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유쾌한 체리(3)
북카페 오아시스 해운대점.
“장마철이라 해운대에도 사람이 별로 없네요.”
홍선화는 해운대점의 새로운 점장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소위 말하는 돌싱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예, 오늘은 좀 그러네요. 장마에 태풍까지 온다고 하니까, 저도 해운대가 이런 모습인 건 처음봐요.”
원래 홍선화는 서울 출신이었다. 부산에는 따로 연고가 없었는데, 서울의 이태원의 북카페에서 일하다가 마침, 이곳 점장 자리가 나자, 자원을 해서 해운대점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진석은 카페를 둘러보았다. 밖에는 장마철이라, 지난주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고, 눅눅한 공기에 더해, 여름철의 태풍이 북상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태풍이 제주도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태풍의 경로는 크게 서해바다로 진입하는 시나리오와, 부산 앞바다를 지나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있었다.
“부산은 좀 피해가면 좋을 텐데.”
“여기가 아니면, 서울이 피해를 보는 거 아닌가요?”
“그렇기는 해요. 그래도 해운대는 바닷가라 태풍이 온다니까, 더 걱정이 되네요.”
서울에 살고 있으면, 태풍이 불어도 그저 비바람이 거칠게 몰아친다는 정도인데, 해운대의 바닷가에서 느끼는 태풍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거친 바람에 해일이라도 덮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카페는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은 문을 닫아야겠어요.”
진석의 말에, 홍선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거 송이체리라는 건데, 한 번 먹어봐요.”
진석은 들고 온 상자에서 송이체리를 꺼내 홍선화에게 보여주었다.
“어머, 이게 뭐예요? 포도인가?”
언뜻 커다란 포도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아, 포도가 아니라, 체리예요.”
“체리요? 이렇게 생긴 체리도 있었나?”
홍선화는 송이체리 알을 하나 따서 입안에 넣었다.
“음, 맛은 체리네요. 체리향이 나요. 신기하네 송이에 달린 체리가 다 있었네.”
“카페에서 이걸로 뭘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선화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진석의 말에 홍선화는 좀 멍한 눈으로 송이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체리라면? 한 알씩 열리는 작은 열매라 먹는 것보다는 데코레이션을 하는데 더 적합한데, 이건 송이로 되어 있어서 좀 그런데요.”
진석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나름 맛은 좋은데 기존의 체리처럼 장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송이로 뭉쳐 있는 게 좀 단점이었다. 하나씩 따면, 꼭지 부분이 떨어져서 약간 미관상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냥,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볼까요?”
“뭐, 그래도 좋고요. 체리주스라?”
장마로 눅눅하고 꿉꿉한 날씨였다. 체리주스든 뭐든 시원한 얼음이 들어간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홍선화는 체리 상자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얼음이 가득 담긴, 진한 레드빛의 음료가 글라스에 담겨 나왔다.
“일단, 시원해 보이기는 하네요.”
진석은 아이스체리 주스 맛을 보았다. 의외로 체리의 향이 살아있었다.
“음, 맛있어요. 생각보다 향도 진하고, 괜찮은데요.”
“그래요?”
홍선화도 진석의 반응에 자신도 송이체리 주스잔을 집어 들었다.
“으음..진짜 맛있네요. 오늘은 태풍으로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인기 메뉴가 되겠어요.”
홍선화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였다. 카페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날씨 때문인지 어딘가 축 늘어진 느낌이었는데, 잠깐 사이에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유쾌함이 느껴졌다.
“해운대로 이사 온 건 어때요? 서울 살다가 부산으로 오니까 좀 적응하기 어렵지 않아요?”
진석의 말에 홍선화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어려워요. 사실, 부산은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거든요. 새로 집을 구했는데 이웃들하고 지내는 것도 어렵고요.”
홍선화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키우고 있었는데 딸과 살 집을 구해서 해운대 근처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해운대에서 좀 떨어진 아파트였는데 단지 내에 유치원이 있어서 딸을 키우기에는 좋은 조건이라 그 집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파트단지다 보니까, 외지에서 온 저 같은 사람은 좀 어울리기 힘들더라고요.”
“서울사람이라고 말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거기에 사람들이 미혼모라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돌싱이지 미혼모도 아니고, 설사 미혼모라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일까 싶기는 했다. 하지만, 다들 진석같은 건 아니니까 말이다. 아마도 외지 출신에 한부모 가정이라 텃세가 있는 모양이었다.
“뭐, 차차 좋아지겠죠. 처음에는 그 사람들도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저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래요? 홍선화 씨라면, 일도 잘하고 리더쉽도 있는 줄 알았는데.”
진석의 말에 홍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여기는 직장이니까, 억지로라도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것뿐이죠. 그리고 여기서는 하루종일 일과시간에는 같이 있잖아요. 오래 지내다 보면 어떻게든 친해지잖아요.”
“하긴 그렇죠. 오히려 같은 아파트 이웃이라면, 얼굴 보기 힘든 경우도 많고, 지나가다 한 두 번 보는 걸로는 친해지기 어렵죠.”
홍선화 말로는 부산 사람들은 사투리도 무섭게 들리고 먼저 다가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웃들이 먼저 친절하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부산 해운대의 카페에는 쉽게 적응했지만, 퇴근 후가 더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차츰 좋아지겠죠. 음, 아무튼, 이 체리 주스는 정말 맛있네요.”
“하하, 장마가 끝나면, 더 가져올게요.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손님도 늘어나겠죠.”
“그러겠죠. 그때쯤에는 저도 부산에 잘 적응하겠죠? 아무튼 걱정해봐야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생각할래요.”
***
그리고 그 다음날, 기어이 태풍은 부산을 직격으로 강타하고 말았다.
서울 스카이캐슬 시그니엘, 진석의 집 거실..
“부산은 난리라고요?”
서울에는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것 외에는 태풍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tv에서는 부산의 태풍 피해가 계속 보도되고 있었다.
다행히 카페는 날아온 나뭇가지에 카페 앞 유리가 조금 깨진 것 외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선화 씨 집은 괜찮아요?”
“예, 다행히 아파트 쪽은 별 피해가 없어요. 그리고 태풍 때문에 사람들하고는 더 친해졌어요.”
“정말요?”
“예, 태풍 때문에 어수선하기는 한데, 피해가 없는지 안부도 묻고 제가 먼저 말을 걸고 그랬더니, 생각 외로 잘 받아주시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유치원에 다니는 딸 아이도 친구들하고 친해지고 이제는 부산에 좀 적응이 된 것 같아요.”
“하하, 태풍 덕을 본 셈이네요.”
“아, 그것도 그렇고, 제가 친해질려고 송이 체리를 아파트에 좀 가져가서 나눠드렸거든요. 괜찮죠? 사장님.”
“뭐, 상관없습니다. 체리는 많이 있으니까요.”
“체리를 나눠 먹어서 그런가? 이웃분들이 다들 평소보다 말도 많이 하시고 유쾌해지신 것 같아요.”
“그래요?”
진석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산에서 재배한 체리에는 사람들을 친하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효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석은 홍선화와의 통화가 끝나자 김현수 감독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fc 강원 선수들에게는 가장 먼저 송이체리를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송이체리가 진석의 생각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서 사교적으로 만들어준다면 외국 선수들이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 축구팀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었다.
“아, 구단주님이시군요?”
“예, 김 감독님, 사실은 외국 선수들과 국내 선수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그 문제라면 잘 해결됐습니다.”
“잘 해결요?”
“예, 지난번에 구단주님이 직접 오셔서 체리를 선물로 주고 간 날 말입니다. 그 날 경기는 졌지만, 끝나고 회식을 했거든요. 그런데 회식자리에서 대화가 잘 돼서 그동안 외국 선수들하고 국내 선수들간의 오해가 있던 것들이 많이 풀렸어요.”
“정말요?”
“예, 부끄럽지만, 제가 감독이면서도 선수들 간에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랐거든요. 하지만 그날 회식자리 이후에 많이 풀어졌습니다. 뭐, 술은 맥주 한두 잔 정도였지만, 대신 체리를 먹으면서 대화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요?”
역시나 송이체리가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재밌군, 사람들을 친하게 만들어주는 체리라..”
그런데 정작 그 체리 묘목을 진석에게 준, 그 체리 농장 주인은 어떻게 됐을까? 평소의 그 무뚝뚝하던 성격으로 봐서는 여전히 동네 주민들과 서먹하게 지낼 것 같았다.
***
김포 은하수 농장..
“체리 농장에요?”
“예, 지난번에 그 체리 묘목으로 체리를 개발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진석은 가져온 송이체리를 서은주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뭐죠?”
“송이 체리라는 신제품입니다. 체리 열매가 하나씩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포도처럼, 송이를 이루고 있어요.”
송이 체리는 그 모양처럼 서로 따로 떨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것이 분명했다. 진석은 지난번처럼, 서은주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체리 농장으로 향했다.
“저기 계세요?”
진석이 농장 밖에서 소리를 지르자, 무덤덤한 표정의 그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지난번에 주신 그 체리 묘목으로 새로운 품종의 체리를 개발했습니다.”
“체리를 개발했다고요? 벌써요?”
“아, 뭐, 유전적으로 처리를 한 거죠. 제이에스 바이오만의 최첨단 기술이죠.”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아무튼, 새로운 체리를 개발했는데 한 번 시식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진석은 송이체리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송이 체리를 하나 따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맛있군요. 맛은 우리집 체리와 비슷한데.”
남자는 송이에 달린 체리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체라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포도송이 같은 체리네요. 대체 이건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하하, 그건 영업비밀입니다.”
“그래요? 아무튼 대단하네요. 사실은 저는 교사 출신입니다.”
“교사요?”
“예, 원래는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죠.”
남자는 갑자기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대충 내용은 중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재단 내부 비리를 고발했는데, 역으로 재단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동료들에게 배신감을 많이 느꼈죠. 다들 재단 편에 서서 저에게 불리한 증언만 하더군요. 제 개인 이익을 위해 한 일도 아니고, 모두를 위해 한 일인데. 쫓겨나게 생긴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죠.”
“저런, 인간적인 배신감이 컸겠군요?”
“예,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큰 상처였죠.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도 그만두고,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농장을 선택한 겁니다.”
남자는 그때 입은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상처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교사를 그만두고 농장을 시작한 후에도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도 거부하며 고립된 생활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신 겁니까?”
“예, 시간이 약이라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아주 깊은 상처 같았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니 그 상처도 다 사라지는 모양입니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오성민이라고 합니다.”
“하하, 제 이름은 아실 테고, 저쪽은 아시죠?”
진석은 서은주를 가리켰다.
“물론이죠. 서은주 사장님이시죠. 가끔 길에서 보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모른 척 지나가서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닌데, 마음의 상처가 그동안 심했었나봐요.”
“그럼, 오성민 씨는 이제 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한 건가요?”
“예, 저도 좀 갑작스럽기는한데, 오늘은 뭔가 기분이 가볍고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앞으로는 이웃들과도 잘 지내볼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은주 사장님.”
“그래요, 사실, 저도 좀 불편했는데 지금부터라도 좋은 이웃으로 지내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던가? 축구팀도, 그렇고 해운대점의 홍선화 씨도, 그리고 체리 농장의 오성민 씨도 모두가 좋지 않았던 인간관계가 해소되면서 문제가 해결된 느낌이었다.
역시 모두 이 유쾌한 송이체리 덕분인 모양이었다.
“하하, 그럼 해피엔딩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