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메콩 델타의 오리(1)
“메콩이라는 말은 아홉 마리의 용이라는 의미죠.”
“용이라면, 보통 물이라는 의미겠죠?”
“그렇습니다. 9라는 건 크다는 의미도 있죠. 동양 문화권에서는 9라면 가장 큰 수로 본 거죠. 아홉수라는 말도 있죠. 9는 마지막이라는 의미도 있죠.”
“그렇겠군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홉수라는 의미는 어떤 단계를 넘어가는 마지막 고비를 말하기도 한다. 29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고, 서른아홉에서 마흔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렇게 변화의 시기라는 것은 쉽지 않은 시련의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메콩 델타 지역도 아홉수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오병우와 함께 진석은 호치민에 도착했다. 베트남 북부가 하노이로 대표된다면, 남부를 대표하는 도시는 호치민이다. 그리고 호치민을 거쳐,
메콩 델타의 주도인 껀터로 갈 것이다.
오병우는 하노이에서 진석의 사업을 서포트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베트남 정부의 요청으로 진석의 제이에스 바이오가 본격적으로 메콩 델타에 농장을 건설하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껀터의 사무실이 새로 개소식을 했다고요?”
“예, 그동안은 호치민에 사무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농장 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까, 메콩 델타에 가까운 껀터에 새로 사무실을 임대했습니다.”
“일단은 건물을 임대해서 쓰고 나중에 껀터에 땅을 사서 건물을 새로 지을 생각인데 어떻습니까?”
“뭐, 그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직원도 더 필요하고 일들이 많아질 테니까요.”
호치민에서 껀터까지는 오병우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호치민이 좀 촌스러운 느낌의 도시라면, 껀터는 도농 복합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번화한 거리도 있고, 메콩 델타의 중심시답게 시골 느낌이 다는 곳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여깁니다. 제이에스 바이오 베트남 지사 사무실이죠.”
빌딩 입구에는 제이에스의 로고가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 먼 베트남의 오지에 제이에스의 사무소가 자리를 잡고있는 모습은 어딘지 뿌듯한 느낌이었다.
“여기가 사무실이군요. 크지는 않지만 괜찮네요.”
진석은 새로 개소식을 했다는 사무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입구에는 베트남 대통령의 화환도 놓여져 있었다.
“대통령의 화환이군요?”
“예, 뭐, 베트남은 대통령보다는 총리의 권한이 더 강하지만, 어쨌든 대통령도 형식적으로는 행정부의 수반이니까요.”
“음, 베트남 정부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보여준다는 반증이겠군요?”
사실 진석도 참석하지 않은 개소식에 베트남 대통령이 축하 화환을 보낸 것만으로 굉장한 신경을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노이이나 호치민도 아니고, 껀터 같은 작은 곳에 사무소를 개설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메콩 델타의 중심지인 이 껀터에 제이에스 바이오의 본격적인 농장 사업이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사무소를 대충 구경하고는 껀터 시내에서 식사를 했다. 베트남 요리보다는 한식을 먹고 싶었는데 마침, 한국인 주인이 운영하는 한인식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농장 쪽은 잘 되고 있는 겁니까?”
“예, 일단은 메콩 강 일대의 논들을 임대해서, 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진석이 개발한 경기미가 메콩 일대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경기미와, 경기오리, 이 두 가지가 메콩 델타의 쌀 재배지에 보급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일종의 유기농의 개념으로 개발된 오리 농업이었지만, 메콩 델타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이 오리 농법이 관심을 끌고 있었다.
“오리들도 잘 자라고 있겠죠?”
“하하, 물론입니다.”
메콩 지대의 벼경작지대는 예로부터 풍부한 델타지역의 퇴적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연적으로 벼가 자생할 정도로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메콩 강의 상류인 중국에서 댐을 건설하면서 유량도 많이 줄었고, 그에 따라 퇴적물이 줄어들어, 델타 지역의 농업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에서도 오리 농법에 관심을 많이 가지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지금 메콩 델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부의 산업 지역으로 인력이 빠져나가고 있고, 또 메콩 강 상류 국가들이 댐을 건설하면서 홍수 피해는 줄었지만 수량이 줄어들면서 퇴적물의 양도 동시에 줄어들었습니다.”
주기적으로 범람을 하며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막대한 영양분의 보고였던 강의 범람이 사라지면서 이집트의 나일 델타처럼, 기존의 자연적인 농법으로는 수확량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요. 나일 델타처럼 메콩 델타도 생산력이 요즘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인력도 부족하고, 상류에서 내려오던 퇴적물도 줄어서 이중고죠.”
“그래서 오리가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요?”
“예, 원래, 베트남에서는 과거에는 제초제를 거의 안 썼어요. 그렇다고 잡초가 안 자랐던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쌀농사에 최적화된 기후 조건이라,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논에 피가 자라서 수확이 줄어도 큰 신경을 안 쓴 거였죠.”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국처럼 한 번 추수하는 개념이 아니니까. 일 년에 세 번 수확을 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생산량도 세 배가 되는 거 아닙니까. 잡초로 수확이 좀 줄어도 큰 타격은 아닐 테고, 귀찮게 피를 제거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거죠?
진석의 말에 오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농사가 전부였기 때문에, 쌀을 많이 생산하는 이 메콩 지역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죠. 쉽게 말해 다른 지역 처녀들이 이곳의 총각들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 이 말입니다.”
농업 생산이 절대적이었던 과거 수백 년 전에는 이 메콩 일대의 껀터는 베트남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이 이루어지고 서구식 자본주의가 밀려들어 오면서 메콩강 일대의 농부들의 수입은 베트남의 공업도시 근로자 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쌀이나 농산물 생산량이 줄었다기보다는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절하된 것이다. 베트남의 젊은 세대들은 쌀과 과일, 채소와 물고기 같은 식재료 외에도, 옷이나 신발, 핸드폰, 노트북, 자동차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산품들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자본주의가 메콩 강의 농부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가난이었다.
가장 풍부한 메콩 델타의 농부들은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처음으로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때 자신들을 부러워하던 북부 베트남의 도시들의 근로자들의 수입이 자신들의 두 배 이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농부들은 돈이 되지 않는 논을 버리고 도시로 가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모두들 메콩 델타의 생산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지금 생산하는 걸로는 도시 지역의 임금 수준의 절반도 벌 수 없거든요.”
풍요와 가난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같은 상황, 같은 땅에서 똑같이 농사를 짓지만, 백 년 전의 농부들이 누리던 풍요는 이제는 가난이 되어 버렸다.
“역시, 소규모 농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군요?”
“예, 베트남 정부에서도 메콩 델타의 소득을 높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죠. 그중에 하나가 오리 농법입니다.”
오병우는 베트남 정부에서 오리 농법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직접 한국에서 경기 오리를 수입해 올 걸 제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문제는 베트남의 논의 구조였다. 베트남은 수로 시설이 잘되어 있는 편인데, 이게 공산주의 국가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논들 주위로 거대한 수로가 나 있는 상황, 그런데 한국에 비하면, 현대적이고 발전한 이 수로 시스템이 오리들이 살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유속이 빨라서 오리들이 한국의 논에서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수로를 따라 이동하기도 쉬워서, 오리들을 관리하기 쉽지 않다. 거기에 베트남은 논이 일종의 공공재 성격이라 개인 소유가 아니라 임대, 따라서 논과 집의 거리도 상당히 멀다. 농부들이 자기 오리를 관리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국 농촌이라면 자기 집 앞에 보통 논이 있고 농가 주택이 있는 구조라, 오리는 데려다가 집에 넣어두어도 되는데 베트남은 논이 일종의 공장 같은 거라 그게 어려운 거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농부들이 한국 농부들에 비해서 약간 게으른 면도 있어요. 공산주의를 오래 경험한 국가라, 또 3모작이 가능한 곳이라 농업은 자연이 알아서 생산해 주는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메콩 강 유역의 풍요로움을 생각하면 그런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하자면, 농업의 조건에서는 한국이 척박하다고 느낄 정도로 베트남의 여러 조건, 특히 메콩 델타의 쌀농사의 입지 조건은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변하고 있죠.”
개인들의 소규모 논에 오리 농업을 시도하려던 시도는, 베트남 논의 구조적인 문제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석은 포기하기 않았다. 소규모 농가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진석같이 거대 기업이 대규모 농지를 임대해, 거대한 오리 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토지 규모 자체가 틀리고, 그 넓은 지역에 충분한 오리들을 넓게 분포시키면서 넓은 논지역의 잡초를 제거하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소규모 자영농들에 비해 대규모 인원으로 오리들을 넓은 지역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백문이 불여일견, 오리들이 있는 논으로 가 봅시다.”
식사를 마치고, 진석은 껀터의 식당을 나와, 메콩 델타 외곽의 제이에스 제1 농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농장 쪽으로 진입하자, 멀리 광대한 벼농사 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농사를 위해 옆으로 건설된 수로 쪽으로 오리 떼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확실히 한국과는 논의 풍경이 다르네요. 일단 수로가 넓어서 오리들이 이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겠어요?”
농장에서 키우고 있는 벼는 경기미 품종이었다. 진석이 경기도의 의뢰로 생산했던 품종으로 베트남의 메콩에서도 잘 재배되고 있었다. 거기에 경기미와 같이 경기 오리도 같이 메콩으로 수출이 되어서 이곳의 논에도 오리 떼들이 벼들 사이의 피를 제거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메콩 지역의 베트남 논들은 일단 스케일 자체가 한국과는 다르다. 그건 제이에스가 일부러 크게 논과 수로를 만들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농업 개발 방식이 한국과는 다르게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 농지는 모두 국가 소유라는 개념이고 농민은 그걸 장기임대 하기 때문에 논이라는 것도 농사를 개인이 짓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 그렇기 때문에 수로나 논의 경지 관리가 굉장히 큰 규모로 스케일 있게 관리 되어 있는 것이다.
그걸 제이에스가 거대한 농장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수로가 크고 유속이 빠르지만, 농장 주위에 펜스를 치고 오리의 숫자가 충분히 많기 때문에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논으로 돌아와 잡초를 제거하는 구조입니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가능하군요?”
“예, 안타깝게도 일반적인 베트남의 농가에는 어려운 방법입니다. 오리 농법을 하려면, 한국처럼 고립된 개인 논이 있던가 아니면 제이에스처럼, 규모가 커서 관리 인원이나 시설이 따로 있어야 가능한데 베트남 농가들은 두 가지 다 해당이 안 되니까요.”
오병우의 말에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이에스의 농장에서라도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오리 농법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우리라도 오리를 키울 수 있는 게 어디입니까. 아무튼 오리 농법으로 생산력도 늘어나고, 오리 자체로도 추가 수익이 발생하는 거니까요.”
진석의 말에 오병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베트남 지방 정부 관리들도 이곳을 보고 나서 감탄을 하더군요. 자기들끼리 말하는 걸 들었는데, 역시 대규모 농장이 아니고는 어려울 것 같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베트남 관리들이 말입니까?”
“예, 자기들도 메콩 지역의 농민들이 자꾸 외부로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아무리 방법을 짜내려고 해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다가 우리가 대규모 농장 식으로 쌀농사를 짓고 오리도 키우는 걸 보고, 놀라는 거죠. 역시 규모의 경제가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특히 농업과 농민을 중시하는 베트남 정부가 외국 자본에게 농업을 맡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메콩 델타의 주변 상황이 완고한 베트남 정부로서도 제이에스 바이오 같은 외국 회사의 농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