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밭에서 키우는 벼(3)
사령관의 지휘로 오아시스 일대에 벼들을 재배할 밭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에 논을 만들어서 벼를 재배해 본 적은 있지만, 밭에서 벼를 재배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물을 재배하는 밭이면 충분했다.
따로 물을 채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편리한 점이었다.
“공간주님, 벼는 보통 모내기를 해야 하는 건데, 밭에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벼를 바로 파종하면 된다는 것 같던데.”
진석은 전라도 지방에서 밭에 키운다는 찹쌀 볍씨를 가져와 밭에 일단 뿌려보았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해 보았다.
싹이 피어오르고, 벼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공간주님, 생각보다, 잘 자라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뭐, 논에서 재배하는 것 정도는 아니지만, 저 정도면 잘 자라는 것 같은데.”
단순히 밭을 갈고, 볍씨를 뿌린 것뿐인데, 찹쌀벼가 제법 잘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계속 가속해서 수확기에 이른 찹쌀벼는 쌀알이 적고, 그나마도 쭉정이가 많았다. 잎이나 줄기는 대충 비슷하게 성장하는 느낌이었는데,
쭉정이가 많아서, 수확량은 일반 논의 벼에 비하면, 4분의 1수준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쭉정이가 많은 거지? 충분히 익은 것 같은데 말이야.”
“밭에서 자라는 벼는 아무래도,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음, 역시 그런가?”
진석은 다 자란, 찹쌀벼의 뿌리를 뽑아보았다. 잎이나 줄기에 비해 확실히 뿌리가 얕고, 빈약한 모습이었다.
모든 식물은 뿌리를 통해, 수분과 양분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다. 뿌리는 에너지가 통과하는 송유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통로 역할을 하는 뿌리가 부실하다는 것은 양분의 흡수가 원활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뿌리가 얕다면, 깊이가 깊어질수록 수분이 풍부한 토양의 특징상 수분을 얻을 기회도 적은 것이다.
“역시 뿌리가 약한 것이 문제인가?”
부드러운 진흙 같은 논이라면, 벼의 약한 뿌리로도 양분을 흡수하는데 문제가 없다. 물도 풍부하고, 뻘 같은 논흙은 벼의 뿌리만으로도 충분히 유기물질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찹쌀벼를 밭에 심는 것은 한유식 과장에게 들은 일과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밭에 심는 것이 가능하지만, 수확량은 보잘 것 없는 수준.
“멥쌀도 밭에 심는 것이 가능할까?”
이번에는 같은 밭에 보통 일반쌀이라고 알려져 있는 멥쌀을 뿌려보았다. 볍씨를 뿌리고, 시간을 가속해 보았다. 이번에도 볍씨에서 싹이 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찹쌀벼보다도 성장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찹쌀뼈는 쌀알은 부족해도, 줄기와 잎은 그럭저럭 잘 자라는 편이었는데, 멥쌀벼의 품종들은, 여러 품종들간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성장이 더디고, 당연히 수확기까지 시간을 가속해도 변변한 수확물을 얻을 수가 없었다.
“공간주님, 멥쌀벼는 더 결과가 안 좋습니다.”
“그래, 예전에 공간에서 개량한 경기미도 이렇게 형편없이 성장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경기미라면, 상당히 수확량이 좋은 품종인데, 거의 쌀알도 없고, 이 정도일 줄은..”
사령관도 쭉정이들만 잔뜩 달려 있는 벼이삭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 했다.
“뭐가 문제지? 결국, 뿌리가 약하다는 건가?”
진석은 이번에도 벼들을 뿌리째 뽑아보았다. 다들, 줄기에 비해, 왜소한 뿌리가 뭔가 언밸런스한 모습들이었다.
역시 벼라는 작물의 기본적인 문제인 모양이었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벼, 특히 멥쌀벼는 덥고 습한 지역이 원산지라, 그런 환경에 적합하게 발전한 작물이다.
습지의 부드러운 토양에 얕게 뿌리를 내리는 방식으로 풀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이 멈춘 후에는 단단한 씨앗을 남기게 된다. 아마도, 습지대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씨앗이 단단해야 물에 녹아 내리지 않고 습지의 진흙에서 견디며 발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에 비해, 씨앗이 상대적으로 무른 찹쌀벼는 좀 더 건조한 기후에도 적응력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량으로의 가치는 멥쌀벼가 더 좋은 편이다. 밥보다 떡이라지만, 식량으로의 가치는 떡보다 밥인 것이다.
“일단은, 모종을 키워서, 밭에 한 번 심어볼까?”
“모내기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까?”
“그래, 보통, 씨앗보다는 모종이 성장이나 적응이 빠르잖아.”
멥쌀벼와 찹쌀벼를 모두 볍씨를 키워서, 모종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밭에 모내기를 하는 것처럼, 하나씩 심어보았다. 물론, 물이 찬 논과는 다른 환경이라, 땅을 파서, 하나 하나 고랑에 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멥쌀벼는 금방 말라죽거나 성장이 더뎠고, 찹쌀벼는 그보다는 나았지만, 역시나, 성장 후에 수확량이 적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아닌가?”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진석도 기분이 다운되는 것 같았다.
“공간주님, 어쩌죠?”
“모르겠어, 그냥, 역시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진석은 밭에 볍씨들을 뿌리고 시간을 가속했다. 논에서는 보기 좋게 쑥쑥 자라던 벼들은 밭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잡초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긴, 밭에서도 잘 자랐다면, 굳이 힘들게 논을 만들 필요는 없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진석은 다시 도전할 마음이 생겼다.
“사령관, 일단 시작한 일이니까, 될 때까지 해보자고.”
그렇게 밭에 볍씨를 뿌리고 시간을 가속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공간주님, 이 벼들은 성장이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 이게 찹쌀이야? 멥쌀이야?”
사실, 약간은 지친 기분으로 마구잡이로 볍씨를 뿌리고 시간을 가속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격하게 구분하던, 참쌀벼와 멥쌀벼, 그리고 각 품종들의 구분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뭔가 우연이 개입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여러 가지 품종의 벼들을 구분 없이 마구 심고 수확하고, 다시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작업으로, 뭐가 뭔지도 헷갈릴 무렵, 뭔가, 다른 것들과 다른 새로운 벼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단, 줄기와 잎의 크기가 생장이, 다른 것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굉장히 잘 자란 벼네...”
진석은 사령관이 보고한, 특이한 벼가 자라는 밭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다. 줄기가 상당히 굵다는 느낌이었다. 보통 논에서 키우는 벼들보다도 훨씬 굵은 줄기였다. 그래서 언뜻 봐서는 벼가 아니라, 다른 잡초 같은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더 가속시켜보자, 벼이삭이 나타나고, 이내 알이 굵어지며, 이삭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건, 꽤, 실한 느낌인데.”
진석이 줄기가 굵은 벼의 이삭을 만져보자, 사령관이 낫을 가져왔다.
“한 번 베어서 확인해 보죠.”
“그래, 낫을 줘봐.”
진석이 직접 벼 이삭을 잘라보았다. 아래쪽 줄기가 굵어서, 굵은 잡초 위에 벼이삭이 붙어있는 느낌도 있었는데, 위쪽으로 갈수록, 줄기가 얇아지며 일반적인 벼의 느낌이 나고 있다.
그래서 진석은 두터운 아래쪽은 놔두고, 위쪽의 이삭만 베어내었다.
그리고 이삭을 가지고 오아시스로 돌아왔다. 그냥 손으로 이삭을 만져보고, 손톱으로 한 개를 까보았다. 안에는 단단한 멥쌀벼가 들어있었다. 크기도, 일반적인 쌀알보다 큰 것 같았다.
“사령관, 이 정도면 훌륭한데.”
“그러게 말입니다.”
사령관은 밭에서 베어온 이삭들을, 오아시스의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지난번에 경기미를 개발하면서 맛을 확인하기 위해, 작은 방앗간을 만들어 둔 것이 있었다.
거기서, 쌀을 도정을 하자, 흰 쌀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쌀로 밥을 지을 수 있을지, 또 맛은 어떨지 확인할 수 있는 정도는 됐다.
진석은 오아시스의 저택에서 밥솥에 밥과 물을 넣고 밥을 지어보았다. 전기 밭솥이라,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밥이 완성되었다. 진석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하얀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와, 비주얼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맛은 어떨까? 한 번 먹어봐야지.”
진석은 밥솥에서 밥 한 그릇을 퍼서, 간단한 반찬과 함께 밥을 먹어보았다. 진석이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몇 마리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진석은 먹고 있던, 생선 한 조각을 떼어 주었다.
“야옹..냐아옹..”
“야옹..야아옹..”
한 녀석이 생선 조각을 통째로 물고 달아나자, 다른 녀석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녀석들, 나눠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무튼, 사령관, 밥은 완벽해.”
“오, 그렇습니까? 그럼, 성공적이네요.”
“그래, 그 밭에서 새로 발견한, 줄기가 굵은 벼가 바로 우리가 찾던 녀석인 것 같아.”
밥을 대충 먹고서, 진석은 다시 밭으로 향했다. 이삭을 베어낸, 굵은 줄기의 벼들은 아직 아래 밑둥은 남아 있었다.
진석은 뿌리를 뽑아보려고 벼 밑둥을 잡고 당겨보았다.
“어..”
“왜 그러십니까?”
“이거, 보통 벼들하고는 다른데, 뿌리가 잘 안 뽑혀.”
“공간주님, 제가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진흙 인간의 사령관이 밑둥을 잡고 쉽게 뽑아내었다.
“음, 조금 단단하게 박혀 있기는 하네요.”
사령관은 잔뿌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벼의 뿌리를 진석의 눈앞으로 들어 보였다. 물론, 인간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진흙 인간들은 쉽게 뽑을 수 있었지만, 보통 성인 남자의 힘으로는 뽑히지 않을 정도로 이 굵은 벼의 뿌리는 깊게 박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잔뿌리도 많고, 큰 뿌리도 굉장이 길게 뻗어 있어, 보통의 벼들은 뿌리가 잘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 녀석은 뿌리고 굵고 그에 따라서 밑둥도 굵게 잘 발달하고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벼가 아니라, 옥수수 뿌리 느낌입니다.”
“그래 맞아, 뿌리만 보면, 옥수수와 비슷하군.”
옥수수와도 비슷하고 예전에 진석이 키웠었던, 테오신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아무튼, 뿌리가 잘 발달한 새로운 벼는 일단, 성장이나 쌀의 품질은 괜찮은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단순한 변종으로 한 세대에만 잠시 나타나는 특징인지, 아니면, 그 후대로 이어지며 새로운 종의 출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석은 기대를 가지고 수확한 볍씨들을 다시 밭에 심어 보았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했다.
“오, 공간주님, 볍씨에서 비슷한 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전 세대의 특징이 이어지고 있어.”
다행히 밭에 뿌리 볍씨에서는 다시 굵은 벼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옥수수와 비슷한 뿌리와 하단의 형태도 전과 같은 것이었다.
전에 심었던 벼들은 씨앗을 마구 뿌리는 파종법으로 심은 거라, 벼들이 산재해서 어지럽게 자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밭에 열을 맞추어서 균일하게 파종을 해보았다.
일반적인 벼들보다는 조금 더 간격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밭에 촘촘하게 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논의 벼들과도 비슷했고, 밀밭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공간주님, 규칙적으로 심었더니, 이번에는 완전히 보통 논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밭이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래, 약간, 밀이나 보리밭 느낌도 있고, 벼가 익어가는 모습도 보리밭과 비슷해, 그렇다는 건, 수확량도 괜찮을 거라는 건데.”
본격적으로 신품종의 벼를 재배해서 수확을 시작했다. 일꾼들을 동원해 벼들을 베어내서, 밭의 면적에 대비해 수확량을 계산해 보았다.
“음, 이 정도면, 보통 논의 수확량 수준과 비슷합니다.”
방앗간에서 도정을 한, 쌀을 기준으로 수확량이 얼마나 되나를 확인해 보니, 일반적인 논농사 수준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밭에서 키우는 벼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성공적인 수확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수확량도 좋고, 밥도 맛있고. 도정을 한 쌀의 상태도 매우 양호, 모든 게 완벽해.”
밭에서 벼를 키우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정도면 성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벼를 뭐라고 부르실 겁니까?”
“음, 이름이라, 옥수수벼 어때?”
“옥수수벼요?”
“그래, 뿌리와 밑둥이 옥수수와 비슷하니까, 말이야. 물론, 테오신테를 더 닮았지만.”
“음, 그것도 좋겠네요. 옥수수벼, 옥수수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