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아나톨리아 고원(2)
킬리칼레
“킬리칼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 외곽에 거대한 저택이었다. 이곳의 주인 무스타파 아카르는 투르크 제국 시절부터 이 일대의 땅을 소유한 대지주 가문이었다.
“듣기로는 땅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하하, 직설적인 분이시군요. 사실 이슬람 율법에서는 탐욕을 금하고 있죠. 종교적으로는 재산이 많은 건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했나보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저도 런던대학에 공부를 해서 사실은 무스타파라는 이름이지만 속은 서구인에 가깝죠.”
무스타파 아카르는 킬리칼레의 오래된 대지주 가문의 장자로 막대한 재산과 땅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터키지만, 부유한 계층은 자식들을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무스타파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런던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했다. 덕분에 영국식 엑센트가 섞인 영어가 무척 유창했다. 영어 실력뿐 아니라, 가치관도 유럽인에 가깝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석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킬리칼레의 대지주를 만나보라고 했을 때 걱정이 많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을까봐 말인가요?”
“뭐, 비슷합니다. 언어도 그렇고 가치관이 너무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말이죠.”
“하하, 정부에서도 그렇게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겠습니까? 지금 터키 정부도 밀값이 상승해서 골치가 아픈데 어떻게든 해결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무스타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다급한 쪽은 터키 정부다,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곡물인 밀의 수급에 비상이 걸렸고 밀 수출국들과도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수입을 못 하고 있는 상황.
“아카르 씨는 지주 가문의 장자이시기도 하고, 곡물의 수입 사업도 하고 계시다면서요?”
“편하게 무스타파라고 부르세요.”
“그래도 되나요?”
“하하, 사실 터키에서는 성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유럽 스타일의 성이 생긴 건 근대 이후니까요.”
“음, 그래요?”
“오히려 터키 전통은, 이슬람식의 이름을 더 중시합니다. 무스타파라는 이름이 종교적 성격이 들어가서 더 중요한 거죠. 성은 유럽의 근대화에 맞추느라 억지로 만들어낸 성격이 있죠. 우리 터키의 전통이라면, 가족을 대표하는 성보다는 지역명을 넣어서 예를 들면, 무스타파 킬리칼레라고 부르는 게 더 전통에 가깝죠.”
“하하, 뭐, 그렇겠네요.”
사실, 성이라는 개념도 로마나 그리스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북유럽의 바이킹들만 해도 성을 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대신 이름과 함께 신체 특징을 넣은 별명 같은 것으로 구분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붉은 수염의 에릭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무스타파 아카르도, 더 옛날에는 무스타파 킬리칼레라고 불렸을 것이다.
“아무튼, 일단은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당장, 밀이 부족하다는 거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거라는 거 말입니다.”
무스타파 아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습니다. 총리부터 해서 다들 난리죠, 물론 언론에서는 쉬쉬하고 있어요. 밀이 부족하다는 건 헛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당장 3개월 후면 시중에 밀이 바닥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고 밀이 없어서 굶어 죽지는 않겠죠. 전세계적으로 보면 밀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요. 어디선가 들어오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가격이 폭등하고 일시적으로 품귀현상도 벌어지고 혼란이 오는 거죠.”
“절대적으로 밀이 없어서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문제예요. 터키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국가에서 아프리카처럼 기아가 발생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혼란이 오면 정치인들의 입지가 약해지죠. 반대파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요.”
어쨌든 단순히 식량 문제라기보다는 국내 정치의 문제라는 모양이었다.
“밀 같은 경우는 미국과 캐나다가 주요 공급권이죠.”
“미국과 터키는 지금 관계가 껄끄럽습니다. 누구 탓이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 잘못이다 그런 건 선동가들이 하는 일이죠. 정치가들 말입니다.”
“하하, 무스타파 씨는 정치가는 아니시군요?”
“저는 사업가에 가깝죠. 정치가는 문제를 키우죠, 왜냐하면, 그럴수록 사람들이 더 모여들거든요. 하지만, 사업가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왜냐면 문제는 돈을 버는데 방해가 되니까요.”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정치가와 사업가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말이군요.”
진석은 속으로 그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진석이 보는 세상도 비슷했다. 정치가들은 기본적으로 선동가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선거에서 표를 얻는 것이 그들의 성공의 방식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문제를 선점하고 독점해서 자신의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업가에게 문제라는 건 골칫거리고 돈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물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업가라는 것이다.
“밀은 제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터키의 부족분을 말이죠.”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호주 윗벨트에 농장을 가지고 있죠. 올리브 농장과 공장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사실, 그 지역은 이름 그대로 밀의 주산지입니다. 밀 농장들과도 협력 관계에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호주에 밀 비축량이 제법 있을 겁니다. 각각의 농장들에 말이죠.
“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호주에서 밀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셈이죠.”
당장 올해의 밀은 그렇다고 쳐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밀은 부족하게 될 것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가뭄은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리 시설도 보강할 필요가 있고,
지금처럼, 토지는 넓지만 소규모 소작농에 의존하는 농업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단기적인 문제는 호주의 윗벨트의 밀을 가져와서 해결이 되겠지만, 그건 단기처방입니다. 윗벨트의 밀 재고량도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그렇겠죠. 하지만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진석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터키의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종교적 이유라면 이슬람 율법에서 과도한 이익을 비난하기 때문인가요?”
진석의 말에 무스타파 아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소작농에게 전체 수확물의 80%를 주는 방식이죠. 물론 토지를 가진 대지주들은 모두 부자입니다. 저처럼 말이죠.”
무스타파 아카르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킬리칼레 외곽의 그의 저택은 한눈에도 주변에서 눈에 띠는 대저택이었다. 이정도면 킬리칼레의 전반적인 경제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수준의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자를 해도, 이익의 10%를 가져갈 뿐인 농업에 투자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겠죠?”
“맞아요, 주식을 하든, 아니면 차라리 사업을 하거나, 해외에 투자를 하는 게 더 이익이죠. 저도 이 저택 주위의 거의 모든 농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부터 우리 가문의 땅이었죠. 하지만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작농들이 농사를 짓는 방식은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기계도 도입되고 비료라든가 변화가 있지 않나요?”
“물론, 완전히 변화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땅의 크기에 비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구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소작농에게 투자를 하고 더 큰 이익을 얻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소작료의 비율은 오랜 전통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슬람 율법과도 관련이 있죠. 최근에 터키에서는 율법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농업에 투자할 돈을 소작농에게 빌려준다거나..”
“이슬람에서는 고리대금업도 금하고 있죠.”
“음, 그렇겠군요.”
진석이 우크라이나에서 농부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던 방식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터키는 이슬람 전통이 강한 국가로, 어찌되었든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환수하는 방식은 이슬람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고리대금업이라고 해서 금기시하는 사업방식,
설명을 하고 새로운 농업금융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터키 사회의 분위기를 봤을 때는 어려운 일일 것 같았다. 터키 사회는 최근에 이슬람 전통주의로 회귀하는 분위기였다.
“지주들이 자발적으로 투자를 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어려운 일이죠. 이익이 없는 곳에 누가 투자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무스타파 아카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투자를 해보죠.”
“이진석 사장님이 말입니까?”
“예, 저게 한다기보다는 제이에스 그룹이 투자를 하겠습니다.”
“어떤 투자를 하겠다는 겁니까?”
“아나톨리아 고원의 밀 경작지에 현대식 농업기계와, 수리시설, 저장 창고와 비료 등등,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 겁니다. 새로운 밀 품종도 물론이고요.”
무스타파 아카르는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얻는 이익이 뭔가요? 이진석 사장님이 말입니다.”
“독점권이죠.”
“무슨 독점권요? 밀 말인가요? 미안한 말이지만, 아나톨리아의 농가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밀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터키에서 말은 주식이고 정치적인 문제죠.”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을 들어보십쇼. 터키에 제이에스가 가뭄에 강한 신품종을 제공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농업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밀 생산이 증가하면 국내 수요분을 제외한 남은 잉여의 밀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수출할 수 있는 독점권을 원하는 겁니다.”
“잉여분의 밀의 수출 독점권이라?”
“터키의 국내 수요와는 상관없는 잉여 생산에 한정한 독점권입니다. 어차피 남는 밀이라면 상관이 없겠죠.”
무스타파 아카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그런 독점권으로 아나톨리아 고원에 투자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될까요?”
“하하, 언뜻 큰 이익이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범위를 넓혀 보면 전세계적인 곡물 시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농업의 특성상 각 지역의 수확은 일정하지 않고 항상 불안정하죠. 최근의 아나톨리아 고원의 가뭄으로 인한 밀 수확량의 감소처럼 말입니다.”
“음, 그렇기는 하죠.”
“저는 국제적 곡물 유통업을 하는 사업가입니다. 아까 무스타파 씨도 말했지만, 사업가는 정치가와는 다르죠. 문제가 생기면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경제는 안정성이 핵심이니까요.”
“국제 곡물 가격을 안정화시키는 게 제이에스 그룹에도 이익이 된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제이에스 그룹의 세계경영 전략이기도 하죠. 지구 전체를 하나의 안정적인 단일 시장으로 만들고 싶은 게 저희들의 목표죠.”
“전 지구를 말입니까? 유럽 연합 같은 거 말인가요?”
“물론, 정치적인 것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농업에 한해서 말이죠. 그중에서 가장 첫 번째 단계가 곡물이 될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대규모 수출입이 용이하고 기업화된 농법으로 대량 생산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니까요.”
“대규모 기업농이 가능하다면, 생산이 더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밀이나 옥수수는 넓은 농지만 확보된다면 기계를 이용해서 기업형의 경영이 가능하죠. 다른 과일들에 비해서 수확에 대규모 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비교적 물의 공급 같은 걸 제외하면 관리도 쉬운 편이고요.”
“그렇겠군요.”
진석이 원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아나톨리아의 고원을 거대한 밀의 곡창지대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대의 밀의 잉여 생산량을 수출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면 국제 곡물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곡물 수급이 불안정할 때, 이 지역의 밀을 이용해서 국제 시장을 안정화시킬 수도 있고 말이다. 그 외에 일정량을 비축해서 장기적인 시장 안정에 이용할 수도 있다. 경제의 기본은 안정성이다. 수요든 공급이든 안정적일 때, 미래에 대한 투자도 가능하고 소비도 더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의 밀의 수출 권리를 얻어 내는 것만으로도 제이에스 그룹의 큰 전략에는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잉여 생산된 밀에 대한 권리라?”
“무스타파 씨가 터키의 정치인들을 설득해 주시겠습니까?”
무스타파 아카르는 잠시 고민을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밝아지며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터키와 제이에스 양쪽에 모든 좋은 제안인 것 같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