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거꾸로 배추(1)
남고비, 하백시, 제이에스 농장.
“김석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진석입니다.”
남고비 남쪽의 하백시는 아사달과 같은 오아시스 도시였지만, 도시의 구조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아사달은 중앙에 공원이 있고 그 주위로 원형으로 도시가 퍼져 나가는 스타일의 도시라면,
하백은 중심에 하백호라는 인공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호반의 도시였다. 도시의 기능면에서도 남고비 일대의 행정의 중심지이자, 제이에스 지사 본부가 자리 잡고, 각종 기반 시설이 있는 아사달과 달리,
하백시는 철저하게 인공호수와, 농업 그리고 인공호수를 이용한 레저 시설 등을 만들기 위해 건설된 도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도시처럼 도심을 중심으로 주거지와 상업지대가 발달하고 외곽에 농업지대가 형성된 아사달과는 달리, 하백은 도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넓게 농업지대가 형성된 형태의 농업 도시였다.
김석류가 일하는 채소 농장도 하백 호수가 보이는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는 경치가 좋군요. 호수가 가까워서 물 공급도 잘 될 것 같고.”
“예, 다들 그러더라고요. 좋은 곳의 농장을 배정받았다고요.”
김석류는 남고비 일대의 오아시스 도시들의 이주자들로는 보기 드물게,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이 하백시에서도 경치가 좋고, 토지나 물 공급이 원활한 좋은 땅을 배정받은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남고비의 도시들은, 몽골로부터 100년간 무상 임대를 받은 땅이라, 소유권이라기 보다는 임대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임대기간이 100년에 달하기 때문에, 소유권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김석류처럼, 외국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에게는 토지를 무료로 임대를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채소를 키우는군요.”
“예, 상추와, 토마토를 키우고 있는데, 비교적 잘 자라는 편이에요. 상추는 일조량이 많아서 그런지 잎이 크고 연한 편이고요.”
“음, 그렇겠군요. 토마토도 일조량이 많으면 잘 자라는 편이죠. 비타민도 풍부하고요.”
김석류는 한국에 있을 때 대기업을 다니는 사무직 직원이었다고 했다. 나름 안정적이고 연봉도 높은 직장인데, 그걸 포기하고 이곳 하백으로 이주한 것이었다.
“대기업이면 연봉도 많고 사회적인 평판도 좋지 않나요? 입사하기도 쉽지 않고.”
“물론 그렇죠. 사실, 부모님도 그렇고, 남자친구도 많이 반대했어요.”
“남자친구요?”
“예, 한국에 있어요.”
“그럼, 애인을 남겨두고 그냥 떠나 온 건가요?”
“사실,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에요. 그냥 같이 만나고 가끔 놀러다니는 그런 친구였거든요.”
“음, 그래요..”
“아무튼, 회사 다니는 게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전, 대학 다닐 때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스타일이었거든요.”
“한 곳에서 일하는 건 이곳 농장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여기는 일단 탁 트인 야외고, 혼자서 하는 일이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전 솔직히 사무실에 이 사람 저 사람 모여서, 사내 정치라고 할까? 편 가르고 누구한테 줄 서고, 그러는 건 체질에 안 맞거든요.”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많으셨던 모양이군요.”
김석류는 진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더니, 뭔가 답답하더라고요. 상사부터 동료들까지 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들이지만, 매일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거잖아요.”
“직장 생활이라는 게 그렇죠.”
“예, 아무튼, 전, 이 농장이 확실히 더 편해요. 토마토 키우는 것도 재밌고요.”
“이곳은 남고비에서도 환경이 좋은 편이죠.”
“그러게요. 다들 남고비의 오아시스에 농사를 지으러 간다니까, 사막이라고 겁을 줬거든요. 그런데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이곳 하백 호수 주변은 사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예요.”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요?”
김석류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불만사항은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네요. 나중에 불편한 게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하하,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이곳 생활에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진석은 김석류의 안내로 채소 농장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상추와 토마토는 김석류의 말대로 잘 자라고 있었다. 다만, 채소들의 종류가 많지 않은 건 좀 아쉬웠다.
“그런데 재배하는 작물이 두 가지뿐인가요?”
“예, 일단은 이 정도죠. 여기 농업 지원 센터 직원분 말로는 지금은 상추와 토마토 정도를 재배하는 게 좋을 거래요. 다른 건 아직 어렵다고.”
새로 이주한 젊은 여성이라 그런지, 농업 지원 센터에서는 새로운 작물에 도전해 보기보다는 잘 자라는 작물 두 가지를 골라준 모양이었다.
“김석류 씨는 키워보고 싶은 거 없어요?”
“키워보고 싶은 채소요?”
“음, 전, 배추 같은 걸 심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배추는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배추요?”
그러고보니, 아직, 오아시스 도시들의 농장에서 배추의 재배는 성공하지 못 하고 있었다. 보통 배추는 김장용의 속이 들어찬 배추를 원하는 것인데, 사막에서 재배한 배추들은, 성장은 제법 괜찮은 편이지만 잎이 너무 무르고 옆으로 퍼지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쉽게 말해, 속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생기고, 배추로 김치를 만드는 포기김치용으로는 사용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속이 나오지 않는 배추를 샐러드나 쌈채소 용으로 쓰기도 애매해서, 배추의 재배는 일단은 보류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고비의 도시들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배추의 수요, 더 정확히는 김치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덥고 땀이 많이 나는 이곳 기후의 특성상, 체력이 탈진되지 않기 위해서 염분의 섭취가 꼭 필요한데, 김치는 그런 점에서 염분을 쉽게 섭취할 수 있어서 이곳 의사들은 김치를 많이 먹으라고 권장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어도, 한국인들에게 김치는 너무도 익숙하고, 즐겨 먹는 먹거리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배추를 생산하지 못 하기 때문에, 김치는 전량 한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예, 하지만, 배추 재배는 어렵다고 하니까, 저 혼자 도전해 보기도 어렵고 말이에요.”
“저기, 김석류 씨, 만약에 사막에서 키울 수 있는 신품종의 배추가 나오면 키워볼래요?”
“예? 신품종의 배추요?”
“그래요, 아시다시피, 제이에스 그룹은 다양한 작물의 종자를 연구하는 곳이죠. 이미 이곳 사막에 적응력이 강한 새로운 작물들을 많이 개발했어요.”
“그렇다고 듣기는 했어요. 그러면 배추도 가능할까요?”
“어떤 일이든 100%라는 건 없죠. 하지만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좋아요. 그러면, 새로운 배추가 나오면 저도 꼭 심어볼게요.”
“약속한 겁니다?”
“예, 저야, 좋죠. 그렇지 않아도 배추를 키워보고 싶었는데.”
김석류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석은 일단, 하백시의 다른 농장들도 한 번 둘러보고, 아사달로 돌아왔다.
***
남고비, 아사달, 제이에스 농업연구소.
“배추라고요?”
한유식 부장은 진석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추는 이미 여러 번 심어봤지만 다들 실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배추가 잘 자라는 편이지만, 속이 나오지 않는다면서요?”
“예, 배추는 주로 한국인들이 재배하고 먹는 작물이죠. 서양에서는 샐러드 등의 용으로 양배추를 재배하기도 하지만 한국 배추는 먹지 않아요.”
“그렇겠죠. 한국에서도 주로 김장용 배추 수요가 있는 거니까요.”
한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추는 기온이 어느 정도 내려가야, 소위 말하는 속이 나오거든요. 그 깨끗하고 잎도 연한 안쪽 속을 이용해서 김치를 만드는 건데. 그런 특성 때문에 한국에도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고랭지 배추 재배를 하지 않습니까.”
“배추 재배에 고온은 치명적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그냥, 배추 자체를 성장시키는 데는 고온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배추가 크게 자라도 속이 나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죠. 배추의 겉 부분을 식용으로 쓰기는 어려우니까요.”
“그건 그렇겠네요. 딜레마군요. 보통 일조량과 잎의 크기는 비례관계가 있는 거 아닙니까?”
“대부분 그렇죠. 일조량이 많으면 잎이 무성해지는 특성이 있죠. 광합성에 유리하니까요. 거기에 수분이 적당히 공급되면 식물은 최적의 성장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배추는 그런 조건에서 잎이 커지고 벌어지면서 속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인 거죠.”
보통 사막 기후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생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다른 작물들과 달리, 배추는 생장은 잘 되고 있지만, 문제는 배추를 사용하는 목적에 적합하지 않게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문제들을 알았으니,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겠죠.”
“음, 글쎄요. 이진석 사장님의 능력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좀 어려울 것 같네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일단, 신품종을 개발할 생각이니까, 베이스가 될 여러 종류의 종자들을 준비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제가 뭐라고 하든 사장님은 하고 싶은 건 하시는 분이니까요. 혹시 모르죠, 성공적인 배추가 나올지도,”
한유식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유식 부장은 필요한 배추의 종자들을 준비해 주었다. 진석은 종자들이 담긴 가방을 받아 연구소를 나왔다. 진석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공간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는 저온 창고였다.
창고 문을 열자,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진석의 지시로 텅 비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석은 문을 닫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
진석이 공간으로 들어가자, 진흙 인간의 사령관이 마중을 나왔다.
“공간주님, 오늘도, 씨앗들을 많이 가지고 오셨군요.”
“그래, 사령관. 오늘은 배추들의 종자를 가지고 왔어.”
“배추 말입니까? 배추는 김장을 할 때 쓰는 것들 아닌가요?”
“맞아, 김치를 만드는데 쓰는 배추를 키울 생각이야.”
“배추를 말이군요. 잘 자랄 것 같기도 하고요.”
“잘 자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배추는 속이 나와야 해.”
“속요?”
“그래, 사령관은 잘 모르겠지만,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추 안쪽 부분이 성장해야 한다고, 그걸 배추 속이라고 하지.”
“김장을 하기 위해서는 배추 속이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그래 맞아. 하지만, 사막에는 고온에 일조량이 많아서 그런지 배추 속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지. 원래 배추 속은 저온기에 배추 잎이 안쪽으로 몰리면서 생기는 거니까 말이야.”
“음, 배추는 단순히 성장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속이 나와야 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는 작물이군요?”
“그래 맞아. 아무튼, 그 문제를 해결하면 배추 재배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산과 평지 중에 평지에서 재배를 해야겠죠?”
“그래, 사막과 기온이 비슷한 평지의 밭에서 재배를 할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배추를 재배할 밭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사령관이 일꾼들을 데리고 배추를 심을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배추를 재배할 밭은 하백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온도는 고온으로 조절을 하고, 대신 물의 공급은 비교적 넉넉하게 만들었다.
밭과, 온도와 물의 공급까지 하백의 호숫가의 김석류의 농장과 비슷한 조건이 만들어지자, 진석은 일꾼들을 동원해 여러 가지 종류의 배추 종자들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보통은 모종으로 심는 배추였지만, 씨를 뿌리는 것만으로도 금세 떡잎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배추가 잎이 솟으며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다.
“공간주님, 생각보다 잘 자라는데요. 저 정도면 크기도 꽤 크고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중요한 건 속이라고.”
“음, 그랬었죠.”
진석은 배추가 다 성장하자 배추 안쪽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안쪽의 배추 속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역시 쉽지 않군. 하지만 계속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