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린 오션 (56/183)

73화. 그린 오션

“좀 난해한 이야기군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저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진석의 말에, 투르진스키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지나온,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군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리들은 새로운 슈퍼 옥수수, 새로운 슈퍼 콩, 새로운 슈퍼 밀이 필요합니다.”

“슈퍼 옥수수? 콩과 밀요”

진석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댄 김을 쳐다보았다. 댄 김도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저기 투르진스키 씨, 일단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죠. 일단, 우리라는 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카르텔이죠.”

“카르텔요?”

“여기 모인 멤버들이 속한, 국제 곡물 거래상들의 카르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단체는 아닙니다. 단지 개인적 친분, 비즈니스적인 이익, 그도 아니면, 정보교환을 위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죠.”

투르진스키라는 인물도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러시아의 신흥재벌 출신으로 이제는 미국에서 국제 곡물 시장의 카르텔을 주도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그가 진석에게는 새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분이군요. 그럼 저를 이렇게 초대한 이유가 그 카르텔을 위해 일해 달라는 건가요?”

“일종의 파트너죠. 세계 곡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몇 개의 거대 기업들이 있고, 그 뒤에는 우리같은 보이지 않는 카르텔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업이든, 비공식적인 카르텔이든 원하는 건 같죠.”

“세계 곡물 시장을 장악하는 건가요?”

“하하..장악요?”

투르진스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계 곡물 시장을 장악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안정적으로 곡물을 유통하는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시장을 안정화시키려는 거죠.”

“이익이 아니라, 시장의 안정이라고요?”

투르진스키의 말은 뭔가 진석의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였다. 본인 입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일 뿐이라고 했던, 투르진스키가 카르텔로 시장을 장악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안정을 바랄 뿐이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지 진석은 혼란스러웠다.

“농업이라는 분야는 누가 쉽게 장악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악당 같은 기업이 나타나 세계 곡물시장을 교란시키고 그로 인해 막대한 이익이라도 취한다, 무슨 007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죠”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요?”

“곡물 시장을 비유를 하자면, 셰일 오일과 비슷합니다.”

“셰일 오일이라면, 암석에서 석유를 채취하는 걸 말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러시아에서 석유 사업을 하고 있죠. 셰일 오일이라는 건, 오일 셰일이라는 암석에서 석유를 채취하는 방법입니다. 기존의 원유 추출 방식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지만, 국제 유가가 올라가면, 미국 등지에서 이 셰일 기업들이 생산을 시작한다는 걸 아실겁니다.”

“셰일 오일처럼, 곡물 시장도 가격이 상승하면, 소규모 농장에서 곡물을 생산할 거라는 말인가요?”

“그렇죠. 그게 바로, 국제 곡물 시장과, 석유 시장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르진스키의 말대로 석유과 곡물은 알고 보면, 굉장히 저렴하게 전세계에 공급되는 원자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격이 상승하면, 대체 상품이 공급되는 것도 같은 점이었다. 옥수수는 미국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옥수수가 가격 경쟁면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옥수수의 가격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상승한다면, 한국에서도 옥수수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곡물 가격도 셰일 석유처럼, 일정 가격 이상으로 올라가면 대체재가 나오기 때문에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이익은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곡물은 워낙 전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또 비교적 생산 방법도 쉽습니다. 쉽고 익숙하죠,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어지간한 작물들을 자라니까요.”

“그렇다는 말은, 곡물을 전세계적으로 거래하는 상인이나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생산량을 추가로 늘리는 것이, 수익을 더 확장하는 방법이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설명이 복잡했지만, 쉽게 말해 그거죠. 싸게 더 좋은 곡물을 만들어 전세계 시장에 곡물을 유통시키는 게 저희들의 비즈니스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거죠. 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세계 곡물시장은 큰 변화의 기로에 와 있습니다.”

“육류 생산이 늘어난다는 말이죠?”

“그렇죠, 우리는 전후에 인류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석기에 동굴에 숨어 살던, 인류가, 신석기 혁명으로 숲과 동굴을 벗어나 넓은 평야지대로 공간을 확장하고, 농업혁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21세기는 또다른 농업 혁명의 시대죠.”

“농업혁명이라?”

“각종 기술의 발달로, 지역에서 생산해서 자체적으로 소비하던 식량과 농업이라는 산업은 이제 글로벌화가 되면서, 몇몇 거대 농장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축산물이 전세계인을 먹여살리 게 된 겁니다. 거기에 아시아 지역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막대한 곡물과, 또 육류 생산을 위한 축산용 곡물 수요도 생기고요.”

투루진스키의 말을 요약하자면, 새로운 곡물 시장이 생기고, 거기에 가격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것이 일종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말인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해, 싸고 질 좋은 곡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이걸 해결하려면 신품종이 필요하다는 말이겠네요?”

“맞습니다. 우리가 제이에스를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데는 제이에스 바이오만한 실력을 가진 기업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뭔가 남다른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요?”

“하하, 비결은요? 꾸준히 연구를 하는 것뿐이죠. 아무튼, 그런 품종을 원한다면, 개발을 해볼 용의는 있습니다.”

“하하, 역시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런데, 그런 신품종 작물을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사실,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이 이미 유전자 변형 작물들을 많이 생산했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슈퍼 옥수수나, 유전자 변형 콩, 등이 많이 재배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건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런 유전자 변형 식품들이 인체에 유해한 독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음, 그런 주장이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환경운동단체나 그런 쪽에서 주장하는 것 아니었나요?”

“대외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곡물 생산에 깊숙이 관여하는 거대 농업 기업들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습니다. 단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GMO 작물들의 유해성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들을 만들어지고 있고, 우리들도 그걸 파악하고 있죠.”

“하지만 언론에는 아직..”

“언론은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언론이 통제되고 있다고요?”

“단순한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악당이고, 세계인들을 속이고 교란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국제 곡물 시장은 지금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겨우 그런 GMO 작물들의 생산성 향상으로 그 수요를 감당하는 실정입니다.”

“그 말은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당장 부족한 곡물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덮어둔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도 없는 일이고, 이건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우리가 직면한 두 가지의 큰 도전이죠. 하나는 부족한 곡물 수요를 감당해야 하고, 또 하나는 기존의 유전자 변형 작물들을 대체할 안전하고 생산성이 높은 대체 품종을 개발해야 하는 겁니다.”

“그걸 제이에스 바이오가 맡아 달라는 말이군요?”

“하하, 그렇죠. 어떻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제이에스 바이오가 얻는 이익은 뭡니까?”

투르진스키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막대한 로열티겠죠. 아시다시피, 농업은 규모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거대한 산업이죠. 이건, 신석기 시대 이후로 변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농업은 가장 거대한 산업입니다. 그중에서 종자 분야만 따져도 엄청나죠.”

“그렇겠군요?”

“한국은 반도체 산업이 발달한 나라라고 하죠? 연간 한국 반도체 산업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반도체라고요?”

사실, 언뜻 반도체 산업의 규모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냥 엄청난 규모라는 느낌정도.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핫한 낸드플래시 시장이 연간 700억 달러 규모죠. 그에 비해, 세계 종자 시장은 이미 천억 달러 규모를 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곡물 종자 분야는 특히 고속 성장 중이죠. 올해만 5백억 달러 이상이고, 내년에는 600억 달러를 넘을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얼마 전에는 제약으로 유명한 바이엘이, 미국 내 종자 1위인 몬산토를 인수하고 업계 1위로 치고 올라갔죠.”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저의 제이에스 바이오도 바이엘과 협력 관계거든요.”

투르진스키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종자 산업은 전세계적으로 급성장 중이었다. 거대 제약 그룹인 바이엘도 종자 산업이 미래의 블루오션이라는 판단하에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일단 가정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제이에스 바이오가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곡물 신품종을 개발하게 된다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될 겁니다. 우리 곡물 거래상들의 카르텔을 통해, 전세계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얻을 거라는 말이죠.”

“그건, 엄청난 로열티 수익으로 이어지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소규모 농가보다는 대형 농장들을 상대로 로열티를 받아내는 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거야 당연하겠죠.”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열티를 받는 일이라면, 상대의 규모가 크고, 상대할 숫자가 적을수록 유리해진다.

소규모의 영세농을 상대로 로열티를 받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어떻습니까? 제이에스와 우리 카르텔이 손잡고, 새로운 농업혁명을 일으켜 보는 겁니다.”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까?”

“우리가 돈을 버는 일이 세계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는 거죠. 우리는 시장을 장악하고 막대한 수익을 얻고, 대신 전세계는 안정적인 식량을 공급받게 되는 겁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죠.”

진석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투르진스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대로 거대한 곡물 국제 카르텔이 있다면, 그 카르텔과 사업을 벌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국제 종자 시장은 한 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거대 시장이었다. 최근에 바이엘이 제약 분야에서 번 돈으로, 종자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도 진석을 자극하고 있었다.

농업은 어떻게 봐도 스케일이 큰 산업이다, 호주, 브라질, 아르헨티나, 중국, 인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가장 거대한 농업 생산국인 미국 등, 크고 넓은 땅에서 엄청난 규모의 농작물들이 생산되는 거대 시장, 말 그대로 그것은 블루 오션, 아니 그린 오션이었다.

그런 거대한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기회가 진석에게 찾아온 것이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석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

***

뉴욕 힐튼 호텔, 제이에스 바이오 기자회견장.

“그럼, 이제 제이에스 바이오는 본격적으로 제약 산업에 뛰어드는 겁니까?”

CNN 기자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 질문을 했다.

“제약 분야도 제이에스의 사업의 일부일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제이에스 바이오는 농업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농업 관련 분야로 더 투자를 늘리실 계획인가요?”

“그렇습니다. 특히 종자 산업은 미래의 블루오션이죠. 제약 분야에서, 이미, 넥타르와, 시타르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는 시야를 좀 더 넓게 돌려서, 세계 농업,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종자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어 볼 생각입니다.”

기자회견장은 뜻밖의 진석의 발언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KBC 장유식 기자입니다.”

“질문 하시죠.”

“심혈관 치료제 시타르가 막, FAD 승인을 받았는데, 농업 분야에 도전하겠다는 것은 의외의 발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말한 그대로입니다. 시타르는 이미 성공한 사업이죠. 오랜 임상실험으로 약의 효능도 입증되었고, 이제 판매와 유통만 남은 겁니다. 그리고 제이에스는 미래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종자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미래의 그린 오션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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