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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깨는 양배추(2) (111/183)

128화. 확 깨는 양배추(2)

제이에스 본사

본사로 돌아왔을 때는 이수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북카페 오아시스 북촌점에 갔다 왔어.”

“거긴 왜요?”

“우리 회사 카페인데 한 번도 안 가봤잖아. 가보니까, 문제점도 있고, 그래서 홍대 본점에 들러서 유민지랑 그 문제로 회의도 하고 말이야.”

“음, 놀다오신 건 아니라는 말이죠.”

“수정 씨, 나는 직장인이 아니라고.”

“그거야 회사 오너니까, 직장인은 아니죠.”

“그래, 직장인은 아니지만 직업은 가지고 있는 거라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직장인은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잖아, 퇴근하면 끝이라고,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동안 업무를 처리하는 게 중요하고 말이야.”

“음, 그러면 직장인은 아닌 사장님은 다르다는 건가요?”

“나는 말이야 직장인이 아니라 사업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지, 나는 정해진 근무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직업이고 일이야, 나에게는 따로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도 모든 시간이 일을 위해서 쓰여지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요. 원래 사장이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래, 그래서 말이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좀 가볼게.”

“어머, 벌써요?”

“수정 씨 말했잖아. 나 같은 사업가에게는 정해진 근무시간이라는 건 없어. 정해진 사무실도 없고 말이야, 전세계가 나의 사무실이고, 24시간이 나의 근무 시간이라고.”

***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오아시스에 들어오니, 뭔가 느긋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석이 공간으로 들어오자 진흙 인간의 사령관이 마중을 나왔다.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아, 뭐. 그냥. 좀 쉬러 왔어.”

“하하, 그러시군요. 그럼 편하게 쉬십쇼. 때로는 가만히 쉬는 것도 좋은 일이죠.”

“그래, 요새 좀 피곤한 건지. 낮에도 졸리고 말이야.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글쎄요. 잠을 자지 않는 진흙 인간인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군요.”

하긴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는 못 하는 것이다. 자신이 뭔가를 상상한다고 생각할 때 조차, 그 역시도 그 경험의 한계를 넘지는 못 한다. 현명한 인간이라면 자신이 언제나 그 한계의 써클을 벗어나지 못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진흙 사령관은 현명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러십쇼. 푹 주무시고 나면 좋아지실 겁니다.”

공간의 좋은 점은 쉴 시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된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공간에서 진석이 보내는 시간은 1초의 손실도 없는 정지된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잠을 자더라도 어떠한 죄책감이나 시간에 대한 후회의 감정은 없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과 시간도 생긴 진석에게도 잠을 오래 잔다거나 일을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다. 뭔가 인생을 낭비한다는 그런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고 잠도 줄여가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바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어린 시절처럼, 아무런 가치없는 순수하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잠을 자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잠이 적은 진석이었지만, 공간에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잠을 자고 계속 자는 일을 반복했다. 주로 자는 곳은 오아시스 앞쪽의 야자수에 걸어 놓은 해먹 위에서였다. 진석은 그렇게 끝도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더이상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잠을 많이 잔 상태였다.

“공간주님, 정말 오래 주무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 그 정도였나.”

“하지만 어떻습니까. 공간의 시간은 공간주님에게는 무한한 것 아닌가요?”

“그래, 여기서는 시간을 따질 필요는 없지.”

더 잠을 자도 상관은 없지만 더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해먹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주머니에 뭔가 들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음, 방울 양배추잖아.”

“그게 뭔가요? 아주 작은 양배추 같아 보이는군요?”

“그래, 이건 방울 양배추라는 거야, 유민지가 준 건데. 용케 주머니 속에 있었군.”

“굉장히 작은데요.”

사령관은 진석이 건네준 방울 양배추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걸 땅에 꽂으면 심어진다는 것 같던데.”

“땅에 말입니까?”

진석은 그 자리에서 방울 양배추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흙을 좀 덮어주고는 물 한 컵을 가져와 뿌렸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흙 위에 얹혀진 느낌이던 방울 양배추가 점점 자석에 이끌리는 쇠처럼, 땅에 달라붙는 느낌이더니 완전히 밀착되고 말았다.

“뿌리를 내렸는데.”

진석은 조심스럽게 양배추를 당겨 보았다. 뿌리가 흙으로 들어가 고정이 되어 있었다.

좀 더 시간을 가속하자, 양배추에서 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배추보다는 상추의 줄기대처럼 솟아오르더니, 어느 순간, 양옆으로 방울 토마토처럼, 방울 양배추가 달리기 시작했다.

“와, 신기하네요. 양배추와는 완전히 다르군요.”

“그래, 마치 새끼 양배추가 열리는 것 같지. 그런데 이 성장한 양배추 자체는 양배추와 모양이 전혀 다르지.”

진석은 방울 양배추를 따서 맛을 보았다. 몇 개 먹으니 양배추에 풍부한 영양분이 흡수되며 몸에서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공간주님, 이걸 밭에서 키워볼까요?”

“그래, 그게 좋겠어. 음, 기왕이면 산으로 가져가서, 심어 보자고.”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일꾼들을 집합시키겠습니다.”

사령관이 일꾼들과 장비를 준비하는 동안, 진석도 열린 양배추들을 모두 따서 모아두었다. 그리고 일꾼들과 함께 산으로 가는 출입구로 향했다.

출입구를 통과해 산에 도착하자, 일단 양배추를 키울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배추는 수분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로에서 물을 끌어와 물도 충분히 흐르도록 준비했다.

“밭에 하나씩 심어 보자고.”

진석은 수십 개로 불어난 방울 양배추들을 밭에 흙속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하자, 양배추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라난 양배추들을 따서 다시 땅에 심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새 밭 하나가 양배추들로 가득 들어찼고, 다시 옆의 밭으로 다시 옆의 밭으로 양배추들의 영토가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작은 방울 양배추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몇몇 양배추들의 색깔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꼭 토마토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씩 색이 붉은빛을 띠는데요.”

전체적으로 빨간색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보면, 방울 토마토처럼도 보일 정도로 색이 붉은 방울 양배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디 먹어 볼까?”

진석은 빨간 방울 양배추를 따서 맛을 보았다. 맛은 크게 차이는 없었다. 양배추 특유의 시원한 맛과 단맛이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사령관, 색이 변했다는 건, 뭔가 효능이 생겼다는 의미잖아. 이걸 더 증식시켜 보자고.”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일꾼들이 양배추 밭에 드문드문 보이는 빨간 양배추들을 따서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밭을 정리하고 다음번에는 모두 빨간 양배추들을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을 가속하자,

빨간 양배추들은 점점 더 진한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

북카페 오아시스 북촌점.

카페 앞쪽으로 벤츠 s클래스가 미끄러지듯 멈추어섰다.

“사장님, 또 오셨네요?”

송혜성이 진석을 맞았다.

“와, 지난번하고는 좀 달라졌군요.”

“예, 사장님 덕분이죠.”

공간에서 새로 제작한 책들을 유민지에게 부탁해서 북촌점의 책들을 교체하게 한 것이었다.

“어때요? 책들이 바뀌니까, 손님들도 반응이 달라졌나요?”

송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책들이 크고,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 책들로 바뀌어서 그런지, 외국인 관광객들도 부담없이 보는 것 같아요.”

“음, 그래요?”

진석은 카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처럼 외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었다. 차이라면, 전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서로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서 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책들은 글보다는 그림이 많은 그런 종류들로, 주로 한국의 전통 건축이나 미술 같은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북촌의 한옥에 관한 사진들이 많이 들어있는 책들은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 같았다.

“한옥에 관한 책들을 좋아하나보네요.”

“예, 아무래도 북촌에 온 관광객들이다보니까, 한옥에 대한 정보가 있는 책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젊은 학생들도 잡지나 만화책들을 부담없이 읽고 있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라 그런지 그런 가벼운 책들에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정독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인가본데 편하게 잡지를 읽고 있네요.”

“예, 확실히 가벼운 책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그렇게라도 책을 보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보기 좋네요. 참,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선물요?”

송혜성은 진석이 내민 박스를 열어 보았다. 박스 안에는 작고 빨간 방울 양배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머, 이게 뭐예요?”

“방울 양배추라는 거예요.”

“방울? 양배추요?”

송혜성은 처음보는 빨간 방울 양배추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들여보았다.

“이런 건 처음 봐요. 마트에서 제주도산 방울 양배추를 본 적은 있는데, 그건 양배추처럼 초록빛이 감도는 흰색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빨간색이네요.”

“색은 빨갛지만 맛은 비슷해요.”

“정말요? 까봐도 돼요.”

“까서 먹어보세요.”

송혜성은 양배추 겉껍질을 까보았다. 안쪽도 겉과 마찬가지로 빨간색의 양배추잎이 보였다. 송혜성은 작은 방울 양배추를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음, 맛은 방울 양배추 맛이네요. 양배추랑 비슷한 맛요.”

“이걸로 뭔가 신메뉴를 만들어보면 어때요? 맛도 괜찮고, 색깔도 붉은빛이 돌아서 예쁘고 신기하잖아요.”

“신메뉴라?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요?”

송혜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양배추 박스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접시에 담긴 양배추 샐러드를 내밀었다.

“와, 샐러드네요.”

“예, 그냥 방울 양배추를 반으로 갈라서 샐러드 드레싱을 뿌려 봤어요. 별거는 아니지만, 방울 양배추가 색이 빨간색이어서, 시각적으로 보기 좋고, 한 번 드셔보세요.”

진석은 포크로 양배추를 찍어 입에 넣어 보았다. 드레싱이 들어가서 맛은 더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괜찮은데요. 주메뉴로는 부족하지만, 사이드 메뉴로 여기저기 같이 내보내면 좋을 것 같아요.”

“예, 그런 것 같아요. 음, 맛이 괜찮아요. 색이 빨간색이라, 더 맛있는 느낌이에요.”

“하하, 색이 빨갛다고 맛이 더 좋을까요?”

“그럼요. 맛은 꼭 혀로 느끼는 게 아니라, 뇌로 느낀다는 거 모르세요? 눈으로도 맛을 보고, 코로도 맛을 본다고요. 맛이라는 건 미각 하나가 아니라 공감각적인 현상이라는 거죠.”

“그래요? 하하, 하긴 그렇기도 하겠네요. 같은 음식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기도한다고 하죠.”

원효 대사가 해골물을 마셨다는 고사는 그냥 교훈적인 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실제로 최근의 뇌과학은 음식의 맛이라는 건, 단지 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냄새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음식의 가격도 맛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주장도 있다. 가격이 높을수록 맛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고 실제로 뇌의 맛에 대한 영역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음식의 가격은 좀 노골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레스토랑의 분위기나 전체적인 느낌이 음식의 맛을 평가하는데도 영향을 준다니까,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색이 빨간 양배추도 시각적으로 맛의 풍미를 더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음, 사장님, 양배추가 굉장히 시원해요. 먹고 있으니까, 살짝 오던 잠도 확 깨는 느낌이고요.”

진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도 왠지 오늘은 몸도 좀 상쾌하고, 정신이 맑은 것 같네요.”

잠이 확 깨는 느낌이라? 그러고 보니, 진석도 요즘 좀 멍했던 머리가 전에 없이 맑은 느낌이었다. 뭔가 잠에서 깨어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 방울 양배추의 효능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그런 특성이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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