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로 미셸의 부활
아르헨티나를 돌아본 후, 몇 개의 농장의 구매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는 주앙 곤잘레스의 모국인 브라질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대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였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고향에 와 보는군요.”
“하하, 보사노바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음악이죠, 요즘은 삼바에 밀려나는 느낌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보사노바가 더 브라질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왜죠?”
“브라질 국민들의 정서에 더 잘 맞거든요. 브라질이라고 해서, 항상 정열적인 삼바 축제만 벌어지는 곳은 아니라는 거죠.”
곤잘레스는 자신의 바나나 농장으로 진석을 초대했다. 곤잘레스는 바나나와 커피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옥수수나 사탕수수를 수입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시 외곽에 있는 바나나 농장에는 줄이 지어 늘어서 있는 바나나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좀 신기한 바나나군요.”
보통, 국제적으로 키워지고 있는 바나나라면, 캐번디시 품종인 경우가 많다, 그로 미셸은 바나나 곰팡이에 치명타를 입고 거의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진석도 바나나를 개량하는 일을 하면서, 바나나의 품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약간 뭉툭하고 짧은 바나나의 모양은 일반적인 캐번디시가 아니라, 그로 미셸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건 그로 미셸인가요?”
주앙 곤잘레스는 진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그로 미셸은 멸종된 것 아니었나요?”
“보통 그렇게 알려져 있었죠. 하지만, 완벽하게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해서 농장에서 대규모로 키울 수 없을 뿐이지, 소규모 농장에서는 조금씩 키우고 있죠.”
“한 번 맛을 봐도 될까요?”
진석은 노랗게 잘 익은 그로 미셸 바나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벗겨내고 속을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씹는 순간 달콤한 느낌이 입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캐번디시에 비하면 굉장히 달콤한 맛이었다.
“굉장히 달콤하네요.”
“그렇죠, 원래 바나나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달콤한 맛 때문이죠, 그에 비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많이 재배되는 캐번디시는 아무래도 당도가 많이 떨어지죠.”
“이진석 사장님은 이미 새로운 바나나 품종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앙 곤잘레스는 진석의 제이에스에서 출시한 아아스크림 바나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에스에서 개발한 아이스크림 바나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그거라면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스크림 바나나는 가격도 너무 비싸고 제가 알아본 바로는 한국에서 소량만 재배한다고 하더라고요.”
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석이 전에, 공간의 산에서 개량한 아이스크림 바나나는 맛은 탁월했지만, 일반적인 바나나에 비하면, 맺히는 열매가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맛이 좋아서 비싸게 팔수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농가에서 재배하기에는 큰 문제는 없기는 했다.
하지만, 주앙 곤잘레스와 같이 국제적인 바나나 유통을 하는 거래상 입장에서는 중요한 선택요소는 가격이었다. 바나나는 그렇게 고급 과일은 아니고, 흔하게 유통되는 저렴한 과일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좀 더 저렴한 바나나 품종을 원하시는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 그로 미셸 정도면 저희가 원하는 그런 바나나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로 미셸은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파나마병에 취약하다는 거죠.”
“그건, 바나나 특유의 클론 복제 때문에 생기는 문제 아닌가요?”
“맞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진석 사장님에게 특별히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푸사리움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그로 미셸 말이군요.”
곤잘레스가 원하는 것은 저렴하게 대량으로 생산해서 세계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하지만 지금의 캐번디시 품종보다는 맛이 더 뛰어난 그런 신품종의 바나나였다.
“쉽게 말해서, 파나마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그로 미셸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듯 하지만, 훨씬 더 맛있는 바나나 말이죠.”
“간단한 문제는 아니군요.”
그로 미셸 품종을 다시 개량을 해서, 맛은 유지하고 파나마병에는 강한 품종을 만들어 달라는 말인데, 말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쉬운 문제라면, 굳이 이진석 사장님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는 거죠.”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
저 멀리, 바다 건너.. 리우데자네이루 시내가 보이고 있었다.
진석은 이파네마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의 해변과는 다른 풍경,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이 진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주앙 곤잘레스의 소개로, 이파네마 해변 근처에 작은 주택을 구입한 상태였다. 방 두 개가 있는 작고 아담한 집이었지만, 정원도 있고, 나름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보사노바를 좋아하는 진석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 해변에서는 멀리 리우데자네이루가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강북에서 강남을 봐야 멋지다는 말처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이파네마를 보는 것보다는 이파네마에서 리우데자네이루를 보는 풍광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 외에도, 집을 사게 되면서 공간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들 수도 있었다.
진석은 이파네마의 작은 주택의 거실에서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주님, 오늘은 뭘 가져오신 겁니까?”
“오늘은 그로 미셸이라는 바나나야.”
진흙 인간의 사령관은 진석이 가져온 바나나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나나라면, 지난번에, 한 번 재배하신 것 아닌가요?”
“아,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고, 이번에는 산이 아니라 평지에서 재배해서, 공간 밖에서도 키울수 있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생각이야.”
“그럼 씨를 파종해야 하는 건가요?”
“사령관, 알다시피, 바나나는 씨가 퇴화됐다고 생각해야 돼.”
그렇다 바나나는 일종의 클론 번식인, 측아 번식을 하는 작물이다. 뿌리에 돋는 측아라는 부분을 잘라, 땅에 묻으면,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나나가 성장하게 된다. 종의 특성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유리하지만,
그로 미셸의 예에 보듯이 특정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공격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약간은 복잡한 문제인데, 바나나처럼 클론 번식을 하는 식물들은, 일반적인 두 쌍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식물이, 아니라 씨없는 수박처럼, 세 쌍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전자에 변형을 주어서, 유전자를 두 쌍으로 만들면, 번식을 위해 씨앗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씨없는 수박이 두 쌍의 자연적인 유전자를 씨를 없애기 위해, 3쌍으로 인위적으로 변형을 준 것을 역으로 하면, 씨앗이 생겨날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상태창이라면, 가능할까?”
진석은 상태창을 불렀다.
-불가능합니다.
“왜?”
-공간주님의 능력은 공간 내에서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입니다. 유전자에 변형을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토양의 비옥도 같은 것은 조절 가능해도, 식물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2쌍의 유전자를 가진, 바나나는 만들 수 없는 건가?”
-공간주님, 오직 시간만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완벽한 반복이라는 건 없습니다. 아무리 똑같이 반복하려도 해도, 미세한 차이는 만들어지게 마련입니다. 이 차이와 반복이 바로 저의 답입니다.
“무..무슨 개소리냐?”
-쉽게 말씀드리면, 언젠가는 돌연변이가 나올 거라는 말입니다.
“아, 그런말이군.”
그래, 결국 바나나를 계속 증식시키고 시간을 가속시키다 보면, 돌연변이가 나올 거라는 말인 것 같았다.
진석은 바나나를 심기 위해, 밭을 만들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로 미셸에 2쌍의 유전자를 가진, 그러니까, 씨앗으로 번식하는 바나나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측아로 번식하는 바나나 나무는 그 숫자만 엄청나게 늘어났을 뿐이었다.
“뭐지 실패인가?”
진석은 다시, 천 년의 시간을 더 가속해 보았다. 계속되는 시간 가속으로 지쳐가고 있을 때쯤..뭔가 바나나 나무에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열매인가?”
사실, 바나나는 열매가 아니라, 일종의 꽃잎이다. 바나나 꽃의 꽃잎에 해당하는 부분이 우리가 먹는 바나나인 것이다.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나나는 3쌍의 유전자로 번식하는 클론 번식을 하기 때문에, 씨앗을 보호하는 열매는 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시간을 증식하던, 그로 미셸 나무에 못 보던, 초록색의 작은 토마토 같은 것이 열리기 시작했다.
작기는 하지만, 열매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진석은 그 작은 열매를 따서 안쪽을 칼로 잘라 보았다.
“역시, 안에 씨앗이 있잖아?”
작기는 했지만, 안에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씨앗을 채취해서 땅에 파종하자, 역시나 바나나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 씨앗이 생긴 바나나 나무는 열매의 씨앗으로도, 뿌리의 측아로도, 두 가지 번식이 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감자의 씨 같은 특징이었다. 주로 감자 자체로 클론 번식을 하지만, 열매가 열리고 번식도 가능한, 감자처럼 말이다.
“좋아 이걸로, 씨앗으로 번식하는 그로 미셸을 만들어 냈다. 다음은, 파나마병을 일으키는 푸사리움 바이러스에 대한 내성을 가진 종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나나 뿌리 부분에 상처를 내고 푸사리움 바이러스를 침투시켜야 했다.
진석은 그로 미셸을 키우는 농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푸사리움에 감염된 바나나 뿌리를 가져와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바나나 나무들은 바이러스에 일부러 감염을 시켜도 잎이 마르거나 하는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이미 바이러스에 적응이 된 건가?”
-공간주님, 공간에서는 외부의 바이러스를 비롯한 각종 병해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상태창이 진석의 의문에 대답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이러스가 작동하지 않는다니?”
-공간에서 병해로 피해를 입은 작물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공간에서 수많은 작물을 재배했었지만, 병에 걸린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공간에는 식물의 질병 같은 건 없다는 말인가?”
-공간의 초기 설정에, 바이러스와 질병은 작동하지 않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라면, 파나마병에 대한 내성 실험을 할 수 없잖아? 아니지, 지난번에도 토양의 비옥도를 조절했었는데, 바이러스 차단 기능을 멈출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바이러스나 병해를 차단하는 설정은 바꿀 수도 있는 거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설정을 건드렸다가는 공간에 각종 질병이 퍼져서, 작물들이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초기 설정은 건드리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위험하다고? 그럼, 부분적으로 밭 몇 개만 바이러스 차단을 풀 수는 없는 거야?”
-가능합니다, 부분적으로 차단을 해제한다면, 안정성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겁니다.
“좋아, 그러면, 바나나를 재배할 바나나 밭에만 바이러스 차단을 해재해 줘.”
-부분적으로 바이러스 차단을 해제합니다.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차단이 되고, 다시 푸사리움 바이러스를 뿌리에 주입하자, 이번에는 바나나 나무들이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한 반복적인 작업이 무한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백 년, 그리고 천 년, 다시 천 년...
푸사리움 바이러스와 그로 미셸 바나나 간의 2천 년이 넘는 생과 사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천 년 동안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그로 미셸이 마침내 반격을 시작했다.
“공간주님, 드디어 파나마병에 내성이 생긴 건 같습니다.”
“그래, 드디어 성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