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림 반도 (76/183)

93화. 크림 반도

크림 공화국, 심페로폴

브리진스키는 50대 초반의 대머리였다. 전직, KGB 요원 출신이라고 하는데 인상이 날카롭기는 했지만, 언뜻 봐서는 평범한 중년의 남자라는 느낌이었다.

“투르진스키와 같이 사업을 하신다고요?”

“예, 사보와는 꽤 오랜 친구죠.”

이제는 진석도 투르진스키를 사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투르진스키는 러시아 출신의 올리가르히로 아직도 러시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푸틴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돈을 가진 올리가르히의 힘은 비공식적인 세계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브리진스키도 권력보다는 돈을 따라다니는 인물이었다.

러시아로 합병된 크림 반도의 수도, 심페로폴은, 동유럽 분위기가 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외국인인 진석의 눈에는 그저 고풍스러운 중세풍의 유럽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크림 반도 일대는 정말 아름답네요. 흑해는 처음 와보는데, 지중해 못지않게 아름다운 곳이네요.”

브리진스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이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정말 마음에 들어요. 기후도 좋고. 관광지로도 개발될 가능성 많은 곳이죠.”

크림 반도 남부는 포도의 산지로도 유명했다. 포도가 재배된다는 것은 지중해와 기후가 비슷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젤렌스키의 말대로, 반도 남부는 평야지대가 많아 농업이 발달한 곳들이 많이 있었다.

“크림 반도에서 사업을 해보려는데,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브리진스키 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업이라면, 어떤 걸 생각하시는 겁니까?”

브리진스키는 전직 KGB 요원 출신이었다. 푸틴과 비슷한 계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러시아 그러니까, 구소련 시대의 KGB 요원들은 서구에서 생각하는 비밀스럽고 냉혹한 이미지와는 달리,

러시아의 엘리트 그룹의 하나일 뿐이었다. 법학을 전공했던, 푸틴처럼, 브리진스키도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 출신이었다.

“농업과, 관광 그런 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페로폴의 노천 카페에서 진석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브리진스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림 반도는 여름이었지만, 비교적 건조한 기후라, 한국처럼 그리 습한 기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은 맑게 갠 하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있었다.

“농업이라, 제이에스 바이오에 대해서라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옥수수로 유명한 곳이죠.”

“옥수수 말고도 여러 가지 종자들을 만들고 있죠.”

“그건 그렇고, 왜 굳이 크림 반도까지 와서 사업을 하겠다는 겁니까. 대규모 농장은 미국 같은 곳이 더 좋지 않나요?”

“뭐, 그렇기는 하죠. 사실은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나, 호주의 서부 윗 벨트 같은 곳에서도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이나 미국에서도 농장이 있고요.”

“엄청난 분이군요. 세계 곡물 시장을 좌지우지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에게 이 크림 반도는 너무 좁은 거 아닌가요?”

“뭐, 그렇지 작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인구도 2백만이면, 한 기업이 투자하기에 작은 곳은 아니죠.”

“투르진스키 때문인가요? 사보는 전부터 푸틴하고는 사이가 안 좋았죠.”

“뭐, 그런 것도 있습니다. 이 크림반도에 농업을 발전시키면, 이 지역이 친러시아에서 친우크라이나로 돌아설 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미친소리 아닌가요? 농업이 발전한다고 이곳 주민들이 우크라이나로 돌아설 거라고요?”

브리진스키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돈이라는 건 꽤 중요한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정치가 어떠니, 정의가 어떠니,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만 결국에는 중요한 건 개인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오냐 아니냐 하는 문제죠.”

“그게 자본주의기는 하죠.”

브리진스키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족주의가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크림 공화국이 러시아로 편입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경제 문제인 것이다.

크림 반도의 역사적인 정체성이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런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크림 반도의 러시아인들이 단지 러시아 민족주의에 반응해서 러시아로의 합병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크림 반도를 위시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대의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와 연관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원래, 이 크림 반도는 역사적으로 봐도 러시아의 일부였다.

구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것인데, 주민들도 다수가 러시아계, 하지만 그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석유 산업으로 돈이 생긴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 지역이 자극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 산업이 발달한 동부 우크라이나와 달리, 서부 우크라이나는 곡창 지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동부에 비해 낙후된 가난한 농업지역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서부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유럽 연합 가입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번번히 무산된데도 그런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난한 우크라이나를 유럽 연합이 거부한 것이다.

반면 동부의 산업지대 주민들은 자신들이 주로 거래하는 러시아와의 경제관계가 깨질까 봐, 유럽 연합을 반대한 것이다.

거기에 경제가 낙후된 우크라이나를 유럽에서 별로 탐탁지 않아 하고 말이다.

지금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푸틴의 주요 권력은 석유에서 나오는 힘이다. 옐친 이후에 득세한 올리가르히 역시 석유와 가스를 민영화한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그 올리가르히를 지원한 세력이

바로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 내지는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 금융 자본이었다.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자원들 중에서 석유는 땅속에서 캐내는 그 성질상, 그 지역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특성이 있었고, 이런 지역성은 좀처럼 글로벌 자본 세력에게도 쉽게 장악되지 않고 있었다.

구소련이 개방된 후, 옐친 체제가 시작되고, 구소련의 석유 사업이 민영화되자, 국제 금융자본은 이걸 크게 반겼다. 그동안 통제 불능이었던 러시아의 거대한 석유자원이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 조절이었다. 올리가르히가 국가 기간 사업을 너무 급속하게 사유화하면서 이익을 사취하고 러시아 경제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린 것이다. 물가가 폭등하고, GDP는 급락하면서 결국 IMF 사태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을 분리했던, 푸틴과 올리가르히 간의 관계가 깨지고 푸틴의 올리가르히의 숙청이 시작된다. 그 후에는 석유산업의 국유화가 이루어지고, 푸틴의 절대 권력이 시작되지만, 그와 동시에, 푸틴은 국제 자본 세력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푸틴은 자본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지 않나요? 그저 독재자일 뿐인 건지?”

“하하, 글쎄요. 푸틴은 푸틴이죠. 이진석 사장님도 ‘오픈 러시아’를 위해 일하시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사보는 오픈 러시아 재단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군요.”

오픈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밀려난 올리가르히들이 유대 자본가 세력인 로스차일드 가문과 손을 잡고 만든 민간 재단이다. 이름처럼, 러시아를 개방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진 재단으로 쉽게 말해 푸틴을 권좌에서 밀어나겠다는 의미였다.

투르진스키는 올리가르히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 오픈 러시아 재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 유럽의 유대계 자본세력, 그리고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그들이 연합해서 푸틴 같은 지역의 권위주의 정부를 공격하는 셈이었다.

얼핏 겉에서 보면, 대의 명문도 있고 민주주의나 인권이라는 문제도 거론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특정 자원을 장악해서,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겠다는 국제 자본 세력의 음모 정도랄까?

아무튼, 그 최전방이 바로, 이 크림 반도인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 세력과, 서구 자본 세력이 이곳,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기타 동유럽 일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튤립 혁명이나, 오렌지 혁명 등 동유럽의 혁명의 배후도 이런 서구의 자본주의 세력들인 셈.

물론, 진석은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진석에게는 꾸준히 경작지를 늘려나가는 것과, 다양한 작물을 키워내는 것이 진정한 목적일 뿐이었다.

크림 반도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냐는 관심 밖이었다. 이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도 역시나 관심밖, 진석이 원하는 것은 이런저런 세력들의 싸움 속에서 경작지를 늘리고, 농업생산을 늘려나가는 것이었다.

“정치니 뭐니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경제입니다. 이 지역이 친러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미국이나 서방과 교역이 늘어나면, 친서방으로 바뀌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크림 반도에 가장 적합한 산업이 농업이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는 전통적으로 공업이 발달한 곳이지만, 그 수준이 높지는 못하다. 유럽을 상대로 공업 제품을 수출할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공업 지역은 주 수출 대상인 러시아의 역향력이 절대적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농업을 발전시키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될 겁니다.”

“하하, 이진석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저는 러시아 출신이라 그런지, 이곳에 새로운 산업이 생긴다고 정치적인 성향까지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뭐, 그거야 어찌 되든, 제 사업을 도와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브리진스키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그거야말로, 제 주머니로 돈이 들어오는 일이니까요.”

브리진스키는 러시아인으로 이곳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와 함께 라면 각종 인허가 문제도 프리 패스가 될 수 있었다. 진석은 크림 반도 남부에 여러 가지 농작물을 키우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풍광을 이용해 관광 비즈니스에도 연계할 계획이었다.

“크림 반도의 남부에 포도 농장을 운영할 생각입니다. 이 지역의 기후가 포도 재배에 적합해 보이는군요.”

진석의 말에, 브리진스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포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이죠. 약간 그리스나 이탈리아 남부와 비슷한 기후거든요.”

“올리브는 어떻습니까?”

“올리브요? 글쎄요, 크림 반도에서 올리브를 대규모를 키우는 곳은 못 본 것 같군요.”

“포도가 잘 자라는 곳이라면, 올리브도 가능하죠. 그렇지 않아도 우리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신품종의 올리브 나무를 개발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자라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나요?”

“보통은 그런 편이지만, 이번에 개량한 나무는 성장이 빠른 편이죠. 토양에 적응하는 적응력도 좋은 편이고요. 이미 호주에도 심어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요?”

브리진스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잘 자란다면, 여기도 가능하겠죠.”

“그 외에 어떤 작물들이 가능할까요?”

“밀이나 옥수수 재배도 가능할 겁니다. 그 외에 해안 쪽에서는 각종 채소나 과일도 많이 키우는 편이죠.”

“아무튼 이 지역에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주로 농업 분야가 될 겁니다. 관광호텔 정도를 인수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주로 농업에 투자를 할 생각이죠. 새로운 품종의 종자도 농부들에게 제공할 계획이고요.”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투르진스키가 당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충분히 실력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제가 그 정도의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오래 산 것은 맞습니다. 아는 지인들도 많고.”

“듣기로는 정치인들과도 친하시다고 하더군요.”

“예, 정치인, 경찰서장, 변호사, 대학교수, 친구들이라면 많이 있죠. 아시다시피, 이 지역은 미국이나 유럽하고는 다릅니다.”

크림 반도는 현재 정치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다. 주민투표로 러시아에 병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도 치안이 불안한 편이라 외국인들에게는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림 반도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지에서 다양한 힘을 가지고 있는 브리진스키 같은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럼, 같이 사업을 시작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건배나 할까요.”

진석을 잔을 들어 올렸다.

“성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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