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촉촉한 아몬드(2)
아몬드에 캐슈넛의 혼종으로 열린 나무의 씨앗을 채취해서 다시 밭에 심어보기로 했다. 캐슈넛을 다시 밭에 심고 시간을 가속하자, 다행히 다시 지난번처럼 나무가 크게 자라기 시작했다.
“공간주님, 혼종 실험은 성공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다른 것들도 혼종을 해봐야겠는데.”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사령관이 일꾼들을 동원해, 브라질너트와 호두도 같은 실험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 오랜 시간이 흘러서, 브라질너트와 호두들도 모두 혼종에 성공했다.
사령관은 야자 열매 같은 브라질너트의 열매를 따서 안쪽을 열어보았다. 안쪽에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너트들이 들어있었다.
“음, 신기하네요. 견과류는 씨앗이라, 이렇게 안쪽에 있군요.”
진석도 호두를 까보았다. 호두도 잘 익어서 안쪽에 고소한 호두가 실하게 들어있었다.
“공간으로 가져온 견과류 네 가지를 모두 사막에서 키울 수 있게 되었군,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데.”
진석은 생각보다 일이 쉽게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잠시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 진석의 머릿속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령관, 이 견과류들을 공간의 산에서 재배해 보면 어떨까?”
“공간의 산에서요? 그럼, 준비를 할까요?”
“그래, 산에서도 한 번 견과류를 키워 보자고.”
진석은 일꾼들을 데리고 공간으로 가는 출입구를 열었다. 출입구를 통해 공간의 산에 도착한 진석은 산의 중턱쯤에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아몬드와, 캐슈넛, 브라질너트, 호두를 종류별로 구분해서 심어보았다. 씨앗들을 밭에 뿌리고 시간을 가속하자, 서서히 흙속에서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견과류 나무들은 공간의 산에서도 무난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간의 왜곡된 에너지의 흐름의 영향으로 특이한 변종이 된 작물들은 모양이나 색깔이 특별해지고는 하는데, 아직 그런 조짐은 없었던 것이었다.
진석은 시간을 가속하는 작업을 반복하다가 조금 지쳤는지, 다시 나무 아래에 앉아 견과류들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공간주님, 아직 변종이 나오고 있지는 않는군요.”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새로운 게 나오지 않겠어.”
“하하, 그렇기는 하죠.”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종자를 심고, 시간을 가속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였다.
“음, 뭐지? 저건, 아몬드 나무에 이상한 거 아냐? 저거?”
“어떤 거 말입니까? 오, 그러고 보니, 저 아몬드 열매는 엄청 크네요.”
보통의 아몬드보다 10배 정도는 더 큰 것 같은 초대형 아몬드였다.
“저렇게 외형상의 변화가 있다는 건, 산의 에너지로 변형이 일어났다는 말인데.”
진석은 가까이 다가가서 아몬드 열매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아몬드보다 수십 배는 큰 녀석이었다. 그래도 모양이나 색은 아몬드 열매와 같은 모습이었다.
“공간주님, 아몬드가 굉장히 큰데요.”
“그러게, 맛은 어떤 거지?”
진석은 아몬드 하나를 따서 맛을 보았다.
“어떻습니까?”
“음, 맛이 좀, 그렇게 고소하지는 않네..”
생아몬드라 그런지, 약간 부드럽기는 한데, 맛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조금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뭐, 맛이야. 생아몬드라 그런지 볶은 아몬드처럼 고소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것도 볶으면 고소해지겠지.”
진석은 일단 크게 자란 아몬드 열매를 채취해서 다시 밭에 심어보기로 했다. 아몬드는 아몬드 자체가 씨앗이라, 그대로 심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큰 아몬드를 심은 곳에서 다시 커다란 대형 아몬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음, 일단, 후대로 특성이 이어지는군. 그리고 이 큰 아몬드에도 뭔가 신비로운 효능이 있을 것 같고 말이야.”
진석은 커다란 아몬드를 최대한 많이 수확해서, 공간 밖으로 가져가 보기로 했다.
***
북카페 오아시스 하슬라 1호점.
“어머, 이게 뭐예요?”
호기심이 많은 전유리 점장은 진석이 가져온 커다란 아몬드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하, 지난번에 아몬드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기는 한데, 이렇게 큰 아몬드는 처음 봐요? 이거 진짜 아몬드 맞아요?”
“물론이죠. 이번에 새로 개발한 대형 아몬드라고 해두죠.”
“음, 신기하네. 하나 먹어봐도 돼요?”
“그럼요, 그런데 생아몬드라 그런지 맛은 별로예요.”
“저는 아몬드는 생으로도 잘 먹어요. 한 번 먹어볼게요.”
전유리 점장은 아몬드를 하나 집어 들고 맛을 보기 시작했다.
“음, 아몬드 맛이네요. 그런데..”
“그런데요?”
“약간 커서 그런가? 더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요? 이런 아몬드는 원래 볶아서 먹어야 하는 거죠?”
“그렇죠. 제가 주방에 가져가서 좀 볶아볼까요? 평소에도 아몬드는 자주 볶아서 먹어요.”
“음, 그럼, 좀 부탁할게요.”
진석은 잠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유리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 주방에서 나온, 전유리는 약간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된 건가요?”
“그렇기는 한데, 이건 아몬드가 너무 커서 그런지, 볶기가 어렵네요.”
“그래요? 어디 그래도 한번 먹어보죠.”
진석은 접시에 담긴 커다란 아몬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갓 구운 거라 따뜻하기도 하고, 냄새는 고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몬드를 씹었을 때 뭔가 맛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안쪽에는 약간 덜 익은 것 같으면서 전체적으로 구운 아몬드 특유의 고소함이 없었다. 그 대신 약간 텁텁하고 눅눅한 느낌이라, 식감이나 맛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몬드가 크고 두꺼워서 그런지 잘 볶아지지 않은 것 같아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아몬드야, 전문적인 기계로 볶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되겠네요. 참, 그러면, 이걸로 아몬드유를 만들어 볼까요?”
“아몬드유요?”
“예, 콩을 갈아서 콩국수 국물을 만들잖아요. 두유도 만들고요. 아몬드를 갈아서 차라리 우유를 만들어 보면 어때요? 아몬드가 크고 좀 부드러워서 볶는 것보다는 갈아서 우유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요?”
“뭐, 그것도 괜찮겠네요. 아몬드유를 만들면 그걸로 라떼를 만들 수도 있는 건가요?”
전유리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몬드유 라떼를 만들면 좋겠네요. 한번 만들어봐야겠어요.”
전유리는 다시 아몬드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진석은 잠시 기다리며, 카페 안의 캣타워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아기고양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몸이 커진 고양이들이 많이 보였다. 캣타워도 잘 올라가고, 서로 친한지 잘들 노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양이들을 보고 있다보니, 전유리 점장이 아몬드 라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점장님 표정이 밝은 걸 보니까. 맛이 괜찮은 모양이군요?”
“예, 한 번 드셔보세요. 깜짝 놀라실걸요.”
전유리가 자신 있어 하는 것처럼 아몬드를 갈아 만든 아몬드유 라떼는 고소하고 맛이 훌륭했다. 거기에 커피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독특한 맛이 있었다.
“와, 맛있는데요.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맛있어요. 이거 괜찮은데요.”
“그럼, 신메뉴로 합격인가요?”
“예, 물론이죠. 이 커다란 아몬드는 많이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아몬드 라떼를 만들면 되겠네요.”
“좋아요. 한 번 해볼게요.”
***
일주일 후...
북카페 오아시스 하슬라 1호점.
“어서 오세요. 사장님.”
“하하, 오늘은 제법 손님이 많군요.”
하슬라 대학의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카페의 풍경도 많이 바뀌고 있었다. 도시의 건설 초기에는 건설 노동자들이 주요 고객들이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기에, 장학제도 덕분인지, 한국에서 하슬라 대학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의 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아몬드 라떼는 대성공이에요.”
“정말요?”
“예, 학생들이 아주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이곳 카페에도 학생들이 많이 보이네요.”
“아무래도, 하슬라 대학에 학생들이 많이 늘어났으니까요.”
진석이 처음 계획했던, 교육도시의 모습이 점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를 둘러보다가, 진석은 창가에 앉았다.
카페라고는 하지만, 중간중간 서가가 자리 잡고 있어서 도서관에 있는 기분도 나는 곳이었다. 진석도 마치 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추리소설을 좀 보고 있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예, 아..아닙니다. 아무것도.”
안경을 낀 남학생은 조금 마른 체격이었다.
“대학생인가요? 하슬라 대학의?”
“예, 하슬라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죠.”
“음, 그래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을 해도 될까요?”
“아..그게..”
남학생은 조금 당황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진석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오아시스 도시들을 건설하신 그 이진석 사장님이시죠?”
“하하, 뭐, 하긴 이 도시에서는 모두 저를 알고 있더군요.”
“모를 수가 있나요. 저도 이진석 사장님의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요.”
“오, 그래요? 한국에서 오신 건가요?”
“예, 고향은 서울인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은 포기하려던 참이었죠. 그러다가 마침 하슬라 대학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합격을 했죠.”
“운이 아니라, 실력이 있는 거겠죠.”
“글쎄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왜요? 학교 생활이 힘든가요?”
“예, 낮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도 쉽지 않고.”
“생활하는 곳이 불편한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시설이나 학교도 좋고, 교수진도 훌륭하고 학교는 나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제 스스로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 이곳 하슬라에서 4년이나 학교를 다녀야하는데 왠지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뭐, 신입생 시절에는 다들 그렇죠. 원래 처음이 가장 힘든 법이니까요. 하지만 차차 좋아질 겁니다.”
“그럴까요, 전 왠지 자신이 없네요.”
남학생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뭐라도 한 잔 마시지 그래요? 여기, 아몬드 라떼 두 잔 부탁합니다.”
진석은 남학생에게 묻지도 않고, 아몬드 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맘대로 골랐는데 괜찮겠죠?”
“상관없습니다.”
“뭐라도 한잔 마시고 나면 기운이 생길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어쩌면,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주문한 아몬드 라떼 두 잔이 나왔다.
“자, 일단 한 잔 드시죠.”
“예, 잘 먹겠습니다.”
“서울에 돌아가게 된다면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서울에 가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죠.”
“하슬라 대학에서는 뭐가 그렇게 힘든 건가요?”
“글쎄요, 다른 환경 탓은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항상 일체유심조라고 하셨는데...”
“음, 불교에서 나온 말이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아는데.”
“예, 아버지가 제가 하슬라로 간다고 했을 때, 그 말을 해주셨죠. 마음이 불안한 건,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남학생은 남은 아몬드 라떼를 마저 들이켰다.
“맞는 말이군요. 사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의 마음이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하더군요. 불안감을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불안감은 결국 스스로를 지켜주는 것 그 이상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일 뿐이죠.”
“예, 맞는 말입니다. 맞아요. 아버지가 말씀하신 일체유심조도 그런 거겠죠? 결국, 불안함이라는 것은 제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네요.”
“하하, 그래요? 뭐, 마음이 편해지셨다니, 다행이네요.”
아몬드 라떼를 마시며 진석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학생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카페를 나갔다.
일체유심조라? 공간의 산에서 수확한 커다란 아몬드에는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들어있었던 것일까?
진석은 남은 아몬드 라떼를 마저 마셨다. 아몬드 라떼는 촉촉하고 부드럽게 진석의 목을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