만, 결론이 똑같았다.

씨발…, 험한 욕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화가 들끓었지만, 라핀은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이성적인 토끼였다.

라핀이 차마 욕을 내뱉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자 블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옷 벗고 이리 와.”

“정말로 아픈데….”

“보지에 안 박을 테니까 이리 오라고.”

“…….”

삽입은… 안 하겠다는 걸까?

그와 하는 행위의 모든 것이 싫었으나 가장 끔찍한 것이 삽입이었다. 팔뚝만 한 성기를 바늘구멍만 한 곳에 쑤셔 넣는 행위라니. 다시 떠올려도 오싹했다. 아까는 도대체 어떻게 삽입한 건지…. 직접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블란이 또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누아에게 제 신체의 비밀을 알리는 것도 싫었고 삽입도 안 한다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

라핀은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커다란 셔츠 단추를 토독토독 풀었다. 느릿하게 상의를 개어 놓고, 옷이 커서 허리를 묶어뒀던 바지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통이 큰 바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입고 있던 옷이 과하게 컸던지라 벗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근데… 여태까지 바지통이 커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블란이 옷을 제대로 입혀준 게 아니었다. 속옷이 없었다. 이런 미친 씹변태 새끼가 다 있나….

순식간에 나체가 된 라핀이 무의식적으로 허벅다리를 모으자, 블란이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침대 맡에 걸터앉은 그가 제 허벅다리를 툭툭 도닥이며 말했다.

“이리 와.”

“…….”

라핀이 머뭇머뭇 그의 앞에 다가갔다.

블란은 라핀을 앞에 세워놓고 고귀한 예술품을 보는 것처럼 하얀 나신을 잠잠한 눈으로 훑었다.

분명 봤던 몸인데도 새삼스럽게 아름다웠다. 블란은 라핀 말고도 수많은 토끼들을 봐왔었다. 대부분 만난 즉시 즉살하긴 했지만, 가끔 배가 부르다는 이유로 하루 정도 집에 가둬놓고 다음 날 잡아먹은 적도 있었다.

숱하게 봐왔던 토끼들에게는 딱히 이런 성욕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단순히 어서 잡아먹고 배를 불리고 싶다는 식욕만 돋을 뿐이었다.

그런데 라핀은 달랐다. 수없이 마주쳤던 토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청초하고 귀여운 미인이었다.

블란도 피부가 하얀 편이었는데, 라핀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햇볕을 한 번도 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조막만 한 얼굴에 동그란 눈과 코, 입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게 신기하고 귀여웠다. 이목구비 선이 진하지 않아서 작은 몸체와 더 어울렸다.

게다가 그는 수컷임에도 불구하고 몸 선이 굉장히 예뻤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헷갈리게 허리도 잘록했고, 엉덩이와 다리가 이어지는 라인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토끼인가 보다. 그래서 시선이 가는 건가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아랫도리에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누아의 먹잇감이 됐으면 아쉬울 뻔했다. 좀 전에 다른 늑대 놈에게 비밀을 밝히겠다고 한 것도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나. 내 짝인데.

블란은 감상하기를 끝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릎 꿇어.”

“예? 에, 예….”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핀은 어정쩡하게 블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삽입을 피하려 보지가 아프다는 상스러운 말도 입에 담은 후이니 이제 와서 챙길 자존심도 없었다.

무릎을 꿇으니 자연스럽게 시야가 낮아지면서 눈앞에 블란의 무릎과 사타구니가 보였다. 왠지 시야가… 불길한데.

라핀이 불안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자, 그가 다리를 벌리며 명령조로 말했다.

“이대로 성기 빼내서 빨아 봐.”

“빠, 빨으라고요…?”

예상도 하지 못한 말에 라핀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걸 어떻게 입에 넣어…!

블란이 제 엉덩이를 핥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가히 놀랍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일반적인 위생 관념으로는 그딴 짓을 하지 않으니까. 물론 동물 모습으로 있을 때 엉덩이 냄새를 킁킁대는 습성이 있는 동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부위를 물고 빠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

라핀의 눈앞이 당황스러움에 팽글팽글 돌 때쯤, 블란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뻔뻔하게 이유를 말해줬다.

“보지에 안 박는다고 했잖아. 그럼 다른 곳 박게 해줘야지.”

“…에?”

라핀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였다. 보지에는 안 박고, 입구멍에다 박겠다는 말일까? 어쩐지 ‘보지에는’ 안 박는다고 강조를 하더라. 이런 얌체 같은 늑대!

아래에 박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입에 박아도 된다는 소리는 아닌데….

라핀이 쉽사리 블란의 사타구니에 손을 뻗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블란이 마저 말을 이었다.

“싫으면 보지에 박아도 되는데, 그럴까?”

“아, 아니요…! 빠, 빨게요!”

라핀은 허겁지겁 블란의 하반신에 손을 대고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차라리 빠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급하게 옷을 끌어내리자 블란의 흉흉한 성기가 눈앞에서 덜렁거렸다. 고작 성기를 눈앞에 둔 것뿐인데 라핀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크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성기 크기가 늑대 중에서도 일반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컸다.

입을 크게 벌려도 다 못 넣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치우면 좋을지 궁리하는데, 라핀의 눈앞에서 성기가 생명체처럼 움찔거렸다.

뭐, 뭐지…? 왜 이러는 거야? 라핀이 화들짝 놀라자, 블란이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좀… 흥분되는데.”

“…하.”

저런 미친 늑대가 다 있나….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지가 왜 이렇게 껄떡거리나 했더니, 시선만으로 발기할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블란은 어지간한 변태인 게 분명했다. 제 아랫도리가 남과 같지 않다는 걸 안 다른 생물들은 전부 저를 배척하고 무서워했다. 제가 재앙의 근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를 피해 다녔다.

그런데 블란은 달랐다. 제 아랫도리에 보지가 달렸다는 걸 알자마자 뭔가에 홀린 것처럼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이를 빌미삼아 성욕 해소용으로 쓰려고 굴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저주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성적으로 받아들인 걸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니지, 차라리 그런 취급을 받았더라면 괜히 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잡아먹지 않고 풀어줬으려나?

잠깐 추측해 봤지만,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해 봐야 마음만 안 좋아질 뿐이었다. 라핀이 한숨을 내쉬자, 자지를 꺼내놓고 있던 블란이 이상하다는 듯 눈짓을 줬다.

“라핀, 안 빨 거야?”

“아, 마, 마음의 준비 좀 했어요. 지금 해요….”

마음은 심란함으로 복잡했지만, 어찌됐든 지금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라핀은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봤지만, 블란의 성기를 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직 완전히 발기한 것도 아닌데 너무나도 흉흉한 크기라서 더 빠듯하게 입술을 벌려야 할 것 같았다.

턱관절이 아플 정도로 벌리고 나서야 두툼한 귀두를 빠듯하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생식기를 입에 담아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비위가 상하는 짓이었다.

블란의 성기는 딱딱하면서도 물컹하고, 또 너무 크고… 무엇보다 혀끝에 닿는 맛이 이상했다. 짭짤하면서도 시큼했다. 더불어 수컷 특유의 향기가 입안에 훅 풍겨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간신히 귀두를 입에 물었지만, 차마 기둥까지 입에 머금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라핀이 귀두만 입에 머금은 채 할짝거리자, 그 낌새를 금방 알아차린 블란이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그렇게 깔짝대서 언제 다 먹으려고?”

그는 라핀의 둥근 뒤통수를 양손으로 감싸더니, 그대로 꾹 끌어당겼다.

“흐우욱…!”

라핀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성기 기둥이 입 속으로 깊게 들어왔다. 입이 더 빠듯하게 벌어지고 역한 기운은 배가 됐다.

라핀이 황급히 손으로 블란의 허벅다리를 붙잡았다. 늑대라 그런지 제 몸과 달리 허벅다리가 근육으로 똘똘 뭉쳐 탄탄했다.

라핀은 그의 허벅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뒤로 빼려고 했으나, 그는 뒤통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억지로 성기를 더 깊게 쑤셔 넣었다.

“흐븝…!”

숨쉬기조차 버거워져 라핀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입 안에 블란의 성기가 반쯤 들어왔을 때쯤, 딱딱한 귀두가 라핀의 목젖을 쿡 찔렀다. 역한 기운이 욱 올라오며 라핀이 어깨를 퍼드득 떨었다.

“우, 후으읍… 읍…!”

얼른 뱉어내고 싶었다. 토할 것 같았다. 목젖에 그의 성기 냄새가 밴 것만 같았다.

라핀이 온몸에 힘을 주고 성기를 뱉어내려고 했지만, 블란을 힘으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고개가 흔들리면서 목젖에 귀두가 무자비하게 비벼졌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후우…, 생각보다 잘하는데. 라핀, 그새 누아 좆이라도 빨고 온 거야?”

“후욱, 욱! 우웁, 읍….”

잘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못 뱉게 하는 거면서! 하고 싶은 말이 치밀어 올랐으나 목구멍이 좆으로 막혀 있어 말할 수가 없었다.

라핀이 말 대신 눈물 젖은 벌건 눈으로 블란을 올려다보자, 블란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짧은 욕설과 동시에 머리가 앞뒤로 세차게 흔들렸다. 꾹 누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고개를 뒤로 빼게 했다가 다시 성기를 입 안 가득 머금게 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입가가 터졌는지 어느 순간 씁쓸한 피 맛이 났다. 찢어진 부위도 따갑고 한껏 벌어진 턱관절도 빠질 듯이 아팠다. 아랫도리 지키자고 입을 벌렸더니 이제는 입이 혹사당하고 있었다. 저 거지 같은 늑대…. 늑대만 아니었어도…!

라핀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고 있을 때, 블란의 귀두가 목젖을 쿡 찌른 채 추삽질을 멈췄다.

라핀이 버거운 감각에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성기가 꿀럭거렸다.

“후욱, 후우….”

“우우욱…!”

입 안으로 뜨끈하고 묽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그가 라핀의 입에 성기를 처박은 채 사정한 것이었다.

정액은 밤꽃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비릿하고도 끈적였다. 그것으로 입이 가득 차는 느낌은 블란의 성기를 입 안에 머금었던 것만큼이나 역했다. 안 그래도 라핀은 비위가 좋은 편이 되지 못했다. 아까부터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블란은 라핀이 그러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입과 식도에 제 성기 냄새를 배게 하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자지를 깊게 밀어 넣고 빼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 번 사정한 블란의 성기는 다시 빳빳하게 발기했다. 라핀의 입 안은 미치도록 기분이 좋았다. 보지 구멍처럼 좁고 따듯해서, 서투른데도 불구하고 환상적이었다.

“후우우….”

블란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사출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라핀의 뒷머리를 놓아주었다.

라핀은 자유를 얻자마자 블란의 성기를 입에서 뱉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터트렸다. 폐가 뜨겁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침을 끊이지 않았다.

“커헉, 콜록…! 욱…!”

어깨를 들썩거리며 토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이미 식도를 타고 내려간 정액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헛구역질하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그의 정액을 온전히 삼켰다는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핀은 벌게진 눈으로 입가를 닦으며 씨근덕거렸다. 그래도 이게 나은 걸까. 아래를 꿰뚫렸을 때는 기절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양반일지도 모른다. 그 행위에 비하면 턱이 아프고, 입가가 찢어지고, 목젖이 얼얼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수준이었으니까.

라핀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합리화를 하고 있을 때, 블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핀의 팔을 붙잡고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쪽으로 와.”

“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라핀은 무지막지한 힘에 끌려 몸이 일으켜지더니 질질 끌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푹신한 침대 한가운데에 제가 눕혀져 있었다. 라핀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궁둥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끄, 끝난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한 번으로 만족하라고. 양심도 없지.”

블란의 대답에 라핀의 두 눈이 망연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난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블란의 성기는 언제 사정을 했었냐는 듯이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왜, 왜 저래! 라핀은 반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뒤로 물렸지만,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히면서 퇴로를 잃었다.

블란은 침대에 완전히 눕더니, 얼굴이 새햐얗게 질린 라핀을 제 몸 위에 앉게 했다.

그런데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얼굴을 마주 본 자세가 아니라 라핀이 블란의 하반신을 보고 있는 방향이었다.

자세를… 잘못 잡았나? 라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블란이 라핀의 엉덩이를 끌어다 제 얼굴 위에 내려놓게 했다.

“힉!”

둔부에 블란의 날렵한 코끝이 닿았다. 이, 이게 뭐야…! 라핀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일어나려 하자, 블란이 라핀의 골반을 꽉 쥐어 잡으며 말했다.

“일어나지 말고 엎드려.”

“네, 네…? 왜, 왜요…? 왜 이, 이런 이상한 자세를….”

“같이 즐기자는 거지.”

“그게 무슨….”

같이 즐겨? 도대체 이 늑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핀이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자, 블란이 라핀의 하얀 엉덩잇살을 콱 부여잡았다. 얼마나 세게 쥐어 잡았는지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

“어서.”

재촉에 라핀이 우물쭈물하다 상체를 바싹 엎드렸다. 그리고 이내, 블란이 왜 이런 자세를 시켰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눈앞에 몽둥이 같은 블란의 성기가 기립해 있는 게 보이는 동시에, 라핀의 아랫도리에 축축한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흐아앗…!”

아랫도리에 닿은 것은 뜨거운 혀였다. 블란은 라핀의 둥근 엉덩이를 양손으로 콱 쥐어 잡은 채 은밀한 부위를 혀로 핥았다.

츄으읍, 춥…. 블란은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내며 회음부와 고환 쪽을 혀끝으로 핥다, 라핀의 보지를 공략했다.

그곳은 조개처럼 입구가 꽉 다물려 있었으나, 블란이 도끼 모양이 나 있는 곳을 물고 빨고 혀로 비집으니 금방 연한 속살을 내어주었다.

“흐읏! 하지, 마, 세요…! 으흣, 앙…!”

라핀이 하얀 허벅다리와 둔부를 경련하며 말했다. 하체를 블란의 얼굴에서 떼어내고 싶은데, 힘에 못 이겨 떼어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두 다리는 쾌감에 힘이 다 풀린 지 오래였다.

라핀의 상체가 완전히 엎어지자, 블란이 보지를 빨던 것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그렇게 무너져 있지 말고, 내 거 빨아. 한 번 해봤으니까 쉬울 거야.”

“흐으윽….”

쉽기는…! 더 어려웠다. 자꾸만 민감한 아래를 핥아대서 팔에 힘 하나 안 들어가는데 어떻게 이걸 빨라고!

라핀은 애벌레처럼 블란의 몸에 바싹 제 몸을 붙인 채, 기어가듯 블란의 성기를 두 손으로 콱 쥐었다. 제 손이 다른 이들에 비해 작은 편이기도 했고, 그의 성기가 다른 이들의 것보다 월등하게 커서 두 손으로 감싸야만 다 쥘 수 있었다.

라핀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귀두에 말랑말랑한 입술을 가져다 대자, 블란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하아….”

블란에게 섹스는 게임이었다. 혼자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이왕 한다면 같이 즐기는 걸 선호했다.

그러니 토끼가 예쁜 신음을 흘리는 걸 또 듣고 싶었다. 다른 수컷이 신음을 흘리는 게 예쁘게 들릴 리가 없는데…. 라핀은 원체 미성이라 그런가? 신음이 정말 듣기 좋았다. 라핀의 신음은 마치 귀로 녹이는 마약 같아서 계속 생각이 났다.

그렇게 거하게 섹스해 놓고선 낮에 몽정까지 했다. 사춘기도 아닌데 또 섹스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아무튼 제 자지를 빨게 하는 것으로는 라핀이 즐기지 못했을 것 같아서 아랫도리나 빨아줄 생각이었다. 보지가 아프다고 하니까, 상처에 침을 발라줄까 하는 고운 마음으로 겸사겸사.

그런 마음으로 라핀의 보지에 혀를 갖다 대는데, 벌써 틈새가 애액으로 축축했다. 제 눈앞에서 덜렁거리는 라핀의 자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쯤 발기해서는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음란한 토끼가 제 것을 빨면서 흥분이라도 했던 걸까? 하, 참나…. 토끼가 음란하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황당하면서도 앙큼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서 싫은 척 뒤로 빼지.

블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꼬리를 올리고는, 엉덩이를 한 움큼 쥐고 있던 손을 보짓살을 벌리는 데 사용했다. 조붓하게 다물린 부위를 쫙 벌리니 예쁜 분홍빛 살결이 보였다.

“야한 분홍색이네….”

전에도 봤었지만 밝은 곳에서 보니 더 색깔이 맑았다. 혹사시켜서 그런가, 조금 더 색이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 경험이 저와 처음이었단 말이지? 마음 한구석이 빠듯해지는 것을 느낀 블란은 라핀을 더 예뻐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블란은 라핀의 보지 안쪽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은근슬쩍 밀어 넣으며 톡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혀에 대고 굴렸다.

“아, 으응, 넣지, 흣, 마요…! 아, 으흑…!”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자 라핀이 블란의 자지 밑동을 꽉 쥔 채 들뜬 신음을 흘렸다. 블란의 시야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궁둥이를 푸르르 흔드는 것이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적거리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제가 한껏 봉사해주는 꼴이 되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반응이 재밌으니까. 블란은 라핀에게 제대로 빨라고 지적하기보다 음부를 빠는 데 집중했다.

혀로 진득하게 할짝거릴 때마다 라핀의 몸이 경기를 일으켰지만, 블란의 얼굴에 엉덩이를 대고 들뜬 신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더 짓궂은 마음이 든 블란은 손가락으로 쑤시던 곳에 혀를 밀어 넣었다. 비좁은 곳에 혀를 밀어 넣자, 내벽이 꽉꽉 조이며 반겼다.

“으으읏, 하아, 거, 거기는, 으응, 하지… 읏…!”

한껏 느끼면서도 거부하고 싶은지 라핀은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안 된다고 앙탈을 부리는 것도 한두 번이야 예쁘게 봐줄 수 있지…. 블란은 같잖은 내숭을 떠는 거라고 생각하며 구멍을 쑤석거리던 손으로 그의 자지를 만져줬다.

같은 수컷의 성기라서 별로 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보지와 자지를 동시에 자극하니 라핀이 눈을 까뒤집으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히익! 아, 거기는, 흐으읏, 흡, 아앗!”

라핀은 싫다면서 기겁을 했지만, 점점 쾌감에 무너져 내렸다. 힘이 축 빠지더니 결국 하반신에 힘 하나 주지 못하고 블란의 얼굴에 엉덩이를 문대고 말았다.

덕분에 블란은 라핀의 음부를 더 수월하게 빨 수 있게 됐다. 이리저리 장난까지 쳐가며 여유롭게 보지를 유린하던 블란은, 라핀이 제 몸 위에서 느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쪽도 재밌긴 하지만… 역시 같이 즐기고 싶다. 블란은 보지뿐만 아니라, 조붓하게 다물려 있는 분홍빛 뒷구멍까지 손을 뻗었다.

“내 거, 안 해?”

“으흑! 흐으윽, 해, 해요….”

뒷구멍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반쯤 우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 라핀이 힘없이 쥐고 있던 블란의 자지 선단을 겨우 입에 물었다. 그렇지만 뒷구멍을 자극하는 집요한 손길에 입에 물고 있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행위에서 벗어나려면 블란을 사정시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하반신에서 쏟아지는 해일 같은 쾌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버틴 게 얼마나 됐을까. 금방 라핀의 보지에서 축축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자지 끝에서도 픽픽, 묽은 액체가 터졌다.

“흐윽, 흐으으….”

“나 참…. 같이 즐기자니까, 혼자 즐기면 어쩌자는 거야.”

먼저 사정한 라핀을 두고 블란이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내용과 달리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블란은 사정 후에 발발 떠는 라핀의 보지를 한 번 진득하게 핥아주고 나서야 라핀을 침대 위로 밀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라핀은 풀려났음에도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침대 시트 위에 바짝 몸을 붙인 채 달뜬 숨을 쉬었다. 도대체 오늘만 벌써 몇 번을 사정하는 건지…. 토끼의 체력으로는 늑대의 정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억울하지만, 블란의 말대로 토끼는 조금 음란하다고 평가를 받는 동물이었다. 워낙 작은 자극에도 흥분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생물에 비해 발정이 잦으니까.

그렇지만 흥분을 잘하는 만큼 사정이 빠른 것도 특징이었다. 성교가 순식간에 끝난다는 말이었다. 블란처럼 이렇게 오래 끌지도 않을뿐더러, 여러 번 하지 않았다.

하…. 죽겠다. 라핀이 다시 혼절할 듯 눈을 가물가물 감고 있을 때, 등 뒤로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으악! 무거워요!”

복상사로 죽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는 압사하게 생겼다.

라핀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니 블란이 조금 일어났는지 저를 누르던 무게감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무겁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라핀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봤다.

“왜, 왜요?!”

“아직 만족 못 했다고 했잖아. 빨라고 했더니, 이게 뭐야?”

“뭐냐니…. 앗, 거, 거기 문지르지 마요!”

라핀의 엉덩이 골짜기 사이로 블란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딱딱하고 커다랬다. 아직 사정하지 못했음을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 넣겠다고 약속했지 않나! 그런데 왜 또 저기에 대고 문지르는 건지…. 말뿐인 약속이었으니 지키지 않으려는 걸까? 소름에 머리카락이 삐쭉 섰다.

“너, 넣을 건 아, 아니죠…?”

“흐음…, 어쩔까.”

블란은 아직 고민 중이라는 듯 답을 흐렸다. 역시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라핀은 그의 극악무도함에 경악했다.

“안 넣는다고 하셨잖아요!”

“보지에 안 넣는다고 했지, 아예 안 넣는다고는 말한 적 없어.”

“씹, 그딴…. 아, 아니, 죄송….”

‘씨발, 그딴 게 어디 있어! 사기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입 밖으로 조금 내뱉고 말았다.

라핀은 급히 비굴하게 사과했으나, 사실 죄송하지 않았다. 욕먹어도 싼, 저보다 훨씬 연약한 토끼의 비밀을 들고 협박하는 비열한 늑대였으니까.

그렇지만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자, 일순간 가만히 몸을 굳히고 있던 블란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우리 토끼, 생각보다 성깔 있구나.”

“죄송하다고요….”

라핀이 꿍얼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화낼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는 욕을 먹고도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생글생글 웃더니 묘한 눈빛으로 라핀의 하반신에 눈짓을 줬다.

“씨발이든 뭐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난 여기에 넣고 싶은데.”

“힉…!”

블란이 이번에 흥미를 가진 곳은 라핀의 뒷구멍이었다. 오밀조밀한 주름을 섬세하게 만지는 손길에 목덜미 뒤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까 서로의 것을 빨아주는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을 때 손가락이 잠깐 들어오긴 했었지만, 그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지적하는 것도 잊었다.

왜 거기를 건드리나 했더니… 그곳에 성기를 넣고 싶다고? 그곳에 박고 싸봤자 생산성이 하나도 없었다. 왜 그딴 곳에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안 들어가요…!”

“네 보지도 안 들어갈 것 같았는데 잘만 들어갔잖아. 여기도 힘주고 쑤셔 넣으면 들어가지 않을까?”

블란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한 마디를 밀어 넣었다.

뒷구멍은 스스로 젖는 부위도 아닐뿐더러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게 처음이었다. 손가락을 따라 빠듯한 살결이 따라 밀려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거기랑 여기는 다, 다르잖… 힉, 소, 손 넣지 말고요…! 마, 말로 하자고요!”

말로 한다고 통할 것 같진 않지만, 어떻게든 회유하고 싶었다. 저딴 곳에 넣을 거면 차라리 앞에 삽입하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거기도 싫은데… 어쩌지?

라핀이 모르겠다 싶어 일단 몸이나 버둥거리는데, 블란이 고심하는 투로 말했다.

“하긴, 여기는 너무 뻑뻑하다.”

“그, 그렇죠?”

라핀이 드물게 화색을 보였다. 블란의 손가락이 아직 뒷구멍 안에 들어와 있었지만, 그 흉기 같은 성기를 넣지만 않는다면 뭐든 좋았다.

라핀이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뒤돌아보자, 블란이 시선을 마주한 채 웃으며 뒷구멍에 넣은 손가락을 빼냈다. 너그러이 넘어가나 싶은 분위기였다.

다행이다…. 이제 엄한 생각 않고 끝나려나 기대하는데, 블란이 갑자기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했다.

“이거, 너 주려고 챙겨온 건데. 먹을래?”

“네?”

블란이 뜬금없는 말을 하며 라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고 동그란 도토리였다.

오전에는 누아가 음식을 챙겨주더니만, 블란이랑 같이 나가서 주워온 거였나? 라핀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솔직하게 대답해버렸다.

“저… 배부른데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누아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어서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라핀이 솔직하게 말하자 블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좀 전까지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제 발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배부르다고? 누아가 줬어?”

“아, 아니. 머,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라핀은 뒤늦게 도토리를 달라며 두 손을 모아 그릇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블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토리를 도로 가져가버렸다.

뭐야…. 지금 놀리는 건가?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게 제일 나쁘다고 했는데.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건만 짜증이 솟구쳤다. 라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블란이 이상한 말을 했다.

“내일까지 얌전히 뒷구멍에 물고 있으면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줄게.”

“…예? 먹으라면서요?”

“뒷구멍으로 먹으라고.”

“그게 무슨….”

왜 갑자기 식량을 챙겨주는 착한 짓을 하나 싶더니만,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혈압이 오르면서 속이 갑갑해졌다. 뒷구멍으로 도토리를 어떻게 먹어! 그렇게 따지고 싶은 것이 단전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라핀은 겨우 분노를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설득했다.

“그걸 왜 거기에 넣어요…. 먹지도 못하는 부위인데요.”

“여기로 하려면 한참 풀어줘야 할 것 같은데, 곧 누아가 올 시간이라서 그건 못할 것 같고. 오늘은 안 박고 넘어갈 테니까 이거 물고 있으라고.”

“아, 안 들어갈 텐데요. 그리고 애초에 거기는 뭐, 뭐를 넣는 곳이 아니에요….”

블란이 제게 보여준 도토리는 작은 편이었고 날카로운 부분도 없이 매끈하고 동그랬다. 뒷구멍에 넣는다고 해서 상처가 날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머금어본 적 없는 곳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컸다.

그러나 블란은 제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기이한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넣는 곳이 아니긴. 넣으면 다 좆집이지. 그리고 다음엔 내 것도 먹어야 할 텐데, 고작 도토리도 못 먹으면 어쩌려고.”

우아한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음담패설에 라핀은 귀가 썩는 것 같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충격적인 언행에 라핀은 말을 떠듬거리며 재차 확인했다.

“다음에는 뒤, 뒤에 삽입하겠다는 뜻이에요?”

“응.”

“왜요?”

“넣고 싶으니까?”

 블란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라핀의 사정이야 어쩌든 제가 넣고 싶으니 억지로라도 넣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안 할 마음은 들지도 않나….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를 않으니 설득할 의지조차 바닥이 나고 말았다.

라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아무런 말도 않자, 허락을 기다리던 블란이 갑자기 의견을 굽혔다.

“뭐…, 네가 정 싫다면 보지에만 쑤셔도 괜찮아. 계속 한쪽만 쓰면 네가 아파할 것 같아서 번갈아 박으려던 건데, 그렇게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굳이 뒷구멍에 넣고 싶어서 이러겠다는 게 아니라며, 라핀을 배려해 주기 위한 거였다는 뉘앙스를 철철 흘렸다.

배려는 무슨…. 이렇게 토끼를 장난감처럼 굴려 놓고서는. 라핀이 속으로 욕을 삼키고 있을 때, 보지에 블란의 자지가 닿았다. 사정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흉흉하게 발기한 것이었다.

“아흐읏….”

가벼운 접촉이었으나, 혹사당한 보지는 살갗이 닿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름 블란이 삽입 전 애무를 해줬다고 한들 작은 토끼가 늑대의 양물을 받아들였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당장 아래만 내려다봐도 여성기가 발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상처만 안 났지, 안쪽은 더 진탕이 되어 있을 거였다.

라핀이 예고된 고통에 몸을 움츠리며 엉덩이를 들썩이자, 블란이 귀두를 살짝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박는다?”

“자, 잠깐만요…!”

더 삽입하면 정말 안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스치는 것만 해도 이렇게 아픈데, 더 쑤셔 넣으면 어떻게 될지…. 안쪽까지 망가져버릴지 몰랐다.

평생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위였으나, 망가져서 못 쓰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두려웠다. 라핀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민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도, 도토리… 넣을게요.”

라핀의 체념과도 같은 결정에 블란의 입꼬리가 얄궂게 올라갔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 즐거워했냐는 듯이 금방 평소와 같이 입매를 고정하며 말했다.

“싫으면 강요 안 하는데.”

“으읏, 거기 문지르지 마세요…. 그, 그리고 가, 강요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거지같은 늑대 새끼….

라핀은 어디선가 늑대의 습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야생에서 드물게 일부일처제를 고집하는 종족이기도 하고, 바람도 안 피운다고. 여유가 있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연애를 즐기는 낭만적인 종족이라고 했다.

그런데 로맨틱은 개뿔. 남을 놀려먹기 위해 성관계를 하는 밉상 늑대만이 제 앞에 있었다.

하긴, 그 낭만적이라는 말도 제 짝일 때나 통하는 말이겠지. 토끼는 늑대의 짝이 될 수 없으니, 그저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다. 굳이 낭만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라핀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블란은 라핀의 몸을 짓누르던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교정시켰다. 손바닥으로 침대 시트를 짚게 하고,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한껏 치켜들게 했다.

어색한 자세에 라핀이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을 때 뒷구멍에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문질러졌다. 도토리였다.

라핀의 전신에 힘이 바짝 들어가자 블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엉덩이에 힘 빼.”

그렇지만 몸에 힘을 빼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느슨해지면 도토리를 넣을 걸 뻔히 아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자, 잘 안 되는데요….”

“하아….”

블란이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귓전을 울리는 낮은 숨소리에 라핀이 몸을 움찔 떨자, 뒷구멍에 닿던 도토리가 떨어지고 손가락이 닿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귀찮다는 듯이 말한 블란은, 라핀의 뒷구멍에 다시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읏…!”

뒷구멍은 스스로 젖는 부위가 아니었지만, 블란이 그 근처를 혀로 핥아주기도 한 데다가 보지에서 흐른 애액이 흘러들어간 탓에 꽤 축축했다.

블란은 지금도 억지로 쑤셔 넣으면 도토리가 들어갈 것 같았지만, 제대로 안 풀어주고 넣었다가 라핀이 다칠까 봐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제가 라핀을 협박하고 막 대하는 것 같아도, 사실 블란은 자신 나름대로 배려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이니까 음부도 열심히 빨아주고 적신 다음에 박아주지 않았나. 라핀은 알 리가 없는 소소한 배려였다.

블란이 라핀의 뒷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구부리자 보지를 쑤셔줄 때처럼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흐으윽, 으읏….”

뒷구멍을 쑤셔지면서 옅은 신음을 흘리는 라핀을 보자니, 도토리 말고 제 성기를 박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누아가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하게 손가락을 쑥 빼내자 뒷구멍이 아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름거렸다. 저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얼른 먹여줘야지.

블란이 다른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도토리를 안으로 밀어 넣자, 도토리가 안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힘 빼고, 삼켜.”

“흐, 흐으윽….”

마치 입으로 무언가를 먹이는 것처럼 삼키라는 말이 참 쉬웠다. 그렇지만 도토리를 받은 곳은 입이 아니라 뒷구멍이었다. 전신이 바르르 떨리고 목덜미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뒷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진 느낌이 버거워 신음을 흘리자, 블란이 도와주겠다는 듯이 빼꼼 튀어나온 도토리를 손끝으로 꾹 밀었다. 그러자 뒷구멍이 언제 벌어져 있었냐는 듯 도토리를 쏘옥 삼켰다.

“옳지, 잘했다.”

“흐으윽, 허억, 흑….”

블란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칭찬해왔지만, 그딴 칭찬을 들어도 좋아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핀이 탈진하듯 침대에 엎드리자, 블란이 라핀의 둥글고 하얀 엉덩잇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페널티가 있어야지.”

“흐읏, 네…?”

“내가 기회를 줬는데, 네가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잖아.”

“…….”

그딴 걸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선택지를 주고 아량이 넓은 척했다고 한들, 두 선택지가 다 엉망진창이었는데….

라핀이 불만스럽게 눈을 치떴으나 블란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환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이 되기 전에 도토리 뱉으면, 더 재밌는 거 할 줄 알아.”

재밌는 거…? 뭔지는 몰라도 좋은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뱉어내지 않으리라. 라핀은 내일까지 꼭 버티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나 왔다.”

누아는 집에 오자마자 정적을 느꼈다.

블란이 다녀왔냐며 살갑게 굴 놈도 아니고, 꼭두새벽에 라핀이 마중을 나오지도 않을 거니 당연한 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하다.

사실 이 찜찜함은 비단 지금만 느낀 게 아니었다. 아까 사냥을 나갈 때도 그랬다. 블란이 라핀을 감시해 준다고는 했지만 어쩐지 뒤가 구렸다. 블란이 다른 사냥감에 비해 유달리 라핀에게 관심을 보이니 어쩐지 저 몰래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게다가… 왠지 오늘 사냥을 나가기 직전에 라핀이 나가지 말라고 쳐다보는 것만 같았단 말이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라핀이 제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쳤었다. 저를 잡아먹겠다고 물어온 늑대한테 SOS를 청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했던지….

누아가 표정을 잔뜩 굳힌 채 닫혀 있는 방문을 벌컥 열자, 침대 위에 작은 인영이 이불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

굳이 이불을 들춰보지 않아도 이 집에 저렇게 작은 체구를 가진 놈은 라핀뿐이었다.

누아는 날카롭게 서 있던 신경이 유순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사냥 가기 전 마주한 라핀의 태도 때문에 나가서도 뒤숭숭했는데, 착각이었나. 저 토끼는 여기가 늑대굴인 것도 잊은 듯 퍼질러 잠만 자고 있었다.

토끼는 겨울잠도 안 자지 않나? 뭐 저렇게 밤낮으로 자는지…. 불만스럽긴 했지만 토끼는 크게 다치기도 했고, 주행성이니 밤에 자는 게 당연했다.

누아는 사냥을 할 때처럼 발걸음 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가 이불을 살짝 들추고 얼굴을 확인했을 때, 누아는 이상한 걸 발견했다.

“…뭐야? 왜 이렇게 식은땀을 줄줄 흘려?”

라핀은 침대에 엎드려 있었는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마에는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싶어 라핀의 이마에 손을 얹으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뭐야? 얘 왜 이래? 누아는 누그러졌던 얼굴을 확 굳히며 라핀의 몸을 흔들었다.

“야, 너 어디 아파?”

“아뇨…. 괜찮아요….”

자는 줄만 알았던 라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만 말과 달리 얼굴은 아픈 티를 팍팍 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반쯤 맛이 가 있었다.

겉보기엔 감기와 증상이 비슷해 보였지만, 사실 목소리는 신음을 내지르느라 맛이 간 거였고 열은 너무 울어대서 난 거였다. 흥건하게 흘리는 땀은 도토리가 빠져나갈까 봐 온몸에 힘을 줘서 그런 거였고.

라핀은 제게 달라붙는 진득한 시선에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붙였다.

“더워서 그래요….”

“이 엄동설한에 덥다고? 근데 덥다는 놈이 왜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어?”

누아에게서 수상하다는 시선이 붙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뒷구멍으로 도토리를 물고 있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핀이 입술을 꾹 다물고 시치미를 뚝 떼자, 누아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의심이 가긴 하는데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는 모양새였다.

잠깐 라핀을 바라보던 누아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아프든 말든 관심 끄려는 걸까? 냉정한 반응이지만, 지금의 라핀에게는 관심을 꺼주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됐다. 부디 제게 신경 쓰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잠깐 일어나 봐.”

그렇지만, 바람과 달리 돌아온 누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라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뒷구멍에 들어간 도토리가 찔끔찔끔 움직이는 것 같았다. 라핀은 끙, 남몰래 괴로워하며 물었다.

“왜, 왜요…?”

“붕대 갈아주게. 아파서 그런 거면 말을 하지, 왜 시위를 하고 있어?”

“…….”

누아는 라핀이 목 상처가 아파서 묵언 시위를 하는 줄 아는 눈치였다. 식은땀이 나고, 열이 끓고, 목소리 맛이 갔는데 왜 그런 쪽으로 추측이 튀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라핀은 그가 헛다리를 짚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가 시위할 만한 입장이나 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저는 그에게 식량에 불과할 텐데, 한낱 식량이 묵언 시위한다고 상처를 다시 치료해 주겠다는 누아의 반응도 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누아가 사냥 나가기 전에 살을 찌우라고 말했던 걸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핀은 육식을 해본 적이 없지만 골골대는 먹이보다는 오동통하고 건강한 먹이가 더 맛있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저를 위한 걱정이 아닌 거군…. 역시나. 라핀이 뒤늦게 누아의 행동을 이해하고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누아가 구급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너, 또 도망갈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네?”

뜬금없는 말에 라핀이 눈을 번쩍 떴다. 몸이 움찔거리면서 도토리가 더 깊게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뱃속이 이상한 느낌에 라핀이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다행히 누아는 구급상자에서 약을 챙기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 그래도 도토리가 입구에 걸쳐서 나올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있는 것보다는 쑥 들어간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식은땀이 절절 끓는, 소름 돋는 감각은 조금 사그라졌다.

누아는 약과 붕대를 꺼낸 뒤, 라핀의 목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어줬다. 라핀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붕대가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치료를 해줬다고 한들 워낙 출혈이 컸고 본의 아니게 많이 움직여 상처가 터진 듯 보였다.

블란은 제 이런 몰골을 보고도 그런 무자비한 섹스를 했다는 거지?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이 야만적인 늑대.

라핀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누아는 피 묻은 붕대를 정리하고 손에 연고를 짜며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아까 사냥 나가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냐?”

“그런 거 아니에요….”

도망갈 생각을 아주 조금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 태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라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누아가 귓등으로도 안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도망갈 거라고 대놓고 말하겠어. 입에 발린 말이야 뻔하지.”

“저, 정말이에요! 나간다고 해도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챙겨 주시는데 제가 왜 도망갈 생각을 하겠어요.”

왠지 믿어주지를 않으니 억울했다. 라핀은 뒤늦게 왜 제가 구구절절 해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해명을 늘어놓은 뒤였다.

어쩐지 말하고 보니 먹을 것도 챙겨주고 잘 곳도 챙겨주는 은인을 만난 뉘앙스가 됐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은인은 개소리지. 암, 그렇고말고.

겉으로는 입에 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열심히 누아와 블란을 씹는데, 누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꼭 기분 좋은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이었다.

…왜 저래? 라핀이 의문에 찬 눈으로 누아를 쳐다보자, 그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말했다.

“흠…, 하긴, 그렇지? 이렇게 잘해주는데 도망갈 이유가 없지?”

좀 전까지만 해도 입에 발린 말이야 뻔하다고 구시렁거리더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단순한 걸까…. 라핀이 보기에 누아는 왠지 빈틈 하나 없이 냉정해 보였는데, 이제 보니 칭찬에 약한 모양이었다. 라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더 치켜세워줬다.

“예…. 자, 잡아먹는다고 하, 하셨지만 이, 이렇게 잘해주시는 분이 또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래. 이렇게 치료해주는 늑대도 나밖에 없을 거야.”

“…….”

라핀은 왠지 그런 누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왠지 그는 ‘냉정한 포식자이지만, 먹이에게도 상냥한 나’에 도취해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다른 포식자에 비해 먹이도 챙겨주고 잠자리도 푹신한 침대를 내어주는 포식자는 흔치 않았다. 그렇지만 목에 송곳니 구멍을 문신처럼 뚫어놓고서 저러는 것도 좀 이상했다.

그래도 좋은 성격인 척하다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블란보다는 이쪽이 낫긴 했다. 블란은 토끼가 새끼를 많이 친다는 사실을 누아에게 알려 제 생명줄을 조금 늘려주긴 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듯한 날을 선물해 줬으니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험한 욕설을 내뱉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에 비하면 그냥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만 하는 누아가 더 깔끔하지…. 둘 다 쓰레기인 건 피차일반이지만, 라핀은 그래도 둘 중 누아가 낫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누아는 라핀의 목덜미에 연고를 듬뿍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실력이 늘었다.

“끝났다.”

누아가 만족스럽게 말하며, 라핀의 목덜미를 가볍게 도닥였다. 아주 조심스럽고 가벼운 손길이었다.

간지러움에 라핀이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뒷구멍에 머금고 있던 도토리가 더 깊은 곳까지 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히, 흐윽…!”

라핀이 헉 하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신음은 이미 흘러나온 뒤였다. 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아파서 그래?”

“아, 아니에요. 안, 아파요….”

“내가 그렇게 세게 건드렸어? 붕대를 잘못 감았나?”

제발 신경 쓰지 않아줬으면 싶은데, 누아는 제가 상처 치료를 이상하게 한 건가 싶어 다시 붕대를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손길은 상냥하기 그지없었으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인 라핀에게는 신종 괴롭힘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니까, 제발 건드리지 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누아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는데, ‘찰싹!’ 손을 때리는 매서운 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라핀이 실수로 누아의 손을 쳐버린 것이었다.

“어….”

때리고 당황한 것은 라핀이었다.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일부러 쳐낸 것처럼 보였다.

라핀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걱정에 물들어 있던 누아의 얼굴이 냉랭하게 굳은 게 보였다. 누아의 노란 눈이 평소보다 더 매섭게 보였다.

화가 난 누아가 사납게 이빨을 세우는 모습에 손바닥이 금방 축축해졌다. 무서웠다. 광포한 살기에 억눌려 이대로 생을 마감할 것만 같았다.

블란의 제안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지만, 누아가 변심이라도 하면 바로 저세상 행이었다. 어쩌면 블란보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존재는 누아였다.

“죄, 죄송해요! 그게, 저는 그냥 눕고 싶어서….”

“하….”

“아프세요…?”

아무리 거지같은 삶이라지만 죽기는 싫었다. 라핀은 뒷구멍에 도토리를 품은 감각도 잊고, 허겁지겁 제가 쳐냈던 누아의 손을 양손으로 쥐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의 손을 살폈으나 제가 때린 흔적은 없었다. 커다란 손에 큼직하고 작은 흉터가 간간이 있긴 했지만 전부 오래된 상처처럼 보였다.

저렇게 무섭게 눈을 뜰 만큼 아프진 않았을 것 같은데…. 늑대는 맷집도 좋지 않나. 라핀이 힐끗힐끗 누아의 눈치를 보자,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프다고 하면 어떻게 해주게.”

다행히 황당해서 그런지 화가 조금 식은 것처럼 보였다. 사납게 보이던 이빨 역시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화가 풀린 것 같진 않으니 기분을 맞춰주는 게 좋겠지? 라핀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대답했다.

“약 발라드릴까 하고….”

“너 약 없잖아.”

“거, 거기 있잖아요. 누아 님 품에 구급상자….”

“이 약들은 다 내 건데.”

지금 장난하자는 걸까? 누아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구급상자에 약이 한가득 들어 있는데도, 제 몸 치료하는 데 못 쓴다는 식이었다.

황당했지만 시비를 걸려면 어떻게든 걸 수 있었다. 라핀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럼 호… 해드릴까요?”

“뭐?”

라핀도 무리수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말한 건데…. 누아가 헛것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되려 당혹스러워졌다.

“야, 약이 없으니까…. 그런 거라도 하는 게….”

“이거 웃기는 토끼네. 그럴 거면 차라리 핥아주겠다고 하지 그래?”

“…핥아드릴까요?”

살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비밀을 숨기기 위해 블란의 아랫도리도 빨았는데, 살기 위해 손을 핥는 정도야 새 발의 피였다.

그렇지만 누아는 이런 반응을 바랐던 게 아니었는지 표정이 점점 이상해져만 갔다. 아니, 본인 입으로 핥아달라고 했으면서….

라핀이 멋대로 핥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누아가 라핀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됐어. 하지 마. 잠이나 자게 이리 와.”

“앗…!”

누아가 화를 내지 않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라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덩달아 라핀의 몸도 끌려가니 마주 보고 누운 자세가 됐다.

어제도 함께 침대에 누워 바싹 끌어안긴 채 자긴 했지만, 시선을 마주한 자세는 훨씬 더 어색했다. 같은 성별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민망하고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부담스럽고 무섭다고 생각하던 누아의 노란 눈은 금방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어쩔 줄 모르겠는 건 여전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보고 있는 게 난감했다.

라핀은 누아가 눈을 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애벌레에 빙의한 것처럼 꼬물꼬물 몸을 반대로 돌렸다. 다행히 몸을 반대편으로 돌릴 때까지 누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야행성이라고 낮에 잤으면서 또 자려는 걸까? 하긴, 사냥을 다녀왔으면 피곤할 수도 있었다. 그가 자지 않고 계속 제 상태를 살폈더라면 더 눈치가 보였을 텐데 다행이었다.

그때,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는 라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밋밋한 배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헉, 라핀이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누아가 라핀을 제 품으로 확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디 가려고.”

“힉…!”

등에는 누아의 딱딱한 몸이 닿았고, 바로 귓전에서 울리는 누아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안 그래도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져서 선뜩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배를 누르는 손짓에 안정적으로 깊게 들어와 있던 도토리가 도로 빠져나가려는 듯 움찔거렸다.

라핀이 선뜩한 기운에 몸을 한껏 옹그렸지만, 그 행동이 누아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는지 그는 라핀을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빈틈없이 꽉 누아의 품에 안기게 되고서야 라핀은 겨우 이성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흐읏…, 가는 게 아니라, 너무 가까워서….”

“꽁꽁 묶어두기 전에 그냥 가만히 있지?”

“도,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의심 살 행동을 하지 마.”

정말 도망가려는 거 아니었는데! 몸만 돌리려는 거였는데! 그리고 이미 꽁꽁 묶은 거나 다름없이 안고 있으면서!

억울한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으나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뭔 말만 하면 괜히 꼬투리를 잡힐 것만 같았다.

라핀이 끙,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누아도 무어라 더 추궁할 생각은 없는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게 한고비가 넘어가나 싶었는데…. 시선을 반대로 돌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타구니 사이로 누아의 단단하고 두꺼운 허벅다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읏.”

기민한 감각에 라핀이 신음을 삼켰다. 누아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사타구니를 비비는 허벅다리와 엉덩이 뒤로 느껴지는 단단한 것은 분명 늑대의 양물이었다.

상상하기 싫었지만, 비벼지는 게 꽤 커서 제 몸을 꿰뚫던 블란의 것이 연상되었다. 정말 싫은데, 끔찍한데…. 그런 마음과 달리 엉덩이가 바싹 조여지면서 잊고 있었던 도토리가 안에서 요동쳤다.

다시 모골이 선뜩해졌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자극이 되는데 태평하게 잘 수 있을 정도로 무감하지 않았다.

다시금 애벌레처럼 꿈질거려 봤지만, 누아가 “쓰읍.” 소리를 내며 못 움직이게 하니 그마저도 불발됐다. 결국 라핀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누, 누아 님….”

“뭐야.”

누아가 한껏 귀찮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뭐냐고 물었을 뿐인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거면 관두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지만 하룻밤을 꼬박 이러고 있을 텐데, 마냥 참기는 무리였다.

“어, 엉덩이에… 닿는데. 그, 그것만이라도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뭐? 뭐가 닿는다고?”

라핀이 우물우물 입도 제대로 벌리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부탁하자, 누아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말할 거면 제대로 말하라는 투였다.

하…. 한 번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지. 라핀은 민망함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그, 성기가….”

“…….”

“아, 아래에 닿아서 좀…. 이, 이상하거든요….”

“…….”

라핀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겨우겨우 말하자 누아에게서 즉각적으로 나오던 반응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던 허벅다리가 빠져나가고, 둔부를 문지르던 두툼한… 그것도 물러났다.

“참나,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뭘…. 사내끼리 그런 걸 신경을 써?”

누아는 구시렁거렸지만,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는 걸 아는데…. 그리고 같은 사내끼리라도 지켜야 할 에티켓은 있지 않나….

아무튼 누아가 순순히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허리와 가슴께에 뱀처럼 파고든 손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억세졌다. 그러면서 등에 탄탄한 가슴이 닿았는데,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손도 빼줬으면 좋겠지만, 하반신이라도 떨어져나간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라핀은 결국 체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

이번 역시 절대로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라핀은 잘만 잤다.

정말 제가 생각해도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도토리를 품은 채, 게다가 늑대를 그렇게도 무서워하면서 그의 품에 안겨 잘만 잤다.

몸이 아프니 잠이 잘 오는 걸까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현실도피인 것 같기도 했다. 가족들과 토끼 무리가 저를 버리고 떠났을 때 라핀은 몇 날 며칠 동안 잠만 자기도 했으니까…. 그때랑 결이 비슷했다.

그런 제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잠을 자고 있을 때는 뒷구멍에 도토리를 머금고 있는 감각을 잊을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것 때문에 잠을 못 잤더라면 정말 개고생을 했으리라.

아무튼 잘 버텨냈으니 블란이 어서 도토리를 빼줬으면 좋겠는데, 블란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먼저 블란을 찾아가야 하는 걸까? 언제? 곰곰이 생각하는데 저를 느슨하게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등에 탄탄한 가슴이 닿고, 귓가에서 누아의 느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아, 네….”

“그럼 밥 먹자. 배고파.”

누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라핀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제가 도망치지 못하게 결박하려고 밥도 안 챙겨먹은 걸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누아는 멍청한 거였다. 저번에 블란이 말한 대로 자신은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니까. 자신은 굶어가면서 붙잡을 식량이 아니었다.

멍청한 늑대인 걸까. 저를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을 시간에 다른 동물 사냥을 한 번 더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텐데…. 무식하게 힘만 센 종족이니 당장 눈앞에 있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흥, 생태계 우두머리도 별거 없구나. 토끼에 비하면 무척이나 강하고 대단한 종족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정신승리를 하고 싶었다.

속으로 꿍얼꿍얼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누아가 라핀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발끝에 먹이 보따리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더니 안쪽에 있는 것을 한 움큼 쥐어 라핀의 손 위에 놓았다.

“먹어.”

“…감사합니다.”

누아에게는 한 움큼이었지만, 라핀이 받으려면 두 손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어 받아야 했다.

누아는 라핀의 곁에 먹이를 챙겨준 뒤 잠깐 자리를 비웠다. 분명 어제 점심쯤 먹고 굶었는데도 뒷구멍에 도토리를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조금 이따가 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아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라핀은 누아가 가져온 그릇 위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욱….”

형체는 고기 형태로 썰려 있었지만 저건 분명 사슴이었다. 순간 고깃덩어리가 저에게 이입이 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라핀이 헛구역질하느라 몸을 들썩거렸으나, 그를 보지 못한 누아는 침대 근처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우아하게 칼질을 했다.

사슴 고기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아는 그것을 맛있게 한입 먹고는 창백하게 질린 채 아무것도 못 하는 라핀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안 먹어?”

“아…. 아뇨. 저는… 생각이 없는데요….”

라핀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대답했다. 생각이 없다 못해 식욕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억지로 먹으면 체할 게 분명했다.

그들이 늑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실감이 확 몰려왔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일 뿐이었다.

“저 잠깐, 화, 화장실 다녀올게요.”

“…….”

딱히 용변이 급한 건 아니었지만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라핀이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기를 씹던 누아에게서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 감시받는 상황이었지. 도망 못 치게 한다고 밥도 안 챙겨 먹고 끌어안고 있던 늑대였다. 화장실이라고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의심스러우면 같이 갈래요?”

“…아니. 갔다 얌전히 돌아와.”

매번 어디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밤에는 꼭 안고 자기까지 하니 화장실도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라핀은 혹 그가 대답을 번복할까 후다닥 방을 나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왔음에도 사슴 고기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이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도토리의 느낌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하…. 이놈의 도토리. 생각해 보면 어제 몰래 뺐어도 몰랐을 텐데, 제가 너무 순진했던 듯싶다.

뒤늦게 반항할 생각을 하며 화장실로 향하는데, 복도에 서 있는 블란과 마주쳤다. 그는 라핀을 발견하자마자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라핀, 어디 가?”

“화, 화장실이요.”

라핀은 그가 껄끄럽기만 해서 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라핀이 면전에 있는 이를 무시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니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라핀이 어색하게 대답하며 그를 피해 가려 했으나, 블란은 먼저 앞장서는 라핀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나도 가는 중이었는데.”

“…네?”

“가자.”

화장실은 순서를 지켜야 하지 않나? 타이밍이 겹치면 잘된 게 아니라 안 좋은 거 아닌가? 라핀은 어리둥절해졌지만, 눈치가 보여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그러는 새 파우더 룸 앞에 도착했다. 라핀은 걸음을 멈추고, 어깨에 둘러진 블란의 팔을 애써 풀어내며 말했다.

“머, 먼저 쓰세요.”

“뭔 소리야, 라핀. 검사하러 온 건데.”

검사? 무슨 검사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블란은 파우더 룸 문을 열더니 라핀을 밀어 넣었다.

라핀이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문이 빠르게 닫히더니 잠겨버렸다.

철컥! 문을 잠그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급하게 정신을 차렸지마는, 그보다 블란이 라핀을 벽에 몰아넣는 게 더 빨랐다.

“아읏!”

늑대의 순발력은 토끼에 비할 것이 못 됐다. 순식간에 앞은 벽으로 가로막혔고, 두 팔목은 블란의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혔다. 두 팔목이 한 손에 쥐어 잡히고 등 뒤로 꾹 눌리니, 순식간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세가 됐다.

눈 깜짝할 새 당한 봉변에 라핀은 벽에 달라붙은 자세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가 사냥 가는 날이라 빨리 해야 돼.”

“네? 뭐를요?!”

“내가 도토리 먹여준 거 잊었어? 설마 꺼낸 건 아니지?”

블란이 말하면서 한 손으로 라핀의 통통한 엉덩이를 톡톡 쳤다. 검사라고 해서 못 알아들었는데, 뒷구멍에 도토리를 잘 머금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소리였나 보다.

엉덩이를 두드리는 손길에 몸 안에 있는 도토리가 꿈질거렸다. 굳이 그렇게 건드리지 않아도 자극이 되던 터라 닿는 손길에 금방 뜨끈한 열이 올랐다.

“흣, 아, 아니요…. 아, 아직 안에 있어요.”

“그런데 깜빡 잊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허벌이 됐어?”

“그런 거 아니에요!”

이것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허벌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쓰다니.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자 블란이 부드럽게 엉덩이를 토닥이던 손으로 라핀의 입을 틀어막았다.

블란의 커다란 손이 입과 더불어 코까지 다 덮었다. 억센 손에 금방 숨이 막혀왔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꿈틀거리는 라핀의 귓가에 대고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쉬이, 누아한테 들키고 싶은 거 아니면 목소리 낮춰.”

“…….”

라핀이 헙,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소리를 듣고 누아가 오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라핀은 숨을 몰아쉬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도토리나 빼주세요.”

“그래. 보여줘 봐. 숙제 검사해야지.”

블란이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라핀의 두 팔목을 결박하고 있던 것을 풀어줬다.

팔목을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던 건지 풀린 손목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그냥 처음부터 이랬으면 될 것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약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쥐고 흔들다니! 야생은 원래 그런 곳이었지만, 약한 자에게 강하게 나오는 블란이 다른 누구보다도 치사하고 졸렬하게 보였다.

속으로 꿍얼꿍얼 ‘저 새끼는 늑대 새끼도 아니다. 개새끼다.’ 하며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순순히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바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자 맨 궁둥이와 다리가 다 드러났다. 일전에 블란이 속옷을 훔쳐 간 탓에 속옷은 없었다.

이미 블란에게 맨몸을 보인 적 있었지만 라핀은 누군가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익숙지 않았다. 라핀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 블란이 라핀의 엉덩이를 떡처럼 조물거리다 말했다.

“흠, 이래서는 안 보이는데. 엉덩이 뒤로 빼고, 구멍 좀 벌려 봐.”

“읏….”

그렇게 깊이 들어갔나? 하루 내리 몸에 품고 있었으니 깊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라핀은 얼굴을 벽에 기댄 채,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뒤늦게 외설스러운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서 도토리를 몸에서 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흐읏, 으… 이, 이제 보여요…?”

“흐음…. 그렇게 벌려서는 안 보이는데…. 얼마나 깊이 넣은 거야?”

블란이 탄력적인 엉덩이를 만지며 고심하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블란의 시야에는 뻐끔거리는 뒷구멍 사이로 도토리가 보였다. 그렇지만 귓가를 발긋하게 물들인 채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는 모습이라니. 너무나도 야하고 귀여운 토끼를 더 놀려주고 싶었다.

블란은 괜히 라핀을 놀리며 뒷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블란의 길쭉한 손가락에 도토리가 빠지기는커녕 더 깊이 들어갔다. 도토리가 내벽 안에서 굴러다니는 감각에 라핀이 진저리를 쳤다.

“흐으읏, 아앗! 소, 손 넣지 마세요…!”

분명 방금 언성을 높이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도토리가 몸 안에서 요동칠 때마다 식은땀이 다 났다. 엉덩이가 어떻게 될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라핀이 격렬하게 블란의 손을 거부하자 안쪽을 쑤석거리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블란이 뒤에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빼주려고 하는 건데, 참나…. 그럼 네가 빼.”

“네?”

“손 넣지 말라며. 너 알아서 빼라고. 아, 손은 쓰지 말고.”

블란의 목소리에서는 한껏 삐진 티가 났다. 어린애처럼 유치한 모습에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의 요구는 말도 안 됐다.

“네에? 이, 이걸 어떻게 손 없이 빼요!”

“못 빼겠으면 계속 머금고 있어도 되고. 대신 보지에 쑤셔도 되지?”

뒷구멍에 도토리를 넣은 채로 앞에 박겠다고? 상상만 해도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데, 블란이 대답도 듣지 않고 라핀의 보지에 손을 뻗었다. 보짓살을 스치는 손길에 라핀의 몸이 화다닥 튀었다.

“아, 흐읏…!”

보지는 어제 하도 괴롭힘당한 탓에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따끔거렸다. 약이라도 발랐으면 좀 나았을 테지만 누아에게 감시를 당하는 터라 그러지도 못했다.

아무튼 이런 상태인데 손가락까지 들어오면 더 악화될 게 분명했다. 차라리 안간힘을 다해 도토리를 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라핀은 벽을 짚고 있던 손으로 블란의 손을 저지하며 애원하듯 말했다.

“아, 아니요! 도토리, 빼, 뺄 테니까 기, 기다려 주세요….”

“할 수 있겠어?”

“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기회를 벌어 보고 싶었다.

라핀이 애걸복걸하자 블란이 선심 쓰듯 손을 치워줬다. 정말 재수 없는 늑대였다.

라핀은 참담한 심경으로 숨을 크게 내뱉었다. 도토리는 가만히 있다가도 쑥 빠져나갈 것 같을 때가 있었으니까 힘을 주면 의외로 쉽게 빠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한 라핀은 엉덩이와 배에 힘을 줬다.

의식적으로 뒷구멍과 내벽을 벌리려고 했지만,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힘을 주니 도토리가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으으…. 흣, 으….”

그러는 동안 블란에게서 자극이 없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뒷구멍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귓불과 바짝 선 젖꼭지를 티셔츠 위로 만지작거리며 은근한 자극을 줬다.

어차피 만지지 말래도 듣지 않을 테니 라핀은 반항 대신 그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니 라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블란의 방해 공작에도 노력 끝에 도토리가 입구에 걸쳐지긴 했지만,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만 날 뿐 빠지지 않았다.

차라리 내벽에 품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만큼, 뒷구멍이 한계치까지 벌어진 느낌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도토리가 큰 것도 아닌데 마치 주먹 하나를 넣은 것처럼 버거웠다.

“하악, 하아….”

도토리가 빠지는 것보다 아득한 현기증이 먼저 라핀을 덮쳤다. 결국 라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탓에 기껏 반쯤 빼냈던 도토리가 다시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이 거지 같은 늑대 놈. 좀 봐주지…. 솔직히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라핀이 속으로 블란을 원망하고 있을 때, 블란이 자세를 낮추고 라핀의 등에 몸을 겹치며 말했다.

“라핀. 포기하는 거야?”

“아, 아니요…. 아직, 흣, 아닌데….”

“기다리는 거야 상관없지만, 슬슬 누아가 의심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누아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누아는 매번 제게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날을 세우던 늑대이니 혹 도망간 게 아닌지 슬슬 찾으러 나올지도 몰랐다.

혹 누아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비밀을 들키게 될 텐데….

누아는 제 아랫도리에 뭐가 달렸든 먹을 수만 있으면 관심 없을 것처럼 굴긴 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그 역시 블란처럼 저를 노리개처럼 다룰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흐윽…, 브, 블란님…. 그, 그냥 빼주시면 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라핀은 결국 블란에게 비는 쪽을 선택했다.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더 떨어질 것도 없었다.

라핀이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블란을 올려다보자, 그의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턱이 움찔거렸다.

블란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라핀의 모습은 미인계를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이 요망한 토끼가….

“뭐가 예쁘다고 네 말을 들어줘야 해.”

그렇지만 속내와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예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수록 더 골려 먹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토끼는 매번 제 더럽고 추악한 음심을 건드렸다. 조금 더 싹싹 빌었으면 좋겠다. 엉덩이를 벌려서 도토리를 빼달라고, 제 다리에 얼굴을 비비면서 그런 부탁을 하길 바랐다.

“흐윽…. 그럼 됐어요.”

그렇지만 블란의 예상과는 달리, 라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했다.

뭐야? 부탁을 하려면 최소 세 번은 물어봐야지, 뭐 저렇게 포기가 빨라? 블란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미간을 좁히며 타이르듯 말했다.

“하아, 알겠어. 빼줄 테니까, 앞으론 내 손 거부하지 않기야.”

“아, 알았으니까, 빨리요….”

엄하게 말했지만, 대답하는 라핀의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한껏 서려 있었다.

이 토끼, 뭐지? 날 무섭게 보기는 하는 거야? 황당한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순한 라핀이 화를 낼 만큼 괴롭힌 것도 사실이었다. 블란은 제 행동을 돌아보며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라핀, 일어나서 다시 자세 잡아.”

“…네.”

라핀이 훌쩍, 우는 소리를 내며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후들후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란은 라핀이 자세를 잡자마자 회음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곧장 그의 뒷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라핀이 애타는 신음을 흘리며 애꿎은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아흐으윽…!”

하루 내내 도토리를 물고 있게 해서 그런지 안쪽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당장 성기를 박아 넣고 싶을 정도로 따듯하고 조이기까지 했다.

블란은 그런 안쪽에다가 성기를 쑤셔 넣고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지만, 좀 전에 말한 대로 시간이 없었다. 누아 성격에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데 안 찾으러 온 것도 많이 참은 거였다. 곧 올 게 분명했다.

블란은 아쉬움에 혀를 달싹이며, 뒷구멍에 있는 도토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탓에 라핀의 둥근 구멍이 양쪽으로 길게 벌어졌다. 뒷구멍이 붉게 벌어지는 것이 굉장히 음란해 보였다.

“으으응…!”

“뺀다.”

“으응, 빨리요….”

라핀이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재촉했다. 블란은 하얗고 복숭아 같은 엉덩이가 제 눈앞에서 흔들리는 걸 보고 아랫도리가 단단해졌다.

씨발, 요망한 토끼…. 누아고 뭐고 거하게 한판 뜨고 싶었지만, 블란은 불길처럼 치미는 욕망을 겨우 다스리고 도토리를 쑤욱 빼냈다.

“아으읏…! 하아, 하아….”

거세게 내벽을 긁는 도토리 탓에 라핀이 버거운 소리를 내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블란이 무너져 내리는 라핀의 몸을 지탱하며 벽을 보니 묽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도토리가 빠져나가는 거친 감각에 사정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블란이 손에 쥔 동그란 도토리는 질척한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뒷구멍이 스스로 젖었을 리 없으니, 앞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안쪽까지 스며든 모양이었다. 블란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라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흐으, 제, 가 언제….”

“이렇게 질질 싸놓고 안 좋아했다고 우기려고?”

블란은 도토리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라핀의 말랑말랑한 자지를 쥐었다. 귀두를 가볍게 엄지로 훑어줬을 뿐인데, 라핀은 그마저도 버거운지 헉 소리를 내며 신음을 삼켰다.

“흐으읏…. 아, 흑, 아닌데….”

라핀이 작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부정했다. 증거가 벽에 훤히 묻어 있는데도 우겨대는 모습에 블란이 입맛을 다셨다. 하…. 한판 뜨고 싶다. 엉망으로 울려버리고 싶다는 음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라핀의 성기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었다.

“먼저 나갈 테니까, 이따가 나와.”

“흐으….”

드디어 괴롭힘이 끝났다. 라핀은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흐트러진 바지춤을 정리하며 말했다.

“제가 머, 먼저 나갈게요….”

후다닥 허리춤을 정리한 라핀이 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블란이 두터운 팔로 라핀의 가슴께를 끌어안았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들며 등 뒤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왜 또…. 라핀이 불만과 의아함이 담긴 시선으로 위를 힐끗 보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해. 너 지금 나가면….”

블란은 말끝을 흐리더니, 가슴께를 감싸고 있던 손을 올려 검지와 엄지로 라핀의 볼가를 꾹 누르고 거울을 돌아보게 했다.

그렇게 들여다보게 된 거울에는 블란에게 안겨 있는 제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그리고 이내, 라핀은 그가 왜 저를 막아섰는지 알 것 같아졌다.

“섹스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꼴이거든.”

“…….”

블란이 라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거울 속에 비친 라핀의 얼굴은 자신이 봐도 이상했다. 눈가는 막 울었다는 걸 티 내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은 혼몽하게 풀려 있었다. 말 그대로 거친 정사를 나눈 후의 모습 같았다.

블란의 말에는 뭐든 따르기 싫었지만, 아무래도 열을 식히고 나가야 할 것 같다. 라핀은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먼저 나가세요.”

“그렇지?”

블란이 ‘네가 봐도 이상하지?’ 그렇게 말하듯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는 라핀의 가슴께를 끌어안고 있던 것을 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그런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도 발소리가 차츰차츰 멀어지고 나서야 라핀은 문에 등을 기대고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저 미친 늑대 새끼.”

더 신랄하고 험악한 욕을 내뱉고 싶은데, ‘씨발’이나, ‘미친놈’ 하는 수준으로밖에 욕을 배우지 못한 라핀의 입에서는 더 험한 욕이 나오지 않았다.

라핀은 욕설을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덕거리다 세면대에 물을 콸콸 틀었다. 한쪽으로 레버를 돌린 그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연거푸 세수했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열을 식히기 위해서는 이게 제일 효과적이었다.

한참 후에야 물을 끄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제 얼굴이 비쳤다. 겨울의 물을 끓이지도 않고 고스란히 올려 보낸 거라 얼굴은 차가움에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렇지만 눈가의 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지 여전히 붉었다.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느리게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지금은 울고 있지도 않는데,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왜 하필이면 특이 취향을 가진 발정 난 늑대한테 잡혀 가지고…. 늑대에게 잡히고서도 죽지 않았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역시 탈출밖에… 답이 없겠지.

블란에게 약점을 잡힌 이 상황도, 이러다가 번식만 하게 될 미래도 참담했다. 앞이 보이지 않도록 암담한 미래였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인체 개조를 당하고도 꿋꿋이 살았던 몸이니 이 정도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명에 관한 의지만큼은 누구보다도 단단했다.

라핀이 담담하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쿵쿵 울렸다. 노크라기보다는 문을 부숴버릴 듯 두드리는 것에 가까웠다.

블란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방금 나가 놓고서는 또 무슨 변덕일까. 화장실에 두고 간 것도 없을 텐데. 라핀은 한숨을 쉬며 화장실 문을 열어줬다.

“왜, 또-.”

“하도 안 오길래 도망갔나 했는데, 화장실에 있긴 있네.”

“…….”

라핀이 급하게 말을 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블란이 아니라 누아였다.

하마터면 왜 또 왔냐는 말을 해서 블란과 함께 있었다는 걸 들킬 뻔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는데 누아가 화장실 안쪽에 눈짓을 주며 말했다.

“볼일은 다 봤어?”

“이, 이제 나가려고요.”

“그럼 나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라핀의 가는 손목을 한 손으로 쥐어 잡고 바깥으로 끌었다. 라핀의 몸이 힘없이 끌려 나왔다.

라핀이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에 미간을 좁히자, 누아의 미간 사이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제가 방금 누아 욕을 입 밖으로 했던가? 생각만 했던 것 같은데? 라핀이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고 있을 찰나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손이 왜 이렇게 얼음장 같아.”

“아….”

다행히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라핀은 제 절제력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찬물로 손을 씻어서….”

“따듯한 물 나오는데,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라핀이 대답한 후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자 누아의 빤한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꺼림칙한 시선이 마치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냐고 묻는 듯했다.

노골적인 시선이었지만 라핀은 모르는 척 시선을 반대쪽으로 피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왜 울었냐고 물어봐도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잠시간 라핀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누아는 여전히 라핀의 손목을 꽉 틀어잡은 채 걸음을 빨리했다. 점차 넓어지는 보폭에 라핀은 이번에도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그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그렇게 바쁘게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누아의 방이었다. 그는 라핀을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그리고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먹이 자루에서 한 움큼을 퍼다가 라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때처럼 라핀의 양손이 먹이로 묵직해졌다.

“청승맞은 짓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청승맞은 짓 안 했는데요….”

“뭐가 그렇게 슬퍼서 혼자 울고 자빠졌냐고.”

“…….”

울었단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냉수로 세수를 했어도 눈가의 열은 여전했으니 안 들키는 게 더 이상했다.

“한동안은 잡아먹을 생각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우는 거 보기 짜증나니까.”

“…네.”

그런 이유 때문에 운 건 아니었는데….

라핀은 해명 대신 먹이를 손 안에 두고 데굴데굴 굴렸다. 한 끼에 이만큼이나 풍족히 먹었던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토끼와 무리 지어 생활할 때를 떠올려 보면 온종일 먹이를 열심히 구해도 무리에게 식량을 나눠 주고 빼앗기다 보면 제 수중에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남들은 한 끼에 먹을 양을 세끼에 걸쳐 나눠 먹었던 적도 빈번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와 함께했던 토끼 무리들은 제게 잘해준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라핀은 돌연변이, 인간에게 개조당한 수컷도 암컷도 아닌 녀석이었으니 오히려 핍박하고 홀대했다.

매번 힘들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살았던 저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다. 인간에게 잡혀 실험실로 갔을 때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늘 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 인생이었다.

이번 역시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라핀은 그런 다짐을 하고 먹이를 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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