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나톨리아 고원(3) (109/183)

126화. 아나톨리아 고원(3)

호주 퍼스

“멋진 와이너리군요.”

진석은 앙카라에서 싱가포르로 그리고 다시 퍼스로 비행기를 바꿔타며 호주 윗벨트를 향하고 있었다.

퍼스에 도착해서 잠시 쉴겸 퍼스 외곽의 포도주밭을 찾았다. 제이슨 크레이크라는 영국 출신의 사업가가 조성한 포도 농장이었다. 진석의 제이에스 그룹이 윗벨트에 올리브 농장을 건설하는 걸 보고는 포도 농장도 해보면 어떻겠다고 제의를 해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하, 이곳 퍼스의 기후는 포도 재배에도 괜찮은 편이죠.”

“포도는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한 품종이 아니었나요?”

“그렇습니다. 퍼스는 바닷가이면서 내륙은 점점 건조해지는 지역이라, 포도 재배지로 괜찮은 조건입니다. 윗벨트 내륙도 올리브 재배가 가능하다면, 포도 재배도 가능하겠죠.”

“와인은 프랑스산이 유명하죠. 보르도나 부르고뉴 같은 곳들 말입니다. 영국인이 만드는 와인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하하, 뭐, 저도 프랑스 와인이 최고라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르고뉴 같은 곳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포도밭이죠. 생산량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물론 보르도는 그보다는 더 크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와인 생산량은 소비 수요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긴 와인의 공급에 비해서 수요가 더 늘어나는 폭이 큰 것 같기는 하더군요.”

“뭐 포도를 이용한 값싼 와인도 많이 있죠. 칠레 같은 곳에서 저렴하게 생산하는 와인들 말입니다.”

진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르고뉴에 생산되는 최고급 와인 시장도 있고요. 저는 그 중간 정도의 시장을 겨냥한 고급 와인시장을 노려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급이라? 최고급은 아니라는 건가요?”

진석의 말에 제이슨 크레이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50대 중반의 은발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사실, 최고급 와인 시장은 범접할 수 없는 전통이 있죠. 더 좋은 와인을 만든다고 해도 프랑스산 최고급 와인의 경쟁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네 꽁띠 같은 건 저도 많이 마셔봤지만, 솔직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말이군요?”

“예, 물론 오랜 전통을 가진 훌륭한 와인이지만, 로마네 꽁띠는 로마네 꽁띠죠. 이게 로마네 꽁띠구나 하고 먹는 거지, 솔직히 맛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정말 세계최고의 맛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누가 평가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하, 그렇기는 하죠.”

어떤 분야든 오랜 전통이 쌓인 명품은 이미 일반인의 평가 대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와인도 최고급 와인시장은 그런 성격이 강하다. 이미 명품으로 인정받는 와인은 희귀성과 명성을 무기로 부자들은 지갑을 쉽게 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같은 후발 주자들이 그 정도까지 도달하는 건 사실 무리죠. 그보다는 저가 와인과 그 위의 중간 가격대의 와인보다는 한 단계 높은 고급 와인을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아시아의 신흥 중산층이 소비할 수 있는 정도의 와인말이죠?”

“그렇죠, 한국이나 중국이 주요 소비 시장이 될 수 있죠. 특히 중국은 어쨌든 미국산 와인은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

“미국과 중국은 정치적인 문제가 좀 있으니까요.”

사실 캘리포니아도 나름 전통이 있는 와인의 생산지이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서 미국 와인은 그렇게 큰 인기는 없는 편이다. 중국과 미국의 정치외교적인 갈등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중국의 부자들은 유럽의 고급 와인을 더 선호하는 편이고,

그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캘리포니아 와인은 남미의 저가 와인에는 가격에서 밀리고 명성이나 품질에서는 유럽산 와인에 밀리는 모양세다.

제이슨 크레이크는 호주 와인으로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야심가였다. 그러기 위해서 제이에스와 제휴를 통해 와인의 생산과 아시아 시장 진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얻으려는 것이었다.

“일단 맛은 괜찮지 않습니까?”

진석은 잔에 남은 퍼스산 와인을 마저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솔직히 소믈리에가 아니라서 맛과 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기 어렵네요.”

“하하, 사실 와인은 어려서부터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미세한 맛의 차이를 판단하기 어렵죠.”

“그런가요?”

“아무튼, 이곳 퍼스에도 까다로운 와인 애호가들이 많은데 모두 저희 농장을 방문하고는 높은 평가를 내리고는 합니다. 최고급은 아니어도 고급이라는 거죠.”

“최고급은 아니지만 고급 와인이라?”

“와인 제조라면, 어느 정도 축적된 기술력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건가요?”

“호주에서 생산되는 최상품의 포도와 신흥 시장이죠. 아직 와인에 흠뻑 취하지 않는 아시아 시장말입니다.”

“사실은 이번에 퍼스에 온 것은 다른 일 때문입니다.”

“다른 일요?”

“예, 밀 때문이죠.”

“밀이라? 하긴 제이에스 그룹은 국제적인 곡물 유통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언제라도 와인 사업에 관심이 생기시면 연락주십쇼. 저는 언제라도 제이에스와 함께 사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언제 기회가 생기면 다시 찾아오죠.”

진석은 퍼스를 떠나 윗벨트의 내륙으로 향했다.

***

호주 서부, 윗벨트. 제이에스 올리브 농장.

진석이 제이에스 농장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올리브유 가공 공장이었다. 공장에 저온 압착기를 설치한 후로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진석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존 스트라다도 공장으로 찾아왔다.

“이진석 사장님.”

“존 스트라다 씨, 압착기는 잘 작동되고 있는 건가요?”

“예, 한국산 기계라서 처음에는 좀 의심을 했었죠.”

“그래요?”

“한국산이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런 기계는 독일산이 최고니까요.”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이상없이 압착기가 잘 작동하는 걸 보고 이쪽의 호주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게 된 거죠.”

“하하, 그런가요?”

올리브 농장과 농장의 올리브로 올리브유를 만드는 공장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에 따라 윗벨트 지역의 일자리도 늘어나고 전체적으로 경제도 좋아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제이에스 그룹의 올리브 농장에서 시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인가요? 밀 재고분이 필요하다는 게?”

존 스트라다는 지금은 올리브 공장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지만, 원래는 밀 농사를 하는 농부들의 대표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터키 쪽으로 수출할 밀이 필요합니다.”

“얼마나요?”

“대략, 200만 톤 정도죠.”

“그렇게 많이요?”

“윗벨트의 농장의 밀 저장고들에는 밀들이 꽤 저장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최근에는 남은 재고량이 다들 있는 편이죠. 그걸 터키로 수출하겠다는 거군요?”

“예, 농가에서 개별적으로 비축한 밀이 필요합니다.”

“음, 각 농장마다 예비용으로 비축한 밀들이 있기는 합니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좀 사정이 있어서 터키에 밀을 공급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존 스트라다 씨가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좀 알아보죠. 뭐 재고를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다행히 존 스트라다가 자신의 오랜 인맥을 동원하자, 상당한 밀 재고분이 모이기 시작했다. 진석은 터키에 보낼 밀이 모이기 시작하자. 퍼스의 제이에스 지사에 밀 수출 문제를 일임하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

제이에스 본사.

“터키 출장은 잘 되신 거예요?”

“그래, 좀 피곤한 것만 빼고는.”

“퍼스트 클래스로 오셨으면 그러시면 어떡해요.”

“퍼스트 클래스든 뭐든 비행은 피곤한 일이라고.”

아나톨리아의 풍광도 멋지고 오는 길에 파묵칼레에 들러서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비경도 즐기고 오기는 했지만, 역시 한국이 좋았다. 거기에 호주의 윗벨트가지 경유해서 오느라 이래저래 피곤한 느낌이었다.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

진석은 일단 스카이 캐슬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었다.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주님,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그래, 좀 피곤해. 터키에 갔다가 호주까지 일단 잠부터 자야겠어.”

진석은 일단 오아시스에서 잠부터 자기 시작했다. 한참을 야자수 나무 아래의 해먹에서 자고 났더니 겨우 에너지가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음, 푹 자고 났더니 역시 개운한데,”

“공간주님, 피로가 좀 풀리신 것 같군요.”

“그래, 사령관, 이번에는 밀을 개발해야겠어.”

“밀 말입니까?”

밀이라면, 곡물 중에서도 재배면적이 가장 넓은 작물이다, 곡물의 왕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사실 별다른 약점이 없는 작물이기도 하다. 가장 자연에 적응을 잘한 작물, 그래서 인류의 문명과 함께 가장 번성한 곡물이기 때문이다.

밀에게 문제가 있다면 항상 수요가 많다보니 공급이 부족해진다는 정도인데, 특히 최근의 기후 온난화로 가뭄이 생기는 지역에서는 수확량이 급감하는 문제가 있었다.

“밀이라면, 어떤 개량이 필요한 건가요? 공간주님.”

“음, 지금 가뭄 때문에 수확이 줄고 있거든.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말이야.”

“그럼, 물 없이 잘 자라는 그런 품종이 필요한 건가요?”

“물 없이 잘 자라는 작물이라는 건 없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보다는 가뭄이 들었을 때, 일시적으로 수분이 부족해도 다시 물이 공급될 때까지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있는 품종이 필요해.”

“음, 그렇겠네요.”

어떤 작물도 물의 공급 없이 성장하고 수확할 수 있는 품종은 없다. 대신 가뭄이 들었을 때, 가능한 오랫동안 고사하지 않고 생명이 유지되는 그런 품종이 필요했다.

“그래 사령관 오아시스 옆에 밭을 준비해 줘, 밀을 재배하면서 중간에 가뭄에 견디는 그런 품종의 개발해야겠어.”

일꾼들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밭이 만들어지고 밀 농사가 시작되었다. 일단은 외부에서 들여온 다양한 밀들을 키워 보기 시작했다.

물과 일조량, 그리고 적당한 토지의 비옥함이 결합되자 밀 농사는 무리없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음, 사령관, 이쪽은 물의 공급을 줄여봐.”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밭의 일부의 공급되는 물을 줄여보았다. 인위적으로 건조한 상태를 조성해 보는 것이다. 모든 식물이 그렇듯이 건조한 환경에서 식물들은 일정기간 이상을 견디지 못 한다. 물 없이 생장이 가능한 식물이라는 건 없다.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 하지만, 건조한 기후에서 오래도록 적응이 되는 일부 생물들은 물이 부족한 기간에도 일정 시간 이상을 견디는 능력이 더 발전되기도 한다. 물론 그 기간동안 성장은 멈추지만,

대신 생명 연장에 필요한 필수적 요소에 집중해서 생존의 시간을 늘려나가는 것이다.

최근의 건조해진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에서 가뭄 기간동안 생명보존에 집중하며 물이 공급될 때까지 견딜 수 있는 밀의 품종이 필요했다.

진석은 사령관과 함께, 일꾼들을 지휘하며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가속하며 다양한 실험을 계속했다.

“음, 이쪽의 밀들이 생산력은 좀 떨어지지만, 가뭄에 견디는 능력이 좋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생산성도 물이 공급되면 다시 성장이 빨라지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좋아, 이게 좋겠군.”

진석은 수천 년의 시간을 가속하며, 그중에서 가장 가뭄 기간에 잘 견디는 밀의 품종을 선택했다. 그리고 밀의 종자를 더 증식하며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신품종의 밀들이 진석의 오아시스 주변을 푸르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 품종의 밀들을 아나톨리아 고원에 소작농들에게 공급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농기계나 수리 시설 보강을 위한 투자도 할 생각이었다.

당장은 큰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아나톨리아의 밀 생산이 증가해서 잉여분에 대한 수출이 가능해지면, 진석의 제이에스 그룹이 독점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

진석의 예상대로라면, 밀 산업의 현대화로 상당한 여분의 밀 생산이 발생할 것이고 그 잉여 생산으로 국제 곡물 시장은 더 안정적인 시장이 될 것이다.

“좋아, 이걸로 아나톨리아의 고원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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