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물컹한 사과(1)
북카페 오아시스 아사달점.
“그런 거 보면, 과일이든 식물이든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는 모양이에요.”
“사람도 그렇고 말이죠.”
최영미 점장은, 아이들이 따온 물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최영미 점장님, 그건 따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물론이죠, 날 뭘로 보는 거에요. 제가 그 정도의 상식도 없어 보여요? 이래봬도, 저는 아사달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라고요. 이건, 아이들이 선물로 준 거예요. 물론, 다음에는 따면 안 된다고 말해줬고요.”
“오, 선물로 받은 거군요.”
“예, 아무튼, 이 물주머니 참 신기하단 말이에요. 자연이란 건, 참 신기해요. 어떻게, 이런 물저장 장치를 만드냐는 말이에요?”
“그게 보기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숨은 노력이 있었던 거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뭐, 그렇기는 하겠죠. 아무튼,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던가요? 뭐든 그 새로운 환경에 적당히 적응하는 것 같아요. 배 같은 것도 서양배는 굉장히 무르잖아요. 한국의 배는 아주 단단하고 아삭해서 식감이 좋은데. 배 좋아하세요?”
“배요?”
“예, 저는 배를 좋아하는데, 아사달에서는 배는 키우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배라? 배도 한 번 키워봐야겠네요. 배나, 사과 이런 과일들은 아주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과일들이죠. 한국에서는 제사상에도 올리는 과일이고요. 추석이나 그런 차례상에 말입니다.”
“맞아요. 사과와 배는 가장 기본적인 과일이잖아요. 그런 게 없어서 좀 아쉬워요. 배가 있으면 갈아서 여러 가지 음료나 샤베트도 만들 수 있을 텐데.."
“기다려 보시죠. 조만간, 배나 사과가 아사달에서 재배되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하하,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아사달과 남고비의 오아시스들에서 재배하는 채소나 과일들의 종류를 점점 늘려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고속도로를 통해서 중국에서도 여러 가지 작물들의 수요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중국 시장이 어쩌고, 중국어를 배우겠다는 사람도 있고요. 학교에도 중국어 수업을 추가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하, 아무래도, 큰 시장이니까요. 뭔가 팔아보겠다거나,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매력적인 나라죠?”
“이진석 사장님은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큰 나라죠. 인구도 많고, 하지만, 저는 한국이 더 좋습니다.”
“왜요?”
“거기가 제 고향이니까요. 저도 그렇고, 제이에스 그룹도 그렇고 모든 것이 시작된 최초의 지점이죠.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요? 처음 시작된 원점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아마 그 최초의 지점에서 모든 것의 이유와 가치를 찾으려는 욕망을 느끼죠.”
“음, 그래요?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고향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석은 카페를 나왔다. 남고비에는 이곳 아사달점 말고도 많은 북카페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가장 남쪽이라고 할 수 있는, 하백에서 새로운 북카페가 개점을 하기도 했다. 하백은 전설 속의 물의 신의 이름에서 따온 곳으로,
실제로 하백은 남고비 전체에서 가장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다. 지하에 대규모 지하수층을 개발해서 이웃 도시들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대규모 물 저장용 인공호수인 하백호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거대한 하백호는 호수 위를 항해하는 유람선이 다닐 정도로 큰 인공호수였다. 그래서 남고비 일대에서는 하백은 물의 도시, 베니스에 비견되고 있었다.
그렇게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서, 하백은 최초의 도시, 아사달에 이어 빠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도시였다. 위치적으로도 중국 북부와 연결되는 지점이라, 하백은 교역에도 좋은 입지조건으로 중국과의 교류도 많은 편이었다.
진석은 최영미에게 말한 것처럼, 최근에 사과와 배를 재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남부의 도시, 하백에 사과와 배를 키워 볼 생각이었다.
***
남고비, 하백시, 제이에스 지사.
“하백은 인공호수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공기가 건조하지 않아 좋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남고비 최대의 인공호수니까요. 대신 물의 증발량도 상당해서 지하수를 공급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지하 암반층에 워낙 많은 물이 있기 때문에 물 걱정은 따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김형태는 한국에서 과수원을 하던 농부였다. 주로 사과를 키웠었다는데,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곳 남고비, 그리고 그중에서도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가장 남쪽의 신도시 하백을 찾아온 것이었다.
“물이 풍부한 곳이라, 다양한 과일을 키우면 좋을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사과를 키우셨다고요?”
“예, 고향이 대구라, 대구는 사과의 고장이죠.”
“그렇다면, 사과 농사는 익숙하시겠군요?”
“그렇죠. 사과라면, 어린 시절부터 많이 키워봤으니까요. 하지만, 사과는 키워내기 쉬운 과일은 아닙니다. 묘목을 심어서 7년은 키워야 하니까요.”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래도, 사막에서 사과를 키워내면 남고비의 오아시스 농업도 한단계 도약을 할 테니까요.”
“그러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일이라는 게 적당한 생육 온도라는 게 있거든요. 사과를 키우기에는 사막이 그리 적합하지는 않는 기후죠.”
“하지만, 사막에 적응한 사과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 사과 품종이 있나요? 있다면 한 번 도전해보고 싶기는 합니다. 저도 이 하백 시에 사과 과수원이 생긴다면 좋을 테니까요.”
“기다려 보십쇼. 조만간, 새로운 배와, 사과 품종을 개발할 테니까요.”
“하하, 그렇게 되면, 사과는 제일 먼저 저에게 기회를 주십쇼. 하백의 최초의 사과 과수원 주인이 될 기회를 말입니다.”
***
아사달, 제이에스 농업연구소.
“한유식 부장님, 배와 사과의 종자들을 좀 준비해 주십쇼.”
“배와 사과 말입니까?”
“예, 한국을 대표하는 과일들 아닙니까? 사과와 배는 한국적인 과일들이죠. 추석 제사상에도 올라가는 대표적 과일 말입니다.”
“신품종의 사과와 배를 개발하려는 건가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의 하백에서 사과나 배의 과수원을 만들어볼 생가이었다. 지난번에 만난 김형태가 사과 재배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서 맡겨 보려는 것이었다.
종자 연구소의 책임자인 한유식이, 필요한 종자들을 준비해주자 진석은 사과와 배의 다양한 씨앗들을 가지고, 공간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는 저온 저장고로 향했다.
저온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진석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
공간의 문을 열고, 오아시스로 들어가자 진흙 인간들의 사령관이 진석이 맞이했다.
“공간주님, 오늘은 씨앗들이군요?”
“이건 사과와 배의 씨앗들이야.”
“사과와 배라, 사막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과일 아닙니까?”
“뭐, 꼭 그렇지는 않아.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서도 사과나 배의 재배가 가능할 수 있게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테니까 말이야.”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은 없으니까요.”
“그래, 사령관, 배와 사과를 재배할 과수원을 만들어야겠어.”
“역시, 오아시스의 평지에 말이겠죠?”
“물론이지, 신품종의 사과와 배를 만들어서, 남고비 사막의 신도시인 하백에서 과수원을 만들 거라고.”
하백은 아사달과 비슷한 사막지대기는 하지만, 대규모의 지하수의 개발과, 그에 따른 인공호수 하백호가 있어서, 물의 공급은 더 수월한 편이었다. 주변에 수로가 발달해서,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에 비해서는 물 걱정은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일조량이나 평균 기온이 사과나 배에는 그리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공간의 오아시스는, 일조량이 풍부한 것은 비슷했지만 평균 기온은 온화한 편으로,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작물들도, 무난하게 잘 자라는 기후였다.
“음, 일조량은 비슷하지만, 기온은 좀 차이가 나는데.”
진석이 고민을 하고 있자, 상태창이 나타났다.
-공간주님, 평균 기온을 높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기온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그렇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기온을 높여서, 특수한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온도를 높이시겠습니까?
“그래, 아사달, 아니, 하백시와 비슷한 기온으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고비 사막 지역과 비슷한 기온을 만들겠습니다. 지역은 오아시스의 밭으로 한정하겠습니다.
상채창이 기온을 조정하자, 진석은 오아시스 근처의 밭에, 화백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의 공급은 넉넉하고, 일조량이나 온도는 높은 환경이 화백과 거의 비슷하게 되자, 진석은 일꾼들을 동원해 연구소에서 가져온 사과 배의 씨앗들을 심기 시작했다.
씨앗을 심고, 진석이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하자, 씨앗에서 떡잎이 나오고, 이내, 줄기가 뻗어 나오며,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는 생각보다 잘 자라는 느낌이었다.
“사령관, 이번에는 쉬운 것 같은데,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쑥쑥 자라고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나무는 쉽게 자라는데요.”
그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기대와는 달리, 사과나 배의 열매는 크기도 작고, 열매의 수도 아주 적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무는 잘 자라는 것 같은데, 열매는 형편없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약간, 이런 사막 기후에는 사과나 배는 잘 안 맞는 거 아닐까요?”
수로를 통해, 물의 공급은 충분했다. 그래서, 나무들은 제법 잘 자라는 느낌인데, 수확기가 되어도 열매는 아주 작은 사과와 배가 드문드문 열리는 정도였다.
“할 수 없지, 처음부터 잘 되는 일은 없으니까. 좀 더 나무들이 적응하도록 시간을 줘 보자고.”
진석은 비록 작고 수도 적지만, 그래도 나무에 열매를 맺은 사과와 배에서 씨앗을 채취해, 다시 밭에 심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사령관, 저 사과나무는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진석은 밭에 심은 나무들 중에서, 유난히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다른 나무들은 좀 꽃들이 시들한 느낌인데, 유독 끝쪽에 한 그루에서만은 꽃이 활짝 만개한 느낌이었다.
꽃은 과수나무의 생식능력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꽃이 만개했다는 것은 열매가 풍부하게 맺힐 거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석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자, 꽃이 만발했던 사과나무에서는 다른 나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매가 많이 맺히고 있었다.
그런데..뭔가 열매가 모양이 이상한 모습이었다.
보통, 사과라면, 동그랗게 탐스러운 모양인데, 이 사과는 열매는 많이 맺히고, 크기도 괜찮았지만, 모양이 약간 타원형에 가까웠다. 마치 통통한 고구마 느낌이 나는 모습이었다.
“뭐지? 이게 사과라는 건가?”
진석은 사과나무로 다가가 열매 하나를 따 보았다. 진석이 사과를 따려고 손을 뻗자, 뭔가 물컹한 느낌이 손바닥에 닿았다.
“느낌도 이상하네. 너무 물렁거리잖아. 이제 막 열린 거라 싱싱할 때인데 말이야.”
사령관이 처음 보는 신기한 사과 열매가 신기한지 다가왔다.
“공간주님, 그게 사과가 맞는 건가요?”
“사과는 맞겠지, 하지만 모양이 괴상한데. 뭐지, 이건 물렁물렁, 뭔가 물컹한 느낌이야. 마치, 서양배 같은 그런 느낌인데.”
진석은 프랑스에서 전에 먹어보았던 서양배가 떠올랐다. 물론, 서양배에 비해서도 훨씬 부드럽게 물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껍질을 칼로 까보자, 굉장히 연하고 달콤한 과육이 나왔다. 향이나 맛은 사과와 비슷했다. 오히려 더 달콤한 맛으로 당도는 풍부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물렁거리는 식감이 그냥 먹기에는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뭐지, 사령관, 열매가 많이 열리는 사과나무가 나오기는 했는데, 이건 사과 치고는 너무 무른 느낌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성공을 한 건가요? 실패인가요?”
“글쎄, 우리가 원하던 그런 사과는 분명히 아닌데, 하지만, 이것도 쓸데가 있지 않을까? 당도는 굉장히 높은 것 같거든.”
무른 식감이 그냥 먹기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해서, 갈아서 주스를 만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와 달리, 배는 별다른 변화가 없이, 사막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일단은 뭔가 변화를 보인 사과 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진석은 일꾼들을 동원해 물컹거리는 당도가 높은 사과 열매를 따서 씨앗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대에 그런 특성이 전해지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씨앗을 다시 심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