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그냥 먹는 오렌지(2)
남고비, 아사달.
한국에서 파견된 의사들이 도착하자, 그날 저녁 간단한 파티가 벌어졌다.
“도영준이라고 합니다.”
“이진석입니다.”
“이성우라고 합니다.”
도영준은 아사달에 도착한, 한국의 의료지원팀의 팀장이었다. 한국 의사들 중에 몽골 사막으로 오겠다는 의사는 전무한 실정이라, 오명진 대통령에게 특별히 부탁해, 공중보건의들이 대거 파견을 와 있었다.
물론, 대신. 이 오아시스 일대의 모든 공사는 한국건설 회사들이 맡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건설 시공능력이 좋은 한국 기업들이 아니고는 이 사막에 도시를 건설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진석은 그런 조건으로 의사들을 파견받는 것에 만족했다.
대부분 공중보건의로 의사로서의 경험은 의대생 수준인 의사들이었지만, 팀장인 도영준은 대학병원의 외과 전문의 출신이었다.
“그런데 도영준 박사님은 어떻게 지원을 하시게 된 겁니까? 보통 의사들은 여기 오기를 싫어하던데?”
“하하,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쫓겨난 거죠.”
도영준은 외과 과장은 맡고 있었는데, 응급 수술 환자들에게 수술비를 받지 않고 수술을 해주다가 병원장에서 미운털이 박혔다는 것이었다.
“가끔 급하게 오는 응급 외상 환자들이 있는데, 보호자랑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래서 급하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치료비 부담 문제로 못 하게 되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 지니까,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고, 수술부터 하는 거죠.”
보통은, 보호자가 나타나 치료비를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형편이 어려워서 그냥 환자를 버려두고 도망가는 보호자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수술 비용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 게 누적되다 보니까, 병원에서도 싫어하고, 저도 눈치가 보이던 참에 몽골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모집 광고를 보게 된 거죠. 월급도 괜찮고요.”
“우리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군요. 하하...”
다행히, 한국 병원에서 적응을 잘 못 하던, 도영준이 이곳으로 오게 돼서, 그래도 베테랑 외과 의사 하나는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도영준은 병원 내의 정치에는 서툴렀던 의사지만, 의료인으로서의 능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거기에, 공중보건의들도 수십 명이 파견을 와서, 당장 급한 진료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었다.
“의사 선생님들이 도착하셔서 병원은 해결이 됐는데, 이제는 학교가 문제군요.”
“학교요? 여기에 학교도 있나요?”
도영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예, 건물만요. 아직, 학생들도 없고, 선생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오기 전에 선생님들이 먼저 준비하고 있어야겠죠.”
“학생들이면, 어린아이들 아닙니까, 이런 곳에 아이들이 올 일이 있나요?”
“도영준 박사님, 저는 이 사막의 도시들을 진짜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마치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말이죠.”
진석의 꿈은 라스베가스처럼, 아무 것도 없던 사막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에 주민과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바로 이 몽골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에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 정착해서 살 주민들이 필요했다.
“라스베가스는 마피아들이 만든 도시죠, 도박장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렇다는 말도 있더군요. 우리는 카지노 대신에 농장을 만들고, 이런 포도를 재배하고 있죠.”
의료진을 위한 환영 파티에는 오아시스에서 재배한 포도도 나왔다.
“음, 이게 이곳 아사달에서 재배한 포도라는 거죠? 굉장히 달고 맛있네요.”
“사막자두포도라는 신품종입니다. 나무 모양도, 자두나무와 비슷하죠. 아마 포도가 열린 걸 보면 박사님도 놀라실 겁니다.”
***
자두포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수종이었다. 그 다음날, 진석은 의사들을 데리고 자두포도 숲을 보여주었다.
“와, 이게 진짜 포도나무인가요?”
도영준을 비롯한 의사들은 자두포도나무를 보고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고 있는 나무는 자두나무를 베이스로 한 큰 나무였고, 가지에 열리고 있는 포도의 양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이진석 사장님은 굉장히 놀라운 분이군요. 이 사막에 도시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놀라운 포도나무는 정말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하하, 생산량이 엄청난 포도죠. 사실, 물의 공급량이 더 많으면 수확량은 더 늘어날 겁니다. 아직은 모래흙이라, 수분 손실이 많은 편이라, 하지만 점점 토질도 좋아지면 포도 생산은 더 늘어날 겁니다.”
“이성우 박사님에게 듣기로는 와인도 만들 거라던데요?”
“예, 포도는 와인 생산용이죠. 아무래도 포도 자체로는 수익성이 적으니까요. 그 외에 올리브는 가공해서, 올리브유를 만들고, 오렌지는 주스로 가공할 계획이죠.”
진석의 말에, 도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렌지도 있었나요?”
“아직은 본격적으로 재배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이 자두포도나무처럼, 자두나무를 베이스로 한, 오렌지 나무도 개발했죠. 이제 본격적으로 오렌지도 수확할 예정입니다. 껍질이 얇아서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신품종의 오렌지죠.”
“오, 그래요. 그러면 혹시 오렌지로 와인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오렌지로 와인요?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와인이라는 게 포도를 이용한 과실주니까요. 사실 과일을 이용해서 와인을 만든다는 건 과실주를 만든다는 의미죠. 관념의 문제라는 겁니다.”
“음, 오렌지 와인이라?”
“외국에서는 이미 오렌지 와인도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와인에도 좀 관심이 있는 편이거든요.”
“음, 그러시군요. 뭐, 그건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해봐야겠지만, 참고하겠습니다. 오렌지로 주스를 만드는 것보다, 와인이라면, 더 경제성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여기에 오렌지 나무들도 들어서면, 정말, 멋진 오아시스 도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이지석 사장님이 원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이 도시를 찾아오겠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리우데자네이루, 이파네마 해변.
뜨거운 사막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몸도 마음도 뜨거운 열기에 지쳐가는 것 같았다.
진석은 남반구의 리우데자네이루의 해변으로 휴가를 떠났다. 이파네마 해변에 작은 집에서 진석은 기타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해변에 나가서, 수영도 하고 말이다.
진석이 이파네마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앙 곤잘레스가 찾아왔다. 주앙 곤잘레스는 국제 곡물 카르텔의 일원으로 브라질에서 여러 가지 농장들과, 농작물의 유통을 하고 있었다.
“이진석 사장님이 이파네마 해변에 출몰하신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하하, 출몰요? 제가 무슨 야생 동물이라도 되나요.”
“브라질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휴가차 온 겁니다.”
진석은 집 안으로 주앙 곤잘레스를 안내했다. 해변의 작은 집이었다. 물론, 비좁은 정도는 아니고, 상당히 쾌적한 수준의 면적은 가지고 있는 집이었다.
“집이 아담하고 좋네요. 위치도 해변이라, 밤에 해변에 나가서 산책하면 좋을 것 같군요.”
“그나저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뭐, 사업에 관한 이야기죠.”
“사업이라면? 어떤?”
“밀이 좀 필요합니다.”
“밀요?”
주앙 곤잘레스는 올해, 브라질의 밀과 옥수수 작황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상이변인지, 가뭄도 있었고, 북부의 밀 재배 지역에 홍수 피해도 있어서, 이래저래 밀의 작황이 좋지 않고, 브라질 전체의 밀 수급이 원활하지 않는 상황이죠.”
“그런 문제라면, 트루진스키에서 말하면 되지 않나요?”
“하하, 트루진스키는 이제 늙었습니다.”
“늙어요?”
“실제로 나이도 먹었고, 점점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죠, 올드맨이라는 겁니다. 이제 세계 곡물 카르텔도 트루진스키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죠. 그리고, 이제는 그런 힘도 없고요.”
“힘이 없다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힘이 없다는 거죠. 당장, 브라질에 밀이 필요한데, 트루진스키는 밀을 구해줄 수 없어요.”
“밀이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그것도 상당한 양의?”
“상당한 양의 밀, 그리고 적당한 가격이어야 하죠. 브라질 서민들에게 공급할 거니까요. 아시다시피, 브라질은 빈부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그만큼, 밀값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죠.”
“밀이라면, 제가 어떻게 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예, 아나톨리아 고원에 밀 수출권을 제가 가지고 있죠. 올해는 작황이 괜찮다고 하더군요.”
“역시, 이진석 사장님이군요. 사실, 그 문제도 그렇고, 트루진스키가 이제는 은퇴를 하고 싶어하는 거 알고 계십니까?”
“트루진스키가요?”
사실, 몽골의 오아시스 도시에 집중하느라, 뉴욕의 곡물 카르텔 모임에는 자주 못 나가고 있었다. 러시아 출신의 억만장자, 트루진스키가 주도해서 옥수수와 밀, 콩 등의 가격을 담합하고 있던 뉴욕의 곡물 카르텔은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진석의 제이에스 그룹이 성장이었다. 제이에스 그룹과 곡물 카르텔은 처음에는 협력 관계였지만, 그런 협력 관계 속에서 제이에스 그룹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독자적인 힘을 가지게 되고, 아나톨리아 고원과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호주의 윗벨트, 우크라이나의 밀 곡창 지대, 이집트 나일 델타, 메콩 델타, 등에 연이어 투자를 하면서,
국제 곡물 시장에서 영향력이 급성장하고 있었고, 이제 국제 곡물 가격은 제이에스 그룹의 영향력에 의해 가격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한 거죠. 트루진스키는 이제 세계 곡물의 왕이 아닙니다.”
주앙 곤잘레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트루진스키가 은퇴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죠.”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곡물 카르텔을 지배할 힘이 없으니까요. 이제는 이진석 사장이 곡물 카르텔의 수장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요?”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이죠. 트루진스키도 마찬가지고요.”
“글쎄요. 전, 그럴 생각이 별로...”
“제이에스 그룹이 영향력이 엄청난 건 압니다. 하지만, 우리 카르텔의 영향력도 아직은 무시할 수 없죠. 둘이 힘을 합치면, 세계 곡물 시장을 다시 지배할 수 있는 거죠.”
“가격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런 의미죠. 우리가 원하는 것도 가격 안정입니다. 이번에 브라질의 밀 부족 사태도 제가 원하는 건, 밀 가격을 안정시키려는 겁니다.”
“현재 정권을 위해서요?”
“그런 이유도 있죠. 아무튼 유통업자의 입장에서, 가격 안정은 중요한 거니까요. 경제는 결국 미래와 안정, 즉, 안정된 미래니까요. 예측 가능한 미래야말로, 경제의 핵심이죠.”
진석에게 국제 카르텔의 수장이 되어 달라는 제의였다. 진석의 생각에도 현시점에서 국제 곡물 시장에 제이에스 그룹만큼 영향력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과거에 곡물의 왕이라고 불리던, 트루진스키도, 유통망을 장악하는 정도였지만, 진석은 유통을 넘어, 곡물 생산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그 영향력은 커질 것이었다. 그런 진석이 국제 곡물 카르텔까지 장악한다면 제이에스 그룹이 국제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격 변동이 심하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국제 곡물시장을 단일 기업이 장악하고 통제하게 된다면, 가격은 보다 안정될 것이다.
더구나 제이에스 그룹이 그런 위치에 서게 된다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움직이는 세계의 식량 수급 문제도 보다 쉽게 해결이 될 수 있다.
“트루진스키는 어떤 생각입니까?”
“트루진스키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거기다, 그는 이제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해요.”
“러시아로요? 푸틴하고 사이가 안 좋지 않았었나요?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푸틴의 힘은 대단하죠. 트루진스키도 그렇고 다른 올리가르히들도 백기 투항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푸틴도 외국으로 도망친 올리가르히들을 적당히 사면해 주고 있고요.”
“음, 그렇군요.”
“어차피, 멍청이들이나 서로 싸우는 거죠. 싸움은 돈이 안 돼요. 뭐든 그렇습니다. 싸우는 것보다는 뭉쳐서 담합을 하고, 이익을 나누는 게 이익이라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죠.”
진석도 주앙 곤잘레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뉴욕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