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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털한 자두(3) (90/183)

107화. 털털한 자두(3)

익선동 한옥 거리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진석이 여기에 올 때면 비가 자주 내리는 것 같았다.

“어머, 사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윤희원은 여전히 익선동 골목의 카페 점주를 하고 있었다. 북카페 오아시스 출신으로 모델로 발탁된 사람은 두 명, 윤희원과 한지수였다. 한지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화장품 모델로 얼굴을 알리더니 어느새 드라마와 cf를 종횡무진 누비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서 윤희원은 제이에스 스토어 모델로 활약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인지도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카페 점주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희원 씨는 카페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한지수처럼, 연예인 타입은 아니라는 건가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

윤희원도 말은 안 해도 내심 한지수와 비교해서 연예인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희원 씨도 연예계에 미련이 남아 있나 보군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제이에스 스토어 모델로 발탁되었을 때만 해도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희원 씨는 기상캐스터 출신이니까요. 카메라에도 익숙하고 나도 희원 씨가 연예계에서 잘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진석의 말에 윤희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연예인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봐요. 한동안은 뭐라도 될 것 같았는데.”

“혹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연락이 온 적은 없었어요?”

“한 두 군데, 오기는 했는데. 약간 의심스러운 회사여서 그만두었어요. 저도 그쪽 세계를 좀 아는데 이상한 회사도 많거든요.”

“하긴, 어설프게 연예인 지망생을 하는 것보다는 카페를 운영하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죠.”

“지금 생활에는 만족해요. 사실, 카페가 저하고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진석은 익선동 카페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익선동의 한옥 스타일의 카페는 약간은 빛바랜 듯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다른 곳에는 크게 만들어진 캣타워도 구석에 작게 하나 있을 뿐이어서, 고양이 세 마리가 사이좋게 캣타워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서 좋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구식이라는 건가요?”

“구식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는 거죠. 참, 이거 우리 회사에서 새로 출시한 자두인데 한 번 먹어 볼래요?”

진석은 가져온 상자에서 커다란 왕자두를 꺼내 희원에게 보여주었다.

“어머, 세상에. 이게 정말 자두예요?”

윤희원은 엄청난 크기의 자두에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하하, 좀 크죠.”

“큰 정도가 아니라, 사과만한데요. 이런 자두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새로 개발한 품종이라는 거죠?”

“예, 그런 셈이죠. 어떤 사람을 위해서 만든 건데, 맛도 좋고 괜찮은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윤희원은 커다란 자두를 이러저리 둘러보았다.

“이걸로 뭘 하시게요?”

“북카페 오아시스는 여러 가지 과일이나 채소로 특별 메뉴를 만드는 전통이 있잖아요.”

진석의 말에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기는 하죠. 이 자두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보라는 건가요?”

“맞아요. 자두로 만들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음, 글쎄요. 일단 한 번 먹어봐도 되죠?”

“물론이죠. 한 번 먹어봐요. 굉장히 놀라운 맛이에요.”

진석이 적극적으로 왕자두를 권하자 윤희원은 자두 하나를 집어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즙이 풍부한 왕자두를 씹자 희원의 입안으로 상큼한 자두 향이 확 퍼지기 시작했다.

“우..음..맛이 좋은데요. 정말 맛있어요. 상큼하고, 달콤하고, 새콤하기도 하고요.”

윤희원도 자두 맛에 반했는지 진석을 향해 엄지척을 해보였다.

“굉장히 좋은 자두죠? 그걸로 메뉴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윤희원은 자두를 마저 먹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건 과즙이 풍부한 것 같아요. 달기도 하지만 새콤한 맛과 향이 있기도 하고요. 이걸 갈아서 얼려서 샤베트를 만들면 어때요?”

“샤베트라?”

하긴 날씨가 더운 여름철이고 비까지 내리는 장마가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눅눅하고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하고 상큼한 향이 입안에서 퍼지는 샤베트라면 인기가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희원 씨가 샤베트를 만들 수 있겠어요?”

진석의 말에 윤희원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이곳 익선동 카페 점주만 몇 년째인데. 아, 말이 나온 김에 당장 만들어 볼게요.”

“지금요?”

“예,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윤희원은 왕자두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진석은 캣타워로 가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석의 손길에 관심을 보이던 고양이들은 귀찮은지 잠시 후에 캣타워 위로 올라가 버렸다.

“뭐야? 귀찮다는 건가?”

진석도 고양이를 쫗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비가 내리는 창가에서 자리를 잡고, 책장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맞은편 테이블을 보니,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초초한 지 손을 자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고등학생인가요?”

“아, 저요?”

소녀는 진석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하, 저는 이 카페 사장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진석이었지만, 그 소녀는 진석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면 몇 학년이에요?”

“음, 고 3요.”

“고 3이면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닌가요?”

진석의 물음에 여학생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은 대학생이에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재수생이죠. 작년에 입시에서 떨어졌으니까요.”

“하하, 제가 괜한 걸 물어봤군요.”

“아뇨, 뭐, 다들 물어보는걸요. 고등학생이냐? 대학생이냐? 재수는 왜 하냐?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냐? 올해는 어느 대학에 갈 거냐?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재수를 하고 있다는 여학생은 안경을 끼고 이마에는 여드름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자주 깜빡이는 모습이 어딘지 불안정해 보였다.

“그런 질문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가봐요?”

“예, 다들 나에 대해서 물어보고 관심을 갖는 게 부담스러워요.”

“왜요?”

“나라는 인간은 별로 내세울 게 없거든요. 대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없고, 얼굴은 여드름투성이고. 성격도 어둡고 아무튼 좋은 여자는 못 되는 것 같아요.”

“하하, 좀 예민하신 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는 나이도 어리고 전도가 유망해 보이는데요.”

“절대 아니거든요. 대학도 떨어지고, 하루하루 뭐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 친구들은 대학에 잘 들어가서 미팅도 하고, 강의도 듣고, 어학연수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벌써 고등학생들 과외를 하는 친구도 있어요.”

“음, 그래요?”

“웃기죠. 저는 과외를 받아야 할 입장인데, 제 또래 애들은 벌써 선생님이 되어서 입시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니,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화장도 하고, 원피스도 예쁘고 화사한 걸 입고 있더라고요. 저는 학원에 오는 길이었는데 머리도 대충 묶고 츄리닝 같은 걸 걸치고요. 정말 챙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고요.”

여학생은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하며 다른 동기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재수를 하는 사람이 하나 둘도 아니고, 그래봐야 1년 정도 늦은 정도라 인생이라는 큰 그림에서 보면, 티도 나지 않을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예민한 사춘기를 갓 지나간 시기라 그런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건지, 그런 상황을 잘 이겨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큰일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죠.”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전 지금 심각하다고요. 그런 자잘한 스트레스들이 쌓여서 폭발할 지경이에요.”

“저런 큰일이군요.”

그때였다. 주방이 열리며 윤희원이 유리그릇에 뭔가를 담아 내왔다.

“사장님 어디 계세요?”

“아, 희원 씨, 여기에요.”

“구석에서 뭐 하세요?”

“하하, 창가에서 빗소리도 듣고 이 학생하고 이야기도 좀 하고요.”

“말씀하신대로 신메뉴를 만들어봤어요. 왕자두로 만든 샤배트예요.”

겉이 빨갛게 익은 자두를 갈아 넣어서인지, 노란 자두 과육에 붉은 빛깔이 섞인 연한 핑크색의 샤베트는 보기 좋게 그릇에 담겨 있었다.

“자두 과즙이 워낙 달콤해서 다른 재료는 조금만 넣었어요, 하지만 맛이 굉장해요.”

“음, 그래요, 희원 씨가 정성을 다해 만든 샤베트니까 맛을 안 볼 수 없죠.”

진석은 스푼으로 샤베트를 한 숟가락 떠먹어보았다. 샤베트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동시에 왕자두 특유의 상큼한 향과, 새콤한 뒷맛도 느껴져서 전체적으로 달콤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와, 맛있는데요. 저기 학생? 이름이 뭐라고 했죠?”

“이름은 안 말했는데, 최영미요.”

“그래요? 하하, 아무튼 영미 학생도 먹어봐요. 새로 만든 신메뉴인데 고객의 의견도 좀 듣고 싶네요.”

최영미는 진석의 권유에도 사양하기는 했지만 재차 권유하자 마지못한다는 듯이 스푼으로 샤베트를 떠서 맛을 보기 시작했다.

한 숟가락 자두 샤베트가 입안으로 들어가자, 굳어 있던 최영미의 얼굴도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때요? 괜찮은 맛이죠?”

진석의 질문에 최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굉장히 맛있는데요. 이런 샤베트는 처음 먹어봐요, 달기도 하고 새콤하기도 하고, 맛이 특이하면서도 맛있어요.”

어느새 활달한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최영미는 활짝 웃으며 맛있게 샤베트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진석도 시원한 샤베트의 향에 눅눅한 장마의 습기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최영미가 기분이 한결 좋아진 느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샤베트를 먹고 나니까, 걱정도 샤베트처럼 다 녹아버린 모양이네요?”

진석의 말에 최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두향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분이 가벼워졌어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달라진 건 없잖아요. 1년 전에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고, 친구들이 먼저 대학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언니들 말 들어보면 취업이 어려워서 졸업을 미루는 일도 많고요.”

“하긴 그렇죠.”

“어학연수에 졸업하기 싫어서 1년 2년 쉬는 사람도 많다는데, 재수 1년 하는 게 대수겠어요?”

“하하, 아까랑은 말하는게 달라졌네요. 많이 긍정적으로 바뀐 느낌이네요.”

확실히 잠깐 사이에 최영미는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뭐, 제가 요즘 스트레스 때문에 좀 예민해져서 그렇지 원래는 털털한 성격이에요. 작은 일에는 신경도 안 쓰고..”

최영미는 샤베트를 깔끔하게 먹어치우고는 책가방을 들고는 카페를 나섰다.

“오늘도 학원에 가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샤베트는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최영미가 카페 문을 나서자, 윤희원이 진석에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아, 뭐, 별로. 그냥 재수생이라고 해서 기죽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고 말해준 거지.”

“저 학생은 어디가서 기죽을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하하,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죠.”

확실히 공간의 산에서 수확한 왕자두에는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펜션의 그 남자도 그렇고, 저 최영미라는 재수생도 그렇고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뭔가 여유를 주는 그런 효능이 말이다.

“희원 씨는 이 자두 샤베트를 먹어 보니 어때요?”

“뭐, 일단 맛있고요. 스트레스랄까?”

“스트레스요?”

“사실, 아까 사장님이 한지수 이야기를 꺼내서 조금 기분이 그랬거든요. 비교되는 것 같아서요.”

“하하, 정말요?”

“예, 사람은 비교당할 때, 가장 예민해지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별 의미 없이 하는 말이지만, 또래나 비슷한 조건에 있는 사람이 더 잘나갈 때, 비교당하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요. 내가 뭔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고요.”

“하지만, 사람은 다 각자의 개성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는 거니까요. 비교할 것 없지 않아요?”

“맞아요. 아까는 그걸 몰랐는데, 이 샤베트를 먹고 나니까, 뭔가 머리가 맑아지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거 있죠.”

“정리요?”

“남은 남이고, 나는 나라는 거죠. 그냥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잖아요.”

진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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