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6)

런, 래빗, 런! 1권

1. 토끼 사냥

“허억, 허억…!”

작고 여린 몸뚱어리가 검은 늑대를 피해 풀밭을 헤치며 전속력으로 뛰었다.

라핀은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토끼가 아무리 전속력으로 뛰어도 늑대를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팠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폐부를 가득 메우는 차가운 겨울 공기가 온몸을 바스러트리는 듯했다. 토기가 치밀어 오를 만큼, 욕지거리가 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도망치면 작은 토끼 굴이 나온다. 거기까지만 가면 늑대를 따돌릴 수 있다. 아무리 늑대라고 한들, 작은 토끼 굴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니까!

라핀이 헉헉거리며 고지의 코앞까지 갔을 때였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라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보름달의 역광을 머금고 있어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형태가 확연하게 보였다.

청량한 푸른 눈에 은빛 털을 가진, 흰 늑대였다.

“헉…!”

라핀이 숨을 들이켜며 뛰던 걸음을 멈춰 세우자, 제 앞길을 가로막은 흰 늑대가 입매를 시원하게 끌어올렸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흰 늑대가 부른 건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가벼운 동요였으나, 라핀에게는 그 어떤 노래보다 섬뜩하게 들려왔다.

라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흰 늑대를 피해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것에 등을 부딪쳤다.

설마….

라핀이 동그란 눈을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보자, 눈에 노란 이채를 번뜩이는 새카만 늑대가 어둠 속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았다.”

“아…!”

새카만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더니 그대로 라핀의 목덜미에 달려들었다.

목덜미에 그대로 구멍이 뚫리는 생경한 감각에 라핀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라핀은 정신이 들자마자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린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열상이 깊은지 뜨끈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혈을 하고 있는지 하얀 솜 같은 게 제 목덜미를 막고 있긴 했지만, 이미 핏물로 벌겋게 물든 채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늑대한테 잡혀 왔으니 늑대 소굴인 걸까?

힘겹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제가 살던 어두컴컴한 토끼 굴과는 달리 드넓고 화려한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상단에 있는 동물들은 좋은 집에서 산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두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탓에 조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내 먹이를 왜 네가 가지냐고?”

“토끼랑 추격 데이트 하면서 여유 부리던 게 누군데. 토끼 굴 코앞에 있던 거 못 봤어?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잡았으니까, 내 먹이지.”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니 검은 늑대와 흰 늑대가 투덕거리며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흰 늑대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하자, 검은 늑대가 씨근덕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결국 낚아챈 건 나잖아. 이놈은 내 먹이야!”

검은 늑대가 씨근덕거리며 라핀의 멱살을 옷깃 채로 콱 잡고 들어 올렸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라핀의 몸이 단번에 공중에 떠올랐다.

멱살이 잡혀 끌어올려진 탓에 숨이 턱 막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입고 있던 상의 네크라인이 깊이 파인 상처를 자극했다는 거였다.

“아악!”

가만히 있을 때도 비명이 솟구칠 것같이 아프던 상처 부위였다. 그 부분이 조이듯 자극되자, 라핀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라핀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펄떡거리자, 검은 늑대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야. 일어났어?”

검은 늑대는 피 칠갑이 된 채 벌벌 떠는 라핀의 모습이 안 보이는지 걱정 하나 묻어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핀은 곧 혼절할 것처럼 벌벌 떨면서 제 멱살을 쥔 검은 늑대의 손을 양손으로 포갰다. 검은 늑대의 시선이 피범벅이 된 라핀의 손에 닿았을 때, 라핀은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그에게 애원했다.

“허, 흐으, 으으…, 사, 살려, 흑, 살려 주세요…!”

“뭐? 살려 줄 거면 내가 왜 데려왔겠어. 키우려고 데려왔겠냐?”

검은 늑대는 잠잠히 듣는 듯하더니,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살다 살다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키우려고 데려온 건 아닐 테고, 바라지도 않지만…. 늑대 입으로 넌 잡아먹힐 거라고 다시 한번 상기되니 토끼의 핏기 없는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흐, 흐윽…, 그럼 저, 정말…, 자, 잡아먹으, 실, 히끅, 거예요…?”

“그럼 가짜로 먹어? 이거 아주, 꿈 큰 토끼구만.”

검은 늑대가 농담하냐는 듯 조롱했다.

진짜구나…. 라핀의 얼굴이 더 잿빛으로 물들어 가는데, 뒤에서 흰 늑대가 라핀의 배를 끌어안았다.

흰 늑대가 라핀을 품에 끌어안으면서 검은 늑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자 상처를 압박하던 옷깃이 놓아져 쓰라린 고통이 덜해졌다. 헉헉거리며 달뜬 숨을 내뱉는 라핀의 뒤에서 흰 늑대가 말했다.

“워어, 진정해. 아직 누가 먹을지 결정 안 했잖아. 어차피 오늘 먹을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러다 먹기도 전에 토끼가 죽겠다.”

“안 정한 게 아니라, 이건 당연히 내 거…!”

“그리고 죽은 토끼보단 산 채로 먹는 게 더 맛있잖아. 오늘 죽일 거 아니면 일단 내려둬. 소중한 토끼잖아.”

“…….”

흰 늑대의 말에 검은 늑대가 씨근덕거리며 라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라핀은 내려지자마자 불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지는 어깨에 손을 얹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라핀은 기절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흰 늑대가 ‘소중한 토끼’라고 했던 말을 바득바득 곱씹었다.

자연에는 수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약육강식의 쫓고 쫓기는 세계 속에서 토끼는 거의 최하위층에 속했다.

그 수많은 종족 중에 왜 하필이면 이런 나약한 종족으로 태어났는지 한탄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라핀은 그 토끼 무리에서도 ‘별종’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라핀 혼자만이 토끼 굴에 남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라핀은 급하게 굴을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봤지만 근처에는 토끼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토끼들이 이 산을 떠난 것이 벌써 작년의 일이었다.

라핀도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한평생 무리 생활을 하던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이 살며 생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러다가 언젠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왔으면서도 진짜로 늑대를 마주하니 몸이 벌벌 떨렸다.

라핀이 흰 늑대의 품에 안겨 벌벌 떨고 있을 때, 흰 늑대가 라핀을 안고 있던 자세를 고쳤다. 오금과 등허리를 양팔로 받치도록 안는 자세를 바꾼 그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자, 이제 씻자.”

“흐, 읏…. 예…?”

라핀이 흰 늑대의 옷가지를 잡은 채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씻자고?

라핀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흰 늑대를 올려다보자, 그가 시선을 맞추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어. 진짜 토끼같이.”

“토끼 맞는데…, 아니, 그런데 씨, 씻는다고요…?”

“그럼 그 상태로 있으려고?”

“…….”

온몸이 땀과 피로 범벅되어 있으니 씻고 싶긴 했다. 그런 다음 목덜미의 이빨 구멍이 난 곳도 소독하고 치료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 죽일 것처럼 굴던 늑대가 왜 갑자기 씻을 기회를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죽이기 전 마지막 배려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쯤 체념했을 무렵 욕실에 도착했다.

아까도 생각했다시피 늑대 소굴은 너무나도 호화로웠다. 파우더 룸도 있었고, 안쪽의 욕실에는 인간화를 한 토끼 두 마리가 들어가서 씻어도 될 만큼 드넓은 욕조가 있었다. 물론 인간화를 한 늑대는 한 마리 정도밖에 못 들어갈 수준이었지만, 몸집이 작은 라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라핀이 신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흰 늑대가 라핀의 발이 바닥에 닿도록 내려놓았다. 이만 욕실을 알려주고 돌아가려나 싶던 순간, 흰 늑대의 손이 라핀의 상의 밑단을 잡았다.

슬그머니 위로 올라가는 티셔츠에 라핀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흰 늑대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고 움직임을 저지했다.

“자, 잠깐만요. 오, 옷은 왜….”

“응? 씻겨 주려고.”

“씻겨 주, 신다고요?”

“응. 너 기운 없잖아.”

흰 늑대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라핀은 정말 손 하나 까딱할 기운 없긴 했다. 그렇지만….

“아, 안 씻을래요….”

“뭐?”

“어, 어차피… 내, 내일 주, 죽을 텐데 꼭, 그래야 해요?”

라핀이 흰 늑대의 손을 아래로 스르르 내리며 말했다. 자연스레 티셔츠가 내려가면서 반쯤 드러났던 흰 배 역시 가려졌다.

조금 전 씻는다고 할 당시만 해도 아무 말 않던 라핀이 극단적으로 나오며 안 씻겠다고 하자 흰 늑대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감돌았다.

“원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아.”

“…….”

“누아는 아무거나 먹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누아…? 그게 누구인가 생각하고 있을 찰나, 검은 늑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잡아먹네 마네 말씨름을 하던 건 그밖에 없으니 아마 검은 늑대가 누아인 것 같았다.

아무튼 씻겨 주는 건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려주는 배려 같은 게 아니라, 저들이 비위 상하지 않고 맛있게 먹기 위해 단장을 시켜주는 것인 모양이었다.

씨발…. 안 그래도 내려앉아 있던 감정이 더 침전하는 듯했다. 라핀이 우울한 기색으로 바닥만 바라보자,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흰 늑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내가 왜 토끼의 기분을 봐줘야 하는 건지. 너, 그럼 혼자 씻으라고 하면 씻을 거야? 그래도 안 씻을 거야?”

흰 늑대는 라핀이 안 씻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는지, 그에게 선택지를 줬다.

잠깐 머뭇거리던 라핀은 은근슬쩍 흰 늑대의 시선을 피하고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 혼자 씻을게요….”

“그럼 밖에 수건이랑 옷 가져다 놓을 테니까 씻고 나와. 어디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네.”

라핀이 고개를 끄덕이자, 흰 늑대가 잠시간 라핀을 내려다보다가 욕실에서 나갔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라핀은 막혀 있던 숨을 내쉬었다. 괜히 수상하게 보는 건 아니겠지…? 남에게 몸을 보여주지 않고 혼자 씻고 싶어 하는 취향도 있는 거니까.

라핀은 후들후들 떨리는 몸으로 옷을 벗고 물을 틀어 몸을 씻어냈다. 온몸이 피범벅이었지만, 사실 다친 곳은 목덜미가 전부였다. 목덜미를 제외하고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붉은 피가 씻겨 내려가자 꼬질꼬질하기만 해 보였던 라핀의 나신이 하얗게 드러났다.

언뜻 보기엔 다른 수인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라핀의 몸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하…. 잡아먹을 때, 여기는 안 보겠지….”

라핀이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다리 사이에는 수컷을 상징하는 남성기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더 깊숙한 다리 사이에는 암컷에게나 있다는 여성기가 달려 있었다.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완전한 수컷으로 태어났었는데, 인간에게 포획당해 이것저것 실험을 당한 이후에 몸에 갑자기 이런 것이 생겼다.

실험이 끝나고 다시 살던 곳에 풀어준 덕에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으나, 가족들은 몸이 변한 라핀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암컷도 수컷도 아닌 몸이라는 게 일파만파 소문이 퍼지면서 토끼 무리에서 ‘별종’ 소리를 듣게 됐고 결국 버림까지 받게 됐다.

그 이후로 라핀은 그 누구에게도 제 몸의 비밀을 말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아무튼 늑대가 기어코 저를 씻기겠다고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긴 했어도 비밀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잡아먹힐 운명이지만, 이런 제 몸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비밀을 들킬 때마다 매번 안 좋은 일이 생겼으니 숨기고 싶었다.

***

라핀이 심란한 기분으로 씻고 나오자, 욕실 앞 파우더 룸에 옷과 수건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티셔츠를 집어 드니 큼직한 옷이 펼쳐졌다. 얼마나 크던지 실크 재질의 셔츠는 허벅지 반을 가릴 정도였고 어깨선도 심하게 내려왔다.

“…늑대 옷을 준 건가?”

굳이 입어 보지 않아도 사이즈가 안 맞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피에 절은 제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으니 상의는 어깨가 다 드러났고, 하의는 질질 끌렸다. 허리 밴드가 제 역할을 못 해서 끈으로 한 번 꽁꽁 묶어야 할 정도였다.

옷을 갈아입은 라핀은 조심스레 파우더 룸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봤다. 넓게 이어진 복도 한쪽에는 빛 사이로 두 늑대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고, 반대쪽은 불이 꺼져 있어 어둠이 들어앉아 있었다.

순간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몰랐다. 늑대 목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고 한들 성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는 놈들이니까 다른 늑대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라핀이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멀리서 흰 늑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끼 냄새 나는데. 씻고 나왔나 봐.”

“헙…!”

라핀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빌어먹을. 늑대 놈들은 후각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라핀은 아직 씻지 못한 척하고 도로 욕실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너무 긴장했는지 몸이 돌덩이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라핀이 애꿎은 문고리만 꽉 쥔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좁은 문틈으로 흰 늑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왜 그러고 있어. 이제라도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

흰 늑대가 문 틈새로 라핀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라핀은 그를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벌벌 떨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니면 나와.”

흰 늑대가 가소롭다는 듯 말하며 반대쪽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라핀의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 나갔다.

안 그래도 힘이 죄다 빠진 몸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려나가며 바닥에 엎어지려던 찰나 흰 늑대가 빠르게 라핀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으며 붙잡아 줬다.

라핀이 자기도 모르게 흰 늑대에게 제 몸을 의지하자, 어느새 와 있던 검은 늑대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종이도 아니고…. 얜 뭐가 이렇게 나풀거려?”

“누아, 네가 피를 그렇게 빨아먹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걸.”

흰 늑대가 검은 늑대인 누아를 바라보며 타박하다가, 시선을 라핀에게로 돌렸다. 하필이면 라핀이 남몰래 벗어나려 버둥거리고 있을 순간에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또 도망가려고 했다고 뭐라 하려는 걸까? 라핀이 독 안에 든 쥐처럼 몸을 한껏 옹그리며 떨자 흰 늑대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말아 올리며 말했다.

“여태까지 꼬질꼬질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미인이잖아.”

“뭐? 이 토끼 자식이?”

“응. 피부도 맨들맨들하고, 하얗고, 얼굴도 귀엽고.”

흰 늑대의 노골적인 시선이 라핀에게 닿았다. 쫑긋 솟아오른 하얀 귀부터 찰랑거리는 흰 머리는 천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순백의 색이었다.

그 아래의 얼굴도 만만치 않았다. 좀 전에 피를 많이 흘려 생기가 돌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매력으로 보일 정도로 백지장처럼 깨끗한 외모였다.

수인의 모습을 해도 눈이 토끼처럼 맑은 것도 예뻤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마치 새카만 밤하늘을 수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흰 늑대가 뚫어져라 라핀의 외모를 감상하고 있을 때, 검은 늑대가 라핀을 힐끗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토끼 좀 봤다고 취향이 괴상해졌나 보네. 찔찔이처럼 생겼구만….”

“…….”

찔찔이처럼 생겼다니…. 늑대한테 외모 칭찬을 바란 적은 없지만, 면전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으니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라핀이 슬픈 눈으로 애꿎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흰 늑대가 다정한 목소리로 라핀에게 말했다.

“나는 블란이고, 저 성질 나쁜 늑대 이름은 누아야.”

“곧 죽을 놈한테 내 이름은 왜 알려줘?”

“친해지면 좋잖아. 토끼야, 네 이름은 뭐야?”

누아가 불만스럽게 말했지만, 블란은 천연덕스럽게 라핀의 이름을 물어왔다.

친해지면 좋다고? 아까는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며 씻기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친해지면 더 맛이 좋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만 얼마 살려두지도 않을 거면서. 친해질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잡아먹을 게 눈에 훤한데….

라핀은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다, 대답을 재촉하는 블란의 눈빛에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핀.”

“라핀? 그게 네 이름이야? 네 얼굴보다는 덜 예쁘네.”

블란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누아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모습이다.

도대체 블란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낸 누아는 라핀의 한쪽 손을 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기며 말했다.

“지랄…, 아무튼 내 거 그렇게 안고 있지 말고 이리 내놔.”

“어어. 그러지 마. 그리고 얘 상처 치료해야 된다니까?”

“내가 치료할 테니까 내놔.”

막무가내로 말하며 매섭게 블란에게서 라핀을 빼앗은 누아는 라핀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에 라핀은 비틀거리며 그에게 끌려가듯 움직였다. 너무나도 빠른 걸음에 무릎이 무너질 것 같은데 무서워서 차마 천천히 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라핀은 두 늑대 다 무서웠지만, 어느 쪽이 더 무섭냐고 하면 누아가 더 무서웠다. 솔직히 블란은 고풍스러운 흰 털을 가지고 있고 눈도 파래서 아름다웠다. 반면, 누아는 밤의 어두움을 전부 담은 듯한 새카만 머리칼, 번쩍거리는 노란 눈, 몸에 이리저리 나 있는 흉터….

외관상으로도 훨씬 무서웠고, 무엇보다 좀 전에 제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은 늑대가 누아였다.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이빨을 세우고 저를 먹어치울 것만 같았다.

바짝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리는데, 빠르게 걷던 누아의 걸음이 멈춰 섰다. 라핀이 그 속력에 못 이겨 그의 등에 코를 박자 그가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뻘짓 하지 말고 앉아.”

“흐으…, 네. 죄, 죄송합니다….”

라핀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으나, 누아는 뭘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픈 건 나뿐인가? 라핀은 울먹거리며 얼얼하게 아픈 코를 가린 채 자리에 앉았다.

누아가 장을 열어 구석에 처박혀 있던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로 상자를 뒤적거리던 그는 안에서 하얀 붕대와 약초 연고를 꺼냈다.

“목 이쪽으로 돌려봐.”

라핀이 냉큼 목을 돌리며 흉터 부위를 내보이자, 누아가 손에 연고를 듬뿍 짜더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라핀은 그의 투박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미간을 찔끔찔끔 찌푸렸다. 한없이 엉성한 손길이었다. 제 몸에도, 남의 몸에도 약을 발라본 적이 없는지 어정쩡했다.

연고 한 통을 다 쓸 듯이 약을 듬뿍 바른 그는 꺼내 놓았던 하얀 붕대로 라핀의 목을 칭칭 감으며 말했다.

“마땅한 밴드가 없어서 붕대로 할게. 불편해도 그냥 있어.”

“네….”

흉측하게 물어뜯어 놓고선 이제 와서 배려해 주는 척하기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라핀이 대꾸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치료해줄 거면 왜 저를 죽일 듯이 물어뜯고 이곳으로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치료해줄 거라면 그냥 데려오면 됐을 거 아닌가.

라핀은 툴툴거리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조심스레 제 목을 만졌다. 좀 전까지 흉측한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만져졌는데, 붕대를 감으니 그나마 안심이 됐다.

라핀이 붕대 위를 만지작거리는데 누아가 구급상자를 대충 정리하고 말했다.

“됐지? 그럼 자자.”

“어, 네, 네…? 아, 잠깐…!”

아까는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더니, 이번에는 라핀을 짐짝처럼 든 채 걸음을 옮겼다.

아니, 아무리 그는 늑대고 저는 토끼라지만, 이렇게 한 손으로 들 정도인가? 힘 차이에서 느껴지는 무력함을 느끼고 있을 때, 푹신한 곳으로 몸이 던져졌다.

라핀이 푹신한 곳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드넓은 침대 위에 몸이 던져진 거였다.

무슨 집에 이렇게 넓은 침대가 있담. 좌우로 열 번을 굴러도 남을 듯했다. 마지막 만찬처럼 마지막 날을 호화롭게 보내라는 걸까. 라핀이 침을 꿀꺽 삼키자, 누아가 대뜸 옆자리에 누웠다.

“어, 왜…, 왜, 누우세요…?”

“내 침대인데.”

아, 그렇지…. 맞는 말이었다. 제 침대에 누운 늑대한테 왜 눕냐고 물어보다니. 라핀은 제 생각이 너무 짧았음을 깨닫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저, 그, 그럼 전 다른 곳에서….”

“내가 너 어디로 도망갈 줄 알고 다른 곳에서 자게 해.”

“도, 도망 안 갈게요…!”

“너의 뭘 믿고. 아까도 좆 빠지게 도망가더니만.”

“그때는….”

그때는 도망치면 살 수 있었으니까 그랬지….

라핀이 말을 삼키며 입술을 우물거리자, 누아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나가봤자 블란이 가만 안 둘걸. 그냥 자지?”

누아의 눈에는 라핀이 도망갈 틈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는 팔을 뻗어 라핀의 상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에 결박되어 순식간에 덫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등 뒤로는 누아의 체온이 느껴졌다.

단단한 가슴팍의 느낌과 더불어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족과도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잔 적이 없는데….

라핀이 식은땀을 흘리며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아의 귀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박할 거라도 가져와야지, 귀찮아 죽겠네….”

“…….”

포박이라니….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늑대에게 안겨서 자느니 그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한입에 잡아먹을 수 있는 늑대의 품에 안겨 어떻게 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라핀은 온종일 늑대에게 쫓기던 몸이었다. 지쳤고, 아팠고…, 침대는 너무 푹신했다.

결국 해일과도 같은 수마에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으음….”

라핀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가 난 목덜미가 따끔따끔 아팠다.

어젯밤 누아가 치료를 해줬다고 한들 그토록 깊은 상처가 하루아침에 나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간밤에 늑대의 묵직한 팔에 눌려서 그런지, 무거운 걸 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근육통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일어나기 싫다…. 어차피 일어나도 늑대랑 마주해야 하고, 금방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시라도 푹신한 침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게 낫지 않나.

라핀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누아와 블란이었다.

라핀이 황급히 자는 척을 하려 눈을 질끈 감자, 블란이 누아의 두터운 팔을 잡으며 그가 침대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정말 지금 라핀을 잡아먹겠다고? 안 아깝겠어?”

지금? 다, 당장?

저를 잡아먹는다는 소리에 라핀이 이불 속에서 입을 틀어막고 숨을 헉 들이켜자, 누아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아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도망치면 말짱 꽝인데. 그 전에 먹어치우는 게 낫지.”

“아껴서 좋을 게 있다면?”

“뭐?”

누아는 뭐 좋을 게 있냐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는지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누아의 반응에 블란이 입꼬리를 빙긋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밖에 나갔다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는데… 토끼 말이야. 번식이 엄청나대.”

“그래서?”

“새끼를 엄청 친다는 말이지. 이 녀석은 아껴두고, 한 마리를 더 잡아와서 토끼 낳게 하는 데 쓰는 게 어때? 그럼 계속 먹을 수 있을 텐데.”

나, 나를 토끼를 낳게 하는 데 쓰자고?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라핀이 이불 속에서 남몰래 벌벌 떨고 있을 때, 누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맛있는 놈을 다 잡아놓고 아끼라고? 뭔 고문이야, 그건?”

“미래를 생각하자는 거지. 요즘 산에 토끼 개체 수 줄어든 거 알지? 라핀도 겨우 한 달 만에 찾은 건데, 이게 마지막 토끼가 되면 어쩔래? 토끼 고기 그렇게 좋아하면서.”

“흠….”

누아가 고민에 잠겼다. 그 사이에서 피가 마르는 건 단연 라핀이었다. 누아가 어떤 선택을 하든, 둘 다 좋지 못했다. 곧 죽을 거라고 단념하고 있었음에도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이불을 당차게 걷어차고 도망갈 타이밍이 있을까. 라핀이 숨을 죽이고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고민하는 소리를 내던 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암컷 한 마리를 잡아와야겠네.”

“뭐? 얘 암컷 아니었어? 목소리가 좀 허스키하긴 하지만, 예쁘장하고, 체구가 작잖아.”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 너 눈깔이 어떻게 됐냐? 이놈, 딱 봐도 수컷이잖아. 그리고 어제 안고 잤는데 가슴이 하나도 없었어.”

누아의 말에 라핀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그가 제 몸을 족쇄처럼 단단하게 끌어안고 자는 바람에 돌덩이처럼 미동도 못 했던 밤을.

라핀이 남몰래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는데, 대답을 들은 블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안고 잤다고? 참나…. 수컷 같다면서 왜 끌어안고 잤는데?”

“도망칠까 봐 그랬지.”

“퍽이나 그랬겠다. 얘가 도망쳐 봤자 어디 갔겠냐? 운 좋게 빠져나가도 도로 잡혀 올 게 뻔한데.”

라핀은 갖은 힘을 다해 도망친 거였지만 그들은 손쉽게 포획했었다. 일전에 ‘추격 데이트’라고 칭할 정도로 여유만만이었으니, 도망가도 다시 잡아 오기 쉬울 거라는 투였다.

무시하는 말에 라핀은 울컥 자존심이 상했지만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라 부정할 수 없었다.

라핀이 침울함에 이불 속 새우가 되어 무릎을 끌어안자, 누아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확인해 보지. 자는 것 같은데, 잠깐 아랫도리만 까보면 될 거 아니야.”

뭐? 아랫도리를 확인하겠다고? 둘은 라핀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겉으로 분간하기 힘드니, 아랫도리를 까서 확인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됐다. 자는 척 대화를 엿듣고 있던 라핀이 벌떡 누운 몸을 일으키자, 두 늑대의 시선이 라핀에게로 닿았다.

“일어났네. 잘 잤어?”

“…….”

여태까지 잘 자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둘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상큼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어오는 블란을 보니, 그는 애초에 제가 깨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라핀은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라핀은 이불 아래에 있는 두 다리를 은근슬쩍 모으며 입을 열었다.

“저, 그…. 구, 굳이 안 보셔도 돼, 돼요….”

“뭐?”

라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누아는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인데 미간을 좁히니 더 무섭게 보였다. 그에 라핀은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저 수컷이니까…. 굳이 아랫도리를 까고 확인할 필요는 어, 없어요….”

어차피 성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성별을 확실히 안다면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변태가 아닌 이상.

고작 성별을 알리는 것뿐인데 엄청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손에 땀이 줄줄 흘렀다. 아랫도리에 두 가지 성별이 있긴 하지만, 태어난 성별이 수컷인 건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라핀이 이불을 꽉 그러쥐며 남몰래 땀을 닦는데,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아가 수긍했다.

“흠…, 그래.”

다행히 누아는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할 필요성은 못 느끼는 듯했다.

이럴 때는 말이 통해서 다행이었다. 라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 블란이 초를 쳤다.

“아니. 확인하자.”

라핀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블란을 바라보자, 누아는 한결 풀려 있던 미간을 다시금 좁히며 질색이라는 듯 말했다.

“뭐? 굳이 사내 좆 봐서 좋을 게 뭐 있는데?”

“거짓말이라서 뺑뺑이 치면 어떡해. 그리고….”

그리고?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라핀이 눈을 데구르르 굴리자, 블란이 능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쟤는 얼굴만큼 자지도 귀여울 것 같은데.”

“씨발, 이런 변태 새끼가 다 있나….”

라핀은 순간 제가 말한 건 줄 알고 입을 틀어막았으나, 거친 욕설은 제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누아는 진절머리 난다는 시선으로 블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블란은 면전에 욕을 먹었으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신경 쓰지 않다 못해 욕이 들리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자약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확인해도 되지?”

“네 좆대로 해.”

누아의 허락과도 말에 블란이 웃는 얼굴로 라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지고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자 한쪽으로 매트리스가 쏠렸다. 위기감을 느낀 라핀이 도망갈 구석을 찾자, 블란이 재미있는 것을 봤다는 듯이 라핀의 턱을 가볍게 쥐고 제 쪽을 바라보게 했다.

“라핀,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내가 잡아먹을 것 같아서 그래?”

잡아먹을 거 맞으면서…. 언제든지 잡아먹으려고 저렇게 간을 보고 있는 거면서….

할 말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듯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라핀은 불만의 말 대신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저, 그… 꼬, 꼭 확인하셔야겠어요? 그, 그냥….”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라핀은 어쩌면 좋지, 하며 아랫입술을 물어뜯다가 이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하나에 행동을 멈췄다.

날쌔게 블란의 손을 붙잡은 라핀은 그의 손을 제 바지 위, 성기 윤곽이 있는 곳에 얹으며 말했다.

“이, 이렇게도 확인할 수 있는데….”

“…….”

라핀의 도발과도 같은 행동에 시종일관 여유롭던 블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라핀은 그의 반응에 뒤늦게 제가 한 짓이 추행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얼굴에 화끈화끈 열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아랫도리를 까서 제 비밀을 들키는 것보다는 추행범이 되는 쪽이 나았다.

일단 남근이 달려 있다는 것만 알면, 보지가 달렸는지 어쨌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라핀이 블란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고 있자, 놀란 눈으로 라핀을 내려다보던 그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블란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핀이 동그란 눈으로 블란을 바라보자, 그가 끅끅거리며 간신히 웃음을 멈추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지 그는 드넓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말했다.

“생각한 것보다 너무 귀여운데. 지금 유혹하는 건가?”

“네…?”

“난 그냥 확인만 하려는 거였는데…, 꼭 그렇게 자지 만지게 하고 싶었어?”

“자, 자지….”

라핀이 어벙한 얼굴로 그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제 행동이 그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건 알고 있었다. 성추행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제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렇지만 필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들, 말할 수 없었다. 라핀이 대꾸도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우물거리자 블란이 두 눈에 흥미로움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토끼가 음란하다더니, 진짜였네.”

“…….”

음란하다니…. 라핀은 졸지에 음란 토끼가 됐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억울했지만 차라리 음란 토끼로 오해받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억울한 건 별개라 라핀이 ‘아닌데…. 나 음란하지 않은데….’ 하며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을 때, 블란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는데, 빼면 늑대가 아니지.”

“네…?”

뭘 빼? 라핀이 의문스럽게 눈을 깜빡이자, 블란의 손이 라핀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어젯밤 늑대가 가져다준 바지가 너무 커서 허리춤을 묶어놓은 참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고정해 놓은 끈을 블란이 잡아당기자 허리를 조이던 바지가 순식간에 헐렁해졌다.

앉아 있는 자세라 바지가 훌러덩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곧 내려갈 기세였다. 라핀은 허겁지겁 흘러내리는 바지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헉…! 잠깐만요, 화, 확인하셨잖아요!”

“확인은 확인이고, 이거는 서비스고.”

“서비스요?”

“음란 토끼가 한 발 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응당 도와줘야지.”

블란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며 라핀의 손을 치워버렸다.

그는 아예 라핀의 밋밋한 가슴팍을 눌러 침대에 눕게 하고, 그대로 다리를 접어 올려 바지를 끌어내리려 들었다.

“필요 없…, 헉, 잠깐, 하지… 앗!”

블란의 무지막지한 손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라핀이 버둥거리며 바지를 사수하고 블란의 손을 막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끝내 블란이 바지를 완전히 벗기고 바닥에다 내던져버렸다. 라핀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두툼한 이불을 생명줄처럼 품에 끌어안았다.

라핀이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 블란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누아가 어느새 다가와 블란을 저지했다.

“이 새끼가…. 내 거한테 뭐 하는 건데?”

“왜? 뭐가 어때서?”

“왜 남의 것에 손을 대냐고.”

내 먹이에 왜 손을 대냐는 말이었다. 먹이 취급하는 건 기분 나빴지만, 지금 라핀에게는 누아가 그 누구보다 반갑게 느껴졌다.

라핀이 눈물 맺힌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블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하하, 누아. 좀 전까지만 해도 내 좆대로 하라며. 내가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딸 좀 해주려는 건데 뭘 그렇게 퍼뜩 놀라서 달려와?”

“사내끼리 그러는 게 기분 나쁘니까 그렇지.”

“그럼 나가 있든가.”

“여기 내 방이야.”

누아가 나가려면 네가 나가야 한다는 투로 대꾸하자, 블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그는 누아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라핀을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라핀의 오금 부근과 등허리를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핀의 가벼운 몸뚱어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라핀은 갑작스레 공중에 떠오른 게 무서워, 한 손으로는 이불을 잡고 한쪽 손으로는 블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블란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는데, 누아가 다시 블란을 막아섰다.

“야, 뭐 하는데?”

“네 방이라며. 그래서 친히 나가 주려고. 네 눈앞에서 사라지면 될 거 아니야.”

“…….”

누아는 불만스러운 듯 눈을 치뜨고 블란을 노려봤지만, 블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누아를 어깨로 치고 지나쳤다.

누, 누아…. 제발 말려 주세요…. 라핀이 애원의 눈빛으로 계속 누아를 바라봤지만, 누아는 지나치는 둘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안한 라핀의 마음과 달리, 블란의 품은 지나치게 안정적이었다. 묵직한 겨울 이불과 토끼를 함께 안아 들었음에도 무거운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어젯밤 누아는 저를 한 손에 짐짝처럼 짊어지고 가긴 했다. 늑대들의 힘이 얼마나 좋은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 힘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은데…. 대, 대딸만 해준다고 했으니까 보지는 못 보고 지나갈 수도 있나…?

라핀이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어느 방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블란의 방인 듯했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누아의 방과 달리 이곳은 화사하고 화려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의 방에도 드넓은 침대가 있다는 점일까. 약육강식의 정점인 만큼 집도 넓게 쓰고, 덩치도 크다 보니 침대는 큰 걸 쓰는 모양이었다.

라핀을 살포시 침대 위에 내려놓은 블란은 라핀이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이불을 가져가려 했다.

“나참, 이불은 왜 들고 온 거야? 다시 가져다줘야 하잖아.”

“저, 저기… 아, 안 하면 안 될까요…? 저, 그냥… 그, 그런 의도로 만지게 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그, 그런 변태도 아니고요….”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서야 말을 이렇게 더듬을 리가 있나.”

“거, 거짓말이 아니라 무서워서….”

“무섭게 안 해. 한 발 빼주는 게 전부라니까?”

블란이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린다고 한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대딸해 준다는 것도 좀 문제긴 했지만, 그보다는 숨겨둔 그 부위를 그가 볼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

“나만 믿어.”

“하읏…!”

야살스럽게 속살거린 블란은 이불째로 라핀의 성기 기둥을 콱 잡았다. 기둥을 직접 매만진 것도 아니었으나 악력이 세다 보니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라핀은 제 입에서 나온 야릇한 신음에 깜짝 놀라 제 입을 작은 손으로 콱 틀어막았다. 라핀은 아주 어렸을 때 실험을 받게 되면서 성경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다른 토끼들에게 배척받기도 했지만, 라핀 역시 제 몸에 있는 여성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가끔씩 자위를 하긴 했으나, 그나마도 자주 그러진 않았다. 남성기를 훑으며 자위를 할 때마다 여성기도 덩달아 축축해지는 느낌이 싫어 그나마도 제대로 한 적 없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보다 성감이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라핀은 필사적으로 이불을 그러쥐고 있었으나, 야릇한 성감에 손아귀에 준 힘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흰 이불에 선명하게 나 있던 주름이 서서히 옅어지자 그 틈을 타 블란이 이불을 치우려고 했다.

아, 안 돼…! 라핀은 힘 빠진 손으로 겨우 이불을 쥐어 잡아 봤지만, 이불은 손 틈새로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아연해진 얼굴로 이불을 바라보던 라핀은 애원의 눈초리로 블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브, 블란 님…. 해주실 거면….”

라핀이 우물거리며 입을 열자, 블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라핀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계속 거절을 하니, 이번엔 또 무슨 이유로 거절하려 그러냐고. 무엇이든 받아쳐 주겠다는 시선이었다.

무슨 이유를 대든 그가 행위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핀은 마지막으로 도박해 보자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불 좀 꺼주시면… 안 돼요…? 부끄러운데….”

어차피 그의 손길을 막아설 수 없다면, 그가 제 여성기를 보지 않게 하면 되지 않을까.

다리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들킬 수도 있었다. 여성기는 아주 은밀한 부위에 있었으니까.

라핀이 얼굴을 발긋하게 붉히며 말하자 저를 바라보고 있던 블란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푸른 하늘처럼 청량한 빛을 띠던 아름답던 눈이 번뜩였다. 늑대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특유의 선뜩한 살기도 함께였다.

라핀이 두려움에 털을 바짝 세우고 몸을 떨었으나, 블란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웃으면서 형형한 이채를 지워냈다.

“뭐야. 부끄러워서 내뺀 거였어? 그럼 어쭙잖은 이유 대지 말고 진즉 말하지 그랬어.”

그는 언제 살기를 내뿜었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불을 꺼달라는 말에 기분 좋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탁-.

불을 끄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 어둠 속에서 블란의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라핀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온 그는 새하얀 이불을 잡으며 말했다.

“불 꺼줬으니까, 이제 치워도 되지?”

“…네.”

라핀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블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라핀의 맨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블란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라핀의 다리 사이에 있는 성기를 두 눈에 꼼꼼히 새겨 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라핀의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양물의 형체는 선명하게 보였다.

“와….”

블란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농담 삼아 누아에게 ‘자지도 귀여울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했다.

가느다랗고 하얀 허벅다리 사이에 있는 선홍빛 남성기는 믿기지 않게 귀여웠다. 한 번도 쓴 적도, 손으로 매만진 적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렇게 남자의 음심을 도발할 줄 아는 토끼라면 성 경험이 다분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블란은 순간 제 눈을 의심할 뻔했다. 성기 주변에는 시커먼 음모는커녕 솜털만 나 있었다.

솜털만 나게 생긴 라핀의 외양과 어울리긴 했다만, 문득 ‘설마 아기 토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토끼라서 늑대에 비해 체구가 작긴 해도, 성인 토끼만 한 체구는 되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늑대의 눈에는 한없이 작고 여려 보였다. 오죽하면 블란이 라핀을 암컷으로 오해했을까.

블란은 손을 뻗어 라핀의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토끼치고 양물이 큰 편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늑대의 기준에는 한없이 작았다. 그는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라핀의 성기를 엄지로 문질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라핀. 너 성인은 맞지?”

“흣, 네…?”

“대답해.”

“하, 흐으읍….”

블란이 대답을 재촉하며 손아귀에 힘을 콱 쥐었다. 블란이 라핀의 남성기를 쥐어뜯을 듯 굴자, 라핀의 몸이 퍼드득 튀어 올랐다.

“마, 맞, 흐읏, 맞아요…!”

라핀이 두 번째 겪는 생사의 고통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핏기를 잃은 라핀과 반대로, 블란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성기를 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어린아이를 벗겨먹는 건 흥미 없었다. 머리도 다 안 큰 놈을 잡아먹어서 뭐 해. 아직 여물지도 않았는데. 물론, 그게 라핀이라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블란은 음험한 생각을 하다 지워냈다. 지금은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상상보다 더 맛있는 것이 눈앞에 차려져 있었다.

블란이 자위를 할 때처럼 라핀의 성기를 위아래로 훑어주자, 말랑말랑하기만 했던 성기가 조금씩 힘을 받고 곧추섰다. 라핀의 얼굴 역시 예쁜 성기 색처럼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흣….”

라핀은 성감에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블란이 맨손으로 제 성기를 훑어주는 감각은 이불 위로 할 때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뜨거운 손의 체온도, 야생에서 살아온 늑대의 거칠거칠한 손 표면도, 무자비한 악력도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혼자 자위할 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제가 무엇 하나 조절할 수 없다는 긴장감이 머리를 더 뜨겁게 만들었다.

라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블란이 남성기를 위아래로 훑다가 무슨 심술이 났는지 좀 전처럼 세게 쥐었다. 머리가 띵 하고 울릴 정도의 고통에 라핀이 엉덩이를 퍼드득 떨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앗! 아, 아파요…!”

“라핀, 소리 안 내면 재미없을 줄 알아.”

민감한 부분인 만큼 고통에도 약한 부위였다. 성기가 콱 쥐어 잡히니 눈물이 핑 돌았다. 라핀이 울먹거리며 비명을 지르자 블란이 얄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예쁘게 소리 내면 좋았잖아.”

“히끅….”

억울했다. 억지로 몰아붙여서 하는 행위면서 바라는 것은 좆도 많았다. 아까는 분명 서비스라고 하더니만, 역시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행위임이 틀림없었다.

라핀이 눈물이 맺힌 채로 딸꾹질까지 했으나, 블란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그는 여유롭게 라핀의 남성기를 손에 쥐고 가지고 놀았다.

“하, 아앙, 앗…, 응, 흐으, 으응….”

결국 라핀의 작고 붉은 입술에서 가늘고 부드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예 신음을 억누르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리를 내는 건 민망한지 끊길 듯 말 듯 가느다란 소리였다.

블란은 그 예쁜 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얼굴도 예쁘더니, 신음도 퍽 마음에 들었다. 더 크게 울어 보라고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으나 라핀에게는 이만치 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으므로 봐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다지 많이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라핀의 성기 끝에는 벌써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혔다. 음란한 토끼는 도발에만 강하지, 자극에는 약한 모양이었다.

블란은 정말 단순하게 대딸만 해줄 생각으로 라핀을 데리고 온 거였으나, 쭉 뻗은 다리도 예쁘고, 남성기도 예쁘고, 신음도 예쁘고… 안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 한 단계 더 높은 서비스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블란은 라핀의 곧게 뻗은 성기를 쥔 손을 더 빠르게 흔들면서도 귀두와 요도구를 농밀하게 자극해줬다. 성기를 쥔 블란의 팔목에 핏줄이 선명해질수록 라핀의 허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농염한 자극에 라핀의 마른 허벅다리가 완전히 벌어졌다. 할딱거리며 뜨거운 숨을 뱉던 라핀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하아, 흐, 잠, 으응, 너무, 머리가… 읏, 흐으으…!”

“너무, 머리가… 뭐?”

“으, 으으, 쌀 것 같… 흐으, 앙, 앗…!”

블란은 라핀이 무슨 소리를 하나 잠자코 기다렸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블란의 손 안에서 뜨끈한 액체가 터졌다. 말도 끝까지 못 잇고 사정한 것이었다.

귀엽긴…. 무슨 말을 하던 건지 궁금하긴 했으나, 별거 아닌 것 같았다. 블란은 뒷말을 묻기보다 사정의 여운에 헐떡거리는 라핀의 두 다리를 M자 모양으로 벌리게 했다.

블란은 사실 수컷과의 섹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라핀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근슬쩍 뒷구멍까지 만져줄 생각으로 손을 아래로 내렸을 때, 그는 문득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살결에 몸을 멈칫했다. 정신없이 할딱거리던 라핀의 몸이 굳은 것도 그와 동시였다.

“아, 자, 잠깐만요….”

라핀이 달뜬 숨을 흘리며 제 아랫도리를 만지고 있는 블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성감에 힘이 다 빠진 라핀의 작은 손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아…, 이래서.

이유를 깨달은 블란은 어둠 속에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방이 떠나가라 웃는 블란과 달리 라핀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가기만 했다. 모든 걸 들켰다는 생각에 사정의 여운이 언제 머리를 메웠냐는 듯 싹 사라졌다.

들킨 게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제게 여성기가 달려 있다는 걸 들킨 건 토끼 무리뿐이었다. 그 때문에 버림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늑대한테 들키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돌연변이를 먹었다가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며 버려주면 고맙겠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아 보였다. 게다가 블란이 이렇게 즐거워하니, 그런 이유로 즐거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라핀이 안절부절못하는 것과 달리, 블란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멈췄다. 분명 어둠 속인데도 라핀은 마주친 블란의 두 눈에 광기 어린 이채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아하…, 이게 달려 있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가렸던 거구나?”

뒷구멍을 만져줄 생각으로 손을 뻗은 거였는데 설마하니… 보지가 달려 있을 줄이야.

“불 끄면 못 볼 줄 알았나 보지? 단순한 토끼 같으니라고.”

블란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하며 라핀의 여성기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자지를 한껏 만져줘서 그런지 조붓하게 다물린 틈새 사이가 축축했다. 안은 완전히 보짓물로 흥건할 게 분명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블란과 달리 라핀은 패닉 그 자체였다.

“어떻게….”

라핀이 자그마하게 말을 뇌까렸다.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본 거지? 라핀의 두 눈에는 기껏해야 늑대의 커다란 덩치밖에 안 보이는데….

라핀이 벌벌 떨며 블란의 얼굴 쪽을 바라보자, 그가 같잖은 걸 본 것처럼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늑대가 야행성인 건 잊은 모양이야.”

“네…?”

야행성이라고? 그러고 보면 늑대들은 밤에 활동했다. 어제도 그랬다. 먹이를 구하러 조금 멀리 나갔다가, 밤이 늦어지고 그러다가 늑대에게 발견되어 이 꼴이 나고 만 거였다.

그래놓고 하루 만에 그 사실을 잊었다니. 라핀은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멍청한 것 같았다. 이런 도박 따위, 하지 않는 거였는데!

블란은 당장이라도 방울방울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라핀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헛고생을 한 라핀의 작은 머리통이 유달리 귀엽게 보였다.

저 작은 머리로 꾀를 쓸 생각을 했단 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걸 가지고 있으면서 못 먹게 하려고 아등바등….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블란은 아예 라핀을 펑펑 울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블란은 조붓하게 다물린 보짓살을 툭툭 건드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그런데… 이게 달려 있으면 수컷이야, 암컷이야. 왜 이런 게 달렸어? 음란해서 달린 거야?”

“아, 아니예요…, 흐윽, 으,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놀려줬을 뿐인데, 라핀의 두 눈망울에 맺혀 있던 투명한 눈물이 볼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블란은 우는 라핀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빠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우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이를 본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더불어 아랫도리도 빠듯해졌다. 생에 처음 알게 된 고약한 취향이었다.

이렇게 예쁜 토끼를 다른 토끼와 번식시키자고? 제가 제안한 거였지만 웃기는 소리였다. 이렇게 예쁜 보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딴 제안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텐데….

블란이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두 눈을 불안하게 굴리던 라핀이 침대 위를 뛰쳐나가려 했다.

깨나 빠른 속도였지만 늑대의 순발력만큼은 못 됐다. 블란은 사냥할 때처럼 재빠르게 가느다란 라핀의 발목을 쥐어 제 쪽으로 끌었다. 작은 몸이 한쪽 다리만 들린 채 침대로 질질 끌려왔다.

“라핀, 그 꼴로 어딜 나가려고.”

“흐으으, 놔주세요…!”

라핀이 언성을 높이며 붙잡힌 다리를 흔들었지만, 블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포식자에게 잡힌 토끼의 마지막 발악이구나, 하고 볼 뿐이었다.

썩 좋은 상황이 아니니 라핀이 도망가려는 것도 백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블란은 이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이거 누아가 알게 되면 큰일 날 텐데…. 정말 이대로 나갈 생각이야?”

“누, 누아…?”

“이 꼴로 나간다고 끝이 아니란 말이지.”

다른 늑대 얘기를 하자, 라핀의 두 눈이 벌벌 떨렸다. 블란은 동요한 기색을 놓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네 아래에 보지가 달렸는데, 누아가 가만히 두겠어?”

밖에는 누아가 있었다. 게다가 라핀은 갓 사정한 후였고, 하체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저런 꼴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따먹어 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사실 블란은 누아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긴 했지만 구멍 동서에는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누아는 수컷과 떡치는 걸 이해하지 못하니 라핀에게 흥미를 느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라핀이 순순히 제게 복종하게 하려고 일부러 두려움을 자극했다.

“아하. 혹시, 누아한테도 대주고 싶어서 그래?”

“그, 그게 아니라…. 놔주세요…!”

“네 비밀. 얌전히 다리 벌리면 누아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

블란의 제안에 라핀의 두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하지…? 발이 잡혀 있으니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블란은 나가 보려면 나가 보라는 듯이 발을 놓아주었다.

몸은 자유를 찾았으나, 얌전히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누아에게 제 비밀이 밝혀질 것이다.

이대로 늑대 소굴에서 도망치는 게 가능하다면 도망을 치는 게 맞겠지만 저보다 훨씬 빠른 늑대를 따돌리고 도망에 성공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리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도망이나 쳐보자는 건…. 지금으로서는 라핀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다 못해 캄캄해졌다. 두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고, 손바닥에는 땀이 절절 끓었다.

라핀이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자, 블란이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며 입을 열었다.

“나랑 누아, 둘이 네 보지에 같이 박으면… 볼만하겠는데.”

“가, 같이요…?”

“그래. 늑대한테는 발정기가 있거든. 만약 그게 동시에 와서 같이 박겠다고 나서면…, 네 뱃가죽 찢어질지도 모르겠다.”

발정기라는 말에 라핀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지 배를 자그마한 손으로 가리는 건 덤이었다.

귀엽긴. 블란은 가리고 있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다, 이내 웃지 않은 척 입꼬리를 굳히곤 침대 시트를 도닥였다.

“무서우면, 이리 와서 다리 벌려.”

“…흐으으.”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핀의 얼굴이 금방 서러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블란에게 다리를 벌리는 건 싫었다. 그렇지만… 늑대 성기 두 개를 한 번에 받다가 뱃가죽이 터져 죽고 싶진 않았다.

훌쩍거리며 머뭇거리는 라핀과 달리, 블란은 마음이 급했다. 라핀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는 모습이 보고 싶어 연신 여유로운 척을 했으나 아랫도리는 라핀의 보지를 본 그 순간부터 터질 듯이 발기해 있었다.

라핀이 차마 스스로 다리를 벌리지 못하자 참다못한 블란이 라핀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확 벌리게 했다. 이미 들킨 치부임에도 불구하고, 라핀은 급하게 생식기를 손으로 가리며 외쳤다.

“으앗…! 잠시만요!”

“하, 얼마나 기다리라고….”

자꾸만 시간을 끄는 라핀의 행동에 블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쁜 부위는 왜 또 손으로 가리는 거야. 저런다고 못 박을 줄 아는 건가? 쥐방울만 한 게….

블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핀을 쏘아보자, 라핀이 벌벌 떨며 물었다.

“정말로 넣으실 거예요…?”

“넣기만 하겠냐.”

블란이 헛웃음을 지었다. 블란은 라핀의 한쪽 발목을 놓아주고는 더듬더듬 배꼽 조금 아래를 검지로 가리켰다.

라핀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갔을 때, 블란은 얄궂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까지 쑤셔 넣고, 안쪽이 다 짓무를 때까지 박아줄 건데.”

“네…? 정말요…?”

블란의 말에 라핀의 얼굴이 세상을 잃은 것처럼 망연해졌다.

블란은 시시각각 변하는 라핀의 표정에 쿡쿡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 왜 이렇게 놀려주고 싶지?

아무리 제 성질이 못돼 처먹었다라도, 블란은 처음부터 라핀의 음부가 헐어 문드러질 때까지 박을 생각은 없었다. 들끓는 성욕으로는 그러고도 남겠지만, 이 자그마한 몸으로 늑대의 성기를 받는 건 처음일 테니까.

게다가 원래 맛있는 음식은 아껴 먹는 편이었다. 단번에 뼈와 살을 다 발라먹을 생각은 없었다. 맛있는 건 오랫동안 꼭꼭 씹어 먹으며 음미해야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한 블란은 누그러진 얼굴을 하고 라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쁘게 굴면 봐줄 수도 있고.”

블란은 나름 다정하게 말한 것이었으나, 어둠에 둘러싸여 시야가 차단되다시피 한 라핀에게는 다정함의 무게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즐거운 생각을 하던 블란은 문득 든 궁금증에 마른 배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섹스한 적은 있어?”

문득 든 호기심이었다. 여태까지는 ‘이 요망한 토끼!’ 하면서 문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뭇거뭇한 음모 없이 보송보송한 솜털만 난 것도 그렇고, 보지를 가리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는 걸 보면 남에게 보여줬을 것 같지 않았다. 앞이든 뒤든 모두.

블란의 노골적인 질문에 라핀의 귓가부터 얼굴까지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홍당무처럼 얼굴을 홧홧하게 붉힌 라핀은 울음을 억누르는 소리만 내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읏….”

“…….”

흠, 대답을 바라긴 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군. 블란은 왜인지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물었다.

“라핀, 내가 처음이야?”

“…네.”

섹스보다는 덜 노골적인 단어로 묻자, 라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아다라니. 이런 영광이 다 있네. 음란한 토끼의 첫 경험을 받아갈 수 있다니. 블란은 왠지 더 즐거워졌다.

블란은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라핀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그의 볼가에 눈물길이 나 있어서 그런지 혀끝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쉬이, 괜찮아. 내가 책임지고 뚫어줄 테니까….”

“흐, 으으, 흐윽….”

내벽에 좆길이 나서 수컷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비록 토끼의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늑대의 자지를 먹을 수 있도록 제대로 뚫어줄 생각이었다.

블란은 나름 달랜다고 한 말이었으나 라핀은 참던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눈물 줄기도 점점 굵어졌다.

블란은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라핀이 왜 더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라핀을 더 어르고 달래줄 만큼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블란은 어정쩡하게 벌어져 있는 라핀의 두 다리를 개구리처럼 활짝 벌리게 한 다음, 손을 아래로 내려 통통한 보짓살을 만졌다.

틈새가 꽉 다물려 있었지만, 다물린 도끼 자국에는 물기가 있었다. 단순히 보지의 형태만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애액까지 흘리다니…. 블란은 그곳을 섬세하게 매만지며 감탄을 터트렸다.

“아까도 만졌지만…, 정말 신기하네.”

“으, 흐, 아….”

한쪽 손으로 라핀의 허벅다리를 누르고 있어서 그런지, 라핀의 몸이 간헐적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꾸 울어대서 떨리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몰아치는 성감에 몸을 떠는 거였다. 블란의 손끝이 점점 축축해졌다. 음부에서 손을 떼어내니 투명한 은실이 길게 이어질 정도였다.

“아직 제대로 만져준 것도 아닌데, 질질 흘리기는….”

“읏….”

성 경험도 없는 주제에 음란 토끼 같으니라고. 블란이 조롱기 어린 목소리로 놀리자 라핀이 억울하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토끼가 저리 억울해해도 별수 없었다. 이런 보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저를 속이려고 한 대가를 철저하게 받아낼 생각이었다.

블란은 라핀의 다물린 보짓살을 벌리고. 분홍색 살결을 검지로 매만졌다. 이곳은 바깥보다 훨씬 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흥건하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이곳에 제 성기를 쑤셔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이라도 삽입하고 따듯한 내벽에 감싸이고 싶었지만, 정말 이대로 삽입하면 토끼의 아랫도리가 엉망이 될 걸 알았다. 안쪽을 부드럽게 풀어줘야 했다.

여성기에는 클리토리스가 있어서 이쪽을 자극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감을 느낀다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다. 블란이 그것을 떠올리며 톡 튀어나온 돌기에 손을 대고 원을 그리듯 문질러주자, 반쯤 누워 있던 라핀의 몸이 펄쩍 뛰었다.

“아, 흐흑… 으응!”

겉보기만 보지가 달려 있는 줄 알았는데 민감한 것도 똑같네.

입꼬리를 씩 올린 블란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돌기를 굴려댔다. 그러자 라핀이 좀 전보다 더 헐떡거리며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자지를 만져줄 때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아, 하지, 흣, 너무… 아응, 아앗…!”

블란이 펄떡펄떡 뛰는 라핀의 다리를 안정적으로 고정하고 끊임없이 자극해주자, 비명 같은 신음이 이어졌다.

라핀이 제발 멈춰 달라며 블란의 손을 애처롭게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블란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클리토리스를 끊임없이 비벼주는 손에 끝내 라핀의 허리가 활처럼 튀어 올랐다. 둔부가 꽉 조이는 듯하다 푸르르 떨렸다.

“흐아, 응…!”

라핀이 입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블란의 손이 완전히 보짓물로 축축해졌다.

“벌써 쌌네.”

자지를 만져줄 때보다, 보지를 자극해주는 쪽이 사정이 훨씬 더 빨랐다.

예쁘긴. 블란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었으나 라핀은 좋지 않은 쪽으로 받아들였는지 수치심으로 얼굴에 화끈화끈 열을 올렸다.

어떤 의도로 받아들였든 블란은 지금 제 사정이 급했다. 블란은 클리토리스를 만지던 검지를 움직여 보지 안쪽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러던 중, 보지 안쪽에 좁은 틈새가 있는 걸 발견하고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구 안으로 검지의 마디 하나가 쑥 들어가자 눈꺼풀을 파르르 떨던 라핀이 눈을 번쩍 떴다.

“아, 하으읏, 아읏, 거, 거기는, 아, 안 돼요…!”

라핀이 여기는 절대 안 된다며, 블란의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바짝 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쌍하고 슬프고… 온갖 감정이 다 느껴지는 얼굴이었으나, 블란은 그렇다고 행위를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기를 들쑤시기 위해 클리토리스도 정성스레 만져준 거였으니까.

굴곡진 손가락으로 안을 들쑤셔주고 좆길을 만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좁아도 너무 좁았다. 한 번의 사정으로 축축하다고 한들 원체 몸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손가락도 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이래서야 늑대를 받을 수 있을지…. 쯧, 혀를 찬 블란은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불쑥 빼냈다.

“흐, 으으앙…!”

안을 빠듯하게 채우던 손가락이 빠르게 빠져나가며 내벽을 확 긁어댔다. 라핀의 입에서 간드러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예쁘장한 신음에 블란은 다시금 안을 채워주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치솟았지만, 백날 손가락으로 깔짝대고 있을 순 없었다.

블란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 라핀의 보지를 눈앞에 뒀다. 몰랐는데 코앞에 두고 보니 야한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보지를 관찰하자, 라핀이 숨결을 의식하는지 몸이 움찔거리며 보지 구멍을 벌름거렸다.

쑤셔달라고 조르는 건가? 얼른 쑤셔주려면 안을 축축하게 적셔줘야지.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블란은 입술을 붉은 혀로 할짝거리다, 단숨에 보짓살을 입에 물었다.

“으흣, 이게 무슨, 앗, 하지, 마요…!”

예상치도 못한 행위에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블란의 머리채를 콱 쥐어 잡았다.

그렇지만 늘 그랬듯 라핀의 반항은 소용이 없었다. 블란의 은색 머리털을 죄다 뜯어버릴 듯 쥐어 잡아도 머리는 뜯겨나가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블란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것처럼 넓적하고 질척한 혀로 보지를 쿡쿡 찌르더니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더러운 부위인데, 왜 빠는 거야! 라핀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성욕을 이기지 못했다. 개처럼 할짝거리고 빨아 당기는 감각에 클리토리스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아, 아아앗! 가, 간지러, 흐, 으응, 앗…!”

머리를 메우는 쾌감에 머리채를 쥐어뜯던 손아귀의 힘이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토끼는 워낙 쾌감에 약했다. 그런데 벌써 사정을 두 번이나 해 쾌감이 무르익어 있기까지 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라핀은 몸을 바르르 떨다 못해 다시금 음부를 축축하게 물들였다. 절정에 다다른 음부에서는 정액도 아닌 투명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블란은 음부를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물길이 멈출 때까지 싹싹 애액을 받아먹고 나서야, 턱에 묻은 애액을 닦으며 고개를 떼어냈다.

“하악, 하아….”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네….”

블란이 라핀을 내려다보자 그가 혼몽하게 눈을 뜨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벌써 세 번이나 사정했으니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됐지만, 블란은 그가 기절하기 전에 얼른 안을 채워줘야겠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블란이 다시금 보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아까는 빠듯했던 입구가 녹진하게 풀려 흐물거리고 있었다.

블란이 검지와 중지를 비좁은 구멍 안에 쑤셔 넣자, 라핀의 몸이 퍼드득 튀어 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슨 행위를 해도 모를 것처럼 헐떡거리더니만 내벽은 손가락을 격렬하게 반기며 오물오물 먹어치웠다.

“우욱, 아, 잠깐…. 흐으으, 으으….”

바싹 조이는 아래와 달리, 라핀은 힘 하나 쓰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앙칼지게 음부를 가리는 것마저도 이제는 힘이 다 빠져서 하지 못했다. 뭐, 블란은 이런들 저런들 좋았다. 어서 라핀의 안을 탐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안쪽을 이리저리 쑤시던 블란은, 내벽이 녹진하게 잘 풀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되어서야 안에서 굽이진 손가락을 빼냈다.

“하아…, 이제 넣는다.”

블란은 보짓물에 축축해진 손가락을 대충 라핀의 허벅다리에 닦고, 급한 손길로 허리춤을 풀었다. 여며져 있던 허리춤을 풀자 바지와 속옷 아래 억눌러져 있던 블란의 성기가 구렁이처럼 힘차게 튀어나왔다.

단단한 귀두가 라핀의 보지에 문질러졌을 때쯤에야 라핀의 텅 빈 검은 눈동자에 정신이 돌아왔다. 힘없이 블란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핀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하반신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블란의 중심부를 본 라핀의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허업…!”

과장한 감이 있었지만, 블란의 성기는 라핀의 팔뚝만 했다. 어떻게 저런 사이즈의 성기를 달고 다니는지 신기할 정도로 컸다.

모양도 라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솜털만 나 있는 라핀의 중심부와 달리 블란에게는 음모가 무성하게 나 있었고, 양물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이 아니라 성기인데도 ‘한 성깔 하게 생겼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핏줄이 선명하게 울룩불룩 도드라져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라핀은 인체의 신비에 단순하게 놀랄 겨를이 없었다. 저, 저런 걸 내 안에 넣겠다는 거지? 블란이 아까 제 배를 만지며 ‘여기까지 성기를 집어넣을 거야.’라고 했던 게 과장이 아닌 것 같아 무서움이 배로 커졌다.

라핀은 허겁지겁 보지를 조이며 도리질을 쳤다.

“이, 이건 모, 못 넣어요…!”

“뭐? 못 넣기는. 손가락도 오물오물 잘 먹었잖아?”

“그, 그건 소, 손가락이고요! 이건 너무 크잖아요! 찌, 찢어진다고요!”

“안 찢어지라고 보빨도 해줬잖아.”

블란은 절대로 찢어지지 않을 거라 단언했지만, 라핀이 보기엔 귀두만 넣어도 음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저렇게 커다란 걸 어떻게 받아!

늑대면 늑대끼리 짝짓기를 할 것이지, 왜 엄한 토끼를 붙잡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저와 무리를 이루던 토끼도 제가 보지가 달렸다는 걸 알고는 불길하다고만 했지 이렇게 달려든 건 아무도 없었다.

빌어먹을, 왜 이상한 취향을 가진 늑대한테 잡혀서는! 라핀이 설득하기도 포기하고 두 눈을 질끈 감자, 딱딱한 귀두가 보짓살을 벌리고 서서히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성껏 보지를 빨아줘서 그런 걸까, 아니면 블란이 막무가내로 허릿심을 주고 밀어 넣어서 그런 걸까. 손가락 하나도 빠듯하게 받아들이던 좁은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면서 기둥까지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으, 흐으읏, 아, 아으윽…! 아, 아파요… 읏, 아!”

물론, 보지가 자지를 맛있게 먹어치운다는 건 블란의 관점이었다. 흉측한 기둥을 아랫도리로 받는 라핀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불기둥을 받는 느낌이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음부는 찢어질 듯 아팠고, 사정의 여운으로 멍하던 머리가 연신 찌릿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랫배는 성욕이 뭉친 듯 묵직한 느낌이었다. 지나치게 난잡했다.

“후우….”

그러는 새에도 블란의 성기는 점점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쩌저적, 손가락과 혀가 닿지 않았던 깊은 곳까지 성기가 들이닥쳤다.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에도 충분히 컸는데, 몸으로 받아들이니 정말 끝도 없이 성기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라핀은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에 좀처럼 몸에 힘을 풀지 못했다.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질 정도로 몸에 힘을 바싹 줬다.

그렇지만 블란은 허릿심을 바짝 주고, 제 고환이 라핀의 볼기짝에 닿을 때까지 삽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고환이 엉덩이에 닿도록 전부 성기를 넣으니 라핀의 작은 꼬리가 그의 품에 완전히 뭉개졌다. 라핀이 블란의 품 안에서 숨을 들이켰다.

“허억…!”

누아에게 사냥당할 때, 제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 넣을 때만큼이나 아팠다. 곧 죽을 것 같았다.

라핀의 눈은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라핀이 숨을 제대로 못 쉬고 꺽꺽거리자, 블란이 쯧, 혀를 차며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 비좁은 내벽은 자지가 빠져나가는 만큼 허겁지겁 길을 막아섰다.

블란은 라핀의 다리를 고정했던 손을 떼어내고, 부드럽게 라핀의 뺨을 감쌌다.

“후, 라핀, 정신 차려. 눈도 제대로 뜨고.”

“으읏, 흐으으, 아, 아파요…, 찌, 찢어질 거야…. 흑, 으으….”

라핀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애원을 하는 건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존댓말을 쓰다 반말을 쓰다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토끼가 원체 겁이 많은 종족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블란은 진도가 너무 느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다고 느꼈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란은 성심껏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달랬다.

“괜찮다니까. 하나도 안 찢어졌어. 후우, 이렇게… 꽉꽉, 조이잖아. 하아…!”

“아으응! 만지지, 읏…! 흐아앗!”

블란이 말하면서 클리토리스를 만져주니 보지가 자지를 꽉꽉 씹어댔다.

라핀은 몸을 벌벌 경련하면서 허리를 뒤로 젖혔다. 클리토리스를 만져주던 손에도, 발딱 서 있던 자지 끝에서도 애액이 터져 나오는 걸 보니 또 사정한 모양이었다.

하하, 이 음란한 토끼는 도대체 몇 번을 사정하는 거야. 아프다는 건 죄다 거짓말 아니야?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블란은 흐뭇한 얼굴로 그 부위를 바라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찢어져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후우, 다리, 더 벌려.”

계속 다리를 벌리게 눌러줬더니, 라핀의 허벅다리 안쪽이 손자국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손으로 고정하지 않으면 자꾸만 오므리려드니…. 블란은 잠깐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들어 라핀을 인형처럼 안아들었다.

“아흑…!”

몸이 위로 올라가면서 라핀의 안을 가득 메웠던 성기가 빠른 속도로 반쯤 빠져나갔다.

내벽을 날카롭게 할퀴며 빠져나가는 성기에 라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등허리부터 꼬리뼈까지 전기가 돈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라핀이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자, 블란은 라핀의 등을 제 가슴에 기대게 하고 내려놓았다. 그 탓에 귀두만 간신히 걸칠 정도로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금 안을 콱 메우고 들어왔다.

“아아윽!”

블란은 그저 라핀의 허벅다리를 제 다리에 걸치게 하려고 자세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탓에 몸 안에 품은 자지가 돌아가고, 이곳저곳 예민한 곳을 자극당하는 라핀에게는 고문과도 다름없었다.

마치 안을 가득 메운 블란의 성기가 쇠창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안을 비집고 들어오자 라핀은 그대로 사정하며 종이 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지나친 자극에 기절한 것이었다.

라핀이 새된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기절했으나, 라핀의 동그란 뒤통수만 바라보던 블란은 그 사정을 몰랐다. 그저 내벽의 조임이 조금 풀렸다고 좋아할 뿐이었다.

“하아…, 씹.”

블란은 힘이 풀린 보지에 마음껏 추삽질을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말만 안쪽이 짓무를 때까지 박아줄 거라고 했지, 실제로는 조금씩 야금야금 음미할 생각이었는데…. 정작 맛을 보고 나니 절제가 되지 않았다.

토끼의 안쪽은 끝내주게 좋았다. 자지를 끊어먹을 듯이 오물거리는 보지가 너무 맛있었다.

블란은 손을 뻗어, 상박을 바짝 끌어안고 작은 젖꼭지를 손으로 매만졌다. 암컷이 아니라서 손을 비집고 나오는 탄력적인 가슴살은 없었다. 그렇지만 하얀 가슴에 톡 도드라지게 서 있는 유두는 그 어떤 가슴보다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아, 라핀….”

“흐으, 으으….”

이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섹스가 처음이라니. 무슨 연유로 보지가 달리게 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제 보니 라핀은 기절해 있었다.

라핀이 까무룩 기절하면서 보지에 힘도 풀렸는데, 입에서는 옅은 신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자지 역시 빳빳하게 곧추서 있는 상태였다.

“하, 나참…. 이걸 깨울 수도 없고.”

라핀이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더 좋긴 했지만, 제가 무리하게 나오긴 했으니 봐주기로 했다. 게다가 기절했더라도 예쁜 신음을 흘리고 있으니까.

블란은 기절한 라핀의 밋밋한 가슴을 만지고 귓가를 물어뜯듯 하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은 어제 라핀이 씻고 나온 걸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식욕인 줄 알았는데, 라핀이 작은 손으로 제 좆을 만지게 했을 때 그게 성욕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여성기와 남성기를 동시에 가진 토끼라니. 환상 속의 동물도 아니고, 저를 유혹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토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제 취향이었다.

늑대는 습성상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기 때문에 한번 반려자로 삼으면 눈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잠깐의 유흥으로 남색을 해보려던 거였다. 놈은 수컷에다가 토끼이기까지 했으니, 잠깐은 가지고 놀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으로.

그렇지만 이제 블란의 눈에 라핀은 평범한 수토끼가 아니었다. 제 짝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토끼를 완전한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사랑은 둘째 치고, 가장 먼저 누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라핀을 받아와야겠지만 거기부터 골치가 아팠다.

순순히 내놓으라고 해서 제게 토끼를 넘길 녀석도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놈에게 라핀의 비밀을 알리기는 싫었다.

블란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잠든 라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일단은 라핀이 제게 완전히 의지할 때까지 몰아넣어야 하니까…. 당분간은 이 상황을 유지해야 할 듯했다.

***

그날은 하늘이 쾌청하고 맑았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 기분이 좋았다. 포식자도 나타나지 않아서 드넓은 풀밭을 뛰놀며 놀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라 식량도 많아서 풀을 뜯어먹고 뒹굴며 하루를 마음껏 즐겼다. 다른 토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가 라핀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었는데,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걸까.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까 싶어 라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것은 인간이었다.

인적 하나 닿지 않는 아주 깊은 산속이었기에 인간이라는 종족을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무서운 것도 몰랐는데, 주변에 있던 토끼들은 라핀을 버리고 재빠르게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라핀은 인간에게 잡혀 온갖 실험을 당했고 아랫도리에 이런 게 생겨버렸다. 무슨 연유로 수컷에게 암컷 생식기를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의 뜻이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던 위험한 실험에서 살아남았다. 생존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라핀은 인간에게 잡혔던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제게는 저주와도 같은 게 제 몸에 달린 이후 가족, 친구… 모든 것을 잃었다. 혹독한 겨울에 혼자 남게 됐고, 혼자서 먹이를 구하려다가 늑대에게 잡히기까지 했다.

이번엔 정말 죽는 걸까. 죽으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끙끙거리며 앓고 있는 라핀의 몸을 누군가가 거세게 흔들었다. 악몽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끙끙대고 있을 때, 무언가가 팔을 확 끌어당기면서 심연에서 라핀을 끌어올렸다.

“헉…!”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번쩍 뜨니, 누아가 보였다.

누아는 라핀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어쩐 건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야, 너 왜 여기서 자.”

“네…?”

일어나자마자 누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딘데? 라핀이 주변을 둘러보자, 정신을 잃기 전에 들어왔던 블란의 방이라는 걸 깨달았다. 옆자리에 블란이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블란과 몸을 겹치다 잠들었지…! 악몽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라핀이 급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다행히 깨끗하게 씻겨진 몸과 갈아입혀진 새 옷이 보였다.

블란이 알몸으로 내팽개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쯤, 누아가 쥐고 있던 라핀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넌 내 거잖아. 저놈 방에서 자면 안 되지.”

“아, 앗…!”

누아가 무자비하게 힘으로 끌어당기자, 라핀의 몸이 종이 쪼가리처럼 힘없이 끌려갔다.

누아는 라핀의 팔을 한손으로 꽉 쥐어 잡은 채 짐짝처럼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의 방이었다.

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라핀을 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저를 깨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말 없는 걸 보면 그저 제 먹이가 남의 방에서 자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잠…? 그러고 보면 좀 이상했다. 블란의 말로는 늑대가 야행성이라고 했고, 그 말대로 지금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누아는 어제 함께 잠들었다. 왜지? 낮잠 같은 거였나?

라핀이 작은 머리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아가 뜬금없이 무언가를 라핀에게 내밀었다.

“먹어.”

“네…?”

뭘 먹으라는 거지? 라핀이 시선을 올리니, 누아의 손에 빛깔 좋은 당근이 들려 있었다.

온종일 굶기도 했고 한겨울이라 제대로 된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 먹은 참이었다. 그런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당근이라니!

뱃속이 꼬르륵 요동쳤으나, 라핀은 쉽사리 당근을 받지 못했다. 갑자기 이걸 왜 제게 주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핀이 머뭇거리며 누아를 올려다보자, 그가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당근을 흔들며 말했다.

“굶길 순 없잖아.”

“…….”

굶길 순 없다니. 무슨 말이지?

잠깐 생각하던 라핀은 오전에 블란과 누아가 하던 대화를 떠올렸다. 근래 토끼가 희귀해졌으니 새끼를 치게 하자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그 제안에 누아는 별로 협조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만, 그 의견대로라면 저를 살려둬야 했다. 죽는 방법에는 물려 죽는 것 외에도 굶어 죽는 것도 있었으니 목숨은 살려두려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달갑진 않았지만, 라핀은 감사 인사를 하고 당근을 받았다. 그리고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는 질 좋은 당근을 냉큼 한입 물었다.

아삭!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난 후,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속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듯했다. 이렇게 맛있는 당근이 있었단 말이야?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달았다. 너무 맛있었다.

당근을 워낙 오랜만에 먹는 거기도 하고, 누아가 최상품을 구해 오기도 했고. 또 요 근래 음식을 구하지 못해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늑대에게 잡힌 참이었으니, 다른 때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질 만했다.

라핀이 두 손으로 당근을 쥔 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문득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누아가 바로 제 앞에 서서 제 식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뭐 저렇게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누아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블란이랑 뭐 한 거야?”

“…네?”

“아니…, 걔가 너를 데려갔잖아. 그런데 왜 네가 그 녀석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건가 싶어서.”

“…….”

자고 있던 게 아니라 기절했던 건데….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토끼의 몸으로 늑대에게 덮쳐졌다는 것도, 제 아래에 이상한 게 달렸다는 것도 전부 다 들키기 싫은 치부였다.

라핀이 마땅한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리자 누아가 눈은 가늘게 뜨고 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에 라핀이 몸을 움찔 떨었으나, 그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목덜미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네 몸에 블란 냄새가 한껏 묻어 있는데…, 걔가 진짜 너한테 손댄 건 아니지?”

“…….”

꿀꺽. 라핀은 목울대를 울렁이며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누아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블란이 제게 손을 댔다고 하면 다시는 손대지 못하게 수를 써줄 것만 같았다. 이 늑대는 저를 ‘내 거’라고 칭할 정도로 소유욕이 많아 보였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대답하면 블란이 제 아랫도리에 여성기가 달려 있다는 걸 낱낱이 까발릴 것 같았다. 그걸 비밀로 해주겠다는 이유로 다리를 벌리게 했던 거니까.

블란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유달리 제 여성기에 광기 어린 반응을 보였던 거니, 누아는 알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제 아랫도리에 여성기가 달렸다는 걸 안 이들은 전부 저를 버렸었다. 전부 안 좋은 일만 일어났다. 그러니….

“그,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냥 얘기하다가 잠들었는데…. 체취가 묻은 게 아닐까요?”

어떻게든 숨겨야겠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라핀이 시선을 은근슬쩍 회피하며 말을 떠듬거리자, 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특유의 의심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럼 옷은 왜 갈아입은 건데?”

“브, 블란 님이 제 옷에 물을 흘려서. 그, 그래서 그랬던 거지… 정말로 별일 없었어요. 믿어 주세요….”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라핀이 벌벌 떠는 손으로 누아의 옷깃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하자 누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거짓말임을 알아챈 눈치였다.

그렇지만 의외로, 누아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빌빌 기면서 믿어 달라고까지 해.”

누아는 귀찮다는 듯이 라핀이 절박하게 쥐어 잡고 있던 손을 떨쳐버렸다.

머쓱하게 떨어져나간 라핀이 다시 당근을 들고 입에 물자, 누아가 침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음에 블란이 건드리면 말해.”

“네…?”

의외의 말에 라핀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누아가 다정스레 라핀의 입가에 묻은 당근 조각을 떼어 주며 말했다.

“나는 내 거가 다른 놈 손 타는 게 싫은데…. 블란 새끼가 널 예쁘게 보는 것 같아서 좆같거든.”

“…….”

“걔가 먹잇감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인데. 왜일까?”

“…….”

라핀이 코앞에 있는 누아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였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 때문일까, 왜인지 저와 블란 사이에 있던 일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블란과 관계를 맺었다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손 타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니… 자신을 그대로 찢어발겨 죽여 버리는 건 아닐까?

블란과 맺었던 성관계도 끔찍했지만, 제 목덜미를 꿰뚫던 사나운 송곳니를 다시 상기하면 더 끔찍했다. 그렇게 아팠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누아가 마음먹고 저를 찢어발겨 죽인다면? 생각만 해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라핀은 당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쥐며, 어떻게든 블란과 있었던 일을 숨겨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렇게 가시방석에서의 식사를 끝내는데, 누아가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늑대라고 별로 하는 일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라핀에게 누아가 옆자리를 도닥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

“네…?”

“안게, 이리 오라고.”

라핀은 일순간 제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 품에 안을 거니까 옆자리에 누우라는 건가?

밤에도 안고 자긴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라핀은 자기도 모르게 궁둥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누아와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왜, 왜 안아야… 해요?”

“내가 자는 사이에 도망치면 어떡해. 수갑도 아직 못 구해 왔는데 손수 붙잡고 자야지.”

잔다고?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의아해졌다. 라핀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대낮인데… 또 잠을 자요?”

“밤에는 너만 잤지, 나는 안 잤어.”

“예…?”

분명 같이 잤던 것 같은데? 라핀의 두 눈에 의아함이 가득 담기자, 누아가 피곤함에 눈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몰랐나 본데, 늑대는 야행성이야. 너처럼 대낮에 뛰어놀지 않는다고.”

“…….”

“알았으면 빨리 와. 졸려 죽겠으니까.”

“예에, 예에….”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핀은 주섬주섬 침대 위를 기어가 누아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누아가 어젯밤 그랬던 것처럼 라핀의 가는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바짝 달라붙은 몸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도 들려왔다.

정말 낮잠을 자려는 걸까? 그렇게 자고 또 잠이 오나? 라핀은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누아 님.”

“뭐.”

자려는데 말을 걸어서 그런 걸까, 누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한껏 실려 있었다.

서늘한 반응에 라핀은 몸을 움찔 떨면서도, 꿋꿋하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이었다.

“어젯밤에는… 안 주무셨던 거예요?”

“어.”

라핀이 혼날까 망설이며 물은 것과 반대로, 대답은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졸리니까 더 묻지 말라는 뉘앙스가 풀풀 풍겼지만, 라핀의 궁금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간밤에는, 왜 아, 안고 계셨어요?”

“너는 자야 되잖아. 자는 놈 혼자 두기도 좀 그렇고. 그냥 누워 있었지.”

“…….”

혹여 도망갈까 봐 차마 두고 갈 수도 없었다는 건가? 겨우 토끼 한 마리 잡아먹자고 밤낮동안 아무것도 못 하면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제 질문 그만해. 졸려….”

라핀의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누아가 라핀의 어깻죽지에 머리를 기대며 웅얼거렸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에 라핀은 기절하기 전 제 몸을 짓누르던 블란의 몸을 떠올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지만, 제 뒤에 있는 것은 누아라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니 조금 가라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목덜미에 구멍을 뚫은 늑대가 누아라서 그가 더 무서웠는데, 하루 만에 블란이 훨씬 더 무서운 존재로 떠올랐다. 함께 자는 게 블란이 아니라 누아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사실은 둘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의지할 이가 하나도 없으니, 누아가 블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늑대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서글픈 일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