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나톨리아 고원(1)
제이에스 본사
“오명진 도지사님이 찾으시는데요.”
“오명진 지사가? 무슨 일이지.”
“지금 이쪽으로고 오고 있다고 면담 가능하냐고 하는데요.”
“그래, 뭐, 지금이라는 거지?”
잠시 후에 사무실로 오명진 도지사가 들어왔다. 오명진 도지사를 만나러 갈 때는 주로 도지사 실로 갔었는데, 직접 제이에스로 오명진이 찾아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하하, 여기가 제이에스 본사군요. 역시 제이에스 그룹의 사옥이라 그런지 건물도 멋지네요.”
“뭐, 그런 말을 많이 듣죠.”
사실은 아직 임대해서 쓰고 있는 건물이었다. 조만간, 신사옥을 건설할 계획으로 마땅한 부지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혹시 축구단 때문에 오신 건가요? fc 강원이라면 지금 리그에서 순항 중인데 말입니다.”
“축구야, 감독과 선수들이 알아서 하는 거겠죠. 그보다도, 좀 복잡한 외교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외교 문제라고요?”
“예, 혹시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아십니까?”
“아나톨리아 고원요?”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이라면, 터키의 거의 전지역에 걸친 고지대로 이 지역은 터키를 대표하는 곡물 생산지, 대곡창지대였다.
인구가 8천만에 달하는 터키는 아나톨리아 고원을 중심으로 풍요로운 농산물 생산을 통해 식량을 거의 100% 자급하는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서유럽에 비해 공업 발전이 뒤처지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공업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라면 최근에 미국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농산물을 거의 수입하지 않는 국가이기도 하다.
“예, 이진석 사장님은 농업 쪽으로는 식견이 있으신 분이니까, 아나톨리아 고원이 터키의 주요 곡창지대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음, 그렇죠.”
최근에 해외 곡물 동향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밀 작황이 좋지 않다는 보고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이상고온과 지구온난화로 인하, 가뭄 등이 주원인, 그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몇몇 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터키였다. 인구가 비교적 많고, 농업 비중이 높은 터키는 전체 경작지에서 밀 경작지가 비중이 높은 국가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생산성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비교를 하자면 한국의 쌀농사와도 비슷한 특징이 있는데, 밀이 터키에서는 주요 곡물로, 주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중이 있었고,
그에 비해, 소규모 농장 비중이 높아서, 생산성이 크게 높지 않다는 점도 비슷했다. 차이라면, 쌀이 남아도는 한국과는 달리 최근 몇 년간 터키 아나톨리아 일대의 밀 작황이 좋지 않아, 밀의 자급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터키 쪽에 이상기후로 밀 농사가 잘 안 되고 있죠.”
오명진의 말에,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치적인 이유로, 터키가 미국의 밀을 수입을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뭐 ,대외적인 명문은 미국산 쌀의 GMO, 즉 유전자 조작 작물의 안정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거지만요.”
터키와 미국간의 외교적 갈등이 농산물의 수출 규제로 이어지는 형태였다. 터키의 경우에는 밀 작황이 좋을 때는 겨우 내수를 채우는 정도고, 그나마도 작황이 안 좋아지면, 국내 수요의 15% 정도가 부족해지는 상황.
전세계적으로 볼 때, 터키에 밀이 부족해질 때, 밀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국가는 미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진퇴양난이겠군요. 터키 정부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대립 중인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그렇고, 주식인 빵의 재료가 되는 밀가루가 부족하면 국내에서 혼란이 올 테고 말이죠.”
“그래서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 뭐, 역사적으로 그렇다고 하더군요, 멀리 고구려 시대까지 역사적으로 인연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니까요.”
‘고대 시대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터키는 한국전쟁 참전국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무기도 많이 수입하는 주요 교역국가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자주포나 그런 무기들도 많이 터키에서 수입하는 모양이더군요.”
“예, 그렇죠. 무기라는 건 사실, 경제적인 가치로 보자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산업이죠. 그렇다고 무기 자체로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은 없어도 국방이란 건 꼭 필요한 분야죠.”
진석의 말에, 오명진 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장 좋은 건 외국에 무기를 수출하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무기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음, 그런 면에서 터키와의 관계는 자주국방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비 예산을 늘리지 않고도 무기 수출을 통해서 여러 가지 비용을 충당할 수 있으니까요.”
무기 수입을 주로 하는 대한민국이 무기를 수출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한 터키는 국방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그런 터키가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으로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밀을 수입 금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유전자 조작을 이유로 미국산 밀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로 밀 수입국가지만 전세계적으로 밀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캐나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미국, 미국의 밀을 수입을 하지 않는다면 밀 수입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터키에서는 밀이 부족하고, 밀 부족을 해결하는 게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한국으로 치자면, 쌀이 부족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터키의 밀 작황이 안 좋은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국제 밀 시장에서 밀을 수입하기 어려운 터키의 사정이 더해져서 좀처럼 밀 부족 문제가 해소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에게 밀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터키 정부에서 비공식적인 경로로 그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도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민감한 외교적 문제라는 말이겠죠. 구체적으로 터키 정부가 원하는 게 뭡니까?”
“일단은 단기적으로 미국산 외의 밀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가뭄에 강한 신품종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음, 밀과 신품종이라?”
***
앙카라 에센보아 국제 공항.
“야밀, 수쿠루라고 합니다.”
“이진석입니다.”
야밀 수쿠르는 앙카라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서도 교환학생과 회사원으로 5년 정도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 한국 문화도 익숙하겠네요?”
“하하, 소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삼겹살은 안 먹습니다.”
“그러시겠죠.”
터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의 율법은 돼지고기를 금하고 있다. 중동의 건조지대에서 탄생한 종교의 특징으로 우물이나, 오아시스를 더럽히는 돼지를 문화적으로 배척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도니스나, 하스라고 불리던 희생제의의 희생양으로 쓰던 돼지를 신성시했던 영향이라는 학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돼지고기는 금지된 육류이고, 대신 터키인들이 즐겨 먹는 것은 소고기나 양고기다.
야밀 수쿠르는 이번 아나톨리아 고원 방문의 가이드를 맡았다.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터키 정부의 초정을 받았기 때문에, 가이드를 비롯한 모든 일정 관리는 터키 정부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야밀은 한국어도 완벽하고, 가이드로서의 지식과 경험도 풍부한 가이드였다. 진석이 야밀과 같이 가게 될 곳은 앙카라에서 가까운 키리칼레였다.
야밀은 직접 차를 운전하며 해발 800미터 이상의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진석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차량이 적어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와, 아나톨리아 고원은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인데, 미국의 프레리 못지않게 광대한 지역이군요.”
“예, 그렇죠.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이런 풍경을 보면 다들 놀라고는 하죠. 아나톨리아 고원이라고 하면, 산악지대의 분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곳의 면적만 75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한반도 전체 면적이 22만 제곱킬로미터라고 하니까.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시나요?”
“진짜 엄청난 규모군요.”
마치 터키가 아니라, 미국 중부 내륙 지대를 차로 달리고 있다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압도적으로 광활한 평야 지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도 놀랍지만, 이런 거대한 평야 지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곡물 생산이 부족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네요.”
“하하, 그렇죠. 그건 터키 특유의 농업 문화 때문입니다.”
“농업 문화요?”
“터키는 전체 농지의 70%가 소작농에 의해 경작이 되고 있죠.”
“소작농요?”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터키는 아직도 소작농이라는 형태의 토지 제도가 남아 있는 독특한 나라였다. 물론, 소작농이라는 개념이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무렵의 한국의 소작농들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다.
“저도 터키의 소작농이라는 개념은 좀 알고 있습니다. 소작농이 전체 수확의 80%를 갖는 방식 아닌가요?”
“음, 역시 이진석 사장님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소작농이라고 해도, 지주에게 지불하는 지대는 10% 남짓이죠. 나머지는 국가에 세금이고요.”
“그것도 굉장히 놀라운 제도인 것 같더군요.”
“터키는 전체 농지의 80%를 소수의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농지 같은 경우에는 부자들의 소유 비율이 너무 커서, 그런 식으로 소작농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의 경제가 엉망이 되는 구조죠.”
야밀은 운전을 하면서 길가의 농가주택 한 채를 가리켰다.
“저런, 집들이 소작농들의 집이죠. 저 한 채에 사는 소작농 가족이 이 일대의 농지를 다 농사를 짓고 있을 겁니다.”
“이 일대를 다 말인가요?”
야밀은 주택을 중심으로 대충 그 일대의 농지들을 가리켰다.
“예, 미국 못지않게 토지 면적은 넓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미국과의 차이라면 대규모 기업적 농업이 아니라, 아직도 전근대적인 소작농 방식이라는 겁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토지의 소유의 불평등이 너무 심하고 그러다보니 소작농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나름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맞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본력이 없는 소작농이 넓은 땅을 경작하는 문제가 생기겠군요.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부자들이지만, 농업에 투자를 해도 소작료로 받는 비율이 너무 적어서 투자할 의욕이 없을 테고.”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이런 광대한 아나톨리아의 고원의 농지들이 있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죠.”
“뭔가 불합리하기도 하지만 오랜 전통이 있는 제도라서 바꾸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런가요?”
진석의 말에 야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쉽게 개선되기가 어려워요. 토지의 소유의 불평등의 문제가 있는 거죠. 부자들이 토지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들에게 자유로운 권리를 줘버리면 농민들은 설 자리가 없는 거죠. 그렇게 되면 사회불만이 고조될 테니까. 정부로서도 곤혹스러운 거고요.”
“그러게요. 뭐, 쉬운 문제는 아니군요.”
진석은 광활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의 풍광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낮은 잡목 정도만이 있는 고지대의 평야는 아직 미개발될 지역도 많고, 고즈넉한 분위기도 있었다. 거기에 들판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도 인상적이었다.
“저기 빨간 곳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뭐죠?”
“한국에서는 그걸 양귀비라고 하죠.”
“오, 양귀비요?”
“예, 양귀비의 원산지가 이곳 아나톨리아 고원이죠. 저렇게 길가에 자생하는 야생 양귀비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하, 아나톨리아 고원은 여러 가지로 제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네요.”
야밀이 운전하는 차는 어느새 키리칼레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