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젊은 토마토(1)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집.
“집을 또 짓겠다고?”
시골에 계시는 부보님 과수원에 내려가보니, 다시 집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은 멀쩡한데 또 왜?”
아버지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하셨다.
“지은 지 좀 되기도 했고, 사업으로 처음 돈 벌면서 지어드린 집이라, 조금 아쉬웠거든요.”
“아쉽게는 뭐가 아쉬워, 이만한 집도 없다.”
“그러지 말고, 다시 하나 새로 지어요. 저 이제 돈도 더 많이 벌어서, 더 좋은 집 지어 드리고 싶다고요.”
진석의 말에도 아버지는 영 반응이 없으셨다.
“땅을 더 사서, 이거보다 더 큰 집을 지으면 여러 가지로 편하잖아요. 저도 가끔 내려와서 쉬고요.”
아버지는 진석의 말을 듣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진석아, 이 동네를 한 번 봐라, 이 주위에서 우리집이 제일 좋은 집이야. 뭐, 더 큰 집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집이 작다고 얼마나 더 큰 집을 짓겠다는 거니? 네 말대로 진석이 네가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서, 아주 큰 집을 지어준다고 해도, 이 시골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아.”
“아버지..”
“물건이든 집이든, 주변과 어울려야 가치가 있는 거란다. 이 동네에는 이 집도 충분해. 나랑 엄마는 이 동네가 좋아서 여기 사는 거야. 그러니까, 집도 이 동네에 어울리는 집이 좋다.”
아버지의 생각은 확고하셨다, 엄마에게도 물어봤지만 역시 비슷한 반응, 하긴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시골 동네를 돌아보며 부모님의 집을 다시 보자,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부분과 전체..
각각의 집이나 창고 같은 시골 마을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하지만, 부분이 전체의 이미지를 넘어서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떤 부분이 너무 크거나 튀면, 그것이 전체를 변화시킨다기보다는 전체에서 이탈해서 동떨어진 모습이 될 것이다.
어떤 부분도 전체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보다 월등히 특이한 부분들 예를 들어서 에펠탑 같은 것들은, 아주 기묘한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 아버지 말이 맞아, 여기에 내가 생각했던 대저택을 짓는다면, 멋진 집이 되는 게 아니라, 에펠탑처럼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는 무엇이 될 것이다.
집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시골에 내려와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나니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심으시고 계셨다. 이번에도 진석이 내려와 보니, 집 주위에는 토마토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음 향기가 좋은데요.”
토마토는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 아니 채소다. 과일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달콤한 과일이라는 느낌이 없지만, 채소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당도가 높은 채소다. 그러면서 채소 특유의 저칼로리에 여러 영양소가 듬뿍 들어 있어서.
채소류 중에서는 맛과 영양 모두 뛰어난 채소, 맛이 좋은 편이라 종종 과일로 분류될 정도로 말이다.
특히 진석이 좋아하는 건, 토마토 열매보다도, 토마토의 잎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이었다.
사실, 토마토가 상대적으로 맛있는 채소지만 과일 이상은 아니다, 달콤한 과일들이 많은 요즘 세상에 토마토는 건강을 생각해서 먹는 성격이 강하다.
채소 중에서 당도가 높은 것이지, 여름철 수박이나 참외 같은 과일들과 비교해 봐도 달다고 할 수 없는 맛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맛과 달리, 토마토의 잎과 줄기에서 나오는 향은 정말 독특한데,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치유가 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 전, 이 토마토 잎에서 나는 향이 좋아요.”
“그거 조심해라, 옷에 닿으면, 얼룩이 져, 특히 너처럼, 흰옷을 입고 있으면, 100퍼센트다.”
토마토 밭에 들어갈 때는 한 가지 조심해야 한다, 토마토 잎이나 줄기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녹색의 얼룩이 지게 되는데, 색이 연한 옷을 입고 가면, 옷 하나는 그냥 버리게 된다.
진석은 별생각 없이 시원한 흰색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하지만, 옷을 버리든 말든, 토마토 잎에서 나오는 향이 너무 좋아서, 토마토를 딴다는 핑계로 토마토밭에서 토마토 잎과 줄기를 일부러 툭툭 건드리며 특유의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토마토가 잘 익었네요.”
아버지가 농약도 치지 않은 거라는 말에, 진석은 잘 익은 토마토 하나를 베어 물었다. 햇빛을 받아 약간 따뜻해진 토마토는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이었다.
저녁에는 진석이 직접 딴, 토마토와 집에서 키운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가 나왔다, 물론 주 메뉴는 어머니가 끓인 된장찌개였다.
외국을 돌아다니느라, 한식 그것도 시골에서 먹는 된장찌개는 정말 오랜만에 먹는 느낌이었다.
“와, 엄마, 된장찌개 정말 맛있다.”
“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아, 물론이죠. 그 나라,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것만 먹고 다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진석이 너 결혼은 안 하냐?”
“결혼요?”
“그래, 뭐, 너 사업한다고 열심히 일하는 건 아는데, 이제 장가도 좀 가야지.”
“하하, 아직, 30대인데요. 뭐.”
진석의 말에 아버지가 혀를 차셨다.
“서른이면, 전 같으면, 장가를 가도 진즉에 갈 나이야.”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를 말리셨다.
“여보, 세상이 변했잖아요, 요즘 서른이면, 예전 스무살이에요.”
“서른이면 서른이지, 예전 스무살은 또 뭐야?”
“한참 젊은 나이라는 거죠. 그 뭐야, 평균 수명도 늘어서, 옛날하고는 달라요.”
다행히 어머니는 진석의 편을 들어주셨다.
“맞아요. 엄마는 그래도 세상 변한 걸 아시네.”
엄마와 진석의 협공에 아버지도 결국 뒤로 물러서시고 말았다.
“뭐, 당장 결혼하라는 건 아니고, 나이도 있으니 선이라도 보려면 보라는 거지.”
“뭐, 아직 할 일도 많고요. 하하, 결혼은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이거 맛있네요. 엄마 된장찌개가 최고예요.”
다행히 아버지도 더이상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그렇게 대충 넘어갈 수가 있었다. 대신 아버지 집에서 토마토 모종 몇 개를 얻어갈 수 있었다.
토마토야 흔한 과일 아니 채소지만, 토마토밭을 지날 때, 잎의 향이 너무 좋아서, 일종의 힐링용으로 키워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진석은 시골집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
42층 로비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석 사장님, 얼굴 보기 힘드네요.”
서태준이었다.
“야, 이게 누구십니까, 한류 스타 서태준 씨 아니십니까?”
서태준도 진석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류 스타는 제가 아니라 이진석 사장님 아닌가요?”
“제가요? 제가 뭐라고 한류 스타라는 건가요?”
“듣기로는 우크라이나에서 국빈으로 방문도 하셨고, 베트남에서도 크게 사업을 하신다면서요? 뉴스에 많이 나오더군요. 한류의 뒤를 잇는 k농업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진석도 뉴스에 자신이 언급되는 기사를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제이에스 그룹의 농업 기술, 특히 새로운 종자들이 유럽과 미국, 동유럽, 남미, 동남아로 퍼져 가는 걸 보면서 기자들은 k 팝에 비교하며, k농업의 전성기가 오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깊이 있는 기사라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소위 말하는 국뽕 기사들이었지만, 덕분에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진석은 한국에서 더 유명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기자들이 만들어낸 판타지죠. 과장된 기사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아, 저, 이진석 사장님, 사실은 할 말이 있는데 말입니다.”
“할 말요?”
그냥 인사치레나 하는 줄 알았더니, 서태준은 진석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지난번에 저랑 중국에 갔던 일 기억하십니까?”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화장품 브랜드인 이비자의 중국 진출 문제로 중국의 백화점 재벌인 바이반 그룹의 리진 회장을 상하이에서 만났던 일이 있었다.
“아, 리진 회장을 만나러 상하이에 갔었던 것 말이군요. 물론 기억하고 있죠.”
“사실은 리진 회장이 이진석 사장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합니다.”
리진 회장이라면, 상하이 일대에 백화점을 경영하는 중국 재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제이에스 그룹에는 화장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농업 분야가 성장하면서 화장품 사업은 비중이 줄어들고 있었다.
“저를 말입니까? 화장품 사업이라면, 더 확장할 계획은 아직 없어서 말이죠. 리진 회장을 만나도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화장품이 아니라, 콩에 관한 문제라고 하던데요.”
“콩요?”
콩이라면, 진석도 최근에 중국에서 콩에 대한 공급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콩, 대두는 원래 미국 중부의 프레리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해서 중국에 수출을 하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진석의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개발한 슈퍼 테오신테가 나오면서 대두 대신, 슈퍼 테오신테 같은 옥수수를 재배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콩의 가격이 급등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콩이라?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콩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사업은 하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건 리진 회장도 알고 있을 겁니다. 사실, 리진 회장은 콩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긴 그렇죠. 백화점 경영을 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리진 회장이 이진석 사장님에게 콩 문제로 만나고 싶다는 건, 중국의 관시 때문이죠.”
“꽌시 말인가요?”
중국의 관시라는 건 쉽게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이다. 인맥이나 관계라고 하기도 어렵고, 아무튼 이전에 맺어둔 인간적 관계를 바탕으로 공동 운명체를 지향한다는 그런 의미라고는 하는데, 리진 회장이라면 지난번에 서태준의 소개로 만나서
중국에 화장품 사업을 하는 것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꽌시가 맺어진 것이다. 물론 진석이 일종의 수혜를 입은 것으로 그런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는 진석이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콩과 관련된 문제라면, 단순히 농업, 작물의 수출입에 관한 일이라기보다는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대결이라는 국제정치적인 문제도 포함되어 있어서 진석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예,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 중국에 가서, 리진 회장과 면담을 좀 했으면 합니다. 지난번에는 제가 리진 회장을 소개시켜 드리지 않았습니까?”
진석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서태준의 말대로 지난번에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리진 회장도 회장이지만, 중간에 끼인 서태준의 입장도 있기 때문에 진석은 거절하기가 어려운 상황.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 보죠.”
“정말입니까? 역시 이진석 사장님은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제가 날짜를 조정해 보겠습니다.”
서태준과 42층 로비에서 헤어진 후, 진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진 건가?”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진석의 아파트와 달리, 공간의 오아시스는 여전히 환한 낮의 세계였다.
“공간주님, 오늘은 어떤 걸 가지고 오신 겁니까?”
“이건 토마토야.”
“음, 새로운 종류의 토마토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아버지 집에서 몇 개 가지고 왔어, 아버지 토마토밭에 가보니까, 잎에서 향이 아주 좋더라고.”
“토마토는 원래 잎과 줄기에서 향이 나고는 하죠.”
“음, 원래 그런 거였나? 뭐, 아무튼, 오랜만에 산에 이 토마토를 좀 심어 보려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공간주님과 같이 산에 가본 지도 꽤 오래되었네요.”
해외에서 사업을 하느라, 산에 작물을 심거나 하는 일을 한 지도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산에 가서 이걸 한 번 심어보자고, 뭔가 재밌는 토마토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당장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