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물컹한 사과(2)
일꾼들이 물렁물렁한, 당도가 높은 사과의 씨앗들을 밭에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석이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하자, 땅속에서 떡잎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기가 굵어지며 서서히 사과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꽃이 만개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수많은 타원형의 물렁물렁한 사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같은 사과가 열리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공간주님, 이 물렁물렁한 사과의 특성이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진석은 물컹거리는 사과 열매를 하나 따보았다. 수분이 많은 건지, 과육이 마치 풍선처럼 말랑말랑하고 물컹거리는 것이, 맛과 향을 제외하면 사과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과일이었다. 하지만 당도가 높은 과즙이 풍부한 것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하백시도 그렇고, 아사달도 그렇고, 무덥고 일조량이 많은 건조한 사막 기후라, 과즙이 풍부한 이런 사과는 오히려 일반적인 사과보다 갈증 해소에는 더 장점이 있을 것 같았다.
진석은 물컹거리는 사과를 그대로 입으로 한 입 베어 물어보았다.
“맛은 어떤가요? 공간주님.”
진흙 사령관이 궁금하다는 듯이, 진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맛은 좀 미묘한데.”
“아주 맛이 있는 건 아닌가 보군요?”
“맛은 있는데, 식감이 좀 그래. 뭔가 사과보다 달고 시원한 맛인데, 사과를 먹는 게 아니라, 사과를 갈아서 먹는 느낌이랄까.”
식감이 미묘하기는 했지만, 주스를 만들거나 과즙으로 다른 걸 만들기에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은 이 사과로 뭘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진석은 밭에서 수확한 물컹한 사과를 가지고 아사달의 저온 창고로 향했다.
***
하백시, 김형태의 농장.
“멜론들이군요?”
김형태는 한국에서는 사과 과수원을 하던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서울로 상경, 자영업을 했었다고 했다.
“자영업이라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식당도 했었고요. 치킨 체인점을 한 적도 있었죠.”
“음, 주로 먹는 장사를 하셨군요?”
“예, 비교적 창업하기가 쉬워서 그랬던 거죠.”
“하지만, 창업은 쉬워도 사업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업종들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잘 아시네요. 이른바 레드 오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죠. 진입은 쉽지만, 경쟁자들이 많아서 버티기가 쉽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뭐든 그렇죠. 진입 장벽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초반에 쉬운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쉬우니까, 결국 경쟁자들이 많아지게 되죠.”
김형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곳 남고비로 오게 된 겁니다. 서울은 뭐랄까? 너무 과밀하다고 할까요? 사람도 많고 좋은 것도 많지만, 경쟁자들도 너무 많아요. 뭔가 열심히 해도 경쟁이 되다 보면 수익도 줄어들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죠.”
“그래서, 치열한 경쟁을 피해서 이 뜨거운 사막으로 오신 거군요?”
“예, 좀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 누구와 싸워서 이기는 일에는 취미가 없어서 말입니다. 대신, 혼자서 열심히 하는 일이라면, 잘하는 편이죠.”
“농업 분야에는 적성에 맞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진석의 말에, 김형태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 과수원을 물려받기를 원하셨죠.”
“그 사과 과수원 말인가요?”
“예,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죠.”
“그때는 그때 사정이 있었겠죠?”
“맞습니다. 어릴 적에는 무조건 도시로 가고 싶었거든요. 도시에 뭐가 있는지,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고향을 떠난 걸 후회하나요?”
김형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해서 정말, 한강까지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잠깐 후회한 적도 있었죠.”
“저런..많이 힘드셨나보군요?”
“하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아요.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는 거죠. 그러면서 뭔가 배운다면 우스운 이야기일 테고, 아무튼, 인간이란 실수와 실패를 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 현명해지는 거겠죠?”
“하하,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현명함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우리는 누군가 실수를 하는 걸 보고 어리석다고 비웃기도 하고, 누군가의 성공을 보면서 천재라거나, 현명하다면서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어리석음과 현명함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농업을 안 하셨으면, 철학을 공부하셨어도 좋았을 분이군요.”
“그저 농부가 되고 싶을 뿐이죠. 그리고, 지금은 멜론을 키우고 있고요.”
“멜론 말고, 사과를 키워 보고 싶으시다고 했죠?”
“사과요? 그것도 좋죠. 하지만, 여기서 사과나무가 자랄까요?”
진석은 들고 온 상자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뭡니까?”
“신품종의 사과인데,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좀 무른 사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석의 말에 김형태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게 사과인가요? 생긴 건 사과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그리고..”
김형태는 상자 안의 사과들을 만져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상한 건 아니겠죠? 왜 이렇게 물렁거리죠?”
“상하거나 오래되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나름 싱싱한 사과들이죠. 그 사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은 이곳 하백의 기후 조건을 고려해서 개발한 신품종입니다. 아, 이름을 하백 사과라고 하면 좋겠네요.”
“하백 사과요?”
“예,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하나 맛을 보세요. 맛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겁니다.”
“음, 그래볼까요?”
김형태는 진석의 말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칼을 들어 사과를 잘라 보았다. 물렁거리는 사과, 하백 사과는 그리 싱싱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형태는 한 조각 사과를 잘라, 입안에 넣어 보았다.
“맛이 어떤가요?”
“음, 맛은 괜찮은데요.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해서, 제 입에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약간 파인애플과도 비슷하고요. 아주 부드럽고, 단맛이 강한 파인애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약간 그런 느낌도 있네요. 새콤한 맛은 덜하지만 말이죠. 부드러운 파인애플이라는 표현도 적절한 것 같아요.”
“식감은 약간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아요. 사과라면, 단단하고 아삭거리는 사과가 맛이 있고, 사람들도 선호하는데, 이건, 뭐랄까? 물렁거리고, 물도 많고, 하백 사과라고요?”
“그냥, 제가 지어 본 이름입니다. 여기가 하백시니까요.”
“아뇨, 이진석 사장님의 그 이름이 딱 맞는 이름인 것 같네요. 하백은 물의 신, 아닙니까? 이건 뭐랄까, 물렁거리는 물사과라고나 할까.”
“물사과라?”
“하지만, 수분이 많으면서도 굉장히 달콤해서, 사막의 더운 날씨에는 갈증 해소에 좋을 것 같네요. 한국에서라면, 별로일 수도 있겠지만, 하백이나 아사달에서는 인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럴까요? 그러면, 한 번 김형태 씨가 이 하백 사과를 하백에서 처음으로 재배해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요?”
“예, 지난번에 새로운 사과 품종을 개발하면, 처음으로 키워 보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김형태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최초로 하는 일이라는 거죠?”
“예, 하백 사과는 아직, 누구도 재배한 적이 없는 신품종이니까요.”
“처음으로 하는 일이라면 쉽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의미도 있고, 전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남고비로 온 거고요.”
“그렇다면, 김형태 씨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겠네요.”
일단, 하백 사과를 시범적으로 키울 농부는 찾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하백 사과의 상품성을 테스트 해볼 생각이었다. 진석은 얼마 전에 개업한 북카페 오아시스 하백점을 찾았다.
***
북카페 오아시스 하백점.
“와, 여기가, 북카페가 맞나요?”
“어머, 이진석 사장님이시죠?”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진석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남고비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는 흔히 있는 일로, 진석의 얼굴은 모두 알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방문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무슨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약간 놀라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은 흔한 일이다.
“예, 이진석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여기는 처음 와보는데, 카페가 굉장히 멋지네요.”
북카페 오아시스 하백점은, 물의 도시, 남고비의 베니스라는 별명답게,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호수라고 해도 지하암반층의 지하수로 만든 인공호수였지만 말이다.
호숫가의 카페답게, 호수라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물가에 데크를 설치해 마치, 호수 위의 배에 올라탄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예, 북카페 하백점 점장, 이수현이라고 합니다.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30대 초반 정도로, 큰 키에, 얼핏 봐서는 모델 같은 느낌의 여성이었다. 실제로도 한국에서는 모델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와, 수현 씨는 키가 크셔서 모델 같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모델이셨군요?”
“예, 농구선수도 좀 했었고요. 키가 커서, 큰 키로 하는 건 다 해봤죠. 여고 시절에는 형광등 교체 담당이었고요.”
“하하, 그래요?”
진석은 이수현의 안내로, 호숫가의 카페를 둘러보았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호수에 있는 건물들은 호수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다. 비가 오거나 하면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기도 하기 때문인데,
철저하게 지하수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인 하백호는 수위에 변동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수위가 증발로 내려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수위가 올라갈 위험은 없기 때문에 북카페 오아시스도 호수의 바로 옆까지 데크를 설치하고, 그 위에 테이블을 놓아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의 노천 카페를 만든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게, 이 카페에서는 장점이 되는군요. 이렇게 호수 위에 자유롭게 카페를 만들 수도 있고 말입니다.”
“예, 맞아요. 그리고 주위가 모두 건조한 사막이라서, 어찌보면 멋대가리 없는 인공호수지만, 단지 물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손님들도 좋아하시고요.”
“음, 그렇겠군요.”
진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현의 말대로, 인공호수라는 것은,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그다지 멋있다고 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주위로 아름다운 숲과, 산이 자연스럽게 둘러쌓고 있는 그런 유명한 호수들과는 달리, 거대한 인공적인 물 저장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수의 주변 경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위로 보이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 막 개발되기 시작한 하백의 도심의 빌딩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이런 건조한 사막에서 단지 물이 있는 호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진기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중국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국인 관광객들도 제법 찾는다는 모양이었다.
“관광객들에게도 하백호가 인기 있는 모양이죠?”
“예, 다들 좋아해요.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요즘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찾아요.”
“한국에서 관광객이 온다고요?”
“예, 중국이나 몽골로 여행을 왔다가,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래요?”
“저기, 저 대학생도, 한국에서 몽골을 거쳐서 온 분이에요.”
이수현은 호숫가의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던 한 청년을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태규라고 합니다. 이진석 사장님을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하하, 저를 아시나요?”
“물론이죠, 한국에서도 굉장히 유명하신걸요.”
“한국에서 여행을 오신 건가요? 혼자서?”
진석은 일행이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예, 사실 혼자서 몽골을 여행하는 길입니다.”
“혼자서요, 와, 대단하네요.”
“몽골 외에도,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남미에도 가봤고, 이번 여행을 마치면,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아프리카에도 가 볼 생각이고요.”
“대단한 모험가시군요?”
“뭘요? 그냥 혼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