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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올리브 기름(2) (92/183)

109화. 차가운 올리브 기름(2)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저온 압착기는 이곳 뒤셀도르프 기계 공작소만한 곳이 없다더군요.”

진석의 말에 한스 발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오랜 전통과 기술력, 모든 면에서 우리 회사만한 곳은 없죠.”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호주의 농장에서 사용할 저온 압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 호주 윗벨트에서는 한창 올리브 압착공장이 공사 중이죠. 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면 바로 설비를 설치하고 올리브유 생산에 들어갈 겁니다.”

“저, 잠깐만요.”

한스 발터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진석 사장님이 오시기 전에 메일로 보내오신 주문서를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까지 압착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곤란한 문제요?”

한스 발터는 조금 뜸을 들였다.

“아시다시피, 올리브는 주로 프랑스나 그리스 혹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작물입니다. 유럽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중에서 포도와 함께 생산량과 품질 면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농산물이죠.”

“뭐, 그렇기는 하죠.”

왠지 한스 발터의 태도에서 진석은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일이 잘되는 느낌이 아니었다. 보통은 물건을 주문하는 쪽이 갑의 입장인데, 한스 발터의 태도는 물건을 적극적으로 팔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유럽연합내에서 농업은 취약한 산업입니다.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 거기에 남미 대륙까지 광활한 농경지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거나, 아니면 저 임금으로 집약적으로 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한스 발터의 말대로 유럽의 농업은 미국식의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도 어렵고, 아시아의 저개발 국가들처럼 저임금 노동에 의존할 수도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고급 와인이니 치즈처럼 높은 품질을 무기로 고가 정책을 펴고 있었다.

올리브는 그다지 고가 제품군은 아니지만, 재배가 까다롭다는 점과 생산지가 유럽 남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강점을 바탕으로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문제가 되나요?”

“제 말은 이진석 사장님 같이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유럽내에서는 농산물에 관한 여러 가지 복잡한 규제들이 있다는 겁니다.”

“올리브도 마찬가지라는 건가요?”

“예, 올리브는 유럽이 대규모 생산지고, 다른 곳에서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따로 보호정책이 필요없었죠. 나름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니까요.”

“하지만 이제 호주에서 대규모로 올리브를 생산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한스 발터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여러 곳에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압착기를 제이에스에 납품하는 것에 대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우리의 전통적인 고객들이 반발하고 있고요. 유럽연합내의 각국 정부들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유럽연합에서도 올리브유의 수출이 줄어들걸 걱정하고 있고요. 가격 덤핑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유럽의 올리브 농가나 농업 담당 공무원들이 호주에서 제이에스 바이오의 올리브 농장 재배의 성공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큰 관심이 없던 호주 윗벨트에서 대규모의 올리브가 재배에 성공하는 것을 보자, 내부적으로 크게 당혹해한다는 것이 한스 발터의 귀뜸이었다.

그리고 올리브가 본격적으로 수확할 수 있게 되고, 제이에스 바이오가 대규모의 저온 압착기를 주문하자, 각국 정부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은 호주산 올리브유를 막을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고, 당장 급한대로 저온 압착기의 수출을 막으라는 비공식적인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 압착기를 팔지 말라는 거군요?”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비공식적인 루트로 다양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농민단체, 독일 정부, 올리브 유통 회사 등등, 모두 우리에게는 중요한 파트너들이죠.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당장의 이익을 생각해서 압착기를 팔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압착기가 여기 뒤셀도르프에서만 생산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스웨덴 쪽에도 유명한 회사가 있죠. 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온 압착기술은 유럽에서 개발된 기술이고, 주로 올리브를 압착해서 엑스트라 버진 등급의 올리브유를 착유하는데 쓰이죠. 유럽 회사들 외에는 다른 지역에는 이런 압착기를 생산하는 곳은 없습니다.”

낭패였다. 올리브의 수확 시기는 다가오고 있는데 압착기 공급이 안 된다면, 올리브유의 생산은 무산되는 것이다. 올리브유는 저온 압착 기술이 이미 국제 표준으로 정착되었고, 영양면에서도 저온 압착기술이 월등한 기술이다.

따라서 올리브를 참깨 같이 고온 압착기로 짜낸다면 그 품질 등급을 인정받기도 어렵고 국제적으로 판매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유럽 연합과 유럽의 올리브 농민단체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진석의 제이에스 바이오가 올리브유를 생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저온 압착기를 생산하는 회사들에 압력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온 압착기 회사들도 기존의 고객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고, 더구나 유럽 연합내의 여러 정부기관까지 나서자 결국 압력에 무릎을 꿇고 제이에스의 저온 압착기 주문을 거절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이군요.”

“죄송합니다. 저희 회사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물론, 제가 말씀드린 건, 비공식적인 내용입니다. 비밀은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식적으로 제가 말씀드린 외부압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신다면, 저는 제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쉽군요. 뒤셀도르프 기계 공작소와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는데요.”

“나중에 또 좋은 기회가 있겠죠. 저희 회사는 저온 압착기 외에도 많은 걸 생산하고 있으니까요.”

한스 발터와는 그렇게 뒷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

진석은 뒤셀도르프를 떠나 일단 파리의 빌레쥐프로 왔다.

빌레쥐프의 빨간 벽돌집, 휴식을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호주, 호주에서 독일로 계속된 장거리 비행에 체력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진석은 빌레쥐프에 있는 집에 있는 공간으로의 출입구를 이용해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이었다.

진석은 빌레쥐프의 집으로 와서,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의 오아시스가 나오고 다시 서울로 가는 공간의 문을 열었다.

서울로 돌아온 진석이 향한 곳은 제이에스 생활건강, 예전의 성원 생활건강의 사무실이었다. 화장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던 성원 생활건강은 자금난으로 몇 년 전에 제이에스 그룹으로 합병되었다.

성원 생활건강을 창업했던 박성준 사장은 아직도 제이에스 생활건강의 사장으로 경영과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박성준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제이에스 생활건강은, 미백 크림인 이비자 크림으로 한국은 물론이고 동남아와 중국 등에서 엄청난 판매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후로 후속 제품은 없어서 아직도 미백 크림 생산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비자 미백 크림은 한지수를 모델로 발탁해서 한지수를 연예계의 거물로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그 이후, 제이에스 그룹이 농업분야에 집중하면서, 화장품 사업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박 사장님은 여전하시네요.”

“저야, 뭐 그렇죠. 그건, 그렇고. 정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에는 제이에스 그룹에서는 화장품은 관심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죄송하네요. 그룹의 주력 사업이 농업 쪽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박성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비자 미백 크림만으로도 다 망해가던 우리회사가 충분히 먹고 사는데요. 그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죠.”

“사실은 박성준 사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요?”

“예, 제가 알기로는 화장품 회사들은 식물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음, 그거야 그렇기는 하죠.”

보통 화장품이나 비누 등에 사용되는 지방은 식물에서 추출하는 경우가 많다. 크림의 유분 중에는 향이나 피부에 효과를 주기 위해 특정 식물성 성분을 이용하는데, 이것도 압착 기술을 이용해 기름 성분을 뽑아내는 것이다.

“혹시 올리브에서 저온 압착으로 기름을 추출할 수도 있겠습니까?”

“예, 올리브유요?”

박성준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분야는 다르지만, 박성준 사장은 기본적으로 엔지니어였다. 모터 사이클을 만들던, BMW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엔지니어들 특유의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의 기술에 항상 관심을 가지는 게 엔지니어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박성준도 화장품 생산에 사용되는 압착 기술과 유사한 올리브 압착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가능할까요? 식물을 압착하는 점에서는 화장품을 만드는 압착기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올리브는 저온 압착 방식인데, 엑스트라 버진 오일의 경우에는 27도에서 압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기름을 압착하는 온도로는 상당히 저온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프라이팬의 기름을 생각하면 됩니다.”

“프라이팬요?”

박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팬이 달궈진 상황에서 기름은 쉽게 튀어오르죠. 하지만 프라이팬이 식으면 기름은 끈적끈적하게 굳어버립니다. 그 상태에서 기름을 짠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쪽이 쉽겠습니까?”

“당연히 뜨거운 쪽이겠죠.”

“예, 기술이라는 건, 어려운 일을 해내는 거죠. 그 말은 저온 압착이 고도의 기술이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화장품 제조에 쓰이는 식물성 기름은 고온에서 쉽게 얻어내죠. 그리고 저온 압착을 하려면 온도가 낮은 대신 고압이 필요하죠.”

“그렇겠군요.”

당연히 온도가 낮은 만큼 기름 성분을 짜내려면 물리적 압력이 더 가해져야 하고, 이런 고압을 견디는 압착기를 생산하는 건 더 어려운 난제가 되고 만다.

저온 압착이 어려운 기술이 되는 이유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정 수준의 고압을 견디려면, 기존의 장비로는 어림도 없거든요. 고압을 견디는 부품들도 필요하고요. 유럽에서야 수백 년에 걸쳐서 이런 기술들이 진보해 나간 거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죠.”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겠죠. 유럽에서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는 세계 어디나 정보의 격차라는 건 없는 세상 아닙니까?”

박성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정보의 격차는 없지만 기술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죠. 아주 미세한 차이를 뛰어넘기가 정말 어려운 법이거든요.”

“투자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진석의 말에 박성준은 고심을 하는 표정이었다. 박성준도 근본적으로 엔지니어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이공계 출신으로 화장품 회사를 경영하면 여러 가지 실험이나, 새로운 장비를 만지는 일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진석의 투자 제의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공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예?”

“투자는 원하는 만큼 해드리고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건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박성준 사장님께서 편한 마음으로 한 번 도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인가요?”

어려운 기술을 개발하라고 부탁하면서 반드시 성공하라는 부담을 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다고 더 열심히 개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보다는 진석은 엔지니어 특유의 호기심과 탐구심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진석이 보기에 박성준은 타고난 엔지니어였다.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며 나름의 식물 압착 착유기술에도 경험이 있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한 번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예, 결과는 걱정하지 마시고, 박 사장님의 경험과 기술을 모두 쏟아부어서 한 번 개발에 착수해주십쇼. 기술 개발 외에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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