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욕의 곡물왕 (128/183)

145화. 뉴욕의 곡물왕

뉴욕, 맨하튼, 트루진스키의 아파트

“얼굴 보기가 힘들군요.”

트루진스키는 진석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여기저기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트루진스키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온, 국제 곡물 카르텔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이진석 사장님의 사업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제, 제이에스 그룹의 영향력은 정말 막강해졌죠. 과거에 곡물 카르텔이 가졌던 파워 이상입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 시작단계일 뿐이죠.”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이에스 그룹이 계속 성장해 가면, 국제 곡물 카르텔은 무용지물이 될 겁니다.”

“음, 하지만, 제이에스 그룹과 국제 곡물 카르텔이 서로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같은 거 아닌가요?”

진석의 말에, 트루진스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표가 같다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트루진스키 씨도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망명을 오신 거 아닙니까. 뉴욕으로요, 정치적이기도 하고, 경제적 망명이기도 하죠.”

“음, 그래서요?”

“결국, 국제 곡물 카르텔이라는 것도, 각국의 정치로부터 곡물 거래 시장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려는 시도 아니겠습니까. 즉, 정치로부터, 시장을 독립시키자는 거죠. 그렇게 해서, 가격을 안정적으로 전세계에 곡물을 공급하는 게 우리의 공동의 번영을 지키는 일이죠.”

“이진석 사장의 제이에스 그룹도, 시장의 안정과 공동번영을 추구한다는 겁니까?”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경제라는 건, 들쭉날쭉한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이 가장 좋죠. 석유 같이 정치적 상황에 자꾸 휘둘리는 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동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석유 가격 때문이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의 보이지 않는 주류가 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원하는 건, 세계의 자원을 미국을 위해서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거죠. 그게 석유든 곡물이든, 그 외에 다른 천연자원이든 결국은 소비대국 미국을 위해서 합리적 가격으로 안정적인 공급이 되어야, 미국의 경제가 발전할 거라는 전략이죠.”

“그리고, 그 정책에 반하는 세력은 제거하고 말이죠. 전쟁이든 뭐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석유 시장에서는 푸틴이 그런 교란자였죠. 옐친 이후로 러시아의 석유 산업은 다국적 기업들의 손에서 벗어나 올리가르히들이 지배하며 미국의 지배력에서 벗어났으니까요.”

“하지만 푸틴은 아직도 건재하지 않습니까?”

“러시아는 군사대국이죠, 미국으로서도 모든 적을 다 제거할 수는 없는 거죠. 하지만 아프리카나, 남미의 석유 시장 교란자들은 미국에 의해서 제거를 당했습니다.”

“국제 곡물 시장도 미국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까?”

옆에서 주앙 곤잘레스가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계의 번영을 위해서 시장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건 미국의 이익과도 일치하는 겁니다. 상부상조라고 할 수 있죠.”

트루진스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제 나는 뉴욕을 떠날 생각입니다.”

“러시아로 돌아가는 건가요?”

“예, 푸틴이 돌아오라더군요, 그 동안의 일은 모두 사면해주고, 재산이나 이전의 사업도 돌려주겠다는 거죠.”

“음,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진석의 말에, 트루진스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푸틴은 못 믿을 사람이지만, 푸틴의 힘도 약해졌죠. 마치 나처럼 말입니다. 푸틴도 나도 나이도 먹고 가지고 있던 힘과 영향력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도 이제 푸틴의 후계자를 찾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하죠.”

“푸틴도 트루진스키 씨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말이군요?”

“맞아요, 믿을 수 있는 상대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뿐이죠. 우리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당분간은 푸틴과도 협력하면서 잘 지낼 겁니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트루진스키는 뉴욕 생활도 지쳤다고 했다. 화려한 뉴욕의 사교계에서 매일 파티를 벌이며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늘 고향인 러시아가 그리웠다는 것이다.

“난, 모스크바 출신입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여름이면, 시골로 내려가서 작은 텃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휴가를 보내죠. 조용한 러시아의 시골도 그립고, 겨울이 되면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추운 모스크바의 추위도 그립고. 아마도 향수병에 걸린 모양이에요.”

트루진스키는 뉴욕에서는 뭘 해도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의 결심은 확고한 것 같았다. 그는 조만간 러시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 무슨 말인가요?”

“나 대신, 이진석 사장이 국제 곡물 카르텔의 수장이 되던가, 아니면 국제 곡물 카르텔은 이제 해체하는 거죠.”

트루진스키의 말에, 다른 카르텔 멤머들이 모두 진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황스럽네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카르텔의 힘은 약해져서, 내가 떠나면 유명무실해질 겁니다. 물론 이진석 사장님이 카르텔을 맡아 주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트루진스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동안 국제 곡물 카르텔을 지배하던 것은 러시아의 대재벌 트루진스키였다. 하지만, 그가 고향인 러시아로 귀국하고 뉴욕을 떠난다면, 카르텔은 힘과 지도자를 동시에 잃고 무너져 버릴 것이다.

국제 곡물 카르텔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아직, 국제 곡물 시장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대립한다. 남미의 국가들이나 아프리카 국가들도, 미국이나 캐나다와 여러 가지 갈등이 있다.

중동의 나라들도 마찬가지고, 아시아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런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 세계인의 주요 식량인 곡물 시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정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잡고 있는 것이, 비공식적인 국제 곡물 카르텔이다. 그들은 국제 정치와는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제 곡물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국제 곡물 카르텔이 무너져내린다면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약소국들은 식량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셰계 식량 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혼란을 막을 방법은 국제 곡물 카르텔을 유지하고, 더 강화시키는 것뿐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트루진스키 씨를 대신해서, 카르텔을 맞아 보죠.”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좀 안심이 되는군요.”

주앙 곤잘레스를 비롯해서 카르텔 멤버들도 박수를 치며 진석의 결심을 환영했다.

“이제 뉴욕의 새로운 곡물왕이 탄생했군요.”

트루진스키가 진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조금 과분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트루진스키의 말대로 진석은 뉴욕의 곡물 카르텔의 수장이 된 것이다.

카르텔 멤버들이 진석을 새로운 곡물왕이라고 부르며 간단한 파티가 즉석에서 벌어졌다.

한참 파티가 무르익을 때쯤, 트루진스키가 자신의 서재로 진석을 따로 불렀다.

“또 무슨 일인가요? 아직 할 말이 남은 겁니까?”

“진짜는 지금부터죠. 곡물 카르텔을 이어받게 됐으니,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시켜 줄 사람요?”

트루진스키는 흥청거리던 파티와는 달리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카르텔은 오래전부터, CIA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CIA라면 미국 정보국말입니까?”

“예, 원래 CIA는 해외에서 다양한 첩보 활동을 하고 있죠. 그들이 하는 일은 사실상, 범위라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의 국익에 관한 거라면 모든 분야, 모든 나라, 모든 사람, 모든 일들에 관여하죠.”

“국제 곡물 시장도 그 중 하나겠군요?”

“맞아요, 국제 곡물 시장은 미국에게 아주 중요한 산업이죠. 아시다시피 미국은 세계최대의 농업 수출국입니다. 미국에서 농업은 산업적으로도 중요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산업입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국은 전후 피폐해진 세계에 막대한 원조를 하며 그 영향력을 확장 시켰다. 그런 해외 원조의 첨병이 되었던 것이 바로 막대한 미국의 농업 생산력인 것이다.

광활한 영토와, 중부의 미개척지를 거대한 기업형 농업지대로 개발한, 미국 농업은 막대한 생산량과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생산성을 무기로 세계의 농업, 특히 수출과 저장이 용이한 곡물 생산으로 전세계에 식량을 공급하는 주요 생산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량 공급 능력은 농업 종사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동시에 식량 부족 국가들에 막대한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강력한 군사력과, 문화 산업, 그리고 농업 생산력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요한 힘들인 것이다.

미국의 CIA는 국제 곡물 카르텔의 존재를 이미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CIA와는 어떤 협력을 한다는 겁니까?”

“뭐, 특별히 위험한 일들을 벌이는 건 아닙니다. 결국 CIA도 국제 곡물 시장이 안정화 되기를 바라는 거죠. 미국의 농가들이 수출을 하려면, 시장이 안정적인 게 좋으니까요. 물론, 가끔씩, 특정 국가를 압박하라고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음, 보통은 시장의 안정을 추구하지만, 가끔씩 식량을 정치적 무기로도 이용한다는 건가요? 거기에 우리 카르텔도 협력을 하고 말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우리는 전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위협을 당하기도 하죠. 나처럼 말입니다.”

트루진스키는 미국 망명 때부터, CIA의 보호를 받아왔고, 그가 국제 곡물 카르텔을 운영하면서 CIA와의 관계는 더 돈독해진 모양이었다.

CIA는 전세계에 걸친 첩보망을 동원해 국제 곡물 카르텔의 멤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다양한 사업이 가능하도록 뒤에서 지원을 해준 것이다. 그리고 국제 곡물 카르텔도 CIA의 요구를 일정수준 들어주며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제 내 시대는 끝났습니다. 뉴욕의 곡물왕은 이진석 사장님이죠. 새로운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CIA를 상대해야 하는 것도 이진석 사장님입니다.”

***

맨하튼 센트럴 파크.

아직, 이른 아침, 센트럴 파크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진석도 잠시 달리다 걷다가를 반복하다가, 커다란 오크 트리 앞에서 멈추어 섰다.

“달리기를 잘 하시는 군요.”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짧은 머리는 군인 같은 인상이었지만, 어딘지 지적인 모습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톰 하든이라고 합니다.”

톰 하든은 오크 트리 아래로 진석을 데리고 갔다. 벤치에 앉자, 들고 있던 물병을 권했다.

“여기에 무슨 약물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니겠죠?”

톰 하든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편의점에서 산 겁니다. 마시기 싫으면 그만두고요.”

“아뇨, 마침 목마르던 참입니다.”

진석은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CIA에서는 왜 저를 만나자는 겁니까?”

“트루진스키가 러시아로 돌아가고, 국제 곡물 카르텔의 보스가 교체되었다면서요?”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트루진스키와 우리는 한동안 잘 지냈죠. 그는 푸틴의 암살자들로부터 보호가 필요했고, 우리는 그가 가진 재력과, 국제적인 영향력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앞으로도 국제 곡물 카르텔과 그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음, 뭐, 하지만 세상은 변했죠. 곡물 카르텔도 전과 같지 않아요. 미국의 농업도 변화를 맞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지난 10년과 비교했을 때,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CIA와 국제 곡물 카르텔과의 관계도 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전과 같을 수 없다고요?”

“CIA든 누구든, 세계 곡물 시장을 교란시킨는 일을 명령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뭐든 말입니다.”

“하하, 재밌는 분이군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것도 시장의 안정이죠. 혼돈이 아니라.”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사실 전 트루진스키처럼, 특별히 정치적인 적이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보호도 필요없고요.”

“음, 그러시군요. 하지만, 세계적인 비즈니스맨이라면, 언젠가는 우리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아무튼, 일단은 전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군요. 협력하면서 말이죠. 서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움도 요청하고요.”

“좋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협력관계죠. 강제적이거나 의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강요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뉴욕의 곡물왕이 되셨군요. 전, 더 뛰어야겠군요.”

톰 하든은 일어서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조깅을 하는 무리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나도 다시 뛰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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