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세계식량농업기구
뉴욕의 맨하튼, 브라질리언 레스토랑. 카마로.
“그라치아 실바라고 합니다.”
브라질 출신의 남자는 구리빛 얼굴의 전형적인 브라질인이었다. 그라치아 실바 FAO 사무총장, 그는 유엔 산하의 세계식량농업기구의 수장이었다.
한국도 연간 천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내고 있는 식량 지원국이 되었지만, 과거 50년대에는 세계식량기구의 지원을 받던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얼마 전에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오셨다고요? 이진석 사장님.”
“예, 그쪽에서 사업을 시작했죠.”
우크라이나에 로시첸코를 사장으로 내세워, 곡물 수출입을 하는 제이에스 인터네셔널 우크라이나 지사를 설립했다. 우크라이나에 슈퍼 테오신테의 종자도 판매하고, 농가에 금융지원을 하고 받은 옥수수를 아시아에서 가공해, 동물 사료로 만들어 수출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새로 사료 공장이 들어설 곳은 한국의 강원도의 홍천에 들어설 농업 단지였다. 여기에 남는 토지에 대형 사료 공장을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고 남미 등의 목축 국가에 사료를 판매하는 것이다
“듣기로는 이번에 슈퍼 옥수수를 개발하셨다면서요?”
“맞습니다. 품종의 이름은 슈퍼 테오신테라고 하죠.”
제이에스가 야심차게 출시한 슈퍼 테오신테는 각국의 농가와, 농업 관련 기업들에게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따로 비료를 공급하지 않아도 일반적인 옥수수보다 수확량이 월등했기 때문에 비용 절감을 원하는 농가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일리노이 일대에 먼저 시범적으로 슈퍼 테오신테가 키워지기 시작했고, 첫 번째 수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전미옥수수협회는 공개적으로 슈퍼 테오신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의 옥수수 농가들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미국 쪽은 슈퍼 테오신테로 완전히 갈아탄 모양이더군요?”
세계식량기구 사무총장인 그라치오 실바는 브라질 출신의 농업 박사였다. 세계식량기구의 브라질 지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해, 5년 전부터 사무총장으로 세계를 누비고 다니고 있었다.
특히 그의 최대 관심사는 가난한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의 기아 사태를 해소하는 일이었다.
“솔직히 슈퍼 테오신테에 관한 보고서를 보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심을 했습니다. 뭔가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고요.”
“하하, 제가 누굴 속일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뭔가 새로운 종자를 개발했다고 했던, 바이오 기업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공개하고, 불리한 것들은 숨기기에 급급했죠. 최근에 GMO 작물들에 관한 문제는 잘 아실 겁니다.”
“그거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GMO 작물의 유해성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맞습니다. 이걸 보시죠.”
실바 박사는 진석에게 오늘자 신문을 내밀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였는데 1면 기사로 유전자 조작 콩의 유해성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사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관한 유해성 주장은 꾸준히 있어 왔지만, 그동안 농민 단체 등의 압력, 그리고 정치권의 압력으로 크게 이슈화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전미옥수수협회가 기존의 유전자 조작 옥수수 대신, 진석이 개발한 슈퍼 테오신테를 선택하면서 그와 동시에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비판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둑을 막고 있던, 댐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동안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해 비판적 언론에 행사하던 압력집단이 사라지지, 언론도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를 찍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참, 언론이라는 게 믿지 못할 것이군요.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대중에게 보여주고 듣게 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죠.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대중에게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은 거 아닌가요?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된다면 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죠. 예를 들어서 이번 유전자 조작 작물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딜레마인데, 유전자 조작 옥수수나, 콩, 밀은, 생산성의 혁신을 가져와서 많은 국가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인체에 유해한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죠. 아직도,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같은 곳이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실바 박사의 말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비록 인체 유해성이라는 문제는 있었지만,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전세계적인 식량 부족을 어느 정도 해소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이에스 바이오가 개발한 새로운 작물들이 그런 유전자 조작 작물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진석이 개발한 신품종은 말 그대로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적인 진화의 결과였다.
단기간에 유전자에 직접 변형을 가한 GMO 작물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 같은 문제는 없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바 박사님, 이제는 제이에스가 개발한 슈퍼 테오신테 같은 새로운 작물들이 그것들을 대체할 겁니다. 인체 유해성의 문제는 없는 완벽한 작물들 말입니다.”
그라치오 실바 박사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이에스의 슈퍼 테오신테도 결국 유전자 조작 방식으로 개발한 것이 아닙니까?”
“아뇨, 전혀 다릅니다. 우리 회사의 방식은 좀 다르죠.”
“어떻게 말입니까? 사실, 농업을 전공한 과학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슈퍼 테오신테는 테오신테를 베이스로 만든 신품종인데,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개발한 겁니까?”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줄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대충 둘러댈 필요가
있었다.
“그건, 기업의 업무상 비밀이라고 해두죠. 그나저나, 그라치오 실바 사무총장님은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아는데, 어떻습니까? 아프리카에 저희 슈퍼 테오신테를 보급해 보려고 하는데요.”
“슈퍼 테오신테를 말입니까?”
“예. 전부터 아프리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땅이라고 생각했죠. 특히 농업 분야에서요.”
“어떤 의미로 말입니까?”
“한국에서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 중에, 아프리카에서 운동화를 팔아라 라는 말이 있죠, 모두 맨발로 다니는 곳이니, 신발을 파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아프리카는 농업 후진국이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인가요?”
실바 박사의 말 그대로였다. 아프리카는 전통적으로 농경을 하는 지역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이 살기에 굉장히 좋은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뉴스 같은 곳에서는 가난하고 척박한 사막지대의 난민촌 같은 걸 보여주지만,
아프리카라는 곳은 열대의 풍요로운 땅이다. 야생 동물의 천국이기도 하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기후라, 오래전부터 농경보다는 이동식 목축, 즉 유목이 이루어지던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제 지하수를 끌어서 농업용수로 쓰거나, 댐을 만들어 필요한 농업용수를 얻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충분한 투자만 이루어진다면 농업을 통해 지금의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무능한 유엔이 이 지역에 농업발전에는 크게 기여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진석이 이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농업을 생산할 곳으로도, 또 소비할 시장으로도 엄청난 가능성이 있는 곳이죠.”
실바 박사는 진석의 말에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아프리카가 인구가 많고, 땅이 넓기는 하지만, 농업 생산에는 그다지 적합한 곳인지는 모르겠군요.”
“그동안 적절한 투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식량기구가 제 역할을 못 했다는 말인가요?”
실바 박사는 약간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하긴, 자신이 속한 유엔 기구가 무능하다는 말을 듣기 좋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자기가 그 기구의 수장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는 법..직선은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돌직구를 날리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빙빙 돌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낼 수도 없었다.
“하하, 사무총장님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세계식량기구든 민간 단체든 간에 식량을 지원해주는 것에만 급급했다는 겁니다.”
“당장 식량이 부족한 곳에, 다른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농가에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농기구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각종 자본을 지원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슈퍼 테오신테를 키우게 되면, 그 수확한 옥수수를 수매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로 우리는 소나 돼지에 먹일 사료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요? 그 다음에는요?”
“그 가축용 사료를 가지고, 아프리카에 축산을 시작하는 거죠.”
“축산요? 아프리카에서 말입니까?”
원래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들은 사냥 내지는 목축을 하는 유목민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마사이족이 그렇다, tv 다큐에서는 키가 크고, 껑충껑충 점프를 하며, 사자를 사냥하는 용맹한 부족으로 묘사가 되지만,
그들이 맹수인 사자를 사냥하는 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소를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높은 점프를 하는 것도 주변의 시야를 확보해서 가축을 육식 동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
즉, 마시이는 전사의 후예가 아니라, 유목만의 후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마사이의 전통은 건기와 우기를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유랑하는 그러면서 가축에게 풀을 먹이는 유목형 목축인 것이다.
하지만, 서구제국이 아프리카를 동서로 분할하고 그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식민 통치와, 그 후의 분할 정책으로 아프리카는 국경선으로 분할된 지금의 형태가 되었고, 건기와 우기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의 길도 막히게 된 것이다.
“실바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아프리카인들은 가축을 키우고 그 고기를 먹는 유목민들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선조들은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맞습니다. 정치적 문제로 국경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풍요로운 우기가 사라지고, 척박한 건기가 되면, 이동하지 못한 채 건조한 황무지에 버려지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가축은 굶어죽고, 유목민도 난민이 되어 버린 거죠.”
“그걸, 새로운 목축으로 해결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전세계적으로 집약식 목축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죠, 아프리카도 옥수수를 키우고, 그 옥수수로 만든 사료로 가축을 키우는 겁니다.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들의 선조들처럼 다시 가축을 키울 수 있게 되는 거죠.”
“음, 그게 가능할까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아프리카에 슈퍼 테오신테를 보급하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농기구나 농업용수 문제도 지원하고요. 그리고 그렇게 조성한 농장에서 옥수수를 키우는 겁니다.”
“그 옥수수는 제이에스 인터네셔널에서 수매를 하고요?”
“그렇죠, 그리고 그 대금으로 농민들은 사료를 구매하는 겁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사료를 파는 거죠. 그걸로 아프리카의 목축이 다시 부활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진석의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에, 실바 박사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과 유엔식량기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며 전혀 진전이 없었던 아프리카의 식량문제를 이 젊은 사업가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식량기구 같은 국제기구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아프리카 재건을 위해서, 제이에스 그룹에 협력하시겠습니까?”
실바 박사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엄청난 계획이군요. 사실, 잘 실행될지 확신은 없지만, 이진석 사장님의 젊은 패기를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한번 일을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