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마지막 여정(3)
남고비의 오아시스 연합의 독립이 선포된 지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각각의 오아시스 도시들의 미래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아사달 시의 시장이, 행정자치 수반을 겸하며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 독립을 선언한 남고비의 오아시스 연합은 전처럼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행정수반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권한을 가진 정치 지도자를 원했다.
그리고 정치체제도 새롭게 정비하기를 원하는 여론이 강했고, 결국, 여러 논의 끝에 한국과 비슷한 대통령제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독립 전의 행정수반이, 몽골 대통령에게 일부 권한을 위임받은 행정자치 책임자의 성격이 강했다면, 새롭게 대통령에 선출될 지도자는 스스로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권한과 책임이 커진 만큼. 전처럼 행정자치의원들의 간접 선거로 선출될 수가 없게 되었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의 구성원 모두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선거 일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여러 명의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후보들이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의 초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고 있었다.
***
하슬라시, 하슬라 대학병원.
“다들 선거 때문에 시끄럽군요.”
“예, 첫 번째 선거니까요.”
몽골로부터 분리독립 선언을 하고, 남고비 연합이라는 임시적인 도시연합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오아시스 도시들이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정치 공동체는 여러 가지 복잡한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각의 도시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연합체라는 것은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 대다수가 한국계라는 것도 영향을 주어서 한국과 비슷한 정치체제를 선호하게 된 것도 있었다.
한반도는 100년의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이제는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 흡수 통일된 북한 지역의 자치 권한이 아직도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진석 사장님은 이번 선거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하, 나 같은 늙은이가 그런데 관심이 있겠습니까?”
정현경 박사는 진석의 주치의였다.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 중에서 교육의 도시인 하슬라 대학의 하슬라 의과대학은 남고비에서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이기도 했다. 하슬라 대학병원은 아시아 전체에서도 10위 안에 든다는 우수한 병원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었다.
정현경 박사는 순환기내과 제 1과장을 맡고 있었다. 심혈관 질환 쪽으로는 상당한 권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심장에 문제가 생긴 진석도 하슬라 대학병원에 내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병원의 vip실에서 아침 회진을 하던, 정현경 박사는 심장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치문제를 꺼내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백년간 이 남고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건 이진석 사장님 아니셨나요?”
“제가요?”
“예,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이진석 사장님이 뭔가 배후에서 정치를 조정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더군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사업가로 정치인들과 여러 가지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일했을 뿐입니다. 물론, 역대 행정 수반들과 중요한 사업을 결정하기도 하고,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게 바로 남고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거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겠군요. 어쨌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뭐가요?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에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이진석 사장님이 은퇴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저는 주치의로서 건강을 위해서 은퇴는 잘하신 일이라는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진석은 백 년 넘게 수행하던, 제이에스 그룹의 사장직에서 지난 달에 은퇴를 했다. 나이도 너무 많고, 이제는 심장에도 문제가 생겨서 더이상 사장직을 유지한다는 건 어렵다는 판단에 심장 전문의인 정현경 박사의 권유로 제이에스 그룹의 사장을 비롯한 모든 업무에서 은퇴를 하고 지금은 하슬라 대학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은퇴를 한 게 잘한 건지는 모르겠군요. 저는 푹 쉬면서 건강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병실에만 있다보니까, 답답하고 오히려 몸이 더 약해지는 느낌입니다.”
“몸이 약해지는 건, 은퇴를 해서가 아니라 심장이 약해져서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의사로서 객관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이제 이진석 사장님의 심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요.”
“위로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이진석 사장님은 정말 많은 걸 이루신 분입니다. 정말, 열심히 인생을 사셨죠. 그건, 저를 비롯한 남고비의 오아시스의 모든 주민들이 인정하는 일입니다.”
“하하, 인정을 받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저는 한평생 누구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뭔가를 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죠.”
“오늘 회진은 이만 마쳐야겠군요. 다른 환자들도 봐야 해서 말입니다.”
“예,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정현경 박사의 말대로 심장이 이제 한계가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 박사는 인공심장 이식 수술을 해보자고 권했지만, 진석은 거절했다. 그걸로 생명이 약간 더 연장되기는 하겠지만,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심장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약간 피곤하고 가끔 숨이 찬 정도였다. 그 외에는 고통 같은 것도 없고, 대체적으로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
2주 후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신임 대통령에는 45세의 젊은 과학자 출신의 최영석이 당선되었다.
“저 사람이 새로운 대통령이군.”
“예, 젊고 인기가 좋죠. 과학자 출신이라 합리적이라는 평가도 있고요.”
“그래요?”
진석은 대통령 선거일에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 선거이기는 했지만, 진석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투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후보들이 진석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찾아왔지만, 진석은 그 누구와의 면회도 거절하고 혼자,
하슬라 대학병원 VIP실에서 추리소설과 서부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선거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진석은 아직도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에스 그룹의 사장에서도 물러났고, 별다른 직책도 없었지만, 남고비의 모든 주민들이 진석을 알고 있었고, 그가 이 거대한 사막의 농업 국가를 건설한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거전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인터뷰도 모두 거절하던 진석은 선거가 끝난 다음날이 되어서야, 정현경 박사에게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듣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신문이나 TV도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그 젊은 과학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택했다면 그만한 능력과 인품이 있을 거라고 진석은 생각할 뿐이었다.
“예, 모두들 그 사람이 예전의 이진석 사장님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고들 해요.”
“나를요?”
선거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영석이라는 새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진석의 젊은 시절과 비슷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석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와 행동, 이미지들은 과거 오아시스의 개척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그의 인기에 한몫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끝까지 중립을 지키기 위해, 선거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진석이었지만, 어떻게든 그의 영향력이 선거에 영향을 준 셈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진석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다는 그 새로운 대통령이 진석의 면회를 신청했다.
“대통령 당선인이 이진석 사장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정현경 박사는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 한 번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보라고 했다. 진석도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병실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군요.”
진석은 새로운 대통령을 병실에서 누워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석은 오랜만에 환자복을 벗고, 전에 입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병원장의 접견실을 빌려서 새로운 남고비의 대통령이 될 최영석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진석과 최영석 당선인의 만남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새로 독립 국가가 된, 남고비 오아시스 연합의 건설자와, 새로운 권력자가 서로 만남을 가지고 일종의 권력의 이양이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이제는 늙어버린 진석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접견실에 진석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모두들 진석과 최영석 당선자가 나란히 서서 악수를 하는 사진과 같이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하는 장면을 찍고 기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지만, 별다른 중요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진석은 당선자에게 가벼운 덕담을 했고, 최영석 대통령 당선인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정도였다.
그렇게 요란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30여 분 정도의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끝이 나고 말았다.
***
그리고 그날 밤.
진석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진석은 직감적으로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지만, 진석은 이내 침착해졌다.
오래 시간을 살아왔고, 인생에 후회 같은 것도 없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고, 이룬 것도 많은 인생이었다. 그리고 설사 그런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었다고 해도, 뭔가를 후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모두 지나가 버린 일들은 한순간의 꿈같은 것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의 순간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진석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기묘한 경험이었다. 예전에 젊은 시절에 들었던 총을 맞은 어떤 남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남자는 관광을 갔다가, 우연히 갱단의 충돌 현장에서 수십 발의 총탄을 맞게 된다.
거의 죽음의 순간까지 같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 그 사람은 수십 발에 총알에 맞아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총에 연속으로 맞는 순간, 내가 죽는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이 붕괴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었다.
죽음이 아주 가까웠던 순간에 그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붕괴하는 그런 기묘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았다. 진석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자신의 존재가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 공간, 시간들이 모두 붕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죽음이란 나의 존재가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붕괴하는 것이라는 말인가?”
마지막의 순간,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있었다. 공간도 시간도, 그리고 빛도 어둠도, 소리도 이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붕괴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진석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을 느꼈다.
이제 진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