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서부 호주 윗 벨트
“와, 엄청나군요.”
윗 벨트 일대의 광대한 농경지가 펼쳐졌다.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 호주지만, 광활한 영토와 천연자원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존 스트라다는, 이곳 윗 벨트 일대의 농장주 연합회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전역 군인이죠.”
“와, 군인이시군요.”
185cm 정도의 짧은 머리의 이 남자는 해군 출신이라고 했다. 호주라면 꽤나 익숙한 나라지만, 서오스트레일아의 주도인 퍼스로 가는 직항편은 아직 없다. 그래서 진석은 싱가포르를 경유해 퍼스까지 올 수 있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호주는 주로 남동부의 시드니니 골드 코스트를 떠올리지만, 서부 오스트레일리아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도시였다. 특히 퍼스는 시드니와는 또 다른 이국적인 풍광이라 잠시 철도를 타기 위해 들렸지만 진석은 퍼스라는 도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곳의 농장주들은 전역 군인들이 많죠. 퍼스는 어땠습니까?”
윗 벨트로 들어오기 위한 관문이 퍼스기 때문에 존 스트라다는 자연스럽게 퍼스의 감상에 대해 진석에게 물었다.
“솔직히 한국인들은 퍼스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제가 관광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관광 상품을 만들고 싶을 정도더군요. 물론 시드니도 멋지지만, 뭐랄까? 거긴 너무 흔하니까요. 한국인들에게 말입니다.”
진석의 말에 존 스트라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서부 쪽으로는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 않죠. 사실, 호주 사람들도 서부로는 많이 오지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호주는 중부 사막지대를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도시가 개발되었죠. 물론 동부가 먼저 개발된 것이고요. 그런 면에서 미국과 비슷합니다.”
존 스트라다는 이곳 서부 윗 벨트의 주민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처럼, 이곳도 골드러시 때 이주한 1차 이주민들과, 그 후에 이곳에서 농업이 발전하면서, 존 스트라다 같은 전역 군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호주도 젊은이들은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를 원하죠, 그게 아니면, 런던이나 뉴욕으로 갈 생각을 하고요.”
“그렇겠죠. 호주는 영연방 소속이라, 언어적인 문화적 차이도 없어서 해외로 진출하기에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똑똑한 놈들은 다 외국으로 빠져 나가고. 호주에는 인력이 항상 부족해요. 이곳 서부는 더 그렇고요.”
“퍼스에서 기차를 타고 왔는데, 윗 벨트라는 곳은 정말 상상 이상이더군요. 광대함도 그렇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지 뭐랄까, 고요하다고 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곳인 것 같습니다.”
진석의 말에, 존 스트라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하다 못해, 야생동물도 많지 않아요. 내륙으로 갈수록 더 그렇죠. 점점 더 건조해지거든요.”
“오다 보니, 퍼스에 유명한 와이너리가 있더군요. 이 지역에서 포도도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해지거든요. 건조한 날씨에 포도가 잘 재배되는 편이죠.”
“올리브는 어떤가요?”
“올리브요?”
존 스트라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전에 올리브를 키워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죠. 하지만, 여기는 주로 밀과, 호밀, 그런 종류죠. 듣기로는 쉽지 않다고 했어요. 올리브를 키워서 열매를 수확하려면, 최소 20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보통은 그렇죠.”
“사람들이 안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죠. 포도라면 몰라도, 올리브처럼 오래 걸리는 작물을 재배하기는 어렵습니다. 밀을 키우면, 그다음 해에 수확이 가능하죠. 그러면 그걸 팔아서 돈도 벌고, 다음 해에 농사지을 자금도 마련되는 거죠. 하지만 올리브는 20년 동안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겁니다. 몇 년은 농사를 지으면서 버티지만, 20년 동안 돈이 안 들어오는데 어쩌라는 거죠?”
물론, 진석도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올리브의 수요가 늘어가고 있지만, 재배지가 더 늘어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 특히, 중국을 생각하면 앞으로 조만간 올리브유도 폭등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 보십쇼. 이곳의 밀들은 주로 어디로 수출되나요?”
“아, 절반 정도는 중국으로 가죠. 최근에 수요가 많이 늘었어요.”
“가축들도 그러니까, 소도 많이 수출되고요? 아시아로 말입니다.”
존 스트라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최근의 추세죠. 아시아쪽이 워낙 인구도 많고 거기에 산업화가 되면서 돈도 많아지고 그에 비해 농산물 생산은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예, 맞습니다. 일종의 악순환인데, 노동집약적인 아시아 농업이 공업이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인력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소규모 농업은 돈이 안 되니까요. 그러면서 농촌의 생산력은 더 떨어지는 거죠.”
“하하, 우리 입장에서는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 같은데요. 점점 더 수출할 곳이 많아지니까요.”
진석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몇몇 품목은 수요가 생산을 따라잡지 못해, 가격 폭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올리브유다.
서양식 식생활이 보급되면서 한국에서도 올리브유는 아주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조만간 중국도 그 뒤를 따를 것이 분명했다. 한국과 중국은 인구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는 국가다, 한국인들이 올리브를 소비하는 것처럼 중국이 소비한다는 것은 세계 올리브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예, 이곳 윗 벨트처럼, 넓은 토지에 기계를 농원해서 대규모 농업을 하는 곳이라면, 좋은 기회가 되는 거죠.”
윗 벨트는 wheat 이라는 말처럼 밀을 재배하는 거대 농업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는 황금을 찾아, 서부 호주에 도착한 금광 노농자들이 금광 개발에는 실패하고 농업으로 전환해 정착한 것이 시초인데 퍼스 같은 서부 해안 도시를 시작으로 점점 더 내륙으로 경작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올리브 농장으로 만들려고 하신다는데 정말인가요?”
“예, 올리브는 앞으로 소비가 늘어날 거로 예상되는 작물이죠. 특히 아시아에서 웰빙 열풍이 불면서 조만간 다른 기름들을 대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올리브 오일이 말이죠.”
“하지만, 호주에서도 올리브는 실패한 작물입니다. 기후에 잘 맞지도 않고, 재배가 쉽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일단 재배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는 것이 문제겠죠. 최소 20년은 키워야 하니까 말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 20년이라는 시간도 토양에 잘 적응했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대부분은 올리브가 잘 자라지도 않죠.”
“사실은 저희 제이에스 바이오가 새로운 품종의 올리브 나무를 개발했습니다.”
존 스트라다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진석을 바라보았다, 존 스트라다도 제이에스의 바이오의 명성이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슈퍼 테오신테라는 옥수수 품종을 만들어서 세계 곡물 시장의 판도를 뒤바꾼 회사였다.
“당신네 회사가 슈퍼 테오신테를 만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올리브 나무를 개량했다는 말이군요?”
“예, 특히 수분이 많은 토양에도 잘 적응하고, 그런 이유로, 수분을 쉽게 빨아들여서 성장도 빠르죠.”
“하지만 그런 올리브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 하는 걸로 아는데?”
존 스트라다도 베테랑 농부답게, 자기가 키우는 밀 외에도 다양한 작물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올리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신품종인 거죠.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품종입니다. 빨리 자라고, 적응력도 좋고, 우수한 열매를 맺죠.”
“하하, 그런 게 가능할까요?”
“저희 회사의 연구 결고에 의하면, 묘목을 심고, 3년 정도면, 수확이 가능합니다. 물론 좀 더 수확량이 늘어나려면, 5년 이상이 필요하지만 말이죠. 수령이 7년 정도면 최대 수확치에 도달하고 말입니다.”
“음, 3년이라고요?”
존 스트라다는 좀처럼 믿기 어려워하는 얼굴이었다. 보통 20년이 걸리는 올리브 나무의 성장이 단지 3년이면 가능하다니 말이다. 올리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별 생각 없이 들었겠지만, 존 스트라다 같은 농업 전문가에게 진석의 말은 정말 터무니없이 들리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잘 압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저희 제이에스가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올리브 농장을 직영으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토지 임대 비용도 지불하고 인건비에 지하수 개발 비용 등등, 모든 것은 우리가 지불하는 거죠.”
“그럼, 이 지역 농부들은 농장을 도와주고, 월급만 받으면 되는 건가요?”
“예, 기존의 농사를 지으면서 올리브 농장에 최소한의 관리만 해주만 되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올리브나무 자체는 별다른 관리가 필요 없는 품종입니다. 수확기가 되면, 필요한 인력은 우리가 구할 겁니다.”
“음, 뭐 나쁘지는 않군요. 농사를 지으면서 부수입이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
진석은 호주 서부 윗 벨트의 더 깊숙한 내륙지역에 대규모 올리브 농장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이곳 농부들에게 올리브 재배를 전파하는 게 목적, 하지만 전통적인 밀 재배지인 이곳에 갑자기 올리브 농업을 하라고 권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올리브는 재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작물, 진석은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직접 올리브 농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면서 올리브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주변의 농부들이 흥미를 보이면, 올리브 묘목을 판매하고, 그들이 수확한 올리브를 수매해, 올리브유 가공 공장도 세울 계획이었다.
이렇게 생산한 막대한 올리브유는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앞으로 늘어날 올리브유의 수요를 충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세계 올리브유 시장은 제이에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 분명했다.
“어떻습니까? 존 스트라다 씨는 이곳에서 농부들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계획하는 올리브 사업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존 스트라다는 잠시 고민을 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 지역의 경제는 지금도 밀 농사로 잘 굴러가고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밀의 비중이 너무 높은 것이 문제, 국제 밀 시세는 해마다 다양한 이유로 가격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상 기후로 가격이 폭등할 때도 있고, 반대로 풍작으로 폭락하기도 하고, 또 밀 농업 자체도 여러 변수로 수확량이 불안정하기도 했다.
결국 안정적으로 지역 경제를 유지하려면, 작물을 다양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음, 사실, 올리브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한번 해보죠.”
존 스트라다는 진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석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았다. 이걸로 거래는 성립된 것이었다.
***
존 스트라다의 도움으로 토지를 구하는 일부터, 다양한 분야의 농장 건설 계획이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스트라다 씨가, 이 올리브 농장의 총책임자를 맡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농장에 책임자라고요? 저는 밀 농사만으로 바쁜데요.”
“하하, 직접 농장에서 일을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형식적인 거죠. 어쨌든 이곳 농장의 책임자 자리에 누가 앉아야 하니까요. 물론, 상당한 연봉이 지급될 겁니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일종의 기업 고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예, 가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언 정도를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지역 농부들이 우리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갈등의 조짐이 보이면 중재도 부탁하고요.”
“그런 거라면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총책임자인지 뭔지도 해보죠.”
존 스트라다는 외모처럼, 시원시원한 남자였다. 덕분에 호주 서부에 진석의 올리브 농장 투자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토지가 매입되고, 부족한 것은 임대를 했다. 인근의 밀 농부들 중에, 지원자를 모집해 필요한 인력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올리브 밭에 대규모로 공간에서 개량한 새로운 품종의 올리브 나무들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 후면, 이 황량한 들판은 초록색의 올리브 열매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진석은 올리브 농장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