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털털한 자두(1)
제이에스 본사
“중국에 갔던 일은 잘 되신 거예요?”
“뭐, 그럭저럭.”
진석은 중국에서 받아온 훈장을 꺼내 보였다.
“어머, 그거 뭐예요? 훈장?”
사막 옥수수와 사막 콩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는지 중국 정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외국인이 진석에게 인민 농업 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원래는 농업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한 농부나, 농촌 지도자, 농업 기술 연구가들이 받는 상이라고 했다.
“인민 농업 영웅요?”
“하하, 뭐, 좀 이상하지? 중국 정부에서 주겠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야.”
뭐, 사실 진석에게는 큰 의미없는 훈장이지만,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데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귀뜸이었다.
우루무치에서의 일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리진 회장이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거기서 상하이 당서기장을 비롯해서 상하이방의 거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상하이방은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거대 정치 그룹이었다. 중국은 한국과는 달리 지역 별로 군대나 정부가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성격이 강한 나라다. 지방자치의 개념과는 다른데, 미국의 연방 정부와도 다르고,
각 지역별로 하나의 국가와도 같은 독립적 파벌이 존재하고, 특히 군대는 그런 특성이 더 강하다. 언뜻 인구가 많은 하나의 단일 국가라는 외부의 시각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역별로 독립성이 상상 이상으로 강한 나라가 중국이다.
아무튼, 상하이 정계의 거물들도 서부 대개발 지역의 농업 발전을 위해 노력한 진석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리진의 파티까지 참석한 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에서 바쁘셨던 것 같으니까, 일단은 좀 쉬셔야겠네요.”
“그래, 좀 쉬면서 힐링 좀 해야겠어.”
마침, 핑계 김에 시골이나 어디 조용한 곳에 내려갔다 오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침 여름 휴가철도 시작되고,
“사장님도 올해는 휴가 가실 거죠?”
“그래, 해마다 한 번도 휴가는 못 간 것 같아. 뭐 중간중간 며칠씩 쉬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휴가는 아니었다는 거지.”
일이 바쁘기도 하고 딱히 휴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다들 바캉스니 뭐니 놀러가는 여름에도 계속 일만 하고 지냈던 진석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휴가를 좀 가볼 생각이었다.
“휴가를 가신다면 어디로 가시게요?”
“글쎄, 어디가 좋을까?”
외국은 많이 돌아다녀서 더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냥, 조용하고 숲이 있는 곳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공간에 들어가서 쉬는 방법도 있지만, 공간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공간에 가서도 맘 놓고 쉬기도 그렇고 아예 조용한 섬이나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조용하게 쉬고 싶으면, 섬은 어때요?”
“섬? 서해에 있는 무인도 같은 곳 말인가?”
진석의 말에 이수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인도는 아니어도, 사람 별로 없는 그런 섬들 있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런 곳은 너무 불편하지 않겠어?”
아무리 조용하게 살고 싶어도, 식당이나 편의점 정도는 있어야 식사도 하고 커피라도 마실 수 있는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무인도 아니, 무인도 급의 유인도에 가봐야 오히려 더 피곤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시골이더라도 적당한 시골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제주도는 너무 관광객이 많고, 좀 덜 개발된 그런 곳이 없으려나...진석은 인터넷을 검색하며 괜찮은 곳을 물색해 보았다.
“사장님 여기 괜찮지 않아요?”
“어딘데?”
“태안반도 쪽에 작은 펜션이 있는데 마을이랑 그리 멀지도 않고, 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sns에 후기도 좀 나오는 곳이었는데 조용히 쉬기에는 괜찮다는 평이었다. 진짜 사진을 보니까 펜션이 하나 외떨어져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얼핏 봐서는 펜션을 찾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찾는 사람들이 있는지 후기가 제법 있었다.
대충 내용은, 진짜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곳이라는 것과, 차를 타고 나가면 근처에 카페, 식당, 편의점 같은 곳이 있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는 내용이었다.
진석이 원하는 조건에 딱 부합하는 곳이었다.
“그래, 여기가 좋겠는데.”
“그럼, 예약할까요?”
“그래, 수정 씨가 예약 좀 해줘.”
태안의 펜션은 딱 한 팀만 예약을 받을 수 있는 작은 곳이어서 예약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이수정 어렵지 않게 예약에 성공했다.
***
태안반도, 바다가 보이는 펜션..
펜션의 이름은 바다가 보이는 펜션이었다. 말 그대로 바닷가의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지어진 펜션이었는데, 주위에는 해안 외에는 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진짜 조용하게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었다.
물론, 차를 타고 10분 정도 나가며, 해안 뒤쪽으로 마을이 있어서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진석은 올해 여름에는 여기서 책이나 읽으면서 망중한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추리 소설도 잔뜩 가져왔다고.”
평소에 즐겨 읽던 추리소설이었지만, 사업을 시작하고는 별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 회사에도 휴가 기간에는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곳 펜션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펜션은 딱히 시설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닷가 외딴 언덕 위라는 위치가 정말 절묘해서, 펜션 앞마당에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좋은 곳이었다.
진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보거나 낮잠을 보내면서 시간을 보냈다. 펜션에는 간단한 주방이 있어서 요리도 가능했지만, 그것도 귀찮은 일이라 진석은 차를 타고 근처의 시내로 가서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날도 늦게 일어나서 오전을 어영부영 보내다가, 점심때가 되어 시내로 나가서 콩국수 한 그릇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펜션으로 돌아오는데, 언덕 의 펜션 앞마당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 누구지?”
펜션 주인은 중년의 아주머니고, 펜션은 규모가 작아서 한 팀만 예약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도둑이나, 아무튼 외부의 침입자라는 말인데?
경찰을 불러야 하나? 진석은 일단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펜션 앞에 차를 세우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석이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을 테고, 안쪽에 있던..남자..가까이 다가가니 분명히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남자는 펜션 앞마당에 멍하니 서 있다가, 진석이 다가가는 걸 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바닷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젠장, 거긴 낭떠러지인데.
“이봐, 뭐 하는 거야? 거긴 낭떠러지야.”
“상관말아요. 어차피 죽으려고 온 거니까.”
젊은 남자는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진석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냐고? 왜 여기서 죽겠다는 거야? 외딴 바닷가 언덕 위의 펜션은 앞마당 바로 앞쪽은 바다였다. 앞마당에 펜스가 있는데 허리 높이 정도의 그 펜스를 넘어가면 바다가 나오고,
수영을 못한다면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였다.
“이봐 진정해요. 갑자기 왜 죽겠다는 겁니까?”
“이제는 정말 못 견디겠어요.”
“뭐가요? 뭐가 못 견디겠다는 거죠?”
어떻게 해서든 남자를 진정시켜야 했다. 뭔가에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안 좋은 일을 겪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장난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은 진지한 태도에 진석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뭘 견디기 힘들다는 건가요?”
“사실 전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요.”
“공황장애요?”
진석도 어디선가 들어본 병이었다. 공황장애라고 한다면 연예인들도 많이 걸리는 병이어서 일명 연예인 병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불안장애라고 했다. 한마디로 정신질환, 즉 다른 신체 기관에는 문제가 없는 심리적인 질병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환자 본인이 느끼는 불안감은 상당해서 종종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은 심각한 질환이었다.
“예,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져서 이제는 더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어요.”
남자는 모든 걸 포기한듯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뭔가 잔뜩 지쳐있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공황장애라니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거죠?”
남자는 잠시 진석을 노려보았다. 뭔가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구체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불안감과 우울감이 너무 심한 게 문제죠.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장애 환자를 전혀 이해를 못 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구체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요?”
공황장애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그렇다면 저 남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보통 정신질환은 뇌에서 벌어지는 호르몬의 불균형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니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뇌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감정들이 인간을 분노에 빠뜨리고 절망하게 하며, 불안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요.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이제 그만 이 세상을 떠나려는 겁니다.”
이런 큰일이었다. 조용히 휴가를 보내려 온, 이곳 태안의 해안가 펜션,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람의 인적이 드문 이 조용한 펜션 일대는 너무 외진 곳이라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이 오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아무래도 휴가지를 잘못 고른 느낌이었다.
“저기, 생명이란 소중한 겁니다. 그리고 아직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이러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 아닌가요?”
“원래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상관하지 마시죠.”
남자는 다시 앞마당 끝의 절벽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막아야 했다.
“저기, 잠깐, 그런데 왜 하필 여기입니까? 왜 이곳에 와서 그런 행동을 하려는 건가요? 여기가 고향이라든가 무슨 연고라도 있는 겁니까?”
진석의 말에 남자는 잠시 움찔하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여기는 제가 어릴 적에 살던 집입니다.”
“어릴 적에 살던 집이요?”
“예, 정확히는 부모님의 집이었죠.”
남자는 갑자기 지나간 기억이 떠오르는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는 아주 외떨어진 곳이었지만, 제가 여기서 살던 1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죠.”
남자는 이곳이 고향이고, 이 펜션은 남자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어부였던 아버지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던 어머니, 그렇게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가족은 어느 날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이후에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고, 남자는 고아원에 버려지게 되고 그때의 충격으로 성격도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인가 문제가 시작되었어요. 어머니에게 버려진 기억,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억, 그런 것들이 악몽처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정신과 의사 말로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군요.”
“인간이란 단순한 동물이어서 사실은 별 근거도 없는 것들을 많이 믿고 살죠. 행복이니 가족이니 미래니, 삶이니 하는 것들 말입니다.”
“행복이나 인생이 근거가 없다고요?”
“예, 사람들은 인생을 너무 낙관해요. 사실,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사고든 뭐든 어떤 일이 일어나서 인생도 행복도, 가족도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음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네요.”
“극단적이라고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예정된 미래 같은 것 없습니다. 당장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가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소중한 가족이나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그런 것들이 다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글쎄요. 동의하기 어렵군요.”
“이진석 사장님이죠? tv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엄청나게 성공한 사업가 아닌가요?”
남자는 어이없게도 진석을 알아보고 있었다.
“당신만 해도 어떻습니까? 당신 같은 부자가, 이런 시골구석에 펜션에 있을 거라고는 나도 전혀 예측을 못 했죠. tv에서 당신을 봤을 때 실제로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여기에 조용히 쉬러 왔겠지만,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상황이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거죠. 그렇게 앞날은 전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미치겠는 거죠.”
“저..진정하세요. 여기에 어렸을 때 살았다면 뭐 좋은 기억이 있었겠죠. 안 그런가요?”
“좋은 기억요? 뭐, 별로..아, 여기 쯤에 아주 큰 자두나무가 있었죠. 여름이면 아주 맛있는 자두가 열렸었는데, 지금은 베어 버렸군요.”
“자두나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