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전략적 선택
우크라이나 동부, 르비르.
“르비브라면, 과거에는 폴란드 영토였던 적도 있죠, 그래서 지금도 그런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르비르 시내의 식당에서 진석은 우크라이나 전통 요리인 보르시치 수프와 만두 같이 생긴 페로기를 점심으로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곡물 수출 사업을 하고 있는 로시첸코는 50대 중반 정도의 키가 큰 남자였다.
키가 2미터에 근접하지 않을까 싶은 큰 키였다.
“아무래도, 서부의 곡창지대를 노리는 외부 세력들이 많았던 거겠죠?”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지금은 폴란드라면,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독일의 침략을 받은 피해 국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폴란드 왕국은 중세 시절만 해도 동유럽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등 슬라브 계열의 국가들은 작은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어서,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폴란드도 그렇고, 히틀러, 그리고, 지금은 푸틴이죠.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노리는 녀석들 말입니다.”
투르진스키와도 친분이 있는 로시첸코는 농업과는 무관한 의사 출신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평범한 내과의사로 지내다가. 동유럽이 서구화되면서 새로운 직업을 찾은 케이스였다.
“의사도 사실 좋은 직업 아닌가요? 안정적이고, 존경도 받고요?”
진석의 말에 로시첸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잘 모르시는 소리입니다. 우크라이나나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한 국가들이죠. 그러다 보니, 공산주의 시절의 관행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의료 분야가 취약하다는 거죠.”
“의사들의 처우는 좋은 편이 아닌가요?”
“동유럽도 그렇고 영국도 그렇지만, 공공의료 위주로 의료정책을 펴는 국가들은 의료비가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의사들의 수입이 적은 편이죠.”
미국처럼, 의료비가 너무 비싸 약과 의사가 있어도 치료를 포기하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저렴한 의료비로 모든 사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공공의료는 재원 부족으로 당초 기대했던 수준의 시설이나 서비스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병원에 가는 부담은 적지만, 병원에 가도 수준 높은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의사나 간호사 같은 의료 종사자 입장에서도, 어려운 의학 공부를 마치고 의사고 돼도, 큰돈을 벌거나 하는 것은 아니어서,
기껏 의대에서 키운 일력들도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그도 아니면 로시첸코처럼, 다른 직업을 찾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그래서 의사는 그만두고, 무역상을 시작하신 거군요?”
“예, 저에게는 적성에 잘 맞는 일이죠. 사실, 저처럼 키가 큰 사람은 좁은 진료실에 있으면, 더 피곤하거든요.”
로시첸코는 농담 같은 뉘앙스로 말을 했다.
“농구를 해보지 그랬습니까? 농구를 했어도 잘했을 것 같은데.”
진석의 말에, 로시첸코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운동 신경은 별로죠, 키가 커서, 농구부에 있었던 적도 있지만, 아무튼 전 지금 일에 만족합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재밌고.”
“로시첸코 씨는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밀을 버리고 옥수수로 전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어떤 옥수수냐 하는 게 문제겠죠. 듣기로는 미국에서 재배하는 옥수수는 비료 없이도 잘 자란다면서요?”
“슈퍼 테오신테라는 품종이죠. 척박한 토양에서도 다른 비료 없이 풍성한 수확이 가능한 신품종입니다.”
로시첸코는 엄지척을 해보였다.
“굉장하군요, 저는 농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농사를 위해서 시비를 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죠.”
“농업의 역사는 시비의 역사죠. 비료를 뿌리고, 토양의 부족해진 영양을 채워 넣는 일이야말로, 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농업을 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요.”
“맞습니다. 농가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죠. 더구나 요즘에는 모든 비료는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들이라, 비료가 없이 키울 수 있는 작물이라면, 엄청난 이익이 되는 셈입니다.”
로시첸코는 무역업, 특히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곡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비료나 농약, 농기구, 그리고 종자들을 수입해, 우크라이나 농가들에 공급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인풋과 아웃풋 두 가지를 다 다루시는군요?”
“사실은 금융업도 하고 있습니다. 농가에 필요한 자금도 빌려주죠. 그리고 생산된 작물을 팔아주기도 하고. 농업 전반을 보조한다고 할 수 있죠.”
로시첸코는 비료와 농기구를 공급하면서, 자금력이 부족한 농가에는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농가의 자금 사정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농가들의 형편이 어떤 편입니까?”
로시첸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농촌이라는 곳이, 다들 돈이 부족하죠. 농업이라는 게 불안정한 산업이거든요. 갑자기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농사를 다 망치기도 하고, 우박이나, 한파도 있죠. 아무튼, 열심히 일해도 꼭 돈으로 연결되는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농가에 돈이 없다면, 돈이 되는 작물에 관심이 많겠군요?”
“슈퍼 테오신테를 보급하러 오신 거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원래 농부라는 집단은 매우 보수적이다. 진취적이고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세계 어디에서든 공통적인 특성이다. 당연히 새로운 품종을 더구나, 밀을 키우던 농부들에게 옥수수로, 바꾸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보수적인 농부들을 새로운 작물로 전화시키려면,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했다.
“저, 로시첸코 씨는 농부들에게 돈도 빌려준다는 말이군요?”
“예, 기본적으로 비료나 종자, 농기구 수리비가 없는 친구들도 많거든요.”
농사를 짓는데도 당연히 돈이 필요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농부들도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슈퍼 테오신테를 재배하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슈퍼 테오신테를 재배하는 조건으로 융자를 해주면 어떨까요?”
“융자요? 제가 말입니까?”
로시첸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돈은 저희들이 준비하죠. 1억 달러 정도면 어떻습니까? 슈퍼 테오신테 종자를 심는 농가에 그 돈을 빌려주는 거죠. 그리고 옥수수 수확이 끝나면, 돈 대신 옥수수 현물로 받는 겁니다.”
돈이 없는 농부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돈과 종자를 빌려주고, 돈 대신 농작물, 즉, 옥수수로 받는 농업 금융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우리로서는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속담이죠. 돌 하나를 던져,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하하, 재밌는 속담이군요, 그러니까 이진석 사장님이 원하는 대로 슈퍼 테오신테 농가의 수도 늘리고, 생산한 옥수수를 국제 시장에 판매해서 이익도 얻는다 이 말이군요?”
“그런 셈이죠.”
물론,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곡창지대에 옥수수 재배지를 늘리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가까운 동부의 산업지대와, 서유럽에 가까운 서부의 농업지대로 나누어진다.
산업지대라면, 언뜻 서구화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실상은 러시아의 영향력에 있는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중공업이나, 가스, 석유 등의 산업의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인구 구성도 러시아계가 많은 편으로 당연히 친러시아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에 비해, 서부 농업지대, 즉, 밀 곡창지대는 인구 구성상 우크라이나계가 많고, 주로 농업지역으로 비교적 낙후된 가난한 지역이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반러시아 정서가 강해서, 미국이나 유럽에 우호적인 지역이다.
진석이 그런 서부 곡창지대에 대규모 금융을 지원하면서, 슈퍼 테오신테의 재배 면적으로 늘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럴듯한 계획이기는 한데, 그래서 얻는 이익이 뭔가요?”
“일단, 저희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개발한, 슈퍼 테오신테를 동유럽의 곡창지대에 재배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죠. 그리고 국제적으로 보자면, 옥수수에서 시작돼서, 남미와 호주의 축산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식량 유통 루트를 만들어가는 거죠.”
“밀 경작지를 줄여서, 러시아도 압박하고 말이죠?”
“그런 것도 부수적으로 있겠죠?”
투르진스키나 몇몇 국제 곡물 카르텔 회원들은 푸틴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내기도 했지만 사실, 진석은 그런 것에는 큰 관심은 없었다.
그보다는 진석이 개발한 신품종 옥수수인, 슈터 테오신테가, 전세계의 농경지에서 재배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로시첸코 씨는 어느 쪽입니까? 러시아인가요, 아니면, 미국인가요?”
“하하, 친미주의자냐, 친러시아주의자냐 하는 건가요?”
어쩌면 어리석은 질문인지는 몰랐지만, 로시첸코라는 사람의 속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적어도 러시아에 우호적인 인물이라면, 진석이 하려는 일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다.
“질문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에서는 어디든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요?”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 사실, 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러시아든 미국이든 외부의 세력일 뿐이죠. 하지만, 국제 정세라는 건 어디까지나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략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우크라이나 인으로서 어디가 더 유리할까? 하는 그런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느 쪽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미국이죠. 세계최대의 경제대국 아닙니까? 물론, 러시아가 가깝기는 하지만 미국과 거기에 연관된 시장 규모에서 상대가 안 되죠.”
“러시아보다는 미국 쪽이라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전략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좋습니다. 저와 전략적인 관점이 같군요. 그렇다면 같이 한 번 일을 해보죠.”
친러시아가 아니라면 그걸로 충분했다. 적어도 자유무역에 반기를 들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로시첸코를 파트너로 삼아, 본격적으로 종자 사업을 우크라이나에게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은 로시첸코와 같이 우크라이나에 농업 관련 사업을 시작할 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자금은 진석과 국제 곡물 카르텔에서 지원하고, 회사의 대표는 형식상 로시첸코가 맡아서 하는 방식이었다.
그 이후에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농가에 융자를 제공하고, 대신, 슈퍼 테오신테의 재배를 위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융자금은 옥수수 현물로 회수하는 방식,
그렇게 얻은 옥수수는 다시, 남미와 호주의 축산 농가에 사료 원료료 공급되고, 그렇게 키워진 가축의 고기는 육류가 되어, 세계 시장에 공급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석의 큰 그림이었다. 슈터 테오신테의 생산력이라면, 부족한 옥수수 공급을 충분히 커버해서, 사료 부족, 그리고 전체적인 곡물 수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곡물로 안정된 가격 속에서 국제 공물 카르텔의 이익도 보장되는 셈이었다.
진석도 그런 곡물 카르텔의 종자를 공급하는 사업자로 참가하고, 장기적으로 세계 종자 시장을 장악하는 거대 기업을 키워 낼 수 있는 시작점에 있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라면, 세계 3대 곡창지대죠. 여기에 슈퍼 테오신테가 재배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겁니다.”
로시첸코의 말에, 진석은 상상을 해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흑토 지대에 슈퍼 테오신테가 끝도 없이 가득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수확기가 되면, 노랗게 익은 슈퍼 테오신테가 수확되고 창고마다 잘 익은 옥수수들로 가득 차게 된다, 다시 옥수수들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다양한 식재료가 되기도 하고, 가축의 사료가 되어 다시 고기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먹거리가 바로 진석의 슈퍼 테오신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