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시작과 끝 그리고 시작(완결)
“수업이 너무 지루해. 진우 넌 어때?”
“뭐가?”
“야, 김진우 넌 수업도 안 듣고, 내 말도 안 듣고,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정은채는 진우의 유일한 여자친구, 아니 정확히는 남녀를 포함해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채에게 진우는 수많은 친구들, 아니 그저 지인들 중에 하나일 뿐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학교에서 인기 탑인 정은채는 수업 시간에 종종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진우 옆이나 뒤에 자리를 잡고는 했다.
은채가 진우 옆에 앉는 것인지, 뒤쪽 창가에 앉는 것인지는 불분명한 일이었다. 아무튼, 완벽한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 진우가 은채랑 친하게 지내는 것을 하슬라 대학 경영학과 내에서는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어,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생각은 무슨, 너 또 공상을 하고 있던 거지?”
“아냐, 공상을 하기는 뭘 해, 야, 수업 끝날 것 같은데.”
“정말? 휴우, 장경민 교수님 수업은 지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
다행히 정은채가 미쳐버리기 전에, 장경민 교수의 수업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나고 말았다. 수업이 지겨웠던 건 은채만이 아니었는지, 하품을 하는 녀석들도 있고 좀비 같은 얼굴로 다들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진우 너는 수업 끝나고 어디 갈 거야?”
“어디 가긴? 도서관에 일하러 가야지. 나, 근로 장학생이잖아.”
“재미없게, 너는 맨날 알바만 하고 노는 건 언제 놀 꺼야?”
정은채는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는 진우의 뒤를 계속 쫓아오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 은채와 진우를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정은채랑 같이 걷는 쟤는 누구야?”
“몰라,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잘은 모르겠네.”
“뭐지? 그래도 우리 학교 퀸가인 정은채랑 저렇게 붙어 다니는 거 보면, 뭐, 돈이라도 많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생긴 건 평범한데, 정은채가 졸졸 따라다니고 있잖아.”
진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서울에서 다른 대학을 다니다가, 하슬라 대학에 편입한 편입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고비로 오게 될 줄을 1년 전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 남고비의 오아시스 연합에 대해서 진우가 알고 있던 건, 지금부터 120년쯤 전에, 이진석이라는 사업가가 처음 도시를 개척했고,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20년 전에, 몽골로부터 분리 독립한 신생 국가라는 정도, 그리고 대부분의 주민이 한국출신으로 한국에서는 한민족 연방을 구성하려고 애를 쓰지만, 소득수준이 더 높은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은 대한민국에서 주도하는 한민족 연방에 시큰둥한 반응이라는 정도였다.
한국에서 듣기로는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 사람들은 한국계지만, 사막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히 독립적인 성격이 아주 강해서 같은 한민족인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약간 껄끄러운 점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특별히 거칠 거나 고집이 세다는 느낌은 없었다. 약간 억양이 서울과는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북한말과도 다르고, 서울의 표준어와도 다르고, 한반도 각 지방의 사투리와도 다른, 남고비 특유의 억양이 조금 독특하기는 했다.
하긴,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이주한 지 백 년 이상이 지났으니, 언어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도망치듯 진우의 가족은 남고비의 하백시의 농장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오아시스 농업으로 유명한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이었지만, 최근에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항공이나 자동차, IT, 바이오산업들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도시의 소득수준도 대한민국을 크게 상회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오아시스 도시들이 발전하면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근간이 되는 농업에는 종사자 수가 줄어들게 되어, 부족한 인력을 외부에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마침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진우네 가족은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 정부의 주선으로 남부의 물의 도시 하백의 채소 농장에서 집과 생활비를 보조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농장에서 아버지가 장기간 근무하는 조건으로, 진우도 이주민 특별 장학 혜택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받는 장학생 자격으로 서울의 대학에서 하슬라 대학 경영학과로 편입할 수 있었다.
학비와 기숙사 비용은 국가 보조를 받고 있지만, 그 외에도 생활비는 필요했다. 옷도 사고 필요한 용돈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진우는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추가로 도서관의 근로 장학생 신청을 해서 하슬라 도서관에서 수업 중간중간 쉬는 시간과, 강의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아르바이트 근무를 하고 있었다.
***
하슬라 대학 중앙 도서관.
하슬라 대학 중앙 도서관은 전유리 도서관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하슬라에 시에는 유명한 도서관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시립 도서관인 하슬라 중앙 도서관이고, 또 하나는 하슬라 대학의 중앙 도서관, 일명 하슬라 대학 도서관이라고도 하고, 이 도서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전유리 교수의 이름을 따서, 전유리 도서관이라고도 불린다.
초기에는 하슬라 대학 도서관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전유리 관장의 노력으로 도서관의 장서 수가 계속 늘어나서, 최근에는 1억 권 이상의 책과 디지털 자료를 보유한 남고비 최대의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하슬라 대학 도서관보다 더 일찍 개관해서 초기에는 훨씬 규모가 컸던, 하슬라 시립 중앙 도서관이 장서 3천만 권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인 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봐도, 2억 권의 장서를 보유한 영국 국립 도서관과, 1억 5천만 권을 보유한 미국 의회 도서관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1억 권 이상의 책을 보유한 도서관으로 세계 3위 수준의 책을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이었다.
그러다보니, 소위 말하는 책에 곰팡이가 나지 않게 한 번씩만 열어주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하슬라 대학 도서관에는 자동화된 장서 관리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천 명이 넘는 정규 직원과, 5백 명 이상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책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진우도 그런 5백 명의 근로 장학생 중의 한 명인 셈이었다.
보통 진우가 도서관에서 하는 일들은 대출했던 책들을 다시 분류해서 제자리에 정리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름의 분류 원칙에 따라, 책들을 원래 있던 서가에 정확하게 다시 원상 복귀시켜 놓는 일로, 대체로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종일 반복되는 일들은 상당히 지루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활동적인 학생들은 도서관 아르바이트에 실증을 느끼고 금세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진우는 도서관의 분위기랄까? 책들이 많이 있는 서가들을 수레를 끌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제법 취향에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약간 내성적인 성격의 진우에게는 모두들 목소리를 죽이고, 대화를 멈추고, 혼자서 책을 읽으며 사색에 빠지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편하게 느껴진 것이다.
사람들과 하는 대화는 어딘지 번잡스럽고, 진우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모두들 진우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진우를 평가하려고 하는 것도 진우로서는 편치 않은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사를 말하기도 싫었고,
진우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진우가 누구인지? 외모는 어떤지? 집안은 어떤지? 성적은 어떤지? 뭘 잘하는지? 그런 것들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반응은 열등감이고 자격지심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실존하는 존재로, 그에게는 이름이 있고, 외모라고 할 수 있는 신체도 있고, 가족들도 있으며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상황 같은 모든 현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진우에게서 외모나, 집안, 경제력, 학벌 같은 외적인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오직 순수하게 진우라는 인간의 생각만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진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대신, 진우는 인간관계가 아닌, 도서관의 책들 속에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한 셈이었다.
책들은, 진우가 누구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진우가 책을 열면 책들은 진우와 격의 없는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떨 때는 친한 친구처럼, 삶의 즐거움을 말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오래된 역사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다. 다소 난해한 과학지식을 설명해서 진우를 난감하게 하기도 하고,
아주 급진적인 사상을 설교하는 녀석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급하게 책을 덮기도 했다. 어쨌든 도서관은 현실과는 또 다른 환상의 공간이었고, 또 하슬라 대학 도서관의 엄청난 규모와 장서들로 인해서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일은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도 들고는 했다.
워낙 크고 복잡한 도서관이라, 주말 내내 이곳에서 책을 정리해도 항상 정리할 책이 남아 있었다. 보통의 아르바이트생들은 그렇게 줄어들지 않는 정리할 책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수에게는 책을 만지고 옮기고 수레로 나르고, 서가에 다시 정리하며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일이 나름의 즐거움이며 취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틈틈이 책들을 열어보는 것도 진우의 은밀한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책을 열어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과는 좀 다른 개념으로 진우는 자신이 하는 일을 책을 열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책장을 펼쳐서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가끔 특이한 제목이나, 아니면 표지가 흥미를 끄는 경우, 아니면, 보통 이상으로 두꺼운 책이거나 유난히 얇은 책들, 아니면 너무 평범한 제목의 책들이 그런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는 했는데,
그렇게 진우의 관심을 끄는 책들이 나타나면, 진우는 어김없이 책들을 열어보고는 했다. 책을 처음부터 진지하게 읽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책을 펼쳐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책을 펼치고는 아무렇게나 순서도 상관하지 않고, 글자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문장이 이루는 것을 바라보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문장들이 뭔가 진우에게 말을 걸어오는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책들은 진우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하슬라 대학의 경영학과 학생들이 진우에게 관심이 없고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진우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마치, 정은채가 강의실 창가에서 멍하니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진우에게 처음 말을 걸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진우는 인기 없는 아웃사이더인 자신에게 예쁘고 인기도 좋은, 학과의 퀸카라고 불리는 은채가 말을 걸어왔을 때,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왠지 자기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은채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우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진우가 가끔 평범하고 볼품없는 책들에게도 호기심을 느끼고 책을 열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진우 앞에도 그런 책이 한 권 있었다. 책의 제목은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라는 책이었다.
책은 작은 문고판 정도의 크기로, 표지는 다시 제본을 했는지, 앞과 뒷면은 아무것도 없는 두툼한 재질의 올리브색의 종이 커버뿐이었다. 그리고 옆면에 제목과 제목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진석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진석이라면? 이 도시를 건설한 그 사람과 같은 이름이군, 하슬라를 비롯한 오아시스 도시들에는 진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 영미권에서 존, 이라는 이름이 흔한 것처럼, 남고비의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진석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남자아이들에게 흔히 붙여주는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저자의 이름으로도 가장 흔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책은 오래되어 다시 제본한 커버와, 평범한 저자의 이름, 그리고 왠지 흥미롭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지자, 묘하게 진우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오히려 호기심이 생긴 것이었다. 진우는 천천히 책을 열어보았다.
그와 동시에, 뭔가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진우가 서 있는 곳은, 바다였다. 바다 위의 작은 바위섬 같은 곳에 진우는 서 있었던 것이다.
-공간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공간은 1시간 뒤에 폐쇄될 예정입니다.-
뭐지? 이건? 상태창인가? 여기는 대체 어디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