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블루 나일의 르네상스(4)
압둘 카심 대통령은 이집트의 재벌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본인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집안 자체로 보면 사업가 집안으로 압둘 카심을 비롯한 형제들이 모두 유럽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협박은 아닙니다. 제가 좀 직설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통령께 지금의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을 해결할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카심 대통령은 여전히 노기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진석의 제안에 호기심이 생기는지, 눈빛은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정확하게 그 제안이라는 게 어떤 겁니까? 구체적으로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에티오피아가 블루 나일에 르네상스 댐을 건설하려는 이유는 전력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전력 생산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국가니까요.”
“그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 생산 때문에, 이집트 농부들이 고사해도 상관없다는 그런 발상은 알라신도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석은 약간 흥분한 자심 대통령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일단, 에티오피아의 아스파 대통령은 기독교도입니다. 알라신이 용서를 안 하신다고 해도, 아스파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라는 거죠.”
“하하, 재밌는 양반이군요. 이슬람 종교 원로들이 당신을 만나보라고 해서 만나기는 하지만...”
“카심 대통령님, 전, 그 이슬람의 종교 원로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면담에 응해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통령님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드리려는 목적으로 온 거지, 제 이익을 위해서 온 건 아니라는 거죠.”
“나일 델타의 이권을 달라면서 이익을 위해서 온 게 아니라는 건 또 무슨 궤변입니까?”
“그거야, 에티오피아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울 비용을 얻기 위한 거죠. 아니면, 이집트가 직접 그 비용을 지불하시던가요?”
“이집트가 에티오피아에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 돈을 지불하라는 겁니까?”
“하하,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이집트의 세금으로 에티오피아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다니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겠죠? 이집트 국민들이 그런 정책을 참지는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떤 나라 국민들이, 다른 나라에 그런 시설을 자기 나라의 세금으로 짓는 것에 찬성할까요?”
“하지만, 르네상스 댐을 막기 위해서는 수력 발전소를 대체할 전력 수단을 제공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한다는 겁니까? 왜 에티오피아의 마음대로 그런 일을 벌이는 걸 두고 봐야 하죠? 원자력 발전소는 왜 지어줘야 하고요?”
“진정하시죠. 블루 나일은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해서 에티오피아를 흐르는 강입니다. 특히 간의 상류는 모두 에티오피아의 영토고, 현재의 국제법 체계에서 자국을 흐르는 강물을 막거나 댐을 쌓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흥, 맘대로 하라죠.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군사력도 생각하고 있다는 점만 알아 두시죠.”
“하하,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미국이라고요? 미국이 개입하면, 다른 이슬람 형제국가들도 참고 있지 않을 겁니다. 이슬람 국가를 침공하는 미군을 가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자자, 진정하시죠. 정말, 그런 식으로 자기 입장만 고수하다가는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대통령께서는 그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요? 정말 무례하군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 누가 미국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겁니까?”
“미국이라도 항상 이긴 건 아니죠. 베트남 전쟁을 잊은 겁니까?”
“베트남은 베트남군을 지켜준 정글이 있었죠. 이집트는 사막의 나라인데,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폭격을 시작하면 어디로 숨으실 생각이십니까?”
“자꾸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는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대통령께서 너무 흥분하신 것 같아서, 좀 진정시켜드리기 위해서 강한 표현이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은 안 된다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압둘 카심 대통령은 조금 다혈질이기는 했지만, 사업가 집안의 아들답게,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흥분했던 기분을 풀고는 조금씩 진석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제가 좀 흥분했던 모양이군요.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러니까, 제이에스 그룹이 블루 나일의 르네상스 댐 대신에, 에티오피아에 원자력 발전소를 제공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죠. 그렇다고 제가 제 개인 돈으로 발전소를 건설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래서 대신 나일 델타의 농업 개발권을 원하는 겁니다.”
“농업 개발권이라는 게, 농지를 개발하겠다는 겁니까? 나일 델타는 이미 그 지역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그들을 땅을 뺏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땅을 빼앗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종의 투자를 하겠다는 거죠. 나일 델타는 고대로부터 농사를 짓던 곡창지대지만, 현재는 다른 농업 선진국들에 비해 무척 낙후된 농업 지역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사실, 나일 델타는 고대 이래로, 풍요로운 퇴적지대로, 나일강의 범람으로 해마다, 다시 쌓이는 퇴적물 덕에, 따로 비료도 필요 없고, 나일강에서 나오는 풍부한 수량으로 가뭄 걱정 없이, 손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요로움이 오히려, 농업기술의 발전에는 방해요소가 된 셈이었다.
별다른 기술 없이도 농사가 잘되다 보니, 현실에 안주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범람하는 강의 특성 때문에, 농지가 범람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현상도 있어서, 작은 규모의 소작농을 넘어서는 대규모 기업농의 발달이 저해되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아스완 댐의 건설로, 강의 범람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상황이다. 물론 강의 범람이 사라지며, 퇴적물이 줄어 땅의 비옥함은 많이 줄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범람이 사라지면서 안정적인 농토가 유지되며 좀 더 규모가 있는 기업적인 농업의 기회가 열린 셈이기도 했다.
“이집트의 농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제이에스 그룹이 나일 델타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면, 농업 생산도 늘어나고, 또 대규모의 유통 시장도 얻게 되는 거죠. 이집트의 농산물이 이집트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수출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겁니다.”
“이진석 사장의 장밋빛 전망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들리지만, 외국의 기업에게 그런 이권을 준다는 게..”
카심 대통령은 이방인에 이교도인 진석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제가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는 건,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당신은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요. 이집트는 엄격한 이슬람 국가라는 겁니다. 외국인이나 이교도에게는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죠.”
“제가 알기로 이슬람 국가들은 율법을 중시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죠. 안 그런가요?”
“율법 학자들이 결정을 내리면, 보통은 국민들은 수긍하는 편이죠. 하지만 율법 학자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입니다.”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습니다. 저를 대통령께 소개한 이슬람 종교 지도자 회의가 율법 학자들에게 적당한 압력을 넣어줄 겁니다.”
“저..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이미, 이슬람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보면 아시겠지만, 제이에스 그룹이 나일 델타에 투자를 하고 사업권을 얻는 것에 이슬람 율법 학자들은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릴 겁니다.”
“음, 그렇다면..”
압둘 카심 대통령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대통령께서는 전혀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제기되면, 율법 학자들에게 문의를 해서 결정하자고 하십쇼. 율법 학자들은 우리들 편이니까요. 그리고 나서, 에티오피아에 발전소를 건설하고, 르네상스 댐이 물이 막지 않아서 나일 델타의 물공급이 원활하게 되면 모든 공로는 대통령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에티오피아와의 갈등이 잘 마무리되면, 그 업적을 바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도 승리하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제안 아닌가요?”
카심 대통령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진석 사장이 말한대로, 이집트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면, 바로 율법 학자들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그리고 그 판결을 따르는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럼, 이걸로 거래를 받아들이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이진석 사장님의 말대로만 되면, 저로서도 이득이죠.”
***
에티오피아 대통령궁.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스파 대통령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진석은 그간의 일들을 간략하게 아스파 대통령에게 설명해주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이집트의 대통령과 유력 인사들을 만난 이야기들, 물론,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 편집한 내용으로, 보이지 않은 숨어 있는 세계 정부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에티오피아 대통령이 알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동의도 얻고,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에티오피아에 건설하겠다는 거군요? 이집트의 나일 델타의 개발권을 얻는 조건으로 제이에스 그룹이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아스파 대통령은 약간 놀란듯했지만, 진지하게 내용을 곱씹어보며,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생각해 보는 듯했다.
“굉장한 이야기군요. 사실이라면, 이집트와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킬 기회기는 한데, 문제는..”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라도 있으신가요?”
“원자력 발전소 말입니다. 그런 시설은 에티오피아가 운영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금이야, 제이에스 그룹이 부담한다고 해도.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할 인력이나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핵시설 아닙니까?”
“그 문제라면 제이에스 그룹이 발전소의 운영과 폐기물의 처리까지 모든 걸 책임지겠습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그저, 전력을 무상으로 공급받기만 하면 되는 거죠.”
“괜찮은 조건이군요.”
“그렇습니다. 전력의 무상 제공, 그리고 이집트와의 분쟁도 해결되고, 거기에 추가로 제이에스 그룹이 에티오피아의 농업에도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농업 분야를 지원하겠다는 겁니까?”
“예, 에티오피아는 블루 나일의 영향으로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니까요. 지금은 농업 생산이 지지부진하지만, 전력도 공급되고, 여러 분야에서의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죠. 농업 분야도 잠재력이 큰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투자를 통해서 에티오피아와 서로 윈윈하고 싶은 겁니다.”
“르네상스 댐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말인가요?”
아스파 대통령은 이미 마음이 기운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농담처럼 물었다.
“조건이라기보다, 르네상스 댐을 포기하면서 얻게 되는 이익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온 용어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배했던, 제국주의 국가 아닙니까? 르네상스라는 용어로 블루 나일을 더렵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하하, 역사적인 문제까지 지적하시는군요. 뭐, 사실, 역사적으로는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혈맹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게 말입니다. 에티오피아를 위해서 저희도 뭔가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을 위한 기금도 마련하고 말이죠.”
“음, 참전용사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말인가요?”
“예, 기왕이면, 새로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에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을 고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뭔가 한국과 에티오피아와의 우호관계를 드러낼 수도 있고 말이죠.”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아무튼, 한 번 해보기로 하죠. 이제 르네상스 댐 같은 건 잊고, 진짜 블루 나일의 르네상스를 열어보는 겁니다.”
“좋습니다. 저도 에티오피아의 발전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겠습니다.”
***
대통령궁을 나오자 박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석 사장님, 이번에는 이야기가 잘 된 겁니까?”
“그래, 완벽하게 해결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