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옥수수의 왕
주의 경계를 지나가고 있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주의 경계, 그러니까 일종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미국과 유럽이 비슷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럽 말인가요?”
댄 김은 운전석에서 진석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미국도 처음에는 개별적인 독립국 개념이었잖습니까? 각 주들이 말이죠.”
댄 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유럽도 점점 연합의 힘이 강해지면, 미국처럼, 국경선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죠.”
“여기부터 일리노이군요.”
진석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주의 경계를 지났어도 급격한 풍경의 변화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점점, 목적지를 향할수록 주변의 빌딩과, 주택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리지고 있었다.
***
북부 일리노이, 스톡턴.
“에릭, 칼슨이라고 합니다.”
금발머리에, 큰 키, 전형적인 북유럽 스타일의 외모였다. 조상들은 노르웨이나 스웨덴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댄 김.”
에릭 칼슨은 미국 옥수수농장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 선조는 바이킹이었죠.”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이라는 말이군요?”
“아뇨, 저의 증조부는 아이슬란드 출신입니다. 아이슬란드도 바이킹의 땅이죠.”
진석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북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바이킹의 전통이 남은 곳이 아이슬란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구가 적은 섬이라 그런지, 이름만 있고, 성을 쓰지 않는 바이킹 전통이 남아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슬란드인들은 성을 쓰지 않는다면서요?”
“하하, 지금도 아이슬란드의 오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작은 마을에 살면 성은 필요 없고 이름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칼슨이라는 성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만든 거겠군요?”
“예, 고조부님의 이름이 칼, 이셨고, 할아버지는 칼손, 즉, 칼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죠. 그게 성이 된 겁니다. 이름을 성으로 쓰고, 이름은 제임스라고 영국식으로 만드셨죠. 그래서 저의 조부가 미국에 와서는 제임스 칼슨이라는 이름이 된 겁니다.”
그 이후로 칼슨의 집안은 마이크나, 존, 같은 평범한 미국식 이름을 쓰고 살았지만, 에릭 칼슨이 태어났을 때, 에릭 칼슨의 아버지, 존 칼슨은 조상의 나라인 아이슬란드를 떠올리며, 그에게 에릭이라는 바이킹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주민들은 대게 그런 과정을 거치죠. 처음에는 적응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모국의 전통은 잊고 살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든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유럽은 조상의 고향을 찾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고 하더라고요.”
진석의 말에, 에릭 칼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요, 저도 이이슬란드 여행을 몇 번 했었죠. 정말, 신비로운 나라입니다. 불과 얼음의 나라라고 하죠. 아이슬란드에 가 보셨나요?”
“아뇨, 아직 기회가 없어서.”
“아이슬란드에는 세계최대의 종자 보관소가 있다는 거 아십니까?”
“그런가요?”
“예, 유엔 식량기구에서 그런 보관소를 만들었죠, 지구상의 종자들을 모아서, 냉동 보관하는 겁니다. 거대한 냉장고, 아니, 거대한 방주 같은 거죠.”
“노아의 방주처럼, 지구의 종자들을 보관하려는 거군요?”
“맞아요, 기후의 대격변이나, 뭐, 핵전쟁이 날 수도 있고,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요.”
“극지방은 기온 자체가 천연냉장고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겨서 전원의 공급이 끊어져도 종자는 보관이 되겠군요?”
“맞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보통, 1만 년간 외부 지원 없이도 종자 보관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1만 년요?”
아마도, 그 종자 보관소는 인류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상정한 모양이었다. 전쟁이든, 대지진이든, 혜성의 충돌이든, 인류가 치명적 타격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되고 극소수의 인류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지구의 여러 곳을 탐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그들은, 이전의 멸망한 세계의 유산인 거대한 식물들의 종자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라졌던, 세계의 기록들을 복구하는 것이 되겠네요. 마치, 컴퓨터의 기록을 복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종자라는 건, 인류의 거대한 기록물이죠. 수많은 실험과 선택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작물의 종자들이 만들어진 셈이니까요.”
에릭 칼슨은 자신의 농장으로 진석과 댄을 초대했다.
***
농장은, 시 외곽의 광대한 옥수수밭 지대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진석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북부 일리노이의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옥수수의 평원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나죠. 아시아에서는 저런 걸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에릭 칼슨은 일리노이 북부에서 거대한 옥수수와 대두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농장주의 자격으로 일리노이 옥수수 농민 대표와, 전미 옥수수 재배 농민 대표를 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옥수수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럴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별명이 옥수수의 왕이시라면서요?”
“예, 그렇죠, 하지만, 실제로는 콩도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콩과 옥수수의 왕이죠.”
전통적으로 미국의 일리노이 북부 일대는 옥수수의 산지로 유명하다, 크고 넓은 평야와 옥수수 재배에 적합한 기후 등으로 수백 년 전부터 옥수수는 이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콩은 미국인들은 잘 먹지 않는 걸로 아는데?”
“콩은, 아시아인들이 좋아하죠.”
댄 김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의사 양반이 잘 아시는구만. 대두는 주로 중국에서 사가는 거죠.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콩을 찾는 중국인들이 늘었죠. 콩은 중국에서 많이 키우는 작물이지만, 여기서 대규모로 재배하는 게 비용면에서 싸거든요.”
한국에서는 저가의 중국산 콩에, 농민들이 걱정이 많은데 정작, 중국에는 미국산의 더 저렴한 대두가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콩은, 비료가 필요 없거든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여길 보세요. 저런 거대한 평원에 농사를 짓는 겁니다. 비료든 뭐는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 규모에서는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는 거죠.”
“그렇겠군요. 콩은 뿌리에서 질소를 생산하니까, 따로 비료가 필요 없이 잘 자라죠. 보통은 한국에서도 콩을 많이 키우지만, 소규모로 재배하는 거라, 비료의 비용 같은 건 크게 생각 안 하는 편인데. 이 정도로 큰 규모라면, 엄청난 비용 차이겠군요?”
“맞아요, 저희들이 종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규모의 문제입니다. 다른 나라들, 아시아 국가들은 소규모 자영농이기 때문에, 농업의 비용이라면, 인력과 토지가 가장 큰 문제겠지만, 미국은 달라요.”
“그렇겠죠. 정말, 길가의 옥수수밭이 끝이 보이질 않네요.”
미국이 세계 최대의 농업생산국이고, 옥수수 같은 작물들이 대규모로 재배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거대한 옥수수밭, 아니, 옥수수로 가득찬 평원을 지나가는 느낌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하하, 사실, 이런 옥수수밭은, 매일 보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엄청나다는 느낌이죠. 전세계 어디에 가도 이런 멋진 풍경은 볼 수 없을 겁니다.”
에릭 칼슨의 말투에는 자부심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은 전세계를 먹여 살리는 식량자원인 옥수수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옥수수들이군요.”
“하하, 그러게요, 이진석 사장님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읽어보셨습니까?”
댄 김의 말에, 진석은 예전에 읽었던 옥수수밭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그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옥수수밭이란, 고립된 공간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미국의 옥수수 경작지를 보게 되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석의 인식의 틀이 깨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고, 거대한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이런 옥수수밭은 고립된 공간이라기보다는 신의 창조를 떠올리게 했다.
“다 왔습니다. 저기가 우리 농장이죠.”
에릭 칼슨의 차가, 농장 안으로 꺽여 들어갔다. 주변에는 옥수수를 저장고 역할을 하는 타워들의 모습이 보였다. 온통 주위는 옥수수밭들이었지만, 칼슨의 농장 주위만은 깔끔하게 잔디가 심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집이 멋지군요.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인데요?”
“하하, 뭐, 별 건 없습니다. 시골이라, 좀 크게 지은 집이죠.”
에릭 칼슨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옥수수의 왕이라는 별명처럼, 에릭 칼슨의 저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고풍스러운 외관의 3층 규모의 저택은, 거대한 일리노이 북부의 옥수수 왕국의 궁전 같은 느낌이었다.
“이쪽은 제 와이프와 아이들입니다.”
50대 초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칼슨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현대의 미국 가족치고는 대가족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곳 일리노이의 농가들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했다.
“큰 애와 둘째는 시카고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죠. 대학에서 쓸데없는 것만 배우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에릭 칼슨은 전형적인 미국 농부였다. 거대한 옥수수와 대두 농장을 운영하고, 대가족을 부양하고, 개신교도로 주말에는 예배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리노이와 미국 전역의 농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옥수수의 왕이고, 옥수수 농부들의 대통령쯤 되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대충,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는 보신 것 같고, 이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보죠.”
칼슨 부인이 마련해준 간단한 환영 만찬이 끝나고, 칼슨의 서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투르진스키의 친구라고요?”
“예, 친구라기보다는 사업 파트너죠.”
“사보는 좋은 녀석이죠, 러시아놈이기는 하지만, 사업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도 그와 거래를 하는 거고요.”
“전미 옥수수협회 말이군요?”
“맞아요. 우리는 시골의 농부들이지만, 사실상 우리가 없으면 세계는 돌아가지 않죠. 경제든 뭐든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옥수수협회 회장의 말이기는 했지만, 옥수수는 그만큼 전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물 중에 하나였다. 미국에서는 식량으로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지만, 육식을 즐기는 서구인들에게는 소나 돼지, 닭 같은 가축의 사료의 원료가 되는 중요한 자원으로 사실상의 식량자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국 덕분에, 콩을 많이 재배하고는 있지만, 정부에서는 콩의 재배 면적을 줄이라고 권하고 있죠.”
“무역 분쟁 때문이군요?”
“예, 어차피, 중국과 미국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제죠. 연방정부는 대두 재배 농가가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아킬레스건이 될 걸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 분쟁이 잦아질수록, 서로의 주력 상품에 대한 관세나 수입 규제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체적으로는 미국이 수입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농산물 분야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작물이 많은 편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콩이다.
“칼슨 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도, 지난 10년 동안은 대두 재배 면적을 계속 늘렸죠. 비료가 안 들어가니, 옥수수보다 이익이거든요. 하지만, 중국에서 수입 규제를 하거나 하면, 타격이 크죠. 중국에 수출이 안 되면, 물량이 남아돌아 가격 폭락이 시작되는 거죠.”
“이 지역은 콩이 아니면 옥수수겠군요?”
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남미 쪽에 옥수수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쪽에 기후 변화 그런 문제도 있고, 아르헨티나 같은 곳은 이제 점점 팜파스 같은 평야에서 방목하는 방식이 줄어들고 있어요.”
그건, 진석도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가우초들도 사라지고, 이제는 그 지역도 집약식 목축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평야에서 풀을 뜯게 하려면 관리할 인력이 더 필요한데, 그 인건비보다, 옥수수로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게 더 싸게 먹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콩을 대체하려면, 비료가 문제가 되겠군요? 콩에 비해 추가로 비용이 들어갈 테니까요?”
“그렇죠, 비료 자체도 문제고, 비료를 뿌리는 비용도 엄청나죠. 연방정부도 그렇고 무역분쟁도 그렇고, 외부 환경은 옥수수 재배를 늘리라고 요구하지만 쉽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비료 없이도 잘 자라는 신품종의 옥수수가 나오면 어떨까요?”
“유전자 조작 옥수수 말이군요? 미안하지만, 일리노이에서는 유전자 조작 옥수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어요. 뭐, 몸에 안 좋다는 말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생산성이 그리 탁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인 옥수수 품종을 늘려 나가고 있죠.”
“인공적인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 자연적인 방식으로 개발된 신품종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개발된 신품종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