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밭에서 키우는 벼(2)
제이에스 본사
“수정 씨, 이제 여기도 마지막인가?”
“왜요?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건데, 서운하세요?”
“그래도, 여기가, 정들었던 곳이잖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빌딩은, 진석이 제이에스를 설립하고 초기에 이사를 온 곳이었다.
회사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더는 회사의 여러 시설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인근의 다른 빌딩을 임대해서 부족한 사무실을 만들어야 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신사옥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송도에서 건설 중이던, 제이에스의 신사옥이 드디어 공사를 마치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상 45층, 지하 15층, 모두 합쳐 60층, 연면적 5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빌딩이었다. 서울 도심에는 인허가 문제나 토지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고심 끝에 송도로 신사옥의 건설지를 결정한 것이다.
대신, 서울에 거주하던 사원들을 위해 송도 사옥 근처에 사원용 아파트도 같이 지었다.
“그래서, 수정 씨는 사원 아파트는 싫다는 건가?”
“송도면, 서울에서 출퇴근 해도 되요. 우리 회사는 퇴근 시간도 빠른 편이고.”
“그건 그렇고, 성제윤 씨와는 잘 되가는 거야? 둘이 결혼할 때가 된 거 아니야?”
“어머, 사장님도, 사장님이 결혼하셔야 저도 결혼하죠.”
“하하, 그런가?”
“사실은 둘이 같이 살아요. 서울의 제 아파트에서.”
“정말?”
이수정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성제윤과 에스제이라는 수입차 판매 회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둘이 사업 파트너를 넘어, 인생의 파트너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형식적인 결혼은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왜? 동거할 거면, 결혼하는 게 좋지 않아? 여자 입장에서는 그냥 동거는 더 부담스럽잖아?”
“사장님, 남자, 여자가 따로 있나요? 그건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고요? 그리고 유럽에 보면 결혼보다는 동거가 대세라고요.”
“그래?”
하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복지모델 국가로 떠올리는 스웨덴 같은 곳은, 결혼보다는 동거 비중이 더 높고, 그러다 보니 동거를 하는 것과, 그런 동거 커플에서 생긴 자녀들이 주류인 것이다.
한국 기준으로는 소수자에 특이한 별종이겠지만, 어떤 이국땅에서는 주류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상과, 이상, 일반과 특이라는 것도 그저 상대적인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한국도 이제 서서히 변할 걸요? 상식이라는 것도 어떤 한 시대의 일시적인 관념일 뿐이라고요.”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재밌어. 그런 거.”
“뭐가요? 남녀가 동거하는 거요?”
“아니, 뭔가 상식이라고 생각되던 게, 뒤집히는 거 말이야. 아무튼, 축하해. 동거든 뭐든, 두 사람 행복하기를 빌게.”
“어머,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세요. 그냥 선남선녀가 연애하고 동거하는 것뿐이라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이수정은 조금 기쁜 얼굴이었다.
아무튼, 신사옥으로의 대규모 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진석이 직접적으로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각 부서의 담당 직원들과, 대규모의 이삿짐 용역 업체가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떡인가요?”
사무실에는 신사옥 이전을 축하하는 떡이 담긴 상자가 여러개 배달 되어 있었다.
“예, 시루떡도 있고. 원래 한국 전통이 그렇잖아요. 좋은 날에는 떡을 해서 돌리는 거니까.”
“후후, 결혼관은 북유럽 스타일이라지만, 아직 식문화는 한국식이라는 건가요?”
“떡 좀 드세요, 아까 먹어봤는데 맛있어요.”
진석은 상자에서 시루떡을 꺼내 한 조각 맛을 보았다. 찹쌀이 들어간 떡은 부드럽고 쫀득쫀득한 식감이었다.
“아직, 사옥 이전은 좀 여유가 있으니까, 난 시골에 좀 다녀올게.”
“시골요?”
“그래, 부모님한테 사옥 구경 좀 시켜드리려고 하는데 잘 안 오시려고 하네.”
“그래서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 이 떡은 내가 가져갈게. 아버지가 시루떡을 좋아하시거든.”
진석은 떡 상자 하나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
시골집, 과수원..
“아버지, 저예요.”
“오, 진석이구나. 웬일이냐? 아침부터..”
“내일 안 오실 거예요? 사옥 이전식이 내일인데.”
“녀석, 거기는 회사 아니냐, 진석이 네가 사장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잖아. 괜히 가봐야 사장님 아버지라고 부담스러워 할 거 아냐?”
“아버지도, 그러면 좀 어때요? 멋지고 큰 건물로 이사를 가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새로 지은 빌딩이 얼마나 큰 지 보고 싶지 않으세요?”
“허허, 나중에 한 번 가보마. 나중에 조용히 몰래 한 번 엄마랑 같이 가서 보고 오면 되지.”
아버지는 사옥 이전식에 아무리 오라고 해봐도 한결같은 대답이셨다.
“할 수 없죠. 그럼, 나중에라도 한 번 엄마랑 같이 오세요. 정말, 크고 좋은 건물이거든요.”
“그래, 그런 말만 들어도 아버지도 뿌듯하다. 나도 뉴스도 듣고, 여기저기서 들어서, 우리 아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잘 알고 있어.”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셨지만, 그래도 아들의 성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으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사업이나 회사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무 말도 하시지 않는 아버지였다.
대신, 가끔 이렇게 시골에 내려오면 맛있는 음식이나, 직접 키우신 과일이나 채소를 먹어보라고 주시는 게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러실 것 같아서. 이거라도 가져왔어요.”
“그게 뭐냐?”
“신사옥 이전 기념 떡이에요. 시루떡도 있어서, 제가 한 상자 가져왔어요. 아버지 시루떡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떡이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어디 하나 먹어보자.”
아버지는 떡 한 조각을 잘라, 입에 쑥 밀어 넣으셨다.
“어떠세요? 떡집에서 한 떡이라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음, 맛있는데 집에서 만든 떡보다 더 맛있다. 요즘은 떡집 떡도 훌륭해. 아주 맛있어.”
“예전에는 집에서도 떡을 많이 해 먹고는 했었죠? 아버지.”
“물론이지, 떡은 집에서 해서 제사에도 올리고 그랬던 거지, 떡집에서 사 먹던 건 얼마 되지 않아.”
“음, 시루에 말이죠?”
“그래, 너도 아는구나. 원래, 시루에 떡을 쪄서, 여러 제사에 쓰고는 했지, 그걸 시속음식이라고도 하고 말이야. 요즘은 민간에서 밥으로 제사를 지내고 떡은 넣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전통을 따지자면, 제사에는 시루에 찐 떡을 올리는 게 맞는 예법이지.”
진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업식 같은 일에 떡을 만들어 돌리는 것도 전통에 맞는 거군요.”
“그래, 그런 셈이지, 좋은 날에도 조상이나, 아니면, 하늘에 떡을 바치면서 예를 올리는 것이니까.”
“자, 그러다 떡 다 드시겠어요. 안에 들어가서 어머니랑 같이 먹어요.”
“하하, 그럴까...”
***
송도, 제이에스 신사옥.
“자, 이진석 사장님, 이쪽 봐주시고요. 좀 웃어주세요.”
진석은 새로 이전하는 신사옥 앞에서 앞에 걸린 테이프 컷팅을 앞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케익 커팅을 하듯, 이 사옥에 처음 들어가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미 직원들이며 집기들이며 다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었다.
하지만, 상직적인 행위라는 것은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전통이나 에티켓 등도 다 그런 상징적인 행동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사장님이 가운데에서 가위로 테이프를 잘라 주세요. 바로 지금..”
옆에는 이수정과, 유민지를 비롯한 회사의 중역들과, 지역의 정치인들, 방송국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진석이 가위로 테이프 중간을 잘라냈다. 동시에 요란한 폭죽이 터지고,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사장님, 축하드려요.”
“그래, 다들 고생했어요. 자 다 같이, 우리의 새로운 신사옥으로 들어갑시다.”
송도에서 제이에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진석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작은 꼬마 빌딩에서 시작한 제이에스 그룹이 이런 현대적인 초대형 빌딩으로 발전한 것이다. 마치 작은 씨앗 하나가, 점점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그것은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진석은 지나온 시간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시간을 가속해, 진석의 제이에스를 순식간에 키워 버린 것처럼 말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끝없이 축하와, 꽃다발, 그리고 악수, 포옹,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정신없는 사옥 이전식이 끝나고 나서야, 진석은 겨우 펜트 하우스에 자리잡은 사장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
제이에스 빌딩, 펜트하우스
말 그대로 끝내주는 전망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걸을 좋아하는 진석은 일부러 가장 높은 펜트하우스에 사무실을 만들었다. 새로 지은 건물, 그리고 새로 지은 도시, 아직 발전단계의 도시였지만, 높은 빌딩 숲은 외국의 대도시 같은 이국적인 풍광을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멋진 모습이군.”
송도에 신사옥을 건설하면서, 진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송도를 신사옥 부지로 선정을 한 것은, 토지를 구하기 쉽고, 높은 고층 건물 건설이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새롭게 지어지는 도시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진석도 몽골의 사막지대에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마천루가 들어서는 송도를 보고 있으면, 언젠가 아사달도 이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도시로 발전하기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송도 일대를 진석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지은 빌딩이라, 모든 시설이 최신식이었다. 이곳 진석의 집무실, 펜트하우스의 공간도 면적만 2백 평 이상의 공간으로, 모든 편의시설이 다 갖추어진 진석의 완벽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여기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정도였다.
“슬슬 일을 시작해 봐야겠는데.”
진석은 집무실 한 편에 쌓아놓은 여러 가지 종류의 볍씨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걸 가지고, 공간에서 새로운 벼를 개발하는 일을 해야 했다.
이미, 이곳 집무실에도 공간으로 이어지는 출입구를 만들어 놓은 상태, 진석은 멋진 전망을 뒤로 하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
“공간주님, 오늘은 씨앗들을 가지고 오셨군요. 이거 볍씨 아닌가요?”
“그래, 사령관도 잘 알고 있군, 이건 벼의 씨앗이야. 여러 종류의 벼들의 씨앗을 가지고 왔지.”
사령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벼라면, 이미 여러 품종을 개발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품종이 필요해.”
“다른 품종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논이 아니라, 밭에서 키울 벼가 필요하다는 거지.”
“예, 벼를 논이 아니라, 밭에서 키우시겠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야,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원래 밭에서 키우는 찹쌀벼가 오래전부터 밭에서 재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음, 그렇군요. 하지만, 찹쌀벼라면, 찹쌀이 나온다는 말인데, 보통은 멥쌀을 먹지 않습니까?”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통 쌀이라면, 단단한 멥쌀을 먹는 게 일반적이지, 쌀로 밥을 짓는 게 쌀문화권의 식문화니까, 물론 찹쌀을 이용해 떡을 만들지만, 간식이나 특별한 날 먹는 정도니까. 쌀은 멥쌀이 표준이야, 그리고 찹쌀이라고 해도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보통이고.”
“음, 아무튼, 공간주님께서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사령관, 단순히 호기심에 이런 걸 하는 건 아니야, 사막에서 쌀을 재배하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사막에 논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진흙 인간의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밭에서 재배 가능한 벼로, 사막에서 쌀을 생산하시겠다는 말이군요. 쉽지는 않겠지만, 성공한다면, 엄청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멋지게 도전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당장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