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젊은 토마토(3)
“토마토 주스는 너무 흔하지 않아? 뭐, 설탕이든 꿀이든 넣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김지영은 진석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왜요? 그냥 토마토만 가지고도 충분히 맛있는데, 쓸데없는 걸 넣는 것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게 좋은 거라고요.”
“그럼 마음대로 해.”
“사장님은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런 건 제 전문이니까요.”
김지영은 토마토 상자를 들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창가의 그 어두운 얼굴의 남자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석은 남의 삶에 간섭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워낙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젊은 남자를 보자,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저기, 학생인가요?”
“아, 예.”
남자 대학생은 진석을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에 열중했다.
“뭐, 고민이라도 있는 표정이군요?”
“아..아닙니다.”
“여기는 단골이라면서요?”
“예?”
남학생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진석이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정이 어둡다고 해서 꼭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하, 저기 김지영 점장도 학생을 알더군요. 자주 오나봐요?”
“예, 공부하다가 머리가 복잡할 때면, 잠깐 쉬러 옵니다. 저, 이진석 사장님 아니신가요? 제이에스 그룹의?”
남자는 진석을 알아보고 있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진석의 지명도는 더 높아진 모양이었다. 해외를 돌아다닐 때마다, 따라 오는 한국 기자들이 있었는데 진석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한국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기사를 작성해서 뉴스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런 뉴스들이 한국에서는 꽤 화제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류붐 이후에 한국인들이 문화적인 자신감이 생기고, 외국에 나가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이유인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수나 배우들이 주도하는 문화의 한류와는 또 다른 농업 기술을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기도 하고, 또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이 세계를 선도한다는 자부심 등이 뒤섞여, 소위 말하는 k농업의 전도사격인 진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것이었다.
“요새 절 알아보는 사람이 참 많네요. 맞습니다. 제이에스 그룹의 이진석입니다. 학생은요?”
“예, 저는 건국대 행정학과 4학년 손호준이라 합니다.”
“아, 호준 씨? 그렇게 불러도 되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행정학과면 고시나 그런 쪽 공부를 하는 중인가요?”
“예, 사실은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공무원도 좋죠. 안정적이고, 선호도가 높은 직업 아닌가요?”
“예, 그렇기는 하죠. 원래는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었지만, 계속 낙방하는 바람에 조금 수준을 낮춰서 7급 공무원을 준비 중입니다.”
“하하,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죠. 나는 호준 씨,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뭐 하는 친구인가 궁금했는데, 역시나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이었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예?”
“사실은 사장님이 잘 보신 겁니다. 저는 고민이 많은 사람입니다.”
손호준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할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더니, 진석과 대화를 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풀어진 건지, 묻지도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손호준은 시골 출신으로 원래는 화가가 꿈이었다고 했다. 순수 예술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림에 관련된 디자인도 좋고, 아니면 에니메이션도 좋고, 그림을 그리고 창작을 하는 일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정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뭡니까?”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처음에는 저보고 육사에 가라고 하셨죠. 저도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으니까요. 아니면, 경찰대학도 좋고요. 경찰이나 군인, 그런 걸 바라셨죠. 물론, 저는 별로 그런 쪽으로는 생각이 없었고요.”
“그래서 중간에 타협한 것이 공무원인가요?”
손호준은 엄한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다고 했다. 군인 장교 출신인 아버지는 퇴역 후에는 중견 기업의 이사로 근무하셨는데 나름 사회 생활은 잘 하시고,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분이셨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권위적인 성격이 있어서, 회사의 직원들도 그렇고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강요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권위적인 성격은 자유분방한 예술가를 꿈꾸던 손호준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둘 다 성격이 다른 듯 비슷했어요. 아버지랑 저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다른 듯 비슷하다니?”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단체 생활을 잘하는 분이었고, 저는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적인 편이었거든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달라보이죠?”
“완전히 다른 성격 아닌가요?”
“하지만, 둘 다 외모도 비슷하고, 사실,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요. 목소리도 똑같아서, 가끔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저를 아버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변성기 이후에요.”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외모나 목소리가 닮았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고집이 세다는 것도요.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죠. 그래서 사춘기 이후에는 아버지와 싸우는 일이 많았어요. 사실 거의 매일 서로에게 으르렁댔었던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가 더 주장이 강하셨죠. 저는 어렸으니까요.”
손호준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을 끝내 거역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원래 꿈이었던 미술 계통의 대학으로 진학은 아버지의 반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군대나 경찰은 못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둘의 타협으로 공무원이 되기 쉬운 행정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고위 공무원이 되자고도 생각했었죠. 고등학교 때는 내가 미술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서 꼭 그걸 해야 하나보다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막상 대학에 와서, 미술이나 춤에 관련된 동아리 활동도 해보니까, 제가 가진 재능이라는 것도 평범하더라고요.”
“더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죠.”
“예, 맞아요. 좁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십 명 중에서 내가 미술을 좀 하는 편이니까, 그림을 그리는 편이니까 재능이 있나보다 그렇게 쉽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보니까. 미술이든 음악이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많더라고요.”
“하긴 그렇죠. 세상은 정말 넓고 사람도 진짜 많으니까.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할수록 점점 더 세상이 커지는 느낌을 받죠. 인간이란 자신의 경험만큼의 공간을 갖는 것 같아요. 경험이 커질수록 그가 가진 세계도 커지는 거죠.”
진석의 말에 손호준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는 것 같아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제가 가졌던 재능이 정말 존재했던 것인지도 희미해지더군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차피 행정학과에 들어와서 고시준비를 해야 하니까. 미술이니 뭐니, 그런 미련은 포기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죠.”
“그럼 잘 된 거 아닌가요? 공부에 더 집중할 수도 있고.”
진석의 말에, 손호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공무원 공부도 저한테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주위에 공무원이 진짜 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는데, 뭐랄까 타고난 공무원이랄까? 학과 공부에도 잘 적응하고, 고위 공무원이든 하위 공무원이든 잘할 것 같은 친구들이 있어요.”
“호준 씨는 공무원 공부도 잘 맞지 않은 모양이군요?”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행정고시도 여러 번 봤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시험이야 떨어질 때도 있죠.”
“하지만, 터무니없는 성적으로...별로 미래가 안 보일 정도로 시험을 엉망으로 봤어요. 아쉽다거나, 실수였다고 할 수도 없죠. 그렇다고 공부를 아주 안 한 것도 아니었는데.”
“공부 때문에, 그러니까, 미래가 불안하다 그거군요?”
손호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까지 흔들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이제 대학 4학년이고 곧 졸업인데, 꿈을 찾아서 청춘을 방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하나 이뤄 놓은 것도 없고, 제 자신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도 아니고, 제 인생은 왜 이 모양인 거죠?”
듣고 보니, 진석도 답답해지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평범한 청춘들의 평범한 고민 같기도 하고 말이다. 자기 꿈을 찾아서 좌충우돌하는 청춘도 있는 것이고, 혹은 안정을 위해서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꿈을 포기한 청춘도 있다.
그게 뭐든 잘 풀리기만 한다면, 그간의 고생 같은 건 아름다운 추억이 될 뿐이다. 성공 후에는 전에 한 고생이든 고민이든, 지나간 기억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원하는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게는 지나간 과거는 되돌리고 싶은 후회의 연속인 것이다.
현재의 실패와, 고통이 그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자책감에 현실의 모든 것들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보는 관점에 따라 좋게도 보이고 나쁘게도 보이는 것이 인생이다. 더 좋은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일체가 유심조라는 말이 있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쩌면 세상이란, 디지털 부호처럼, 그저 숫자들의 나열에 불과한지도 모르죠. 모든 것은 인간들의 착각과 환상이고요.”
“하하, 별로 위로가 안 되네요. 이진석 사장님처럼 성공한 분들은 저 같은 실패한 인생을 보고 위로하려고 하고 싶겠죠. 하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제 기분은 나아지지 않네요.”
그때였다. 주방이 열리고 김지영이 주스들 들고 나오고 있었다.
“지영 씨, 여기야..”
“어머,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여기, 손호준 씨와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
“무슨 이야기요?”
“뭐, 사는 이야기, 인생 이야기지 뭐. 그나저나 그게 그 녹색 토마토 주스인가요?”
“예, 그냥 갈아봤어요. 워낙 맛이 있어서 갈기만 해도 맛있어요. 한 잔 드셔보세요. 사장님도 그리고 호준 씨라고 했죠?”
“아, 예.”
손호준은 김지영을 보며 조금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지영이 내미는 주슨 잔을 받아 들었다.
“한 번 마셔봐요. 지영 씨가 새로 개발한 신메뉴, 녹색 토마토 주스예요.”
“녹색 토마토요?”
“예, 다 익어도 빨갛게 변하지 않고, 녹색으로 더 진한 녹색이 되는 새로운 품종의 토마토죠. 맛도 아주 훌륭해요.”
“아, 예. 한 번 마셔보죠.”
손호준은 별생각 없이 주스 잔을 잡고 한 잔 마셔보기 시작했다.
“음 맛이 굉장히 좋은데요.”
영 기운이 없어 보이던 호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호준 씨는 어쩔 생각이에요?”
“아, 제가 하는 일 말입니까? 뭐,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진석의 질문에 손호준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게..그러니까..다시 시작해야죠.”
“공무원 시험공부 말인가요?”
“예. 대학 4년 내내 하던 거니까요?”
“시험을 망쳤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하, 뭐 다들 그렇죠. 낙방한 수험생들을 다 시험을 망친 거니까요. 하지만, 그 다음 해에는 또 합격하고는 합니다. 실패를 해야 성공도 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새, 손호준은 기분이 풀렸는지, 한결 경쾌해진 목소리였다.
진석은 지영이 가져온 주스를 마셔보았다. 달콤한 듯, 새콤한 맛이 뭔가 지쳐 있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주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도 맑아지고, 뭔가...의욕이 막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뭐지? 갑자기 텐션이 올라가는데...
설마, 이번 녹색 토마토의 효능은 의욕을 강화시켜 주는 것인가?
“아무튼 저도 이럴 때가 아니네요. 일단 한 번만 더 시험을 치고, 안 되면, 제가 할 다른 일을 찾아볼 겁니다. 디자인도 좋고, 순수 미술도 좋고, 기회가 되면 유학을 가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손호준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의 미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이 많아져서, 진석과 지영 앞에서 10 여분 동안 떠들어대던, 호준이 카페를 나가자. 지영이 진석에게 물었다.
“저 학생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아주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뭐, 별 이야기 안 했는데. 참, 이 토마토 주스 말이야, 아주 훌륭해.”
“정말요?”
“그래, 좀 우울한 친구들에게 추천해 주면 좋을 것 같아, 토마토는 우울증에도 좋다니까, 이걸 마시면 의욕이 좀 생기는 기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