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용감한 파인애플(1)
“사장님 시골집에 가보셔야겠어요.”
“왜?”
“아버님 농장이 있는 곳이 비가 엄청 왔다는 것 같은데요.”
“그래?”
베트남에서 돌아와보니, 한국은 폭우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곳곳에 비 피해로 뉴스는 온통 폭우 피해 현장을 보여주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직접 연락이 온 거야?”
진석의 말에 이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뉴스에 그 근처가 폭우 피해가 심하다는 것 같아서요. 뉴스 한 번 검색해 보세요.”
“뉴스 검색은... 직접 전화해 보면 알겠지.”
진석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진석이냐? 왜 무슨 일이야?”
“그건 제가 묻고 싶어요. 아버지, 거기 괜찮으세요? 베트남에서 돌아와 보니까, 폭우 때문에 난리라고 하던데?”
“아, 여기 말이냐, 비가 많이 오기는 했는데, 괜찮다, 나하고 엄마하고 둘이서 다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비 피해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나이도 있으시고, 폭우 피해를 복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기, 아버지 제가 내려갈게요.”
“아냐, 괜찮다니까. 너는 바쁜데, 올 거 없어.”
“안 바빠요. 괜히 힘든데 일하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지금 막 내려갈 거니까.”
“사장님, 시골 내려가시게요?”
“가봐야지, 우리 회사는 폭우에 피해 없는 건가?”
“강원도 쪽에 좀 침수 피해가 있는데, 거기 직원들이 알아서 복구하고 있어요. 따로 신경 쓰실 건 없어요.”
“그래?”
일단 회사 시설은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회사나 연구소, 창고 이런 곳들은 새로 지은 건물들이라, 기본적인 배수설비가 잘 되어 있었다.
“그럼, 난, 아버지 집에 내려갔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
진석은 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짐을 챙겨 부모님의 과수원이 있는 시골 농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사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도로가 물에 잠겨서 통행이 제한되고 있었다.
“저기..이 길 통과해도 되나요?”
도로를 통제 중인 경찰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물이 불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요?”
“글쎄요. 물이 빠져야 갈 수 있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쪽 마을로 들어가려는 건데, 다른 길은 없나요?”
“차가 다니는 길은 이 길뿐이에요. 걸어서 가시는 건 막지 않습니다. 급하면 차는 여기에 세워두시고, 옆쪽 샛길로 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마을 입구에는 물이 차 있어서, 차량의 이동이 불가능하고 샛길은 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진석은 차는 세워두고 가방 하나를 챙겨서 샛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샛길로 가다 보니, 마을 사람들인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비가 많이 왔나 보군요?”
“아, 예, 말도 마세요. 이틀 동안 억수같이 비가 퍼부어서 길도 끊기도 아주 엉망이라니까요.”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는 거죠?”
“예, 다행히 이 동네는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중간중간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다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나마 아버지의 과수원은 지대가 높은 산기슭이어서 물에 잠기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대신 과수원 한쪽으로 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밀려 내려와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진석을 알아보고 아버지가 손짓을 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바쁜데 여긴 왜 와?”
“과수원 뒤쪽 산이 무너져 내렸네요.”
“괜찮다, 약간 흙이 흘러내린 정도야.”
아버지는 삽으로 산에서 내려온 흙더미를 치우고 계셨다. 진석도 창고로 가서 삽을 들고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힘들게, 이걸 혼자서 하세요? 사람 불러서 하든지 아니면, 포클레인이라도 불러서 하면 되지.”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이거 얼마나 된다고 사람을 부르고 장비를 불러, 삽 하나만 있으면 반나절이면 할 걸..”
“힘드시니까 하는 말이죠.”
진석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를 도와 흙더미를 대충 정리했다.
“됐다, 이 정도만 해 두고, 나중에 비 다 그치면, 다시 정리하자.”
아직도 하늘은 먹빛이었다. 중간중간 가랑비도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피해가 심하지는 않네요. 저는 뉴스를 보고, 완전 홍수가 난 줄 알고 놀라서 온 건데.”
“그렇게 피해가 심하면 내가 먼저 연락을 했겠지.”
“하긴 그렇죠.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네요.”
과수원 피해를 대충 정리하고 나서 마을을 둘러보니, 다른 집의 밭들도 물에 잠기거나 작물들이 쓰러진 곳들이 많았다.
시골이라 그런지, 노인들이 나와서 밭을 정리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아버지, 이 동네는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나봐요?”
“시골이 다 그렇지, 젊은 사람들은 다 도시로 가버리고. 노인들 천국이야.”
덕분에 진석은 앞집 밭의 복구 작업까지 돕게 되었다.
“아이고, 과수원집 아들 아니야?”
“아, 예. 어르신 혼자서 이거 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힘들어도 해야지 어떡해?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러게 큰일이네요.”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골에서 비 피해가 생기자 복구 작업할 인력이 부족했다. 다행히, 오후가 되자, 대민 지원을 나온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군인들이 왔네요.”
진석도 군대에 있을 때,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종종 대민 지원을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부대 밖에 나간다고 마냥 힘든 줄도 모르고 좋아했는데,
이제 진석이 군인들의 대민 지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여기도 좀 도와 드려야겠다.”
중대장인 듯한 대위가 여기저기 병력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여기도 좀 도와드릴까요?”
“아, 예, 밭에 고추도 다 쓰러졌고.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진석 혼자서 밭 주인 할아버지를 돕고 있었는데 슬슬 진석도 지쳐가고 있던 참이었다. 군인들 네 명이 추가로 투입되자, 밭의 복구 작업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자, 좀 쉬면서 합시다.”
“예, 아직 괜찮습니다.”
“군인 아저씨들도 좀 쉬어요. 군인이라고 힘든 건 마찬가지지.”
“예, 잠시 휴식..”
병장인 듯한 한 명이 다른 세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는 근처에 부대가 있어서 이럴 때는 좋은데요.”
“그럼, 군인들 덕에 이래저래 든든하지 뭐.”
오후에 투입된 군인들 덕분에 앞집의 밭도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 다들 수고했어요. 뭐, 군인 아저씨들은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병장이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병장 아저씨는 곧 집에 갈 거니까, 상관없지만, 여기 이등병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저..전..파일애플..”
“야..무슨 파인애플이야..”
“아,,아닙니다. 먹고 싶은 건 없습니다. 그냥 물이나 있으면 주십쇼.”
“하하, 파인애플을 좋아하나 보죠?”
이등병인 병사는 고참들이 면박을 주자 좀 당황한 표정이었다.
“음, 이정수 이등이군, 지금은 파인애플이 없는데 나중에 한 번 가지고 부대로 면회 갈게요.”
“아, 괜찮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니에요. 대민 지원도 지원이고, 나라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들이 많아요. 나도 군대 생활을 해 본 선배로서 말하는 건데, 정말 수고 많아요.”
“하하, 남들도 다 하는 건데, 너무 과찬이십니다.”
“다 하는 거라고 쉬운 것도 아니고 의미 없는 것도 아니죠. 아무튼, 이정수 이병도 그렇고 다른 병사들도 파인애플이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뭐, 파인애플이야 다들 좋아하죠, 달콤하고 새콤한 과일 아닙니까?”
“그래요, 내가 과일 유통하는 회사를 하는 사람이니까, 한 번 맛있는 과일 가지고 부대로 찾아갈게요.”
저기, 제이에스 그룹 이진석 회장님 아니신가요?
병장이 진석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하, 용케 절 알아보네요.”
“굉장히 유명하신 분 아닙니까, 평소에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존경은요. 뭐, 그런 말을 들을 위치는 아닙니다. 아무튼, 나중에 면회 한 번 가도로 하죠.”
일을 도와준 것이 고마워서 얼떨결에 면회 약속을 하게 되었다.
***
제이에스 본사
“그래서 군대에 면회를 가시려고요?”
“약속을 한 거잖아, 군대에 가면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다고. 그 이등병도 파인애플이 정말 먹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고참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어?”
“하긴 파인애플이 맛있기는 하죠.”
기왕 면회를 가는 거면, 좀 좋은 파인애플을 가져가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진석은 강원도 인제의 제이에스 바이오 농업 연구소를 찾았다.
“사장님, 오늘은 무슨 종자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아, 소대영 과장이군요. 파인애플을 재배해 보려고 하는데, 파이애플 묘목도 있을까요?”
“파인애플요?”
소대영은 열대나 아열대 작물이 파인애플을 찾자, 조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파인애플 묘목도 보관 중입니다.”
진석은 묘목들을 구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의 오아시스에 도착하자, 사령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늘은 뭘 가지고 오신 건가요?”
“아, 이건 파인애플 묘목이야.”
묘목이라고는 하지만 파인애플은 다년초 식물, 즉 나무는 아니다. 일종의 화초라고 할 수 있고, 벼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사령관, 일단은 좀 쉬어야겠어. 아버지 농장에서 일을 했더니, 여기저기 피곤하고 어깨도 아프고 말이야.”
사실, 엄청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안 하던 일을 했더니 몸살이 난 것 같았다. 일단은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인 오아시스의 집에서 한숨 잠부터 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겨우 깨어났을 때는 고양이들이 야옹거리며 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말린 생선을 던져 주자, 정신없이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음, 잘 잔 모양이군.”
어깨가 조금 뻐근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몸은 가벼웠다. 진석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공간주님, 작업 준비를 할까요?”
“그래, 오늘은 산으로 가야겠어.”
“산에 그 파인애플을 심으실 겁니까?”
“그래, 이건 잘 키워서 군인들에게 선물로 줄 거야.”
“군인들요?”
“그래, 다들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성실한 젊은이들이잖아. 여러 가지 대민 지원도 하고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뭔가 보답을 해야지.”
파인애플은 과일 자체로도 맛있는 달콤한 열대 과일이지만, 공간의 산에서 좀 더 특이하게 변형시켜 보기로 했다.
진석은 공간으로 가는 출입구를 열었다. 출입구를 통과하자 바로 공간의 산기슭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일꾼들이 밭을 만들고 파인애플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석이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하자, 파인애플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슨 화초 같군요. 알로에 같기도 하고요.”
“그러게 말이야. 나는 파인애플이라고 해서 사과나무 같은 곳에서 열리는 줄 알았는데, 야자수 비슷한 나무에 열리는 줄 알았다고.”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진석은 파인애플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자, 하나를 잘라서 칼로 속살을 분리했다. 거친 표면과는 달리, 속의 과육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거기에 새콤한 맛까지 더해 상큼하고 시원한 맛, 여름에 청량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최고의 과일인 것 같았다.
진석은 계속해서 파인애플들을 증식시켜 나갔다. 그냥 먹어도 맛있기는 하지만, 뭔가 특별한 파일애플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증식을 반복하며 변형된 파인애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공간주님, 저건, 좀 색깔이 특이하네요.”
“오, 정말 그런데, 색이 보라색이잖아.”
잘 익은 파인애플은 보통 노란색을 띠지만 사령관이 가리킨 파인애플은 진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저렇게 색깔이 다르다는 건, 뭔가 변종이 생겼다는 증거인데...”
공간의 산에서 변종이 생긴 과일들은 모양이나 색이 확연하게 달라져서 구분할 수 있었다. 진석은 보라색의 파인애플을 골라, 증식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을 가속하자, 산기슭의 파인애플 밭에는 진한 보라색 파인애플들이 무수하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이걸 가지고 군인들이 있는 부대로 면회를 가야겠어.”
“공간주님이 직접 말입니까?”
“그래, 내가 가야겠지, 그리고 나 혼자 가면 군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걸그룹과 같이 가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