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올리브 기름(1) (91/183)

108화. 차가운 올리브 기름(1)

제이에스 본사

“존 스트라다 씨에게서 전화가 왔는데요.”

“존 스트라다, 호주에서 말인가?”

“예, 올리브 농장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고 한 번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존 스트라다는 전역 군인 출신의 호주의 농장주였다. 원래는 호주 서부 윗벨트 지역에서 밀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단체의 대표도 맡고 있는 그 지역의 유력인사였는데,

지난번에 진석이 윗벨트 지역에 올리브 농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의 농장들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호주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메일 등으로 업무 보고를 받고는 있었지만, 역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방문하고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존 스트라다는 올리브 농장에 오일 생산 공장을 짓고 싶다는 것이었다. 건설은 이미 진석이 허가를 내려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단, 진석은 호주로 가서 존 스트라다를 만나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호주로 가시게요?”

“그래. 윗벨트는 직항 노선이 없으니까, 일단 시드니행 비행기를 알아봐줘, 아니면 싱가폴 경유하는 것도 괜찮고.”

한국에는 아직 호주 서부지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서 가야했는데, 일단 시드니행 비행기편이 더 빠른 것 같았다.

진석은 대충 짐을 꾸리고, 시드니로 향했다.

***

시드니행 비행기.

급하게 오느라, 좌석 등급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웬일인지 1등석이 없고 비즈니스 석도 못 구했는지, 이코노미 좌석에 앉게 되었다.

태어나서 이코노미석에 앉아서 비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돈이 없어서 비행기를 탈 일도 없었고,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1등석만 탔던 진석이었다.

사업차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행경험이 많았지만, 시드니까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자, 확실히 좌석이 좁고 불편하다는 느낌이었다.

다음에는 공간을 통해 가는 출입구를 만들어 놔야겠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고.

하지만 1등석으로 갈 때와는 달리, 옆좌석의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옆자리에 이진석 사장님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돈이 많은 분이라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가실 줄 알았는데, 검소하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최창민이라는 남자는 대학생이었다. 호주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어학연수겸, 알바겸, 겸사겸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뉴스기사에서 이진석을 자주 보고는 옆자리의 진석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급하게 호주 출장을 가느라, 1등석을 못 구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1등석을 탔겠죠.”

“역시 그러시군요, 하긴 저라도 여유가 있으면, 좋은 좌석으로 가겠죠. 처음에는 그냥 닮은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이진석 사장임이라니, 사실, 평소에 굉장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저 같은 사람을 무슨 존경씩이나...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최근 들어서 진석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단어가 존경이라는 단어였다. 주로, 젊은 청년들이 그런 말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존경한다는 말이 부담스럽고,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미디어에 비친 진석의 모습이라는 건, 젊은 나이에 굉장한 성공을 하고, 전세계를 누비는 청년 사업가의 이미지였다.

물론 실제와는 다른 점도 많지만, 대중에게 비쳐지는 그런 모습이라면 진석이 봐도 존경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호주라면 어디로 가십니까? 시드니행 비행기이기는 한데. 역시 시드니인가요?”

“아뇨, 퍼스로 갑니다.”

“퍼스요? 호주에 그런 곳도 있었나요?”

퍼스를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국인들에게 호주라면 굉장히 익숙한 국가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남동부에 한정된 것이었다. 대부분 남동부의 해안지대를 여행하고는 호주를 다 본 것처럼 생각하지만,

호주에는 아직 미개척지라고 할 수 있는 서부지역이 남아있었다. 이쪽은 직항편이 없을 정도로 한국과는 교류가 적은 지역이었다.

“퍼스는 호주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죠. 사실 거기가 목적지는 아니고, 퍼스에서 또 더 내륙 지방으로 들어갈 겁니다. 윗벨트라고 해서 밀의 산지로 유명한 농업지역이죠.”

“와, 듣기만 해도, 뭔가 스케일이 크고 엄청난 것 같네요.”

최창민은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창민 씨는 어디로 가나요?”

“예, 저는 뉴 사우스 웨일즈에 있는 무슨 양털 농장이라는 곳에서 일할 계획입니다. 양털을 깍는 일이라는데 잘 모르겠네요. 뭘 하는지는.”

호주도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단순노동이나 농업 분야의 인력은 많이 모자라고 있었다. 중국의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철광석을 생산하는 호주의 광산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 지하자원 수출로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관광객들도 많이 찾으면서

호주는 호경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일자리가 넘쳐나는 편이라. 농장 같은 힘든 일은 이렇게 최창민 같은 외국에서 오는 인력이 대체하는 것이었다.

“뭐, 일은 힘들겠지만, 젊은 시절의 고생은 다 경험이죠. 어쨌든 호주에서 좋은 경험을 쌓기를 바랍니다.”

***

시드니에 도착해서는 비행기를 갈아 타고 퍼스로, 퍼스에서는 기차를 타고 윗벨트의 내륙, 제이에스 바이오의 올리브 농장 지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하, 오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존 스트라다는 시드니를 경유해서, 온 길을 설명하는 진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군인 출신이라,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강인한 인상의 존 스트라다였다.

“자, 농장으로 가봅시다.”

진석의 존 스트라다의 픽업 트럭을 타고 농장으로 향했다. 진석이 조성한 올리브 나무들은 벌써 빠른 성장을 거쳐 초록색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역시, 올리브의 성장이 빠르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수확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진석은 올리브 나뭇가지 사이로 주렁주렁 열려 있는 올리브 열매를 만져보았다. 단단한 올리브 열매가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빨리 자란 나무들은 올리브 수확기가 다가오고 있죠. 물론, 본격적인 수확 시기는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올리브를 수확하게 되면, 빨리 착유를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올리브는 신선한 열매를 바로 짜서 올리브 기름을 얻는 것이 품질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압의 압착기가 필수다.

“일단은 압착기가 필요하겠군요. 압착기를 운영할 공장도 필요하고요.”

“공장 부지는 기초 공사 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존 스트라다는 농장 옆의 공사 현장으로 진석을 안내했다. 바닥 공사는 마무리되고, 목조 골조가 세워지고 있었다. 목조 건물이라 건축 속도는 빠르게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호주나 미국 쪽은 목조 건물들이 많은 편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목조 전통이 오래되어 기술적으로 안정성을 갖춘 것이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은 원래 한옥의 목조 전통이 있는 나라지만, 최근에는 그 기술의 명맥이 끊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압착기는 아무래도 유럽에서 수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올리브를 압착하는 압착기는 유럽 외에는 없으니까요.”

식물에서 기름을 짜는 기술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식문화지만, 올리브유의 경우에는 유럽 남부에서만 재배되는 특성이 있는데다가, 오래전부터 고품질의 고급 기름을 개발하기 위해 저온 압착 기술이 발달했다.

보통 한국의 기름집에서는 참깨나 들깨를 볶은 후에 기름을 짜내는 열처리 방식인데, 그와 달리 올리브는 저온 압착식이 일반적이다.

저온이라고 해도 무슨 냉동 수준이 아니라, 최저 49도, 국제 기준으로는 50도 정도의 온도다, 기름은 고온에서는 활성화가 되지만 저온에서는 굳어버리는 특징이 있다. 당연히 저온보다는 고온에서 압착하는 것이 더 쉽고, 채유량도 더 많아지게 된다. 한마디로 저온 압착은 더 어렵고 비싼 방식,

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지는 저온 압착식이 주류가 된 것은 품질 때문이다. 올리브도 식물이기 때문에 고온에서 가공하면, 영양소가 파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영양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일반적인 표준으로 정착된 것이라 고온 압착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결국 유럽에서 저온 압축 장비를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압착기는 제가 알아보니까, 독일의 장비 회사가 거의 독점을 하고 있더군요. 유럽에서도 독일의 기술력은 알아주니까요.”

“공장 공사는 한 달 내로 마무리될 겁니다. 장비가 도착하면, 일단 시험용 오일을 생산할 거고요.”

“압착기가 문제군요. 일단 독일로 가보겠습니다. 구하는대로 보내드리죠.”

***

독일 뒤셀도르프 , 뒤셀도르프 기계 제작소

독일인들은 뭔가 멋대가리가 없는 민족 같다. BMW만 해도, 독일어는 좀 다르지만 영어로는 바바리안, 모터, 웍스, 바바리안 모터 제작소라는 의미다.

“BMW는 바바리안 자동차 제작소라는 의미인가요?”

“하하, 정확히는 모터, 엔진을 만드는 엔진 제작소라는 의미죠. 원래는 오토바이를 만들던 회사입니다.”

“아, 오토바이 회사였군요?”

뒤셀도르프의 뒤셀도르프 기계 제작소라는 곳이었다. DMW가 약자인데, 지역명에, 업종, 그리고 회사라는 의미의 독일어, Werke를 붙이는 전형적인 독일식 작명이었다.

한스 발터는 이 회사의 부사장이었다. 하지만, 창업주의 손자로 사실상의 오너 가문을 대표하는 실력자였다.

“이진석 사장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농업기업인 제이에스 바이오의 창업자라면서요?”

“하하, 한국에서는 저 같은 사람을 흙수저라고 하죠.”

“흙수저요?”

“가진 것 없이 태어난 계급이라는 뜻이죠.”

“하하, 재밌는 표현이군요. 유럽에도 부자집에서 태어나는 걸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표현이 있기는 하죠. 아무튼, 저는 이진석 사장님이 부럽네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자수성가형 사업가니까요. 저는 선대의 사업을 물려받아서 경영하고 있죠. 그래서 알게 모르게 직원이나 파트너들에게서 냉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요, 상상하기 힘드네요. 아시아의 기업에서는 그런 식으로 가족이 후계를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어서 말이죠.”

“독일도 비슷하기는 합니다. 오래된 공방이나 빵집, 상점 같은 걸 물려받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큰 기업들은 좀 인식이 다릅니다. 독일도 마이스터라는 장인들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서 작은 공방을 대를 이어 하는 건 긍정적으로 보지만, 큰 기업을 경영하는 건 다르게 보는 거죠.”

진석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흙수저는 흙수저대로 금수저는 금수저대로 삶의 무게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사업 이야기를 해보죠. 저희 회사의 저온 압착기를 구매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호주에 올리브 농장을 대규모로 조성해서 이제 곧 수확기에 접어들 겁니다.”

“올리브 농장이라? 스페인이나 그리스 정도 외에는 재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로 규모가 큰 올리브 재배지를 조성하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하하, 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더군요. 아무튼, 올리브 재배는 대성공입니다. 호주의 서부 내륙의 윗벨트 라는 곳이죠. 전통적으로는 밀 재배지지만, 이제는 다양한 작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올리브도 그 중 하나고요.”

한스 발터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상은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변하는군요. 특히 아시아 지역의 발전 속도는 엄청난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같은 독일 사업가들은 아시아를 아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죠. 경제적으로 저개발 국가고 정치적으로도 부패가 심한 한심한 지역이라고 말입니다.”

한스 발터의 인식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수십 년, 아니 지금도 그런 식으로 아시아를 낙후된 지역으로 생각하는 유럽인들은 많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우월주의까지 더해 유럽인의 아시아의 대한 인식은 상당한 저평가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건가요?”

“뭐, 중국의 경제 급성장에 유럽인들은 다들 놀라고 있죠. 그리고 이진석 사장님의 제이에스도 저희 같은 농업용 장비 업체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하, 그 정도인가요?”

이제 한스 발터와 본격적으로 비즈니스에 대해 말할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