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국제 곡물상 (55/183)

72화. 국제 곡물상

진석은 투르진스키의 펜트하우스를 둘러 보았다. 같은 뉴욕의 맨하튼, 같은 허드슨강이 보이는 아파트였지만, 일단, 투르진스키의 펜트하우스는 진석의 아파트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체감상 100평은 될 것 같은 넓은 거실은 전면이 창으로 되어 허드슨강이 바로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저도 60번가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은 또 별세계군요.”

“하하, 가격을 8천5백만이나 주고 산 곳이니까요.”

투르진스키는 부동산 매매 과정을 떠올리며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는 이 건물에 공용 엘리베이터가 4개였는데, 투르진스키가 고집을 해서,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와 주차장을 따로 분리해주었다는 것이었다.

“건물에 다른 주민들도 많을 텐데, 4개 중에 1개를 펜트하우스 전용으로 해달라고 했다고요?”

투르진스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 않으면 이런 아파트에 살 이유가 없다고 맞받아쳤죠.”

결국, 부동산 업자가 중간에서 중재를 해서, 어렵게 이 펜트하우스의 매매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워낙 고가의 아파트라, 투르진스키가 거절하고 나가버리면, 그 후에 다른 구매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투르진스키의 과한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재력이 상당하신 모양이네요. 천억짜리 펜트하우스라..”

“하하, 사실, 이건 별거 아닙니다. 러시아에 있는 개인 별장은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죠. 하지만 당분간은 러시아에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전 뉴욕이 맘에 듭니다.”

간단한 통성명이 오가자, 와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떠들썩하게 즐기는 파티는 아니었고, 투르진스키가 불러모은 사업가들이 파티를 핑계 삼아,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투르진스키 씨는 그럼 어떤 사업을 하고 계십니까?”

“원래는 러시아에서 석유 사업을 했었죠. 국영 석유기업을 민간으로 이양할 때, 정유회사를 아버지가 인수했거든요.”

“개방 개혁이 이루어지던 시절 말이군요?”

“예, 좋은 시절이었죠.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았거든요.”

투르진스키가 손짓을 하자, 와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고급 와인입니다. 로마네 꽁띠죠.”

댄 김이 와인 병들을 살펴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엄청난데요. 한 병에 5천만 원은 할 겁니다. 10병 정도가 나왔으니까, 이걸 다 먹어치우면, 5억 정도네요. 제 아벤타도르 가격이군요.”

진석은 프랑스에서 와인 투어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130만 원이 조금 넘는 로마네 꽁띠도 볼 수 있었는데, 투르진스키가 내온 와인들은 로마네 꽁띠 중에서도 상당히 고가의 와인들이었다.

“석유 사업이 잘되는 모양이군요?”

진석은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푸틴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독재자가 되더니, 이제 독재도 모자라, 경제까지 장악하려고 하고 있죠.”

“그게 무슨 말인가요?”

“러시아 정세에 대해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는 위기가 찾아왔죠.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개혁개방 이전으로 러시아를 되돌리려는 시도도 있었고, 그때 나타난 게 바로 옐친 대통령이었죠.”

“러시아 역사는 잘 모르지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군요?”

“아무튼 옐친 대통령은 건강 문제가 있었죠. 고령이기도 했고, 술을 좋아해서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고, 아무튼 그 시절에 성장한 세력이 경제 쪽은 올리가르히들이고 정치 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푸틴이었죠.”

“그 둘은 뿌리가 같은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옐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의 러시아는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비자금이 필요하던 시절이죠. 그 자금을 댈 수 있었던 게 올리가르히고, 그런 정치 자금으로 옐친이나 그 후의 푸틴의 권력이 유지된 거죠.”

“최근에는 사이가 안 좋아지신 건가요?”

“맞아요, 그만큼, 러시아가 안정을 찾았다고도 할 수 있죠. 푸틴도 자신의 정치 기반이 탄탄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막대한 돈을 가진 올리가르히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투르진스키 씨처럼 외국으로 이주한 올리가르히들이 많이 생겨나고요?”

“반반이라고 할 수 있죠. 기존의 자신이 소유했던 기업과 사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머물면서 반 푸틴 운동을 지원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외국으로 빠져 나와서 다른 비즈니스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요.”

투르진스키의 설명에 의하면, 러시아에 남은 올리가르히 중에 몇몇은 최근에 푸틴에 의해 숙청을 당했다고 한다.

“뭐, 죄야, 갖다 붙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독재 국가에서 그런 일은 일도 아니죠.”

러시아에 남는 대신, 외국행을 선택한 투르진스키는 러시아에서 축적한 막대한 부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국제 곡물 거래사업이었다.

“콩, 옥수수, 밀, 그런 것들이죠. 보통 그런 건 선물거래로 거래됩니다. 이진석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농업이라는 분야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상당히 까다로운 분야입니다. 가뭄이 닥칠 수도 있고, 태풍이 갑자기 올 수도 있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죠.”

“까다롭기는 하겠지만, 시장 규모는 자동차나, 반도체, 제약 같은 거대한 산업들과 비교해도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겠죠?”

“맞습니다. 정말 엄청난 시장이죠. 그리고, 최근에 그 엄청난 시장에 큰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변화요?”

진석이 흥미를 느끼는 걸 보고는 투르진스키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로마네 꽁띠 맛을 좀 보기로 하죠. 최고급 와인인데, 좀 즐겨야죠.”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건배나 좀 하죠.”

게스트들의 잔이 서로 오고가며 서로 부딪쳤다.

“와인 맛이 정말 좋은데요. 역시 비싼 값을 하는군요.”

댄 김도 로마네 꽁띠를 마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와인을 몇 잔씩 마시고 난 후였다.

“자,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투르진스키가 진석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아무튼, 러시아를 빠져 나와서, 석유나 정유 사업 대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곡물 거래 시장이었죠.”

“규모가 크고, 필수적이고, 전세계에 걸쳐서 소비한다는 데에서는 공통점이 있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일정하지 않아서 가격 변동도 심한 편이죠.”

“오, 그래요? 공급은 몰라도, 수요도 변화가 있나요?”

“물론이죠, 곡물의 수요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경제죠, 경제가 호황이면, 육류의 소비도 늘어나거든요. 아시다시피, 현재의 축산업은 옥수수 같은 곡물을 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가우초들이 밤새, 아사도를 구우며 소를 몰던 시절은 지나간 거죠.”

“안 그래 후안?”

투르진스키는 브라질에서 온 사업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보, 난, 브라질인이라고, 그리고 내 이름은 후안이 아니라 주앙이야..”

“그게 그거잖아? 아무튼, 아시아 경제가 성장하면서 고기 수요도 늘어나고, 그런 게 국제 곡물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죠.”

“가격이 오른다면, 거래를 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일 아닌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선물거래가 곡물 거래 때문에 만들어진 거란 걸 아십니까?”

“선물거래요? 주식에서 나온 거 아닌가요? 금융파생 상품이나?”

“뭐, 지금은 복잡한 금융거래에 사용되지만, 원래는 콩이나 밀 같은 계절성 변동이 심한 곡물 거래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래 방법이죠. 그게 1948년의 일입니다. 그때는 전쟁이 끝나고 줄어들었던 미국의 농업 생산이 급증했던 시기죠.”

“전후에 군인들이 돌아왔을 테니까 그랬겠죠?”

“맞습니다. 마치 로마시대에 정복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귀환한 군인들이 실업자가 된 것처럼, 미국도 전역 군인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했죠. 더구나 그들은 전쟁 영웅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졸지에 전쟁 영웅에서 실업자 신세가 된 거죠.”

“글들을 구제하라면, 일자리가 많이 필요했겠군요?”

“예, 맞아요, 전쟁기에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늘어서, 전역 군인들은 더더욱 설 자리가 없었던 거죠. 그 시기에 농장으로 들어가 농부가 된 군일들이 많아요. 덕분에 미국의 농업 생산이 크게 늘었습니다. 전쟁기에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쪽에서 막대한 농산물이 유입되던 것이 미국내 생산이 늘어 역전이 된 거죠.”

“미국에서 곡물이 남아 놀았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유럽은 재건되지 않았고, 아프리카나 아시아도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죠. 한국전쟁도 일어났고요. 전세계적으로 보면, 아직 식량은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부족한 식량을 사갈 정도로 경제적 여유도 없는 나라들이 많았죠. 그때 여러 가지 목적으로 시작된 게 바로 미국의 식량 원조입니다.”

“남아도는 식량도 처리하고, 미국의 원조로 영향력도 강화하고 일석이조군요.”

“그렇죠. 덕분에, 경제적으로 빈곤하던 지역이 되살아나서, 산업 국가로 발전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죠.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같이 식량 원조를 받던 국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의 농산물을 수입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럽이나 러시아도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의 곡물 수출이 없으면, 식량 자급이 안 되는 나라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곡물 생산이야 어디든 가능하지만, 미국처럼 대규모 농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곡물 생산국가는 거의 없으니까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곡물 생산 능력이 아니라면, 전세계의 곡물 가격은 급등한다는 말이겠네요?”

“맞습니다. 보통, 미국의 농업수출이 자국의 농업기반을 무너뜨린다고 난리들이지만, 사실, 미국의 농업생산력이 아니면, 전세계는 식량난에 빠지거나, 곡물 가격 상승으로 엄청난 물가폭등을 겪게 될 겁니다. 한국을 예로 들면, 미국의 식량이 들어와, 한국의 농부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농업으로부터, 인력을 다른 산업으로 전환할 기회를 주는 거죠, 실제로 그런 도시로 간 농부들은 노동자가 되고, 회사원이 되고, 연구자가 될 수 있었죠.”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세계 경제가, 미국의 저가 곡물 생산에서 파생되는 잉여의 시간, 남아도는 노동력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네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농업은 그 극악의 생산성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땅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으니까요. 저렴한 곡물은 인간을 땅으로부터 해방시킨 셈이죠.”

“그런데, 곡물 시장이 변화를 겪을 거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프리카요?”

“왜, 식량은 남아도는 시대, 식량을 서로 수출하려고 하는 시대인데, 아프리카에서는 굶주리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음, 뭐, 그거야, 돈의 문제겠죠. 그들은 돈이 없으니까요.”

“그런 것도 있지만, 남아도는 식량을 먹어치우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거죠.”

“다른 존재요?”

“바로 가축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소죠.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미국의 농장에서 소들이 야생을 뛰어다니며 풀을 뜯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처럼, 사료를 먹고, 좁은 축사에서 사육되죠. 그게 더 경제성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료들은 인간들이 먹을 수 있는 곡물들이고요.”

“가장 저렴하니까요. 사료의 원료로 말입니다. 대표적인 게 옥수수죠. 곡물은 사람이 먹을 것 이상으로 남아돌지만, 가축까지 계산하면, 좀 달라집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은 점점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지고 있어요.”

“기후 변화나 그런 영향도 있겠죠? 뉴스에는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던데.”

“기후 변화요? 날씨야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요소죠. 하지만, 고기의 수요가 늘어나는 건 확실합니다. 국제 곡물 시장을 폭등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의 육류 수요죠. 사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도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점이죠.”

“하하, 그런가요?”

“농담이 아닙니다. 인도인들도 소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부자들이 소를 키우기 위해, 밭에서 옥수수와 귀리, 콩 같은 걸 소에게 먹이기 시작합니다. 원래 그런 곡물들을 사서 먹던, 가난한 도시의 근로자들은 옥수수나 콩을 살 돈이 없어서, 하루 3끼를 먹던 걸 2끼로 줄여야 할지도 모르죠. 이런 비유는 인도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곡물 부족 현상입니다. 제가 이진석 사장님을 만나고 싶어한 이유기도 하고요.”

“투르진스키 씨는 말하자면, 인도주의자인가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투르진스키는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랬다면, 로마네 꽁띠를 마실 돈으로 아프리카에 식량을 보냈겠죠. 전, 그냥, 이기적인 사업가일 뿐입니다. 어떤 사업이든, 수요가 늘고 공급이 부족해진다면 그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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