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스타 (69/183)

86화. 탑스타

청담동의 한우 오마카세 전문점,

“오랜만이야?”

“와, 사장님은 더 멋있어지신 것 같아요.”

지수는 진석을 보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에 카페에서 일하던 그 여대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숙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제이에스의 화장품 브랜드 이비자의 모델로 발탁된 한지수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한 번의 반짝인기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걱정도 있었지만, 보란 듯이 드라마와, CF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이제는 탑스타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대단해. 솔직히 난, 지수 씨가 연예인으로 성공할 줄은 몰랐어.”

진석의 솔직한 말에, 한지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렇게 별로였어요? 어머, 실망이다. 사장님이 절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투나 표정은 전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전에 알던, 한지수와 달리 지금의 탑스타 한지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한결 여유가 있었다.

“아, 재능이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워낙 나이도 어리고 연예계가 쉬운 곳이 아니잖아.”

“하긴 그래요. 쉬운 곳은 아니죠. 하지만 또 열심히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리고 운도 좀 좋았고요.”

아마도, 열심히 노력한 것보다는 운이 더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했다. 한지수가 젊고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연예인 지망생들은 많으니까, 그중에서도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를 탈 수 있는 건, 우연의 작용이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운이든 뭐든 다 그것도 실력이지. 노력하고 잘하니까 운도 따르는 것 아니겠어.”

셰프가 식재료를 보여주며, 요리를 시작했다.

진석은 와인을 마시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여기 맛있는데요.”

“뭐, 요즘 유명한 곳이라고 하더라고.”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본격적으로 한지수와 모델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지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매니저 오빠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베트남에 북카페 오아시스가 진출한다면서요?”

“그래, 북카페도 그렇고, 제이에스 스토어라고 알지? 농산물이나 과일 유통하는 전문 매장이야. 우리 제이에스 그룹 계열이고, 이번에 베트남에 이 두 업체가 진출할 거야. 거기에 모델이 필요해.”

“저에게 모델을 제의하시는 거죠?”

한지수든 누구든 기업에서 모델이 되어달라는 일은 나쁠 것이 없는 일이다. 연예인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것이, CF니 말이다.

“그래, 내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지수 씨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베트남에서도 한지수 씨 인가가 대단하더라고.”

진석의 말에 한지수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사장님, 부탁이기도 하고 또 저도 북카페 오아시스 가족이잖아요.”

“후후, 그래, 잘 생각했어.”

***

속초항.

북으로 보낼 대북 식량 지원 선박이 속초항을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북한에 보내는 물자는 유엔의 대북 제재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기 때문에, 유엔 식량 기구 소속의 사무관들이 직접 나와서, 대북 지원 식량의 물량과, 종류를 체크하고 있었다.

북으로 보내는 것은, 제이에스에서 생산한 즉, 공간에서 생산한 슈퍼 카무트였다. 일단 북에 카무트 지원을 설명하고, 샘플로 소량의 카무트를 북에 보냈었다.

당연히 첫 반응은 냉담한 것이었다. 처음 보는 곡물을 식량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그리고 카무트에 대해 설명하면서 상온 장기 보관이 어렵다는 점도 북에 충분히 설명을 했기 때문에 북쪽의 반응은 더더욱 냉담한 것이었다.

공식적인 논평 같은 건 없었지만, 북쪽의 비공식적 라인을 통해서 들려오는 반응은, 아무리 식량 사정이 안 좋다고 해도 이런 걸 어떻게 받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에스와, 청와대, 통일부 등, 관련 기관에서 북에 여러 차례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식량이고 단기 내에 식량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북에서 답신이 도착했다.

카무트를 지원받겠다는 것이었다.

속초항에는 수송선을 취재하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오명진 지사였다.

오명진 지사는 언론 앞에서 한껏 포즈를 잡고 있었다. 역시 잘생긴 외모에 타고난 정치인답게 자신을 카메라 앞에서 잘 포장하는 본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지사님, 그러면, 이 슈퍼 카무트라는 곡물이 북에서 식량으로 지원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까? 유엔 대북 제재 저촉된다거나 하는 문제는 없나요?”

기자의 질문에, 오명진 도지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유엔의 허가를 받아 보내는 거고요. 이 슈퍼 카무트라는 건, 아마 국민 여러분들에게는 생소한 곡물일 텐데요. 쌀과 옥수수의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쌀과 섞어서 밥을 짓기도 좋고요. 견과류처럼, 그냥 먹어도 괜찮은 정도입니다. 영양면에서도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측에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이전에 지원된 쌀이 군량미로 저장되고 주민들에게는 전달이 안 됐다는 외신 기사도 있는데요.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죠?”

“그것도 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슈퍼 카무트는 상온에서 장기 보관이 안 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군량미로 저장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고요. 외국에 판매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그건 왜죠?”

“일단, 국제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곡물도 아니고, 설령 북에서 유출이 되어서 중국의 시장에 나온다고 해도, 워낙 희소한 곡물이라 금방 출처가 들어 날 겁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명진 도지사 대단한데요. 누가 들으면, 슈퍼 카무트를 오명진 지사가 만들 줄 알겠어요.”

이수정은 오명진 도지사가 기자 회견을 주도하는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하, 신경쓸 거 없어, 원래 저런 건 정치인들이 이용하기 좋은 소재잖아. 이런 기회에 대중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야, 더 큰 정치인이 되는 거지.”

“지금도 큰 정치인 아닌가요? 도지사잖아요?”

이수정의 말대로, 지금도 성공한 정치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명진 자신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진석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일부러 이번 대북 식량 수송선의 첫 번째 출항식에서 오명진에게 기자 회견 기회를 양보한 것이다.

이번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한 것이라던가, 슈퍼 카무트를 개발해서 생산한 것 모두 진석이 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런 기자 회견자리도 진석의 차지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석은 미련 없이 그 모든 영광을 오명진에게 양보했다.

“왜요? 사장님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좋았을 텐데.”

“대신, 나중에 더 큰 걸 받을 거야.”

“더 큰 거요? 그게 뭔데요?”

“그런 게 있어.”

이수정에게는 자세하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김영훈 대통령과 오명진 지사, 나중에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오명진 도지사 등과 같이 했던 면담 자리에서 오고 갔던 대화들은 북의 통일 후에 있을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비공식적인 것이었지만,

제이에스에게 막대한 사업기회를 제공한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물론 법적인 구속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거래였다.

현재 제이에스가 대북사업 등을 도와준다면 나중에 있을 통일 혹은, 대북 관련 투자 기회에서 우선권을 주겠다는 내용..

그 정도의 정치적 거래라면, 오명진에게 이런 대중의 이목을 끌수 있는 기회는 양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앞으로 그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석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란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결정을 내리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 현실,

정치인들을 이용해서 진석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조정하고 바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진석은 지금 킹 메이커를 꿈꾸고 있는 셈이었다.

“자, 이걸로 기자 회견을 마치도록 하죠, 멀리 속초까지 와주신 내외신 기자 여러분들 수고하셨습니다.”

기자 회견을 마친, 오명진 도지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단상을 내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노련한 정치인이라 그런지, 회견도 능숙하시네요.”

진석의 말은 입에 발린 칭찬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명진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남들에게 그것을 더 잘 포장하는 타고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공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왠지 미안해지네요. 오늘 저 자리에는 이진석 사장님이 올라갔어야 하는 건데.”

“아닙니다. 사업가는 사업이 잘되면 그걸로 만족이죠.”

“하하, 그런가요? 아무튼, 시작이 반이라고 이제 반쯤 성공한 셈입니다.”

오명진의 말대로, 절반은 넘어선 느낌이었다. 이제 북으로 가는 카무트를 실은 첫 번째 수송선이 출발하고, 이어서, 북에 지원할 슈퍼 카무트들이 하나 하나 북으로 수송될 것이다. 그리고 북에 주민들에게도 식량이 지원되면, 북쪽의 식량 사정도 한 고비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대북 제재 때문에, 남쪽의 식량 지원이 계속 연기되거나 취소되면서 북의 식량 사정은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번 식량 지원으로 큰불은 끄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과 북의 관계도 지루한 정체를 벗어나 한 발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석은 멀리 북쪽으로 사라지는 수송선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

하노이, 북카페 오아시스 하노이점, 개업 당일

“자, 이번 공연은 한류 보이 밴드, 빅 스타즈의 공연입니다.”

진석은 무대 위로 올라가는 요란한 차림의 남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름 유명한 가수들이라는데 솔직히 진석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펼치는 춤과 노래, 각종 퍼포먼스들도 굉장히 낯선 모습들이었다.

“민지 씨. 저런 게 정말 인기 있는 거야?”

진석은 옆에서 공연을 바라보고 있던 유민지에게 물어보았다.

“왜요? 멋있는데? 정말, 사장님은 빅 스타즈를 모르세요?”

유민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냐는 듯이 진석에게 되물었다. TV를 잘 안 보고, 아이돌 가수들에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빅 스타즈라는 이름도 오늘에서야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고 그들의 요란한 공연도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저런 아이돌 가수를 부른 이유는 진석이 즐기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큰둥한 진석과 달리, 베트남의 사람들, 주로 젊은 여성들로 보이는 행사장에 입장객들은 빅 스타즈의 춤과 노래에 열광을 하고 있었다.

열광적인 무대가 연이어 이어지고, 다음으로 무대에는 한지수가 사회자의 소개를 받으며 올라왔다. 한지수는 베트남이 익숙한지 간단한 베트남어 인사말까지 하며, 무대인사를 시작했다.

“한지수 잘하는데요? 이제 완전히 연예인이네, 무대에서 팬서비스도 잘하고. 홍보도 잘하고요.”

“그러게, 베트남 사람들 반응도 좋고 말이야. 빅 스타즈 못지 않은데.”

아이돌 가수들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닌데, 객석의 반응은 아까 공연 때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아마도 최근에 베트남에서 반영된 드라마에 여주인공으로 나온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노이에 오픈한 북카페 오아시스의 첫 오픈은 성공적이었다. 오아시스 하노이점은 한국보다 날씨가 더운 열대 기후의 하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좀 더 개방적인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모든 시설이 실내에 있었던 한국과 달리, 하노이점은 야외에도 테이블과 책장을 비치해서 노천카페 분위기도 내고 있었다.

“확실히 한국과는 인테리어나 분위가 많이 다르네요.”

무대인사를 마치고 내려온 한지수는 카페 하노이점을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지수 씨 수고했어, 뭐, 앞으로도 우리 카페 오아시스의 홍보를 위해서 힘을 써줘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오아시스 가족이잖아요. 북카페 오아시스 홍보 모델을 하니까, 감회가 남다르다고요. 마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어때, 여기 하노이점은 분위기가 좀 다르지?”

진석의 말에, 한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날씨가 더운 곳이라, 이렇게 노천카페 분위기로 옥외 공간이 있는 것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도 하노이에 자주 와봤는데, 여름에는 많이 습하거든요.”

어쨌든, 카페 오아시스 하노이점의 오픈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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