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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시티(2) (173/183)

190화. 슬로우 시티(2)

오아시스 도시들의 전체적인 설계를 맡은 장유진이 이번에도 하슬라의 도시 설계를 담당했다. 기본적으로 도시 설계의 가장 큰 특징은 확장 가능성이었다. 도시는 큰 규모의 교육 도시를 목표로 설계가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현재 학생이나 학교 교수진 등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해서, 모든 시설은 최소화한 수준에서 건설되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마치, 작은 나무 묘목이 성장해 거대한 나무가 되듯이, 도시의 기본적인 기능만을 가진 작은 도시에서 시작하지만,

도시가 더 성장하게 되면 안정적으로 도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시의 성장과 확장에 용이한 설계를 한 것이다.

그렇게 미지의 공간이 남겨진 채로, 도시는 기본적인 골격 위주로 건설이 되었고, 그런 방식의 도시 건설방식 때문에 하슬라는 비교적 단기간에 주요 시설들을 완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하슬라의 주요 시설들 간에는 상당한 거리나 간격이 유지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래의 성장을 위해서 중간중간 많은 여백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인간의 상상력과도 같은 거죠.”

장유진은 도시의 설계에 대해 설명하며 진석에게 말했다.

“상상력요?”

“예, 저는 상상력이라는 건, 뭔가 가득 채워진 건 아니라고 봐요, 그보다는 비어 있는 여백이 아닐까요. 빈 공간, 빈 자리, 비어 있는 문장, 그런 게 있으면 사람들은 뭔가를 상상하게 되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죠. 문장 사이에 단어를 지워버리면,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문장은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으니까요.”

“맞아요. 그런 것처럼, 뭔가를 억지로 채우거나 뭔가를 계획하기보다는 넉넉하게 여유로운 공간을 비워두면, 미래의 누군가가 그걸 자유롭게 채우지 않을까요.”

“하하, 재밌는 생각이네요. 왠지 교육적으로도 좋을 것 같은데요.”

진석의 말에 장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교육도 상상력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뭔가를 상대에게 가르쳐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상대의 상상력을 막아버리는 거잖아요.”

“교육은 결국,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거라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장유진은 자신의 교육과 상상력에 대한 철학을 도시의 설계에서 반영했다고 했다. 그래서 하슬라의 기본적인 시설들을 건설하고 그 주위에는 빈 공간을 많이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 빈 공간들에 대한 계획은 따로 있는 건가요?”

“아뇨, 그게 바로 이 설계의 핵심이죠. 저는 처음부터 이 빈 공간들의 대략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았어요. 물론, 저도 상상을 해보기는 했죠. 하슬라 대학이 얼마나 더 커질까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거대한 종합대학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단과 대학 몇 개 정도로 끝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건물도 어떤 대학도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 공백을 남겨 둔 거죠.”

“장유진 씨 의견에 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도시 초기에는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미리 어떤 미래를 상정하기 어려우니까요. 뭔가 큼직큼직하게 구획을 나누어 놓으면 나중에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할 테니까요.”

하슬라는 장유진의 말대로, 미래의 상상력을 위해서 최소한의 설계만을 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심플한 선처럼, 도시는 단순하고 빠르게 성장을 시작했다.

마치, 볼품없는 나무 막대기 같은 나무의 묘목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지가 뻗어 나가며 점점 더 성장을 거듭하는 나무처럼, 하슬라도 하슬라 대학을 중심으로 차츰, 학생도 늘고, 도시의 인프라도 추가되면서 빠르게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에서 유학생들이 하슬라 대학으로 유학을 오기 시작했다. 진석이 하슬라 대학의 학비를 면제하기로 하면서 하슬라 대학은 무료로 다닐 수가 있었고, 특히 유학생들에게는 기본적인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하고는 싶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어려움을 겪던 학생들이 하슬라 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외에 대학의 교육수준도 향상시키기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의 실력 있는 교수진들도 꾸준하게 스카웃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교수진이나, 학업 여건은 한국의 대학 못지않은 수준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또, 진석이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도서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대학 같은 적극적인 교육기관, 즉 강의나 커리큘럼을 통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교육방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평생 교육, 자발적인 교육과 같이 스스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율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많은 정보가 디지털화되기는 했지만, 가장 쉽고 기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창구는 책이다. 그리고 저작권 등의 문제로 디지털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IT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책이라는 것은 유용한 정보창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

하슬라, 중앙 도서관.

“어머, 사장님,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새로 개장한 하슬라 중앙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던 진석은 북카페 오아시스 하슬라점의 점장인 전유리와 만나게 되었다.

“전유리 씨도 도서관을 구경하러 왔군요?”

“예, 아무래도 원래 하던 일이 사서여서, 관심이 많이 가네요.”

“그래요? 그럼, 도서관에 일해 보는 건 어때요? 전유리 씨가 원하면,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죠.”

“아뇨, 괜찮아요. 전 북카페랑, 하슬라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어요.”

“아, 강의도요?”

지난번에 전유리를 카페에서 만났을 때, 대학 강의를 제안했던 것은 진석이었다. 전유리가 해보겠다고 해서, 하슬라 대학에 연락해 전유리를 소개시켜주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예, 사장님은 모르셨죠?”

“아, 뭐, 일이 많다 보니까.”

“아무튼, 사장님이 하슬라 대학에 소개를 해주셨고, 얼마 후에 정말 하슬라 대학에 문헌정보학과가 생겼어요. 그래서, 저도 강의를 하게 되었고요.”

“교수님이 된 건가요?”

진석의 말에 전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수는 아니고, 강사 정도예요. 하지만, 재밌어요. 모르죠, 나중에 정식 교수가 될지도. 후후..”

“문헌정보학 전문가의 입장에서 이 도서관은 어떤 것 같아요?”

“뭐, 아직 시작 단계기는 하지만, 규모도 크고 좋은 것 같은데요. 아까 여기 관장님하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책이 500만 권 정도 있다면서요?”

“예, 지금은 그 정도지만 앞으로 2000만 권까지 장서 수를 늘릴 계획입니다. 그 정도면, 하버드나 스웨덴 국립도서관을 넘어서는 숫자라고 하더군요.”

“와, 정말요?”

도시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한 수준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의 전체 인구는 100만을 넘지 않고 있었고, 한국 기준으로는 중형 도시라고 할 정도였다. 성남의 인구가 거의 100만에 육박하고 있다고 하니까, 인구만 놓고 보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농업에 특화된 곳이고, 계속 이주민과 인구가 늘고 있는 젊은 도시였고, 도시의 발전 속도, 농업의 발전 속도가 모두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석은 조만간 인구나 도시의 영향력이 크게 확장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고비 일대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인 이 하슬라에 하버드 대학이나 스웨덴 국립 도서관의 수준을 넘어서는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도서관을 건립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투자를 해서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예,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도서관은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일반적인 사람들이 2천만 권의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예, 저는 그보다는 사람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은 역시 북카페라고 생각해요. 접근성도 좋고, 꼭 지식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휴식도 취하고 책을 읽으면서 힐링도 할 수 있고, 뭔가 재충전을 하는 그런 공간인 거죠.”

전유리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북카페도 일종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작은 도서관요.”

“작지만 아주 유용하죠. 사실, 진짜 도서관은 그런 작은 도서관들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어릴 때, 그런 동네 도서관이나 작은 책방에 자주 갔거든요. 사실, 규모가 큰 도서관보다는 작은 도서관이 책 읽기에는 좋죠.”

“그러면, 그런 작은 도서관도 만들면 좋잖아요.”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북카페 오아시스죠. 소규모의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도서관보다는 북카페가 더 좋은 것 같아요. 뭐든 그렇잖아요?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그런 거 말이에요. 도서관은 왠지 책을 강제로 읽어야 할 것 같고, 다른 걸 하면 매너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죠.”

“음, 그렇기는 해요. 약간 딱딱하죠. 저도 일해봐서 알아요. 도서관은 규모가 크던 작던, 조용히 있어야 하고, 책을 빌리거나 읽기만 해야 하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하슬라에는 그런 작은 도서관 역할을 하는 북카페도 더 늘려나갈 생각이에요. 조만간 하슬라에 북카페 오아시스 2호점, 3호점도 오픈할 계획이니까요.”

“저도 환영이에요. 저도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이죠.”

***

도서관과 대학, 그리고 또 진석이 하슬라에 만들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슬로우 푸드 식당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지, 미국을 상징하는 것들 중에 빠지지 않고 꼽히는 것이 패스트 푸드, 즉 햄버거와 콜라 같은 것들이다.

가장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이런 패스트 푸드는 효율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산업화의 단면 같은 것이다.

그것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진석은 슬로우 푸드를 이 하슬라를 중심으로 보급하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슬로우 푸드의 한 가지인, 사찰 요리 식당을 제이에스 스토어와 함께 이태원에 개업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사찰 요리라는 특성 때문인지 약간 대중화에는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일단 채식으로만 구성해야 하는 식단이 사람들의 미식 욕구를 다 충족시키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채소와 고기, 곡물, 과일 등 가능한 모든 재료를 이용한 슬로우 푸드 레스토랑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

아사달, 이성우 시장의 집무실.

아사달의 시장은 남고비의 자치정부의 수반을 겸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착 초기에 아사달의 인구가 월등했기 때문에 생긴 규칙인데, 아직도 행정 기관의 수장은 아사달의 시장이 남고비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슬라의 개발 계획도 이성우 시장과 상의할 일들이 많았다.

“슬로우 푸드 레스토랑을 만들겠다고요?”

“예, 원래 슬로우 푸드나, 슬로우 시티는 모두 이탈리아에서 나온 개념들이죠.”

“그건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시장님도 아시겠지만, 미국의 패스트 푸드 업체들이 이탈리아에 진출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나온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더군요, 원래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개념에서 시작했지만, 천천히 먹고, 느리게 사는 그런 여유 있는 삶은 전세계적으로도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요, 하지만 실제로 슬로우 시티라고 할 만한 도시는 별로 없지 않나요? 이탈리아에도 말입니다.”

“그건, 이성우 시장님 말이 맞습니다. 원래 슬로우 시티 운동이라는 게,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농촌 생활로 돌아가자는 건데. 그러기에는 시대가 많이 변했죠. 그보다는 새로운 개념의 슬로우 시티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성우 시장은 진석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운 개념의 슬로우 시티라면 어떨 걸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통적인 농촌 생활 같은 느림이 아니라, 좀 더 도시적인 느림이 필요하다는 거죠. 세상은 이미 많이 변했으니까요. 좀 더 도시화된 생활 속에서도 여유과 상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여백이 있는 생활 패턴을 추구하자는 거죠.”

“음, 좀 난해하네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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