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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조건 (65/183)

82화. 까다로운 조건

“수정 씨, 그동안 회사는 잘 돌아갔던 거지?”

뉴욕에서 귀국하자마자, 회사에 가장 먼저 들렀지만,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강원도로 향했던 길이었다.

그 후에는 시골에 내려가 부모님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제이에스 본사로 돌아왔다.

외국에 있는 동안, sns라든가 메일 등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회사에 관한 주요 업무는 모두 진석에게 보고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오랫동안 회사를 비워 두어서, 이것저것 확인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했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 이래봬도 제이에스가 창업할 때부터, 일했던 창업공신이라고요.”

“하하, 그랬었지. 아무튼 나 없는 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한국에 귀국하니 외국을 돌아다닐 때보다 더 바빠진 느낌이었다.

“사장님, 오늘은 청와대 만찬 일정이 있는 거 아시죠?”

“그래, 초대를 받았으니 안 갈 수 없지.”

진석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대선이 치러졌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김영훈 대통령, 대통령 선거 출마 전에는 서울시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시장이 대선으로 가는 중간다리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행정의 최고 책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 지방행정을 담당하고 그 자치단체의 행정의 수장을 맡고 있는 도지사나 시장이 대통령의 바로 아랫 단계라고도 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차기 대권 후보들도 도지사나 시장 출신 중에서 많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사람은 오명진 강원도 지사였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젊은 이미지가 장점, 하지만 불안한 요소도 많이 있었다. 일단, 전임, 현임 대통령들이 모두 오명진과 같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당 출신이 세 번 연속으로 당선이 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는 것이 여론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보통 10년 주기로 정권이 바뀐다는 10년 주기설이 있는데, 10년 주기설에 따라도, 다음번에는 정권도 대권도 모두 야당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명진의 개인적 인기를 이유로 유력 대권 후보군으로 분류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결국 선거를 치러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상황,

어쨌든, 오명진이 현재 여당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당내에서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명진이 청와대에 요청해, 이번 만찬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은 이진석과 오명진 외에, 대북사업에 관련된 기업인들과, 통일 관련된 단체들의 대표들이 초대되었다.

목적은 대북관계와 대북사업에 대해서 청와대가 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

청와대 만찬장...

김영훈 대통령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기립 박수가 나왔다.

사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정권 초기, 대통령의 파워가 강한 시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김영훈 대통령은, 60대의 대법관 출신이었다. 공정과 정의 등의 가치를 내세운 전략으로 대선에서 의외의 선전, 사실, 전에 서울 시장이기는 했지만, 여권 주류와는 성향이 좀 달라 대선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경선과 대선에 연이어 성공한 케이스였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모두 북한과 관련된 일들을 하고 계시거나 앞으로 하실 분들로 알고 있습니다. 북이라는 정권이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특징이 있죠. 전임 대통령께서는 북한과의 직접 교류를 많이 시도하셨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인 이성혁은 최근의 달라진 청와대의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김영훈 대통령은 법조인 출신이라 그런지, 대북경협을 추진하던 현재의 여당과도 대북 정책에 대한 생각이 다른 편이었다.

진석은 옆자리에 앉은 오명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대통령은 대북사업에는 큰 의욕은 없으신 모양이군요?”

오명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도 대북사업을 더 열심히 해달라는 것보다는 지금 북한관의 관계가 교착상태라는 걸 설명하려는 자리라고 할 수 있죠.”

대통령의 연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북한과의 교류의 중요성,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진 내용이 문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국제 공조라는 건, 유엔이나, 적어도 미국과의 협의하에 대북사업의 속도를 조정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물론, 단 한 가지 인도적인 식량지원은 예외로 한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오늘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봐서는 북한과의 교류는 당분간 올스톱이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오명진 도지사는 별다른 동요가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당내 혹은 청와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전에 그런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찬이 마무리되고, 만찬장을 나오려는 데 오명진 지사가 진석을 불렀다.

“이진석 사장님, 잠깐 나랑, 갈 곳이 있습니다.”

“예? 어디를 말입니까?”

만찬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명진은 진석을 청와대 내부로 이끌었다.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이진석 사장님이시군요, 오명진 도지사님도 두 분 다 잘 오셨습니다.”

청와대 만찬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대통령과의 개인 면담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또 어떤 의미일까?

공식적인 만찬에서는 대북교류를 현재에서 일단 정지시킨다는 뉘앙스의 발언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의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만찬장에서도 다른 분야와 달리, 인도적 식량지원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발언도 있었고. 그렇다면 대통령이 진석에게 대북 식량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할 수도 있다.

“개인 면담 일정이 잡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보통은, 대통령에게 할 말이 있어서 면담을 신청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대통령께서 저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시다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까 만찬장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간 걸 이진석 사장께서도 들었을 겁니다.”

“예, 뭐, 현재 북한과 관련한 대북사업이 위기라는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 북의 정권이 굉장히 문제가 많으니까요.”

“골칫거리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대통령이 되니까, 북한 때문에 두통이 생길 지경입니다.”

“그중에서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진석의 말에, 오명진과 김영훈 대통령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뭔가 사전에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었다.

“사실은 여러 가지 국제적인 문제로 다른 대북사업은 당분간 중지될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서 남북관계의 경색도 피할 수가 없고요. 일종의 빙하기가 올 거라는 말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최근에 북핵 실험과 연관해서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유엔의 제재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뭐, 정치적인 입장에서야, 언제나 힘겨루기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큰 문제는 없는데. 문제는 북한의 식량 사정입니다.”

“그거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올해는 더더욱 작황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식량을 지원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지만, 식량을 지원하는 게 대북제재 사항에 해당하는 일이고,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을 지원해도, 북한 국민들에게 식량이 배분되는 게 아니라, 군량미로 전용되거나, 중국 같은 외국으로 밀수출이 되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북에 지원되었던 식량의 상당수가 주민에게 가지 못하고,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용으로 비축되거나, 중국으로 빠져 나와 곡물 시장에서 거래가 되어 달러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북한 정권은 믿기 어려우니까요. 차라리, 식량 지원은 그만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진석의 말에, 김영훈 대통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도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습니다. 북한 정권의 횡포도 질려버렸고요. 하지만 북에 있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십쇼. 아마 어른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더 피해가 큽니다.”

“그렇기는 하겠죠.”

아이들의 경우에 식량이 부족하면, 영양부족으로 성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질병이나 건강 악화에 노출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통일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부담이 될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해결해야 될 일입니다. 대북 식량 지원 문제 말입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도 말하신 거 아닙니까? 대북사업은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인 이진석 사장님을 이렇게 모신 겁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이진석 사장님은 작물 종자를 개발하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말인데, 북에 지원할 곡물을 개발할 수 있을까요?”

“곡물을 개발한 다고요?”

“예, 기존의 북에 지원된 식량들은 보통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는 군용으로 군량미로 저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중국을 통해 외국으로 밀수출되었다는 거죠.”

“그렇다는 말은,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신품종의 작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군용으로 저장되지 않으려면, 장기 저장이 안 되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외국으로 수출이 안 되는 작물, 아마, 국제 시장에서 거래가 잘되지 않는 마이너한 작물,

그러면서도 북에 식량으로 지원되어서, 북한의 영향 부족 문제를 해결할 그런 작물을 대통령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석은 그동안 축적한 다양한 작물들의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한 작물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요.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작물이라는 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명진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는 겁니까?”

“새롭게 창조를 말인가요?”

정치인들이라, 농업이나 생명공학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품종이나 작물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진석의 경우에는 공간에서 시간을 가속하는 방식으로 다른 생명공학 기업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북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다 만족하는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라니, 그런 작물을 개발하는 과정도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데다가,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진석으로서는 시도할 의욕이 안 생기는 일이었다.

“대통령님이나 도지사님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작물을 개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저희 회사에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제이에스 그룹은 국제 곡물을 유통하는 사업을 최근에 활발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그거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 나라, 아니 전 세계에 걸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고, 미국이나 유엔과의 관계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미국이나 유엔의 정책에 위배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인도적인 문제죠.”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그리고, 여기 현직 대통령인 저와, 아마도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 큰 오명진 도지사 우리 두 사람이 비공식적으로 보증하겠습니다. 이번 식량 지원 계획을 제이에스가 도와준다면, 앞으로 대북사업에서 제이에스에게 주도적인 권한이 주어질 겁니다.”

“주도적 권한이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각종 대북사업에서 제이에스가 특혜를 입게 될 거라는 겁니다. 물론 가능한 범위에서 말이죠.”

김영훈 대통령의 말에, 오명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을 이진석 사장님이 해주신다면, 나중에 통일 후에라도 그에 걸맞는 대가를 얻을 거라는 말입니다.”

물론, 두 대통령, 아니, 한 명의 대통령과, 차기 대권 후보의 비공식적인 약속에 불과했지만 이번 대북 식량 사업을 제이에스가 성공시킨다면, 차후에 막대한 특혜를 보장하겠다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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