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단단한 참외(2)
일주일 남짓 계속된 기타 레슨, 사실, 기타는 1주일 동안 배울 수 악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파리의 여름속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보사노바는 뭔가 고급스러운 음악인 것 같아요. 재즈 비슷하기도 하고요.”
진석은 기타를 잡고, 간단한 코드 네 개로 이루어진 곡을 보사노바풍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지금의 브라질 하면 삼바와 축구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50년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브라질은 굉장히 부유한 나라였거든요.”
“그래요?”
“예,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예전에는 브라질로 이민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게 그런 이유가 있는 거죠. 저희 가족들도 그런 케이스였고요.”
“지금의 남미국가들을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않는 이야기죠.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유럽은 아직 회복이 안 된 상태였고, 미국도 전쟁으로 경제가 회복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그에 비해,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유럽과 미국에 엄청난 농산물을 수출하는 나라였어요.”
“아, 농업국가였다는 거죠?”
“예, 이진석 씨도, 농업 관련 기업을 운영하신다면서요?”
“아, 그렇죠. 그러니까, 그때는 브라질이 엄청 부유한 선진국이었다 이거군요?”
“예, 저도 브라질 살 때, 들은 이야기인데,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보다, 리우데자네이루가 더 화려한 도시였네요. 사람들 소득수준도 높고 자연스럽게 문화도 고급스러웠던 시절이었죠. 말하자면 보사노바는 가장 풍요로웠던 브라질의 추억 같은 거죠.”
“추억이라, 유진 씨는 한국에 대한 추억이 있나요?”
“한국에 대한 추억요? 음, 사실, 어렸을 때 브라질에 살았거든요. 리우데자네이루에서요.”
“리우데자네이루라면 이파네마 해변도 있고 그런 곳이죠? 노래도 있잖아요?”
“맞아요, 실제로 가보면, 뭐, 그냥 그런데. 아무튼, 조빔의 음악 때문에 굉장히 낭만적으로 묘사되는 곳이죠. 한국에는 외할머니 댁이 있어서 몇 번 가보기는 했어요. 기억나는 거라면, 여름에 수박하고 참외를 먹고 그랬는데, 참외 아시죠?”
“하하, 참외를 모르는 한국인도 있나요?”
“전, 솔직히, 외할머니 집에서 처음 먹어봤거든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왜요?”
“그냥, 노란 멜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라놓고 보니까 색도 하얗고 또 엄청 단단하더라고요.”
“딱딱하다는 말이죠?”
“예, 제 한국어가 약간은 이상해요. 아무튼, 브라질에도 멜론이 있지만, 엄청 부드럽거든요.”
“그거야 그렇죠. 참외가 좀 딱딱하기는 해도 더 달고 맛있지 않나요?”
진석의 말에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기는 해요. 좀 단단하기는 하지만.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릴 때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치아가 좀 부실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참외는 맛은 있지만, 좀 그렇더라고요.”
“그래요? 치아가 좀 안 좋으신가보죠?”
“예, 충치도 좀 있고, 잇몸에 염증도 있어서, 이런 얘기 별로죠? 여자가 잇몸 염증 이야기나 하고 말이에요.”
“하하, 괜찮습니다. 한 서른 넘으면, 다들 몸에 한 군데는 아픈 모양이더라고요. 다음에는 참외를 좀 가져올까요?”
“참외요?”
“추억의 과일인 것 같아서요.”
“그렇기는 한데, 파리에 참외를 파는 곳이 있었나요?”
***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주님, 오늘은 뭘 가지고 오셨나요?”
“참외를 좀 심어볼까 하고..”
“참외 말이군요.”
진석은 일꾼들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비어 있는 밭에 참외 씨를 뿌리고, 시간을 가속하자, 녹색의 떡잎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증식작업이 반복되고, 비어 있던 밭들은 노란 참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뭐가 말입니까?”
진석의 말에 사령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상하잖아? 이건 모두 그냥 참외잖아?”
“아, 뭔가 변종 참외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군요?”
사령관은 녹색의 줄기와 잎들 사이로,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색깔도 노란색이고, 크기도 보통 참외 크기고, 뭔가 외관상 확 바뀐 참외는 보이지 않는군요.”
“뭐지? 이 정도 시간을 가속하거나 하면, 변종이 나오고는 했었는데..”
진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랗게 익은 참외를 반으로 갈라 보았다.
“안쪽도 똑같은 참외군, 하얀 과육에 가운데는 노란 씨앗이 있고. 맛은 어떨까?”
진석은 반으로 가른, 참외를 그대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공간주님?”
“이거 왜 이렇게 딱딱하지?”
“참외가 딱딱한가요?”
“그래, 그것도 엄청, 딱딱하다고.”
아, 참외가 무슨 돌덩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딱딱하지..혹시..그 동안은 색이나 모양이 변하면서 변종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외양이 아니라, 과육의 강도가 달라지며 변종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공간주님, 참외는 못 먹을 정도인가요?”
“그래, 무슨 돌덩이를 씹는 느낌이야, 도저히 그냥은 못 먹겠는데.”
사실, 진석이 참외를 심은 이유는 한유진에게 선물로 가져다주고 싶어서였다. 기타 실력은 비록 크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휴가기간 동안, 재밌게 기타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선생님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한유진도 이가 안 좋아서, 딱딱한 참외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대신 이걸로 뭔가 주스 같은 걸 만들어 볼까?”
***
북카페, 익선동점.
익선동 골목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 사장님이 웬일이세요?”
“아, 희원 씨, 오랜만이야.”
윤희원은 제이에스의 모델로 활동하면서 여전히 익선동 북카페의 점주 일도 하고 있었다.
“그래, 카페 일은 할만 하고?”
“북카페야 원래 하던 일인데요.”
익선동 카페는 여전히 빛바랜 추억 속의 가게 같은 모습이었다.
익선동은 물론이고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이 벌써 일주일 째 지루한 장맛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는 비가 계속 내렸다고 하던데?”
“여기요? 어디 다른 곳에 계셨었어요?”
“아, 외국에 좀 있었어.”
“정말요? 어디요? 미국? 일본?”
“사실은 프랑스에 갔다 왔어.”
“파리요? 와, 대박..거긴 여기처럼 비 안 오죠?”
“그래, 좀 덥기는 했지만, 날씨는 무척 맑더라고.”
“좋으셨겠어요. 정말 부러워요,”
“하하, 내가 말인가?”
“그럼요? 돈도 많고, 성공한 사업가에, 마음만 먹으면 파리든, 런던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말이에요.”
“사실은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마음대로 다닐 수는 없어.”
“하긴, 워낙 바쁘시기는 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바쁘신 이진석 사장님이 익선동에는 무슨 일이죠?”
“뭐, 겸사겸사 와 본 거지, 전에는 몰랐는데, 비 오니까, 익선동이 꽤 운치가 있네.”
“그래요?”
“참, 이건,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신품종 참외야.”
“참외요?”
갑자기 참외가 든, 상자를 내밀었지만 윤희원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윤희원도 제이에스 스토어의 모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석이 다양한 농작물을 개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좀 단단한 참외.”
“그냥 봐서는 평범해 보이는데요?”
“모양은 일반 참외랑 같은데, 과육이 굉장히 단단하다고 그냥 생으로 먹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래요?”
윤희원은 주방에서 접시와 칼을 내왔다. 그리고 칼로 참외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먹기 좋게 조각을 내고는 입에 넣어보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이름이 뭐죠? 저라면 돌참외라고 부르겠어요.”
“하하, 돌참외라, 아무튼 이건 너무 단단한데, 차라리, 믹서에 갈아보면 어떨까?”
“믹서예요? 차라리 그게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윤희원은 주방으로 단단한 참외들을 가져가서 믹서로 갈기 시작했다. 잠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예쁜 유리잔에 바나나 우윳빛깔의 주스가 담겨 나왔다.
“한 번 마셔 보세요.”
진석은 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입안으로 주스가 넘어 들어오자, 뭔가 향긋한 참외 향이 입안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쭈욱 들이켜자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주스의 맛이 느껴졌다.
“대단한데, 이거 참외에 뭘 넣은 거야?”
“아무것도요?”
“정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참외는 달콤한 과일이라 아무것도 안 넣었어요. 그래도 충분히 맛이 나죠?”
“그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맛있는데, 뭔가 시원한 청량감도 있으면서 동시에 아주 달콤해, 전체적으로는 시원해서 더운 여름철에 제격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카페에서 참외 주스를 메뉴에 추가할까요?”
“좋지, 참외 주스를 신메뉴에 추가하자고.”
***
파리시내, 시간제, 음악 스튜디오.
“이게 뭐예요?”
한유진은 진석이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병을 보고 물었다.
“선생님에게 드리려고, 참외 주스를 만들어 봤어요.”
“참외 주스요?”
“사실은 저희 회사에서 새로운 품종의 참외를 개발했는데, 그냥 생으로 먹기에는 좀 딱딱하더라고요.”
“그래요? 하긴, 원래, 참외라는 게 굉장히 단단..아니, 딱딱하기는 하죠. 서양사람들은 저작능력 그러니까, 치아로 씹는 능력이 한국인보다 훨씬 약하다는 거 아세요? 제 프랑스 친구들이 참외를 먹으면 다들 딱딱하다고 난리가 날 거라는 거죠.”
“맞아요, 확실히, 프랑스 사람이나 유럽인들이 육식을 해서 그런지 채소를 주로 먹는 한국인들보다는 치아가 약하더라고요.”
“그럴 거예요, 골격 자체가 다르거든요. 동아시아 인종이 턱이 가장 발전한 인종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단단한 참외는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 봤는데.”
“어디 한 번 마셔 볼까요.”
한유진은 딱히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병에 담아온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때요? 참외 주스는 처음이죠?”
“음, 생각보다 맛있는데요.”
한유진은 살짝 감탄한 표정이었다.
“맛이 괜찮죠?”
“멜론은 갈아서 먹어본 적이 있거든요, 비슷한 맛일 줄 알았는데, 이건 뭔가 더 상큼한 맛이네요. 마시고 나면, 깔금하기도 하고요.”
“괜찮으시면, 선물로 참외를 더 가져왔는데 받으세요.”
“참외요?”
진석은 들고 온 상자를 열어 보여 주었다. 상자 안에는 탐스럽게 익은 참외들이 먹음직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선물이라고요? 하하..아무튼 잘 먹을게요.”
한유진은 참외 상자를 받아들고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요.”
“부탁요?”
“예, 기타 레슨 말인데, 1주일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조금 더 배워보려고요.”
“그래도 되겠어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시간에 대해서라면 자유로운 편이거든요.”
***
처음에 기초적인 코드를 치던 기타 레슨은 조금씩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보사노바풍의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레슨이었지만, 진석의 기본기가 너무 부족한 탓에, 기초적인 연주곡부터 배워 나가기로 했다.
“오늘 연습할 곡은 타레가의 ‘라 그리마’ 라는 곡이에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네요. 타레가 라면 스페인의 유명한 기타리스트죠?”
진석의 말에 유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냥,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클래식 기타리스트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죠. 기타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니까요.”
“와, 그 정도인가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곡은 많이 들어봤는데, 그걸 배우면 어떨까요?”
“일단,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좋은 곡이기는 하지만 아무나 쉽게 칠 수 있는 곡은 절대 아니에요. 사실, ‘라 그리마’ 도 그리 쉬운 곡은 아니죠.”
“그런가요?”
“보통, 취미로 클래식 기타를 치는 분들 중에, 연주를 들려달라고 하면,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는 분들도 많고, 라 그리마를 연주하는 분들도 많은데, 보통, 라 그리마를 연주하는 분들이 더 실력이 좋은 편이에요.”
“왜 그렇죠?”
“일단,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클래식 기타도 자기 실력을 아는 게 발전의 시작이거든요. 알람브라 궁전은, 듣기에는 아름답지만 사실 프로 기타리스트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든 까다로운 곡이라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그럼, 저는 라 그리마부터 시작하겠습니다.”