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오래가는 키위(1)
북카페 오아시스 제주도 애월읍점.
“이게 뭐죠?”
“키위예요.”
“이걸 왜?”
“근처에서 키위 농장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진석 사장님이 가끔 오시는 걸 보더니, 선물로 좀 드리라고 해서요.”
잘 포장된 상자를 열어보니, 먹기 좋게 잘 익은 키위들이 들어있었다.
“내가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안 오면 어쩌려고 이걸 줘요?”
“사장님이 안 오시면 저더러 먹으라던데요.”
양소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그거 남자 아닌가요?”
“맞아요. 서울에서 귀농했다고 하던데, 나이는 좀 젊은 아저씨예요.”
서울 출신의 젊은 아저씨라? 나한테 키위를 준 게 아니라, 양소진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혹시 소진 씨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거 아닐까요?”
“예,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이진석 사장님을 존경한다고 그랬다고요.”
“음,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진석을 존경한다는 그 귀촌한 농부가 키웠다는 키위를 맛보기로 했다. 양소진은 주방으로 키위를 가져가더니, 먹기 좋게 키위를 잘라왔다.
“음, 맛있네요. 지금이 딱 먹기 좋은데요.”
“그러게요. 지금 안 먹었으면 큰일날뻔 했어요.”
키위는 그런 면에서 참 까다로운 과일이다. 전형적인 후숙 과일인데, 껍질만 봐서는 어느 정도 숙성된 건지 영 알 방법이 없다. 덜 익은 키위는 맛이 별로고, 너무 익어도 물러서 식감이 떨어지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운에 맡기고 먹어야 하고, 되도록 빨리 먹는 게 그나마 성공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키위가 양다래죠?”
“왜요?”
“이 키위를 가져온 농장주 아저씨는 키위라고 안 하고 양다래라고 부르더라고요.”
“사실, 그 말도 맞아요. 키위는 서양 과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산지는 동북아시아거든요. 중국이나 한국에 자생하던 다래가, 키위의 조상이죠.”
“그래요?”
키위가 중국을 거쳐, 뉴질랜드로 넘어간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세계를 누비던 영국인들에 의해, 중국의 다래 씨앗이 뉴질랜드로 넘어갔고, 거기서 개량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키위가 된 것이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키위 열매가 뉴질랜드에 사는 키위 새와 비슷해서 키위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은 뉴질랜드 사람들을 키위라고 부를 정도로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과일이 된 것이다.
한국에도 야생 다래를 볼 수 있는데, 사실, 맛만 보면 키위와 비할 바가 아니다. 잘 익은 다래는 키위보다 훨씬 맛이 있다. 하지만, 크기가 너무 작고, 산지에 자생하는 수준이라, 상업적 가치에서는 키위에 밀리면서,
한국의 마트를 차지한 건, 서양식 다래, 양다래 키위가 된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원조인 한국 다래를 다래라고 부르기도 하고, 키위를 양다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사람들은 키위라고 알고 있고, 뉴질랜드 키위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키위를 양다래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 과도한 집착 아닌가요? 중요한 건 과거나 아니라, 현재, 아니 그보다는 미래죠.”
“그렇기는 해요. 사실 저도 미래가 걱정이라고요.”
“소진 씨도 미래를 걱정하나요? 뜻밖이네요.”
“어머, 저라고 왜 미래가 걱정이 안 되겠어요. 모든 사람들은 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나요?”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기는 하겠지만, 진석의 머릿속에 있는 양소진은 현재를 즐기며 사는 즐거운 아가씨였다.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도 포기하고 해안가의 한적한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일종의 욜로족이라고나 할까,
미래를 설계하면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게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들과는 삶의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를 걱정한다는 말이 조금은 예상밖으로 들렸던 것이다.
“소진 씨는 한적한 카페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은 사는 거 아니었나요? 마치 날이 좋으면 햇볕을 쬐면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 이런 식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사장님, 햇볕을 쬐면서 행복을 느낀다고요? 뭐,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저도 미래를 걱정하고, 이것저것 고민이 많은 평범한 청춘일 뿐이라고요.”
“그래도, 보통의 청년 세대보다는 여유 있게 사는 거죠.”
진석의 말에, 양소진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하긴,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는 않으니까요.”
그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안경을 낀 남자였다.
“저 분이에요.”
“누구요?”
“그 키위, 아니 양다래 농장주인요.”
“와, 이진석 사장님이시죠. 장경수라고 합니다.”
카페로 막 들어오던 남자는 카운터 앞에서 키위를 먹고 있던 진석을 알아보고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저에게 키위를 주신 분이시군요.”
“예, 평소에 사장님은 너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저를요?”
“정말입니다. 원래 저는 공무원을 하다가, 제주도로 와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업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이에스 그룹과 이진석 사장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감탄을 하게 되더군요.”
장경수라는 남자는 막 농업을 시작했고, 그전에는 평범한 행정직 공무원이라고 했다.
“공무원이라면, 꽤 안정적인 직업인데, 의외로 공무원을 그만두는 사람이 많군요.”
“저 말고, 또 그런 사람이 있나요?”
“옆에 양소진 씨도 공무원 출신이죠.”
진석이 양소진을 가리키자, 장경수는 양소진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소진 씨도 공무원 출신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장경수 씨는 공무원이면? 어디서 근무하셨나요?”
“서울이죠, 도시계획에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신호등과 횡단보도를 관리하는 일이었죠.”
“신호들 같은 건 굉장히 중요한 거 아닙니까?”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 공무원이라는 게 일하기는 가장 지루한 일인 것 같아요. 공무원 시스템이라는 게, 철저한 분업이거든요.”
“분업이라?”
“그러니까, 신호등과 횡단보도 같이, 같은 일을 장소만 바꿔서 계속 반복해서 관리하는 거죠. 오늘은 이 동네, 내일은 저 동네, 하지만, 신호등과 횡단보도라는 일의 무한 반복으로 변화가 없이 똑같은 일의 반복이죠.”
“매일 아스팔트 위에서 똑같이 생긴 신호등과 똑같이 생긴 횡단보도를 살펴보고 작업일지를 쓰고, 수리도 하고, 보수가 필요하면, 보고하는 거죠.”
“보통 일이라는 게 그렇죠.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해야, 노하우도 생기고 경험도 쌓이는 거 아닙니까.”
“물론, 저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신호등과 횡단보도는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시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반복되는 일상이 잘 안 맞아요.”
“그래서, 제주도로 오신 건가요? 가족들이나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을 것 같은데?”
진석의 말에 장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정말 반대가 많았죠. 가족들도 모두 반대고요. 아버지 어머니도 제주도 간다고 하니까 호적 파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인가요?”
“예, 가족들 모두가 서울에 살거든요. 서울 토박이죠. 친척들도 다 서울에 살아요.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전혀 없고요.”
“경험도 없고, 주변에서도 다 반대인데 제주도에 와서 농사 짓는 게 정말 쉽지 않았겠네요.”
“그래도 저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제 인생을 바꿀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무원이라는 게 아시겠지만 안정적이거든요. 주위의 선배들도 마냥 공무원 생활이 만족스러워서 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겠죠.”
“하지만, 안정성이 있고, 주위에서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괜찮게 평가해주니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벗어날 생각을 못 하는 거죠.”
“그런 게 좋은 직업이라는 의미 아닌가요?”
“하지만, 국가 공무원이라는 게, 워낙 큰 조직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일을 맡아서 하는 거라, 제 경우에는 큰 보람이나 성취감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만 사는 일상도 지겨웠고요.”
“키위 농사는 어떤가요?”
장경수는 키위 이야기를 꺼내자, 겨우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시작점이지만, 재미가 있어요. 내가 심은 모종들이 잘 자라서, 열매가 맺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죠. 제가 가져온 양다래 맛은 어떤가요?”
“뭐, 키위는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맛이 훌륭하네요. 식감도 좋고. 딱 먹기 좋게 익은 것 같아요.”
“예, 저희 농장의 양다래는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제주, 장경수 양다래 농장이라? 저도 명함 하나 드릴까요.”
진석도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장경수에게 주었다.
“언제 저희 농장에 한 번 들러주시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가끔 오기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따로 장경수의 농장에 가볼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한 번 가볼까요?”
“지금요? 그러면 더 좋고요. 사실, 제가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좀 보여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연구요?”
“예, 사실, 서양의 키위라는 것도 우리의 전통 다래를 개량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통 다래를 개량해서 키위보다 더 좋은 다래를 만들어 보려고 말입니다.”
장경수는 진석을 데리고 근처의 자신의 농장으로 데려갔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농장이었는데, 키위 외에도, 장경수의 말대로 야생 다래가 키워지고 있었다.
“와, 이건 진짜 다래네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강원도의 산지를 다니면서, 농가나, 산속에 자생하는 다래에서 씨를 채취한 것들입니다.”
장경수는 공무원 출신이라 그런지 꼼꼼하게 일지를 써가면서 야생 다래들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작물을 개량하거나, 하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생육 주기가 긴 작물은 한 세대가 지나봐야, 비로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인지, 특징이 후대에 전해지는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 개인이 하기에는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고 필요한 투자도 많이 필요했다.
“품종을 개량하는 건,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과 인력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일이죠.”
“저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뉴질랜드산 키위만 키우려고 하지, 더 좋은 다래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혼자서라도 이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장경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해보자고 뛰어들었지만, 하면 할수록 품종 개량이라느 게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런 건 어디까지나 취미로만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수십 년 후에라도 좋은 품종이 나오면 좋겠다는 정도죠.”
“그런 게 좋죠. 농장에서는 일반적인 키위도 키우시는 것 같네요.”
“예, 현실은 현실이고 이상은 이상이니까요.”
장경수는 키위를 키워서 수익을 얻으면서, 남은 시간에 야생 다래를 개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와 미래, 이상과 현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어렵겠지만, 이진수 사장님 같은 분이 마음만 먹으면, 다래를 개량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개량이라?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제가 키위를 키워보니까, 야생 다래보다 크기는 크지만, 과육이 쉽게 무르는 것이 단점입니다. 맛은 새콤하고 당도도 풍부하죠.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과육이 쉽게 물러지고 맛도 유지가 안 되는 점이 단점이라는 겁니다.”
“좀 더 과육이 단단하고 맛이 오래 유지되면 좋을 거라는 건가요?”
“예, 키위가 맛에 비해서, 크게 인기가 없는 것도 후숙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키위 농장에서 키위를 키우는 사람들이야, 적당한 숙성 시기를 예측할 수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쉽게 물러지는 과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사과처럼 저장성이 좋은 과일은 드문 편입니다. 사과가 과일의 여왕이라는 것도 그런 이유죠.”
“하지만, 다래 정도만 해도, 키위보다는 저장성이 좋거든요.”
“음, 그래요?”
진석은 장경수가 내미는 야생 다래 열매 몇 개를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키위에 비해서 신맛이 덜하고 더 달콤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식감도 더 좋은 것 같았다. 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상업적 가치는 부족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어떻습니까?”
“혹시 야생 다래를 좀 주시면, 제가 회사로 가져가서 연구해 보고 싶은데요.”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제가 가진 종자들을 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